<사진설명>불국사 승가대학 학장 덕민스님은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며 마음이 물듦에 당하지 않음을 각(覺)이라 하니, 각이 곧 부처(佛)"라고 설명했다
오늘은 육조 스님이 구결로 ‘여시아문’을 풀이한 것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六祖} 如者 指義 是者 定詞 阿難 自稱如是之法 我從佛聞 明不白說也 故 言如是我聞 又我者 性也 性卽我也 內外動作 皆由於性 一切 盡聞 故稱我聞也 言一時者 師資會遇齊集之時 佛者 是說法之主 在者 欲明處所 舍衛國者 波斯匿王 所居之國 祇者 太子名也 樹是祇陀太子 所施 故言祇樹 給孤獨者 須達長者之異名 園 本屬須達 故言給孤獨園 佛者 梵語 唐言 覺也 覺義有二 一者 外覺 觀諸法空 二者 內覺 知心空寂 不被六塵 所染 外不見人之過惡 內不被邪迷 所惑 故名曰覺 覺卽佛也 與者 佛 與比丘 同住金剛般若無相道場 故言與也 大比丘者 是大阿羅漢故 比丘者 是梵語 唐言 能破六賊 故名比丘 衆 多也 千二百五十人者 其數也 俱者 同處平等法會
여(如)는 뜻을 가리키는 것이요 시(是)는 (다른 것과의 혼돈이 없는) 결정된 말이니, 아난이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은 스스로 한 말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고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아(我)’는 성품이며 성품은 곧 ‘나’이니 내외 동작이 모두 성품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듣기 때문에 ‘아문(我聞)’이라고 한 것이다. ‘일시(一時)’라고 말한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가지런히 모인 때이다. ‘불(佛)’은 설법의 주인이요, ‘재(在)’는 처소를 밝히고자 한 것이니, 사위국은 바사익왕이 거주하는 나라이다. ‘기(祈)’는 태자의 이름이고, 수림은 이 기타태자가 보시한 것이기 때문에 ‘기수(祈樹)’라 말한 것이다. ‘급고독’은 수달장자의 다른 이름이니 동산이 본래 수달장자의 것이었으므로 ‘급고독원’이라 말한 것이다. ‘불(佛)’은 범어인데 당(唐)의 말에 각(覺)이다. 각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외각(外覺)으로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내각(內覺)으로 마음이 공적하여 六塵(色聲香味觸法)에 물듦을 당하지 않고 밖으로 다른 사람들의 과오를 보지 않으며 안으로 삿됨에 의혹 당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각(覺)이라 하니, 각은 곧 불(佛)이다.
‘여(與)’는 부처님이 비구와 더불어(與) 금강반야의 무상 도량에 있기 때문에 여(與)라고 말한 것이다. ‘대비구’는 곧 대아라한이니, 비구는 범어이고 당의 말로는 ‘능히 六賊(眼耳鼻舌身意)을 파괴한다’이기 때문에 비구라 이름 한 것이다. ‘중(衆)’은 많다는 뜻이고 천이백오십인은 그 수다. ‘구(俱)’는 똑같이 평등 법회에 있는 것이다.
{冶父} 如是 여(원만한 당처)와 시(깨우침 없는 당처)여! 〈보충설명〉 야보 스님의 송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道可道면 非常道’라고 했듯이 야보 스님의 송도 해석하려고 말을 붙이면 그 맛이 이미 퇴색됩니다. 강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석은 해 보지만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임을 새겨두면서 정진하고 체득해야합니다.
{說} 如是之言 古人 說有多途 今川老 蓋取有無不二爲如 如非有無爲是 여시(如是)라는 말은 옛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설명했으나, 지금 도천노사는 아마도 有(現實, 유위)와 無(理想, 무위)가 둘이 아님을 여(如)라 하고, 여(如)가 유무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시(是)가 됨을 취한 것이리라.
〈보충설명〉 함허 스님이 야보 스님의 여시에 대해 설명을 달았습니다. 川老는 冶父道川禪師를 말하는 것이며, 不二는 유와 무, 이상과 현실 등 두 경계를 초월한 진여의 자리를 말합니다.
古人 道 喚作如如 早是變了也 且道 變向甚處去 口出 不得亂走 畢竟作生 道火不曾燒却口 옛 사람(남전 스님)이 말하기를 “여를 진여라고 결정지어 말하면 벌써 맛이 변한 것이다” 하였으니 또한 일러 보라. 변한 맛이 어느 곳을 향해 가버렸는가? 돌(口出)! (머리로 알려고) 어지러이 내달리지 말지어다. (그렇다면) 필경 어떤 답을 구해야 하는가? 불이라고 말해도 (이미 거리가 벌어지니) 일찍이 입을 태우지 못한다.
〈보충설명〉 道를 道라고 결정지어 말하면 이미 道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道는 어떤 표현이라도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言說과 思量을 끊어 버리기 위해 야보 스님은 ‘돌(口出)’이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禪의 입장에서는 ‘불’하면 타야하고 ‘물’하면 젖어야 합니다. 그러나 如是를 모른 채 ‘불’하면 如是와 거리가 멀어져 입은 타지 않고 허물만 남게 됩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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