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야보스님 해설 - 1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5:21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거든

 

[宗鏡]調御師 親臨舍衛 威動乾坤 阿羅漢 雲集祗園 輝騰日月 入城持鉢 良由悲愍貧窮 洗足收衣 正是宴安時節 若向世尊 未擧已前 薦得 由且不堪 開口已後 承當 自救 不了 宗鏡 急爲提撕 早遲八刻 何故 良馬 已隨鞭影去 阿難 依舊世尊前 乞食歸來會給孤 收衣敷座正安居 眞慈弘範 超三界 調御人天得自如

조어사께서 친히 사위대성에 납시니, 위엄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킨다. 아라한들이 기원정사에 운집하니, 깨달음의 빛이 해와 달보다 뛰어나다. 발우를 들고 성에 들어가심은 진실로 중생의 빈궁함을 자비로서 어여삐 여기기 때문이요, 발을 씻고 옷을 거두심은 바로 진리에 안주한 시절이다. 만일 세존의 금강경 설법 이전의 모습에서 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입을 열고 난 뒤에 깨달았다 하면 더구나 자신의 구제도 요달하지 못할 것이다. 종경(宗鏡)이 급히 이끌어 진리를 드러내 보여도 벌써 팔각(八刻)이나 늦어짐이니 어찌 하겠는가? 훌륭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려가거늘, 아난은 (소식을 알아채지 못하고) 옛과 같이 세존 앞에 있도다. 밥을 빌어 돌아와 급고독원에 모여서 옷을 거두고 자리를 펴고 正히 안거하시니, 참된 자비와 넓은 모범이 삼계를 뛰어 넘어 인천(人天)을 조어하고 스스로 여여(如如) 하시도다.

<보충설명1>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이전 또는 듣고 난 이후에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는 능소(能所)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이나 진리와는 거리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종경스님은 그 차이의 벌어짐을 一刻이 아닌 八刻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보충설명2> 良馬 已隨鞭影去 阿難 依舊世尊前 : 어떤 외도가 부처님을 찾아 뵙고 언설 이전의 소식과 언설 이후의 소식에 관해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외도는 부처님의 침묵의 대답을 통해 “대자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미혹을 걷어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며 찬탄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아난이 외도가 물러간 뒤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아까 그 외도는 어떤 것을 증득했기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습니까?” 그 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답해 주셨습니다. “훌륭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느니라.(良馬 見鞭影而行)”


禪詩 맛보기

南隣(杜甫)
錦里先生烏角巾 園收芋栗未全貧
금리의 선생님이 검은 망건을 쓰고
동산에서 토란과 밤을 거두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네.
慣看賓客兒童喜 得食階除鳥雀馴
방문객에 익숙해진 어린이들 손님 보면 좋아라 하고
섬돌에 뿌려주는 먹이를 쪼아먹는 새들도 길이 들었네.
秋水纔添四五尺 野航恰受兩三人
가을비에 강물이 겨우 너댓 尺 불어났는데
꾸밈새 없는 배는 두어 명 올라타도 흡족스럽네.
白沙翠竹江村暮 相送扉門月色新
하얀 모래, 푸른 대밭의 강마을이 저물어 가니
서로서로 헤어지는 사립문에 달빛이 싱그럽네.

<보충설명1> 금리(錦里)는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를 말합니다. 그 곳에 흐르는 강물에 빨래를 하면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져서 금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남인(南隣)은 그 수도의 남쪽 마을을 일컫는데 이 곳에 두보가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이 아니고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 때문에 그 곳에 살았는데 어느 가을날 그 분을 찾아가 이 시를 지었습니다. 이 律詩는, 나와 나를 둘러 싼 外境이 한 덩어리를 이루는 禪的 분위기가 물씬합니다. 사립문 위로 흘러내리는 싱그러운 달빛은 곧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淸淨心입니다.

<보충설명2> 오각건은 養生하는 선비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며 쓰는 관(冠)의 한 종류입니다. 그리고 토란과 밤을 줍는 것은 자연에 묻혀 사는 선비의 조촐한 모습과 청빈한 인품을 이갸기 하는 것입니다.

<보충설명3> 두 번째 頷聯의 분위기는, 금리 선생님의 학식과 덕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고 그런 방문에 낯익은 마을 어린이들이 손님이 올 때마다 기쁘게 마중하는 분위기입니다. 또 손님들이 가져온 음식을 남겨서 섬돌에 뿌려주면 이에 길들여진 새들이 모여들어 쪼아먹는 모습이 아주 정겹습니다.



고전 맛보기

莊子(내편), 제3편 養生主

(1)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爲善无近名, 爲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나의 삶이란 한정되어 있지만 악지악각(惡知惡覺)은 한정이 없다.
한정 있는 것으로써 한정 없는 것을 따르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악지악각을 따른다면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
조그만 선을 행하더라도 명예를 가까이 하지 말고,
어쩌다 악을 저지르더라도 형벌을 멀리하라.
이치에 맞게 항상된 법(常法)을 행하면
자신의 몸도 보존할 수 있고, 생활도 안정되며,
부모를 봉양하고, 천수(天壽)를 다 할 수 있다.

<보충설명> 삶은 빨리 흘러가고 한정이 있지만. 탐하고 시기하는 것과 같은 나쁜 생각들은 한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짧은 생을 끝도 없는 망념에 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문장 가운데의 爲惡无近刑은 살아가면서 조금씩은 악을 행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마음을 비워 선과 악을 잊고 바깥 경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2) 생략
양생주의 두번째 우화는 소를 잡는 포정(庖丁)의 이야기인데 이 부분은 전에 이야기 한 적이 있어서 생략하고 그 다음 우화인 우사(右師)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3) 公文軒 見右師而驚 曰是何人也 惡乎介也 天與 其人與
曰天也 非人也 天之生 是使獨也
人之貌 有與也 以是 知其天也 非人也
공문헌(公文軒)은 우사를 보자 놀라서 말했다. “아니 이건 어찌 된 사람인가? 어째서 외발이 되었는가? 하늘 탓인가, 사람 탓인가?”
우사가 답하기를, “하늘 탓일세. 사람 탓이 아니야. 하늘이 나를 낳아 외발로 만들어 주었네. 사람의 모양새는 누구에게나 하늘이 준 발이 있게 마련이지. 이로써 내 외발이 하늘 탓이지, 사람 탓이 아님을 알 수 있단 말일세.“

<보충설명1> 惡乎介也에서의 ‘介’는 발꿈치 또는 발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

<보충설명2> 자신의 다리가 하나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 것을 하늘이 내려준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면서 외양에 얽매이지 않는 긍정적인 삶은 양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4) 澤雉 十步一啄 百步一飮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못 가의 꿩은 열 걸음 걸어서 한 입 쪼아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울 속에 갇혀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네. (새장 속에선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왕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보충설명1> 不蘄畜乎樊中의 ‘蘄’는 ‘바란다’는 뜻,
神雖王의 ‘王’은 ‘旺’(왕성하다)의 뜻.

<보충설명2> 명예와 이익과 祿과 功에 사로잡혀 사는 삶은 자유로움이 없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은 평화롭습니다. 이 것이 곧 양생의 삶입니다.


출처 : 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