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 마 / 라즈니쉬의 달마어록 강의(요약)

通達無我法者 2008. 10. 18. 23:45

 

 

달 마

라즈니쉬의 달마어록 강의(요약)

라즈니쉬강의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목 차

<< 1 부 >>

1.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 5

(달마의 二入四行論)

2.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 9

(달마의 血脈論1-無心)

3.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 12

(달마의 血脈論2-本性)

4.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14

(달마의 血脈論3-眞身)

5.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 17

(달마의 血脈論4-眞如)

6.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23

(달마의 血脈論5-禪道)

7.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27

(달마의 血脈論6-覺醒)

8. 누구나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36

(달마의 血脈論7-空寂)

 

<< 2 부 >>

9. 죽은 자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41

(달마의 悟性論1-佛乘)

10.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43

(달마의 悟性論2-中道)

11.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 47

(달마의 悟性論3-實體)

12.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50

(달마의 悟性論4-佛種子)

13.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52

(달마의 悟性論5-衆生)

14. 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55

(달마의 悟性論6-三身)

15. 파상하라! 불성에 이를 때까지 ………………59

(달마의 破相論1-觀心)

16.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 ………61

(달마의 破相論2-無明)

17. 그대의 전재산을 걸라 ………………………… 61

(달마의 破相論3-頓悟)

18.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61

(달마의 破相論4-六波羅密)

19.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신비를 맛보라 ………… 61

(달마의 破相論5-修行)

20.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62

(달마의 破相論6-淸淨)

 

 

달마어록강의 초록

 

1.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달마의 二入四行論)

 

(양무제의 질문)

“나는 수많은 절을 지었고 수 천명의 학승들을 후원하고 있고,

고타마 붓다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큰 대학을 세웠소.

또한 나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앞에 내 왕국과 전 재산을 내놓았소.

이 다음에 나는 어떤 보상을 받게 될 것 같소.”

 

(달마대사의 답변)

“그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불교도이든 불교도가 아니든 아무도 그대를 도와 줄 수 없다.

고타마 붓다의 길에 보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는 그 마음이 곧 탐욕이다.

그의 가르침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수많은 절을 짓고 수 천명의 승려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은 공덕을 행하면서 마음속에 욕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지옥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행하고 그 즐거움을 나라 전체와 함께 나누며 보상을 바라는 어떠한 마음도 갖지 않는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큰 보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은 마음을 잡아내는 일이다.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 그것을 찾으라.

마음을 잡아내는 순간 나에게 ‘여기 있다’라고 말하라.

그 다음은 내 지팡이가 알아서 할 것이다.”

 

황제는 마음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그는 마음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의 작은 전략이 거기에 있었다.

마음이란 그대가 찾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있지 못해서 그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존재한다.

그대가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대는 깨어 있게되고 그 깨어 있음이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린다.

 

달마가 황제를 흔들어 깨워서 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래 마음을 찾았는가?”

양무제가 말했다.

“내 마음속으로부터 사념들은 사라졌으며,

당신이 말한 내면의 목소리를 나는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보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보상을 해주겠습니까?

또 누가 나에게 벌을 내리겠습니까?

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벌이고 보상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운명의 주인입니다.”

 

『도에 이르는 길』의 해설

그대가 바로 진리이며 그대는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어디를 향해 가는 행위를 당장 그만두라. 

그리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핵심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길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도 향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이 순간 속에, 바로 그대 안에 머무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길을 걷든지 그대는 길을 잃고 만다.

어떤 실천도 필요 없다.

그대는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망상을 등지고 실제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무언중에 존재와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의 해설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이란 사념을 버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마음을 떨쳐 버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의 마음 속 화면은 이제 하나의 벽과 같이 텅 비어 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순수한 고요뿐이다.

이제 그는 자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의 내면에 에고가 없는 것이다.

‘나’라고 말할 만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존재만이 있을 뿐 나는 없다.

중생과 부처는 인격이 다르고 외모가 다를 뿐 그들의 주체를 이루는 내면 자체는 같은 것이다.

죄인과 성자가 똑같다.

죄인은 불필요한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성자는 ‘나는 너희들보다 거룩하다’는 불필요한 에고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아라는 점에서,

하나의 순수한 무(無)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같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존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의 해설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는 움직임 없는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거기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또한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없다.

노력이 움직임을 낳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치 그대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지도 말고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때 그대는 존재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르마는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뜨거운 것은 불의 다르마이다.

차가운 것은 얼음의 다르마, 얼음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이며 침묵이며 자비심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모든 구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대를 본질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달마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라.

그대의 에너지를 전부 내면으로 쏟아 부으라.

외부로 향한 꽃잎을 모두 닫고 그 안에 있으라.

그러면 그대는 다르마가 무엇인지,

그대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것을 실천하라 마치 그대가 아무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

그때 드넓은 자비심을 갖고 행동하라.

그때 그대의 삶 전체가 하나의 현존이 되게 하라.

그러나 그대 안에 ‘나’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게 하라.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의 해설

그대는 일의 성공이나 실패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꿈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것들은 왔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지켜보는 자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의 해설

 

그대 밖에서 일어나는 삶의 일들은 무엇이든 꿈처럼 공허한 것이다.

그것과 꿈은 재료가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기 때문에’ 인생 전체를 하나의 긴 꿈의 연속으로 본다.

어떤 때는 기분 좋은 꿈이고 어떤 때는 기분 나쁜 꿈이다.

어떤 때는 달콤하고 어떤 때는 악몽도 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꿈이다.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 않으며 깨어 있는 동안에는 바깥 세계의 꿈으로 인하여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추구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망상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여섯 가지의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는 것이다.』의 해설

만일 이 세상이 하나의 꿈의 세계라면 그대가 도둑이건 위대한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꿈속에서 그대는 도둑도 되고 자선가도 될 수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니면 그 꿈속에서 자신이 도둑이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하겠는가?

둘 다 한낱 꿈이고 물거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꿈을 깨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는 이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다.

그는 환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 곧 고통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다”

 

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안에 있다.

 

 

2.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달마의 血脈論1-無心)

깨달음,

혹은 불성!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가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저 앉아서 고요히 자신 안에 머무른다면,

그래서 순수한 깨어 있음으로 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 그대는 부처다.

깨달음 그 자체이다.

깨달음이란 그대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존재가 바로 깨달음 자체이다. 그대의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런 본성이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장님에게 빛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깨달음의 경험을 말로 하는 순간 그것의 본질은 죽어 버린다. 그 시체만이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원래 목소리의 아득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삼계란 무엇인가? 그 삼계는 몸과 마음과 가슴이다. 이것들은 결국 네 번째의 세계로 돌아오는데, 이것이 무심(無心)이다. 거기는 어떤 사념의 파도도 없는 침묵의 세계이다.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마저 사라진 세계,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대상 없는 의식, 오직 그 자신만을 의식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홀로 빛나는 깨어 있음의 세계이다. 삼라만상이 이 홀로 빛나는 깨어 있음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 무심이 바로 부처이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무심이란 인과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대의 무심이 바로 열반이다. 무심이 부처이고 부처가 무심이다. 무심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무심도 없다.

가장 큰 망상은 바로 그대 자신 밖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 밖에서 존재의 의미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찾는 것이다.

마음은 항상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과학 안에서, 사업 안에서, 경제구조 안에서, 그대 바깥의 모든 것 속에서 그토록 잘 꾸려 나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것들 속에서 마음은 완벽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대 내면은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대가 내면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마음을 떠나 될 수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가 마음의 관찰자가 될 때, 그때가 바로 그대가 고향집에 돌아온 순간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의 해설

부처는 그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도록 도울 뿐이다. 부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부처이다. 아무 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차이라야 아주 약간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부처이다. 다만 몇 사람은 아직 잠들어 있어서 그 사실을 모를 뿐이고, 몇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일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거기에는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 잠들어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대는 강제로 그를 깨울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자유를 간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무심 밖의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의 해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부처가 다른 부처를 구원할 수 없듯이 한 부처가 다른 부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불교는 숭배하는 것에 반대한다.

고타마 붓다가 임종시에 한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의 불상을 만들지 말라. 나의 사원도 짓지 말라. 나는 전생애를 통틀어 그대가 바로 부처이며, 다른 부처를 섬겨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에게 비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들은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어떤 계율도 지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계율을 깨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것을 따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부처들은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의 해설

달마는 모든 부처들이 자신의 깨어 있음 외에 어떤 다른 계율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빛 외에는 어떤 경전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것을 따르지도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선을 행하지도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선과 악을 초월한 자연적인 본성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들은 순수의식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은 어떤 사상이나 계율이나 경전을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전도 외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깨어 있음만으로도 충분히 길을 밝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은 채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3.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달마의 血脈論2-本性)

그대의 불멸성과 그대의 영원성을 단지 지식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은 그대의 마음을 많은 말들로 가득 채울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는 공허하고 황량하다. 그대는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직 직접적인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간접적인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죽은 말이다.

진리 앞에서 그 느낌 앞에서 그대는 경이로움 속에 빠질 것이다. 모든 말이 그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그것을 아는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의 해설

그대가 자신의 깨어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시간마저 멈춘다. 갑자기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를 전체의 일부가 되게 해주는 문이 열린다. 전체의 일부는 결코 전체보다 작지 않다. 이것이 존재의 수학이다. 전체의 일부가 전체와 동일하다. 전체는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나눔도 불가능하다. 따로 더 찾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 자신이 전부이다.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찾을 대상이다. 구하지 말라. 그대가 구하면 구할수록 그대는 계속 잃어 버릴 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구하지 않음이며 찾지 않음이며 두드리지 않음이 전부이다.

『그대는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의 해설

사람은 죽는 순간 제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왕국을 갖고 갈 수 없다. 그의 지식과 그의 권세와 그의 명예를 갖고 갈 수 없다. 그대가 갖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그대의 재산이다. 만일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만이 실체와 허상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4.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달마의 血脈論3-眞身)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조건에 따른 것이며 업에 따른 결과다. 그것은 인과 응보의 결과다. 그것이 윤회의 바퀴를 돌린다. 그대가 삶과 죽음의 바퀴 속에 매어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의 해설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조건에 따른 것이며 업에 따른 결과이다.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조건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그것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조건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그대가 그것을 파괴할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그대는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고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성취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발견할 뿐이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대의 눈이 열릴 때 그대는 자신의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부처였다. 그것은 조건과는 상관없는 나의 본성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한 생각이나 한 힘, 한 지식이나 한 견해에 매달리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무심은 비어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의 해설

만약 그것이 무심이 아니고 마음이라면 그것은 결코 비어 있을 수 없다. 마음은 항상 사념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은 사념을 담는 그릇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은 사념의 흐름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낮에는

그것이 사념이고 밤에는 그것이 꿈이다. 아무튼 그것은 항상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결코 텅 빌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순수하거나 순수하지 않다. 마음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사념의 종류에 따라서 그것이 결정된다. 무엇을 훔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울 자비로운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무심은 이원론을 넘어서 있으나, 마음은 결코 이원론을 초월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찬성이나 반대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항상 나누고 쪼갠다. 그것은 항상 정신분열증적이며,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마음의 한 부분은 항상 망설인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일부분은 그대와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계속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 그것을 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다. 그대는 항상 그러한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을 해도 잘 못되고 저것을 해도 잘 못된다.

오직 무심만이 이원론을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은 선택하는 마음이 아니다. 무심은 순수한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텅 빈 하늘이다.

고요히 바라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전존재가 반응하도록 허용한다. 그는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는 거울처럼 비칠 뿐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반응은 단지 거울에 반사되는 영상일 뿐이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부처라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지도 않는다.』의 해설

신이 앞에 있다 해도 그는 신에게 집중할 수가 없다. 그는 그저 순수한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긴장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집중은 하나의 긴장이며, 한 곳에 매달리는 것도 긴장이다. 그는 완전한 휴식에 들어가 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의

해설

갓 태어난 아기는 더없이 순수하다. 그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만약 그 아기가 자신이 순수하다고 안다면 그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정말로 순수한 것이다.

부처는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그것은 의식의 새로운 탄생이다. 그는 절대의식의 세계에 있지만 “나는 절대의식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너무도 순수한 의식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것 심지어 ‘나는 부처다’라는 생각조차 들어설 여지가 없다.

한순간도 잊지 말라. 그대 자신이 아닌 것은 결코 말하지 말라.

『무심은 항상 존재한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의

해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과 함께 살 수 있다. 그것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을 노래부를 수 있고, 춤출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행위가 내가 될 수는 없다. 나는 항상 뒤에서 지켜보는 자이다. 나는 항상 그것들 너머의 지켜보는 자이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무심이다. 이 무심은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깨끗하거나 더럽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어디로 갈 곳도 없고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그대는 이미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다.

찾는 것, 그것이 그대의 죄이다.

길을 잃는 유일한 방법이 곧 찾는 일이다.

 

 

5.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달마의 血脈論4-眞如)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무지가 그대의 존재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방안의 어둠을 밝히려면 빛에 대한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실제적인 빛이 필요하다. 그대는 자신의 내면의 빛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대 존재의 중심이 바로 순수한 빛이기 때문이다.

여여(如如)한 것, 본래 그러한 것.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사물의 본성이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거기에는 행복해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어떤 것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생이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의 ‘본래 그러한 것’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방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강은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그것이 강의 ‘본래 그러한 것’이다. 불은 뜨겁다, 그것이 불의 ‘본래 그러한 것’이다. ‘본래 그러한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고타마 붓다에게 욕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이 와서 물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것이 그의 ‘본래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나의 ‘본래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지도 않고, 더 높지도 않다. 단지 우리의 ‘본래 그러한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의 본성이 다를 뿐이다.”

『붓다는 사람들이 망상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들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무심을 떠나지 않는다.』의 해설

깨달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가만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행동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고, 마하비라의 행동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고, 크리슈나의 행동이 고타마 붓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타마 붓다의 제자인 달마 역시 고타마 붓다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오직 붓다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옳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모든 부처가 어느 시대에나 항상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계에 똑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 고유성은 더욱 강해진다. 그는 고리샹카 봉우리처럼 우뚝 서서 별들에 가 닿는 히말라야 봉우리가 된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다른 봉우리들과 같지 않다. 다른 어떤 산과도 같지 않다. 그것은 다만 그 자신일 뿐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이 아무리 몸가짐이 다르고, 아무리 철학이 다르고, 아무리 행동이 다르고, 아무리 개성이 다를지라도 여전히 똑같은 맛, 여전히 똑같은 무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은 똑같다. 그들은 똑같은 빛이다.

초의 모양에 따라 판단하지 말라. 초는 어떤 모양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더라도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똑같다. 중요한 것은 초가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불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생산라인을 거쳐 나온 자동차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부처를 원한다. 그러나 부처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부처는 쌍둥이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만의 향기를 갖고 있고, 마하비라는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붓다 역시 자기만의 빛을 갖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독특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만일 모든 부처들이

예수그리스도와 똑같다면, 만일 모두가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세상은 더없이 빈곤해졌을 것이다.

이 세상은 장미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모든 종류의 꽃을 다 가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꽃향기를 다 가져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존재계는 부자가 된다.

무심은 깨달은 자의 불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평정을 갖게 된다.

『어떤 동작, 어떤 형태의 것이든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은 무심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심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의 깨어 있음 또한 마찬가지다.”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문제가 있다. 물질적인 육체는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함 없이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본성이란 자기가 항상 갖고 있는 어떤 것임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의 해설

그대들 모두 자기 안에 똑같은 공간을, 똑같은 무심을, 그리고 하나의 독특한 꽃으로 피어날 똑같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가 그것을 갖고 있다. 내면의 존재에 관한 한 가난한 자도 없고 부유한 자도 없다. 그대는 항상 그것을 갖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들 모두는 부처들이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그대는 첫 번째로 자신에 대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한바탕 웃음은 항상 자기 안에 있었던 어떤 것을 찾아 무한한 세월을 헤맨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 한잔은 그대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그대는

수세기 동안 찾아 헤맸지만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찾는 자 본인을 그대는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발견하면 그대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그대는 항상 깨달음의 상태 속에 있었다. 단지 그대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세상에서 가장 큰 코히누르 다이아몬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서도 평생을 거지처럼 동냥하며 다닌 것과 같다. 그대는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는 날, 그대는 삶이 그대를 데리고 엄청난 농담을 했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없이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마하가섭이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 순간에 문득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고 자신 역시 부처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부처나 보살이 갑자기 그대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존경할 필요가 없다.』의 해설

달마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존경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부처를 존경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해도 그대의 전존재가 자연적으로 존경심을 느낄지 모른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 스스로 깊은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느낄지 모른다. 부처가 그대의 미래를 나타내 주고 그대에게 그대의 본성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존경심이다. 그대가 하나의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할 때 그것은 가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저절로 그것이 그대 안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진실한 것이고 진정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고, 감사이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이 무심은 비어 있으며 어떤 모습도 담고 있지 않다. 겉모습에 매달리는 자들은 모두 마귀들이다.』의 해설

불교에는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 신과 악마는 늘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은 악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악마 역시 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똑같은 사업에 참여한 동업자들이다. 그러나 둘 다 가설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달마가 사용하고 있는 '악마'라는 단어는 단순히 어둠을 뜻한다. 그것은 어둠을 의인화시켜 말한 것이다. 한 인격체로서의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인격체로서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 신성(神性)이나 악함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절과 사원과 교회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온갖 종류의 숭배는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 어둠의 소산이다.

아는 자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의 숭배이다. 그는 절이나 교회로 가지 않는다. 그가 살아가는 삶은 스물네 시간이 하나의 숭배이다. 그의 삶은 하나의 충만된 기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자비와 사랑과 감사의 삶을 살아간다. 그의 모든 동작 하나 하나가 그의 깨달음을 드러낸다.

『숭배하게 되면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부처의 본래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 말을 명심하라.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무심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무심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귀신이나 마귀나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존경하지도 말라.』의 해설

그대의 마음 속에는 오직 환상만이 있다. 그것들은 환각에 불과하다. 부처를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유령을 보는 사람도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든 종류의 환상을 본다. 그것들은 전부 그대 마음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것들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무심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겉모습들은 환상일

뿐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라.』의 해설

오직 이 한가지를 기억하라. 그대의 본래 본성은 절대적인 침묵이다. 평온함이고 평화로움이다. 그것은 거의 무와 공에 가깝다. 그것이 그대의 불성이다. 그대의 본성이 활짝 깨어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삶과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 번뇌와 고통을 낳는 바퀴로부터 그대를 해방시켜 준다. 그것은 그대를 환희의 세계로, 영원한 기쁨의 세계로 인도한다.

달마의 이 선어록은 그대의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라.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단지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수백만 번의 생을 그대는 잠든 채 살아왔다. 얼마나 더 잠들어 있기를 원하는가?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다. 사실 그대는 너무 많이 잤다. 이제 자기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의미에서라도 잠에서 깨어나라.

 

 

6.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달마의 血脈論5-禪道)

『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상상하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의 해설

달마의 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부처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따로 부처를 상상하거나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그때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대가 기본적인 가르침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거기 숭배해야 할 사람도 없고 따로 상상할 대상도 없다. 그대 지신이 부처인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의미는 너무도 심오해서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지 못했다. 그가 신을 부정한 것은 무신론자여서가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신으로 존경했기 때문에 신을 부정한 것이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존재의 수만큼 신도 존재한다.

그대는 쓸데없이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대 내면의 신은 숭배할 다른 신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유한한 중생이 아니다.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본래부터 그는 항상 불멸의 존재였지만 자신이 오해 때문에 스스로를 죽을 수밖에 없는 중생의 위치로 깍아 내려왔다. 그대 내면에 있는 생명과 의식은 불멸이며 영원한 것인데도 그대는 계속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부처는 절의 불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상이나 길가의 이정표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의 해설

달마는 어떤 모양과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육체도 모양이며 마음도 모양이고 세상도 모양이다.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이다. 다른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해 간다. 끝없이 변하는 것은 다 모양이다. 그것과 그대를 동일시하지 말라. 그대는 변함없는 신성이다. 그래서 달마는 그것 외에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가지 무심이 될 것이다.』의 해설

마음을 초월하는 순간 모든 구분이 사라진다. 모든 구분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넘어서면 거기에는 오직 침묵의 하늘, 순수한 허공만이 있다. 부처의 자리인 그 순수한 허공 안에서 그대는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된다.

『부처란 본래 범어로서 ‘깨어 있음’을, ‘불가사의한 깨어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불가사의하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무심이며, 그 무심이 부처이다. 그 부처가 곧 도(道)이다. 그 도가 선(禪)이다. 그러나 선이란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이다.』

『만약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의 세계는 해설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구절의 글도 읽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도를 찾을 수 있다. 부처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무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그것은 또다시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붙잡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대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 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무심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그들은 도를 잃는다. 집착하지 말라. 한 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깨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 나면 경전 전체가 덧없는 장광설로 들릴 것이다.』의 해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집착이 그대를 자신의 진정한 존재로부터 떼어놓고, 그 대신 그대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대의 의식은 물건들과 돈과 사람과 권력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그대 주위에는 그대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드는 것들이 밀림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다. 잊지 말라. 무집착이 그대 자신을 발견하는 비밀이다.

『수천 가지 경문이 하나의 밝은 무심에 못 미친다. 진정한 이해는 문장 중간에서 얻어진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는 말의 차원이지 도가 아니다. 말은 환상이다.』

『그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죽음이 왔을 때 한순간만이라도 머뭇거리면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나 망상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대는 헛되이 고통받는다. 그대가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본래의 존재와 무심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집착에도 얽매이지 않는다.』의 해설

모든 사람이 어느 날인가는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순수의식임을 안다면 즉, 육체나 마음이나 가슴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집이 아니라, 오직 순수의식이 자신임을 안다면, 그때 그대는 죽음의 장벽을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그때 죽음은 그대 안에 어떤 자국도 남길 수 없다. 죽음은 그대가 집착할 때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본심리는, 죽음이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그대를 떼어놓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대로부터 모든 것을 떼어놓고 그대를 완전히 벌거벗긴다. 오직 하나의 의식체로서만 떠나게 만든다.

그대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문을 두드리면 그 순간 두려워 떨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그대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맞이할 것이다. 그대는 떠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죽음은 힘을 잃는다. 죽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는 위력을 잃는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들은 부처가 된 것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우주적인 빛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큰 축복이며, 궁극의 환희이다. 그 너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7.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달마의 血脈論6-覺醒)

달마는 이 세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는 모든 구분에 반대한다. 우주는 하나의 전체적인 유기체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구분들은 다른 곳에서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본래 구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구분들은 그대의 의식에서 나온다.

그대의 의식이 잠들어 있을 때, 그대는 하나의 중생이다. 그대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그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대가 의식적이지 못할 때 그대는 세상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고 이세상 너머의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을 때, 그때는 세속적인 것도 없고 성스러운 것도 없다. 그때 모든 것이 하나다. 이 하나됨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구분은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에 따른 것이다. 마치 태양아래 서 있는 장님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의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밖은 화창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다. 그러나 장님에게는 색채도, 꽃도, 태양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이 치료되어 눈을 뜨는 순간 그는 놀라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전에 그가 보았던 어둠의 세계가 바로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빛의 세계다. 구분은 그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존재계 자체에 그런 구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철학자와 종교창시자들은 항상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구분해 왔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 놓았다. 그들은 존재계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순간 사람까지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구분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조각난 집과 같다.

내면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속에 있다. 그의 전 에너지가 자신과의 싸움에 소모된다.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데 사용할 수 없다. 봄이 왔다가 가건만 그에게는 꽃을 피울 에너지가 없다. 그는 이미 지쳐 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음모가 수십 세기 동안 행해져 왔다. 구분이 곧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통치자들의 근본 원리다. 구분하고 통치하라.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설교사들은 정치가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해 왔다. 그들의 모든 바램 역시 구분하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내면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노예로 만들 수가 없다. 구분은 일종의 거세행위이다.

달마의 유일한 가르침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알라는 것이다. 그대의 본성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성스럽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구분, 모든 이원론을 초월해 있다. 그대 속에 있는 이 초월성이 바로 그대의 진정한 존재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요구하지도 않아도 그대에게 모든 종류의 축복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몰아 넣어 졌다. 그의 불행, 그의 고통, 그의 지옥이 여기서 비롯된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천국이다. 그밖에 또 다른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은 운명이나 나쁜 운명에서도 자유를 찾아내는 사람이다.』의 해설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유명인이든 전혀 이름 없는 사람이든, 혹은 자신이 힘있는 사람이든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사람이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깨어있는 사람에게 모든 이원론은 중요하지 않다. 깨어 있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지고 나면 그대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의 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행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행위라도 부처는 그것을 탈바꿈시킨다. 천국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의 해설

깨어있는 사람, 부처 역시 그런 변형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불행이 그에게 찾아 와도 그는 그 속에서 축복을 발견한다. 슬픔이 다가와도 그는 그 속에서 무한한 아름다움과 침묵을 발견한다. 죽음이 그에게 찾아오지만 그는 그 속에서 오직 불멸만을 발견한다.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사람의 자리가 천국이고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의 자리가 지옥이다. 그대는 그대의 무의식 속에 지옥을, 그대의 의식 속에 천국을 갖고 다닌다. 천국과 지옥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것들은 존재의 상태이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확신 없이 행동하면 그대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며, 피난처가 없음을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해야 한다.』의 해설

달마는 ‘전체성 속에서 행동하라’는 말을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행동하라. 강렬하게 행동하라. 그리고 절대적인 의식과 자발성 속에서 행동하라. 그때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좋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행동한다면, 분열된 마음을 갖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망설이면서 마음의 작은 부분만 의식적이고 큰 부분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행동한다면, 그때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잘못된 것이다. 겉으로는 좋게 보일지 모르지만, 겉모양으로는 누구도 속일 수 없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때 그것은 그대 마음속에 어떤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전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대가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 그대는 사실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은 그의 삶의 원천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것은 행동함이 없는 행동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다시 말해 그 행동에 그대의 마음이 개입한다면, 그대의 과거의 경험이 개입한다면, 그 행동은 ‘그대’의 행동이다. 그대가 그 행동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계 자체가 그대를 통해 반응하도록 허락하고 그대의 마음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무심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그대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에 따라 자신의 본성이 행동하도록 허용한다. 그때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대가 거울 앞에 설 때 거울이 ‘이 사람을 비추어 줄까 말까?’하면서 망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거울은 그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있는 그대로를 비출 뿐이다. 비추는 것이 곧 거울의 본성이다. 거기에는 어떤 결정이나 판단의 문제가 없다. 아름다운 여인을 봐도 거울은 그녀를 감상하지 않는다. 또는 험상궂은 남자를 봐도 거울은 단 한순간도 그 사람을 비출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판단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는 무심으로부터 행동한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그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진실하고, 그 속에 선함과 신성함마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대는 행동함이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의 해설

여래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물의 ‘본래 그러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것에 대해서 특별히 비난하거나 더 좋아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낙타는 낙타로서 낙타의 ‘본래 그러한 것’으로서 완전하다. 또 사자는 사자로서 사자의 ‘본래 그러한 것’으로서 완전하다. 그것들은 그저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여래의 안목이란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여래의 안목을 이해하려면 그대는 그의 존재에게로 좀더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이다. 그대는 행동함이 없는 행동을 배워야 할 것이다. 마음의 간섭 없이 행동하는 법을, 전체성 속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전존재가 완전히 빛으로 가득 찰 때만이 가능하다. 그대가 깨달았을 때만이, 모든 어둠이 그대로부터 사라졌을 때만이 가능하다.2.24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의 길을 출발할 때 그대의 깨어 있음은 잘 집중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온갖 이상한 꿈같은 장면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한다.』의 해설

명상중에 나타나는 어떠한 장면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것이 아무리 달콤한 것일지라도. 명상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그대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스스로 확신할 것이다. 부처님마저도 그대의 의식 속에 나타났는 데 무엇을 더 원하는가?

이 세상의 소위 성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꿈 같은 현상에서 정지해 버린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본 기독교 성자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힌두교도도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 힌두교도는 그대신 크리슈나를 본다. 기독교도는 절대로 크리슈나나 붓다를 보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런 식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음은 그리스도와 붓다와 크리슈나의 화면을 갖고 다닌다. 그래서 그대가 침묵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그 화면이 그대 앞에 나타난다. 그 화면이 너무도 생생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으로 곧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달마는 명상의 길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에게 일깨우고 있다. 그

것을 없애 버려라. 그것이 붓다이든 그리스도이든 크리슈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아무것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마음의 모든 투사체를 훨씬 뒤로 하고서. 그때 그대는 초월에 이른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본성에 도달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의 해설

그대의 본성에 도달하기 전에 달마는 그대가 명심해야할 한 가지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마음은 오직 알고 있는 것만 투사할 수 있다. 즉, 마음은 태양을 투사할 수는 있으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투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전에 전혀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단지 깨달음의 기초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깨달음의 기초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니 차라리 그대 가슴속에 하나의 비밀로 간직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어서 남들 앞에 함부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

『혹은 그대가 걷고서고 앉거나 밤의 어둠과 정적 속에 누워있는 동안 모든 것이 마치 대낮의 햇빛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놀라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무심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는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고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의 해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깨어 있음을 키우는가? 깨어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걸을 때에도, 먹을 때에도, 어떤 것을 할 때에도 활짝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라. 모든 일을 깨어 있음의 기회로 삼아라. 그래서 점차 스물 네 시간 동안 깨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샤워를 할 때도 그냥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샤워를 하지 말라. 그대는 항상 샤워를 해 왔기 때문에 샤워하는 법을 잘 안다. 그래서 그대는 샤워꼭지 밑에 서는 순간 수천 가지 생각들을 계속한다. 샤워할 때 할 일이란 그대를 향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자각하는 일이다. 그것에 활짝 깨어 있으라. 깨어 있음을 키우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신선해지고 힘이 솟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 그것이 타타타(tathata)이다.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왜냐하면 존재계가 그러한 것들을 그대에게 가져다줄 아무런 이유나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아름다운 구름이 지나간다. 서쪽하늘에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다. 비온 뒤 일곱가지 색의 무지개가 선명하게 뜬다. 삶이 그대에게 가져다주는 이러한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라. 이것은 점차 그대 안에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세를 심어줄 것이다. 그 깊은 수용성 속에 초월이 감추어져 있다.

『중생이 한번 그들의 본성을 보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깨어 있음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 뿐이다.』의 해설

만일 그대가 명상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나중이 아니다. 나중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그대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명상은 그대 인생의 명세표중 뒷편 어딘가에 둘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만은 그대가 분명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에 대해서는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한순간도 더 이상 늦추지 말라. 만약 그대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여기’가 바로 그 장소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도를 찾고 싶다면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말라. 한번 그대가 모든 행위의 종지부를 찍고 그대의 깨어 있음을 키우면 남아 있는 모든 집착은 사라질 것이다.』의 해설

어떤 선입견도 갖지 말라. 진정으로 도를 찾고자 원한다면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라. 그 도의 길이 이러이러한 요구 조건을 채워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 길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것은, 그대가 이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의 친구도 갖지 않게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대가 남에게 매달리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대는 즐거움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누구에게 혹은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무의미한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사람이나 사물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대자유를 준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다.

『이해는 저절로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붓다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그들은 성인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운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의 해설

부처가 한가하다는 것은 그가 게으르기 때문에 한가한 것이 아니다. 반응이 필요한 상황이 일어나면 그는 자신의 의식이, 자신의 본성이 자연

스럽게 반응하기를 기다린다.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는 노력 없는 노력을 하는 사람, 무위(無爲)의 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저 존재계가 자신을 통해 일하도록 허용한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텅 빈 대나무와 같다. 복과 명성은 그대의 삶을 파괴할 뿐이다. 그것들은 그대 자신을 아는 모든 기회를 없애 버린다. 그대의 삶이 위대한 축복과 은총으로 변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부숴 버린다.

달마의 이 선 어록은 존재계가 그대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환희의 순간을 맛보게 해준다. 그대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다.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8. 누구나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달마의 血脈論7-空寂)

『속인도 부처다. 머리를 깍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으면 한낱 광신자에 불과하다.』의 해설

세상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의 잠들어 있음이다. 그대의 잠들어 있음을 포기하라. 세상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세상이 그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궁전에서 산다고 해서 궁전이 그대의 깨달음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이 그대의 깨달음을 막을 수는 없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가난한 자의 오두막이든 궁전이든, 중요한 것은 그대의 명상과 깨어 있음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든 그대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그대는 그 무엇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외도(外道)란 일차원적인 자를 말한다. 즉, 진리의 한쪽 단면만 보는 자들을 말한다.

『성생활을 하는 결혼한 속인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질문)

『나는 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면 성이란 기본적으로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 속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음에 따라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의 해설

이것은 위대한 통찰력이다. 불교의 가장 위대한 성자의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말이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성은 실체 없는 허깨비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꿈과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에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명상이 성숙해질수록 그대는 점점 성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 간다. 그대가 완전히 존재계와 일체가 되는 날,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방울처럼 사라져 버린다. 성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을 강제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그때 그대는 온갖 종류의 성도착증을 만들어 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왜곡된 인간형을 만들어 냈다. 새디즘, 매조히즘, 호모, 레스비언, 수간 등등. 사람들은 기이하고 도착적인 성적 표현들을 계속해서 발명해 낸다. 그들의 종교가 성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성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생물학을 초월하지 않는 한, 마음을 넘어선 어떤 것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성은 어떤 형태로든 그대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어차피 그것이 거기에 남아 있다면,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더 좋다. 비뚤어진 성은 더 나쁜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성은 승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비뚤어진 성은 승화되기가 매우 힘들다. 나는 동성연애자나 성불구자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결코 들어본 일이 없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사실 성불구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독신생활을 실천하는 셈이니까. 그러나 성불구자가 깨달음을 성취한 예는 한 번도 없다.

사실 성적 에너지 그 자체가 그대의 깨달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성불구자는 성적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는 더 높이 올라갈 수가 없다. 그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갈 에너지가 없다. 그는 고타마 붓다나 달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달마는 성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본성을 아는 일이다. 그대의 존재를 아는 일이다. 그때 필요한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난다.

『설령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의 해설

예를 들어서 그대에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나는 깨달은 사람이 담배 때문에 어떤 식으로라도 방해를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에 방해를 받는 깨달음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하는 행동은 아무런 차이를 낳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질적이고 순수한 본성을 안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그대에게 허용된다. 그때 그대는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데 그토록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사소한 습관의 차이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이해의 폭이 넓다. 그는 다른 사람, 다른 환경, 다른 지리적 여건들을 이해한다. 다른 기후, 다른 시대, 다른 형태, 다른 습관을 이해한다. 그리고 사소한 것들이 깨달음 같은 위대한 경험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대가 오온의 허깨비 몸 속에 살지언정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더렵혀질 수 없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조차도, 그대는 모든 것을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대는 막힘 없는 영적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평화로울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과 사의 바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보면 그대는 이미 부처다. 설령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의 해설

실제로 일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의 궁전에 한사람의 백정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왕의 식사를 위해서 짐승을 잡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왕조차도 그를 존경했다. 왕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궁전 뒤에서 짐승들을 도살하는 것을 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가?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이제 당신은 옛 직업에 매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자비심과 더 많은 사랑, 은총을 갖고 짐승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일을 그만두더라도 어차피 이 짐승들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나만큼 자비심을 갖고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짐승들은 결국 도살될 것이라면, 내가 안 한다고 달라질 게 무엇입니까? 나의 깨달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내면의 하늘은 다시는 구름에 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 다시는 추락하지 않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일도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직업입니다.”

『인도에서는 스물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무심의 등불을 전하셨다. 그리고 이 달마가 중국에 온 단 한가지 이유는 이 무심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떠남 없이 떠나고, 봄 없이 보고, 웃음 없이 웃고, 들음 없이 듣고, 앎 없이 알고, 기뻐함 없이 기뻐하고, 걸음 없이 걷고, 머무름 없이 머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에 이른다. “언어를 넘어서 가라. 생각을 넘어서 가라.”』의 해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무심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

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대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을 그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행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순간 속에서 깨어 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다. 준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서 말하고 행동하도록 열어 놓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행동과 말의 덫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대는 다만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된다. 그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대는 무엇이 일어나든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이 지켜봄, 이 주시야말로 종교적인 삶을 창조하는 궁극의 비밀이다. 초월적인 삶, 영적인 삶, 깨달음의 삶, 불성의 삶을 창조하는 비밀이다.

 

 

9. 죽은 자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달마의 悟性論1-佛乘)

『도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리고 수행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겉모습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의 해설

우리의 모든 무지와 어둠은 수천 가지 집착들의 이상한 결합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되면 빼앗겨 버리고 말 것들에 대해 집착한다. 어쩌면 그 이전에 빼앗길 수도 있는 것들에...

그대가 집착을 버리기 시작할 때 거대한 에너지의 해방이 그대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사물에 집착하는 것에 묶여 있던 에너지가 그대의 존재에 새로운 새벽을 가져다 줄 것이다. 새로운 빛,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짐에서 그대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거기에는 고통과 번민과 고뇌가 일어날 어떤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이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그대는 고요와 정적과 침묵, 그리고 미묘한 기쁨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대 존재 속에는 웃음이 있다. 그것이 달마가 부처는 웃음 없이 웃는다고 말한 의미이다. 웃고 있는 불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처는 굳이 웃을 필요가 없다. 그의 전존재가 웃음의 느낌이다. 그는 삶 자체가 우스개라는 사실을 안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그 겉모습과 가면 뒤에 실체가 깊숙이 숨어 있다. 그 실체를 알려면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모든 집착이 그것을 방해한다.

『경에 이르기를 “오대(五大)의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아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이 곧 선이다.』의 해설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다섯 가지로 이루어진 이 몸이 사원이고, 그대의 의식은 그 사원의 신이다. 선은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명상하거나, 자기 전에 한 시간 명상하는 것 따위는 믿지 않는다. 선에서는 명상을 특별한 별도의 행위로 나누어 놓지 않는다. 선은 그대 존재 전체가 명상 자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고요함 속에서, 평화 속에서 그것을 한다. 그대 마음 속에 사념의 어떤 물결도 없다. 그때 그대의 삶 전체가 명상이 된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시방의 부처들이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무심을 보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선이다.』의 해설

그대 자신을 누구에게 포기할 것인가? 바로 우주에게! 분리된 존재가 되지 말라. 존재계의 대양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가 되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자선이다. 그것 말고 그대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대의 집은 하나의 여인숙일 뿐이다. 그대의 돈과 재물도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잠시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면 그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대는 오직 그대의 것만을 줄 수 있다.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그대가 줄 수는 없다. 그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그대 자신의 존재뿐이다. 따라서 후회 없이 자신을 내주는 것이 유일한 자선이라는 달마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후회가 아니라 사실은 크나큰 즐거움으로 자신을 존재계에 내주는 것이다. 존재계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모든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위대한 선의 능력이다.』

 

 

10.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달마의 悟性論2-中道)

『마음을 사용해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의 해설

마음은 실체를 알 수 없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 꿈, 상상, 환상, 환각, 온갖 종류의 망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실체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사념도 없는 완벽한 침묵의 상태, 하나의 백지 상태가 되었을 때, 그 투명함과 그 지각 속에서 사람은 무엇이 실체인지 알게 된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왜냐하면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물러가면 구분도 떨어져 간다. 그때 그대는 실체가 된다. 그때 가장 멀리 떨어진 별조차도 그대와 연결되며 가장 작은 풀잎 하나도 그대와 연결된다. 모두가 한 존재인 것이다. 돌연히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대는 전체 속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졌다.

『말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해탈이다. 감각의 먼지에 때묻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다르마를 지키는 일이다.』의 해설

진정으로 포기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도망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것은 그대의 마음으로부터 말들을 떨쳐 버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고요하게 지켜보는 자, 순수한 주시자로 남는 일이다. 이것을 달마는 해탈이라고 부르고 있다.

감정과 감상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그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마음의 어떠한 전략도 초월하는 것, 깨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전부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집을 찾아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도에 이르는 것이다.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의 해설

마음에 머물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며, 진정한 집을 찾는 일이고, 깨달음이며, 도를 발견하는 길이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이다.』의 해설

어떤 고통, 어떤 번민, 어떤 분노와 탐욕으로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니르바나이다. 그대는 집에 도착한 것이다. 그 집의 이름은 니르바나이다.

마음이 사라질 때, 마음과 함께 이 세계는 모두 사라진다. 마음과 함께 모든 무지가, 모든 지식이, 삶의 이 모든 악몽이 사라진다. 마음은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모든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주역이다. 마음이 한번 사라지면 그 즉시로 피안이 나타난다.

비밀은 간단하다. 마음에 머물지 않고, 순수 의식이 되는 일이다. 사념이 없는 의식, 구름 없는 하늘이 되는 일이다.

『삶을 죽음과 다르게 보거나, 동(動)을 정(靜)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열반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의 본질이 본래 텅 빈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고 상상함으로써 결국 열반이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의 해설

그들의 욕망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다. 그대가 욕망을 갖는 순간, 그 욕망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그대는 덫에 걸린다. 그대 자신의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다. 깨달음을 욕심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다. 그 욕심이 돈에 관한 것이든 깨달음에 관한 것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마음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끝없이 대상을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욕심으로 가득 찬 똑 같은 마음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갑자기 깨달음이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때 갑자기 연꽃이 열리고 그대는 향기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에 들어간다. 열반은 텅 빈 마음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과 같으니 욕심도 성냄도 망상도 없다.』의 해설

‘텅 빈 마음’이란 말은 잘 못 해석하기 쉽다. 그것은 ‘무심’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 마음은 결코 텅 빈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대가 영원토록 노력한다 해도 그대는 마음을 텅 비게 할 수 없다. 그대는 마음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것도 한꺼번에 전부를! 분할 납부로는 그것을 텅 비게 할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을 비우는 순간 사방에서 또 다른 것들이 그 안으로 몰려들어오기 때문이다. 그것에 집착하든지, 그것을 떨쳐 버리든지 둘 중 하나다. 거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마음과 싸우지 않고 다만 하나의 주시하는 자로 머물 때, 마음은 사라진다. 주시의 불꽃 앞에서는 마음은 잠시도 그대와 함께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주시의 불꽃을 밝혀라. 깨어 있음의 횃불을 밝혀라.

『그대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투명해질 때 이것이 진정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이다.』의 해설

그대 외부의 세계는 그대의 마음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거의 그대 마음이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대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날 때, 그대 바깥에서

세상이 만들어진다. 마음이 사라질 때, 그대는 전적으로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 모든 투사체가 사라지고 나면 오직 실체만이, 객관적인 실체만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어떤 집착도 생기지 않는다. 집착은 오직 마음의 투영과 함께 일어난다.

진정한 이해를 가진 사람은 홀로 서기를 한다. 그는 어떤 집단, 어떤 조직체 어떤 절과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형태의 이해에 마음을 열어 놓는다. 그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홀로 서있다. 결코 편협한 신자나 추종자가 되지 말라. 결코 어떤 조직체의 일원이 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 진실하라.

 

 

11.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달마의 悟性論3-實體)

『지식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실이다. 그대가 알 때,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한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에 의존한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실재하는 것이 거짓이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모든 것이 거짓이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사용하거나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거나,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실체는 그의 마음을 지어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과 실체가 둘 다 고요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다.』의 해설

마음과 실체, 마음과 세상, 이것은 하나의 악순환이다. 마음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다. 그 세상은 그대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투영된 세상이 다시 그대의 마음을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지탱하면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마음은 투영된 세계를 지탱하고, 투영된 세계는 마음을 지탱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계속해서 환상 속에 살아간다.

마음이 고요하고 실체가 고요할 때, 그대가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때 그곳에 침묵이, 심오한 침묵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균형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아무 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질문할 때 그대는 틀린 것이다.』의 해설

이 말은 그대의 의식이 순수한 허공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어떤 부속물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텅 비어 있으면서 또한 가득 차 있다. 기쁨으로, 빛으로, 향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사람들을 구분 짓는 자성 같은 것은 없다.

질문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지 그대의 마음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는 것에 기뻐한다. 달마는 말했다. “제발 어떤 것도 묻지 말라. 답을 알고자 원한다면 결코 묻지 말라.” 행동하라. 그 마음을 초월하라. 그러면 ‘그대 자신’이 곧 해답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그 답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가 고통과 죽음의 구조물이다. 그대가 깨어날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는 열반과 불멸의 구조물이다.』의 해설

그대가 미혹에 빠질 때, 그대가 마음에 머물 때 다섯 가지 원소와 그대 신체의 여섯 가지 감각이 그대에게 고통과 죽음만을 창조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마음을 넘어서면 그것들은 나르바나와 불멸을 창조한다. 모든 것이 똑같다. 여섯 가지 감각과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인 똑같은 다섯 가지의 집합체들이다. 그러나 마음에 머무느냐 넘어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도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도를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사용해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불성이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의 해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그대가 이 세상의 온갖 종류의 환상 속에 방황할 때, 거기 그대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의 욕망이 있다. 때로 그대는 그것을 자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처가 되고자 하는 바람, 깨어 있고자 하는 열망이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 누구도 불행과 번뇌와 고통만으로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부처이다. 그때 불성에 대한 열망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대가 부처일 때 그대는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깨어 있음은 깨어 있음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다. 순수함은 순수함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다. 따라서 불성은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집에 돌아온 사람에게는 불성이 사라진다. 무엇을 안다 함은 항상 상대편에 대한 것이다. 거울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지만 자신은 비추지 못한다. 거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며,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망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삶 속에서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태에 물들지 않고 형태를 보며, 소리에 물들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해탈이다.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선의 문이다.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의 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집착에 머무는 자는 해탈에 이른 것이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은 지옥이다.』의 해설

성냄, 폭력, 파괴욕 이것들은 지옥의 문이다. 그리고 지옥은 그대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나 이해와 자비와 침묵은 천국의 문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마음을 초월해 있다. 마음을 넘어서라. 그것이 모든 깨달은 자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12.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달마의 悟性論4-佛種子)

『무심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무심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무심 밖 어디에선가 열반을 본다면 그대는 스스로를 망상에 빠뜨린 것이다.』의 해설

타고르는 보름달이 뜬 날 밤 나룻배 안에 작은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려고 책을 덮고 촛불을 껐다. 그런데 그 작은 촛불이 사라지는 순간, 나룻배의 모든 창문으로부터 달빛이 흘러 들어왔다. 달빛이 나룻배 안을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웠다.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이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촛불이 그 아름다움을 가로막고 있었다. 촛불의 빛 때문에 달빛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니르바나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대 에고의 작은 불빛이, 마음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의식의 작은 촛불이 전우주가 그대 안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니르바나는 그대의 촛불을 불어 끄고 우주 전체가 그대의 존재의 구석구석을 관통하게 만드는 상태를 뜻한다.

『모든 고통이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지혜를 찾아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의 해설

고통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말라. 고통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라. 아픔과 고통과 늙음과 죽음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라.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그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낟알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에서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에 사는 것이다.』의 해설

천국과 지옥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탈바꿈이다. 분노를 일으키는 똑같은 에너지가 자비로 변하고, 욕심을 일

으키는 똑같은 에너지가 나눔으로 변하고, 망상을 만드는 똑같은 에너지가 자각으로 변한다. 그 에너지는 같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대 에너지의 새로운 교향곡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기술이다. 그대는 천국과 지옥이 둘 다 가능한 장소이다. 약간의 깨어 있음만으로도 그대는 지옥을 천국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약간의 변화, 약간의 다른 배열만으로도.....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다. 아무 것도 그대에게 덧보태야 할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그대로부터 떼어 내야 할 것이 없다. 그 에너지들이 무엇을 하는지 주시하라.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다르마가 아닌 언어는 없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도이다. 하루 종일 침묵하며 앉아 있어도 무엇인가를 떠든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침묵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의 해설

침묵은 내면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내적 고요, 정적, 평화이다. 사실 내면의 침묵을 가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더 잘 말할 수 있다. 그는 더욱 명확하고 더욱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의 말은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대의 가슴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 침묵은 말과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침묵은 말이나 언어보다 훨씬 위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침묵과 말이 만나는, 침묵과 소리가 만나는 바로 그 중심이다. 그 중심은 둘 다를 초월한다. 그것은 단순히 소리의 부재인 침묵도 아니고, 재잘거림과 소음으로 가득 찬 말도 아니다. 그것은 노래와 함께 하는 침묵이며, 그 노래는 소리 없는 노래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면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하면 그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그 침묵은 구속되어 있다.』

 

 

13.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달마의 悟性論5-衆生)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마음이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의 해설

마음은 부처의 굴레이다. 마음을 넘어서서 무심의 경지로 나아간 사람은 부처가 된다. 하지만 그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여래는 존재계를 신뢰하고, 존재계의 본래 그러한 모습을 신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또는 불행이 찾아오든 축복이 찾아오든 그는 평정을 잃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사물의 본래 그러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거기 고통으로 방해받을 필요도 없고 기쁨으로 흔들릴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대는 초연한 채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여래의 한가지 의미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여래란 산들바람처럼 오고 산들바람처럼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는 그것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다'는 뜻이다. 그는 그대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찾아오며, 그대가 붙잡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는 어느 날 문득 떠나간다. 하지만 그는 서늘함과 고요함과 평정의 경험을 뒤에 남겨놓고 떠나간다. 그 고요함, 서늘함, 평온함과 침묵은 한 사람의 부처가 이 땅에 왔음을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크게 존재계 전체에 선언한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겨울이 되어 얼었던 얼음은 여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된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더 이상 불성은 없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키는 것은 중생의 고통이 깨어 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은 깨어 있음이 고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공평함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의 해설

오직 중생들의 눈에만 부처가 높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중생심이 사라지면 그들 자신의 불성이 얻어진다. 그대가 진정으로 알 때 그대는 아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때 그대는 그 앎과 하나가 된다. 불성은 그대가 중생이고 부처가 아득히 멀게 보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일어난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씨앗으로 진흙 속에 남아 있을 뿐이어서 연꽃이 너무도 멀고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 그대는 자신과 연꽃 사이에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대 자신이 연꽃이 되었을 때 모든 차이는 사라진다. 그리고 연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향기를 자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순히 연꽃의 본성일 뿐이다.

모든 부처는 중생으로부터 나온다. 중생의 고통과 번뇌와 불행을 보는 것, 그리고 의미 없는 삶을 계속하는 중생들의 처지를 보는 것이 그 가 해탈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본다. 모든 광경이 비극적이고 애처롭다. 그것은 그들 내면에 큰 깨어 있음을 심어 준다. 만약 거기에 중생이 없다면 부처도 있을 수 없다. 중생들을 한번 둘러 보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부처가 된 사람은 빚을 갚아 중생들을 깨우쳐 부처가 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에게 빚을 지고 있지 않다. 부처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푼 것도 아니고, 그대가 부처에게 은혜를 베푼 것도 아니다. 둘 다 서로에게 빚을 갚은 상태가 되었다.

『거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깨어 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부처가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이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모든 부처들은 망상을 아버지로 삼고 욕심을 어머니로 삼는다.』의 해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불행한 세계가 없다면 그들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자신들이 덫에 걸려 있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덫에 걸리지 말라고 그들을 몰아친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서, 욕심이 만들어 내는 번뇌와 불안을 보면서, 그리고 망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오직 달마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지만, 자기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격체와 에고와 지식을 부풀린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체한다.

『망상과 욕심은 중생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어떤 겉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을 때, 그대는 망상과 깨어 있음 모두를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망상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이쪽 언덕에도 없고 저쪽 언덕에도 없다. 그리고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의 해설

불행과 깨어 있음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망상이 사라지는 순간 깨어 있음이 무슨 필요인가? 그대는 이제 더 이상 깨어 있음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 병이 낫는 순간 그대는 남아 있는 약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듯이.

깨달은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곳이 바로 낙원이다. 낙원은 그대의 존재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 여래는 어느 곳에도 없다. 자신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곳에 있거나, 아무 곳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말이다.

 

 

14. 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달마의 悟性論6-三身)

『부처들은 세 가지 몸(三身)을 갖고 있다. 그 세가지는 응신(應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응신은 현신(現身) 또는 화신(化身)이라고도 부른다. 현신은 중생이 선행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중생이 지혜를 쌓을 때, 그리고 법신은 중생이 숭고한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들은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의 몸이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해력은 얕을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으며, 깊을 수도 있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복을 쌓는 다고 상상하면서 현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중간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고통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상상하면서 보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해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불성을 체험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법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 무심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부처를 이해한다.』의 해설

사실 부처는 단 하나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순수한 허공이다. 그는 아무런 한계도 없는 순수한 하늘이다. 이 무한함은 오직 부처가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헌신자가 자신의 존재를 잊는 순간 '나'라는 생각이 그의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 순간, 그는 부처가 어떤 몸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부처가 아무도 아닌 존재임을, 부처는 순수한 침묵이며 비어 있음이고 완전한 제로임을.

『각 개인이 업을 만든다. 업이 각 개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보상도 받지 않는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과 함께 사라진다.』의 해설

행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반작용이고 또 하나는 반응이다. 누군가 그대를 욕한다. 그대는 화가 난다. 그가 그대의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사실 그는 주인이고 그대는 노예처럼 행동한다. 그가 그대 안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그가 조종하고 있고, 그대는 조종을 당하고 있다. 누군가 그대를 욕하면 그대는 즉시 과거의 경험에 따라 반작용을 한다. 이 반작용이 바로 업이다. 그것은 그대를 묶는 힘이고, 그것은 그대를 묶는 사슬을 낳는다. 그러나 반응은 반작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반응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대를 욕하고 비난한다. 그대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그저 듣기만 할뿐이다. 그가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것은 그 순간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대는 즉각적인 반작용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대는 하나의 거울처럼 그대의 깨어 있음으로 그가 말하는 것, 그가 행동하는 것들을 비춘다. 그리고 그 거울 같은 명상 속에서, 현재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아닌 깨어 있음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나온다. 만약 그대가 고요히 듣는다면 그가 욕을 한다해도 그것에 대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그의 말이 옳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다. 그의 말이 옳다면 그대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바꾸면 된다. 혹은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단순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말에 대해서 왜 내가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사실이 아닌 말에 기분 나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그의 말에 더 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의 문제지 그대의 문제가 아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물들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반작용이 아니라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처럼 어떤 판단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비춘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의식으로부터 나온다. 그대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를 묶는 사슬이 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행동이 스스로에게 속박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인간의 행동이 또 다른 생을 낳는 원인이 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행동함이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의식이 탄생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의 존재가 아무 것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대는 그대 행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행동보다 훨씬 위대하다. 좋은 행동이든 나쁜 행동이든 그대는 행동과는 차원이 다르며,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도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만약 누군가 그대를 해방시킬 수 있다면, 반대로 그대를 생과 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대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믿는 모든 종교는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것들은 각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과 자부심을 앗아가 버린다.

지옥은 불행이고 천국은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겨워진다. 그대는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서양의 종교지도자들은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인이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성인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의 해설

불상은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부처는 위험하다. 그와 만나는 것은 끊임없는 모험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가 사라져 버리는 목적지를 향해 그대를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존재할 것이지만 하나의 에고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의식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란 자신의 존재를 중생에서 불멸의 신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겉모습이 겉모습이 아님을 알 때 그대는 여래를 아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수천 수만의 문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의 겉모습들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중생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염려한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 배고픔을 염려한다. 그들의 삶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성인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염려하지도 않는다. 또한 현재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들은 도의 길을 따른다.』의 해설

마음이 그 모든 환상과 꿈과 사념과 망상들을 데리고 멀리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자신 안에서 하나의 깨어남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부처라 부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단지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대의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신성한 어떤 것이 그대 안에 나타난다. 그것은 무성한 잎과 무수한 꽃, 수많은 열매를 가진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는 지나가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는 매순간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완전한 깨어 있음과 자연성 속에서,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들은 기쁨과 평화와 침묵의 삶을 살아간다. 서서히 그들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깨어 있음이 절정에 이를수록, 매순간이 그들에게는 낙원이다. 그때 그들은 구름 너머의 어딘가에 있는 낙원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때 낙원은 여기에 있다.

그때 낙원은 이 순간에 있다.

 

 

15. 파상하라! 불성에 이를 때까지

(달마의 破相論1-觀心)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모든 열매와 꽃들, 모든 가지와 잎들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에 거름을 주면 나무는 크게 자란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 자신과 깨달음을 제외하고는.』의 해설

마음이 깨어 있는 것이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 지켜봄이 깊어질수록 그대는 어느새 자신이 마음을 넘어서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십지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불성이 들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 그러나 한번 오온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항아리 안의 빛처럼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이다. 자신도 깨어 있고 남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로부터 모든 덕의 열매와 열반의 열매가 자란다.』의 해설

선행은 실천해야 하는 덕목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산물일 뿐이다. 오직 그대는 그대 안에 더 많은 깨어 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때 이 모든 덕목들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그때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는다. 실천을 행하려고 하면 그것들은 위선적으로 된다. 그것은 뿌리가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기만일 뿐이며, 그대 본래의 얼굴을 바꿔 주지 못한다. 도덕론과 진정한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 도덕론은 그대에게 표면적인 것만을 가르친다.

깨어 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악한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이 깨어 있음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이다.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아름답고, 옳다. 거기에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실천도 필요 없다.

잎과 줄기를 자르는 것보다는 뿌리를 자르라. 그리고 뿌리를 자르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바로 깨어 있는 것, 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대의 의식이 더욱 깨어 있을 때, 그대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이 존재계를 아름답게 한다. 이 존재계를 더욱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 더욱 성숙한 것으로 만든다. 그대의 깨어 있음은 그대에게만 꽃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 향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깨어 있음은 신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이다.

 

 

16.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

(달마의 破相論2-無明)

『우리의 참된 불성과 모든 덕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무지의 뿌리는 무엇입니까?』의 해설

이에 대한 답은 “나는 모른다”이다. 그것이 가장 용기 있는 답변이다. 무지는 시작은 없으나 끝이 있다. 무지가 끝나기 때문에 깨어 있음이 시작된다. 그러나 의식, 깨어 있음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된다.

 

 

17. 그대의 전재산을 걸라

(달마의 破相論3-頓悟)

 

 

18.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달마의 破相論4-六波羅密)

 

 

19.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신비를 맛보라

(달마의 破相論5-修行)

 

 

20.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달마의 破相論6-淸淨)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등의 외부적인 실행으로 어떤 공덕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공덕을 쌓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다.』

『“경전에는 사람이 전심으로 붓다에게 빌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의 해설

붓다가 한 말들을 분류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이해와 나의 깨달음에 의하면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붓다는 내적인 수련과 더불어 외적인 수련도 만들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의 일이다. 그것은 내가 관계할 바가 아니다.

『세속을 꿰뚫어보는 것, 그리고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내일을 걱정하고 늙음을 걱정하는가?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달마의 선어록은 그대로 하여금 명쾌하게 식별하는 법을 알게하는 좋은 훈련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볼 줄 아는 것,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가면인지 느낄 줄 아는 것이다.

쉽게 감명 받으면 속기 쉽다. 속지 말라. 안 그러면 그대는 계속 사기당할 것이다. 속지 않는 것이 정신차리고 깨어 있는 일이다. 누구에게도 서둘러 감명을 받을 필요가 없다. 기다리라. 지켜보라. 모든 면에서 살펴보라. 만약 그대의 가슴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진정한 스승을 찾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단지 그대의 마음이라면, 그때는 그대의 마음을 조심하라. 그대의 마음이야말로 그대의 가장 큰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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