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만인의 본래 모습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4:47

 

 

만인의 본래 모습

글· 광덕큰스님

경전에 보면 암라과 얘기가 나옵니다. 암라과는 인도지방에 흔한 과실로서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끝까지 푸르고, 어떤 것은 처음에는 푸르다가 나중에는 노랗게 됩니다. 마치 살구를 연상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과실이 흔해서인지 암라과 비유가 경에 종종 나옵니다. 암라과 씨는 썩지 않아서 심으면 큰 나무가 됩니다. 암라과의 겉모습은 썩어야 씨가 나오지요. 우리가 잘 아는 호두의 겉껍데기도 살은 썩혀서 씻어낸 다음에 호두가 나타나듯이 은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천안제일, 먼 거리를 막힘 없이 다 보는 신통조화를 가지신 천안통의 대표적인 성자이신 아나율 존자의 신통력은 온 대천 세계를 손 안에 있는 암라과와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손 안에 있는 과실을 눈으로 보듯이 온 천지를 당신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눈을 감고 보는 것입니다. 경계가 끊어진 깊은 마음의 세계, 원래 막힘이 없습니다. 일체에 통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암라과는 그렇게 겉은 썩었어도 그 속의 씨는 썩지 않아서 땅에다 심으면 큰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탐심, 진심, 치심을 피우고 부정한 것같이 보이는 그런 무명에 덮인 범부들 속에 부처님의 보배공덕이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 암라과 속에 씨앗이 있는 것과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씨앗을 보니, 그 인간을 보니 어떠했던가 이 대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난과 불행은 본래 없다


첫째는 청량무열(淸凉無熱)입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우리 중생들을 보니 중생들 가슴 속에, 그 생명 속에, 그 마음에 겉은 범부로 보여도 실로는 없는 것이고 실지로 있는 것은 그 씨처럼 부처님 공덕장 세계가 갖춰져 있고, 공덕장 세계가 청량무열이라는 것이지요. 청량은 시원하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고뇌가 없으며 불행이 없으며 고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해 둬야 합니다. 고난과 불행이 없다고 보는 것이 부처님의 눈입니다. 부처님이 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광은 반야바라밀을 염하고 기도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불행을 보고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아닌 부처님의 공덕세계를 믿고 반야바라밀을 염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세계, 반야바라밀의 세계, 불행이 없는 원만공덕이 갖춰져 있는 세계, 그것을 믿고 일심으로 염하여 내 마음이 그 마음이 되어 버렸을 때 고통에 빠져 있는 고통상태에서 내 마음이 빠져나와버립니다.

내 마음이 고통을 안고 있으면, 내 마음이 고통을 안고 있는 동안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고통이라는 것에서 내 마음이 빠져나와서 반야바라밀, 고통이 없는 세계에 머물렀을 때 나의 환경은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불광의 기도하는 방식이라든가 생활개혁 방법이라든가 기본적인 원리가 다 이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시니 청량무열, 고뇌가 없고 불행이 없고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가슴 속에 있는 본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 없다


두번째는 대지혜가 모여 있다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대지혜취(大智慧聚)입니다. 대지혜가 무더기처럼 모였다는 뜻입니다. 사람 사람마다 고통이 없고 불행이 없고 그렇게 일체고가 끊어진 자리, 그런 것이 갖춰져 있고 동시에 온갖 지혜가 그 안에 무더기로 뭉쳐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보고 “이 어리석은 멍충이야.” 하고 말했다고 하면 겉껍데기의 어리석은 것밖에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잘못 말한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넌 지혜가 있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하는가.” 하고 말하지 “이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멍충이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지혜 없는 눈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태조와 무학 대사가 군신의 격의 없이 농을 했다고 합니다. 이 태조가 먼저 말했습니다. “내가 대사를 보건대 대사는 돼지 같소. 돼지로 보이오.” 한바탕 웃어 보려고 태조가 농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무학 대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이 대왕을 뵈옵건대 부처님으로 보옵니다.” 그러니까 이 태조가 “아니! 다 놓고 자유롭게 말하기로 했는데 어찌 그렇게 말을 하시오.”라고 했겠지요.

그러니까 무학 대사의 말이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눈으로는 중생들이 청량무열입니다. 고통과 불행이 없는 세계를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겉껍데기가 고통이 있는 것이고, 실로 생명 깊이에는 고통이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또, 그것뿐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고통으로 보이지만 고통으로 보는 미혹의 눈이지 실로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가득 차 있습니다.


번뇌의 불꽃이 쉬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열반입니다. 여래장은 청량무열하여 대지혜가 모였으며, 열반입니다. 열반은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진, 망상이 끊어진, 대립이 끊어진 진리의 자리, 청정하고 완전한 상태입니다. 생과 멸이 영영 끊어지고 있다 없다가 완전히 끊어진 완전무결한 상태가 열반입니다.

번뇌의 불꽃이 팍 쉬어버린, 번뇌가 활활 타오르다가 다 꺼져버려 불도 재도 남지 않은 그 상태, 그와 같이 해서 완전무결한 상태, 청정한 상태, 이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눈으로 보건대 어리석고 못나고 정말 암라과의 썩은 과실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씨가 분명히 있어서 씨를 탁 보듯이 부처님의 눈에는 씨가 보입니다.

부처님의 눈으로는 모두가 참 행복한, 그렇게 공덕이 가득한, 참으로 괴로움이 영영 끊어진 그런 상태가 인간의 본 모습이며, 온갖 지혜가 가득 갖춰져 있고, 청정열반이라 생멸을 초월한 상태입니다.


부강한 나라를 이루는 법


국력은 자원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존자원, 지정학적인 여건, 그것이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고 그러지요. 예를 들어서 아라비아나 쿠웨이트는 기름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그것으로 세계에서 큰소리치고 지냅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빈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존자원이 부의 기초라고들 알기가 쉽지요.

그런데 사실인 즉슨 그것을 개발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자원 가운데서, 부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자원의 개발입니다.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덕성과 역량을 개발하는 것, 이것을 신뢰하고 개발하는 것이 최고의 부의 개발입니다. 그 부분은 내버려두고 바깥에서 물량적인 것을 얻거나 바깥에서 요령껏 소득을 올리려 하고 침공해서 얻으려 하고 계략으로 얻으려 해서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지혜가 갖춰져 있는 것을 생각해서 인간에게 갖춰져 있는 지혜를 개발하는 시책을 쓰고, 그것을 향해서 노력하고,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단결해서 나아갈 때 저절로 부강한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인의 가슴이 뿌듯해지고, 그 만인의 뿌듯한 가슴이 모여서 그 나라가 뿌듯해지고, 그 세계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우리들은 배웁니다.


만인이 여래·응공·등정각이다


첫째는 청량무열. 두 번째는 대지혜가 모였다. 세 번째는 청정열반이다. 네 번째는여래(如來), 응공(應供), 등정각(等正覺). 여래는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고, 응공은 부처님의 호입니다. ‘공양을 받을 만하신 완전한 덕을 이루신 어른이다’라는 뜻입니다. 등정각(等正覺).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며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보건대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인이 여래이고, 응공이고, 등정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뭐 미혹한 범부중생이 돼서….”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몰라도 말하는 그 자신은 금덩어리입니다. 등정각이고, 여래이고, 응공입니다. 여래 응공·등정각자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진금덩어리가 “나는 흙덩어리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가져 오너라. 너의 불안을 내가 풀어주마.”
이것은 혜가 스님 때의 얘기입니다.
“찾아보니 없습니다.”
“내가 다 쉬게 했느니라.”
그와 같은 법문이 또 있습니다.
“저의 속박을 해탈케 하옵소서.”
“어느 누가 너를 속박했느냐.”
“찾아보니 없습니다.”
“너는 해탈해 마쳤느니라.”
이것은 조사들의 문답입니다.


속박없는 금덩어리의 자리


바로 조사라는 도인들은 속박이 없는 금덩어리 자리, 완전무결한 정각 자리, 여래 응공 자리에 가서 딱 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느 공부인이 도인에게 가서 “가난하고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칠진팔미(七珍八味), 즉 일곱 가지 보배와 여덟 가지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와서 네가 무슨 소리냐.” 하고 일러줍니다. 그 말에 깨쳐버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참선해서 도를 깨쳤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진리 자체에 자기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인이 금덩어리인 것을 알고 “속박을 풀어주십시오.” 하면 “어디 있나. 속박을 찾아 보게.” “찾아 봐도 찾아 봐도 없습니다.”
“그러면 네가 속박되지 않았느니라.”
“가난합니다. 먹고 살 것을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 내가 보건대 너는 보배가 가득 하고 온갖 것을 구족한 자인데 무슨 소리냐?”
그 말 아래 도를 깨쳐서 알아버린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여래는 이와 같이 중생을 관한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확 와 닿았습니다. 지혜가 있고, 청정 열반 경계에 있고, 고통이 끊어진 자리가 중생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뇌와 불안에 싸였다고 아우성치고 있기 때문에 자비의 구름을 일으키고 대비의 감로수를 부어서 그를 건지고자 하기 위해서 짐짓 중생이 되어서 범부 꿈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보신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중생을 보십니다. 우리 불광이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불광이 다른 데 보다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