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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11

 

붓다의 수행법, 위빠사나 1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바꿔야합니다.

괴로움을 대체하는 유일한 대안은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하면 영원히 괴로움의 지배를 받습니다.

 

괴롭다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감각적 쾌락은 일시적인 최면 효과에 불과합니다.

 

괴로움을 죽음으로 대체하지 마십시오.

자살은 살생으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자살로 괴로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자살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입니다.

만약 자살을 하면 다시 태어나서 더 가혹한 과보를 받습니다.

 

괴로움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느낌일 뿐입니다.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지켜보십시오.

그것은 단지 괴로운 느낌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몸을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 중에서 두 번째인

몸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로 와야 합니다.

 

현재로 와서 현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가장 진실한 현재입니다.

이 몸에는 먼저 호흡이라는 두드러진 대상이 있고

다음으로 몸의 네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네 가지 자세란 행, 주, 좌, 와를 말합니다.

가고, 서고, 앉고, 누워 있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이 말은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구부리고, 펴고, 돌고, 들어 올리고, 밀고, 당기고, 돌리고,

먹고, 마시고, 대 소변을 볼 때까지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느 한정된 시간에만 알아차리는 수행이 아닙니다.

생활하는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과 경행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알아차림까지 함께 합니다.

 

좌선이 끝났다고 해서 알아차림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이 끝난 것이지 알아차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좌선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동작과

다시 걸어가는 동작 하나하나를 연결해서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의 동작이 다음 동작으로 연결될 때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빠른 시간 안에 집중력이 생기고 더불어 이러한 집중력을 바탕으로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를 계속 비벼서 불을 내듯이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활이 곧 수행입니다.

 

수행자는 어느 때 무엇을 하거나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 고요함이 오고, 이런 고요함에 의해서 비로소 바른 지혜가 계발됩니다.

이런 과정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방법을 취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특성을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바로 그 특성이라는 것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무명에 눈이 가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한 알아차림으로 우리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 자세에 대한 경전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갈 때는 나는 걷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서있을 때는 나는 서있다고 알아차리고,

앉아 있을 때는 나는 앉아 있다고 알아차리고,

누워 있을 때는 나는 누워 있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확립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이상 경전의 말씀처럼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할 때, 하고 있는 행위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매우 단순한 상태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비구가 알아차린다는 것은

수행자들이 철저하게 깊이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표피적인 앎이 아니고,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앎’ 입니다.

수행자는 가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갈 때 나는 간다. 걸을 때 나는 걷는다. 서있을 때 나는 서 있다.

앉아 있을 때 나는 앉아 있다. 누워있을 때 나는 누워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몸의 모든 자세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나는 가고 있다, 나는 서 있다, 나는 앉아 있다, 나는 누워 있다고 할 때,

‘나는‘ 이란 말은 자아를 의미하는 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나는’ 이란 말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그것 자체가 자아가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라고 할 때는 분명한 대상을 정하는 관용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란, ‘몸이라는 육체적 현상과 그것을 아는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나’ 를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인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는 이 문장은 몸의 모든 작은 동작이나 자세

즉, 가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눕는 것뿐 아니라,

뻗침, 구부림, 앞으로 옆으로 보는 것, 배의 일어나고 꺼짐 등

작은 동작도 포함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작은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작은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와 잘못된 견해로 인해서

그것들을 집착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여기서 약간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 순간 갈애와 집착이 들어와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문장에서

모든 여러 가지의 움직임을 모두 포함시켜야 하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네 가지 주요한 자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작은 자세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는 집중을 하는 수행뿐만 아니라 어느 때건 항상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가르침에 대해서 오해가 좀 있었습니다.

이 오해는 최근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주석서가 써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 경전이 속한 법문의 주석서는 약 2,100년 전에 써졌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가고 있을 때 나는 가고 있다.’ 는 등을 알아차리는 뜻에 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문장의 진정한 뜻을 모릅니다.

그들은 이러한 수행을 비웃으며, 수행을 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과 동물조차도 갈 때 나는 간다고 압니다.

그들은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나는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갈 때 간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도대체 무엇이 중요합니까?

누군가가 가고 있을 때 나는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알아차림의 확립이라면,

모든 사람이 항상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보통 사람의 앎’ 과

‘위빠사나 수행자의 앎’ 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가 정 반대로 대립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갈 때는 ‘나는 간다.’를 어떻게 아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는 것이 일어나기 전에 가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갈 때는,

나는 간다고 알 때 그들은 가는 행위가 일어나는 매 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때로 피상적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려는 의도와 가는 것을 아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앎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갈 때, 나는 간다고 말할 때,

그들은 정신적인 의도와 물질적인 몸의 움직임이 서로 떨어져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애매한 견해만 갖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는 것의 정신적, 물질적 양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앎은 피상적이기 때문에, 의도의 연속적인 순간들 뒤에

몸의 연속적인 움직임이 따른다는 직접적인 앎을 갖지 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 내가 갈 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은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막연하게 피상적으로 아는 것 일뿐만 아니라

가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가기 때문에

가는 것을 면밀하게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갑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없으면 가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누구나 눈 깜빡할 사이에 수백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 순간에 몸에는 네 가지의 기본 요소가 있습니다.

땅, 물, 불, 바람의 요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 수, 화, 풍 사대입니다.

그중에 움직임에는 바람의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의도가, 움직이려고 하는 몸의 부분들에 바람의 요소가 일어나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바람의 요소가 몸의 부분을 움직이게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누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이 움직여서 가는 것을 면밀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는 것이 의도에 의하여 일어나는 연속적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은 가는 것이 어떤 사람, 어떤 높은 권능, 어떤 영원한 실체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과연 여러분이 가는 것이 어떤 가피,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간다는 것은 오직 의도와 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지를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의도와 가는 것 외에, 어떤 개인도, 어떤 존재도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나, 남자, 여자라는 것은 없으며, 의도와 가는 것만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단지, 매우 애매한 생각만 가졌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면밀한 알아차림 없이는,

여러분은 의도와 가는 것이 다음 순간까지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은 가는 순간 가려는 의도와 가는 행위가 다음 순간으로,

그 순간에서 또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가는 과정을 계속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은 매 순간 의도가 있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몸의 움직임과 바람의 요소는 일어나고 그리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의 의도가 다른 순간으로 옮겨 간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경험하는 것이며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와 같은 것을 결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