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1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감각 대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감각 기관에 마음을 두십시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고정관념으로 보며, 대상에 대한 차별이 일어납니다.

 

알아차려서 집중력이 생기면, 다음 단계로 대상을 보는 마음을 지켜보십시오.

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으면,

여러분들은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냄새 맡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으로 냄새를 맡고,

맛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으로 맛을 보고,

접촉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으로 접촉하고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아는 마음을 지켜보십시오.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번뇌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가는 것은 가는 것을 원하는 마음과

원하는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와

바람의 요소에 의해서 일어나는 움직임 때문에 간다는 것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가령 하나의 마차가 있고, 네 마리의 말이 그것에 매여 있으며,

마부 한 명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부가 말을 움직이게 해서 말들이 움직이고,

말들이 움직임으로써 마차가 움직입니다.

 

여기서 몸의 움직임은 마차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몸은 마차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말은 마음에 의해 일으켜 지는 바람의 요소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마부와 같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마부는 말들을 움직이게 하고, 또 바람의 요소를 일으키게 합니다.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과 함께 몸 전체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은, 함께 일어나는 세 가지의 요인들로 구성됩니다.

첫째, 마음

둘째, 바람의 요소

셋째, 바람의 요소에 의해서 일어나는 움직임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는 것의 전부입니다.

이것 외에 어떤 힘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직 이러한 조건, 이러한 원인과 결과로 가는 것만 성립될 뿐입니다.

 

이들 세 가지 조건에 대하여 완벽하게 아는 수행자들은

가는 행위에 어떤 살아있는 존재나 어떤 영원한 실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간다, 사람이 갖는다는 어법은 오직 편의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쓰이지만, 가려는 의도와 몸의 갖가지 부분들의 실제 움직임 외에

실제로 가는 사람, 가는 여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가는 것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정말 있는 그대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가는 것에 대한 진정한 앎, 올바른 앎을 달성했다는 뜻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가고, 서고, 앉고, 눕는 행위, 몸의 다른 모든 움직임들을 압니다.

그렇게 하여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바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이 있고, 바람의 요소가 몸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움직임이 없을 것입니다. 바람의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람의 요소가 없다면 움직임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하여 가는 배와 같이, 활시위의 힘에 의하여 가는 화살과 같이,

이 몸도 앞의 방향으로 가나니, 바람의 활기찬 밀침에 의하여 완전히 밀쳐지고

마치 끈으로 꼭두각시의 등을 맨 것처럼, 마음으로 몸이라는 인형을 연결하고,

그리고 그것에 끌리어 몸이 움직이고 서고 앉는다.

그것을 떠받치는 조건들 없이 자신의 정신적 힘이 의지력에 의하여

서거나 걸을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렇습니다. 이들 조건들 없이, 이들 떠받치는 원인들 없이,

걷는 것, 앉는 것, 서는 것, 움직이는 것 모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수행을 통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배웁니다.

수행자는 현재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꿰뚫어 보는 앎을 얻습니다.

 

수행자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의 앎과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은 매우 다릅니다.

실제로 그들의 앎은 정 반대로 이해됩니다.

 

의도와 가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 이 둘은 서로 독립된 것들이라는 것,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생긴다는 것에 대한 앎을 계발했을 때

수행자는 의도와 가는 것이 매 순간 나타나고 사라짐을 압니다.

오직 그 때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인 팔만사천법문은 마지막에 무아(無我)라는 것을 설하기 위해서

펴는 안내입니다. 불교의 궁극의 진리는 무아를 알아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을 설하신 최종적인 내용이 바로 무아입니다.

 

무아(無我)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는 진아(眞我)나 참나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부정되고 깨달음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가는 자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의도와 가는 행위만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무아(無我)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궁극의 진리인 무아를 알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다시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

 

수행자가 그들 자신의 가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또는 눕는 것,

그리고 다른 작은 거동들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수행 중에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가고, 서고, 앉고,

누워있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가고 있는 것이 무상하고,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가는 것, 앉는 것, 서 있는 것, 눕는 것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며 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이 수행할 때 그들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수행 중 내가 가거나 움직이는 것 없이, 덧없이 오고 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오고 가는 것도 그럴 것이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동일하게 상대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이런 방식으로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고 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수행자는 자기 자신이 가는 것과

다른 사람이 가는 것에 대해서 이리 저리 알아차립니다.

이리 저리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고 말합니다.

 

이것 또한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수행 중에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추리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직접적인 위빠사나와 추리의 위빠사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가는 것, 앉는 것, 서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에 대하여

직접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다른 사람이 가는 것 등에 대하여 추리의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내가 가는 것이 덧없듯이 다른 사람이 가는 것도 그럴 것이라고 추리하여,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가는 것, 앉는 것, 서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에 대해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행을 할 때,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에 대한

정확한 뜻을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또 다시 반복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일어나는 현상’들은 몸의 일어남의 원인, 그것을 뜻합니다.

물질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들 원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수행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과거에 어떤 것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의 업(業) 때문입니다.

업은 몸이 생기는 원인입니다.

업이 생긴 것은 존재하려는 갈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갈애를 가진 것은 바로 무지 때문입니다.

갈애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안다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무지는 더 좋은 삶을 바라도록 합니다.

수행자는 업을 쌓고 그리고 그 결과로써 인간으로 태어나는 매우 좋은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번 생(生)에서 물질의 특성의 일어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여러분의 몸이 만들어진 과정에는 어떤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과거의 무지

둘째, 과거의 갈애

셋째, 과거의 업(業)

넷째, 현재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이 있습니다.

음식 또한 물질적 특성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때때로 수행자는, 몸의 생겨남의 원인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거나 알아차려 봅니다.

몸이 여기에 생긴 것은 내가 업을 행했기 때문이고, 또 내가 갈애를 가졌기 때문이고,

또 내가 무지했기 때문에 여기에 몸이 생긴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수행자는 일어남 자체를 알게 됩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을 조금 밖에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일어남의 원인보다 일어남을 알아차리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가는 것을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욕구의 일어남과 움직임의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이상의 네 가지 원인인 과거의 무지, 과거의 갈애, 과거의 업, 음식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고 말합니다.

 

사라지는 현상들은 ‘무지 없음, 갈애 없음, 업이 없음, 음식이 없음’ 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특성의 사라짐, 소멸의 원인들, 사라짐 자체입니다.

 

수행자가 사라지는 대상들을 알아차릴 때 원함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은 알아차리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한 순간의 움직임이 있고 다음 순간 그것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면밀히 주의를 기울일 때

수행자는 여러 가지 현상의 사라짐 즉. 소멸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이들 요소들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몸을 사라지게 하는 요소들, 네 가지 원인들,

그리고 하나의 소멸을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에도 네 가지 원인들과 하나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을 바로 보는 위빠사나 지혜의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는 사라짐의 표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의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생생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 도달하면 사물의 사라짐에 대한 앎,

사라짐에 대한 인식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이들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는 두 가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비로소 명확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묘원법사 :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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