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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1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즐거울 때 즐거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즐거움으로 인해 일어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조용히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즐거움이 지나치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괴로움으로 인해 일어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조용히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괴로움이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집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한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심심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조용히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심심한 것이 지나치면 무지가 커집니다.

 

수행자는 어느 것이나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즐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괴로움에 빠지고,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없애려는 또 다른 갈애가 일어나고,

덤덤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지하고 나태한지 모르기 때문에 더 깊은 게으름에 빠집니다.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입니다.

그것들은 와서 봐주기를 바라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그것은 단지 와서 보라는 법이라는

의미를 잊지 마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일어나고 사라진 것을 아는 지혜에 관해서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성숙되면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가볍게 압니다. 이런 지혜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생멸의 지혜를 아는 단계가 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지혜는 점진적으로 발전합니다.

한 단계의 지혜는 다음 단계의 지혜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면 차츰 있는 지혜는 작아지고

새로운 지혜가 나타나서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새로운 지혜의 단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지혜를 바탕으로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다음에는 사라짐을 아는 지혜의 단계만 옵니다.

이때는 일어남은 없고 사라짐만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더 성숙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더 정확한 지혜가 성숙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지혜들은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모두 조건이 성숙될 때만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다음 경전의 구절은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확립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는 구절입니다.

 

수행자가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완전히 알아차릴 때

사람이나 영원한 실체가 아닌, 몸만 있다는 것을 압니다.

초기 단계에는 몸만 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에 발전이 거듭되면 결국 몸만 있고

그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경전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 가지 현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어떤 것에서도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어떤 것도 붙잡을 이유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갈애를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자신이나 가는 행위에 대한 어떤 갈애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것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지금 직접적인 앎을 통해서 모든 것이 무상하고

오고 가고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애착하지 않고 어떤 것도 움켜쥐지 않을 수 있을 때

갈애와 집착이 일시적으로 억제되거나 순간적으로 소멸됩니다.

 

어떤 것을 바라거나 움켜쥠을 갖지 않을 때

수행자는 알아차린 사물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순간적으로 제거한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도 얼마동안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갈애와 집착의 순간적 소멸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수행을 잘하려는 것조차도 갈애입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차린 사물에 대하여 갈애와 집착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수행자는 알아차리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도 갈애와 집착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힘을 일시적 소멸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린 사물에 대해서 순간적 소멸을 알아차리며,

또는 알아차리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 일시적 소멸을 알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소멸을 통하여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떤 것에도 갈애를 일으키지 않거나 집착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현상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소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수행자가 갈애와 집착이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탐진치라는 번뇌가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마음이 새로 나타나서 번뇌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이 약해지면 다시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마치 종기를 건드려서 성나게 한 것처럼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의 지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적 소멸이 이루어질 때 그 힘에 의해서

알아차리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일시적으로 번뇌가 소멸합니다.

이것을 일시적 소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순간적 소멸과 일시적 소멸의 과정을 거쳐서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됩니다. 이것을 완전소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탐진치라는 번뇌가 붙지를 않습니다.

이 순간을 순간적 소멸이라고 합니다.

이때 소멸은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순간적 소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때 없어져서 소멸이 된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에 의해서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것들은 반드시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대상을 알아차렸을 때 탐진치라는 번뇌가 순간적으로 소멸되면

이 순간에 알아차린 힘에 의해서, 알아차리지 않은 다른 대상에서도 일시적으로 번뇌가 소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적 소멸을 많이 만들어서

그 다음에 대상으로 삼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일시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겼을 때 수행의 대상이 아니었던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힘입니다.

 

그래서 순간적 소멸이 연속되면 일시적 소멸이 연속될 것이고,

일시적 소멸이 연속되면 궁극에는 아라한의 경지인 완전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소멸의 상태가 바로 원인과 결과가 없는 무인작용심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무엇을 하던, 걷던, 서있던, 앉던, 눕던,

어떤 작은 자세를 취하던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그들의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냅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차츰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이것을 법이 앞에서 이끈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믿음과 지혜가 성숙되어서 앞에서 모든 대상을 이끕니다.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는 말에 대해서

잠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알아차릴 대상에 마음을 고정해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론 몸을 알아차리다가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전력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을

충실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다른 대상과 섞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섞이게 되면 두 가지 내지 세 가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분열현상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가려움으로, 가려움을 알아차리다가 망상으로,

망상을 알아차리다가 졸음으로, 이렇게 대상이 자주 바뀌면 알아차리는 힘이 약해지며

마음이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수행을 포기하거나 또는 졸음에 빠져 수행을 멈추게 됩니다.

이런 때는 즉시 방황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의 대상은 항상 무엇이거나 현재 여기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방황할 때는 방황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며

수행이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낼 때는 짜증을 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리다가 느낌으로, 느낌을 알아차리다가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다가 법으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집중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집중력이 생기지 않으면 마음이 들떠서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으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고요함이 생기지 않으면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상을 단순하게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대상이 있어서 단순하게 알아차려야지, 어떤 의미를 두거나,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일 때는 없애려고 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어떤 목표가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수행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직 나타난 대상을 개입하지 않고 계속해서 분리해서 지켜보는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거기 단지 그것이 있어서 봐야 합니다.

대상의 성품을 본다는 것이 바로 지혜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지혜를 얻어 번뇌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시작하면 바른 마음가짐으로 정해진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 뒤에 많은 아라한들이 계승한 수행방법이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4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이지만,

초보자는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몸은 항상 현재 여기에 있으며 분명한 대상이라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의 기본입니다.

 

그중에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상황에서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움직임이 있는 동적인 상황에서는 몸의 네 가지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할 때 호흡만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위빠사나의 도의 지혜가 성숙되기 어렵습니다.

좌선을 할 때와 함께, 다른 일상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도 함께 중요한 대상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위빠사나 수행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려야만 지속적인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은 잘 흐트러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 생긴 집중의 힘이 다른 수행을 할 때에도 알아차리는 힘을 보태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