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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1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네, 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즐거울 때는 즐거워하네, 라고 알아차리십시오.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이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과 즐거움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부정할수록 더 커집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괴롭지 않습니다.

즐거움을 알아차려야만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니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수용하십시오.

 

알아차리는 순간에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므로 있던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받아들이는 것만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분류할 때는

오직 이것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많은가 적은가,

또는 강한가 약한가를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학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강화하는가 하는 문제는 수행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교학으로 분석한 사항을 바탕으로

필요한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의도가 왜 중요한가를 교학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하여 파악한 뒤에,

이제 의도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중점적으로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의도를 알아차리면 분명한 앎을 함께합니다.

마음이 일하려는 마음을 대상을 알아차리면 일하는 마음의 본질에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하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무엇이 이익이고 손실인지를 알 수 있으며,

시기와 장소를 판단할 수 있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어리석음과 지혜를 구별하는 힘이 생깁니다.

 

처음부터 의식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기본적인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도를 보기위해서는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집중력을 키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을 알아차리기도 어렵다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시작한 뒤에 적절한 시기가 되어서

그때서야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하면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없어 실망하거나 수행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수행을 하면 이내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쉬운 수행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의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자세히 알아차려도 됩니다.

 

이런 자세는 수행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의도의 중요성을 알아서 아직 아는 힘이 없음에도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하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도를 보기가 어려우면 싫증을 내거나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할 때 매우 좋지 않은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현상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도 나타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때로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얻으려고 하는 갈애가 일어난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런 갈애가 일어났을 때 갈애가 일어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특별한 것인 줄 알고 다른 데서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비물질인데 모양으로 마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알아차리는 대상을 충실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끄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가 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것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음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에 헤맨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이나 집중을 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며,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얼마나 계속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번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나 때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의도를 내는 것이고

이것이 행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행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먼저 의도가 일어나고 그런 뒤에 직접적인 행위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은 처음에 생각하는 단계를 시작으로 다음에 말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로 행위로 옮기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이때 생각하는 단계가 의도입니다.

이때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단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런 단계적 과정에서 시작부터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는 이러한 미세한 과정을 모르고 행위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를 한 뒤에 알기 마련이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수행은 하기 전에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훨씬 일하는 마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의도를 알아차림으로써

모르고 할 때 저지를 수 있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사소한 행위를 할 때도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부주의한 상태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냅니다.

 

특히 운전을 할 때나, 중요한 기계를 조작할 때나

한순간의 부주의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일어나는 위험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생각에 빠지면 숨 쉬는 것조차도 잠시 잊어버리고 있다가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는 일을 알아차리면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함께 하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면

더 분명한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도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몸이 아프고 쑤시면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냄이 일어납니다.

이때 움직이고 싶은 의도가 일어납니다.

이때의 의도는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서 움직입니다.

 

이때 성냄과 탐욕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작은 움직임 하나도 마음의 의도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은 미세해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이때의 어리석음도 미세한 번뇌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행위는 몸에 속하지 않고 마음에 속합니다.

마음이 의도를 일으켜 몸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12연기에서의 행도 몸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몸은 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마음이 의도를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심히 움직인다고 할 때는 ‘무심히’가 없습니다.

반드시 마음의 의도가 있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보이지 않고 워낙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에 의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 여러분들이 앉을 채로 팔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 보십시오.

먼저 움직이기 전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려는 의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앞서서 팔을 들어 올리려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위로 들어 올려 보십시오.

이때 팔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팔을 들어 올리려는 의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은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도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팔을 들어 올리려는 의도는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때 동작을 멈춥니다.

이때도 마음이 팔을 더 이상 들어 올릴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더 이상 들어 올리려는 의도를 중단합니다. 그래서 팔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몸이 스스로 알고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팔을 들어 올리려는 시작도 마음이며,

그만 멈추어야겠다고 판단하는 것도 마음이 결정합니다.

이렇게 내린 판단에 따라서 팔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이 조정하고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이때 움직이는 것은 팔이지만

사실은 모두 마음이 의도를 일으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의도를 일으켜서 팔을 움직이도록 시작했지만

결국 움직이는 팔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팔을 아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아는 것은 사실 지혜로 본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서 추론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팔을 들어 올리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들어 올리는 팔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팔을 들어 올릴 때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팔이 움직일 때 진동하면서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동작 안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상을 염처별로 적절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을 들어 올릴 때도 들어 올리는 동작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방법이 있고

동작을 알아차리지 않고 들어 올리려는 의도를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 올리는 동작에 주목하면 신념처나 수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 올리려는 의도를 계속해서 지켜볼 경우에는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서 무상을 알아차리면 법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법념처 수행을 따로 떼어서 법념처라고 하지 않아도 법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이 이미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 느낌, 마음을 대상으로 하면 이미 법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상으로서의 법이 지혜가 성숙되면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아는 법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상의 법이 나중에는 진리의 법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났을 때는 진리를 알아차리는 법념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시작부터 알아차리거나, 중간에 알아차리거나, 끝에서 알아차리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때나 알아차리면 된 것입니다.

사실, 이미 지난 뒤에 알아차리는 것도 훌륭한 알아차림입니다.

 

누구도 알아차리면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차렸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고 나서 알아차렸다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후회를 해도 계속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이때는 후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래야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어느 때나 자신의 마음을 속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 순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있더라도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나중에 알아차리는 것보다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고 하면

또 다른 갈애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는 행위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는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기본에 접근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여

지혜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