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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이란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 위를 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오르면

효과적으로 오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사다리를 잡는 손과 발이 닿는 것만 알아차려야

위험하지 않게 오를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도 이처럼 다른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를 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며

아래를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현재에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에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에 법의 성품이 있어서 지혜가 계발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술을 빨리어로 수라메라야맛자(suraamerayamajja)라고 합니다.

수라(sura)는 곡주(穀酒)이고,

메라야(meraya)는 과주(果酒), 화주(花酒), 목주(木酒)이고,

맞자(majja)는 술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그래서 술은 마시면 정신이 흐려집니다.

약물도 이와 같습니다. 상좌불교에서 오계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울 때

술에 관한 것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곡주, 과일주 등의

술을 마시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술’이란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술이 알아차림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술을 먹은 것과 같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행한 크고 작은 잘못에는 술 때문에 생긴 일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느낌이듯이 술도 느낌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즐거운 느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느낌은 항상 더 좋은 느낌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술이 술을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먼저 취하고 싶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술을 마시려는 순간의 느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느낌은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데

이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육체적인 즐거움에서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감각적 쾌락은 짧은 한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면

이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한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술을 먹는 행위로 발전합니다.

이처럼 반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과거에 술을 마시고

이완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고 고생을 했던 때를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술을 마시고 싶은 느낌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먼저 마시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주시해야 합니다.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몸을 통해서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이 약간 두근거린다던가, 가슴이 뛴다던가, 어떤 형태로던가 가슴에 느낌이 있습니다.

이 느낌은 거칠 수고 있고 미세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느낌이거나 가만히 주시해야 합니다.

얼마동안 이렇게 주시하면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한결 약해져서 제어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알아차림으로 극복했다면 이때는 알아차리는 힘이 증장한 것입니다.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가슴의 호흡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가슴에는 이런 유의 여러 가지 느낌과, 호흡과 맥박, 진동이 있습니다.

느낌이 강하면 느낌을 알아차리고,

아니면 몸에 있는 다른 것이라도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에 느낌이 없는데도 반드시 가슴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상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강한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마시는 술은 때로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술로 해결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수행자에게는 괴로움이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도피처가 술이 되면 알콜 중독자가 되기 때문에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좋거나 싫거나 나타난 어떤 대상도 피하지 않습니다.

그냥 온 몸으로 마주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실 피한다는 것은 현명한 대처가 아닙니다.

피할수록 더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사실 별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이 두려워서 피하려 하기 때문에 사실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선업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매우 자율적으로 정해졌습니다.

율장을 보면 부처님께서 계율을 임의로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비구들이 모여서 해결의 방편으로

자연스럽게 계율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합의된 상좌부 불교의 비구 계율이 227계입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계율이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알아차림 하나면 계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선하지 못한 마음을 방어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계율을 의식하면 수행자가 스스로를 속박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막아서 스스로와 남을 보호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계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청정한 수행을 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명상이라고도 합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특히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수행이 잘 안된다면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 중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 때는 알아차림이라는 행위가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대상을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깨어서 알아차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비로소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의 종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을 통해서 고요함을 얻는 사마타 수행이 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선정의 고요함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얻어 열반을 성취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40가지가 있는데 모두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선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색계선정과 무색계 선정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색계 1선정일 때,

현재에도 색계 1선정이 되고, 죽어서도 색계 1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선정은 무색계 4선정까지 있고 그 위에는 없습니다.

선정의 세계는 윤회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현재 몸과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은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3가지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대상과 아는 마음 사이에 알아차림이라는 행위가 있어서 비로소 수행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말은 대상을 분리해서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지속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통찰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모든 방편이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으로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계발되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열반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 끝이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은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실천하는 수행이 아니면 사변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진실은 완전하지 못해 두려움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자는 진실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과 고통이 없습니다.

 

이렇듯이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선에 이르기 어렵기 때문에

관용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수행은 반쪽짜리 수행이라서 바람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완전한 관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서 살기 때문에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극단적 고행을 하는 사람도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것에는 항상 반대급부가 따르기 마련이라서 관용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대결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려서 수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남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 있게 할일을 못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살면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일은 상대의 일이라서 내가 상관할 것이 없고,

내 일은 내 일이라서 남이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상대의 어떤 행위도 단지 상대의 일로 보여서

알아차리는 힘을 온전하게 자신의 내면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치를 볼 것이 없고, 아울러 남과 시비할 것도 없어야 합니다.

바른 알아차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향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라서 전에 없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습관적인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인내가 함께 해야 합니다.

노력은 조금만 하고 큰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지 관용이 아닙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지만 수행에서는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로 내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노력입니다.

대상에 빠져서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즉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알아차림과 집중인데 이것들이 모두 노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는 현재의 마음가짐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자세가 바른가, 몸에 힘은 들어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들을 살피는 것도 노력입니다.

 

수행을 할 때 무조건 참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는 무엇이나 참아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관용이고 수행의 미덕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선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보시, 지계,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3가지는 선심인 관용, 자애, 지혜를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 덕목입니다.

완전한 선심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상의 3가지를 선행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