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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0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50년 동안 탐욕을 가지고 괴롭게 살아왔으면

50년 동안 알아차려야 괴롭지 않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100년 1000년 동안 탐욕을 가지고 살아왔으면

100년 1000년 동안 알아차려야 괴롭지 않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행해온 날들이 길면 알아차리는 날들도 그만큼 필요합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얻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입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씨를 뿌리고 기다리지 않고 거두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탐욕으로 알아차리면 살아온 날들만큼 알아차렸다고 해도 번뇌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만이 시간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계율을 딱딱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계율은 가장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율은 막아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계율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유 분망한 마음이 침해받는 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 분망한 마음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계율은 자신을 억제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으로 인해서 남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계율의 가장 큰 이익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의 싹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좋은 일어남은 좋은 사라짐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나쁜 일어남이 있으면 나쁜 사라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서나 우리 주위에서 항상 볼 수 있고

크고 작은 많은 현상들입니다.

 

좋은 일어남은 좋은 출발이고, 계율이 있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팔정도에 입각한 출발입니다.

그리고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이 좋으면 결과도 좋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출발이 좋지 않으면 반드시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계율 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의 과보는 매 순간 받는 것이고, 일생을 통해서 받는 것이고,

다음 생에도 받는 것이고, 그래서 온통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업이 이러하니 악업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수행자 여러분!사람이 죽으면 남는 것은 계율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죽어서 가지고 가는 재산은 물질이 아니고 선업과 악업의 과보인데,

계율을 지켰을 때는 선업의 과보를 가지고 가고,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악업의 과보를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것은 전생에 남을 비난하지 않아서

칭찬을 한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며,

부자는 전생에 남에게 베풀었던 결과이며,

병이 많거나 단명한 것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결과입니다.

 

무엇이나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이것을 조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은 우리 생존의 기본 골격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선업의 과보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 생에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경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오늘을 산다는 절실한 의미는

새로운 선업을 쌓아서 좋은 원인을 만들고,

현재 있는 선업의 의식을 더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도 행복하고 다음에도 행복을 보장합니다.

이것이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을 함께 일으키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축생과 다르다는 것은

일정한 계율의 바탕에서 산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인으로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을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율은 왜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계율은 몸과 마음이 들뜨지 않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괴롭지 않고 기쁨이 생기기 위해서 지켜야합니다.

노력과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선정수행의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을 위해서,

혐오스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통찰지혜로 알기 위해서,

선한 행위로 집착을 소멸하기 위해서,

사성제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서 계(戒)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에 바탕에 항상 계율이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지계(持戒)의 이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세상에서 지계가 구족한 이는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으로 흐리지 않아서 큰 재산을 모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좋은 소문이 널리 퍼집니다. 셋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왕들의 모임이나 지혜로운 브라흐만 대중, 거부장자,

비구, 수행자, 대중 등에게 가더라고 두려운 마음이 없이 밝은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임종 시에 허둥대지 않으며

맑은 정신과 기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합니다. 다섯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죽은 다음에 선업이 있는 이들이 가는 곳,

행복한 곳에 태어납니다. 이 이외에도 계율을 지키면 건강이 좋아질 것이고,

사회적으로 신망을 얻어 정신적인 지도가 될 것이고,

늘 알맞은 이윤을 남겨 재산이 오래 유지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모두 계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가장 우선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 것,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계입니다.

 

하나,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다른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게 불필요한 살생을 즐깁니다.

취미가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잘못된 취미입니다.

다른 생명을 죽인 과보는 고스란히 자기가 받습니다.

 

작은 곤충조차도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지구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모두 살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것을 죽인다면

그것은 삶을 역행하는 것이고 그 과보는 고스란히 자신이 받습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 마음에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생을 하는 마음에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없습니다.

 

살생을 하는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고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물과 다름이 없다면 그의 다음 생은 동물이거나

동물보다 낮은 단계의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도 살생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 더 큰 살생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자살을 하는 것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명을 끊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과보로 인해 더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지금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스스로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찾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누구나 선한 마음이 있어서 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서 선하지 못한 행위를 했습니다.

만약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불선행의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선행을 한 과보도 올 것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당한 고통이 아니고 단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괴로울 뿐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한 수모가 아닙니다.

단지 이 순간의 마음이 경험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움은 한낱 느낌일 뿐입니다.

그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 느낌이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이 느낌이 항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맙니다.

 

둘,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갖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에 속합니다.

남의 것을 훔치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으며 남에게 손실을 입히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그렇습니다.

내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남도 내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줄 것을 주는 것은 남도 내게 줄 것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한 기준은 5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절도입니다.

남의 소유의 물건을 집에 침입하여 훔친다거나 소매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둘, 강도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폭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거나 협박을 해서 빼앗는 것입니다.

셋, 날치기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반항할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낚아채는 것입니다.

넷, 사취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거짓으로 속여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섯, 속임수입니다.

상대를 눈가림으로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행한 대로 과보를 받습니다.

 

훔친 물건의 가치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생깁니다.

매우 소중한 것일수록 그 불선과보가 큽니다.

다음에 피해자의 도덕적 자질에 따라서 과보가 다릅니다.

피해자가 정신적 수준이 높으면 그것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더 큽니다.

 

그리고 탐심으로 했는지 복수심이나 증오를 가지고 했는지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다릅니다.

만약 단순한 탐심이 아니고

소유한 사람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했다면 불선과보가 더 큽니다.

 

셋,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불륜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부모 형제, 친척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사람, 여자 죄수,

그리고 남과 약혼한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전에서 말합니다.

 

출가수행자는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이욕(離慾)을 통하여 정신적 함양을 꾀해야 합니다.

 

재가 수행자가 음란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결혼관계를 보호하고

부부가 상호간에 정신적 유대감을 가져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3가지 종류의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 아직 보호를 받고 있는 여자, 전통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여자에게 2가지 종류의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남자, 독신을 선언한 남자입니다.

 

넷,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이루어져야 비로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면 스스로나 남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해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합니다.

 

거짓말에는 소극적인 경우와 적극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측면일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인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려는 의도로 하는 것이지만 거짓말의 동기가 다릅니다.

탐욕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고,

미움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고,

미혹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의 종류에 따라서 그 과보가 다릅니다.

특히 성스러운 상가를 분열시키는 거짓말은 그 과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사람을 속이는 것이 그 과보가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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