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6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2:4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리석음은 나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고 남의 어리석음만 보는 것입니다.

고요해야할 곳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관용이 일어나야할 곳에서 탐욕이 일어난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대상의 실재하는 것을 보지 않고 대상을 관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주어야할 것을 주지 않고 갖지 말아야할 것은 갖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열리면

그 순간 어리석음은 사라집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회의 시작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윤회의 시작이 제1원인과 혼돈되어서는 안 됩니다.

윤회의 시작은 무명으로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윤회의 시작이

어느 날, 어느 시부터 시작되었느냐하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시간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윤회의 시작이 무명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르고 어리석기 때문에 윤회가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는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시원은 모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기의 시작이 무명이라는 것은

연기의 근본원인이 모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모르면 무명이고 알면 지혜로 바뀝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무명으로 시작하여 무명으로 끝이 납니다.

과거에 모르는 채로 태어나서 현재에나 미래에 모르는 채로 죽는다면

다시 모르는 채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시작도 무명이고 끝도 무명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그러나 윤회가 없는 세계에서는 지혜로 시작하여 지혜로 끝이 납니다.

무명으로 태어났지만 현재에 지혜로 시작하여 미래에도 지혜로 끝난다면

바로 거기에는 태어남이 없습니다.


무명과 갈애가 없는 것이 지혜이며

지혜가 있으면 바라는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는 생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시작이 있고 두 가지의 끝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에 무명으로 시작해서 현재에 무명이 계속되어

미래에 무명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에 갈애로 시작해서 현재에 갈애가 계속되어

미래에도 갈애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설하신 괴로움의 원인인

무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법문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불교의 법문은 동의어 반복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훌륭한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복이야말로 어려운 법을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수단입니다.

그래서 여러 스승들의 같은 말이 반복되더라도 싫증을 느끼지 마시고

계속 들으셔서 이해의 폭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한 말을 오늘 내가 다시 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 시간에 들은 이야기와 오늘 들은 이야기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듣는 마음과 오늘 듣는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은 것을 또 들었을 때, 오늘 새로운 마음이 지혜가 열려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듣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무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집착으로 인해서 행복하고 집착이 없으면 삶이 따분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대상, 음식, 의복, 그리고 친구들을 찾습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삶을 무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동호인이나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있을 때만이

마치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갈애는 범부가 오욕을 애착하는 것과 몹시 목말라하는 것을 갈애라고 말합니다.

이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갈애는 갈애로 그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하기 때문에

시작은 갈애이지만 결과는 행위를 하게 해서 그 과보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착한다는 것은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떨어지지 않고 계속 집착을 하는 결과로

업을 생성해서 그 과보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부들은 집착할 것이 없으면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가리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의 삶은 즐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조건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는 좋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명이 있어서 삽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웃을 때도 크게 웃지 않고 그냥 미소만 띄웁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하면 갈애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에 수행을 하기 전과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종종 가정생활을 지루해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런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모든 것은 가치관의 차이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수행자의 이러한 기분이나 일시적 상태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행위가 있을 때는 단지 과정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을 탐구해보고 얼마나 진정으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많다면,

여전히 우리는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러분!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행복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 듯이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사실은 즐길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괴로울 거리를 찾는 것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즐길 것을 찾지만

그 즐길 것의 결과가 결국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무명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취미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런 것들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들 취미가 사실상 괴로움의 원천일 뿐입니다.


더 분명한 예는 흡연입니다.

흡연자는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비흡연자에게는 일종의 자학적 괴로움입니다.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에 대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걱정이 없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그래서 갈애가 일어나는 가장 가까운 원인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느낌이고 누구나 이 느낌을 더 즐기려고 해서 갈애가 일어납니다.


괴로움의 원천인 갈애는 각성효과가 있는 나뭇잎을 씹는 것과 같습니다.

나뭇잎을 씹으면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나뭇잎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갈애가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뭇잎 씹기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나뭇잎을 씹는다는 것이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습관입니다.


남방에서는 비틀이라는 나뭇잎을 씹으면 각성효과가 있는데

입안이 붉고 이가 붉고 매우 보기가 흉합니다.

그리고 그 침을 삼키지 못해서 늘 더러운 침을 뱉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용되는 수단들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흡연자는 씹어서 각성효과가 있는 그런 나뭇잎을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긴 노력이

바로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생의 주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매우 심오한 것이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지식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혜로 통찰해야 합니다.


지식은 표피적인 것에 그치지만, 지혜는 실재하는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안개에 가려서 본질을 볼 수 없지만,

지혜로 보면 안개너머에 있는 진실을 압니다.


지식으로 보면 내가 느끼지만, 지혜로 보면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라고 압니다.

지식으로 보면 항상하지만, 지혜로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론은 언제나 자신의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높은 실재가 있으니 판단을 유예하고 깊게 숙고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못된 견해는 바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고 더욱 배척합니다.

여기서 바른 견해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갈애이며, 이러한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을 선한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번뇌를 만드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무명은 모르는 마음이고 갈애는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바라기 때문에 집착을 하여,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합니다.


누구나 과거에는 무명을 우두머리로 살았고 현재는 갈애를 동반자로 삽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명에 이끌리고 갈애에 내몰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무명과 갈애가 물처럼 흘러가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하면,

무명이 지혜로 바뀌고 갈애가 관용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리석음과 탐욕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러분!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면 메마른 평가가 되기 쉽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우르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몰랐기 때문에 과거에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오직 알아차림만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여러분들을 스스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번뇌를 가진 자는 번뇌가 불타버린 세계를 알지 못하며,

어떻게 불태우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명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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