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5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2:3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은 누구나 똑같이

모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알려고 하는 것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모른다고 포기하지 말고 몰라도 계속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듣고, 읽고, 수행을 하면 조금씩 알게 됩니다.

모르는 세계에서는 끊임없는 반복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복잡하다고 스스로 포기해서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부터 많이 알려고 하면 탐욕으로 더 어렵습니다.

모른다고 포기를 하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지만,

몰라도 알려고 하면 결국에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무관심은 게으름으로 인해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찮아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깊은 무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무지에 대해서는 고통과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무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윤회의 시작은 무명입니다.

이때의 시작은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원인이 되는 조건을 말합니다.

 

언제라고 하는 시간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지 과거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필요한 것을 알고자 하는 때가 많습니다.

과연 인류가, 인간이 언제 적부터 시작되었는가가

지금 현재 나의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가

지금 나의 번뇌와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렇듯 윤회의 시작이 무명이라고 하는

이때의 시작은 근본원인을 말하는 것이지

시제상의 언제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 무명이다라는

그런 뜻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곡 사야도의 무명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마하시 사야도가 말씀하신 무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무명은

‘고집멸도’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는 무명은 착각이나 잘못된 생각을 말합니다.

바꿔 얘기하면 전도몽상을 우리는 무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명은 우리를 타락하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가는 무지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일반적인 무지와는 다릅니다.

사람이나 마을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되지는 않지만

12연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마치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동쪽을 서쪽으로 알고, 북쪽을 남쪽이라고 잘못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해서 매우 낙천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괴로움의 진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책에서 찾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고 듣는, 즉 여섯 가지의 감각장소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은 모두 괴로움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상의 존재는 무상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모든 존재는 어느 때라도 끝날 수 있어서 모든 것은 고통과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좋고 축복받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무명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형상, 좋은 소리, 맛있는 음식 따위의 감각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존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 때문에 생깁니다.


여기서 무명은 말에게 푸른색 안경을 씌워서

마른풀을 푸른 풀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그것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대상과 정신과 물질의 성질에 대한 환상을 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을 못 보는 장님에게 싸구려 옷을 건네주면서

이것은 매우 비싸고 훌륭한 재질의 옷이라고 하면 쉽게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장님은 그 사람을 믿고 건네받은 옷을 아주 좋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고 나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 즉시 그 옷을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 때, 지혜를 알게 된, 지혜로 보게 된, 눈을 뜨고 보게 된

장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으로 덮인 범부는,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즐깁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에 대한 성찰로 자기 존재의 불건전한 속성을 알아차리면

바로 뒤바뀐 인식이 사라져서 바른 인식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정신과 물질에 대해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책 속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식(識)으로 구성된

정신과 물질적 현상에 철저하게 주시하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은 정신과 물질의 본성을 철저하게 알도록 해줍니다.

수행을 해서 집중이 계발됨에 따라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에 대한 통찰 지혜를 얻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인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남자, 여자, 손, 다리 등과 같은 잘못된 인식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는 것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실체가 없는,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며, 단지 마음과 몸,

즉 정신과 물질의 진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신과 물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있는 사람은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이 계발되기 전에 처음부터 통찰 지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때 통찰 지혜는 위빠사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인식,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방식이 관찰에 앞서기 때문에

초보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위빠사나의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이 집중력과 지각력이 계발되어

비로소 위빠사나의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위빠사나의 지혜에 이르게 될 때만이

비로소 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사념처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가려움을 느낀다면 수행자는 그냥 가렵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에게는 손이나 다리, 몸의 어느 부분이 가렵다거나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 자기라는 생각,

내가 가렵다. 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지속적으로 가려운 감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감각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주시하면 사라집니다.

지켜보는 마음은 모든 정신과 물질적 현상을 바로 주시하여

손과 다리라는 잘못된 인식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몸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나의 몸이 아닙니다.

내가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덤덤함은

단지 감각적 쾌락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감각기관이 느낄 뿐이지,

그것이 나의 느낌은 아닙니다.


느낌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느낌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각기관이 느끼는 이 느낌을 우리는 나의 느낌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갖습니다.


바로 그것이 무명이며 이러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의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잘못된 인식에 지배되어서

모든 감각대상의 불만족스러운 성품인 괴로움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게 됩니다.


참으로 무명은 실재를 모를 뿐만 아니라,

실재를 왜곡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은 괴로움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운 감각대상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무명은 노력과 행(行)으로 원인되어집니다.


경전에 따르면 무명으로 인해 행이 일어나지만

그 사이에 갈애와 집착이라는 두 개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무명은 갈애를 일으키고 갈애는 이 후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갈애와 집착은 감각적 욕망에서 나오는데

이는 연기법의 중간 부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연기와 관련된 과거는 무명, 갈애, 집착, 업의 형성, 행입니다.


이렇게 무명은 우리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숨겨져 있는 세속의 실재입니다.

이 무명을 조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있다는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라서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유신견이란 내가 있다는 견해로 삿된 견해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와

항상하다는 상견,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단견입니다.


이 중에 몸이 있다는 의미에서 유신(有身)은 있습니다.

몸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유신견이라고 해서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유신은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견은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입니다.


12연기가 돌게 하여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로써 이것은 연기의 핵심 요소들입니다.


12연기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실은

무명은 시작에 불과할 뿐, 무명 뒤에서 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명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이 세 가지를 불선심이라고 하고 또는 번뇌라고도 합니다.


바로 연기를 돌게 하는 것이 무명이고,

무명을 조정하는 것이 번뇌이고,

번뇌를 조정하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이 유신견의 반대가 무아입니다.


유신견은 이처럼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불선심을 조장합니다.

인간의 탐욕, 성냄, 고통, 슬픔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무명의 상태에서는 언제나 윤회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 몸, 내 마음, 내 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자신의 모든 불행이 만들어지고 행복을 빼앗깁니다.

이것이 유신견입니다.


이 유신견은 내 몸이 있다는 견해이지만 똑같은 뜻으로

내 마음이 있다는 것도 함께 포함한 말입니다.


몸도 내 몸이 아니고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닙니다.

단지 몸일 뿐이며 단지 마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단지 몸일 뿐인 이 몸을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유신견이 바로 무명의 근본원인이 또 됩니다.

 

그리고 단지 마음일 뿐인 이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전도몽상에 빠져

끝없는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을 해서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야 되는 가장 근본 이유는 사실은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데

이 무명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무아의 반대인 자아, 유신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유신견입니다.

그러한 나는 없습니다.

이러한 내가 없다고 알 때,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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