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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와 위빠사나/44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2: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부터는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책을 가지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시겠습니다.


먼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책의 8쪽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12연기 도표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도표를 보면서 공부를 하시면

여러분들이 난해한 12연기를 쉽게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제8장 순관(順觀)으로 본 연기법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연기는 역관으로 가는 12연기와 순관으로 가는 12연기가 있습니다.


먼저 연기의 시작인 무명부터 공부를 해보시겠습니다.


8쪽의 도표는 오온의 진행과정에 맞춰서

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 고안하여서 그리신 것입니다.


이는 연기가 바로 우리 자신의 오온이며,

이것이 쉼 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오온이 사라져 새로운 오온을 일으키는 과정인 연기는

바로 물질적 정신적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인 원인과 결과의 과정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인간의 문제는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 현상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여기에는 결코 어떤 외부적인 힘이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가 되고, 현재의 원인이 다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이처럼 우리는 윤회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연기를 또 다른 말로 윤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윤회의 시작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명에 가려지고 갈애에 묶인 채,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끝없이 윤회를 계속해 온 존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명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 존재가 거쳐 간 육신의 뼈들을 무더기로 쌓는다면,

그 높이는 웨뿐라(Vepunlla) 산과 맞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웨뿐라 산을 올라가는 데는 나흘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단지 한 존재의 뼈들로만 말입니다.

윤회란 이토록 긴 것이며,

윤회가 이토록 길다고 하는 것은 고통의 세월 또한 이렇게 길었으며,

연기의 순환 또한 그토록 오래 계속되어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흘이 걸려서 올라가는 웨뿐라 산의 높이만큼

우리가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면서 생긴 뼈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이 말을 돌이켜 볼 때, 색계나 무색계에서 화생을 한 생명들은 뼈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축생이나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이 뼈들이 쌓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엄청난 세월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윤회의 시작은 무명입니다.

그렇다면 무명이란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도 무명을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모곡 사야도의 법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씀드립니다.

이때 사성제라는 것은 고집멸도를 말하는데,

네 가지 성스런 진리로서 성인이 되어야 아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집멸도를 말할 때는 사유로 아는 것이지, 생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그 진실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열반을 체험한 성자가 되어야 비로소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8정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성제의 첫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불만족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에 처해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것은 열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제인 8정도에 대한 무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성제에 대한 무지가 바로 무명이라고 말씀 드렸듯이

오늘도 같은 뜻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째, 집제(集諦)에 대한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금이나 은 또는 값나가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집제에 대한 무지입니다.


두 번째, 괴로움 불만족에 대한 무지는 우리 자신의 오온이 바로

괴로움과 불만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고제(苦諦)에 대한 무지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원래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고제에 대한 무지입니다.


셋째,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멸제(滅諦),

즉 궁극적 열반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멸제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 멸제는 우리들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에 대한 그것만을 알아차릴 뿐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수행의 대상이 아니며 알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8정도가 궁극적 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모르는 것,

도제(道諦)에 대한 무지입니다.


8정도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이고,

8정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8정도는 늙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8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때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은 세속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윤회하는 세계 속에서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뒤에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8정도를 찾아내셔서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제는 출세간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제와 집제는 세속의 진리이고 일어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찾아내신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제는

출세간의 진리이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소멸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4성제 중 첫째와 둘째는 세속적 진리이고,

셋째와 넷째는 출세간의 진리이고,

다시 첫째와 둘째는 일어나는 진리이고,

셋째와 넷째는 소멸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데 괴로움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도제와 멸제를 찾아내신 부처에 의해서

비로소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로 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자, 이러한 무지가 바로 무명이며,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바로 이 무지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行)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슬픔과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우리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온갖 종류의 행위들을 합니다.

재산을 늘리고 더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

선하고, 선하지 못한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해서 행동합니다.


정당한 수단으로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이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는 윤회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연기를 다시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이 사람은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물론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연기의 고리가 계속해서 돌아가도록

연결짓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의 진리는 가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어떤 것도 서슴치 않고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되겠지만, 출세간에서는 다릅니다.


비록 가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이나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도

바로 연기를 회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잘못한 것이 아니지만,

따져놓고 본다면 최상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가장 최상의 선택입니다.


선택은 여러분들이 하십시오.

괴로움뿐인 윤회를 거듭하고자 한다면 선하다는 명분으로 무엇이나 행하십시오,

그러나 괴로움뿐인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윤회를 끊고 싶다고 한다면

출세간의 진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고

온전하게 선한 것만 실천해야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보다 나은 지위를 얻기 위하여 보시를 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선업(善業)입니다.

이러한 칭찬받을 만한 공덕이 괴로움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과 함께 행해질 때는

이는 덕을 짓는 행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보시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명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매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졌지만,

사라지면서 그 마음의 과보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힘이 있어서 또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지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무명의 반대는 지혜입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이라고 해서 무명이라고 했는데

몰라서 바로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고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합니다.


모르면 나태한 상태에서 게으르고 바라고 집착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계속 바라서 집착을 하게 되고, 집착을 해서 업의 생성을 하고, 

업의 생성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환난병고를 겪어야 됩니다.


그러나 이 무명의 반대가 있습니다.

무명은 모른다는 것인데,

무명의 반대는 지혜인데,

그 지혜는 안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알기 때문에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는 알기 때문에 어둠이 아니고 밝음입니다.


알면 바라지 않아서 끊어버립니다.

끊기 때문에 그 과보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명인 상태로 모르면 번뇌에 당하고 살지만

알면 지혜인 상태에서 번뇌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하고 하는 것들을

누가 선택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무지는 대상의 실재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관념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속박합니다.

이 관념이 잘못 된 견해로서 무지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이 무지는 맹목적입니다.

무지는 분별력을 갖지 못하고 미혹하여

삿된 것에 빠져서 삿된 것을 구합니다.


여러분!

무지는 용감합니다.

무지하면 양심이 없고 수치심이 없으며 항상 들떠 있어서

짐승처럼 본능만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지가 가장 큰 불선업입니다.

무지한지를 몰라서 바로 개선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무지가 자신의 습관이고 고정 관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지를 모르고,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내지 못합니다.


무지는 깊은 망상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을 좋아하며,

그것 때문에 살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괴로움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무지는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며,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우리 다 함께 무지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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