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43

通達無我法者 2011. 1. 6. 21:5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화가 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항상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무지한 마음이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무지한 것을 알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무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지보다 더 한 근본원인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모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래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12연기의 역관과 순관, 24연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연기는 24연기가 되어야 연기의 완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연기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최초로 보신, 바로 역관이 있고,

그리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순관이 있는데, 이것을 빠알리어로는 빳타나라고 말합니다.


이 빳타나는 24연기를 뜻합니다.

그래서 빳타나라는 빠알리어의 뜻은 다양한 조건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역관이 끝에 가서 무명에 이르게 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무명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이른 곳이 또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역관으로 무명을 보고,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을 보고 거듭

역관과 순관을 거듭하신 뒤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을 아셨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사에 수많은 사상들이 있지만,

부처님께서 밝히신 이 원인과 결과라는 사상은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이의(異意)를 제기하지 못하는 거의 완벽한 사상입니다.


바로 고따마 싯달타께서 부처가 되는 과정이

12연기라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연기는 바로 극단적 고행이 아닌 중도를 통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가 의미하는 불교의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이르신 ‘무명’이라는 연기의 시작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명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사물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명의 원인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명입니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빠알리어로는 빳짜야라고 합니다.

이 빠알리어 빳짜야는 원인, 조건, 동기, 연, 연기 할 때 연 하는 등으로 쓰입니다.


이런 원인을 의지해서 바로 결과가 생깁니다.

그래서 빳짜야, 원인은 의지한다, 버리지 않는다, 생기기도 하고 끊임없이 생겨서 머문다,

영향을 미친다, 은혜를 미친다, 등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이와 같은 무명을 조건 짓는 원인은 바로 여덟 가지를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네 가지가 있는데, 사성제, 고집멸도를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苦)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때 말하는 괴로움은 매우 많은 종류의 괴로움을 뜻합니다.


괴로움은 보편적으로 열한가지의 괴로움이 있는데,

태어남, 늙음, 병, 죽음,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오취온, 이런 것들을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고집멸도 사성제 중에서 ‘집’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집은 집착을 말하는 것인데 집착은 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인데, 이는 감각적 욕망의 갈애에서 비롯된 집착입니다.

집착의 두 번째는 사견에 대한 집착인데, 유신견, 상견, 단견에 대한 집착과

업의 과보가 없으며, 내생 정등각자 아라한이 없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세 번째 집착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인데, 팔정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식과 의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네 번째 집착은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인데,

영혼, 자아, 살아있는 실체의 믿음에 대한 집착입니다.


다음에는 멸제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은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열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도제에 대한 도성제에 대한 무명입니다.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길인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이때의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을 말합니다.


이렇게 고집멸도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네 가지 무명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출생 이전의 과거 생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전생의 내가 이생의 나로 환생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전생의 나는 현생의 내가 아닙니다. 이때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로 온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자아가 없음으로 전생의 원인이 현생에 왔다는 사실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의 내가 이생에 왔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무명은 죽음 이후의 미래 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여섯 번째 무명은 내가 죽어서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 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나 그 순간의 마음은 있지만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은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때에 내가 미래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서 어디엔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일곱 번째로 과거와 미래를 같이 모르는 것입니다.

역시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가 되었고,

현재의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서 미래의 결과로 간다는 사실이

과거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내가 현재로 와서, 다시 현재의 내가 미래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여덟 번째로 12연기의 바른 성품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12연기는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연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이러한 조건 지어진 현상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며,

현재는 다시 현재의 원인이 되고, 다음으로 미래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이상 여덟 가지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윤회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는 원인이 두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그 이전에 무명이 없고 그 이후에 무명이 생겼다. 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서 무명의 원인이 무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 이전에 존재에 대한 갈애가 없었지만

그 이후에 존재에 대한 갈애가 생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번뇌가 생겼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2연기의 원인은 무명과 갈애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무명으로 시작하여 무명으로 끝이 납니다.

과거에는 모르는 채로 태어나서 현재에나 미래에는 모르는 채로 죽으면

다시 모르는 채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시작도 무명이고 끝도 무명입니다.


윤회가 없는 세계에서는 지혜로 시작하여 지혜로 끝납니다.

무명으로 태어났지만 현재 지혜로 시작하여 미래에 지혜로 끝나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명과 갈애가 없는 것이 지혜이며 지혜가 있으면 바라는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는 생이 없습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는 두 가지 시작이 있고, 두 가지의 끝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무명으로 시작해서 현재에 무명이 계속되어

미래에 무명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말씀드린 대로 과거의 갈애로 시작해서

현재에 갈애가 계속되어 미래의 갈애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윤회의 시작은 과거에는 무명을 우두머리로 삼아서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는 갈애를 동반자로 살아서 윤회가 계속됩니다.

그래서 연기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라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무명의 뜻은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얻는 것을 말하며,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는 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려는 것과

가져야 할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오온이 무더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단지 자리(處)라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며,

열여덟 가지의 요소가 비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며,

오근의 기능이 다스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며,

진리에 여여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오온인 색수상행식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육입 처인 안이비설신의가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18계인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오근인 믿음과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를 알아야하고

사성제인 고집멸도를 아는 것이 바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러분! 무명을 무지라고 하는데 무지는 맹목적인 것입니다.

무명은 모른다는 것으로,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혜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교나 맹신 등 맹목적인 것으로는, 대상의 실재를 알 수가 없어서

바로 ‘무지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대상의 고요한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와 반대가 되며,

그래서 이것이 악행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무명의 계층은 매우 다양합니다.

지혜가 많고 적고 하는 차이에 따라서 무명의 정도도 다양합니다.


빠라마타 담마라는 근본법을 알고,

신, 구, 의, 삼업을 알고,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알고,

12연기를 알아 원인과 결과의 과보를 알고,

고집멸도 사성제를 아는 것이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아는 것과 수행을 통해서 지혜로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바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잠부깟따까 경에 사리불 존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있습니다.

무명, 무명이라고 말씀하시니, 사리불도반이시여!

무명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리불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잠부깟따까 도반이시여!

고(苦)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집(集)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멸(滅)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도(道)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을 일러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반이시여!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사리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귀한 팔정도 이것이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이 팔정도가 중도이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여러분!

무지의 특성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에 반해서 지혜는 아는 것입니다.


무지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대상의 바른 뜻을 덮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이 지혜로 드러납니다.

무지는 번뇌의 소용돌이와 가까운 원인이 있습니다.


이렇듯 무지는 모든 것의 괴로움의 원인이자, 모든 것의 시작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늘 또 수행을 시작하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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