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9

通達無我法者 2011. 2. 22. 03:5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면 마음이 긴장하고,

마음이 긴장하면 즉시 몸이 긴장합니다.

 

마음과 몸이 긴장한 상태에서는

들뜸과 통증으로 인해서 집중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행 중에 몸이 긴장했을 때는 먼저 긴장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미간과 입술, 어깨, 허리, 손 등을 차례로 알아차리면서 이완해주어야 합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때나, 경행을 할 때나, 좌선 중에나

이따금씩 마음과 몸을 점검해야합니다.


‘지금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그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스스로 살펴서 이완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제 14장의 네 번째 주제인

비구 사띠는 어떻게 사견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의식은 영구불변하고,

변화하는 것은 오직 몸뿐이라는 사견을 가졌던 사띠라는 비구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일치한다고 다른 비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열 개의 본생담에 나와 있는 떼미야, 자나까, 수안나사마,

부릿다, 짬뻬야, 위두라, 마호사다, 니미야, 나라다, 웨산따라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사띠 비구는 떼미야로부터 웨산따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존재들이

동일하고 항상하는 존재로 다만 몸만이 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식은 하나로서 동일하며 영구불변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생의 개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본생담은 부처가 되기 전의 보살이

수많은 생애 동안 윤회를 거듭한 전생의 삶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이러한 본생담으로 인하여 같은 생명이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한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본생담은 보살의 과보를 설명한 것인데,

하나의 마음이 몸만 바꾼다고 알면 잘못된 견해이며 유신견으로 본 것입니다.

본생담은 각각의 삶이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가 상속되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에 부처라는 자아는 없습니다.


사띠 비구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자 비구들은 위대한 스승께서 설하신

참된 법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띠 비구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계속해서 퍼뜨렸고,

이를 말릴 수 없었던 비구들이 부처님께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띠 비구를 불러

그러한 견해를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그 사실 여부를 물으셨습니다.

사띠 비구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너는 누구로부터 내가 그러한 법을 설했다고 들었는가?

내가 모든 의식의 조건 지어진 성질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던가?

적합한 원인이 없이는 어떠한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반복해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다른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지속되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똑같은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의식의 조건지어진 성질이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원인과 결과의 유위법을 말한 것입니다.

 

오온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끊임없이 상속되는 조건지어진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어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른 비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의식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은 오직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감각기관과 대상이라는 두 가지 것에 의존하여 의식이 일어난다.

눈과 보이는 대상의 접촉이 있을 때 안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부딪침, 마음과 생각에 의존하여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각각 일어난다.


이것은 마치 연료로 인해 불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오직 이러한 원인을 통해서만 저러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나무가 타고 있다면 그것을 장작불이라고 한다.

만일 소똥이 타고 있으면 그것을 소똥불이라고 한다.

대나무나 풀이 타고 있다면 그에 따라 이름 지어질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의식은 그 대상과 감각기관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하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 또한 멈추게 된다.


이것이 연기에 따라 현상들이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현생의 의식은 죽는 순간의 마음으로 종결되고,

내생에서의 새로운 의식은 재생연결식으로 일어납니다.


떼미야 왕자의 의식은 그가 죽을 때 사몰심으로 종결되었으며,

새로운 의식이 다음 존재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자나까, 위두라, 수안나사마, 웨산따라 왕자도 각각 생에서

사몰심으로 종결되었으며,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죽을 때의 마음과 다시 태어날 때의 재생연결식이 같은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아입니다.


죽을 때의 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죽을 때의 마음은, 모든 생명들은 태어날 때 재생연결식이라는 태어남이 있어서 태어납니다.

그 뒤 죽을 때의 마음인, 죽음의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짐으로 인해서 일생이 마감됩니다.

이 사몰심이 생멸하면 즉시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과정을 윤회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은 일생에 한 번 있는 마음입니다.

재생연결식으로 정신과 물질이 생긴 뒤에 죽음의 마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 까지

마음은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마음이 몸을 떠날 때 바로 사망을 한 것이며,

죽음의 마음이 몸을 떠나는 정확한 순간은 부처님의 혜안으로 밖에 알지 못합니다.


죽을 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음생의 마음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죽을 때의 마음이 선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조건 지어졌다면

그 사람은 다음 생이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종자를 가지고,

그 종자가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져서 그러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같은 예로, 죽을 때에 화를 내고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바로 그 마음이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져서 지옥에 태어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죽을 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은 한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는 삶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원인과 결과로 태어난다는 사실,

그리고 죽기 전의 마음은 이미 끝났고, 태어날 때의 마음은 그 과보가 전해져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같은 생이 아니고 재생(再生)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 뒤에 바로 잠재의식으로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도표를 참고하면

12연기의 부분 2에서 업의 형성과 의식이 연결되는 첫 번째 고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개구리 한 마리가 부처님의 설법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듣기가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목동의 뾰족한 지팡이에 찔려

우연히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개구리는 욕계 천상의 33천의 천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개구리의 의식이 천인의 몸을 따라간 것도,

몸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과법에 따른 것입니다.

그 개구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충만한 마음으로 33천에 새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이 옮겨 간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환생이라는 것도 철저히 부정됩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개구리라는 과거 생의 죽음의 마음이 선행하는 원인이 되어

천인의 재생연결식이란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천인의 재생연결식은 개구리의 죽음의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영혼이나 의식이 한 존재와 다음 존재에서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인의 의식과 개구리의 의식이 하나이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숙지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의식으로 옮겨 가는 영혼이나 의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렸듯이 의식은 일시적이며,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동일한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죽어서 몸만 바꾼다는 환생의 사견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이것은 힌두교식의 아트만에서 나온 사견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바로 진아, 주인공이 생깁니다.


이와 똑같이 화원정사의 기증자로 알려진 위사카는

죽어서 도솔천의 왕비인 수니미따가 되었습니다.


앞에 든 예와 같이, 위사카의 의식은 도솔천의 왕비인

수니미따의 몸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선행한 위사카의 죽음의 마음으로 인하여 태어남이라는 결과를 받아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이는 단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생의 의식이 다음 생의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이나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상견(常見)에 해당됩니다.

한 존재의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는 것은 단견(斷見)에 해당됩니다.

이들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도와 과로 인도하는 중도(中道) 뿐입니다.

이 중도가 8정도이며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견이라는 형태로 장애와 방해물이 있으면 결코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도과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조차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행자 여러분 !

우리가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듯이 매순간의 마음도 변합니다.

지혜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하는 마음으로 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합니다.

특히 몸이 변하듯이 그 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음도 함께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이런 무아를 지혜로 알 때만이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은 실로 가장 큰 범인입니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바른 제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차치하고 여러분들은 고통뿐인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생명이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물이 조건에 따라 수증기가 되고, 얼음이 되고, 눈이 되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우유와 같습니다.

우유가 치즈가 되고, 아이스크림이 되고, 빵이 되고, 요구르트가 됩니다.


이렇듯 생명은 조건에 의해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에  결코 자아가 없습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만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연기의 원인과 결과가 주는 지혜를 얻어야하겠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지혜가 없으면 다음 단계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의 바탕 위에서만이 위빠사나 수행의 현상들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우리는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그 원인과 결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안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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