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1

通達無我法者 2011. 2. 22. 22:3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아픈 것은 몸이지 마음이 아닙니다.


몸은 마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으로

마음이 아프면 몸이 즉각 아프게 됩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몸이 아프면 즉시 마음이 아프게 되는 것입니다.


아플 때 통증을 없애려고 하면 탐욕이 일어나서

몸과 마음이 더 긴장하게 되고 고통이 가중됩니다.


몸은 육체적 현상이고 마음은 정신적 현상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몸에서 알아차릴 현상은 단단함, 부드러움,

그리고 수분, 뜨거움, 차가움, 진동이라는 4가지 요소입니다.

몸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4가지 대상으로 보면

단지 그것들은 대상일 뿐이며 괴로움과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계속해서 사념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행처에서 몸만 알아차린 것은 아닙니다.

느낌과 마음의 의도와 법을 보는 수행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아랫배의 풍대를 주 대상으로 하는 수행을 했기 때문에

이것을 신념처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몇 년 간 신념처 수행을 하다가

다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곳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다시 몇 년 동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하고

오직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전력했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조금씩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큰 스승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큰 스승님께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해서 그렇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수행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던 것을 알고

다시 균형을 잡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 뒤에 큰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나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만 말하는데

사실 나는 신수심법 사념처를 하는 수행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저희 스승님들은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주 대상으로 하시면서도 사실은 모든 것들이 균형된 사념처 수행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저희는 큰 스승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만 못 박아서 그렇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4가지 대상이라는 것은 수행의 기본적 구성이고

그 중에 어느 쪽으로 좀더 집중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염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염처의 각 장 끝에 두 번째 단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위의 세 가지 요점이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들 세 가지 요점들을 확실하게 숙지하기 전까지는

단지 알아차림만을 의미하는 염처에 불과할 뿐이며

단지 이런 알아차림만으로는 위빠사나의 좀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진지한 노력을 하고도

알아차림이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집중의 상태에 머물러

헤매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일정한 단계인 집중을 이루기까지에는 분명히 이런 마음의 상태가 필요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염처의 각 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염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는 수행자가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

들숨,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린다는 구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의미는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만 있다고 하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의 마지막 단락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법에 대하여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탐진치가 개입되지 않게 그냥 단순히 대상으로 삼아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냥 몸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의 몸을 그냥 있는 몸으로 보지 않습니다.

크다, 작다, 예쁘다, 밉다, 가볍다, 무겁다, 하는 어떤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게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나의 몸’ 이라고 하는 유신견이 생기지 않습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 몸, 네 몸, 내 자식의 몸, 누구의 몸이라고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봅니다. 이것들은 모두 관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볼 때만이 유신견으로 보지 않습니다.


셋째, 몸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서 집중력을 기르게 됩니다.

이 말은 몸을 알아차릴 때 단지 몸만 알아차려야지

망상을 하거나 다른 것을 하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분열현상이 생겨서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넷째,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모든 움직임은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냥 몸을 몸으로 볼 때 차츰 집중력이 생기면 그 몸이 움직이는 것이

우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과,

또 들었으면 놓는다는 원인과 결과가 연속적으로 지속된다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다섯째, 이렇게 알아차릴 때 대상을 어리석음 없이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대상을 모두 어리석음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선입관, 고정관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단지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미혹하지 않은 상태로 지혜를 가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위 본문에서 ‘지낸다’ 라는 단어는 빨리어의 ‘위하라띠(viharati)’를 번역한 것입니다.

위하라띠는 거처, 머무는 곳, 사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 머문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몸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호흡, 자세, 분명한 앎 등등이 있는데 주석서에 의하면

몸의 자세를 알아차릴 때는 지속되는 시간에 따라서 3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첫째, 오래 지속되는 자세는 가는 것, 서 있는 것, 앉아있는 것, 누워있는 것으로

행주좌와가 있습니다.

둘째, 중간으로 지속되는 자세는 앞으로 가는 것, 뒤로 가는 것,

앞으로 옆으로 바라보는 것, 구부리고 펴는 것, 이상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짧게 지속되는 자세는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상 몸을 알아차릴 때 어느 자세이거나

계속되는 시간에 따른 자세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에도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침묵할 때도 침묵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또한 ‘더 높은 지혜와 알아차림을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 알아차림이 확립된다.

이제 그 갈망과 그릇된 견해에 의하여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지낸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수행자가 통찰력을 점차 계발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시점에서 위빠사나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몸, 느낌,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또한 나는 수행한다. 혹은 수행하는 것은 나다, 내 집중력은 매우 좋다,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은 매우 만족스럽다, 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이상이 수행을 하는 목표와 결과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나’ 라고 하는 유신견이 사라지고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비로소 법을 보게 됩니다.


‘집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의 세상에서 그는 어떠한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제 수행자는 더 이상 몸, 느낌, 지각과 행,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나, 나의 몸, 나의 느낌 또는 나의 마음이라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라고 말씀하신

이것이야 말로 수행자가 몸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바른 길입니다.


오늘날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완성하지 못하고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염처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위빠사나의 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에 의해서만이 열반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생멸을 보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의 도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지혜를 보아서 무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상을 앎으로서, 비로소 바른 견해의 길로 들어서서

수행이 날로 발전해서 궁극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 주제는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알아차림의 확립을 다음 3가지 단계로 나누셨습니다.


첫째,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알아차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둘째,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에서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로 가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의 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반을 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성숙되면 소멸을 봅니다.

그래서 탐진치, 이 번뇌가 소멸된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일어난 대상, 예를 들면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이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정시키는 것을

알아차림의 첫 번째 확립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몸, 느낌, 마음, 법이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을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 두 번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본격적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설명은 조건지어진 현상에 대한 지혜,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혐오스럽다는 것을 알아서

알아차림의 확립을 이끄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을 소멸시키는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세 번째는 업의 형성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에 열반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빨리어 ‘아누싸띠’ 는 기억,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마타로 분류되는 반면,

‘아누빠싸나’ 는 알아차림,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통찰하는 수관으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됩니다.


이와 같은 통찰을 통하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무상, 고, 무아로 아는 지혜가 없으면 결코 위빠사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위빠사나를 공부하시면서 접하게 되는 두 가지 수행에 대한

분류의 기준을 아셔야 되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누싸띠’ 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누빠싸나’ 는 알아차림과 함께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대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근본집중에 의해 선정의 고요함을 얻지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은 통찰지혜가 생겨서

무상, 고, 무아를 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이상 ‘아누빠싸나’라고 아시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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