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4

通達無我法者 2011. 2. 24. 21:1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차별을 일으켜서 탐욕과 성냄이 일어납니다.

마음을 감각기관에 두고 대상을 알아차리면

고요해지고 지혜가 나게 되어 관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든 대상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일하는 마음의 뿌리를 보아 원인을 알게 됩니다.


볼 때는 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하며,

들을 때는 듣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를 맡는 마음을 알아차려하며.

맛을 볼 때는 맛을 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이 접촉할 때는 접촉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며.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로 내서, 일하고 있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16장 심념처의 중요성>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논장의 분별론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지나치게 분별하지 않는

심념처 수행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 청정의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유신견이 강한 사람, 내가 누구다, 또는 무엇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심념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유신견이 강하면 결코 윤회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것은 사견의 성향을 가진 지성적이지 못한 수행자가 도를 얻기 위해서는 

간결하고 꾸미지 않는 심념처가 적합하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해보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효과가 없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세 번 이상 알아차리기가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심념처 수행을 해서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전면에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도록 하면 쉽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같은 호흡도 몸에 일어난 호흡을 알아차리면 신념처이고.

호흡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수념처이고,

호흡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심념처이고,

호흡을 무상의 법으로 알아차리면 법념처입니다.


삼장에 정통하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빨리어 경전에 비추어 보고, 삼장과 주석서에 입각해서

오늘날 수행자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복잡하지 않고

간단명료한 심념처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여기서 비록 심념처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다른 세 가지의 염처(念處)의 알아차림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신선한 라임 원액과 설탕, 소금, 물이 들어 있는 라임쥬스와 같습니다.


이처럼 대상으로 하는 염처(念處)만큼 두드러지거나 명백하지는 않을지라도

나머지 세 가지의 염처 또한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상응하는 법으로서 함께 존재하며 일어남과 사라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심념처 수행을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신념처, 수념처, 법념처 수행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가 모두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상응하는 법이란 오온이 따로 떨어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용하면서 서로 되먹임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이 서로 다르지만 함께 모여서 작용을 합니다.

몸의 요소인 지수화풍도 각각의 느낌이지만

사실 함께 작용하는 것도 바로 상응하는 법입니다.


불교는 하나로 보는 시각과 전체로 보는 시각,

이 두 가지가 모두 작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방법에 대한 경>에서

대장로 사리뿟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서 쉽지가 않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은 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심념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자를 경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마음이 읽힐까봐서 두려워하는 경우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설령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관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알아차리지

배척을 하거나 경멸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탐심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탐심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때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으며,

사라질 때에도 또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마음이 증인입니다.


미얀마의 많은 불교도인들은 마음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옮겨간다거나.

환생을 한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믿고 있습니다.


수행자여러분!

불교에서 말하는 재생은 환생이 아닙니다.

재생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영혼재래나 환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거나,

대범천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음 존재로 옮겨 오는 불변하는 영혼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재생은 전에 있던 마음이 뒤의 마음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고,

전에 있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상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의 마음은 끝나서 다시 일어나지 않고 사라지며,

죽을 때에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므로

이것을 재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환생은 같은 마음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자여러분! 어떤 이들은 한 존재가 죽을 때

몸을 떠나는 것이 영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죽을 때 영혼이 있어서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윤회를 하지만 재생을 하면서 윤회를 하지

같은 마음이 윤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관의 차이입니다.


영혼은 항상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절대불변의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보시고 최상의 지혜가 나서 보니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 무상이 현대과학에서 진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현대과학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진동한다는 것을 수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입니다.


부처님께서 물질의 느낌이 변하는 것을 보시고

물질을 아는 그 마음을 혜안으로 지켜보시니

물질뿐만이 아니고 마음도 계속 변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변하는 것이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도 함께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무상인데, 마음이 변하는 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같은 마음이 아닌 것을 이때 지혜의 눈으로 보신 것입니다.


역대 모든 선지자들은 이런 수준의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으로 안 것입니다.

여기 이러한 발견이 중요한 분수령이 됩니다.


변하는 마음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존재를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 생긴 것이며,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서

초월적 존재가 있는 것으로 사유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초월적 존재도 변한다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신도 태어나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천인이지 모든 것을 창조한 절대적인 신은 아닙니다.

또한 천지를 창조한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모두 마음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으로 만들어 진 견해인 것입니다.

또한 오래 동안 내려온 인습적 문화적 전통이라서 

의심할 여지없이 그냥 수용한 것입니다.


마음은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며 자아를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 실체가 있고 자아를 소유하여

진아, 참나, 주인공이 만들어 집니다.


자아가 없다면 갈애를 일으킬 필요가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으니 신에게 귀의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있고 참나가 있고 주인공이 있으면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갈애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윤회가 끝나는 해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아냐 진아냐에 따라 해탈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시기 위해서

바로 무아를 설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아의 지혜로 아신 마음이란 하나의 점, 점 ,점으로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과보의 힘에 의해 굴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있고 항상하다는 견해로 본 마음은 점, 점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고

일직선으로 끊어지지 않고 연결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점과 선의 차이로 마음의 실체를 아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상좌불교의 교리가 힌두교의 교리와 접목되면서

전혀 반대의 논리인 진아가 등장하면서 불법이 왜곡된 것입니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유신견이고,

이 유신견이 있다면 영원히 윤회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해탈의 자유가 없습니다.

해탈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곡사야도나 지금 말씀드리는 제가 이점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불법(佛法)이 아닌 것으로서는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불교도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불법(佛法)으로 돌아와서 해탈의 자유를 얻고

부처님의 제자로써의 본분을 지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해탈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겠지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가 있어야 하며,

신수심법 사념처가 아니면 결코 바른 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기의 유충이 번데기가 되어도 계속해서 성충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이 

거주할 빈자리가 없으면 영원히 몸에 매달려서 떠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조상 대대로 깊이 뿌리 박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영혼이 옮겨가서 환생한다고 하는 믿음은

사견(邪見)일 뿐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는 마음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으로 알고

죽을 때 오직 몸만이 사라질 뿐이라고 하는 그릇된 믿음 때문에 유지되어 온 것입니다.


모기의 유충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성충이 되면,

성충은 유충도 아니며, 번데기도 아닙니다.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거듭 난 것입니다.

유충은 유충이고, 번데기는 번데기이고, 성충은 성충입니다.

이것들이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충에 번데기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알이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 새가 됩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알과 새는 다른 것 입니다.

이들은 아직 바른 연기법의 지식을 얻지 못한 까닭에

마음이 무상하고,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고,

일어난 곳에서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하고 즉시 사라지며,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연속적인 두 순간에 동일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 심념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불자들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려진 마음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장로 모곡사야도께서는 대중들에 대한 깊은 자비를 가지시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사악도로 떨어질 위험에서 구제 받으려면

사견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중요성을 항상 강조 하셨습니다.


수다원의 첫 번째 과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사견의 제거가 필요합니다.


사견이 머무르고 매달려 있는 곳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심념처 수행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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