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3

通達無我法者 2011. 2. 23. 23:3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앎이라고 합니다.

앎은 아는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알아차릴 대상이 몸이 아닌 마음입니다.


앎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으며,

둘째, 몸이나 느낌이나 호흡이 사라진 것을 아는 앎을 말합니다.


첫 번째,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안 되는 것을 아는 앎을 하거나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응용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수행을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몸이나 느낌이나 호흡이 사라진 것을 아는 방법은

집중력이 생겨서 느낌이나 호흡이 사라지는 상태에 이르면

몸이 소멸되므로 이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앎을 합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먼저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다음에 호흡이 사라지게 되는데 두 대상은 있지만

미세해져서 알아차릴 수가 없어 앎을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새로 내야합니다.

마음을 새로 내지 않고서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는 것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나중에 생긴 마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 했다면 이미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았어도 알아차리려 했다면 이미 안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느낌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 수가 있으며

기억을 할 때 기억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으며

행동을 할 때 행동을 하게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6장 심념처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왜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경전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강조하여 반복해서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부처님의 말씀을 숫자별로 모은 경전입니다.


“첫째,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융통성 있고 유연한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둘째,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셋째,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커다란 소득과 이익을 주는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넷째,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이로운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다섯째,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더한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다른 어떤 방법도 알지 못한다.”

이상 부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얻는 이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융통성이 있고 유연해 집니다.

쉽게 적응할 수가 있습니다.

커다란 소득과 이익을 줍니다.

그리고 이롭습니다.

또한 행복과 즐거움을 줍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상과 같은 이익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익은 번뇌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마음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괴로움의 온상입니다. 또한 즐거움의 온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는 마음과 일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났다면

바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합니다.


물론 지혜가 나기 전까지는 순간적인 소멸이지만

일단 소멸이 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면 순간적으로 번뇌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은 수행을 하는 마음이고

잘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수행을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잘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의 결과는

이와는 반대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지 않는 마음은 고요함과 지혜가 계발되지 않아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융통성이 없고 유연하지 못합니다.

둘째, 쉽게 적응할 수 없습니다.

셋째, 소득과 이익이 없습니다.

넷째, 여러 가지 이로움이 없습니다.

다섯째,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상이 수행을 하지 않을 때에 마음이 받는 불이익입니다.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意]이 모든 법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들에 앞서간다고 할 때의 마음은

감각기관의 하나로서 ‘의(意)’를 말합니다.

의(意)를 빨리어로 마노(mano)라고 하는데

미세한 느낌의 사유에 해당하는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의는 감각기관의 하나로 안이비설신의 중에서 의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말할 때는 3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첫째, ‘심’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찌따(citta)’ 라고 합니다.

둘째, ‘의’ 로서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마노(mano)’ 라고 합니다.

셋째, ‘식’ 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윈냐나’ 라고 합니다.


첫 번째의 ‘심’ 은 마음 심(心)자입니다. 이 심은 심소(心所)와 구별할 때 쓰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별할 때 심(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마음의 작용은 수상행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식과 수상행을 포함한 말입니다.


두 번째, 의(意)는 6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라고 할 때 의(意)입니다.

이것이 생각입니다.


세 번째, 식(識)은 오온의 색수상행식을 말할 때 식(識)입니다.

이때의 식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상의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다르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의 마음입니다.

상좌불교에서는 마음을 이상 3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모든 법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라고 할 때

‘법들’과 ‘그들’은 색수상행식을 말합니다.

주인이라는 말은 자아가 있는 실체를 말하지 않고

앞서서 이끄는 주체를 말합니다.

이는 먼저 마음이 있어서 색수상행식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앞서서 이끄는 이 마음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마음이 똑같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라는 말은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앞선 원인에 의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응보를 표현한 말입니다.


이 법구경 게송은 아라한이었던 짝꾸빨라가 전생에 의사를 할 때

환자를 눈멀게 한 과보로 인하여 장님으로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게송입니다.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은 마음[心]에 의해서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서 이끌려 간다.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의 힘을 쫓아간다.’


여기서 ‘세상은 마음에 의해서 인도된다’ 고 할 때의 마음은 ‘심’을 뜻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은 심소와 구별되는 마음인데 심소를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이때의 마음을 왕이라고 하며 이때의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을 신하라고 합니다.

왕과 신하는 밀접한 관계이듯이, 왕은 뒤에서 지도 감독을 하고

신하가 모든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心)을 빨리어로 ‘찌따’ 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 그림, 회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그림이라는 것은 마음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용어입니다.

마음은 항상 여러 가지 종류의 그림을 끊임없이 그립니다.


신하가 여러 가지의 행동을 하면 왕은 그것을 받아들여서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의 상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마음을 그림 또는 회화라고 합니다.


심(心)은 의(意)에 비해 더 정신적인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며

본질적인 것으로서 정서 또는 감정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서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서 이끌려가고,

마음이란 법의 힘을 쫓아간다고 할 때, 모든 것은 마음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몸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운 뒤에

집중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심념처 수행을 하는 지도자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질을 보는 것처럼 알기가 어려워서 집중이 필요하며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마음은 모든 행위에 앞서가는 것이며, 모든 현상에 앞서 일어납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행위는 마음이 협력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던 악한 행위를 하던 마음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떠한 행위도 먼저 의도하지 않고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도란 오직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제어될 때 우리의 몸 또한 제어됩니다.

마음이 자유롭고 통제되지 않으면 육체적인 행위 또한 아무런 제약 없이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제어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하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 의도가 바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져서 그 실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가 눈꺼풀 하나를 깜박거리는 것도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일어나는 마음이기 때문에

눈꺼풀 하나 깜박거리는 그 마음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몸은 저 스스로 하게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은 장님이고 마음은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저 스스로가 움직일 수 없지만

앞서서 이끌기 때문에 몸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주인은 주인공이나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앞서서 이끄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자아의식, 나 또는 개체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사견이 머무르는 곳이며,

또한 유신견이 자라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 자아라고 하는 망상은 우리의 마음 뒤에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서

어떤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 행위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런 마음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개아, 자아의식, 진아, 그런 것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신견이라고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병이 자라는 곳이며

마음은 유신견이 자라는 곳입니다.


몸과 마음은 고통의 온상이 될 수도 있고,

지혜와 기쁨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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