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1

通達無我法者 2011. 2. 28. 02:1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이란 반드시 스승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초월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으며

항상 자신의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정신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서

누구도 혼자서는 바른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른 스승의 가르침은 바른 길로 갈 수 있지만

바르지 못한 스승의 가르침은 잘못된 길로 갑니다.


정법(正法)과 바른 스승을 만나서 정법을 계승하는 것은

자신이 쌓아온 선업의 결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의 과보가 적으면 정법과 바른 스승을 만났어도

따르지 못하며 결국 수행을 포기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오직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쫓지 않기 때문에 결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제 19장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음을 121가지로 분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121가지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세간적 마음입니다.

세간적 마음은 욕계의 마음 54가지, 색계의 마음 15가지, 무색계의 마음 12가지입니다.

그리고 출세간의 마음은 출세간의 유익한 마음 20가지, 출세간의 과보의 마음 20가지입니다.

이상 121가지의 마음은 마음의 종류를 모두 설명한 것이지

수행자가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이든 하나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분석이 필요한 것이지

121가지의 마음을 모두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일 수행자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열반의 입구로 가는 바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해탈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반에 이르기 전에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먼저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지고

그 뒤에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마음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열반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을 때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의식이 일어난 것으로

수행자는 이때 눈에 의식이 일어났다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는 귀에 의식이 일어나고,

이때 귀에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코에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맛을 볼 때도 혀에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에 가려움이나 즐겁고 불쾌한 감각이 느껴질 때는

몸에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여러분!

이 말은 먼저 일차적으로 눈으로 본 것을 알아차리고,

이차적으로는 눈으로 알아차린 그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두 번째 알아차림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똑같이 일차적으로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차적으로 귀가 알아차린 그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을 심념처 수행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똑같이 코가 냄새를, 혀가 맛을, 몸이 접촉한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린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먼저 볼 때는 본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지금 보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들을 때는 먼저 듣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지금 듣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냄새가 날 때는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지금 냄새 맡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맛을 볼 때는 맛을 아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지금 맛을 아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몸이 접촉할 때 접촉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지금 접촉한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처음에는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차츰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처음엔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문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대로 실천하면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장이 있다고 해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은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새로 내지 않기 때문에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지속적인 지도를 받지 않아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야 조금씩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렇게 하기 어렵지만, 일단 알아차리고 나면 매우 빠르고

신속한 효과가 있으며, 잘못된 것의 뿌리를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의식은 매순간 하나씩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의식이 두 가지 내지 세 가지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합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통찰력이 점점 더 명확해질수록 알아차림은

일어남과 사라짐에만 집중이 됩니다.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의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알아차리는 시간도 점점 길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점에서 수행자는 통찰력을 가지고

탐심, 진심, 치심, 무탐심, 무진심등 어떠한 마음이든 일어났다가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제 어떠한 의식도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게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의 수명은 하나 내지 두 순간입니다.

여기서 하나 내지 두 순간을 영어로는 one/Two 라고 합니다.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 두 순간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은 한순간에 하나만 존재합니다.

이 한순간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매우 빠른 순간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경전과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 두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일어남이라는 시작이 있고, 소멸하는 사라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고 하는 한순간의 마음과

사라짐이라고 하는 또 한순간의 마음이 있어

기본적으로 하나의 마음이 완성되고 다시 사라집니다.


상좌불교의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한순간의 마음을 두개라고 하지 않고

발생, 지속, 소멸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또 설일체유부에서는 발생, 유지, 쇠퇴, 소멸의 네 순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마음이 소멸하고 저 마음이 일어난다’ 하는 경전의 구절은

이미 사라진 한 마음의 뒤를 따라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이 주시하는 마음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마음이 소멸하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소멸을 아는 것입니다.


‘사라진 후 존재하지 않음으로 무상이라고 한다’는 구절은

마음은 일어나자마자 즉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어떤 마음을 알아차리든 그는 오로지 무상, 즉 마음의 사라짐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마음이 사라진 것을 보지 못한다면

무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수행자는 아직 마음이 항상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하여 오온의 본성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 말은 무상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의 변화를 보라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깨달음의 과정에서 먼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을 압니다.

그리고 무상함으로써 괴로움이 뒤따라옵니다.

이 괴로움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결국에는 무아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의 지혜의 시작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통찰력을 가지고 무상을 보고 깨달으면

이제 고(苦)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어 위빠사나를 통해 고(苦)를 보고 깨달으면

이제는 무아(無我)라고 하는 깨달음을  또한 얻게 됩니다.


무상, 무상, 하고 아무리 읊어 보았자무상을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매순간 수행자는 자신의 오온이 항상 보여주고 드러내고 있는 무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상은 소리를 내어 암송하거나 기도문처럼 읽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인 무상법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온은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항상 사라지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것을 오로지 위빠사나의 통찰지혜를 통해서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관념으로 보지 말고, 무상을 다른데서 찾지 말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른발 왼발이나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봐야 무상인지 모릅니다.

그저 대상에 집중하여 고요함이 온 뒤에 지혜가 나서 비로소 무상이 보입니다.

고요함이란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무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마타 보다는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 필수적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마음의 길이라고 불리는데 이 길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렇듯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특성을 가진 오온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것을 여실지견이라고도 하고 빨리어로는 야타부탐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실재하는 것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온에는 마음의 길과 몸의 길이 있습니다.

마음의 길은 생명이 있는 한, 윤회를 끝내지 못하는 한,

영원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길을 갑니다.

몸의 길도 생명이 있는 한, 윤회를 끝내지 못하는 한,

영원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길을 갑니다.

마음은 마음대로 제 갈 길을 가는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길을 가고

몸은 몸대로 제 갈 길을 가는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길을 갑니다.


이것이 오온의 일반적 특성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지혜를 여실지견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말할 때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혜를 볼 때라야

비로소 여실지견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오온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오온을 가진 실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지혜 뒤에 괴로움의 진리와 무아의 진리가 차례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133  (0) 2011.03.03
12연기와 위빠사나/132  (0) 2011.03.02
12연기와 위빠사나/130  (0) 2011.02.28
12연기와 위빠사나/129  (0) 2011.02.27
12연기와 위빠사나/128  (0) 201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