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7

通達無我法者 2011. 3. 7. 23:4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호흡은 주된 대상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호흡은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몸에 있는 바람의 요소로서 풍대에 속하며

코, 가슴, 배, 몸의 일부, 전면 중에서

강한 것을 선택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코의 호흡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위빠사나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코의 호흡은 선정 수행을 할 때는 표상으로 알아차리며

위빠사나 수행은 들숨과 날숨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호흡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느낌과 함께 있는 대상입니다.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은 풍대로서

움직임이 크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아차리기가 좋은 대상입니다.


몸의 일부에 있는 움직임은

호흡이 미세해져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때

몸의 일부에 있는 진동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몸이 아닌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주시하는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곳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좋으며

상황에 따라 옮겨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에서 배까지 따라가지 말고 한 곳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으니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몸에는 호흡과 함께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호흡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다른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호흡이 나타나지 않으면 몸에 있는 여러 가지 느낌이나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등의 느낌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대상을 잡기가 어려울 때 대상은 중요한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 되었거나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자,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이 무상하다고 지혜로 볼 때

그 고통에 대하여 혐오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에 의한 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조건지어지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위빠사나 지혜를 통해서 이해할 때

수행자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이 고통일 뿐이라고 아는

완전한 혐오가 일어납니다.


그는 더 이상 오온에 대해 갈망하지 않으며

다음 생에 대한 욕망에 불꽃을 지피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 그가 열반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어났다가 곧 소멸한다.

그들의 소멸이 행복이다.”


누구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소멸하는 열반을 지고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오온을 가졌다는 것이고

오온은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번뇌가 소멸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소멸은 열반이고 이때의 행복이 열반입니다.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없고 번뇌가 끊어진 자리라서 지고의 행복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출세간의 최고의 지위로 일컫습니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대상으로 하는 세속의 정신적 상태에서는

출세간의 열반의 상태를 도저히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실로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고 하신 첫 번째 구절은

조건지어지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 속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그들은 일어났다가 곧 소멸한다.’ 는 두 번째 구절은

모든 대상에는 오직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의 소멸이 행복이다.’ 라는 세 번째 구절은

일어남 뒤에 사라짐이 있으며 일어남과 사라짐,

즉 고통의 멈춤과 소멸은 열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제 수행자는 잘 알려진 이 두 개의 빨리어 게송을

단지 부처님을 경배하려는 의도로만 암송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게송은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알아차려야 할 기준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염처경의 어느 부분에서나 사념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아래 구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사라지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것은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내용 중에 일어나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내고,

사라지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는 말씀은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순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말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심과 더불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지혜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까지 설명하신 것입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단순하게 하여

단지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리게 하신 것입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이 하나의 작은 완성이라면

처음에는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리게 하여

수행자의 근기가 자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리다 보면 약간의 집중력이 생기고,

이 집중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짐까지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은 조금만 힘들어도 싫증을 내고 달아나기 때문에

처음 수행을 할 때는 쉽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기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모두 알아차리게 됩니다.


첫 번째 단계의 일어남과 두 번째 단계의 사라짐이 결합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이것을 모두 무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차츰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무상이라는 지혜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연스럽게 지혜가 성숙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특별한 방법이 결코 없습니다.

오직 단순하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현재 한국 명상원에서 경행을 할 때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명상원에서는 경행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일어남 하나 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발의 뒤꿈치가 들리는 것 하나 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마간 발의 뒤꿈치를 알아차리는 것을 계속하다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이제는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발의 뒤꿈치가 들리는 것만 알아차리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발이 바닥에 닿는 것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절반씩 나누어서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좀더 집중력이 생기면 세 번째 단계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한꺼번에 모두 알아차립니다.


다시 말하면 뒤꿈치가 들리는 것부터 바닥에 닿는 것까지

움직임의 전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단계적인 집중을 하면

좀더 용이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으며 집중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편도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방편이 있어도 본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도 원하는 자의 것이지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 중에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기준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이며 긴요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이해 없이 보내는 100년보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통찰지혜를 얻은 단 하루의 공덕이 높습니다.

이 말은 수행을 하지 않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수행을 하고 사는 단 하루가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법구경의 구절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보편적 특성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괴로움이 있는 것과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무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평범한 비구와 네 분의 아라한들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관념과 실재에 대한 문제입니다.

누구나 사물을 고정관념으로 보지,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에 유신견이 작용합니다.


네 분의 아라한은 일관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했는데,

평범한 비구는 아라한들이 말하는 실재를 보지 않고

관념적인 숫자만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고도 못 보는 범부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평범한 비구와 네 분의 아라한의 차이는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차이입니다.


범부는 실재를 모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지혜를 가진 아라한이 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는 것이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상태만이 모든 번뇌를 여읜 자유를 얻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밀 공덕을 쌓고 난 다음에

지혜가 나서 바라지 않는 바라밀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바라지 않는 최고의 공덕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두 번째 부처님의 위대한 두 제자의 문답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시던 어느 날 꼬티까 장로가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뿌따 장로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사리뿌따 형제시여,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범부가

수다원도를 얻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리뿌따 장로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오, 꼬티까 형제시여,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닌 범부가 수다원도를 얻기 위해서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품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자 꼬티까 장로께서 다시 질문을 하셨습니다.

“오, 그렇다면 형제시여, 다시 수다원의 도과를 얻은 자가

사다함의 도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리뿌따 장로께서는

“바른 태도를 가진 수다원의 도과를 얻은 자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품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꼬티까 장로는 다시 사리뿌따 장로께 사다함과 아나함은

다음에 더 높은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사리뿌따 장로께서는 앞서와 같이 다음에 높은 단계를 얻기 위해서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성품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또한 아라한마저도 과를 성취한 지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지속하고 나면, 생멸의 법이 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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