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5

通達無我法者 2011. 3. 4. 22:2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몸에는 4대의 요소가 있으며

4대를 알아차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호흡, 몸의 자세, 분명한 앎, 몸의 부정관이 있으며

또한 네 가지 요소라는 중요한 대상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물질은 모두 4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지대, 물의 성분인 수대,

뜨겁고 차가운 화대, 진동하는 풍대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몸은 관념이며 인식할 수 있는 몸은 실재입니다.

위빠사나는 실재를 통하여 성품을 인식하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자신의 몸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몸에 있는 4가지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을 4대의 요소로 알아차리면 내 몸이라는 인식이 해체되고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자아가 소멸됩니다.


수행의 목표는 대상의 성품인 무아를 알아 집착을 끊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서 자아의 소멸이 필요합니다.


마치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팔 때 소라고 팔지 않고

갈비, 안심, 등심, 꼬리, 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자동차라고 말할 때는 내 차라고 말하게 되지만

사실은 엔진, 타이어 등은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나의 몸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알아차리면

대상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4대로 보면 실재를 보는 것이라서

느낌으로 인해 생기는 환청과 환시가 없습니다.


또는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4대로 보면 어떤 두려움이나 의문이 없어지고

상상을 하게 되거나 헛것을 보지 않습니다.

환시로 인해서 야생짐승, 초자연적인 존재, 도깨비, 산신령,

귀신과 같은 존재를 상상하여 그의 노예가 됩니다.


몸의 느낌을 4대로만 보면 상상력이 일어나지 않아

헛것을 보지 않게 되어 정신질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몸을 4대 요소로 보면 우선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니고

단지 그것은 느낌일 뿐이며,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환청과 환시로 새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몸에서 4대를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아홉 번째 해탈을 원하는 지혜 다음에

열 번째 지혜는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열한 번째 지혜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입니다.


열한 번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를 쌍카루뻬까냐나라고 해서

평등심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열두 번째 지혜는 적응의 지혜입니다.

열세 번째는 성숙의 지혜입니다.

열네 번째는 도의 지혜입니다.

열다섯 번째는 과의 지혜입니다.


바로 열네 번째와 열다섯 번째가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열반을 의미하는 도과의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리고 열여섯 번째는 회광반조의 지혜입니다.

마지막 회광반조의 지혜는 지나온 것을 모두 돌이켜보고 아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도과의 지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계적으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한 걸음에 도과의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바라는 것 없이 부단히 노력하게 되면 언젠가 그 결과로서

어느 날 홀연히 여러분 앞에 도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성자는

우주의 제왕이나 천계의 전륜성왕보다 더 높은 지위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자란 사악도로부터 벗어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수다원은 사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성자란

6가지 극악한 죄를 행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수다원은 나병환자나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혹은 불구자로 태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길어도 일곱 생 안에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여

궁극에는 열반을 얻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자가 한번이라도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면 작은 지혜가 완성된 것입니다.

아직 아라한의 지혜는 나지 않아서

모든 번뇌를 다 끊지는 못했지만 끊는 방법을 알았고

이제 그것을 더욱 자세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면 수다원이라고 하며

수다원이 되면 성자라고 합니다.

성자는 성스러운 진리를 안 것을 말합니다.

일단 성자가 되면 여섯 가지 극악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 세계에 태어날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가지 극악한 죄는 첫째, 어머니를 죽이는 것,

둘째, 아버지를 죽이는 것,

셋째, 아라한을 죽이는 것,

넷째,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

다섯째, 부처님의 몸에 피가 나게 하는 것,

여섯째,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쫓는 것,


바로 성자가 되면 이 여섯 가지 극악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떨어지지 않는 그러한 것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옥에 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각각 자기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수다원이 되면 이런 여섯 가지 극악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다른 스승의 가르침이란 수다원이 되면

해탈로 가는 길인 위빠사나 도 이외의 길은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진리를 안 이상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이 수행, 저 수행 찾아서 방황하지 마십시오.

이제 위빠사나 수행을 배워서 한발 더 가까이 도과에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수행자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면

그러한 지혜는 바로 지혜의 도이며 이것은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갈애와 교만, 사견이 제거됩니다.

따라서 연기는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괴로움과 근심, 고뇌가 일어날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12연기가 끝에서 끊어집니다.


연기는 시작에서부터 끊어질 수 있고, 중간에서 끊어질 수 있고

이처럼 끝에서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사성제에 의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이며,

이로 인해서 일어난 지혜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길에 대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도제입니다.


갈애와 교만, 사견이 소멸되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진리가 멈추는 것으로

생과 노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인 멸제에 해당이 됩니다.


따라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알아차림은

사성제를 모두 포함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단 하루라도 수행을 늦춘다면

그는 그만큼의 기회를 잃는 것으로 언제 어떠한 고난이 닥칠지 모릅니다.

더욱이 과중한 압박을 받는 시대인 요즘 어떠한 위험과 질병이 도사리고 있을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다음 생에 사악도로 떨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미리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할까요?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오직 유일합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번뇌의 근본원인이 바로 무명과 갈애입니다.

그런데 이 무명과 갈애가 잘못된 사견인 유신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바로 이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려야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무아를 알아

비로소 유신견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유신견이 제거되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며 윤회가 비로소 끝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에 의해서 연기가 끊어지는 방법은 중간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갈애가 일어났을 때 갈애가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면

단지 느낌의 상태에 머물러서 갈애가 소멸합니다.

그러면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집니다.

갈애가 끊어지면 집착이 끊어지고 업이 생성되지 않아 미래에 태어남이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이익입니다.


이렇게 갈애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지혜가 있으면

지금 이후에는 무명으로 시작하지 않고 지혜로 시작합니다.

무명과 갈애는 한 몸이라서 갈애가 소멸되면 무명도 함께 소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부터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집니다.

이렇게 지혜로 살게 되면 연기가 시작부터 끊어져서

단지 오온만 있을 뿐이지 오취온이 일어나지 않아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산 결과로 죽을 때

새로운 원인이 일어나지 않아 연기가 끝에서도 끊어집니다.


이처럼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가 모두 소멸하여 열반에 들며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갈애를 일으키면 끝없는 윤회가 회전합니다.


결국 깨달음이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느낌이고, 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위빠사나가 상좌불교의 수행법이라는 이유로

또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수행방법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무지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저마다 자기가 하는 수행방법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이처럼 경전에 기록된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과거의 무지로 갈 것인가, 미래의 지혜로 갈 것인가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여러분!

죽는 순간의 마지막 마음인 죽음의 의식은 일어나서 사라지고 없지만

그 순간의 과보심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마음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이것이 재생연결식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이 죽음과 재생의 순환을 옮겨 다닐 때

마음속에 축적되어있는 번뇌도 옮겨 다닙니다.

현재의 마음은 현재 이전의 번뇌가 옮겨 온 것입니다.

또한 미래의 마음은 현재의 번뇌가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알아차리면 과거의 번뇌가 사라지며

그래서 미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는 쉽게 소멸되지 않지만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일시적으로 소멸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약해지면 자리에 비켜나 있던 번뇌가

다시 나타나서 더 큰 번뇌로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람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축생에게는 축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축생의 마음이 아니고 축생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축생에게는 축생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이 축생의 길이 아니고, 축생의 길이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면서 축생이 되지 않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수행을 시작하셔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137  (0) 2011.03.07
12연기와 위빠사나/136  (0) 2011.03.07
12연기와 위빠사나/134  (0) 2011.03.03
12연기와 위빠사나/133  (0) 2011.03.03
12연기와 위빠사나/132  (0) 201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