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6

通達無我法者 2011. 3. 7. 23:2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걷는 수행을 경행이라고 하며 경행의 이익은 매우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일상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까지

모든 것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나무를 계속 비벼야 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수행도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지혜가 납니다.

그 중 경행은 일상생활을 할 때

하나의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발전하려면 좌선이나 일상의 알아차림과 함께

반드시 경행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경행을 하면 몸에 지구력이 생겨서 이동이 자유로우며,

걸으면서 생긴 힘은 좌선할 때 지구력을 갖게 합니다.


처음부터 오랜 시간 좌선을 하면 피로가 누적되고

건강을 해치게 되므로 알맞은 시간 안배가 필요합니다.

경행으로 몸을 움직여서 굳어진 근육을 이완하고

몸에 활력을 주면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천천히 걸으면서 자세히 알려고 힘을 기울이면

오히려 상기의 위험이 오고 앉으면 졸릴 수도 있습니다.

경행은 소화가 잘 되게 하고 식곤증을 없애 줍니다.

소화가 안 되면 집중이 안 되고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걸으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집중력이 생기는데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은 쉽게 깨지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경행으로 생긴 집중력은 맑은 정신을 갖게 하고

가벼운 몸을 만들어서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합니다.


경행은 자신의 나태함을 스스로 극복하게 하는데

움직이기 싫어하는 수행자의 게으름이 치유됩니다.

수행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정진력인데

바로 이 정진력은 경행을 통해서 배양 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20장, 청정에 대한 문답입니다.


청정은 더럽거나 속되지 않고, 맑고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은 계행이 조촐하여 죄가 없이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청정을 얻기 위해서 안,이,비,설,신,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색,성,향,미,촉,법이란 감각 대상이 부딪힐 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청정이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그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청정한 알아차림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단순하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순간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해져서 차츰 대상의 성품을 보는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상관없이

어떤 대상이나 관용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청정한 상태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걸림이 없어집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청정한 알아차림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스스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향을 가질 때 수행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엇이 싫다. 나는 무엇이 좋다’ 라고 하는 선입관은 유신견으로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째, 어느 평범한 비구와 네 분의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 열반을 실현하기를 열망하는

어떤 비구 한 분이 아라한에게 다가가서 질문을 했습니다.


“존자시여! 존자께서는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지혜를 청정하게 하십니까?”

즉, 분명하게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께서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 오, 형제시여! 여섯 가지 감각 기관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청정하게 합니다.

형제시여! 분명하게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감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이란 눈, 귀, 코, 혀, 몸, 마음입니다.

정신과 물질은 단지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일 뿐이고,

실재하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들 여섯 가지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라한께서는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 이 평범한 비구는 이러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알아차려야만 하는 것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를 얻는 것의 중요성보다도

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숫자에 대해 더 큰 우려를 한 것입니다.


알아차려야 할 것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다른 아라한께 가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미 아라한의 말씀에는 법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 어휴! 왜 이렇게 숫자가 많아.” 라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을 보지 않고 손을 보는 것’이며

‘실재를 보지 않고 관념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라한에게 가서 질문을 드린 결과 두 번째 아라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 오, 형제시여!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인식하고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대답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는데

역시 알아차릴 것들의 숫자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평범한 비구는 분명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핵심이 아닌 

알아차려야 할 것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첫 번째 아라한께서는 여섯 가지인데,

두 번째 아라한은 다섯 가지를 말했기 때문에

숫자에 걸린 것입니다.

두 번째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그는 다시 세 번째 아라한께 가서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아라한은

“사대 즉, 지, 수, 화, 풍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본성을 이해하고

알아차릴 수 있다면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 우리 몸에 있는 지, 수, 화, 풍의 사대 요소도 사실 그 본성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대답 또한 이 평범한 비구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는 세 번째 대답이 첫 번째나 두 번째 답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고 그는 숫자에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 아! 여섯 가지 보다는 다섯 가지가 좋고, 다섯 가지보다는 네 가지가 좋구나.”

하지만 그는 아직도 네 가지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네 번째 아라한께 가서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네 번째 아라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끝이 소멸하는 법이다.

즉, 어떠한 현상이든 일어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법을 이해하는 자는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비구는 마지막 아라한의 대답에도 전혀 만족하지 못했는데

그는 여전히 그가 두 가지의 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육문이나 오온, 사대가 아니라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바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을 보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의 답변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생멸로 보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두 가지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께 가서 이들 네 분의 아라한들에게 들은 바를 말씀드리고

그 대답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오, 비구여! 일생동안 한 번도 부떼아 나무를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가 마주친 첫 번째 사람에게로 가서 그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부떼아 나무가 검정색이라고 대답 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나무가 불에 타서 쓰러진 뒤에 보았기 때문이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채 그는 다시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부떼아 나무에 대해 물어보았다.

두 번째 사람은 부떼아 나무는 고깃덩어리처럼 생겼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꽃이 피었을 때 나무의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는 세 번째 사람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세 번째 사람은 부떼아 나무는 마치 칼집 속에 들어있는 칼과 같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나무가 열매를 매 달고 있을 때 보았기 때문이다.


이 대답에 또한 만족하지 못한 채 그는 네 번째 사람에게 질문을 하여

부떼아 나무는 넓적한 잎을 가진 반얀나무와 비슷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봄철에 녹색의 그늘 진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았기 때문이다. “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사람이 부떼아 나무를 설명한 것은

각자의 경우에 비추어서 나름대로 모두 옳은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깨달음을 증득한 순수한 통찰력을 가진

네 분의 아라한 또한 각자의 경우에 비추어 모두 옳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이 육문이나 오온, 사대 등

어떤 대상이 아니라 바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안에 일어남과 사라짐 이외의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은 가장 핵심적인 대상으로써

수행자에게 무상의 통찰 지혜를 얻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을 이해함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진리에 대한 통찰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하는 대상을 확고하게 잡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알아차림 없이는

다른 어떤 방법도 완전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위빠사나 수행은

일어남과 사라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은

순수하고 완전한 위빠사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러한 수행 방법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마타 수행은 관념적이고

고유한 특성이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수행을 하면 고요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하는 현상인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이 때 알게 되는 고유한 특성이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말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며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거듭합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을 통해서 비로소 무상이라는 법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수행자들이 처음부터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라는 말은

넓은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무상을 아는 지혜로

경험이 충분한 수행자들이 얻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의 모양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차츰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고 집중이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너무 심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단순히 알아차릴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그 어느 땐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도(道)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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