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34

通達無我法者 2011. 3. 3. 23:1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통증은 혜택입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느낌이 많다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알아차릴 느낌이 많다는 것은 혜택입니다.


통증을 통하여 집중할 수 있고 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몸이 아플 때는 다른 욕망이 사라지므로

오직 아픈 것에만 마음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상태가 됩니다.


통증이 생긴 것은 앞선 원인으로 인한 과보입니다.

수행자가 과보를 받아들이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과보를 거부하면 연기가 회전하여 무명이 계속됩니다.


통증 때문에 아픈 것은 과보심이 일어난 것이며

통증 때문에 화를 낸 것은 과보심에 새로 반응한 것입니다.

위대한 성자들은 과보심에 대해 새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성자들은 원인과 결과가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므로,

수행자도 마지막에는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나타난 통증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매우 좋은 수행의 대상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제 19장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이 교단의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무상한 것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그는 무상을 인식하고, 무상을 경험하면서,

항상 마음으로 해탈하고 통찰지로 직관한다.

그는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번뇌가 없고,

마음을 통한 해탈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얻으며 지낸다. “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항상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마음은 변하고 일시적이며,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통찰을 가지고 완전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제자들은 어떠한 번뇌도 없이

모든 불결한 번뇌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무상의 지혜로 가득 차,

바로 이번 생에서 열반을 실현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괴로운 마음과 괴로운 마음으로 인해 생긴

가슴의 느낌이나 호흡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 때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순간에 괴로움은 소멸됩니다.

괴로움은 이렇게 알아차려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먼저 있던 무상과 따라오는 도(道) 사이에 어떠한 불결한 번뇌도 없으면

7일 이내에 궁극의 깨달음인 아라한의 도(道)를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어떠한 번뇌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마음이 일어날지라도 항상 법이 보여주고 드러내고 있는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와 통찰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번뇌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합니다.

아쉽게도 이것을 실천할 수 없다면 아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한 통찰을 얻은 것은 곧 생멸을 아는 것으로,

이는 있는 그대로를 아는 지혜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오온을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게 되며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곧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무상을 알면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란 단순하게 대상을 지켜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볼 때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한 지혜를 얻은 수행자에게는 과연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대답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탐심이 일어났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가 탐심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 탐심은 자라나지 못하고, 탐심의 단순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이

있을 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 연기법의 과정이 중간에서 멈춥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탐심에 대한 아무런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뒤를 따라 집착이,

또 그 뒤에는 업의 생성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옵니다.

또한 업의 생성이 일어나면 반드시 태어남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남을 얻는 것은 괴로움을 얻는 것이고,

결국 이로써 연기의 바퀴에 갇히는 것입니다.

윤회의 순환은 계속되어 재생의 굴레를 끝없이 돌리도록 만듭니다.


일어남과 사라짐, 즉 무상을 보는 수행을 하는 것이

재생의 굴레를 멈추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바퀴살을 부서뜨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또한 연기의 연결고리들을 잘라 부수는 일입니다.


또한 이처럼 생멸을 보는 수행은 무명을 종식시키고

통찰지혜를 얻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꿰뚫는 통찰을 하게 되면 지혜가 나타나고 무명이 사라집니다.


초전법륜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다섯 비구들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비구들이여!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통찰지가 일어났다. 명지가 일어났다. 광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디가니까야 대전기경과 쌍윳따니까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선언을 하신 뒤에 전법을 시작하셨습니다.


괴로움의 진리에 대해 꿰뚫는 통찰을 얻게 되면 무명은 지혜가 됩니다.

따라서 무명은 사라지고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이 지혜가 될 때 행(行)은

더 이상 식으로 연결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즉,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보아오신 도표 부분1에서

부분2로 연결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연결이 일어나지 않으면 행(行)은 새로운 태어남을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결과도 더 이상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때의 태어남이란 일반적으로 비참한 존재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은 이들 수십만 가운데서

고귀한 존재의 길을 획득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찾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선한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윤회를 끊는 일이란 더욱 희귀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연기가 연결된다는 것은 이후의 존재인 새로운 오온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태어남의 토대가 되는 기능들이

더 이상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명이 지혜가 되는 순간부터 멈추게 됩니다.

따라서 연기의 고리가 시작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움뿐인 오온을 만들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견(邪見)이 제거되면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심이 제거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의심으로 인해 일어나던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다른 번뇌나 잠재적 성향으로 인해

결과로써 나타난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 큰 자비심으로 반복해서 수행자들에게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라고 권하신 이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오온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혜를 얻게 되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쉼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오온의 본성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낄 때

이러한 지혜를 혐오의 지혜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지혜를 얻은 이후에

꾸준히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알아차리면

결국 그의 수행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끝을 보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도(道)의 지혜입니다.

이들 세 단계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그는 이제 작은 수다원이 아닌 큰 수다원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면 16단계의 지혜의 성숙으로 인하여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는 도과(道果)의 지혜까지 이르게 됩니다.

16단계의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둘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셋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넷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 이것이 생멸의 지혜입니다.

다섯째, 소멸의 지혜.

여섯째, 두려움의 지혜.

일곱째. 고난의 지혜.

여덟 번째, 혐오의 지혜입니다.


혐오의 지혜는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인

오온의 본성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혐오감이 일어났을 때 혐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혐오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혐오의 지혜입니다.


이처럼 혐오의 지혜는 싫어하게 되는 지혜로

정신적,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고 기댈 것도 없고 진저리나는 것일 뿐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이 때 수행자는 행복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열의가 식어지고 알아차림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 어느 세계도 좋게 보이지 않고 혐오감만 갖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단계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계에 이르러서 혐오감이 일어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도 어려운데 이런 복병이 도사리고 있어서

수행을 계속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혐오의 지혜가 난 것은 수행이 퇴보한 것이 아니라

발전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수행을 하면 더 감미로운 지혜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처절한 상황을 파악하는 지혜가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지혜의 과정을 거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온의 실체를 파악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온을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애가 나타났을 때 수행자들은 저 스스로 헤쳐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스승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을

스스로가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현상에 대한 자가 진단은 금물입니다.

수행자는 단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거의는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단지 수행만 하고,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고,

스승의 몫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바른 것이 아니기 마련이라서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단계에 있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진리를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홉 번째 지혜는 해탈을 원하는 지혜입니다.

해탈을 원하는 지혜는 오온을 혐오하는 지혜가 나면서 자연스럽게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혐오의 지혜 뒤에

자연스럽게 해탈을 원하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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