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書 狀 - 大慧普覺禪師

通達無我法者 2007. 1. 24. 20:44
LONG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


받아보니 문을 닫고 면벽(面壁)한다고 하니 이것은 마음을 쉬는 좋은 약입니다. 만약 다시 옛 종이를 연구한다면 반드시 정식(藏識:8식) 중에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생사의 근본의 싹을 끌어 일으켜서 선근(善根)의 어려움을 만들며 도를 장애하는 어려움을 만듦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고 또한 마음을 쉬고는 과거의 일에 선(善), 악(惡), 역(逆), 순(順) 같은 것은 모두 생각하지 말며, 현재의 일은 없앨 수 있는 대로 없애되 한 칼에 두 동강내어 머뭇거리고자 하지 않으면 미래의 일은 자연 이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에 망령되이 과거의 법을 취하지 말며, 또한 미래의 일에 집착하지 말며, 현재에 머무르는 바 없으면 삼세가 모두 공적함을 깨달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없다>고 한 것을 들고 청컨대 쓸데없이 사량하는 마음을 잡아 무(無)자에 돌이켜 두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문득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 한 생각 깨뜨릴 수 있다면 곧 삼세를 요달한 곳입니다. 깨달았을 때는 안배(安排)할 수 없으며, 계교할 수 없으며, 인증(引證)할 수도 없으니 왜냐하면 요달한 곳에는 안배(安排)도 용납하지 않고, 계교도 용납하지 않으며, 인증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증하고 계교 안배하더라도 요달한 것과는 전혀 교섭함이 없습니다. 다만 놓아 걸림이 없게 하여 선과 악을 모두 사량하지 말며 또한 뜻을 두지도 말고 또한 망회(忘懷)하지도 마십시오. 뜻을 두면 곧 산란해지고 망회(忘懷)하면 혼침이 있게 됩니다. 뜻을 두거나 망회 하지 않으면 선(善)이 선이 아니요, 악(惡)이 악이 아닙니다. 만약 이와 같이 요달한다면 생사의 마(魔)가 어느 곳을 엿 볼 수 있겠습니까? 일개 왕언장(汪彦章)의 명성(名聲)이 천하에 가득하니 평생에 안배하고 계교하고 인증한 것은 문장(文章)이며 명예(名譽), 관직(官職)입니다. 만년(晩年)에 인(因)을 거두고 과(果)를 맺는 곳에 어느 것이 실체입니까? 한없이 쓸데없는 것만 행했으니 어느 한 글귀에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명예가 이미 드러났으니 덕을 숨기고 빛을 감추는 것과는 차이가 얼마입니까? 관직이 이미 대양제(大兩制)에 이르렀으니 벼슬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와 차이가 얼마입니까? 지금 이미 70에 가깝습니다. 그대의 기량(技倆)을 다 발휘했으니 무엇을 바랍니까?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타협하겠습니까? 무상(無常)한 살귀(殺鬼)가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설봉진각(雪峯眞覺)선사께서 이르시되 “시간이 너무 빨라 잠깐이다. 뜬세상 어찌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겠는가 재를 넘은 때가 32세더니 민중(閩中)에 들어오니 이미 40이로다. 다른 이의 잘못은 자주 들추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도리어 마땅히 재빨리 없애라. 성(城)에 가득한 벼슬아치에게 알리나니 염라대왕은 금어(金魚) 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고인이 입이 아프도록 간절히 말씀하심은 무슨 일을 위함이겠습니까?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배고프고 추운 것에 핍박을 받아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몸이 조금 따뜻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곧 끝나니 다만 이 두 가지 일 밖에는 없습니다. 생사(生死)의 마(魔)가 도리어 번뇌(煩惱)롭게 하지 못하니 부귀한 자와 비교하면 가볍고 무거움이 크게 같지 않습니다. 부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이 이미 항상 따뜻하고 뱃속이 항상 배불러서 이미 이 두 가지 것에 핍박을 받지 않지만은 말할 수 없이 일이 많아 형용 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항상 생사의 마의 그물 가운데에 있어 그로 말미암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다만 숙세의 선근이 있는 자는 막 보아 꿰뚫고 알아 버립니다. 선성(先聖)이 말씀하시되 “문득 (생각이) 일어남은 병이요, 이어지지 않음이 약이니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늦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란 깨달음입니다. 그는 항상 깨달아 있기 때문에 대각(大覺)이라고 부르며 또한 각왕(覺王)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두 범부(凡夫)에서부터 지어 나왔습니다. 그도 이미 장부니 내가 어찌 그렇지 않으리요! 백년 세월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 생각을 마치 머리에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십시오. 좋은 일을 행함도 도리어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생각 생각이 번뇌 가운데에 있어 깨닫지 못함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두렵고 두렵습니다. 근래 여거인(呂居仁)의 사월 초에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증숙하(曾叔夏)와 유언래(劉彦禮)가 죽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거인이 교유(사귐)하는 중에 때때로 다시 한 두 사람 빠져나가니 바로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는 요사이 이 일을 매우 간절하게 하면서 또한 문득 생각을 돌이킴이 조금 늦은 것으로 후회한다고 하거늘 근래에 편지를 써서 답장하여 단지 마지막에 잘못됨을 아는 한 마음으로 바른 것으로 삼고 (생각을 돌이킴이) 더디고 빠름은 묻지 마십시오. 그릇된 줄을 아는 한 마음은 곧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며 마(魔)의 그물을 부수는 날카로운 무기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단지 이와 같이 공부를 해나가십시오. 지어나가는 공부가 점점 익으면 온종일 가운데 곧 힘을 든 것을 느낄 것입니다. 힘을 든 것을 느꼈을 때에 놓아 느슨하게 하지 말고 오로지 힘을 든 곳에서 공부를 지어 나가십시오. 공부를 지어감과 이렇게 힘이 들린 곳이 또한 알지 못하는 어느 때는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이 무(無)자를 들지언정 얻고 얻지 못함은 관여하지 마십시오. 지극히 빕니다.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2)


편지를 받아보니 문을 닫고 사귐을 쉬며 세간의 일을 소홀히 하고 오직 아침, 저녁으로 내가 지난번에 언급한 화두를 든다고 하니 매우 좋고 좋습니다.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었다면 마땅히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야 합니다. 만약 스스로 퇴굴심(退屈心)을 내어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고 하면서 다시 들어가는 곳을 구한다면 바로 함원전(含元殿) 속에서 장안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바로 (화두를) 들 때에 누가 드는 것이며,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함을 아는 것은 또한 누구이며, 들 곳(깨달아 드는 곳)을 구함은 누구입니까? 내가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분명히 거사를 위해 설하겠습니다. 다만 하나의 왕언장이지 다시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왕언장만 있다면 다시 어디에서 화두를 들며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함을 알며 들어갈 곳을 구함을 얻겠습니까? 마땅히 모두가 왕언장의 그림자이지 전혀 다른 왕언장이 간여하는 일이 아님을 아십시오. 만약 진실한 왕언장은 근성이 반드시 열등하지 않으며 들어갈 곳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주인공을 믿는다면 결코 허다한 수고로움을 소비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앙산(仰山)스님께 여쭈되 “선종은 단박에 깨닫는 것입니다. 필경에 입문(入門)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이 뜻은 지극히 어렵다 만약 선종의 문하에 지혜와 근기가 뛰어나면 한 번 듣고 모든 것을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얻나니 이러한 근기의 사람은 얻기가 어렵다. 대개 근기와 지혜가 미약하고 낮아 그러한 까닭으로 고덕(古德)께서 이르시되 만약 선정(禪靜)에 안주하지 않고 생각을 고요히 하지 않으면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땅히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 스님이 말하되 “이 격식을 제외하고는 도리어 다른 방편이 있어 학인들로 하여금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까?”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별도로 있다 없다 하면 너의 마음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는 것이니 내가 지금 너에게 묻겠다. 너는 어디 사람인고?” “유주 사람입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너는 또한 그 곳을 생각하는가?” “항상 생각납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그 곳의 누대(樓臺)와 수풀 동산에 사람과 말이 아울러 찼으니 너는 생각나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라. 또한 허다한 것들이 있는가?” “제가 이 곳에 이르러서는 일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너의 견해가 오히려 경계에 있다. 신위(信位)는 옳으나 인위(人位)는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노파심(老婆心)이 간절하여 마땅히 다시 설명을 달 것이니 인위(人位)는 곧 왕언장이요 신위(信位)는 곧 근성이 낮음을 아는 것과 들어갈 곳을 구하는 것이니 만약 화두를 들 때에 드는 곳에서 여전히 왕언장인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속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 털끝도 용납하지 않으니 만약 생각에 머물고 근기에 머문다면 그림자의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청컨대 정신을 차리고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기억해 보니 이전에 답장한 편지 중에 일찍이 써서 보내되 마음을 쉼을 얻어 또한 마음을 쉬고는 과거의 일에 선이니 악이니 역순을 모두 생각하지 말며 현재의 일은 없앨 수 있는한 없애되 한 칼에 두 동강내어 의심하고 머뭇거리지 않는다면 미래의 일은 자연히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이와 같이 엿보아 잡아가고(화두를 들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곧 가장 힘을 들어 공부하는 곳입니다. 지극히 빕니다.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3)


편지를 받으니 다섯째 아들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니 아버지와 자식의 정(情)은 오랜 생(生)에 은애습기(恩愛習氣)가 흘러 모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일을(자식이 병듦) 만나면 옳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탁악세(五濁惡世) 가운데 가지가지가 모두 헛된 환영이어서 한가지도 진실함이 없으니 청컨대 행주좌와에 항상 이렇게 관(觀)하면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점점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할 때에 자세히 헤아려 궁구(窮究)해 따지되 ‘어느 곳을 따라 일어나는가?’ 만약 일어나는 곳을 궁구할 수 없으면 ‘현재 번뇌하는 것은 또한 어느 곳을 따라 왔는가?’ 번뇌할 때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헛된 것인가, 진실한 것인가?’ 계속 궁구해 가면 마음이 갈 곳이 없으니 사량하고자 하면 다만 사량하고 울고 싶거든 다만 우십시오. 울다가 사량해 가다가 의식 중에 허다한 은애의 습기를 털어 다할 때 자연히 얼음이 녹아 물로 돌아감과 같아서 나의 본래 번뇌도 없고 근심 기쁨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세간에 들어와 있으면서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다면 세간법이 곧 불법이요, 불법이 곧 세간법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천성(天性)은 하나이니 만약 자식이 죽었는데 아버지가 번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며, 만약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이 번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도리어 옳겠습니까? 만약 억지로 참아 울 때에 또한 울지 않고 생각날 때에 또한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천성(天性)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 메아리를 그치게 하고 기름을 부어 불을 끄려함입니다. 번뇌 할 때에는 모두가 본분사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니 또한 벗어난 일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영가(永嘉)스님께서는 “무명(無明)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요, 환(幻)과 같이 변하는 헛된 몸뚱이가 곧 법신(法身)이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참된 말이며 속이거나 망령된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량하거나 번뇌하고자 하려 해도 또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관하는 자는 이름하여 바른 관(觀)이라고 하고 만약 다르게 관하는 자는 이름하여 삿된 관(觀)이라고 합니다. 삿되고 바름을 구분하지 못했다면 곧 힘을 잘 쓸지니 이것이 나의 확고한 뜻이니 지혜 없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운사 지굉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도와 계합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며 뜻이 다른 즉 얼굴을 마주 대하더라도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같이 멀다고 하니 이 말은 진실한 것입니다. 곧 이것이 전하지 못하는 오묘한 것입니다. 그대가 뜻을 내어 나에게 편지를 쓰고자 할 때 글을 쓰고 종이를 털기 전에 이미 두 손으로 분부(인가)했습니다. 또한 어찌 굳게 참아 구경까지 기다려 다른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도리는 오직 증득한 자라야 비로소 묵묵히 서로 계합하니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연평(延平)은 곧 민령(閩嶺)의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대가 스스로 조복(調伏)하여 역순의 문빗장(화두)에 움직인바 되지 아니하였으니 곧 크게 해탈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일체의 화두를 굴려 일상생활에 자유자재하여 그를 얽매여 끌거나 이끌어 묶을 수 없습니다. 만약 즉시 곧 이렇게 깨달으면 자연히 털끝만큼도 나에게 장애됨이 없습니다. 고덕이 말씀하시되 “부처님께서 설한 모든 법은 일체의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내가 일체의 마음이 없으면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며 또한 나융(懶融)선사는 “바로 마음 쓸 때가 마음 씀이 없을 때니 자세히 말함은 이름과 모양이 번거롭고 바로 말함은 번거로움이 없다. 무심이 바로 마음 쓰는 것이요, 항상 쓰되 마음 씀이 없는 것이다. 지금 말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르지 않다.” 하셨으니 다만 나융스님만 이와 같지 않고 나와 그대도 또한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 속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잡아내어 보이기가 어려우니 앞서 말한 묵묵히 서로 계합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나니 화두에서 의심이 깨어지면 모든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지게 됩니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면 또한 그 위에 나아가 더불어 서로 지어 가십시오. 만약 화두를 버려두고 달리 문자상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상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 번뇌 가운데에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들입니다. 첫 번째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한 사량하고 헤아리지 말고 오로지 뜻을 두어 사량 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가 없으니 마치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마음이 만약 시끄럽거든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드십시오. 부처님과 조사들의 말씀, 제방의 노숙(老宿)의 말씀의 천 가지 만 가지 차별들은 만약 <무(無)>자만 꿰뚫으면 한꺼번에 통과할 것이니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마십시오. 만약 한결같이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말씀은 어떠하며, 조사의 말씀은 어떠하며, 제방의 선지식의 말씀은 어떠한가 묻는다면 영겁에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여랑중 융체에게 답함


당신의 형 거인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아보니 이 일을 위해 매우 바쁘다고 하니 그러나 또한 마땅히 서둘러야 합니다. 나이가 이미 60이요 관직에 종사함도 또한 마쳤으니 다시 무엇을 기다리리요. 만약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정리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들으니 그대도 근래에 일찍이 서두른다고 하니 다만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 곧 죽음에 대처할 소식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 속을 투과하지 못하면 죽음이 닥쳐오면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서생(書生)들은 일생토록 낡은 종이만 파고들되 이 일(일대사인연)을 알고자 하여 널리 여러 책을 열람하며 고상하고 넓은 담론으로 공자(孔子)는 또한 어떻고, 맹자(孟子)는 또한 어떠하며 장자(莊子)는 또한 어떻고 주역(周易)은 또한 어떻고 고금(古今)의 평화로울 때와 혼란할 때는 어떻다 하여 이런 사소한 말들의 부림을 당하여 칠전팔도(七顚八倒: 마음이 어지럽다)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막 어떤 사람이 한 자를 드는 것을 듣고는 곧 책을 이루도록 생각하되,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으로 삼다가 그 자신의 본분사를 물음에 이르러서는 전혀 한 사람도 아는 이 없으니 종일토록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다가 스스로는 반푼의 돈도 (얻은 것이) 없다고 이를만합니다. 공연히 세상에 와서 한 평생 살다가 이 몸뚱이를 벗어버리면 천상에 오르는지, 지옥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하고 업력(業力)을 따라 육도(六道)에 들어감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의 크고 작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사대부가 읽은 책이 많은 것은 무명(無明)이 많은 것이고, 읽은 책이 적은 것은 무명이 적은 것이며, 행한 관직이 낮은 것은 아상(我相)이 적은 것이고, 행한 관직이 높은 것은 아상(我相)이 높은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말하다가도 아주 작은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총명함을 볼 수도 없고 영리함을 볼 수 없으며 평생 읽은 책은 한 자도 소용이 없으니 대개 어린 시절로부터 곧 어긋나 다만 부귀함을 얻고자 합니다. 부귀함을 취하는 자 중(中)에 몇 사람이나 생각을 돌려 자기 근본에서 추궁하여 ‘내가 이렇게 부귀를 취하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지금 부귀함을 받는 것은 다른 날에 다시 어느 곳을 향해 가는고?’ 하겠습니까! 이미 온 곳도 모르며 또한 간 곳도 모르면 곧 마음이 어둡고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바로 어둡고 답답한 때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속에 나아가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 오로지 이 화두를 들다 보면 문득 기량이 다 할 때 곧 깨닫게 됩니다. 절대로 문자를 찾아 증거를 대어 어지러이 헤아려 주해(注解: 풀어서 이해하다)하지 마십시오. 비록 분명하게 주해하며 설명하여 낙처(落處)가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의 살림살이입니다. 의정(疑情)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서로 더해가며 의정을 만약 부수면 생사심이 끊어질 것입니다. 불견(佛見), 법견(法見)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의 번뇌의 견해를 일으키겠습니까?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건시궐(乾屎橛)> 위에 옮겨 놓아 한 번 겨룸에, 겨루다 보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둡고 답답한 마음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총명함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행해지지 않음을 느꼈을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홀연 겨루는 곳에서 소식이 끊어지면 평생에 경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식이 끊어짐을 얻으면 불견(佛見), 법견(法見), 중생견(衆生見)을 일으키며 사량, 분별하고 총명을 일으켜 도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상관이 없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다만 항상 놓아 걸림이 없게 하여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항상 <건시궐(乾屎橛)>을 든다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물소(마음)가 자연히 익어(순수)질 것입니다. 첫째로 밖에서 달리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건시궐>에서 의심이 깨어지면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질 것입니다. 이전에 일찍이 또한 이와 같이 써서 여거인에게 주었는데 근래 조경명(趙景明)이 옴에 편지를 받아보니 편지 중에 재차 물어 와서 이르되 이것을 여의고는 달리 공부를 착수하는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 먹을 때는 마땅히 어떻게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다시 다만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또한 별도로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또한 평생에 일대사를 지금에 이르도록 끝내지 못했으니 단지 죽은 후에 단멸(斷滅)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어떻게 확실히 볼 수 있습니까? 또한 경론(經論)에서 설한 바를 인용하지 말고 조사의 공안을 가리키지 말고 오로지 눈앞을 의거하여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은 실처(實處)를 분석 판단하여 지시해 달라고 하니 그의 이와 같이 말함을 보면 도리어 서너 마을집의 할일 없는 놈이 도리어 허다한 분별망상이 없어 죽으면 죽어서 문득 벗어버림만 못합니다. 분명히 그에게 말하기를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에서 의심이 깨지면 천만가지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진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했다면 오로지 화두에 나아가 공부를 지어가라. 만약 화두를 버리고서 달리 문자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조사의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하는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이다. 또한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고 또한 알음알이로 헤아려 재지 말고 오로지 사량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감에 뜻을 두어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 없음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써 준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였는데 또한 도리어 다시 (편지를) 보내와서 어지럽게 물으니 그 많던 총명한 지견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말한 것을 믿지 못합니까? 평생에 책을 읽은 것은 이 속에 이르러서는 한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부득이하여 다시 그를 위하여 나쁜 냄새를 조금 피우겠습니다. 만약 단지 이렇게 그만 둔다면 도리어 내가 그에게 질문을 받고 다시 대답하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 편지가 막 도착하면 곧 그에게 보내어 한 번 보게 하십시오. 거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이 일을 끝내지 못했다고 하니 그에게 묻는데 밝히지 못한 것은 다시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끝내지 못했습니까? 만약에 손을 들고 발을 움직임과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라면 또한 무엇을 하려고 끝내려고 합니까? 그는 단지 이렇게 죽은 후에 단멸(斷滅)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를 알고 반드시 보고자함이 곧 염라대왕 앞에 철로 된 몽둥이를 맞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의심(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생사에 떠돌아다녀 마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말했는데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를 만약 타파하면 죽은 후에 단멸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라는 의심도 즉시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듯 다 풀릴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음을 지시하여 판단해 달라고 물으니 이와 같은 견해는 외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평생에 쓸데없는 것만 행하여 무엇에 쓸려고 합니까? 그는 이미 많이 먼 곳에다가 이러한 나쁜 냄새를 풍겨서 사람에게 배어들게 하니 나도 다만 이렇게 쉴 수가 없어(방관할 수가 없어) 또한 조금 나쁜 냄새를 풍겨서 그에게 배어들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그는 경전과 조사의 공안을 인용하지 말고 다만 눈앞에 의거해서 바로 분명히 단멸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시하라고 하니 옛날에 지도(志道)선사가 혜능(慧能)대사께 묻기를 “제가 출가하면서부터 열반경을 본지가 거의 1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큰 뜻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원하건대 스님께서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느 곳에서 밝히지 못했는가?” 대답하기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생멸법(生滅法)인데 생멸(生滅)이 이미 없어지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이 의심이 되고 미혹합니다.” 육조스님이 이르시기를 “너는 어떻게 의심하는가?” 대답하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두 가지 몸을 가지고 있으니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입이다.(이것이 곧 여거인도 똑같이 말하는 것이다) 색신은 무상하여 생(生)과 멸(滅)이 있으나 법신은 변함이 없어(常) 느끼어 아는 것이 없는데 경전에 이르시기를 생멸(生滅)이 이미 멸(滅)하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이며 어떤 몸이 즐거움을 받습니까? 만약 색신이라면 색신이 없어질 때에 사대(四大)가 흩어지니 모두가 고통이니 즐겁다고 말할 수 없고 만약 법신이라면 적멸이 곧 풀, 나무, 기와, 돌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즐거움을 받겠습니까? 또한 법성(法性)은 생멸의 바탕(體)이고 오온(五蘊)은 생멸의 작용이니 하나의 바탕과 다섯 가지 작용이 생멸이 일정하여 생(生)하면 체(體)를 따라 작용을 일으키고 멸(滅)하면 작용을 거두어 체(體)에 돌아가는데 만약 다시 생한다고 한다면 곧 유정(有情)의 무리가 단멸(斷滅)하지 않으며 만약 다시 생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적멸에 돌아가 무정(無情)의 무리와 같게 되니 이와 같다면 일체의 모든 법이 열반(涅槃)에 감금되어 오히려 생(生)할 수가 없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마땅히 여거인과 더불어 한 문서에다 허물을 다스려야 한다) 육조스님께서는 여기에 이르러 임제(臨濟),덕산(德山)의 방식을 쓰지 않고 곧 조금 냄새를 피워서 다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어찌 외도의 단견과 상견을 익혀서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는가? 네가 이해한 바에 의거하면 색신 외에 별도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 또 열반상락(涅槃常樂)을 미루어 짐작하여 말하되 몸소 받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것은 곧 생사를 집착해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을 탐착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마땅히 알라. 일체의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이 모인 것을 알아서 본인의 모양으로 삼고 일체의 법을 분별하여 육진(六塵)의 모양으로 삼아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여 생각생각 이어져서 꿈이나 환(幻)같은 헛되고 거짓인줄을 모르고 그릇 윤회를 받아서 항상 즐거운 열반으로 도리어 고통의 모양으로 삼고 종일 (오욕의 낙을) 치달려 구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으로 곧 보이시어 열반의 참된 즐거움은 찰나에 생하는 모양도 없고 찰나에 멸하는 모양도 없고 다시 없앨 생멸도 없다고 하셨다. (여기에 이르러 청컨대 눈여겨  보십시오.) 이러하다면 곧 생멸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분명히 나타날 때에 또한 나타난다는 생각이 없어야 곧 항상 즐겁다고 이름하니 이 즐거움은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는 사람도 없다.(또한 조금 명백하다) 어찌 하나의 바탕(體)과 다섯 가지 작용(用)의 이름이 있으며 어찌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감금하여 영원히 생(生)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리요! 이것은 곧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다.(여거인도 또한 (불법을 비방하는 것을) 조금 가지고 있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시비(是非)를 낼 수 없다)  


위없는 대열반이 두루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거늘

어리석은 중생은 죽음이라고 이르며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이라고 말하며

모든 이승(二乘)을 구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고서 지을 것이 없다고 여기니

모두가 망령된 정(情)으로 헤아린 것에 속하니

육십이견(六十二見)의 근본이로다

망령되이 헛되고 거짓된 이름을 세우니

무엇을 진실한 뜻이라 하리요.(거인은 실다운 곳을 보고자 할진대 오로지 이 한 글귀를 보라)

오직 역량이 뛰어난 사람은(아직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통달하여 취하고 버림이 없어(거인은 또한 30년을 의심하라)

오온법과 오온 가운데 나(我)와 (거인은 이 속에서 허다히 벗어남을 구하였으나 문이 없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든 색상과 (허공 꽃을 보지 말라)

낱낱의 음성 모양이(사람을 속인다.)

평등하여 꿈과 허깨비 같음을 알아서 (반쯤은 구원했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열반의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않으며(또한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양변과 삼세가 끊어져 항상 모든 근(根: 六根)을 응해 쓰되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체법을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나니

겁화(劫火)가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산을 때려 서로 부딪히더라도

진실로 항상 고요하고 즐거우니 열반의 모양이 이와 같다.

내가 지금 힘써 말하여 너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버리게 하니(오직 거인만은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너는 말을 쫓아 이해하지 않는다면(거인은 기억해라)

네가 조금은 알았다고 인정하겠다.” (다만 이러한 조금도 얻을 수 없다)


지도스님이 게송을 듣고 문득 크게 깨달으니(말이 적지 않았다) 오로지 이러한 말이 곧 분명히 바로 결단내어 거인에게 지시한 손가락입니다. 거인이 이것을 보고 만약 말하되 여전히 경전에서 말한 바이고 고인(古人)의 공안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여 만약 오히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면 지옥에 들어감이 화살을 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받아보니 평소에 공부를 함을 쉬지 않는다고 하니 공부가 익으면 화두를 쳐서 깨뜨릴 것입니다. 이른 바 공부라는 것은 세간의 잡다한 일들을 헤아리는 마음을 <건시궐(乾屎橛)>에 돌이켜 두어 정식(情識)으로 하여금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흙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과 같아 어둡고 답답함을 느껴 붙잡을만한 근거가 없을 때가 곧 좋은 소식입니다.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앞과 뒤를 헤아려 어느 때 깨달을까 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은 사량, 분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르셨으니 이해하면 곧 화가 생깁니다. 사량, 분별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아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하나의 여거인이니 곧 머리를 굴려 따지지 마십시오. 이 앞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에서 선병(禪病)을 다 말했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결코 한 법도 사람에게 주신 것이 없고 다만 본인이 스스로 믿고 스스로 수긍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다만 다른 사람이 입으로 말한 것만 취했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었으며 문자상(文字相)을 여의었으니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을 아는 자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저 죽은 후에 단멸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를 의심함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나에게 (대혜스님) 바로 끊음을 지시해 달라는 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평상시 하루 종일 혹 성내고 혹 기뻐하며 혹 사량, 분별하며 혹 혼침하고 혹 마음이 들뜸도 모두가 다만 여거인이니 다만 이 여거인이 가지가지 기특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과 함께 더불어 적멸대해탈광명(寂滅大解脫光明)의 바다 가운데 노닐어 세간 출세간의 일을 성취 할 수 있건만 다만 여거인이 믿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믿을진대 청컨대 이 주석(註釋)에 의거하여 삼매(三昧)에 드십시오. 홀연 삼매로부터 일어나 식심(識心)을 잊는다면 곧 깨달을 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2)


당신의 아우 자육(子育)이 지나가면서 편지를 내놓기에 그것을 읽고 기뻐하고 안심해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백년의 세월이 번개가 번쩍하는 것과 같아 곧 죽을 때가 닥쳐옵니다. <건시궐(乾屎橛)>은 어떠합니까? 단서(巴鼻)가 없고 재미가 없음을 느껴 가슴이 답답함을 느낄 때가 곧 좋은 소식입니다. 첫째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 (화두의 의심을) 다 날려 버리고 공적(空寂)함 속에 있지 말며 (화두를) 들 때에 의심이 있다가도 들지 않을 때는 곧 없게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세간의 번잡함을 사량(思量)하는 마음을 가지고 <건시궐>에 돌이켜 두어 사량하다가 어찌 할 수 없는 곳에서 기량(技倆)이 문득 다하면 곧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에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영겁(永劫)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전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에 사대부의 병통을 다 말했습니다. 받아보니 오직 곁에 둔다고 하니 만약 이것에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비록 깨닫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삿되고 바른 것은 가려 삿된 마구니의 장애를 입지 않을 것이며 또한 깊은 반야의 종자를 심게 되니 비록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생에 태어남에 다 성취하여 받아써서 또한 힘을 소비하지 않으며 또한 나쁜 업에 빼앗김을 당하지 않고 죽을 때에 또한 업(業)을 굴릴 수 있으니 하물며 한 생각 서로 상통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날마다 제발 다른 일을 사량하지 말고 다만 <건시궐>을 사량하되 어느 때 깨달을까하고 묻지 마십시오. 지극히 빕니다. 깨닫는 시기는 (정해진) 때가 없으며, 또한 대중들을 놀라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지 않고 곧장 편안해져서 자연 부처님과 조사를 의심하지 않고 생사(生死)도 의심하지 않으니 의심하지 않는 곳을 얻음이 곧 부처님의 지위입니다. 부처님의 지위에서는 본래 의심이 없으며, 깨달음도 미혹함도 없으며, 생사도 없고, 유무(有無)도 없고, 열반과 반야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설하는 자도 없으며, 이 말도 또한 듣지 않으며, 또한 듣지 않는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음을 아는 자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받지 않음을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 여거인이 이와 같이 믿으면 부처님도 다만 이러하고 조사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깨달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미혹도 다만 이와 같으며, 의심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생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죽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평소에 번뇌하는 것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죽은 후에 단멸(斷滅)한가 단멸하지 않는가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조정에 있어 관직에 종사함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휴직하여 고요한 곳에 있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경산(徑山)에 머물러 천 칠백 대중이 에워쌈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귀양 가서 형주(衡州)에 있음도 다만 이와 같으니 당신은 또한 믿습니까? 믿는 것도 또한 다만 이와 같고 믿지 못함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니 필경에 어떠한고? 이와 같음을 이와 같다고 한 이와 같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습니다.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


그대가 어린 나이에 자립하여 곧 모든 사람의 정상에 있으되 부귀함에 얽힌바 되지 않았으니 오랜 겁에 원력을 지닌바 아니면 어찌 이러한 것에(부귀한데 있으면서 부귀함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일대사에 간절하고 절실하여 한 순간도 물러섬이 없으며 확고한 믿음이 있으며 확고한 뜻을 갖추었으니 이것은 어찌 얕은 장부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하나의 일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청컨대 채찍질하여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세간의 일은 다만 이러하니 선성(先聖)이 어찌 이르지 않았습니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는데 듣는 것은 무슨 도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찌 엿봄을 용납하리요! 다시 불도(佛道)를 ‘나의 도는 일이관지(하나로써 꿴다)’에다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모름지기 스스로 믿고 스스로 깨달을지니 설(說)한 것은 결국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믿으면 설(說)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더라도 도리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설하고 형용하여 보여 주어도 도리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이 두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리켜 증상만인(增上慢人)이라고 했으며 또한 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한 대망어(大妄語)를 짓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한 불혜명(佛慧命)을 끊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천불(千佛)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투과하면 이러한 말들은 도리어 망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곧 망어라는 견해를 내지 마십시오. 여거인(呂居仁)에게서 근래 연이어 두 번의 편지를 받으니 편지 가운데 모두 이르기를 여름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를 항상 곁에 두고 얻는 것으로 목표를 삼는다고 하며 또한 일찍이 그대에게 적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근세의 귀공자로 그와 같은 사람은 마치 우담발화(優曇波羅)가 삼천년에 한 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근래 산에 있으면서 매번 그대와 더불어 이러한 이야기를 해보니 그대의 안목의 정동(定動)을 보니 구분구리(九分九釐)를 알아차려 보고 다만 한번 와지(?∫?)함이 모자랄 뿐입니다. 만약 한번 와지(?∫?)함을 얻는다면 유교가 곧 불교요, 불교가 곧 유교이며, 승(僧)이 곧 속(俗)이요, 속이 곧 승이며, 범부가 곧 성인이요, 성인이 곧 범부이며, 내가 곧 너이며, 네가 곧 나이며, 하늘이 곧 땅이며, 땅이 곧 하늘이며, 파도가 곧 물이며, 물이 곧 파도이며, 유락(酥酪)과 제호(醍醐)를 섞어 한 맛을 이루며 단지 쟁반, 비녀, 팔찌를 녹여 한 덩어리의 금(金)이 되게 함이 나에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면 나의 지휘로 말미암게 되니 이른 바 내가 법왕(法王)이 되어 법에 자재(自在)하니 득실시비(得失是非)에 어찌 걸림이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무구노자(無垢老子)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으며 비록 믿는다 해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미 그르고(邪) 옳은가(正)를 가릴 수 있으나 다만 손에 넣지 못했을 뿐입니다. 손에 넣는 때는 늙음과 젊음을 가리지 않고 지혜롭고 어리석음에 있지 않습니다. 마치 범천왕위(梵位)를 가지고 바로 범부에게 줌과 같아 다시 계급차례가 없습니다. 영가(永嘉)스님께서 이르신바 "한 번 뜀에 곧장 여래(如來)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오로지 들으십시오. 결코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2)


제(왕장원)가 모든 반연을 쉬고 평소에 다만 이와 같이 번뇌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대의 분상(分上)에 모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으면서 천만가지를 갖추었다고 이를만합니다. 만약 이 문중에 몸을 돌이켜 전심전력한다면 어찌 다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며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뿐이겠습니까? 옛날에 양문공대년(楊文公大年)이 30세에 광혜연공(廣慧璉公)을 보고 가슴에 걸린 물건을 제거하고 이후로부터 조정에 있거나 마을에 머묾에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節槪)를 공명(功名)에 움직이는바 되지 않고 부귀의 빼앗기는바 되지 않고 또한 공명과 부귀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가 있는 곳에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께서 “모든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부림을 당하나 나는 종일토록 부린다.”고 하셨으니 조주스님의 이와 같은 말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대개 배움과 도를 닦음이 하나인데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배움을 삼고 격물(格物), 충(忠), 서(恕)와 일이관지(一以貫之)같은 것을 도로 삼고 있어 다만 수수께끼(博謎子)와 같고 또 여러 맹인(盲人)이 코끼리를 만짐에 각각 다른 부위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유(思惟)하는 마음으로 여래원각경계(如來圓覺境界)를 헤아려 잰다면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당할 때에 전혀 힘을 얻지 못함은 모두가 이것 때문입니다. 양자(楊子)는 “배움이란 성품을 닦는 방법이니 성품이 곧 도다.” 했으며 부처님께서는 “성품은 무상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셨으며 규봉(圭峯)선사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깨달은 마음이요,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광란(狂亂)하는 마음이니 광란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아 생긴다. 목숨이 끝날 때에 업에 끌림을 당하게 된다. 깨달음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지 않으니 죽을 때 업을 굴리나니 이른 바 의(義)라는 것은 의리(義理)의 의(義)요, 인의(仁義)의 의(義)가 아니다.”고 하셨으니 지금 보면 이 늙은이도 또한 허공을 쪼개 두 쪽을 만듦을 면치 못했습니다. 인(仁)이란 곧 성품(性品)의 인(仁)이요 의(義)란 곧 성품의 의(義)요, 예(禮)는 곧 성품의 예(禮)요, 지(智)는 곧 성품의 지(智)요, 신(信)은 곧 성품의 신(信)이라. 의리(義理)의 의(義)도 또한 성품이니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곧 이 성품을 거역하는 것이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이 성품을 따르는 것이나 따르고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음이요, 성품에 있지 않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음이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있으나 성품에는 없습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어진 사람에게 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있지 않는다면 성인의 도는 가리고(揀擇) 취하고 버림이(取捨) 있어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림에 땅을 골라 내림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르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지 성품에 있지 않습니다. 양자(楊子)가 말한 성품을 닦는다는 것은 성품 또한 닦을 수가 없으니 또한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일 뿐이며 규봉(圭峯)선사가 말씀한 깨달음과 광란함이 이것이며 조주(趙州)스님이 말씀하신 온종일 부림과 온종일 부림을 당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성품이 일어나는 곳을 안다면 격물(格物), 충(忠), 서(恕), 일이관지(一以貫之)도 그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승조법사(僧肇法師)가 이르시되 “하늘의 일을 모두 알고 인간의 일을 모두 아는 자가 어찌 하늘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배우고 도를 닦음은 하나입니다. 대개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功績)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봄이 초목(草木)에 행해지는 것과 같이 이 성품을 갖춘 자는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나 그 근기와 성품을 따라 크고 작음, 네모와 둥글고, 길고 짧음, 혹은 푸르고 혹은 누렇고 혹은 붉고 혹은 푸름과 혹은 냄새나고 혹은 향기로움이 동시에 피어나니 봄이 크게 하고 작게 하며 네모지게 둥글게 하며 길게 하며 짧게 하며 푸르게 하며 누렇게 하며 붉거나 푸르게 하며 냄새나거나 향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 인연을 만나서 피어났을 뿐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보라 시절이 만약 이르면 그 이치는 자연히 드러난다.”고 하셨으며 또 회양(懷讓)선사께서 마조(馬祖)스님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네가 마음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要諦)를 말함은 저 하늘의 혜택에 비유할 수 있다. 너의 인연이 맞기 때문에 곧 마땅히 그 도리를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르시되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품을 보아 도를 이루게 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무구노자(無垢老子)가 말하기를 도가 한 겨자씨만큼 있으면 겨자씨만큼 무겁고 도가 천하에 있으면 천하만큼 무겁다함이 이것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무구(無垢)의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겉은 보고서 그 속은 보지 못했습니다. 백년의 세월이 단지 한 찰나간에 있으니 찰나간에 깨달아 버리면 위에 말한 것들이 모두가 실다운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깨달으면 사실이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고 사실이 아니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으니 마치 물위의 조롱박이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도 항상 안정되지 않아서 만지면 곧 움직이며 누르면 곧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으니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의 <구자무불(狗子無佛性)> 화두를 그대는 마치 사람이 도적을 잡음에 이미 소굴은 알았으나 단지 아직 잡지 못함과 같으니 청컨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금도 (화두가) 끊어짐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 수시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과 책을 보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닦는 것과 웃어른을 시봉하는 것과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죽을 먹고 밥을 먹는 가운데 공부를 지어간다면(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화두의 의심을 놓지 않는다면) 홀연히 몸뚱이를 잊게 되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종직각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연(緣)을 만나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되 일찍이 불법 가운데 있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상의 움직이는 가운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육근육진) 을 부숴 제거한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이 공부 할진대 마침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근본자리에서 비추어 보십시오. 차별경계는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며 움직이며,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어떻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를 부숴 제거하며 번뇌를 제거함을 아는 자는 또한 누구인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중생이 전도되어 스스로를 미혹하게 하고 사물을 쫓는다.”고 하셨으니 사물은 본래 자성이 없건만 자기를 미혹하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쫓을 따름이며 경계는 본래 차별이 없거늘 스스로 미혹하게 한 자가 스스로 차별할 뿐입니다. 이미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는다 하고 또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니 이미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면 차별경계가 아니요, 이미 차별경계에 있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버리면 어찌 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요? 광액도아(廣額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으면서 짐승 잡는 칼을 놓고 선 자리에서 곧 성불하였으니 어찌 허다히 말을 많이 하리요? 일상에 연(緣)을 만나는 곳에 곧 차별경계(差別境界)를 겪음을 느낄 때 다만 차별하는 곳에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들지언정 부숴 제거하겠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번뇌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차별(差別)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불법(佛法)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만 드십시오. 다만 <무(無)>자만 들지언정 또한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경계가 차별이며 불법이 차별이며 번뇌(情塵)가 차별이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가 차별이며 끊어짐이 있는 곳이 차별이며 끊어짐이 없는 곳이 차별이며 번뇌를 만나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 편안하지 못하는 곳이 차별이며 허다한 차별을 아는 것도 차별이니 만약 이 병을 없애고자 한다면 다만 <무(無)>자만 들며 다만 광액도아가 칼을 놓고 이르되 나는 천불(千佛) 중(中) 하나다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보십시오. 만약 허(虛)와 실(實)을 헤아린다면 또한 차별경계에 들어가게 되니 한 칼에 두 동강내어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만 못하니 앞뒤를 생각함도 또한 차별입니다. 현사(玄沙)스님께서 “이 일은 기약할 수가 없다. 마음과 생각의 길이 끊어짐은 장엄(莊嚴)함에 말미암지 않는다. 본래 참되고 고요하여 움직이며 쓰고 말하고 웃으매 그 곳을 따라 분명하여서 다시 모자람이 없거늘 지금 사람들은 이 가운데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일을 겪고 경계를 만나 곳곳마다 물들고 제각기 얽히어 매이나니 비록 깨닫더라도 잡다한 경계가 어수선하며 이름과 모양이 실답지 않아 곧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어 일을 거두어 공으로 돌이키려고 하여 눈을 닫고 눈동자를 감추고 생각이 일어남을 따라 자주 부숴 제거하며 미세한 생각이 막 일어나면 곧 막아 누르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곧 공에 떨어져 죽은 외도이며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며 어둡고 막막하여 느낌도 앎도 없나니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과 같아 한갓 스스로 속일 따름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대의 온 편지에 운운(云云)함이 모두가 현사스님께서 꾸짖은 바의 병이며, 묵조의 삿된 스승이 사람을 매장하는 구덩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화두를 들 때에 모두 허다한 기량을 쓰지 말고 오로지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곳에 화두가 끊어짐이 없게 하며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운 곳에 분별을 내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어봄에 이치의 길도 없고 재미도 없어 마음이 애타고 갑갑함을 느낄 때가 곧 본인이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곧 물러서는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지금 묵조의 그릇된 스승들은 오로지 말이 없는 것으로 지극한 이치로 삼아 위엄나반(威音那畔) 전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공겁이전(空劫已前)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속인다하고(깨달음이 있다고 함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깨달음으로 이구(二句)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방편의 말이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끌어들이는 말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무리는 다른 사람을 속이며 스스로 속이며 다른 사람을 그르치며 스스로도 그르치는 것이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차별경계를 겪으면서 힘을 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은 곳이 곧 지극히 힘을 든 곳이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면 반드시 삿된 법이지, 불법이 아닙니다. 오로지 장원심(長遠心)을 갖추고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지어 가십시오.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마음이 갈 바가 없어져 홀연히 꿈을 꾸다가 깨어남과 같으며 연꽃이 핀 것과 같으며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는 자연히 한 덩어리를 이룰 것입니다. 오로지 일상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지 이 <무(無)>자를 들되 깨닫고 깨닫지 못함과 뚫고 뚫지 못함을 관여하지 마십시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만 일개 무사인(無事人)이며 모든 조사(祖師)스님도 또한 단지 일개 무사인(無事人)입니다. 고덕께서는 “단지 事(일체 차별의 모양 곧 현상계)에서 무사(無事)함을 통달한다면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들음에 귀머거리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며 또 고덕(古德)이 말씀하시되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없애지 않으나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없애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모든 곳에 무심(無心)하다면 가지가지 차별경계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사대부는 대개가 성질이 급하여 곧 선(禪)을 알고자 하여 경전과 조사의 언구(言句)에서 널리 헤아려 설(說)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하나 분명히 밝히는 것이 도리어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일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무(無)>자를 투과한다면 분명히 밝히고 밝히지 못함을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대부로 하여금 놓아 둔하게 하라함은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잘못된 방(鈍牓)으로 장원(狀元)이 됨은 나쁜 것이 아니나 단지 백지(白紙)를 낼까 두려워 할 뿐입니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참정 태발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중중법계(重重法界)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고 하니 이미 헛된 말이 아니라면 반드시 인정(分付)하신 곳이 있었을 것이며 스스로 긍정하는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읽고 오랫동안 찬탄하였습니다. 사대부가 평소에 배운 바가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만났을 때 손발을 다 드러낸 자가 십중팔구(十中八九)입니다. 그 행한 일을 살펴보건대 서너너덧 집 되는 촌의 하릴없는 놈에게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이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비교해 보건대 지혜는 어리석음만 못하고 귀함은 천한 것과 같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드러나면 거짓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참상공(大叅相公)은 평소에 배운 바가 이미 행한 일에 드러났으니 화복(禍福)을 만날 때에 순금이 불에 들어가면 더욱 밝게 되는 것과 같으며 또 결코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중중법계(重重法界)가 단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다른 생각은 내지 마십시오. 그 나머지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 혹은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혹은 바름과 삿됨도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그대는 항상 이와 같이 관(觀)하십시오. 나도 또한 그 가운데에 있으니 다른 날에 열반의 물가에서 서로 만나 미래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중중법계를 성취하여 이 일을 실천한다면 어찌 작은 도움이리요. 다시 모름지기 주석(註釋)을 내리니 지금 이러한 말은 우언(寓言)로 사물을 지시한 것이란 생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증종승 천은에게 답함


그대가 천성이 도에 가까워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다른 반연의 장애됨이 없으니 단지 이러한 것은 어떤 사람이 미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내가 보인 바 힘을 드는 요긴한 곳에서 수시로 공부하십시오. 일념(一念)이 서로 맞아 모든 공안에 막힘이 없을 때만이 곧 옳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이렇게 지어 죽음에 이르면 염라대왕도 마땅히 도리어 삼천리 밖으로 물러나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 생각이 반야(般若) 속에 있어 다른 생각도 없고 끊어짐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도가(道家)와 같은 무리들은 망령된 마음으로써 생각에 두더라도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오히려 공적(功績)을 이룰 수 있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부림을 당하지 않는데 하물며 온 생각을 반야의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면 죽음이 이르렀을 때 어찌 업을 굴릴 수 없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대개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도를 배우니 이것은 망상 가운데 진짜 망상하는 것입니다. 다만 놓아 자유롭게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급하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되니 다만 이렇게 공부를 하면 무한히 마음의 힘을 들 것입니다. 그대는 생소한 곳은 이미 익고 익은 곳은 이미 생소해지면 온 종일 가운데 자연히 묵조선의 수행이나 관법의 수행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깨우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모든 마구니와 외도가 이미 그 틈을 엿볼 수 없고 또 스스로 모든 마(魔)와 외도와 더불어 손을 맞추고 눈을 맞추어 저 일을 이루더라도 그 무리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대 한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그대의 수행과 같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반드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화두를 드십시오. 들다보면 단서도 없고 재미도 없음을 느껴 마음이 답답할 때에 바로 잘 힘을 쓸지언정 절대로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다만 이렇게 답답한 곳이 곧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어 천하 사람들의 시비를 끊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왕교수 대수에게 답함


그대는 헤어진 후 일상생활 가운데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일찍이 이성(理性)에서 재미를 얻거나 경(經)에서 재미를 얻거나 조사(祖師)의 언구(言句)에서 재미를 얻거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발을 들고 걷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곳에서 재미를 얻으면 모두가 일(깨닫는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바로 쉬고자 할진대 마땅히 앞의 재미를 얻은 곳에서 전혀 다른 것은 관여하지 말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없는 곳에 시험 삼아 뜻을 두어 보십시오. 만약 뜻을 둘 수 없으며 잡거나 더듬을 수 없을진대 점점 잡을만한 자루(단서)가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치의 길과 뜻의 길에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행해지지 않음이 마치 흙, 나무, 기와, 돌과 비슷할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본인의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대개 총명의 장애를 입어 이 때문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어떤 경계를 만나면 막히게 되니 중생은 무시(無始)이래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해 생사에 떠돌아 다녀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쾌활한 놈이 되고자 할진대 마땅히 한칼에 두 동강내어 심의식(心意識)의 길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약간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영가(永嘉)스님께서 “법재(法財)을 감하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의식(心意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얼마 전에 편지를 받으니 그 가운데 가지가지의 마음 쏠린 것들이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던 병입니다. 이러한 일을 알진대 다 날려 생각 밖에 두고 또 근거도 없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에서 시험 삼아 공부를 지어보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없다>를 들어 보십시오 평소에 총명한 사람은 막 들어 일으키는 것을 듣고 곧 심의식(心意識)으로 이해하여서 널리 헤아려 끌어다가 증거로 삼아 말하고자 하니 인가하는 곳은 끌어다가 증거를 댐을 용납하지 않으며 널리 헤아림을 용납하지 않으며 심의식(心意識)으로 앎을 용납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끌어 증거로 대고 널리 헤아려 알았더라도 모두 촉루(髑髏: 8식) 이전의 정식(情識)의 일입니다. 생사의 언덕에는 결코 힘을 얻지 못합니다. 지금 온 천하에 선사(禪師), 장로(長老)라고 일컫는 자들이 분명히 알았다고 하는 것들이 조금 전에 말한 소식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가지가지 삿된 견해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밀(密)수좌는 그와 함께 평보융(平普融) 회하(會下)에 있을 때 서로 모여 모두 보융(普融)의 깊은 뜻을 다 얻어 그는 스스로 안락(安樂)으로 삼으나 도달한 바가 또한 그대의 편지 가운데 소식을 벗어나지 않더니 지금 비로소 그릇됨을 알고 따로 이 안락처를 얻고 비로소 내가 추호(秋毫)도 그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특별히 그로 하여금 가서 당신을 보게 하니 일이 없을 때에 시험 삼아 그로 하여금 말해보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대의 뜻과 계합합니까? 80 먹은 늙은이가 과거시험장에 들어감은 진실로 정성스러울 것이니 아이들 장난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생사(生死)가 닥침에 힘을 얻지 못하면 비록 말하여 분명히 알고 이해하여 낙처(下落)가 있으며 인증(引證)하여 차별이 없더라도 모두가 귀신집의 살림살이입니다. 나에게는 조그만 일도 전혀 관계되지 않습니다. 선문(禪門)의 가지가지 차별의 다른 견해는 오직 법을 아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법(大法)을 밝히지 못한 자는 종종 대개 병으로 약을 삼으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시랑 계호에게 답함


받아보니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니 요컨대 일상에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면 세간의 잡다한 마음들이 자연히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잡다한 마음이 이미 녹아 없어지면 다음 해(來日)도 예전처럼 초봄은 여전히 차가울 것입니다.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살펴보라.”고 하셨으니 이 시절은 곧 부처님께서 세속을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금강좌(金剛座)에 앉으셔서 마군중(魔軍衆)을 항복 받고 법륜(法輪)을 굴리어 중생을 제도하며 열반에 드신 시절이 그대가 말한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의 시절로 다름이 없습니다. 이 속에 이르러 다만 이와 같이 살펴볼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을 이름하여 바른 관이라고 하며 이와 달리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삿된 관이라고 합니다. 삿되고 바름을 가리지 못하면 저 시절을 따라 뒤바뀜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시절을 따르지 않고자 할진대 다만 한꺼번에 놓아버려서 놓아도 놓을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이 말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전과 같이 다만 그대이지 다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유시랑 계호에게 답함(2)


우리 부처님 대성인께서 모든 상(相)을 비우시어 모든 법(法)에 대한 지혜를 이루셨으나 정업(定業)은 바로 없애지 못하셨거늘 하물며 땅에 묶여있는 범부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거사는 이미 불법에 들어온 사람이니 아마 또한 이 삼매(三昧)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한 노숙(老宿)에게 묻기를 “세계가 이렇게 뜨거우니 어느 곳으로 회피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노숙(老宿)이 이르시되 “끓는 가마 속이나 화로 숯불 속에 회피하라” “끓는 가마 속이나 화로 숯불 속으로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모든 고통이 이를 수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원하건대 거사는 일상의 생활하는 가운데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하여서 노숙의 말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가 효험을 얻은 처방입니다. 거사와 더불어 이 도가 서로 계합하고 이 마음을 서로 알지 못했다면 또한 쉽게 전수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일념이 상응한 약을 쓰지 다시 별도의 탕약(湯藥)은 쓰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탕약을 쓴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게 할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념이 상응한 탕약은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거사의 일상생활 가운데 있어 밝은 곳은 밝기가 해와 같고 어두운 곳은 어둡기가 옻칠한 것과 같으니 만약 손을 펴서 잡고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 한 번 비추면 어긋남이 없어 또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또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이 항상 이 약으로써 끓는 가마 속과 화로 숯불 속에서 고뇌하는 중생의 나고 죽는 큰 병을 치료하시니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릅니다. 거사는 또한 믿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나는 스스로 부자(父子)가 전하지 못하는 묘한 처방이 있어 끓는 가마 속과 화로 숯불 속에서 회피할 묘술(妙術)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거사의 보시(布施)를 바랍니다.



이랑중 사표에게 답함


사대부가 이 도를 배움에 총명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너무 총명함을 근심하며 지견(知見)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지견이 너무 많음을 근심하십시오. 항상 식(識)이 먼저 한걸음 앞서 행하여 본분의 쾌활자재(快活自在)한 소식을 어둡게 하나니 삿된 견해의 좀 나은 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알아서 자기 몸으로 삼으며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경계로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삼으며 하열(下劣)한 자는 8식을 굴리고, 들어가는 문의 입구를 가지고 두 입술을 나불거려 현묘한 것을 이야기하며 심한 자는 발광(發狂)하여 글을 써서 혼란스럽게 이러쿵저러쿵하며 더욱 하열한 자는 묵묵히 비추어 말을 하지 않음과 고요한 것으로 귀신의 굴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구경안락(究竟安樂)을 구하니 그 나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충밀(冲密)등이 돌아옴에 편지를 받아서 읽고 기쁘고 안심이 됨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또 세간의 이치를 늘어놓아 서로 문답하지 않고 다만 그대가 도를 향한 용맹한 뜻으로 곧 갈등선(葛藤禪)에 들어갔으니 덕산(德山)과 임제(臨濟)가 다름이 없고, 법안(法眼)과 조동(曺洞)이 다름이 없건만 다만 배우는 자가 광대하고 확고한 뜻이 없고 스승도 또한 광대하고 융통한(두루 통달한) 법문이 없기에 들어가는 것이 차별이 있으나 구경(究竟)에 귀착하는 곳은 전혀 이와 같은 차별이 없습니다. 편지에 내가 편지를 통해 지름길을 지시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니 다만 이렇게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이미 아교단지(膠盆)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격이니 다시 (내가) 눈 위에 서리를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물음에 답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평소에 경전을 보고 화두를 드는 것으로부터 혹 사람들이 들어 깨우치고 가리켜 보임으로 인해 재미와 환희를 얻는 곳을 모두 놓아버리고 전과 같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와 같이 성식(性識)이 있으나 행해지지 않게 하여 다시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서 들어 보십시오 계속 들다가 보면 점점 단서가 없음을 느껴 마음이 점점 편안하지 않을 때에 놓아 느슨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 속이 천성(千聖)의 머리를 끊는 곳입니다. 종종 도를 배우는 사람이 대개 여기에서 물러나니, 그대가 만약 믿는다면 오직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서 들어 보십시오. 들다가 보면 문득 잠자다가 꿈을 깬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평소에 수행해서 힘을 얻은 공부이니 그대가 확고한 뜻이 있음을 알기에 진흙을 끌고 물을 묻혀 한바탕의 허물을 적어봅니다. 이외에 다시 지시할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지시할 것이 있다면 지름길이 아닐 것입니다.



이보문 무가에게 답함


저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근성이 어리석고 둔하여 힘써 수행하여 지니되 끝내 깨닫는 방법을 얻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근래 쌍경(雙徑)에 있으면서 부계신(富季申)이 물은 바에 답한 것이 바로 이 물음과 더불어 같습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는 결코 둔하지 않으니 다시 어느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합니까? 사대부가 이 도를 배움에 마땅히 어리석고 둔한 것을 빌려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스스로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이른다면 혼둔(昏鈍)의 마장(魔障) 걸리는 바가 될 것입니다. 대개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아 깨달아 증득함을 구하는 마음이 앞에 있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기의 바른 지견이 드러날 수가 없는데 이 장애도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둔한 것을 아는 주인공입니다. 단엄(瑞巖)화상이 평상시 방장실에 계시면서 스스로 불러 이르되 “주인공아”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성성하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의 속임을 받지 말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예”하였습니다. 옛부터 다행히 이러한 모범이 있었으니 마음껏 이 속에서 <이 뭐꼬?>하고 들어 보십시오. 다만 이렇게 드는 것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일뿐입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곧 이보문의 본분자리입니다. 이것이 내가 병에 대해 약을 주는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간략히 거사를 위해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는 길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곧 죽은 말을 인정하여 진실로 본분자리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식신(識神)을 알아 자기로 삼는 것이니 더욱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사(長沙)화상께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함은 다만 예전의 식신(識神)때문이니 무량한 겁으로부터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고 하셨으니 앞에서 말한 어리석고 둔함을 빌려 들어간다 함이 이것입니다. 다만 이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것이 필경에 무엇인지를 살펴볼지니 다만 이 속에서 살펴볼지언정 뛰어넘어 깨달음을 구하지 마십시오. 들다가 보면 문득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이외에 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향시랑 백공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과 꿈과 깸이 하나인가? 라고 물었는데 하나의 인연입니다. 부처님께서 “너는 끄달리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또한 마음에 끄달린다.”라고 하시고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 고 이르시니 ‘있다, 없다’의 무(無)가 아닙니다. 꿈과 깸이 하나임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부처님께서 금고(金鼓)를 꿈꾸심과 고종(高宗)이 꿈에 열(說)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두 기둥에 잔을 바치는 것을 꿈꾼 것을 또한 꿈과 꿈 아니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다시 세간(世間)을 보건대 꿈속의 일과 같다고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으니 오직 꿈은 곧 전부 망상이거늘 중생이 전도되어 일상의 눈앞의 경계를 진실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꿈인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다시 허망한 분별을 내어 망상심으로 생각을 얽어매어 신식(神識)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정말로 꿈이라고 여기니 바로 꿈속에서 꿈을 말하는 것이며, 전도된 가운데 전도됨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자비심과 노파심이 간절하시어 다 일체법계 모든 존재하는 국토의 있는바 미진 속에 두루 들어가시어 낱낱 티끌 가운데 꿈으로써 자재(自在)하게 법문하시어 세계해(世界海)의 미진수(微塵數) 중생이 사정취(邪定聚)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개오(開悟)시켜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전도된 중생이 눈앞에 있는 경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세계로 삼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꿈과 꿈 아님이 모두가 환(幻)임을 깨닫게 한다면 모든 꿈이 실(實)이며 모든 실(實)이 꿈이어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음을 널리 보이신 것입니다. 지인(至人)이 꿈이 없다는 뜻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내 온 편지의 물음을 보니 곧 내가 36세에 의심하던 바입니다. 그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이것을 원오(圓悟)선사께 여쭈었더니 다만 손으로 가리키며 멈추고 멈추어 망상을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말씀드리기를 제 경우는 잠자지 않을 때는 부처님이 찬탄하신 것을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는 것은 감히 어기지 않으며 예전처럼 스승을 의지함과 스스로 공부를 지어 자질구레하게 얻은 것도 깨어있을 때는 모두 수용하다가 침상에 올라 반쯤 깨었을 때 이미 주인이 되지 못하여 꿈에 금과 보배를 보면 기쁨이 끝이 없고 꿈에 다른 사람이 칼과 몽둥이로 나를 핍박하거나 모든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속에서 두려워하고 겁에 질리니 스스로 생각컨대 이 몸은 오히려 있어도 오직 잠잘 때에 이미 주인이 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여러 고통이 번성하면 어떻게 뒤바뀜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르면 바야흐로 허둥지둥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원오(圓悟)선사께서 또 이르시기를 네가 말한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 네 스스로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인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듣고는 또한 그것을 믿지 않아 매번 내 스스로 돌아보니 깸과 잠듦이 분명히 둘인데 어떻게 감히 크게 입을 열어 선을 말하리요? 오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나의 이 병(病)을 마땅히 없애지 않을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면 곧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후에 오조스님께서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곳에 훈훈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고 법문하심을 들음으로 인해 홀연히 가슴에 뭉친 물건을 없애버리고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심이 참된 말씀이며 여여(如如)한 말씀이며 속이는 말씀이 아니며 허망한 말씀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대자비심(大慈悲心)임을 알았습니다. 몸을 가루를 내어 목숨이 다하더라도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에 걸린 물건을 이미 제거하고 비로소 꿈꿀 때가 곧 깰 때며 깰 때가 곧 꿈꿀 때임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라는 것을 비로소 스스로 알았으니 이러한 도리는 다른 사람에게 잡아내어 보여줄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꿈속의 경계와 같은 것은 취할 수도 없으며 버릴 수도 없습니다. 받아보니 나에게 묻되 깨닫기 이전과 이미 깨달은 후에는 다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나도 모르게 사실에 의지하여 대답하겠습니다. 자세하게 온 편지를 읽으니 글자마다 지극한 정성이어서 선(禪)을 묻지도 않으며 또한 힐문(詰問)을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옛날에 의심하던 것으로 말해줌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거사는 시험 삼아 방(龐)거사가 말씀하신 모든 있는 것을 비우고 절대로 모든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는 것을 마음껏 들어 보십시오. 먼저 눈앞의 일상적인 경계로써 꿈이라고 이해한 후에 다시 꿈속의 것을 가지고 눈앞에 옮겨오면 부처님께서 꿈꾸신 금고(金鼓) 고종(高宗)이 열(說)을 얻은 꿈과 孔子가 두 기둥 사이에 잔을 올리는 것을 꿈꾼 것은 결코 꿈이 아닐 것입니다.



진교수 고경에게 답함


이 도가 쇠퇴함이 지금보다 심한적은 없었습니다. 삿된 스승이 법을 설함이 악착취(惡叉聚)와 같아 각각 스스로 무상도(無上道)를 얻었다고 말하고 모두 삿된 말을 제창하여 범부를 미혹케 하기 때문에 내가 매번 이것에 이를 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도와서 광명종자(光明種子)로 하여금 불가의 본분사(本分事)가 있음을 알게 하여 삿된 견해의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니 만에 하나 중생계에서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으면 또한 부처님의 음덕(蔭德)을 헛되이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른 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티끌 국토를 받듦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때를 알지 못하고 힘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대는 이미 불법에 들어 온 사람이니 이 가운데의 일을 설하지 않을 수 없어 붓을 잡고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임판원 소첨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한 말씀을 구하여 신도인(信道人)과 더불어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이미 원각경(圓覺經)을 보았다면 경에는 어찌 한 마디 말뿐이겠습니까? 모든 대보살들이 각기 스스로 의심하는 곳을 따라 묻거늘 세존께서 의심하는 것에 의거하여 낱낱이 분명히 분석하신 큰 단락(段落)이 분명하고 명확하며 전에 주었던 화두도 또한 그 속에 있습니다. 경전에 이르시되 모든 때에 있으면서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며 또한 모든 망상에 대해 쉬어 없애려고 하지 말며 망상의 경계에 있으면서 분명히 앎을 보태지 말며(이 말은 가장 친절하다) 분명히 앎이 없는데서 진실을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 내가 옛날에 운문암(雲門庵)에 거처할 때 일찍이 송(頌)하여 말하기를


   연잎은 둥글고 둥글기가 거울과 같고

   마름뿔은 뾰족뾰족하기가 송곳과 같다

   바람이 불면 버들강아지 털이 날리고

   비가 배꽃을 때리니 나비가 날아간다


다만 이 게송을 원각경에다 두고 다시 원각경의 글을 옮겨 송(頌)에 두면 송(頌)이 도리어 경(經)이요, 경(經)이 도리어 송(頌)이니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하되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초초하거나 애달음을 쉬고 또한 놓아 느슨하게도 하지 말지니 마치 거문고 줄을 고르는 방법과 같이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으면 곡조는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돌아가서 오직 충밀(冲密)의 무리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번갈아 서로 탁마(琢磨)하면 불도의 수행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빌고 빕니다.



황지현 자여에게 답함


편지를 받고 이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매우 노력함을 알았습니다. 대장부의 하는 일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무상(無常)함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크니 하루가 지나면 하루의 좋은 일이 없어지는 것이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그대가 나이가 한창이어서 바로 무슨 일을 함에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때에 이 마음을 돌이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배우니 이것은 세상에서 일등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리한 사람입니다.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무슨 기특한 일이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기력이 강건함을 따라 일찍이 (수행함에) 생각을 돌리면 늙어서 마음을 돌이킴과 비교하면 그 역량이 백 천 만억 배(百千萬億倍) 뛰어난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대를 위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써준 법어를 일찍이 때때로 들어봅니까? 첫째로 기억할 것은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마음이 초초함으로 급하게 깨닫고자 하지 마십시오. 막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 곧 이 생각이 길을 막아 끊어서 영원히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사가 이르시되 “집착하여 정도(正度)를 잃으면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놓으면 근본(體)은 가고 머무름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조사가 심장과 쓸개를 내보여 사람을 위한 곳이니 다만 일상에 힘을 소비하는 곳에 공부를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문중은 힘을 소비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항상 사람들을 위하여 이 말을 하되 힘을 얻은 곳이 곧 힘을 든 곳이며 힘을 든 곳이 곧 힘을 얻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한 생각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깨달아 들어가는 곳을 구한다면 사람이 자기 집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머물 곳을 찾음과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생사(生事) 두 글자를 잡아 편안히 코끝에 두어 잊어버리지 말고 수시로 이 화두를 들으십시오. 들다가 보면 생소한 곳은 자연히 익고 익은 곳은 자연히 생소해질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공상도인(空相道人)의 편지에 적어 두었으니 청컨대 같이 이 편지를 서로 바꾸어 보면 곧 분명히 알 것입니다.


 

엄교수 자경에게 답함


진실로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은 온전한 강철로 만든 것과 같고 무쇠로 부어 이룬 것과 같아서 설사 천성(千聖)이 세상에 나와 무량하고 수승한 경계를 드러내더라도 그것을 보아도 또한 보지 않음과 같으니 하물며 이것에 대해 기특하고 수승한 도리를 일으키겠습니까? 옛날에 약산(藥山)스님이 좌선할 때에 석두(石頭)스님께서 묻기를 “그대는 이 속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는가?” 약산스님이 이르되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석두스님이 이르되 “이러하면 한가히 앉은 것이다.” 약산스님이 이르되 “한가히 앉는 것도 하는 것입니다.” 석두스님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저 고인(古人)을 보건대 한낱 한가히 앉음도 그를 어찌 할 수 없는데 지금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대개 한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근래 총림의 실없는 무리들이 묵조(黙照)라 부르는 것이 이것입니다. 또 한 종류는 근본자리가 확고하지 않으면서 문 입구의 빛 그림자만을 알아 한결같이 미쳐 날뛰어 (다른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말하나 모두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은 업식(業識: 8식)을 불러 본분자리라고 하니 다시 그들과 본분사(本分事)를 말하지 마십시오. 보지 못했습니까? 운문(雲門)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빛을 뚫어 벗어나지 못함이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모든 곳에 밝지 못하여 눈앞에 물건이 있음이 하나요, 또 일체가 법공(法空)임을 투과했으나 어슴푸레하게 어떤 물건이 있는 것 같으니 또한 빛을 뚫어 벗어나지 못함이다. 또한 법신(法身)에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법신(法身)을 얻었더라도 법집(法執)을 잊지 못하여 자기의 견해가 여전히 있어 법신변에 앉아 있음이 하나요, 설사 법신을 뚫었더라도 놓아버리면 곧 옳지 못하니 내가(운문선사) 자세히 점검해 보건대 무슨 소식(氣息)이 있겠는가! 이것이 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 실법(實法)을 배우는 자는 법신을 투과한 것으로 지극한 이치로 삼으나 나는 반대로 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신을 투과함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속에 이르면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화가 되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르되 진실로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는 온전한 강철로 만든 것과 같고 무쇠를 부어 만든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고 배부를 때에 다시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배부른지 안 부른지 묻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황벽(黃檗)스님이 백장(百丈)스님께 여쭙기를 “위로부터 고인(古人)이 어떤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입니까?” 백장스님이 다만 기대어 앉거늘 황벽스님이 이르되 “후대의 자손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전하여 주겠습니까?” 백장스님이 옷을 털고 곧 일어나 이르시되 “나는 장차 네가 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하시니 이것이 곧 사람을 위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스스로 믿는 곳에서 보십시오. 또한 스스로 믿는 소식이 끊어짐을 얻었습니까? 만약 스스로 믿는 소식이 끊어졌다면 자연히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제(臨濟)스님께서는 “네가 만약 생각, 생각 치달리는 마음이 다하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으니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 7지보살(第七地菩薩)이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만족치 못했기 때문에 번뇌라고 부릅니다. 바로 당신이 안배(安排)할 수 없는 곳에는 약간이라도 다른 헤아림을 둘 수 없습니다. 수 년 전에 허거사(許居士)가 문의 입구(8식)를 알아 글을 가지고 와서 견해를 보이어 이르되 일상생활에 텅텅 비어 마주 대할 한 물건도 없어 바야흐로 삼계(三界)와 만법(萬法)이 모두 원래 없음을 알아 바로 편안하고 즐거워 놓아버렸다 하거늘 게송을 그에게 보이어 이르되 깨끗한 곳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깨끗한 곳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즐거운 곳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즐거움이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마치 물이 그릇에 맡겨 모나고 둥글고 짧고 긴 것을 따름과 같으니 놓고 놓지 않음을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삼계와 만법이 돌아갈 어느 곳도 없다고 하니 만약 다만 이러하다면 이 일은 크게 어긋날 것입니다. 허거사에게 말하노니 부모가 재앙이 되니 천성(千聖)의 눈을 활짝 열지언정 마땅히 자주 묻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연히 새벽에 일어나니 조금 서늘하거늘 문득 기억해보니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오히려 혹시 빛 그림자가 아닌가 의심하여 드디어 종전의 의심하던 공안을 끌어 비추어 보고 비로소 조주(趙州)선사의 허물을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붓 가는대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장시랑 자소에게 답함


그대가 스스로 조금 깨달은 것을 가지고 지극한 이치로 삼고 겨우 이치의 길을 보고 경험하고는 노파선(入泥入水)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은 곧 없애 그것으로 하여금 종적(蹤迹)을 없애고자 하며 내가 모은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보고 곧 이르되 임제(臨濟)선사 밑에 무수한 암주(庵主)들은 기봉(機鋒)이 좋은데 어찌 기록하지 않고 충국사(忠國師) 같은 이는 의리선(義理禪)을 말해 마을의 남녀들을 그르치게 하니 반드시 빼 버려야한다고 하니 그대가 도를 보고 이와 같이 이해하여 충국사가 노파선을 말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고 깨끗하고 맑은 곳에 있으면서 다만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한 수(수단)만 좋아하여 이 외에 조금도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때문에 내가 힘을 다해 주장하는데 만약 법성(法性)이 관대하지 않고 물결이 광활하지 못하며 불법에 대한 지견(知見)이 없지 않고 생사의 뿌리(命根)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감히 이와 같이 몸을 땅에 붙이고 진흙과 물에 들어가 사람을 위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중생의 근기(根器)가 같지 않기 때문에 위로부터 모든 조사들이 각각 문을 세우고 베풀어 중생의 근기를 갖추어 근기에 따라 교화하셨으니 때문에 장사금대충(長沙岑大蟲)께서는 “내가 만약 한결같이 근본 가르침만 들어 말한다면 법당 앞에 반드시 풀이 한길(一丈)이나 자랄 것이니 사람을 고용해 절을 돌보게 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불문(佛門)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종사(宗師)라고 부름을 받는다면 마땅히 중생의 근기를 갖추어 설법해야 합니다.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수단은 이러한 근기라야(아주 뛰어난 근기라야) 비로소 알아차리니 근기가 맞지 않는 곳에 쓴다면 헛수고일 것입니다. 내가 어찌 한번 방망이질함에 문득 깨달아 일곱 내지 여덟 겹을 구멍 냄이 성질 급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모아 종문(宗門)의 종류를 나누지 않고 운문(雲門), 임제(臨濟), 조동(曺洞), 위앙(潙仰), 법안(法眼)종을 상관하지 않고 오직 바른 지견이 있어 사람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수록하였습니다. 충국사(忠國師), 대주(大珠) 두 노장을 보니 선(禪)에 모든 바탕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록하여 으뜸의 근기를 가진 자를 구제하고자 합니다. 그대의 편지에 이르되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고 하니 그대의 뜻으로 보면 정법안장에 모든 선문(禪門)을 제거하고 다만 그대와 같은 견해를 가진 자만 수록해야지 비로소 옳을 것이니 만약 이와 같다면 그대는 스스로 한 책을 모아 대근기(大根器)인 사람을 교화함을 어찌 하지 못하란 법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나로 하여금 그대의 뜻을 따라가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충국사가 진흙과 물에 뛰어드는 노파선(老婆禪)을 설해 곧 후손(법을 잇는 사람)이 끊겼다고 한다면 암두(巖頭), 목주(睦州), 오구(烏臼), 분양무업(汾陽無業), 진주보화(鎭州普化), 정상좌(定上座), 운봉열(雲峰悅), 법창우(法昌遇)같은 모든 대노장들은 당연히 자손이 땅에 가득 차야하거늘 지금 또한 비어 크게 교화하는 자가 없으니 앞서 말한 모든 선사들이 어찌 진흙과 물에 들어가는 노파선을 설했습니까? 그러하니 나는 충국사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대는 빼더라도 처음부터 서로 무방(無妨)합니다.



서현모 추산에게 답함


그대가 자주 편지를 부쳤기에 내가 생각해보니 (그대의 목적은) 물소(마음)를 조복하고자 하며 원숭이(식심)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래 총림(叢林)을 돌아다녀 흡족히 선지식을 찾아뵙는데 있지 않고 다만 일언일구(一言一句)에 바로 끊어 알아차림을 귀하게 여깁니다. 말을 돌리지 않고 사실에 의거하여 논하면 그 사이에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득이하여 바로 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굽어버린(어긋난) 것이며 알아차렸다 말함도 이미 어긋난 것이거늘, 하물며 가지와 넝쿨을 끌어다가(지엽적인 것) 경(經)을 들먹이고 이(理)와 사(事:현상계)를 말하여 구경(究竟)에 이르고자 합니까? 고덕(古德)께서는 “다만 털끝만큼이라도 있어도 곧 번뇌다.”라고 하셨으니 물소(마음)을 조복하지 않으며 원숭이(식심)를 죽이지 않으면 비록 항하사(恒河沙)와 같이 많은 도리를 말하더라도 전혀 나에게 조금도 관계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밖의 일이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강서(江西)노숙께서 “말할 수 있더라도 또한 너의 마음이요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너의 마음이다.”라고 하셨으니 결정코 바로 끊어 짊어지고자 할진대 부처와 조사를 보기를 살아있는 원수와 같이 해야 비로소 조금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오래되면 애써 마음을 일으켜 깨달음을 구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저절로 조복하며 식심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오로지 평소에 마음과 식심(識心)이 모여 머물 수 없는 곳과 취할 수 없는 곳과 버릴 수 없는 곳에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는 화두를 드십시오. 들 때 평소의 총명하고 영리하여 사량하고 헤아리지 말지니 마음을 헤아리고 사량하면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가 먼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량(思量)하지 않고 계교(計較)하지 않고 마음에 헤아리지 않음이 곧 옳은 것입니까? 돌(咄) 다시 이 무엇인고? 그럼 이만 줄입니다.



양교수 언후에게 답함


그대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强項) 도리어 불가사의한 유화(柔和)함이 있어 한마디 말에 깨달음에 이르니 이 일은 수승(殊勝)합니다. 만약 간혹 관직에 있으면서 깨달은 몇 사람이 아니었다면 불법이 어찌 오늘날에 있겠습니까! 반야의 근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을 수 없으니 장하고 장한 일입니다. 편지를 보니 내년 봄과 여름 사이에 밑 없는 배를 젓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다함이 없는 공양을 베풀고 말함이 없는 말을 하여 다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근거를 요달(了達)하고자 한다고 하니 다만 청컨대 와서 면목없는 놈(대혜스님)과 더불어 헤아려 보면 반드시 위에서 한 말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받아보니 도호(道號)를 구한다고 하니 바로 서로 더럽히고자 한다면 쾌연거사(快然居士)라고 칭함이 옳을 것입니다. 진정(眞淨)노인이 이르시되 “쾌연한(快然: 즐겁고 편안한) 대도(大道)가 오직 눈앞에 있으니 종횡(縱橫)의 십자(十字)에 헤아리며 머물러 즐긴다.”고 하시니 곧 이 뜻입니다. 나는 다만 장사(長沙)에 있어 오래 머무를 생각이니 그대가 후일 과연 여기로 온다면 숲 속이 적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출밀 중훈에게 답함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 후에 날마다 연(緣)을 만나는 곳에 바깥 경계에 빼앗김을 당하지 않습니까? 책상에 쌓인 글을 봄을 물리쳐 둡니까? 사물과 서로 마주칠 때에 화두를 굴립니까? 고요한 곳에 있을 때에 망상은 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몸소 궁구하되 잡념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망령되이 과거법(過去法)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일에도 탐착하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 없으면 삼세가 다 공적(空寂)함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과거의 일에 혹 좋고 나빴던 것을 마땅히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생각하면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미래의 일을 마땅히 헤아리지 말지니 헤아리면 날뛰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일이 앞에 닥쳤거든 혹 역순(逆順)의 경계에 마땅히 뜻을 두지 말아야 하니 뜻을 두면 마음이 어지럽게 됩니다. 다만 모든 때에 임하여 인연을 따라 응(應)하면 자연히 이러한 도리에 계합할 것입니다. 역(逆)경계는 쉽게 칠 수 있으나 순(順)경계는 물리치기가 어렵습니다. 나의 뜻에 거슬리는 것은 다만 참을 인(忍) 한 자(字)로 녹여 조금 살피면 곧 지나가나 순(順)경계는 바로 당신이 회피할 곳이 없음이 마치 자석이 철과 서로 만날 때에 서로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한 곳에 붙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무정(無情)의 물건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온 몸이 현행(現行)하는 무명 속에 있어 살림살이로 삼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이 경계를 만나면 만약 지혜가 없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경계)이 그물 속으로 끌어들임을 당할 것이니 다시 이 속에서 벗어날 길을 구하고자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성(先聖)께서 이르시되 “세간에 들어가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게하라.”고 하심이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근세에 한 종류가 있어 수행함에 방편을 잃은 자가 종종 현행무명(現行無明)을 알아 세간에 들어가는 것으로 삼고 곧 출세간법을 가지고 억지로 차배(差排)하여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습니까! 오직 숙세에 서원(誓願)이 있는 자는 바로 알아버려 주인이 되어 다른 것에 이끌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유마(維摩)거사는 “부처님께서는 증상만인(增上慢人)을 위하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고 해탈하라고 설하셨다. 만약 증상만인이 아닌 자에게는 부처님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이 곧 해탈이라고 하셨다.”고 이르셨으니 만약 이 허물을 면(免)하면 역순경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양이 없어 비로소 증상만인이라는 이름을 벗어나게 되니 이러하여야 비로소 세간에 들어간 것이니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내가 평소에 겪어 지나온 것이며 지금 일상에 또한 이와 같이 수행합니다. 원컨대 그대는 기력(氣力)이 강건할 때에 또한 이 삼매에 드십시오. 이외에 때때로 조주(趙州)의 <무(無)>자를 들어 오래 오래하다 보면 순일하고 익어서 자연히 무심해져 무명(無明)을 쳐부술 것이니 곧 깨닫는 곳입니다.



누출밀 중훈에게 답함(2)


일상의 공부를 앞의 편지에서 이미 말함이 적지 않으니 단지 전과 같이 바꾸거나 움직이지 않고 사물이 오면 그것과 더불어 응하면 자연히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고덕(古德)께서 말씀하시기를 “걸림이 없이 가고 머무르는데 맡기고 고요히 비춰 원천을 깨달을지니 깨달음의 경지를 말해도 사람에게 보일 수 없고 도리를 말해도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얻은 곳은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몸소 증득하고 얻은 자라야 대략 눈앞에 조금만 드러내면 서로가 곧 묵묵히 계합(契合)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이로부터 사람의 속임을 받지 않아 공부함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니 대체적인 것이 이미 바르고 칼자루를 이미 얻었으니 마치 소 잘 치는 사람과 같아 고삐를 항상 손에 쥐고 있으면 어찌 다른 사람의 벼싹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고삐를 놓아버려 콧구멍에 잡을 곳이 없으면 평원(平原)의 얕은 풀밭에 마음대로 뛰어 놀 것입니다. 자명(慈明)노인께서는 “사방(四方)에 놓아 울타리를 막지 말고 팔방(八方)에 걸림이 없게 하여 마음대로 놀게 하라. 거두고자하면 다만 고삐를 다스리는데 있다.”고 하시니 이와 같지 못하면 마땅히 고삐를 꽉 잡고 또 순하게 쓰다듬어 따르게 할지니 공부가 이미 익으면 자연히 뜻을 써서 막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공부는 급하게 하지 말지니 급하게 하면 곧 조급히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해서는 안되니 느슨하면 허리멍텅해 질 것입니다. 생각을 잊거나(忘懷) 뜻을 둠(着意)이 모두 어긋나니 비유하자면 칼을 휘둘러 허공에 던짐에 미침과 미치지 못함을 논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엄양(嚴陽)존자가 조주(趙州)스님께 여쭙기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주선사께서 이르시기를 “놓아버려라.” 엄양스님이 이르되 “한 물건도 이미 가져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려라 하심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이르시되 “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엄양스님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으며 또 어떤 스님이 고덕께 여쭙기를 “학인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고덕이 이르시되 “나도 어찌할 수 없도다.” 그 스님이 이르되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거니와, 화상(和尙)께서는 대선지식인데 무엇 때문에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까?” 고덕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약 어찌 할 수 있다면 곧 너의 어찌할 수 없음을 잡아 물리쳤으리라.” 그 스님이 즉시 크게 깨치니 두 스님의 깨달은 곳이 곧 그대의 깨치지 못한 곳이며 그대가 의심하는 곳이 곧 두 스님이 여쭌 곳입니다. 법은 분별을 따라 생겨 또한 분별을 따라 없어지니 모든 분별법(分別法)을 없애면 법에는 나고 없어짐이 없습니다. 자세히 온 편지를 보니 병이 이미 다 물러가고 별다른 증후도 또한 생기지 않는다고 하니 큰 단락(段落)이 서로 가까우니 또한 점점 힘을 덜 것입니다. 청컨대 다만 힘 들린 곳에 나아가 놓아 걸림이 없게 하면 홀연히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 끊어 곧 마치리니 제발 힘쓰십시오.



조태위 공현에게 답함


내가 비록 나이가 들어가나 감히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안 되어 힘써 이 일로 납자의 무리를 떨쳐 분발시키니 한 끼 죽 먹은 후에 명패를 내어 많은 사람에게 돌리어 방에 들게 하니 간혹 목숨을 짊어진 자는 낚시에 걸려오고 또한 사람을 무는 사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법희선열(法喜禪悅)로 즐거움을 삼으니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조물(造物)이 어여삐 보아줍니다. 그대는 복과 지혜가 모두 온전하여 날마다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이 일대사 인연에 뜻을 두고 있으니 진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력이 있으면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기가 어렵고 부귀하면 도를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셨는데 수많은 생(生)에 일찍이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고 반야종자를 깊이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이렇게 믿는 곳이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오로지 믿는 곳에서 엿보아 잡아(화두를 들어) 오래하면 스스로 깨우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뜻을 두어 안배(安排)하여 깨달을 곳을 찾지 말지니 만약 뜻을 둔다면 어긋나버립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불도(佛道)는 사의(思議)할 수 없다 누가 부처를 사의할 수 있겠는가?” 또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물어 이르시되 “너는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어가는가?” 문수가 이르시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사의(思議)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사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부사의 삼매에 들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발심하여 이런 선정(禪定)에 들고자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마음의 생각이 없고서 삼매에 들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활 쏘는 것을 배움에 오래 익히면 솜씨가 생겨 뒤에는 비록 무심(내가 꼭 과녁의 중앙을 맞히겠다는 생각이 없으나)하나 오래 익혔기 때문에 화살을 쏘면 다 맞으니 나도 또한 이와 같이하여 처음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를 배울 때 한 곳(一緣)에 마음을 묶어 두었습니다. 만약 오래 익혀 성취하면 다시 마음의 생각이 없더라도 항상 정(定)과 더불어 함께하니 부처님과 조사의 수용처(受用處)가 둘이 아니며 다름도 없습니다. 최근 총림에 한 종류의 삿된 선이 있어 눈을 감아 눈동자를 숨기고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망상을 내어 부사의(不思議)한 일이라고 하며 또한 위음나반(威音那畔), 공겁이전(空劫以前)의 일이라고 하며 막 입을 열면 곧 업에 떨어졌다고 하며 (묵묵히 비추어 보는 것이) 또 근본상(根本上)의 일이라고 하며 또 깨끗함이 지극해 빛이 뚫고 이른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지엽적인 일이라고 하니 대개 그는 처음 걸음을 내디딜 때 곧 어긋나되 또한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깨달음을 방편으로 세워둔 것이라고 하니 이미 스스로 깨달을 문이 없습니다. 또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니 이러한 것은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끊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천불(千佛)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사람을 점검하는 안목을 갖춘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사자의 가죽을 쓰고 여우의 울음을 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그대와 더불어 비록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마음이 이미 묵묵히 서로 계합함이 여러 해(多年) 되었습니다. 이 앞에 대답한 글이 지극히 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특별히 법공(法空)선인을 보내어 대신 가서 공경하게 하기 때문에 선사유삼매(善思唯三昧)에 들 겨를도 없이 다만 이렇게 손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나도 모르게 말이 이와 같이하여 그나마 공손치 못함을 사과합니다.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이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자 한다하니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었다면 첫째로 급하게 구하지 마십시오. 급하면 더더욱 더디게 될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하지 말지니 느슨하면 나태해질 것입니다. 마치 거문고를 고르는 법과 같이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을 반드시 알맞게 해야 비로소 곡조를 이루게 됩니다. 다만 일상에 인연을 만나는 곳에 때때로 엿보아 잡되(화두를 들되) ‘내가 이렇게 사람과 더불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며, 결국은 어느 곳을 따라 흘러나오는고?’엿보아 잡아가다 보면(화두를 들다가 보면) 평소에 생소한 곳의 길은 자연히 익으리니 생소한 곳이 이미 익으면 익은 곳은 자연히 생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익은 곳인고? 오음(五陰), ․육입(六入),․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와 이십오유(二十五有)와 무명(無明)으로 사량(思量), 계교(計較)하는 식심(心識)이 밤낮으로 또렷함이 아지랑이와 같아 잠시도 쉼이 없음이 이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오음, 육입등등이) 사람을 부려 생사에 떠돌게 하고 사람을 부려 좋지 못한 일을 하게 하니 위에서 말한 것들이 이미 생소하게 되면 보리, 열반(菩提涅槃)과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날 때에 또한 드러났다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고덕께서 계합해 증득함에 대해 곧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볼 때는 일천 해와 같아 모든 모양이 그림자를 피할 수 없고 들을 때는 깊은 계곡과 같아 크고 작은 소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일은 따로 구함을 빌리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자연히 연(緣)을 만나는 곳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으면 장차 세간의 잡다함을 생각하는 마음을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돌이켜 두고 한번 사량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어떤 스님이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시되 없다.> 오직 이 한자에 어쨌든 무슨 기량이 있겠습니까? 안배(安排)해 보고 계교(計較)해 보십시오. 사량(思量), 계교(計較), 안배(按排)는 둘만한 곳이 없으니 오직 가슴속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마음에 번민하는 때가 곧 좋은 시절이니 제 8식이 서로 번갈아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느끼면 반드시 놓아버리지 말고 오직 이 <무(無)>자 위에 나아가 들어 보십시오. 들다가 보면 설은 곳은 자연히 익게 되고 익은 곳은 자연히 설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총림 가운데 한 종류의 삿된 말을 부르짖어 종사가 된 자들이 있어 배우는 자에게 일러 말하되 오로지 다만 고요함만 지켜라 하니 지키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고요한 것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대로 말하되 고요한 것이 기본이라고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지엽적인 것이라고 이르며 다시 어떤 스님이 앙산(仰山)스님께 여쭙기를 “지금 사람도 또한 깨달음을 빌립니까?” 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음을 어찌하랴.”라고 하셨으니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을 말할 수 없겠습니다. 곧 실법(實法)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어 깨달음이 이구(二句)에 떨어진다고 하니 앙산스님께서 스스로 배우는 자를 경책하여 깨닫게 한 말이 매우 간절하여 이르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하신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곳에다 두겠습니까? 앙산스님께서 후학에게 의심하게 하고 그르치게 해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게 하고자 했다함은 옳지 않습니다. 조합사(曺閤使)가 또한 이 일에 마음을 두었으되 그가 삿된 스승에게 그르친바 될까 두려워하여 근래에 또한 이 편지와 같이 많은 말을 써 주었는데 이 사람의 총명식견(聰明識見)이 모두 크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곳이 있어 결코 방편의 말을 그릇 알아 실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킴에 이르지 않을 것이지만 다만 내가 그와 더불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사로이 걱정함이 지나쳤을 뿐입니다. 들으니 그대가 또한 그와 더불어 수행하는 도반이라고 하니 붓을 잡은 차에 나도 모르게 말을 하니 일없이 서로 만날 때에 시험 삼아 그에게 물어 편지를 가져 한 번 보면 바야흐로 내가 확신함이 얼굴만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서로의 뜻이 서로 맞음에 있으며 또한 세력과 이익으로 사귀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한 장을 적고 종이가 다하여 또 한 장을 보태어 다시 글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 편지도 또한 이 앞의 편지와 같이 이 가운데 사람(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이가 많은데 (나를 등용함은) 무슨 연유인가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좋은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반드시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가 비록 간략한 것 같으나 또한 기감(機感)이 서로 맞아서 또한 나도 모르게 답장을 하니 그대가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벼슬을 하리라 여겨집니다. 일상의 인연을 만나는 곳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베풀어서 임금의 어진 사람을 구하여 천하를 편하게 할 뜻에 보답한다면 참으로 그 알아주신바(임금이 당신을 알아주어 등용한 것)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갖가지를 감내(堪耐)하여 시종(始終) 오직 지금과 같이 공부해 간다면 불법과 세간법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전쟁하고 한편으로 밭을 갈면서 오래오래 하여 익어 순일해지면 일거양득(一擧兩得)하리니 어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2)


편지를 받아보니 종명루진(鐘鳴漏盡)의 비방은 임금에게 정성을 다하고 아래로 백성을 편한케 하기 위함이니 자연히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 그 소리를 감상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모든 일을 굳게 참아 역순의 경계를 만나면 바로 잘 힘을 쓰십시오. 이른 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 티끌같이 많은 세계)을 받듦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평소에 도를 배움은 다만 역순경계 가운데 수용하고자함이니 역순이 앞에 드러날 때 고뇌를 내면 평소에 일찍이 이 가운데서 마음을 쓰지 않음과 거의 같을 것입니다. 조사가 말씀하시되 “대상(境)과 반연(緣)이 좋고 싫고가 없거늘 좋고 싫어함이 마음에서 일어나니 마음으로 만약 억지로 이름 붙이지 않는다면 망정(妄情)이 무엇을 따라 일어나리요? 망정(妄情)이 이미 일어나지 않으면 참된 마음이 두루 안다.” 고 하셨으니 청컨대 역순의 경계에 항상 이와 같이 살핀다면 오래하면 자연히 고뇌(苦惱)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뇌가 이미 생기지 않으면 곧 마왕(魔王)을 몰아서 호법선신(護法善神)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 이미 나이도 많은데 (나를 등용함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 있으니 어찌 잊겠습니까!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하십시오. 거사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스스로 한가로운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벼슬과 권세가 손에 있으니 곧 바쁜 시절입니다. 한가할 때는 누가 한가하며 바쁠 때는 누가 바쁜가를 생각하고 마땅히 바쁠 때에 도리어 한가한 때의 도리(道理)가 있고 한가할 때에 도리어 바쁜 때의 도리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로 바쁜 가운데에 임금이 그대를 기용(起用)한 뜻을 체달하여 잠시라도 잊지 말고 스스로 경책하고 살펴보아 무엇으로써 보답할까 생각하십시오. 만약 항상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키면 끓는 가마솥이나 화롯불, 칼산, 칼수풀 위에도 또한 마땅히 나아갈 수 있는데 하물며 눈앞의 사소한 역순경계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대와 이 도리가 서로 계합한 까닭에 생각을 남기지 않고 다 토로(吐露)하였습니다.



황문사 절부에게 답함


여기서는 따로 <보충설명>을 하지 않고 본문에 바로 설명을 붙이겠습니다.


편지와 많은 이야기를〔許多葛藤이란 장주가 자신이 깨달은 인연이라든지 깨달은 내용에 대해 대혜스님께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을 말한다〕받고 나도 모르게 곧 풀어서 이와 같이 나[대혜스님 자신]의 견해를 보였더니 바로 활발발(活鱍鱍)하게 대답해 왔습니다.〔이 부분은 현재 출판되어 있는 서장에는 “이처럼 솜씨 있게 다룰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스승은 제자가 깨달으면 낱낱이 점검한 후에 하나도 막힘이 없을 때 인가를 하듯이 장주가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서신을 통해 보내오니 대혜스님께서 다시 장주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였더니 장주는 막힘이 없이 다시 맞받아쳤다는 말이다. 拈弄은 註 867번 참조〕진실로 스스로 증득한 사람이니 기쁘고 기쁩니다. 다만 이와 같이만 한다면〔이 말은 ‘장주와 대혜스님이 서로 깨달은 경지만 주고받는다면’의 의미이다〕교학하는 사람들이〔여기서 從敎人은 그냥 從敎人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從은 종사한다는 뜻이고 敎는 敎學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따라서 從敎人은 교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말하기를 “이 관리는 본분을〔관리로써의 임무〕 따르지 않고 어지럽게 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他家〔여기서 他家란 從敎人에 반대되는 말로 참선을 하는 문중 곧 선종을 말한다고 여겨진다.〕에는 당연히 상통한 사람의 아낌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일찍이 증득하고 깨달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지 만약 메아리만 듣는 무리〔부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말씀만 쫓아가는 사람〕라면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鑽龜打瓦를 글자대로 해석하면 문맥이 어색해서 이렇게 해석했는데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다시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며 비판한다면〔안진호스님은 狀主의 비판이라고 했으나 나는 입장이 다르다.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장주가 아니라 從敎人, 메아리만 듣는 무리이다. 이들은 장주가 대혜스님과 법거량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여래선을 깨달은 경지다, 조사선을 깨달은 경지다라고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함을 말한다〕나의 주장자를 다 맞아야 할 것입니다. 자 한번 일러 보시오.〔장주에게 묻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을 상주는 것입니까, 벌주는 것입니까〔是란 주장자로 때리는 것. 伊란 從敎人, 메아리만 듣는 무리를 가리킨다〕제방(諸方)에서 다시 30년을 의심하도록 맡기겠습니다.



손지현에게 답함


받아보니 수정한 금강경(金剛經)을 나에게 보이니 즐거이 한번 수희(隨喜)함을 얻었습니다. 근세 사대부가 그대와 같이 불경(內典)에 마음을 두고자 하는 자가 진실로 드뭅니다. 뜻(意趣)을 얻지 못하면 이와 같이 믿을 수 없으며 경(經)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면 경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보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참으로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입니다. 자세히 오래도록 음미(吟味)해보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모든 성사(聖師)들이 번역함이 참됨을 잃고 본래의 진리를 어지럽히고 문장의 글귀의 보태고 뺌이 부처님의 뜻에 위배되었다고 꾸짖고 또 이르되 처음 지송(持誦)함으로부터 곧 잘못됨을 깨닫고 정본(正本:원본)을 구하여 그릇됨을 바로잡고자 하였건만 그러나 잘못 익혀 온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일률적으로 뇌동(雷同)하여 서울의 장경본(京師藏本)을 얻음에 이르러 비로소 의거함이 있다고 하며 다시 천친(天親), 무착(無着)의 논송을 자세히 비교해 참고하니 그 뜻이 들어맞아서 드디어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없었다고 하며 또 장수(長水), 고산(孤山) 두 스님은 모두 글귀만 의지하고 뜻을 어겼다고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대가 감히 이와 같이 비판한다면 반드시 육조시대의 번역한바 범본(梵本)을 자세히 보아 여러 스님들의 번역이 틀렸음을 다 얻어서야 비로소 얼음이 녹듯 의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범본(梵本)이 없는데 곧 자기 혼자의 견해로써 성인의 뜻을 없앤다면 또한 인(因)을 부르고 과(果)를 몸에 지닐 때 성인의 가르침을 훼방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짐은 논하지 않으려니와 아는 자가 그것을 보고 다시 그대가 여러 스님의 틀린 것을 점검한 것과 같이 본인에게 돌아올까 걱정합니다. 옛사람은 “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은 것은 허물을 부르는 길이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그대는 평소에 잘 알지 못하지만 그대가 이 경(經)으로 인증(認證)을 구하여 온 세상에 유포(流布)하여 중생계에서 불종자(佛種子)를 심고자하니 이것은 일등의 좋은 일이요, 또 나를 유포시켜 줄 사람으로 여기고, 수정한 금강경으로 서로 마음이 계합함을 바라기 때문에 감히 답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청량국사(淸凉國師)가 화엄소(華嚴疏)를 지어 번역한 스님의 잘못됨을 바르게 하고자하였으나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여 다만 경전에 끝에 썼을 따름이니 예컨대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가운데 이른바 『일체의 부처님이 끝없는 몸을 두시어 색상(色相)이 청정하여 모든 육도에 널리 들어가셔도 물듦이 없다.』고 한 대목에 청량국사께서 다만 이르시되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상권 제 3쪽 제17행에는 일체제불(一切諸佛)이거늘 구본(舊本)에는 ‘諸’자가 빠졌다고 하고 그 나머지 경본(經本)에 빠진 것도 모두 경전의 끝에 주(註)를 달았습니다. 청량국사도 또한 성사(聖師)이나 첨가하고 뺌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감히 경의 끝에 쓴 것은 법을 아는 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 경전 중에 대유리보(大琉璃寶)라는 말이 있는데 청량국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마 패유리(呔琉璃)를 구본(舊本)에 잘못 써넣은 것이라고 하시고 또한 감히 고치지 않고 다만 이와 같이 경의 끝에다가 주석을 달았습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번역한 모든 스님들도 모두 얕은 지식의 인물이 아닙니다. 번역하는 곳에서는 말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글을 다듬는 사람도 있으며 범어(梵語)를 증명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바로 잡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말과 범어(梵語)를 서로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대가 오히려 성인의 뜻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그대가 이미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고 곧 망령되이 간삭(刊削)을 더하여 도리어 살펴보고 믿도록 함이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장수(長水)스님을 논하여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어긋났다고 하니 범본의 증거도 없으면서 어찌 곧 결정하여 그를 잘못됐다고 하겠습니까? 장수스님은 비록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다른 강사와 다르니 일찍이 낭야광조(瑯琊廣照)선사를 참례하여 낭야스님께 수능엄경(首楞嚴經) 중에 부루나(富樓那)가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 홀연히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여쭌 뜻을 청익(請益)하니 낭야선사가 곧 소리 높여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홀연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라고 하시니 장수스님이 언하(言下)에 크게 깨친 뒤 곧 허물없이 지내면서 스스로 좌주(座主)라고 일컬으니 대개 좌주(座主)는 흔히 글줄을 찾고 먹 자국만 세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른 바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니 장수스님은 깨달음이 없지 않으며 또한 글줄만 찾고 먹 자국만 세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 경문(經文)의 큰 단원이 분명하여 이 글은 지극히 쉽고 평범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견해를 세워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따를 것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그대가 무착론(無着論)에서 말한 『법신(法身)으로 응당히 여래를 봄이요, 상(相)이 구족했기 때문이 아니다.』를 인용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여래를 비록 응당 상(相)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으나 마땅히 상이 구족됨이 인(因)이 되어 아뇩보리를 얻었으니 이런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시되 『수보리야 너의 뜻은 어떠한가? 여래는 상(相)을 성취한 것으로 아뇩보리를 얻었는가?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등의 것은 이 뜻은 상(相)이 구족함은 자체가 보리가 아님을 밝힌 것이요, 또한 상(相)이 구족한 것으로 인(因)으로 삼지 않으니 상(相)은 색(色)의 자성(自性)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論)의 큰 단락이 분명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잘못 보고 이해한 것일 따름입니다. 색(色)은 상(相)의 연기(緣起)요, 상(相)은 법계(法界)의 연기(緣起)입니다. 양(梁)나라 소명(昭明)태자가 “여래가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을 32분 중에 이 분(分)으로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으로 삼은 것은 수보리가 상을 갖추지 못하면 연기가 없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처음 어머니 태에 있을 때 곧 공(空)을 알아 다분히 연기상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편지의) 뒷부분에 인용한 공덕시보살론(功德施菩薩論)의 끝부분에 『만약 상(相)의 성취가 진실로 있다면 이 상(相)이 없어질 때 곧 단(斷)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나기 때문에 멸함이 있다』는 구절과 또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경에서 말한『무엇 때문인가? 일체법(一切法)은 생김이 없는 성품이므로 단상(斷常)의 두 변(邊)을 멀리 여의었으니 양변을 멀리 여윔은 법계의 모습이다.』는 구절은 성(性)을 말하지 않고 상(相)을 말함은 법계는 성품의 연기인 까닭이요, 상(相)은 법계의 연기이기 때문에 성품을 말하지 않고 상을 말한 것입니다. 양나라 소명태자의 이른바 무단무멸분(無斷無滅)이 이것입니다. 이 단원이 다시 분명하거늘 또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 억지로 조목(節目)을 낼 뿐입니다. 만약 금강경을 간삭(刊削)해야 한다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대개 보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에 따라 모두 간삭(刊削)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한퇴지(韓退之)가 논어(論語) 가운데 ‘畵’자를 가리켜 ‘晝’자라 하고 구본(舊本)이 틀렸다고 하니 한퇴지의 견식으로 고칠 수 있거늘 다만 이와 같이 글 가운데에 논함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또한 법을 아는 자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규봉밀(圭峰密)선사께서 원각소초(圓覺䟽鈔)를 짓되, 밀(密)선사가 원각경(圓覺經)에서 깨달은 곳이 있어 감히 붓을 대니, 원각경 중에 『일체중생이 모두 원각(圓覺)을 증득했다』는 대목을 규봉선사는 ‘證’자를 고쳐 ‘具’로 하고 번역자의 잘못이라고 하되 범본(梵本)을 보지 못하여 다만 이와 같이 소(疎)에서 논(論)하고 감히 경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늑담진정(泐潭眞淨)화상께서 개증론(皆證論)을 짓고서 논(論)중에 규봉선사를 매우 꾸짖어 이르시되 ‘파계한 범부 누린내 나는 놈이다. 만약 일체중생이 원각(圓覺)을 갖추고 증득하지 못하면 축생은 영원히 축생이 되고 아귀는 영원히 아귀가 되어 모든 시방세계가 모두 구멍 없는 쇠방망인지라 다시 한사람도 참됨을 일으켜서 근원에 돌아감이 없으며 범부도 마땅히 해탈을 구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이미 원각을 갖추고 있어 또한 마땅히 증득함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대가 서울의 장경본으로 옳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본으로 근거를 삼고 있습니다. 만약 서울장본이 지방 고을로부터 들여왔으며, 경산(徑山)의 두 장경(藏經)같은 것도 모두 조정의 전성기 때 주어서 이른 것이요, 또한 지방고을 경생(經生)들이 쓴 것이니 만에 하나 잘못이 있다면 또한 어떻게 고쳐 바로 하겠습니까? 그대가 만약 아상(人我)이 없어 반드시 나의 말이 지극한 정성이라고 여긴다면 반드시 고금(古今)의 큰 잘못됨에 빠져 있지 않을 것이며 만약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여 반드시 고쳐서 빼어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함을 받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간삭(刊削)하여 출판하십시오. 나도 다만 수희(隨喜)하고 찬탄하겠습니다. 그대가 이미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경(經)을 가지고 인가(印可)를 구하니 비록 서로가 (얼굴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법으로 친함을 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여 당신의 마음을 거슬렸습니다. 당신의 지성(至誠)을 보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음에 두지 않고 (다 吐露했습니다.) 그대가 반드시 교승(敎乘)을 궁구하여 깊은 뜻에 이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 이름난 강사(講師)를 찾아서 한마음 한뜻으로 그와 더불어 자세히 참구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하여야 일등으로 교망(敎網)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만약 무상(無常)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크지만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했다면 마땅히 한마음 한뜻으로 사람의 생사의 소굴을 부술 수 있는 본분(本分)을 밝힌 스승을 찾아 그분과 더불어 목숨을 건 공부를 해나가 홀연히 칠통(漆桶)을 타파하면 곧 깨닫는 곳입니다. 만약 단지 이야기자루만 돕고자 하여 이르되 나는 모든 서적을 널리 읽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 선(禪)도 내가 알고 교(敎)도 내가 안다하며 또한 이전의 모든 번역한 사람들과 강사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점검하여 나의 능력과 나의 이해함을 드러내면 삼교(三敎:유․불․선)의 성인을 모두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인가를 구한 후에 간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어떠합니까?  



장사인 장원에게 답함


그대가 결정코 이일을 궁구하고자 한다면 다만 항상 마음으로 하여금 활짝 비워서 사물이 오면 응함이 마치 사람이 활 쏨을 배움에 오래오래 하면 과녁을 맞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달마(達磨)대사께서 이조 혜가(慧可)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담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거늘 지금 사람들은 겨우 이 말을 듣고 문득 이리저리 꿰어 맞춰 미련스럽게도 지각없는 곳에서 억지로 스스로 막아 눌림으로써 마음이 담벽과 같게 되기를 바라니 조사가 “그릇(錯) 알면 어찌 방편인줄 알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암두(巖頭)스님께서 “겨우 이렇게 하면 곧 이렇지 못하니 옳은 글귀도 깎고 그른 글귀도 또한 깎아라.”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비록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한 말에 움직임 당하지 않아, 달을 보고 손가락을 보지 않고 집에 돌아감에 길을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식(情識)을 부수지 못하면 마음의 불꽃이(망상들이) 선명할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에 단지 의심하던 바 화두를 들되 예컨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여쭙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께서 답하시기를 없다>를 오로지 들고 깨어있을지언정 요리조리 (무언가를) 해보려 함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또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한 현묘(玄妙)한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있다, 없다’하는 헤아림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진짜로 없다는 무(無)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일없는 갑(匣)속에 앉아있지 말며 또한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하는 곳에서 이해하지 마십시오. 바로 마음 쓸 곳이 없어 마음이 갈 곳이 없을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곧 좋은 곳입니다. 문득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나니 오직 숙세에 일찍이 반야의 종지를 심음이 깊으며 일찍이 무시광대겁(無始曠大劫)으로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섬겨서 바른 지견을 닦아 익혀 영식(靈識)가운데 둔 사람은 경계에 부딪히고 인연을 만나 현행(現行)하는 곳에서 문득 깨달으니 마치 만인(萬人)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 자기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 굳이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자연히 구하는 마음이 치달려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문(雲門)스님께서 이르시되 “말할 수 없을 때 있다가 말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 상량(商量)할 수 없을 때는 곧 있다가 상량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고 하시고 또 스스로 들어 일으키면서 이르시되 “다시 일러라 헤아리지 않을 때 이 무엇인고?” 또 사람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또 스스로 이르시되 다시 “이 무엇인고?” 하셨습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선(禪)에 많은 길이 있어 혹은 한번 묻고 한 번 답하다가 끝에 한 글귀가 많음으로써 선으로 삼고 혹은 고인이 도에 든 인연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헤아리며 이르되 이 속은 비었고 저 속은 실다우며 이 말은 깊고 저 말은 묘하다하여 혹 대신 대답하고 혹 달리 대답하는 것으로 선을 삼고 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이해하여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이 오직 식(識)에 있다하여 선으로 삼고 혹은 말없이 컴컴한 산 속 귀신굴에 앉아 있으면서 눈썹을 닫고 눈을 감는 것으로 위엄왕불(威音王佛) 저편(이전)과 부모가 낳지 않을 때의 소식이라고 일컬으며 또 묵묵히 항상 비춘다고 일러 선으로 삼으니 이와 같은 무리들은 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사람을 속인다 하고 깨달음으로 (그냥 방편으로) 세워 둔 것이라고 하니 스스로 이미 일찍이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도 않습니다. 내가 항상 납자들에게 일러 말하되 세간의 솜씨 좋은 재주와 예술도 만약 깨달은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묘함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다만 입으로 고요함을 말하여 곧 끝장을 내려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파묻고 동쪽을 향해 달리면서 서쪽의 물건을 취하려고 함과 거의 비슷해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며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지니 이 무리들은 불쌍하다고 이름하겠습니다. 경전(經典)에서는 그것을 일러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며 불혜명(佛慧命)을 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가 통하지 않으니 비록 좋은 인(因)이나 도리어 나쁜 과보를 부르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 몸을 부숴 먼지와 같이 할지언정 끝내 불법으로 인정(人情)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결정코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무명(無明)을 쳐부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절대로 삿된 스승이 순하게 어루만지며 동과(冬瓜)도장으로 인정함을 입고 곧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무리가 벼, 삼, 대나무, 갈대와 같이 많은데 그대는 총명하여 식견이 있어 반드시 이러한 나쁜 독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씀이 간절하여 빠른 결과를 구하고자하여 모르는 사이 저들의 오염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붓 가는대로 말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한바탕의 허물일 것입니다. 제발 내 말을 들으십시오. 다만 조주(趙州)의 <무(無)>자로 평상시 연(緣)을 만나는 곳에서 들되 끊어짐이 없게 하십시오. 고덕이 말씀하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 하셨으니 만약 말하여 하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어리석고 미쳐서 바깥으로 내달리는 것이니 힘써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탕승상 진지에게 답함


그대가 이미 이 일대사인연에 마음을 두니 사바세계(缺減界)는 허망하여 참되지 않아서 혹은 거슬리고 혹은 순(順)하는 하나하나가 모두가 공부할 마음을 일으키는 계기(時節)입니다. 다만 마음으로 하여금 활짝 비게 하여서 평상시 합당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분수를 따라 덜어버리고 경계에 부딪히고 연(緣)을 만남에 수시로 화두를 들지언정 빠른 결과는 구하지 마십시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마음을 두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두어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에 도안(道眼)이 가려짐을 당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뎌집니다. 다만 화두를 들다가 문득 (화두를) 드는 곳에서 생사심이 끊어지면 이것이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을 얻는다면 자연히 고인의 무수한 방편을 뚫어 가지가지 다른 견해가 자연히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에서 “마음의 생사를 끊고 마음의 빽빽한 수풀을 베고 마음의 더러운 때를 씻고 마음의 집착을 푼다.”고 했으니 집착하는 곳에 마음으로 하여금 (화두를) 굴리되 굴릴 때 또한 굴린다는 도리도 없으면 자연히 두두(頭頭)가 분명하고 물물(物物)이 드러나서 평상시 연(緣)을 따르는 곳에 혹 깨끗하고 혹 더럽고 혹 기뻐하고 혹 성내고 혹은 순(順)하고 혹은 거슬림에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름과 같아 튕기지 않아도 저절로 구를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얻으면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남양충국사(南陽忠國師)가 말씀하시되 “법이 얻은 바 있다고 말하면 여우의 울음이 된다.”고 하시니 이 일은 맑은 하늘에 해와 같아서 한번 보면 곧 보이니 진실로 스스로 본 것은 삿된 스승이 흔들래야 흔들 수 없습니다.(註 227번 참조) 지난날에 또한 일찍이 대면해 말하되 이 일은 전해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겨우 기특하고 현묘하여 여섯 귀가 함께 꾀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서로를 속이는 것이니 곧 끌어다 놓고 얼굴에다 대고 침을 뱉어야 할 것입니다. 서생(書生)에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세간법(世間法) 가운데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만약 이 일을(일대사인연) 깨달아버리지 못한다면 곧 헛되이 남섬부주(南閻浮提)에 와서 한 번 만났다가 인(因)을 거두고 과(果)를 맺을 때 일신(一身)에 악업을 두르고 갈 것이니 경전에서는 “어리석게 복을 지음이 삼생(三生)의 원수다.”라고 했으니 어째서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하는가? 제 일생(第一生)에는 어리석게 복을 지어 견성하지 못함이요, 제 이생(第二生)에는 어리석게 지은 복을 받으나 부끄러움이 없어서 좋은 일을 하지 않고 한결같이 업을 지음이요. 제 삼생(第三生)에는 어리석게 지은 복을 받음이 다하고 좋은 일도 하지 않아 몸뚱이를 벗어버릴 때에 지옥에 들어감이 화살을 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받기가 어렵고 불법은 만나기가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서 이 몸을 제도하겠습니까? 이 도를 배움에 마땅히 확고한 뜻이 있어야 하니 만약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마치 소리를 듣고 점치는 자가 사람이 동(東)을 말하는 것을 보고는 곧 사람을 따라 동쪽으로 달려가고 서(西)를 말하면 곧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잡아 가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융(懶融)선사께서는 “설사 한 법이 열반보다 뛰어나더라도 내가 설함은 또한 꿈과 환과 같다”고 말씀 하셨으니 하물며 세간의 헛되고 꿈과 같아 실답지 못한 법에 다시 무슨 마음이 있어 세간과 더불어 교섭하겠습니까? 원컨대 그대는 이 뜻을 견고히 하여 손에 넣는 것으로 확고한 뜻으로 삼으면 비록 대지(大地)와 유정(有情)들로 하여금 다 마왕(魔王)이 되게 하여 와서 어지럽게 하고자 하더라도 그 틈을 얻을 수 없으니 반야(般若)상에서는 헛되이 버릴 공부가 없습니다. 만약 마음을 위에서 말한 것에 둔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종자를 깊이 심어 죽음이 닥쳐왔을 때 또한 업식(業識)의 끄달림을 당해 모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몸을 바꾸어 돌아오면 또한 나를 매(昧)하게 하지 못할 것이니 살피십시오.



번제형 무실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불사(佛事)는 행하나 선어(禪語)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니 불사를 행함과 선어를 이해하지 못함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불사를 행하는 것이 곧 선어(禪語)임을 아십시오. 선어(禪語)를 알고 불사를 행하지 않으면 마치 사람이 물 속에 앉아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소리치는 것과도 같고, 음식 광주리 속에 앉아 있으면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땅히 선어가 불사이고 불사가 선어임을 아십시오. 행하는 것과 아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법에는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다시 이 속(법)에서 같음과 다름을 찾는다면 이것은 빈주먹 손가락 위에서 실다운 견해를 내는 것이고 근(根), 경(境), 법(法) 중에 헛되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입니다. 마치 물러가면서 앞으로 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급히 서두를수록 더디어지며 빨리 할수록 멀어질 것입니다. 바로 꺾어 마음을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해함과 이해하지 못함 같음과 다름 다름과 다르지 않음 이와 같이 사량함과 이와 같이 헤아리는 것은 타방세계(他方世界)에 쓸어버리고 다시 쓸어버릴 수 없는 곳에서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같은지 다른지를 살펴보면 문득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끊어질 것이니 마땅히 이러한 때에는 스스로가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성천규 화상에게 답함


이미 외호(外護)하는 사람을 얻고 (납자들을) 비추어 인도해 주는데 마음을 두었으면 스스로 마땅히 인사(人事)를 물리치고 자주 납자들과 불사(佛事)를 행하십시오. 오래하다 보면 자연히 수승(殊勝)해질 것입니다. 거듭 바라는데 방(조실채)에 있으면서 납자들에게 자세하게 점검하며 인정은 용납하지 말고 그들에게 낙초(落草)를 하지 말고 바로 본분초료(本分草料)로써 들어 보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얻게 하여야만 비로소 존숙(尊宿)이 사람을 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머뭇거리며 의심해서 답하지 못함을 보고 곧 그들에게 주각(注脚)을 내려주면 그들의 눈을 멀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본분의 수단마저 잃게 됩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더라도 곧 우리들의 인연법(因緣法)이 다만 이와 같음이요, 만약 한 개 반개(一箇半箇)라도 본분을 밝힌 이를 얻게 된다면 또한 평소에 뜻한 것과 원(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산체 장노에게 답함


전사(專使)가 와서 편지와 신향(信香)등을 받고 법을 열어 출세하여 석문(石門)에서 도를 설하여 쫓아온 바를 잊지 않고 악장로(岳長老)를 위하여 향을 잡아 양기종파(楊岐宗派)를 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미 이런 일을 맡았으면 꼿꼿하게 하여 철두철미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평소에 실제로 증득하고 깨달은 마음으로 단정히 방장실에 있는 것이 백이십근(百二十斤)의 짐을 지고 외나무다리 위를 지나가는 것과 같으니 다리를 헛디디고 손이 미끄러질 땐 자신의 목숨도 보존할 수 없는 처지인데 하물며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 못을 뽑고 쐐기를 뽑아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고덕(古德)이 “이 일은 80먹은 노인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아이들의 장난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고덕이 “만약 한결같이 종지의 가르침만 들면 법당 앞의 풀이 한길이나 자라 마땅히 사람을 고용해서 절을 돌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암두(巖頭)스님은 매번 이르시기를 일어나기 전에 한번 화두를 들고 눈을 부릅뜨라고 하셨고 안국사(晏國師)의 석문(石門)을 넘지 말라는 구(句)와 목주(睦州)선사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은 너에게 30방을 때리겠다는 것이다와 분양무업(汾陽無業)선사의 망상하지 말라와 노조(魯祖)선사의 무릇 승려가 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몸을 돌려 벽을 마주하고 앉는다 등을 사람을 위할 때는 마땅히 이러한 법식에 어둡지 아니하여야 비로소 위로부터의 종지(宗旨)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위산(潙山)스님이 앙산(仰山)스님에게 이르되 “한 곳에 종지를 세우려면 5가지의 인연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성취하게 된다.” 5가지의 인연이란 외호연(外護緣)과 단월연(檀越緣)과 납자연(衲子緣)과 토지연(土地緣)과 도연(道緣)입니다. 듣자니 어사대부(霜臺)인 조공(趙公)은 당신의 단월(檀越)이고 치정사업(致政司業)의 정공(鄭公)은 그대를 절에 들게 하였으니 두 사람은 천하의 (이름 있는) 선비입니다. 이로 볼 것 같으면 당신에게는 5가지의 인연이 조금은 갖추어졌습니다. 매번 납자들이 민중(閩中)으로부터 올 때 마다 법석의 성대함을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단월이 귀의하고 사대부들이 외호하며 절에 머물러 지킴에 마장(魔障)이 없으며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이니 마땅히 젊고 힘이 있을 때 이 일을 격려해야 합니다. 착수할 때는 마땅히 눈을 부릅뜨고 소홀히 함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근래에 한 종류의 장사치들이 곳곳에서 보잘것없는 선을 배워서 종종 종사가 소홀히 지나쳐 버리면 드디어 허공을 타고 메아리가 울리듯이 번갈아 서로 인가하여 주어 그릇 사람을 속이는데 이르러 바른 종풍으로 하여금 담박하게 하니 단전직지(單傳直指)의 가풍이 거의 없어지고 있으니 자세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조(五祖)스님께서 백운(白雲)에 계실 때 일찍이 영원(靈源)화상에게 답하여 올 여름 모든 농장에 낱알을 수확하지 못함은 근심되지 않지만은 근심하는 것은 선방의 많은 납자들이 여름 한철에 한사람도 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뚫지 못하여 불법이 장차 멸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법을 관장하는 종사의 마음씀을 보십시오. 또한 (그분들이) 언제 수입(收入)의 많음과 절의 크고 작음으로 경중(輕重)을 삼으며 쌀, 소금 같은 자질구레한 일로 급함을 삼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이미 출세하여 선지식이란 이름을 짊어졌으니 마땅히 한결같이 본분을 밝히는 일로 방문해 오는 이를 제접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과 곡식은 인과를 아는 소임자에게 맡기고 부서를 나누어 그들로 하여금 맡게 하고 때때로 전체적인 것만 살피시고 (소임)스님들을 배치함에 있어 많게 하지 말아 일상의 공양을 항상 뒷사람들로 하여금 남게 하면 자연 힘을 소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납자가 방에 이르면 칼 씀을 반드시 긴밀하게 하고 진흙을 묻히고 물을 적시는 일은 행하지 마십시오. 저 설봉공(雪峰空)선사를 근래 운거(雲居)의 운문암(雲門庵)에서 서로 만났는데 나는 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불법에 깊이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본분감추(本分鉗鎚)로 그에게 주었더니 뒷날 스스로 다른 곳에서 타파하여 대법(大法)을 이미 밝혀 지난번에 받아간 감추(鉗鎚)를 일시에 수용해서 바야흐로 내가 불법으로 인정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을 알았습니다. 작년에 한 권의 어록을 보내왔으니 정법이 쇠퇴한 위급한 시기에도 임제종지(臨濟宗旨)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대중처소에 보내두고 납자들과 더불어 보게 하고 내가 그참에 붓을 들어 그 뒤에 글을 써서 특별히 격려하여 본분납자들로 하여금 장래에 설법하는 법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처음에 그에게 진흙을 묻히고 물을 적셔 노파선을 설했던들 눈이 열린 후에 반드시 나를 욕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때문에 고인(古人)이 “나는 선사의 도(道)와 덕(德)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다만 선사가 나를 위해 설해주지 않는 것을 중히 여긴다 만약 나를 위해 설해 주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니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조주(趙州)스님께서는 “만약 나로 하여금 너의 근기를 따라 사람을 제접하면 당연히 3승12분교(三乘十二分敎)로 그들을 제접해야 하지만 나의 분상(分上)에서는 본분사로 사람을 제접한다. 만약 제접할 수 없다면 본래 배우는 자의 근성이 둔할 뿐이지 나의 일에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으니 거듭 생각해 보십시오.


大慧普覺禪師書 終








후기(後記)

대혜선사께서 40여년동안 설법하심에 법문이 천하에 가득하였으나 평소에 참학(參學)하는 사람들이 모아서 기록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납자가 개인적으로 베껴 써서 드디어 책을 만들었다. 만년에 대중들이 힘써 간청을 하여 이에 유통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스님의 회상에 있음에 시간상 선후(先後)가 있고 보고 들은 것에도 그 내용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있다. 또한 어진 사대부가 얻은 바의 법문을 각자가 소장을 하고 있어, 다 볼 수 있는 인연이 없으니 지금 법문을 모은 것이 자못 미진하니 다시 수집하여 별도로 후록(後錄)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문창이 삼가 아룀



ARTICLE  

머  리  말

 

귀의삼보하옵고

저는 사미 아무개 입니다.

저의 법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저는 사미계를 받고 바로 선방에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한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 혼자 한문을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한문에 대해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처음에 서장을 가지고 시도를 해 보았는데 여러 책을 통해 쭉 정리를 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카페를 운영하며 서로 자료를 공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인터넷을 사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이렇게 자료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노트북을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별로 사용할 부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컴퓨터를 가지고 주로 법문을 녹음해 시디로 만드는 것과 사전을 컴퓨터로 옮겨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사전을 통째로 컴퓨터에 옮겨 사용을 해보니 정말 편리했습니다.

첫째 무거운 사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둘째 글자를 찾는데 시간이 너무나 빨리 단축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도도 빨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민중서림에서 출간한 한한대사전과 또한 허사사전을 컴퓨터에 옮겨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불교사전과 선학사전등을 컴퓨터로 옮겨 사용할 예정입니다.

제가 하는 방법은 일일이 컴퓨터로 글자를 쳐서 입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캐너로 인식을 한 후 아크로벳으로 만든 후 색인 기능을 추가해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사전도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면 워드로 작업을 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문을 공부하다가 보면 한국에서 출판한 사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상당히 많은 단어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에서 출판한 중문대사전을 구입을 했습니다.

책이 10권인데다가 한권의 페이지가 1700여가 됩니다.

실로 방대한 자료입니다.

책이 10권이라 가지고 다니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단어를 찾기도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이것을 스캔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혼자서는 너무나 벅찬 일입니다.

전에 한한대사전을 스캔하는데도 거의 한달이 걸렸는데 중문사전을 스캔하는데 거의 1년이 걸린다는 얘기가 됩니다.

게다가 한한대사전에는 뒤에 한글로 찾는 부분이 있는데 반해 중문사전에는 원문만으로 되어 있어 한글로 찾는 부분이 없어 색인 작업을 함에 있어 하나 하나의 단어에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거의 1달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분명 노트북 하나에 한문사전 불교사전등을 가지고 다닌다면 부피도 줄뿐 아니라 글자를 찾는 것도 빠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9~10분만 저와 동참을 해 주신다면 1인당 한 달 정도면 스캔 작업을 할 수 있어 10권의 중문사전을 1달이면 끝내고 색인 작업도 1달이면 끝나 2달이면 그 많은 분량을 2달이면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전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동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드시 스캐너를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만약 동참을 해 주실 분이 계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스캔한 사전을 다 드리겠습니다.

리고 저는 최근에 향곡스님 법문 테입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잡음을 없애는데 기술이 없어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만 최근 그 방법을 어느 정도 파악을 했습니다.

아마 이번 하안거를 마치고 작업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지만 꼭 중문사전을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연락할 전화도 없고 또한 인터넷으로  계속 메일을 확인을 할 입장도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동참할 분이 계신다면 하안거를 마치고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저에게 메일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안거를 마치고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부디 많은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정리한 서장에도 많은 부분 지적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메일 주소: saytome825@hanmai.net

1. 반드시 연락번호를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하안거를 끝내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2. 제가 정리한 글은 상업적으로는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3. 다른 사이트에도 자료를 옮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학 혜연 기록

정지거사 황문창 거듭 기록


대혜선사행장


선사는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人)의 사람이며, 성(姓)은 혜씨(奚氏)이다. 어머니의 꿈에 신장(神將)이 검은 뺨에 우뚝 솟은 코를 가진 한 스님을 데리고 침실에 이르렀다. 사는 곳을 물으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했다. 깨어나고 보니 태기가 있었다. 태어나던 날에 밝은 빛이 방을 뚫고 나와 비추니 모든 고을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곧 이 해(남송(南宋)철종(哲宗)원우(元祐) 4年 已巳) 11월10일 巳時에 태어났다. 선사의 휘(諱)는 종고(宗杲)이다. 13살에 향교(鄕校)에 들어가 학우들과 더불어 놀 때 벼루를 던지다가 잘못해서 스승의 모자를 맞히고 돈 삼백으로 배상하고 돌아와서 말하되 ??세간의 책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찾는 것과 같겠는가!” 16세에 동산혜운원(東山惠雲院)의 혜재대사(惠齊大師)에게 의지하여 출가했다. 17세에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19세에 제방(諸方)을 돌아다니다가 태평주(太平州)의 은적암(隱寂庵)에 이르니 암자 주지가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어제 밤 꿈에 가람신장이 부촉하여 말하기를 내일 운봉열(雲峰悅)선사가 절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스님이 맞습니까?”라고 말하고 곧 열(悅)선사어록을 보이니 스님이 한번 보고 다 외우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운봉열선사 후신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조동종(曺洞宗)의 스승을 찾아뵙고 그 종지(宗旨)를 다 얻었지만 스님은 오히려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휘종(徽宗)대관(大觀) 3年 己丑(31세)에 담당무준(湛堂無準)화상을 찾아뵙고 7년을 시자소임을 보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담당이 열반에 이르러 스님으로 하여금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를 찾아뵙고 일대사를 성취하라고 지시하였다. 스님이 선화(宣和) 4年 壬寅(34세)년에 원오선사를 찾아뵙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선사가 멀리 장산(蔣山)에 계셨기 때문에 잠시 태평사(太平寺) 평보융(平普融) 회하(會下)에 머물렀다. 선화(宣和) 7년 乙巳(37세) 처음으로 변경(汴京) 천녕사(天寧寺)에서 원오(圓悟)선사를 찾아뵈었다. 막 40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원오선사가 개당(開堂)하고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여쭙되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곳입니까? 운문이 동산이 물위를 간다(東山水上行)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 법문 하시면서 천녕(天寧: 원오스님 자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말한다면 훈훈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처마 끝에 시원함이 생기는구나!”

스님이 그것을 듣고 문득 앞 뒤 사이가 끊어지거늘 원오선사께서 스님으로 하여금 택목당(擇木堂)에 거쳐하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시자소임을 신경 쓰지 말고 전심으로 보임케 하시었다. 후에 원오스님 방에서 어떤 스님이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화두를 묻는 것을 듣고서 스님이 곧바로 여쭈되 “오조(五祖)선사가 계실 당시에 일찍이 이 화두를 여쭈었다고 하니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원오선사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거늘 스님이 말하되 “이미 대중의 물음에 대답하셨거늘 지금 말씀하신다고 해서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원오스님이 부득이하여 이르시되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에 의지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여쭈니 오조선사께서 이르시되 묘사할래야 묘사할 수 없고 그릴래야 그릴 수 없느니라. 또한 나무가 쓰러져 등나무가 마를 때는 어떠합니까? 라고 여쭈니 오조선사께서 서로 따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대혜스님이 즉시 활연대오하여 말하되 ??저는 알았습니다.” 원오선사가 여러 개의 화두를 두루 들어서 물으니 모두 대답하여 막힘이 없었다. 원오선사가 기뻐하며 이르시되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하겠구나.” 곧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스님에게 주면서 서기직(記室)을 맡기니 스님이 이에 원오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원오선사가 촉(蜀)에 돌아가거늘 스님은 이에 몸을 숨기고 암자를 지어 기거하였다. 후에 호구사(虎丘寺)에서 여름을 날 때 화엄경(華嚴經)을 읽다가 제칠지보살(第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곳에 이르러 홀연 담당(湛堂)이 보인 바 앙굴마라(央掘摩羅)가 발우를 가지고 산모(産母)를 구했다고 하는 인연(因緣)을 확실히 알았다. 소흥(紹興) 7년 임금이 명을 내래 쌍경사(雙徑寺)에 머무르게 했다. 하루는 원오스님의 열반소식이 이르러 손수 글을 지어 제사에 나아갔다. 저녁 소참법문 때에 어떤 스님이 장사(長沙)선사에게 물은 것을 들어 법문 하시되 “남전(南泉)선사가 열반하시어 어느 곳으로 가셨습니까 라고 여쭈니 장사선사가 동촌에 나귀가 되고 서촌에 말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스님이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장사선사가 타고자하면 곧 타고 내리고자 하면 곧 내린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약 나라면 곧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스님이 원오선사가 열반하시어 어느 곳으로 가셨냐고 묻는다면 곧 그에게 말하되 대아비지옥(大阿鼻地獄)으로 갔다고 할 것이며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굶주리면 끓는 구리물을 마시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신다고 할 것이며, 도리어 사람이 구할 수 없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며 어째서 구할 수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평소에 차 마시고 밥 먹는 도리니라고 하리라.” 11년 5월 간신(姦臣) 진회(秦檜)가 스님이 장구성(張九成)과 작당을 했다고 아뢰어 승복과 도첩을 빼앗고 형주(衡州)에 15년 동안 귀양 보냈다. 26년 10월 명(命)을 내려 매양(梅陽)으로 옮겼다가 오래지 않아 승려의 신분을 되찾고 풀려났다. 11월에 칙서를 내려 아육왕사(阿育王寺)에 머물게 하였다. 28년 칙서를 내려 스님으로 하여금 다시 경산사(徑山寺)에 머물게 하여 크게 원오의 종풍을 펴게 하였으니 도의 융성함이 당시에 으뜸이었고 대중이 이천여명에 이르렀다. 신사년(辛巳年) 봄에 물러 나와 명월당(明月堂)에 기거하였다 다음해 壬午年(고종32년) 임금이 대해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효종 융흥원년(孝宗隆興元年) 계미(癸未)에 거듭 명월당에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에 대중이 별똥 하나가 절 서쪽에 떨어지는데 빛이 붉은 것을 보았다. 스님은 이어 약간의 병세를 보이었다. 8월 9일에 대중에게 “아마도 내일 가련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날 저녁 5시(五鼓)정도에 손수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촉하니 요현(了賢)이라는 스님이 게송을 청하니 스님이 곧 크게 ‘생(生)도 다만 이러하고 죽음도 다만 이러하거늘 열반게(涅槃偈)가 있고 없고에 무엇하러 열 내겠는가?’ 라고 쓰시고 편안하게 열반하셨다. 세수(世壽)는 75세요, 법랍(法臘)은 58세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고 휘(謚)를 내려 보각(普覺)이라 하고 탑(塔)은 보광(普光)이라 했다. 현재 살아 계실 때의 호(號)와 열반하신 후의 휘(謚)를 들어 대혜보각(大慧普覺)이라고 하는 것은 남악회양(南岳懷讓)화상의 호가 또한 대혜(大慧)여서 구별하기 위함 때문이다. 어록(語錄) 80권이 있는데 대장경(大藏經)을 따라 유통되고 법을 이은 사람이 83인이다.

증시랑 천유에게 답함

(묻는 글을 실음)


제가 근래에 장사(長沙)에 있으면서 원오(圓悟)선사의 편지를 받아보니 스님을 일컬어 만년(晩年)에 서로 만났으나 얻은 바가 매우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거듭 그 말씀을 생각한지가 지금 8년이 되었습니다만 직접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하면서 오직 간절히 사모하여 우러러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발심(發心)하여 선지식을 찾아뵙고 이 일(일대사인연)을 여쭈었으나 20살 이후에 혼인과 벼슬에 끄달림을 당하여 공부가 순일(純一)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지금의 늙음에 이르렀습니다. 아직까지 들은 바 없어 항상 스스로 탄식하고 부끄럽게 여기지만 뜻을 세워 발원(發願)함은 진실로 얕은 지견(知見)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려니와 깨닫는다면 반드시 바로 옛 조사스님들께서 몸소 증득(證得)한 곳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크게 쉬는 곳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마음은 비록 일찍이 한 생각도 물러남이 없었으나 스스로 공부가 마침내 순일하지 못함을 느꼈으니 뜻과 원은 크나 역량(力量)이 작다하겠습니다. 저번에 원오선사께 절실하게 간청을 드렸더니 스님께서 법어(法語) 6가지로써 보여주셨는데 그 처음은 바로 이 일을 보여주시고 뒤에 운문(雲門)선사의 수미산(須彌山)과, 조주(趙州)선사의 방하착(放下著)의 두 가지 공안을 들어서 저로 하여금 둔한 공부에 착수하라고 하시면서 항상 스스로 화두를 성성하게 들어라, 오래오래 하다보면 반드시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하신 노파심이 간절함이 이와 같건마는 어찌 둔하고 막힘이 이다지도 심합니까? 지금 다행히 가정의 세속인연을 다 마치고 한가하게 있으면서 다른 일없어 바로 간절히 스스로 채찍질하여 처음 세운 뜻을 갚고 있습니다만 다만 직접 가까이서 가르침을 얻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일생의 허물을 이미 낱낱이 아뢰니 반드시 이 마음을 훤히 비춰 주실 수 있으시니, 바라옵건대 자세하게 경책(警策)하고 제시(提示)하여 주십시오. 평소에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해야 거의 다른 길을 밟지 않고 바로 본분자리와 서로 계합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을 드림도 허물이 또한 적지 않으나 오로지 정성을 바칠 따름입니다. 스스로 숨기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지극히 여쭙니다.



증시랑에게 답함


글을 써서 보낸 것(편지)을 받으니 어릴 때부터 벼슬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큰스님들을 참예(參禮)했다가 중간에 과거와 혼인에 끄달림을 당하고 또 나쁜 견해와 습관에 이김을 받아 순일하게 공부할 수 없었던 것으로 큰 죄로 삼으며 또한 무상(無常)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환영(幻影)이어서 하나도 즐거운 것이 없음을 깊이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일대사인연을 참구한다고 하니 심히 병든 노승의 뜻에 맞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비가 되면 나라에서 주는 봉급으로 생활하게 되고 과거, 혼인, 벼슬살이는 세속에서는 면(免)할 수가 없는 것이니 또한 그대의 죄가 아닙니다. 조그마한 죄를 가지고 크게 두려움을 내니 무시광대겁(無始曠大劫)으로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고 반야(般若)의 종지(種智)를 익혀옴이 깊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그대가 말한 큰 죄라는 것은 세속의 성현(聖賢)도 또한 면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헛된 환영이어서 구경법(究竟法)이 아님을 알아 마땅히 이 불법 문중에 마음을 돌이켜서 반야의 지혜의 물로써 더러운 때를 씻어 없애고 청정하게 스스로 처신하여 지금부터 한 칼에 두 동강을 내어(과단성 있게) 다시 (번뇌가) 이어지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반드시 앞(과거)도 뒤(미래)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환(幻)이라고 했으니 짓는 때(업을 짓는 것)도 또한 환(幻)이며 받는 때(과보를 받는 것)도 또한 환이며, (幻인줄) 알고 깨닫는 때도 또한 환이며 미혹하여 전도된 때도 또한 환이며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환입니다. 지금 그릇된 줄을 알았다면 환약(幻藥)으로써 다시 환병(幻病)을 치료한 것이니 병이 나아 약을 없애면 전과 같이 다만 옛사람이 됩니다. 만약 달리 사람이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견해인 것입니다. 그대는 깊이 생각하여서 오로지 이와 같이 공부해 가되 때때로 고요한 가운데에 절대로 수미산(須彌山), 방하착(放下著) 두 가지 공안을 잊지 말고 지금부터 착실히 공부해 가되 반드시 이미 지난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생각하지도 말지니, 생각하거나 두려워하면 곧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오로지 모든 부처님 앞에 ‘제 마음이 견고하여 영원히 물러남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의지하여 선지식을 만나 한마디 말에 바로 생사(生死)를 여의고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깨달아 증득하여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옵니다.’ 라고 큰 서원(誓願)을 세우십시요. 만약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하면 깨닫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文殊)로부터 발심하여 점차 남쪽으로 가는데 110성을 지나 53선지식을 참예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손가락 한번 퉁기는 찰나 문득 이전의 선지식에게서 얻은 법문을 잊고 다시 미륵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들고자 생각하니 이에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110유순(由旬)을 지나 선재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여! 만약 믿음의 뿌리를 여의었다면 마음이 나약하여서 근심하고 후회하며 수행이 갖추어지지 않아 부지런히 정진함이 시들어버려 하나의 선근(善根)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생겨 조그만 공덕에 곧 만족하게 여기니 좋은 방편으로 행원(行願)을 일으킬 수가 없고 선지식의 거두어 보호하는바 되지 못하며 혹은 이와 같은 법성(法性)과 이와 같은 이치(理趣)와 이와 같은 법문(法門)과 이와 같은 소행(所行)과 이와 같은 경계(境界)를 깨달아 알 수가 없으며 저 주변지(周遍知), 종종지(種種知), 진원저(盡源底), 해료(解了), 취입(趣入), 해설(解說), 분별(分別), 증지(證知), 획득(獲得)을 모두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선재에게 말씀하시어 보이시니 선재가 말끝에 아승지법문(阿僧祗法門)을 성취하여 무량한 큰 지혜의 광명을 갖추어 보현의 문에 들어가 한 생각 가운데 삼천대천세계미진수의 모든 선지식을 뵙고 가까이하여 공경히 받들어 모시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아 행하고 불망념지장엄장해탈(不忘念智莊嚴藏解脫)을 얻어서 보현(普賢)의 모공찰(毛孔刹)에 들어가 한 모공에 한 걸음을 걸어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세계(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世界)를 지나 보현과 더불어 동등하고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며 찰(刹)과 행(行)도 동등하며 해탈자재(解脫自在)도 모두 동등하여 둘도 없고 다름도 없었으니, 마땅히 이러한 때에 이르러야 비로소 삼독(三毒)을 돌이켜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만들며, 육식(六識)을 돌이켜 육신통(六神通)이 되게 하며 번뇌(煩惱)를 돌이켜 보리(菩提)로 만들며 무명(無明)을 돌이켜 큰 지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러한 말도 오로지 그 사람의 마지막 한 생각의 진실함에 있습니다. 선재가 미륵이 손가락을 퉁기는 찰나에 오히려 모든 선지식이 증득한 삼매를 문득 잊었는데 하물며 무시(無始)로부터 거짓된 나쁜 업의 습기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만약 전에 지은 죄를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지금 눈앞의 경계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며 혹은 관직과 부귀 은혜와 사랑도 모두가 실재(實在)하는 것이 됩니다. 이미 실재한다면 지옥 천당도 또한 실제로 있는 것이며 번뇌와 무명도 또한 실제로 있는 것이며 업을 짓는 것도 또한 실제로 있으며 과보를 받는 것도 실제로 있으며 증득한 법문도 또한 실재(實在)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이러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미래가 다하도록 다시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에 나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가지가지 방편이 도리어 망어(妄語)가 될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그대가 편지를 보낼 때 집에 모셔놓은 불상에 향을 피우고 멀리서 내가 있는 암자에다가 절을 한 후 보낸다고 하니 그대의 정성스런 마음 지극하고 간절함이 이와 같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음이 비록 그다지 멀지 않으나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비록 번잡스럽게 말을 많이 한 것 같으나 또한 정성이 지극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니 감히 말 한마디 글자 하나도 당신을 속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약 그대를 속였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될 뿐입니다. 또 기억해 보니 선재동자가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이 성어해탈(誠語解脫)을 얻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깨달음에 대해 과거에도 물러남이 없었고 현재에도 물러섬이 없었고 미래에도 물러남이 없어 무릇 구하는 바를 성취함은 모두 정성의 지극함이 미치는 바에 연유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그대는 이미 죽의포단(竹倚蒲團: 참선할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의자와 창포로 만든 방석)으로 벗을 삼았으니 선재가 최적정바라문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낼 때 집에 모셔진 불상에 향을 피우고 멀리 암자에 절을 한 후 보냄은 오직 내가 그대를 믿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것은 정성이 매우 지극한 것입니다. 오로지 (나의 말을) 들으십시오. 오직 이와 같이 공부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성취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증시랑에게 답함(2)


그대가 부귀(富貴)한데 있으면서 부귀에 꺾이어 얽매인 바가 되지 아니하니 일찍이 반야지혜종자를 심지 않았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공부하는 중간에 이러한 뜻을 잊고 날카로운 근기와 총명함에 장애 되어 얻은 바 있다는 마음(알았다고 하는 마음)이 앞에 있어 곧 놓아버리기 때문에 옛 조사들의 직절경요처(直截徑要:생사를 끊는 지름길)에 한칼로 두 동강내어 바로 쉴 수가 없습니다. 이 병은 단지 현명한 사대부뿐만 아니라 오래 참구한 납자(衲子)도 또한 그러합니다. 대개가 물러나서 힘 들린 곳에 나아가 공부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총명(聰明), 의식(意識), 계교(計較), 사량(思量)으로 밖을 향해 치달아 구하며 문득 선지식이 총명, 의식, 사량, 계교 외에 본분초료(本分草料)로써 보이면 대개가 그 자리에서 어긋나 버리고 “바야흐로 옛날부터 큰스님들은 사람에게 주는 실다운 법이 있다. 예컨대 조주의 방하착과 운문의 수미산과 같은 유형이 이것이다”라고 말들하고 있습니다. 암두(巖頭)스님께서는 “경계를 물리침이 으뜸이 되고 경계를 쫓아가는 것이 저급(低級)한 것이 된다.”고 하셨으며 또 “대개 으뜸이 되는 종지(宗旨)는 반드시 언구(句)를 알아야 되는데 어떤 것이 언구(句)인가? 온갖 것을 사량하지 않을 때를 정구(正句)라고 하며 또 거정(居頂)이라고 부르며 또한 득주(得住)라고 부르며 또한 역역(歷歷)하다고 부르며 또한 성성(惺惺)하다고 부르며 또한 이러한 때(恁麽時)라고 부른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야흐로 이러한 때라야 모든 시비(是非)를 똑같이 쳐부수게 되니 겨우 이러하다면 곧 이러하지 않게 됩니다. 옳은 글귀도 깎아버리고 그른 글귀도 또한 베어버려 마치 한 덩어리 불과 같아 닿으면 곧 타버리는 것처럼 어디에 기댈 곳이 있겠습니까? 지금 사대부는 대개가 사량(思量)과 계교(計較)로써 집을 삼고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곧 “아마도 공(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하니 비유하건대 배가 아직 뒤집히지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물로 뛰어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매우 가련하고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근래 강서(江西)에 이르러 여거인(呂居仁)을 보았는데 거인이 일대사인연에 마음을 둔 것이 매우 오래되었으나 또한 깊이 이러한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찌 총명하지 않겠습니까만은 내가 일찍이 그에게 “그대가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데 두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은 공(空)한가, 공하지 않는가 한번 일러보시오” 라고 물으니 그가 머뭇거리며 생각하다가 계교(計較)로써 단지 대답하고자하여 그때 바로 할(喝)을 하니 지금까지도 아득하여 단서(巴鼻)를 찾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있어 곧 놓아버려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요, 별다른 어떤 것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한번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시간이 흘러가면 자연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장차 마음속에 깨닫기를 기다린다거나 마음에 쉬기를 기다린다면 지금부터 참구하여 미륵(彌勒)부처님께서 오시더라도 또한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쉼을 얻을 수도 없고 점점 더욱 미혹하고 답답해질 뿐입니다. 평전(平田)화상께서 “신광(神光)은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萬古)에 아름다운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옛 큰스님은 “이 일은 유심(有心)으로 구할 수 없으며 무심(無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말로써 이르지도 못하며 고요한 것으로도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일등(一等)의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거늘 종종 참선하는 사람들은 다만 이렇게만 생각하고 전혀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는 자세하게 보지 않습니다. 만약에 근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듣고 들어서 그 자리에서 금강왕보금(金剛王寶劍)을 가지고 한번에 베어 이 네 가지 길의 얽힘을 베어 끊는다면 생사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범부와 성인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계교와 사량도 또한 끊어지며, 득실시비(得失是非)도 또한 끊어지니 본인의 그 자리가 벌거벗은듯 드러나고 물을 뿌려 깨끗한 것과 같아서 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 유쾌하고,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옛날에 관계(灌谿)화상이 처음 임제(臨濟)선사를 참예할 때 임제선사께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곧 법상에서 내려와 갑자기 멱살을 잡으니 관계화상이 곧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제스님께서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아시고 곧 밀쳐내고 다시 말없이 그와 더불어 거량(商量)하니 이러한 때에 관계화상이 어찌 사량, 계교로써만 응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다행히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거늘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그것으로 일을 삼지 아니하고 다만 ‘머트러운 마음씀(麤心)이다’라고 하니 관계화상이 처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깨달아 증득하며 쉼을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다면 당시에 멱살을 잡히고 곧 깨달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곧 손발을 묶고 온 천하를 한바퀴 돌더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쉼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계교(計較)하고 꿰어 맞춤(安排)도 식정(識情: 6식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이며 생사를 따라 옮겨 다님도 또한 식정이며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거늘 지금 참구하여 배우는 자는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태어나고 죽고 하니 교(敎)에서는 ‘식(識)을 따라 행하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면목(本來面目)에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만약 혹 한때라도 놓아 버리고 모든 것을 사량, 계교하지 않는다면 문득 육신을 잊고 본분(本分)을 밟게 되리니 곧 이 식정(識情)이 바로 진공묘지(眞空妙智)이지 다시 얻을만한 특별한 지혜가 없습니다. 만약 달리 얻은바 있고 증득한바 있다면 도리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이 미혹할 때에는 동쪽을 불러 서쪽이라고 하다가 깨달았을 때는 서쪽이 곧 동쪽인지라, 달리 동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진공묘지가 태허공(太虛空)과 수명이 같으니 단지 태허공 속에 한 물건이라도 그것(허공)을 방해함이 있겠습니까? 비록 한 물건에도 장애를 받지 않으나 모든 물건이 허공에 오고 감에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러하여 생(生)과 사(死), 범부와 성인, 번뇌가 한 점도 붙을 수 없습니다. 비록 붙을 수 없으나 삶과 죽음, 범부와 성인이 그 가운데에 오고 감에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믿고 꿰뚫어 본다면 비로소 이것은 나고 죽음에 대자유(大自由)를 얻은 사람입니다. 비로소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著)과 운문(雲門)의 수미산(須彌山)과 약간의 상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고 놓지 못한다면 다시 하나의 수미산(須彌山)을 짊어지고 가는 곳마다 행각(行脚)하여 눈 밝은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들어 보이십시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증시랑에게 답함(3)


방(龐)거사께서 “다만 바라건대 모든 있는 바를 비우고 절대로 없는 바를 채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다만 이 두 구절을 깨달으면 일생참학(一生參學)의 일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날 일종의 머리 깎은 외도(外道)가 자기의 안목(眼目)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갈단(獦狚)처럼 쉬어라.’ 하니 만약 이와 같이 쉴진대 천불(千佛)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쉴 수가 없고 점점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미혹하고 답답하게 할뿐입니다. 또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관찰하라.’(주136번을 참조) ‘일어나는 생각을 잊고 묵묵히 비추어 보라’ 하니 비추어보거나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 점점 더욱 미혹하고 답답해져서 깨달을 기약이 없나니, 다만 조사의 방편을 잃고 잘못 사람을 지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헛되이 태어났다가 쓸데없이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깨달음)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이렇게 쉬어가라. 쉬어가다 보면 정념(情念: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리니 이러한 때에 이르면 어둡고 무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성역역(惺惺歷歷)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다시 독으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나는 평소에 이러한 무리를 보면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겨 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미 스스로의 눈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책에 쓰인 말을 가지고 본보기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니 이러한 것이 어떻게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요? 만약 이러한 것을 믿는다면 영겁토록 참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도 평소에 사람들로 하여금 좌선하되 고요한 곳에서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병에 대해서 약을 주는 것이지 실제로 이렇게 사람들에게 지시한 것은 없습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황벽(黃檗)스님께서는 “우리 선종은 위로부터 이어져온 이래로 일찍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이나 알음알이를 구하지 말고 다만 도를 배우라고 이른다.”고 말씀하셨으니 일찍이 사람을 제접하는 말씀이었으나 도(道)라는 것도 또한 배울 수 없는 것이니 마음에 도를 배우겠다는 것이 존재한다면 도리어 완전히 도에 미혹하게 될 것입니다. 도에는 방향과 장소가 없으니 이름하여 대승심(大乘心)이라고 하니 이 마음은 안과 밖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니 진실로 방향과 장소가 없으니 첫째로 지식이나 알음알이를 내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에게 말하노니 지금의 정량(妄情과思量)처로써 도를 삼아야 할지니 정량(情量)이 만약 다 없어진다면 마음에 방향과 장소가 없으니 이 도는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인데 다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해 미혹함이 마음속에 있어 그런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어 이 일을 말씀하셨으니 중생들이 깨닫지 못할까 두려워하시어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으니 이름에 집착하여 알음알이를 내지 마십시오. 앞에서 말한 눈먼 사람이 잘못 사람에게 지시함은 모두가 고기의 눈을 알아 밝은 구슬이라고 하니 이름에 집착하여 알음알이를 낸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관찰하라함은 이것은 눈앞의 감각을 고집하여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고, 쉬어서 감각도 지식도 없는 것에 이르면 마치 흙, 나무, 기와, 돌과도 비슷하니 이러한 때는 어두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함은 또한 방편으로 묶인 것을 풀어 주는 말을 잘못 알아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경계를 따라 비추어 보되 나쁜 생각이 나타나게 하지 말라하니 이것은 또한 8식(八識)을 알아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하고 마음이 움직임은 신경 쓰지 말라.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짐은 본래 실체가 아니니 만약 집착하여 실제라고 한다면 생사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하니 이것은 또한 자연(自然)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사상을 고집하여 구경법(究竟法)으로 삼아 알음알이를 내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모든 병은 도를 배우는 사람의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눈먼 종사(宗師)의 잘못 지시한데 연유한 것입니다. 그대는 청정하게 스스로 처신하면서 도에 대한 한 조각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이 있으니 공부가 순일하다 순일하지 못하다 관여하지 말고 다만 옛 조사들의 말씀에 대해서 다만 탑을 쌓는 것과 같이하여서 한층 쌓고 또 한층 쌓는 잘못된 공부를 한다면 깨달을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한 곳에다 마음을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축착합착(築著磕著)하여 문득 깨달아 버릴 것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킴이 오히려 허물이 있습니까? 수미산이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놓아버려라.> 이 속에서 의심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오로지 이 속에서 참구할지언정 달리 사람에게 지시하여 줄 불법은 없습니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마음대로 강북 강남의 선지식에게 물어서 한번 의심하고 의심해 보십시오.



증시랑에게 답함(4)


온 편지를 자세히 읽으니 곧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한 때도 끊어짐이 없으며 공무(公務)의 바쁜 가운데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급류(세상사) 가운데에 항상 스스로 맹렬히 살펴 전혀 방일하지 않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오래될수록 더욱 견고해진다고 하니 매우 나의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번뇌는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아 어느 때에 마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시끄러운 가운데 죽의포단(竹倚蒲團)의 일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평소에 고요한 가운데에 마음을 두는 것은 바로 시끄러운 가운데에 쓰기 위함이니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 힘을 얻지 못한다면 도리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에서 공부하지 않는 것과 매 일반입니다. 받아보니 전생의 인연이 복잡하여 지금 이러한 과보를 받는다고 한탄하니 다만 그 말만은 듣지 못하겠습니다.(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낸다면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옛 큰스님께서는 “흐름을 따라(인연을 따라) 성품을 안다면 기쁨도 없으며 또한 근심도 없다”고 하셨으며 유마가사께서는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언덕과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지 않고 습진 진흙에서 이 꽃이 핀다.”고 하셨으며 부처님께서는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일체사법(一切事法: 차별적인 현상계)이 성취된다”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인연을 따라 감응(感應)을 두루 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항상 보리좌에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만약 고요한 곳을 옳다고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세간상(世間相)을 무너뜨리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며, 생멸(生滅)을 여의고 적멸(寂滅)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할 때 잘 힘을 쓸지니 문득 시끄러운 속에서 고요할 때의 소식을 쳐 뒤집는다면 그 힘이 좌선할 때보다 천만억배 수승할 것입니다. 내말을 믿어십시요. 결코 당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또 받아보니 방거사의 두 구절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마음에 새겨두고 경계하는 말로 삼는다고 하니 훌륭하기가 더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시끄러운 때에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 마음을 어지럽힐 뿐입니다. 만약 마음이 움직일 때는 다만 방거사의 두 구절로써 들면, 곧 더울 때에 시원하게 하는 약을 먹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대는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추었으니 이것은 큰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고요한 가운데 공부에 머물러 있었으니 바야흐로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의 분상(分上)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만약 업식(業識)이 아득한 증상만인(增上慢人)의 앞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면 곧 그에게 악한 업의 짐만 더할 뿐입니다. 많은 종류의 병통은 이미 앞 편지에 있으니 일찍이 자세히 이해하였습니까?



증시랑에게 답함(5)


편지를 받으니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방편문(方便門)이니, 방편문을 빌어서 도에 들어감은 옳거니와 방편을 고집하여 버리지 못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진실로 보내준 글과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읽고 매우 즐거워서 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방의 깜깜한(진리의 눈이 없는) 무리들은 다만 방편을 고집하여 버리지 못하고 참다운 법으로 사람에게 지시한다고 하니 이 때문에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판사정설(辨邪正說)을 지어 그들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근세에 마(魔)가 강하고 법(法)이 약하여 고요함(번뇌가 없는 것)이 들어와 맑고 고요한 경지와 일치하는 것으로써 구경을 삼는 자가 수(數)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방편을 고집하여 버리지 아니하고 종사가 되는 자가 마(麻)와 낱알(粟)과 같이 많습니다. 나는 근래 일찍이 납자들에게 이 두 가지를 들어 말했는데 바로 보내온 편지의 말과 한 글자도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반야의 속에 마음을 머무르고 생각생각 끊어짐이 없는 그대가 아니라면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의 각기 다른 방편을 훤히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칼자루를 쥐고 있습니다. 이미 칼자루를 얻어 손에 쥐고 있는데 어찌하여 방편문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지 못함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야하니 경전의 가르침과 옛 조사들의 어록과 수많은 차별의 말씀도 또한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며 예컨대 <수미산(須彌山)>, <방하착(放下著)>, <죽비자(竹篦子)>,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의 화두도 또한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해 나갈 것이며 다시 별도로 다른 알음알이를 내지 말며 달리 도리를 구하지도 말며 달리 재주도 뽐내지 마십시오. 그대가 능히 급류(세상사) 가운데에 늘 스스로 이와 같이 움켜쥐고도 도를 만약 성취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기 바랍니다. 편지를 받으니 꿈에 향을 사르고 나의 방에 들어오니 매우 조용했다고 하니 절대로 꿈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마땅히 이것은 진실로 방에 들어 왔다고 아십시오. 보지 못했습니까? 사리불(舍利佛)이 수보리(須菩提)에게 묻되 “꿈속에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설한 것이 깨어났을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수보리가 이르시되 “이 뜻은 깊어서 내가 설할 수 없습니다. 이 회상에 미륵보살님이 계시니 당신은 그분께 가서 여쭈어 보십시오.” 하니 돌(咄)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설두(雪竇)선사가 이르시되 “그때 만약 방관하지 않을진대 말이 끝나자마자 침 한방을 놓을 것이지 누가 미륵이라고 이름하며 누가 미륵인고 곧 빙소와해(冰銷瓦解)를 보였구나” 돌(咄) 설두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묻되 “증대제(曾待制)가 꿈에 스님의 방에 들어 왔다고 하니 또한 말해보시오 깼을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내가 곧 그에게 말하되 “누가 방에 들어온 사람이며 누가 방에 들어 왔다고 하는 자이며 누가 꿈을 꾼 자이며 누가 꿈을 이야기하는 자이며 누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이며 누가 정말로 방에 들어온 자이겠는가?” 돌(咄)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증시랑에게 답함(6)


온 편지를 자세히 여러 번 읽고 철과 돌같이 굳센 마음을 갖추고 결정코 이루겠다는 뜻을 세워 초조(草草: 빨리 도를 이루겠다고 허둥지둥 서두르는 것)해 하지 않음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해 나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 또한 염라대왕과 더불어 서로 겨룰 수 있을 것이나 정문안(頂門眼)을 활짝 열고 금강왕보금을 쥐고서 비로자나불 머리꼭대기에 앉았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일찍이 세간에 살면서 도를 배우는 벗(方外道友)에게 지금의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오로지 빠른 결과만을 구하고 그릇된 줄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일없이 반연을 끊고 고요히 앉아 몸소 참구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은 몇 권의 경전을 보고 몇 번의 소리로 부처님을 염(念)하며 부처님 앞에 여러 번 예배하여 평생에 지은 죄를 참회하여 염라대왕의 손에 있는 철봉을 벗어 나고자함과 같지 못하다는 말들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지금의 도가(道家)의 사람들은 온전히 망상심(妄想心)으로 해의 정기와 달빛을 상상하며 노을을 삼키고 기운을 삼키면서 오히려 몸을 가지고 세상에 머물더라도 춥거나 더움의 압박을 받지 않는데 하물며 이 마음을 돌이켜 온전히 반야(般若) 속에 둠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옛 성인이 “비유하자면 파리가 곳곳에 앉을 수는 있지만 오직 불꽃 위에는 앉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이러하여 곳곳에 닿을 수 있지만 오직 반야의 위에는 오를 수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정말로 생각 생각이 초발심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아니하며 본인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에 끄달림을 돌이켜 반야 위에 둔다면 비록 이번 생에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숨이 끊어질 때 확실히 악업(惡業)에 끌려 악도(惡道)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다음 생에 태어나면 금생에 세운 원력(願力)을 따라 진실로 반야 속에 있으면서 그 자리에서 수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된 일이어서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애써 배우지 않더라도 무시(無始)이래 배운 것이 익었으며 길도 또한 익었는지라 자연 취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그 근원을 만나게 되니 마땅히 힘써 멀리 두어야 합니다. 세간을 벗어나 반야를 배움은 무시이래로 등져왔으니 문득 선지식의 법문하는 것을 듣고 자연히 이해할 수 없나니 마땅히 확고부동한 뜻을 세우고 그것과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여 결정코 양립하지 않게 해야 됩니다. 이런 곳(반야)에 만약 깊이 들어간다면 저곳(중생계의 일)을 애써 물리치지 않더라도 모든 마(魔)와 외도(外道)가 자연히 숨을 것입니다. 생소한 것은 놓아 익게 하고 익혀온 것은 놓아 생소하게 하면 바로 이와 같이 되니 평소에 공부를 지어가는 곳에 칼자루를 잡고 점점 힘 들릴 때를 느낄 때 곧 이것이 힘을 얻는 곳입니다.



이참정 한로의 묻는 글


제가 근래 스님께 여쭙고 어리석고 막힌 것을 뚫어 주심을 입고 문득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근식(根識: 根本識인 8식을 말함)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에 배워 안 것이 다. 알음알이에 떨어져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마치 헤진 솜옷을 입고 가시풀 속을 가면 자연히 들러붙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놓고 기뻐함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스님께서 자세하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고을에 이른 후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자식을 안고 손자를 보는 등 모든 것들이 옛날 그대로이되 이미 얽매이는 마음이 없고 또 기특하다는 생각도 내지 않습니다. 그 외 숙세(宿世)부터 익혀온 옛 장애도 또한 점점 경미해지고 있으며 이별할 때 간절히 말씀해 주신 것은 감히 잊지 않습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왔으나 대법(大法)에는 밝지 못하여 일을 만나거나 근기에 따라 대하고 일에 부딪히면 장애가 없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다시 들어 가르침을 주시어 저로 하여금 문득 이르는 것이 있다면 거의 법석(法席)에 대해 결점이 없을까 합니다.



이참정에게 답함


편지를 보니 성(城)에 이른 후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자식을 안고 손자를 보는 모든 것들이 다 그대로이되 이미 마음에 두는 것이 없다고 하며 또한 기특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며 숙세에 익혀온 옛 장애들이 점점 경미해진다고 하니 세 번 이 말을 되풀이하여 읽고 기뻐서 뛰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될 공부를 하는 영험입니다. 만약 한 번 웃는 속에 백 천가지를 알고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뛰어난 그대가 아니었다면 불가(佛家)에서 과연 전하지 못하는 오묘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며 만약 그대가 아니었다면 의심하고 성낸 두 글자의 법문을 미래가 다하도록 결국 무너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사 허공으로 하여금 나의 입이 되고 풀, 나무, 기와, 돌이 방광(放光)을 하여 도리(道理)를 도와 이야기한다고 해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전할수도 없으며 배울 수도 없음을 막 믿게 되었으니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깨달으며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가 쉬어야만 비로소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지금 한번 웃음에 문득 얻은 것이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말하는 일체유위(一切有爲)의 허망한 일을 취하지도 않으며 비록 다시 말에 의지해서 말하지 않으나 다시 또한 말없는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지에서 말한바 이미 걸리는 마음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 가만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계합(契合)합니다. 이 말을 따름은 이름하여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파순(波旬)의 말이 됩니다. 나는 평소에 큰 서원이 있는데 차라리 이 몸이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끝까지 이 입으로 불법을 가지고 인정으로 삼아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장차 옛 그대로를 따르되 다시 대법(大法)이 밝다, 밝지 못하다는 것과 근기에 응함에 장애가 있다 없다는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러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다만 옛날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받아보니 여름이 지난 후에 다시 나온다고 하니 매우 나의 뜻에 맞습니다. 만약 다시 조바심을 내어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서로 계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날에 그대가 매우 기뻐함을 보고 이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말로 인해 다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쁨이 이미 안정이 되어 비로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일은 극히 쉽지 않으니 마땅히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종종 좋은 근기의 훌륭한 지혜를 갖춘 자는 경지를 얻으면 힘을 쓰지 않고 결국 쉽다는 마음을 내고 다시 수행하지 않고 대개가 눈앞의 경계에 빼앗겨버려 주체가 되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미혹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마(魔)가 그 틈을 타서 마침내 마의 거두어 가짐을 당하게 되어 죽음에 닥쳐 또한 힘을 얻지 못하게 되니 제발 기억하십시오. 저번에 했던 말에 이치(理)는 돈오(頓悟)라 깨달음에 이르면 번뇌는 다 녹으나 차별상(事)은 바로 없앨 수 없는 것이어서 차례를 따라 다 없애야 하나니 행주좌와에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 밖에 옛사람들의 많은 차별의 말도 모두가 실답다고 여기지 말며 그렇다고 헛된 것이라고도 여기지 마십시오. 오래 오래하다 보면 순일하게 익어져서 자연 묵묵히 본래 자성(自性)에 계합할 것입니다. 별도의 수승하고 특별함을 구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수료(水潦)화상이 등나무를 캐던 곳에서 마조(馬祖)선사에게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입니까?” 하고 물으니 마조선사가 이르되 “가까이 오라 너에게 말해 주겠다.” 수료화상이 막 가까이 오자 마조선사가 멱살을 잡고 한 번 밟으니 밟혀서 넘어졌다가 수료화상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가가대소(呵呵大笑)하니 마조선사가 말씀하시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웃는가?” 수료화상이 “백 천 가지 법문과 무량한 오묘한 뜻을 지금 하나의 털끝에 완전히 근원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마조가 다시 그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설봉(雪峰)선사가 고산(鼓山)스님의 인연이 익은 것을 알고 하루는 홀연히 곧장 멱살을 잡고 “이 무엇인고?” 라고 이르시니 고산스님이 깨닫고 깨달은 마음까지 잊어버리고 오직 미소만 짓고 손을 들어 흔들 뿐이거늘 설봉선사가 “그대는 도리를 나타내는가?” 고산스님이 다시 손을 흔들면서 말하기를 “화상이시여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곧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몽산도명(蒙山道明)선사가 혜능대사(盧行者)를 쫓아 대유령(大庾嶺)에 도달하여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하거늘 노행자가 바위 위에 던져놓고 말씀하시기를 “이 가사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어찌 힘으로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대 마음대로 가지고 가 보십시오.” 하니 도명스님이 그것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거늘 곧 말하기를 “저는 법을 구함이요 가사와 발우 때문이 아닙니다. 원컨데 행자님은 열어 보여 주십시오.” 하니 노행자가 말씀하시기를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 면목입니까?” 도명스님이 그때 크게 깨치고 온몸에 땀이 흐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하면서 이르기를 “위로부터 온 비밀한 말씀과 뜻 외에, 다시 다른 뜻이 있습니까?” 노행자가 “내가 지금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스러운 뜻이 아니며 그대가 만약 자기의 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비밀스러운 뜻이 도리어 그대에게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약 설한다면 비밀스러운 뜻이 아닙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 분의 존숙(尊宿)의 세 가지 경우의 깨달은 인연과 그대가 한번 웃는 가운데 깨달은 것과 비교한다면 낫고 못함이 어떠합니까? 스스로 단정해 보십시오. 또한 달리 기특하다고 할만한 도리가 있습니까? 만약 달리 있다면 도리어 일찍이 깨닫지 못함과 같을 것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는 일만 알지언정 부처가 풀어서 말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마십시오. 예로부터 도를 얻은 선비가 자기를 이미 충족시키고 자기의 나머지를 미루어 근기에 따라 일에 부딪힘에 마치 맑은 거울이 받침대(臺)를 대하며 맑은 거울이 손바닥에 있는 것과 같아서 호(胡)가 오면 호(胡)가 드러나고 한(漢)이 오면 한(漢)이 드러나되 뜻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만약 뜻에 집착한다면 사람에게 주는 실다운 법이 있게 됩니다. 그대가 큰 법을 밝혀서 근기에 따라 막힘이 없고자 한다면 오직 또한 이전의 것을 그대로 따를지언정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지니 오래하다 보면 스스로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갈 때에 마주 대하고서 한 말을 자리의 곁에 써 놓으십시오. 이외에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말할 것이 있더라도 그대의 분상(分上)에서는 모두가 다 군더더기 말이 될 것입니다. 말을 너무 많이 했기에 이만 줄입니다.



이참정의 묻는 편지


제가 근래 가르쳐 답해주심을 받고 깊은 뜻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이 3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일에는 역순(逆順)이 없어 인연을 따라 대하되 가슴에 두지 않음이요, 하나는 숙세의 습기가 두터우나 물리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옅어짐이요, 셋째는 옛 조사의 공안이 옛날에 막혔던 것을 때때로 다시 보니 이것은 스스로 매(昧)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법(大法)을 밝히지 못했다는 말은 대개 조그마한 것을 얻고 만족해함을 두려워하고 넓혀 충만하게 하려함이지 어찌 달리 수승한 견해를 구하겠습니까? 현행(現行)하는 번뇌를 깨끗이 없앰에 이치가 있으니 어찌 감히 (대혜스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어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이참정에게 답함


편지를 받은 후에 더욱 우러러봅니다. 날마다 인연을 따라 자유자제하여 뜻과 같이 자재(自在)한지 모르겠습니다.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번뇌에 끄달림을 당하지는 않습니까? 잠자고 일어남에 일여(一如)합니까? 옛것을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습니까? 생사심(生死心)이 이어지지 않습니까? 다만 번뇌의 마음을 다 없앨 뿐이지 별도로 특별한 깨달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한 번 웃음에 바른 눈을 활짝 열고 소식(깨달았다고 하는 생각)도 곧 잊었으니, 힘을 얻고 얻지 못했다함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 속에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음욕을 없애고 음욕을 발생시키는 요인을 없애 현재의 업을 등지는 것이 곧 일을 마친 사람의 방편 없는 가운데 진실한 방편이며 닦아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진실로 증득한 것이고 취하고 버림이 없는 가운데 진실로 취사(取捨)하는 것입니다. 고덕(古德)이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가도 하나의 진실함이 있음이요, 또한 전단(栴檀)의 무성한 가지가 다 떨어져 나가도 오직 진실한 전단이 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현재의 업을 등지고 조인(助因)을 없애고 정성(正性)을 베어 버리는 극치인 것입니다. 그대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이야기도 일을 마친 사람의 분상에는 대개 한 자루의 겨울 부채와 같을 것입니다만 남쪽에 춥고 더움이 일정하지가 않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강급사 소명에게 답함


인간의 한세상에 백년의 세월이 얼마나 길겠습니까? 그대는 선비로써 집을 일으켜 두루 높은 관직을 다 거쳤으니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이나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을 돌려 도를 닦는데 향해 출세간의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배우니 또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마땅히 급히 착수하여(참선을 함을 이름) 냉정하게 해서 다른 사람의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 본명원진(本命元辰: 본분도리)을 알아서 갈 곳을 분명히 하면 곧 이것이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마친 대장부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매일 가서 이참정과 더불어 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니 매우 좋고 훌륭합니다. 이참정은 치구(馳驅)하는 마음을 쉬고 언어가 끊기고 마음의 작용이 끊기어 차별방편의 여러 갈래 길에서 고인(古人)의 수단을 엿보아서 고인의 방편문자에 얽매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산승은 그의 이와 같음을 보았기 때문에 다시 일찍이 그와 더불어 한자(一字)도 이야기하지 않음은 그를 무디게 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와서 스스로 나와 이야기하고자 하면 비로소 그와 함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해함(불법에 대해 논함)이 있을지언정 다만 이러하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치구심이 만약 쉬지 않는다면 비록 그와 더불어 마주 대하고 이해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바로 어리석게 날뛰어서 밖으로 달릴 따름입니다. 옛사람이 “착한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마치 이슬 속을 가는 것과 같아 비록 옷은 젖지 않으나 때때로 윤택함이 있다.”고 했으니 다만 자주 이참정과 이야기하기를 매우 바랍니다. 고인이 보여주신 말씀과 가르침을 가지고 어지럽게 뜻을 캐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컨대 마조스님이 회양(懷讓)선사를 만났는데 (회양선사가) 설법하여 이르시되 “비유하자면 말이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쳐야 옳은 것인가 소를 때려야 옳은 것인가?” 마조스님이 그것을 듣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이 몇 구절의 이야기를 제방에서는 많이 설법함이 천둥과 번개와 같고 구름과 비와 같으나 이해하지 못하고 그릇 말에 떨어져서 말을 쫓아 알음알이를 내고 있습니다. 주봉(舟峯)스님에게 준 편지의 끝을 보니 잘 알지 못하면서 주해하여 내가 그것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마땅히 그에게 말한 여래선(如來禪)이니 조사선(祖師禪)이니 하는 것은 문서에 적어 허물을 다스려 한길로 귀양을 보내십시오. 보내준 송(頌)을 자세하게 보니 전번의 두 송(頌)보다는 낫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마땅히 그만두십시오. 송(頌)을 주고받음에 무슨 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요? 저 이참정을 닮으십시오. 그가 어찌 게송을 짓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만은 무엇 때문에 전혀 한자도 쓰지 않는 것일까요? 곧 법을 아는 사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간혹 조금 (살림살이를) 드러내면 자연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 저 출산상(出山相)송에 이르기를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 문득 대놓고 속인다.'는 말은 총림에서 안약(點眼藥)이 될만합니다. 그대는 후일에 스스로 보십시오. 결코 내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요즘 그대가 문득 마음을 고쳐먹고 이 일을 위하여 매우 힘씀을 보고 그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쓰다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았습니다.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어릴 때에 이 도(참선 공부)를 알아 신심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였다가 만년(晩年)에 알음알이에 장애 되어 깨달아 들 곳을 구하지 못하여 날마다 도를 체득할 방편을 알고자 한다고 하니 이미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있으니 감히 스스로 외면하지 못하여 항목에 의거하여 결론을 내려 말을 조금하겠습니다. 오직 이렇게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곧 도를 방해하는 알음알이니 다시 달리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 그대에게 방해를 할 것이며 필경에는 무엇을 불러 알음알이라고 하며 알음알이는 어디를 따라 이르며 방해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직 당신이 (앞에서) 말한 이 한 구절은 뒤바뀐 것이 3가지 있으니 스스로 알음알이에 장애된 바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요,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여 미혹한 사람이라고 달게 여김이 하나요, 다시 미혹한 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림이 하나입니다. 오직 이 3가지 전도(顚倒)됨은 곧 생사(生死)의 근본입니다. 바로 마땅히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전도된 마음이 끊어지면 바야흐로 파괴해야할 미혹이 없으며 기다릴만한 깨달음도 없으며 방해할 알음알이도 없음을 알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뜨거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오래오래 하다보면 자연히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에 나아가서 보십시오. 아직도 장애가 됩니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에 여전히 허다한 것들이 있습니까? 옛날부터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알음알이로 친구로 삼고 알음알이로 방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알음알이 상에서 평등의 자비를 행했고 알음알이 상에 모든 불사(佛事)를 했는데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에 의지한 것과 같았으니 결국 이것으로 번뇌를 삼지 않았으니 다만 그들은 지혜가 일어나는 곳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나는 곳을 알았으니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곧 해탈(解脫)의 도량이며 바로 생사를 벗어나는 곳이며 이미 해탈의 장(場)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곳일진대 알음알이 내는 곳이 바로 적멸(寂滅)이며 알음알이 하는 곳이 이미 적멸인데 알음알인줄 아는 자는 적멸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니 보리열반과 진여불성도 적멸 아닐 수가 없으니 곧 어떤 것이 장애가 될 수 있으며 다시 어느 곳에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리요? 부처님께서 “모든 업은 마음을 따라 생기니 때문에 마음이 환(幻)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분별을 여의면 모든 집착이 사라집니다. 어떤 스님이 대주(大珠)화상에게 여쭙기를 “어떤 것이 대열반입니까?” 대주스님께서 이르되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그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생사의 업입니까?” 대주스님께서 “대열반을 구함이 생사의 업이다.”고 하셨습니다. 고덕(古德)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에 생사를 헤아리면 곧 마도(魔道)에 떨어지며 한 생각에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 외도(外道)에 떨어진다.”라고 이르셨으며 또 유마거사는 “모든 마(魔)라는 것은 생사를 즐기는 것이다. 보살은 생사에 대해 버리지 아니하고 외도는 모든 견해를 즐기지만은 보살은 모든 견해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알음알이로써 친구를 삼는 것이며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고 알음알이에서 평등의 자비를 행하고 알음알이에서 모든 불사를 한 본보기입니다. 다만 그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공(空)함을 깨달아 생사열반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상 절대로 삿된 승려들이 어지럽게 말하는데 꾀여 마의 굴속에 끌려 들어가 눈을 감고 망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요즘 조사의 도가 쇠퇴하여 이러한 무리들이 마(麻)와 조(粟)와 같이 많으니 진실로 한 맹인이 여러 맹인을 이끌고 서로 불구덩이에 끌고 가는 격이니 매우 불쌍하고 근심스럽습니다. 원컨대 그대는 척량골을 꼿꼿이 세워 이러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잠시 냄새나는 가죽주머니에 얽매여 있으면서 곧 구경을 삼으나 마음이 어지러이 날뜀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 비록 6식이 잠시 정지해 있으나 돌이 풀을 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 어느새 또 생기니 무상보리를 취하여 구경의 안락처에 이르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내가 또한 일찍이 이러한 무리의 속임을 당하여 후에 만약 참 선지식을 만나지 않았다면 거의 헛되이 일생을 지나칠 뻔했습니다. 매일 생각해 보니 곧 참을 수가 없어 이 때문에 구업(口業)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니 지금 점점 잘못됨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바로 끊어 깨닫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한 생각을 문득 부수어야 비로소 생사를 깨달을 것이니 비로소 깨달았다고 이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마음을 두어 부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부수어진 곳에 둔다면 영겁토록 부술 때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망상 전도된 마음과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知見)으로 알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놓고 다만 눌러 놓은 곳에서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없느니라.> 이 한 자(無)는 곧 허다한 나쁜 지견과 나쁜 앎을 꺾는 무기입니다. 불성이 있다, 없다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도리(道理)가 있다는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고 의식(意根)에서 사량하여 헤아리지 말며 선사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서 머물지 말고 말에서 살림살이를 짓지 말고 다 날려 버리고 일 없는 가죽주머니 속에 있지 말고 (선지식이 공안을)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문자 가운데 끌어들여 증거로 삼지 말고 오로지 하루 종일 사위의 가운데 항상 들며 항상 들고 뚜렷이 하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일상에서 여의지 말고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해 본다면 어느 날에 곧 스스로 보게 되리니 한 고을의 천리의 일이 전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인이 “나의 이 속은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니 어떤 물건이 그것을 구속하여 잡아 둘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만약 일상을 버리고 달리 나아가 향한다면 이것은 파도를 버리고 물을 구하는 것이며 그릇을 버리고 금을 구하는 것이니 구할수록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2)


나날이 이 일대사인연으로 생각을 삼아 용맹정진하여 순일하여 잡된 것이 없음을 가만히 알고 기뻐서 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가운데 왕성히 활동하는 때에 반드시 상응합니까? 잠자고 깸의 두 가지 경계에 한결같습니까? 이와 같지 못할진대 절대로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나아가지 말지니, 고인께서 캄캄한 산 아래 귀신 집의 살림살이라고 불렀습니다. 미래가 다하도록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온 편지를 접하고는 그대가 필시 고요한 삼매에 탐착했으리라고 혼자 염려했더니 직강공(直閣公)에게 묻고서 곧 과연 헤아린 바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무릇 세간을 두루 겪고 여유가 있는 선비가 오랫동안 세간이 잡다한 일 가운데 있다가 홀연히 다른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지으라고 가르쳐 줌을 얻고서 잠깐 가슴속이 일없게 되면(번뇌가 없으면) 곧 고요히 앉는 것으로 구경의 안락을 삼으니 전혀 돌로써 풀을 눌러놓는 것과 같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잠깐 소식(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이 끊어 졌음을 느끼지만 뿌리는 오히려 있음을 어찌하리요? 어찌 적멸(寂滅)을 증득해 뚫을 기약이 있겠습니까? 참되고 바른 적멸이 앞에 나타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치연(熾然: 왕성한 모양)하게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하는 가운데 곧장 한번 뛰어 벗어나되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긴 강을 저어서 소락(酥酪)을 만들며 대지(大地)를 바꾸어 황금을 만들며 근기를 대하고 주고 빼앗고 죽이고 살림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스스로도 이익되게 함에,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옛 성인들께서 무진장다라니문(無盡藏陀羅尼門)이며 무진장신통유희문(無盡藏神通遊戱門)이며 무진장여의해탈문(無盡藏如意解脫門)이라 하시니 어찌 참된 대장부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시켜서 그러함이 아니라 다 우리들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분수이니 원컨대 그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반드시 이것에다 목표를 정하십시오.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가슴속이 밝음이 마치 백 천가지 해와 달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알되 털끝만큼도 다른 생각이 없을 것이니 비로소 구경과 더불어 상응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어찌 다만 나고 죽음에 대해서만 힘을 얻겠습니까? 다른 날에 다시 균축(鈞軸)을 잡아서(재상의 자리에 올라) 임금을 요순(堯舜)보다 더 위에 이르게끔 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 가리킴과 같을 것입니다.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3)


편지를 보니 처음에 잠깐 고요히 앉아보니 공부가 또한 만족스러웠다하고 또 이르되 감히 고요함에 집착하는 견해는 망령되이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 부처님께서 이르신바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그의 귀를 막고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고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기를 구함과 같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만들 따름입니다. 만약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리지 못하면 평상시 하루 종일 어둡고 흐릿함이 마치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무엇하러 부질없이 공부를 하면서 고요하고 시끄러움을 따지는 것을 찾겠습니까? 열반회상(涅槃會上)에 광액도아(廣額屠兒)가 짐승 잡는 칼을 놓아버리고는 문득 성불했다 하니 그가 어찌 고요한 가운데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가 어찌 초심(初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이를 보고 결정코 그렇지 않다고 여겨 마음에 차별을 두어 ‘그는 옛 부처님께서 시현(示現: 부처님께서 영험을 나타낸 일)하신 것이지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역량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곧 스스로 수승함을 믿지 아니하고 하등한 사람이라고 달갑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이 (불법)문중은 초기(초심)와 늦게 배움을 논하지 않고 또한 구참과 선배(먼저 불문에 들어온 사람)도 묻지 않습니다. 만약 참으로 고요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생사심을 깨뜨려야 합니다. 애써서 공부를 하지 아니하여도 생사심이 부수어지면 곧 고요하게 될 것입니다. 옛 성인께서 말씀하신바 적정방편(寂靜方便)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삿된 스승들 스스로가 옛 성인들의 방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대가 만약 나를 믿는다면 시험 삼아 시끄러운 곳에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간하되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말하지 말지니 바로 마음이 시끄러운 때에 마음껏 화두를 들고 느끼어 보십시오. 또한 고요함을 느낍니까? 또한 힘을 얻은 것을 느낍니까? 만약 힘을 얻음을 느낀다면 곧 마땅히 놓아버리지 말고 고요히 앉고자 할 때에 다만 한 가닥의 향을 사르고 고요히 앉되 앉을 때에 혼침(昏沈) 하지 말며 또한 마음이 들뜨게도(掉擧) 하지 말지니 혼침과 마음이 들뜸은 옛 성인들께서 꾸짖은 것입니다. 고요히 앉을 때에 문득 이 두 가지 병(혼침과 도거)이 나타남을 느끼면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들면 힘써 물리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서 안정될 것입니다.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져서 막 힘 들린 것을 느낌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또한 애써 고요히 앉아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대로 곧 공부입니다. 이참정이 근래에 천남(泉南)에 있으면서 처음 서로 만났을 때 내가 묵조(黙照)의 삿된 선(禪)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다고 하며 힘써 배척함을 보고 그가 처음에는 불평하여 의심과 분노가 반반이더니 곧장 내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화두에 송(頌)하는 것을 듣고 홀연히 무명(無明)을 쳐부수고는 한 번 웃는 가운데에 모든 화두에 의심이 없어졌으니 비로소 내가 입을 열어 나의 쓸개를 보인 것이 조금도 속임이 없었으며 또한 아상(我相)를 다투지 아니함을 믿고는 곧 나에게 참회하였습니다. 이참정이 현재 그곳에 있으니 청컨대 시험삼아 그에게 나(부추밀)의 공부방법이 옳은가하고 물어보십시오. 도겸(道謙)상좌가 이미 복당(福唐)에 갔으니 이미 그곳에 도착했습니까? 이 사람은 참선을 하면서 고통을 맛본 것이 많으니 또한 일찍이 10여년을 묵조선에 들어갔다가 근래에 비로소 안락처를 얻었습니다. 서로 볼 때에 그에게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일찍이 방랑한 사람이기 때문에 선객(禪客)을 매우 아낄 것이니 아마도 반드시 지성(至誠)으로 말해줄 것입니다.



이참정 별지


부추밀(富樞密)이 근래에 삼구(三衢)에 있을 때에 일찍이 편지를 보내와 도를 묻거늘 그러한 연유로 편지로 답장하여 말(落草)이 적지 않았는데 여전히 묵조(黙照)하는 곳에 있으니 반드시 삿된 스승이 귀신굴로 끌어들임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또 편지를 받아보니 고요히 앉는 것에 집착하여 좋다고 하니 묵조에 걸려 있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바른 선을 참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그의 편지에 답해 또 다시 누누이 일러 구업(口業)을 아끼지 아니하고 간절히 그에게 버리라고 했는데 또한 (그는) 생각을 돌이켜 일상 가운데 화두를 들고 있습니까? 옛 조사스님들께서는 “차라리 파계(破戒)를 수미산과 같이 할지언정 삿된 스승의 단 하나의 삿된 생각이라도 받음은 당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만약 겨자씨만큼이라도 정식(情識: 6식) 속에 있다면 마치 기름이 밀가루에 스며들면 영원히 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부추밀이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만약 그와 더불어 서로 보거든 그에게 답장한 편지를 한번보고 그것에 의거(依據)하여 방편을 지어서 이 사람을 구제해 주십시오. 사섭법(四攝法) 가운데 동사섭(同事攝)이 최고이니 그대는 마땅히 이 법문을 크게 열어서 그로 하여금 믿게 한다면 나의 힘을 반으로 들어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믿음이 생기게 하여 옛굴(묵조선)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이 일대사인연에 뜻을 두고자 하나 근기와 성품이 지극히 둔하다고 하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축하를 드립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대개가 이 일에 모든 공안(公案)에 막힘이 없이 바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은 근성이 너무 날카롭고 지견이 너무 많아 종사(宗師)가 막 말을 시작하면 이미 한번에 알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도리어 둔한 근기가 허다한 그릇된 지각(知覺)이 없어 문득 일기(一機), 일경(一境)과 일언(一言), 일구(一句)에 깨달아버리는 것과 같지 못하니 곧 달마(達磨)대사가 나오셔서 모든 여러 가지 신통을 쓰더라도 그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다만 그에게는 장애될만한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기가 날카로운 자는 도리어 근기에 장애를 입어, 문득 꺾어 버리거나 부술 수가 없습니다. 설사 총명한 알음알이(知解)상에서 배우더라도 자기 본분사(本分事)에는 더더욱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전(南泉)화상은 “요즈음 선사는 너무 많은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고 말씀 하셨으며 장경(章敬)화상은 “지극한 도리는 말을 떠났거늘 요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굳이 그 일(말)을 익히는 것으로 수행으로 삼으니 자성이 본래 塵境(6진과 6경)이 아니라 이것은 미묘한 대해탈문이며 있는 바의 감각(感覺)은 물들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으며 이와 같은 광명이 일찍이 쉬거나 없어지지도 않았다. 오랜 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본디 바뀜도 없음이 마치 해가 멀고 가까운데 서로 비추어 모든 사물에 도달하나 일체와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신령스럽게 비추고 묘하게 밝음은 수련을 빌리지 않지만 깨닫지 못하는 까닭으로 사물을 취하는 것이다. 다만 눈을 비벼서 망령되이 허공 꽃이 생기는 것과 같아 헛되이 스스로 수고롭게 하여 잘못 세월을 보내니 만약 돌이켜 비추어 볼 수 있다면 다른 나(我)가 없을 것이다 일상의 행동이 실상과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니 그대는 근기가 둔하다고 하니 이와 같이 한번 반조해 보십시오. 둔함을 아는 자는 도리어 둔합니까? 만약 회광반조(回光返照) 하지 않고 다만 둔한 근기만을 지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면 곧 이것은 환망(幻忘) 위에 환망(幻忘)을 더하는 것이며 허공꽃(空花) 위에 다시 허공꽃을 보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만 들으십시오. 근성이 둔함을 아는 것은 결코 둔하지 않나니 비록 이러한 둔하다는 생각은 고수(固守)하지 말아야겠지만 또한 이러한 둔한 참구는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취하고 버림, 이근(利根)과 둔근(鈍根)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一體)여서 둘이 아닙니다. 만약 둘이라면 법은 평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마음을 전함이 모두 허망한 것이며 진실을 구함이 점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일체이고 둘 아닌 마음이 결코 취하고 버리고, 이근(利根)과 둔근(鈍根) 사이에 있지 않음을 안다면 곧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고 바로 한칼에 두 동강 낼 것이나 만약 다시 머뭇거리고 의심하여 앞과 뒤를 생각하고 잰다면 곧 이것은 빈주먹 손가락 위에서 실다운 견해를 내며 근(根),경(境),법(法)중에 헛되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이니 음계(陰界) 가운데에 망령되이 집착하여 갇혀 있어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근래에 한 삿된 스승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온 종일 이 일(깨달음)에 관여하지 말고 쉬고 쉬되 소리를 내지 말라 업에 떨어질까 두렵다고 하는데 종종 사대부가 총명함과 날카로운 근기의 부림을 당하여 대개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문득 삿된 무리의 고요히 앉으라는 가르침을 입고 또한 힘을 드는 것을 느끼고는 곧 만족하게 여기고 다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잠잠한 것으로 지극한 이치를 삼습니다. 나는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하니 지금 점점 그릇됨을 아는 자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오로지 의심이 타파되지 않는 곳에서 참구하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놓지 마십시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없다>고 한 이 한 글자는 곧 생사의 의심을 부수는 칼날입니다. 이 칼과 칼자루는 다만 본인의 수중(手中)에 있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대게 할 수 없고 마땅히 스스로 착수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생명을 버릴 수 있으면, 바야흐로 스스로 손을 대고자 할 것이나 만약 목숨을 걸지 못하겠거든 장차 다만 의심이 부서지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지어 간다면 문득 자연히 목숨을 한 번 버리려 하여 곧 깨달을 것이니 그 때에 비로소 고요한 때가 곧 시끄러운 때이며, 시끄러운 때가 곧 고요한 때이며, 말 할 때가 곧 침묵하는 때이며, 침묵하는 때가 곧 말할 때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더라도 또한 자연 삿된 스승의 어지럽게 말하는 것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지극히 바랍니다. 옛날에 주세영(朱世英)이 일찍이 편지로 운암진영(雲庵眞淨)화상에게 묻기를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니 일상에 어떻게 마음을 써야하며 어떻게 몸소 궁구해야 하는지 바라건대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진정화상이 이르시기를 “불법은 지극히 묘하여 둘이 아니나 다만 오묘함에 이르지 못하면 장단(長短)이 있으니 만약 오묘함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진실로 자신의 마음이 구경(究竟)에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며 진실로 자재(自在)하며 진실로 즐거우며 진실로 해탈이며 진실로 청정하여 일상에 오직 자신의 마음을 쓰니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잡아 곧 쓸지언정 옳고 그름을 묻지 마라. 마음을 헤아려 사량하면 이미 옳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낱낱이 천진이며 낱낱이 밝고 묘한 것이며 낱낱이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으니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거늘 미혹과 깨달음에 말미암은 때문에 저것과 이것(중생과 부처)이 있게 된다.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마음을 믿지 못하며 자시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명묘수용(明妙受用: 밝고 묘한 수용)을 얻지 못하며 자신의 마음의 안락해탈(安樂解脫)을 얻지 못하고 마음 밖에 망령되이 선(禪)의 길이 있다고 하여 망령되이 기특함을 세우고 망령되이 취하고 버림을 내나니 비록 수행하더라도 외도이승(外道二乘)의 선의 고요한 단견(斷見)경계에 떨어져 있게 된다. 이른 바 수행함에 단견(斷見)과 상견(상견)의 구덩이에 떨어짐이 두려운 것이니 단견(斷見)이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본래 오묘하고 밝은 성품을 끊어 버리고 한결같이 마음 밖의 공에 집착하여 선의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상견(常見)이라는 것은 일체의 법이 공(空)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간의 모든 유위법에 집착하여 구경법(究竟法)으로 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삿된 스승의 무리들은 사대부로 하여금 마음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 모든 일에 관여하지 말고 쉬어라고 하니 어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외도이승(外道二乘)의 선적단견(禪寂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신의 마음의 명묘한 수용과 구경안락과 여실청정(如實淸淨)한 해탈변화(解脫變化)의 오묘함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본인이 보고 스스로 깨달으면 자연히 고인의 말에 끌려 다님을 입지 않고 고인의 말을 굴릴 수 있을 것이니, 예컨대 청정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진흙 속에 두어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또한 물들지 않으니 본래자체가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미혹할 때엔 번뇌의 미혹됨을 당하나 이 마음의 자체는 본래 일찍이 미혹되지 아니하니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홀연히 만약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 구경(究竟)에 자재하여 여실히 안락(安樂)하면 가지가지 묘용(妙用)이 또한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해진 법이 없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이름하며 또한 여래가 설할 수 있는 확정된 법은 없다.”고 말씀 하셨으니 만약 본체(本體)를 확정시켜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도리어 옳지 못한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미혹과 깨달음, 버리고 취함에 말미암아 도리를 설함이 약간 있으나 오묘함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방편의 말일뿐입니다. 참된 본체는 또한 약간도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이렇게 마음을 써서 일상의 가운데 삶과 죽음, 부처님의 도리가 있다는 것에 집착하지 말며 생(生)과 사(死), 부처님의 도리를 물리치고 무(無)로 돌리지도 말고 다만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를 들되 절대로 의근(意根)에서 헤아리지 말며, 말에서 살림살이를 삼지 말며, 또한 (선사가) 입을 여는 곳에서 알지 말며, (선사가)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하는 곳에서 알지 말고,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지언정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쉬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점점 절충(交涉)되지 못할 것입니다.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2)


편지를 받으니 나의 전번에 보내준 편지를 받은 후부터 매일 시끄러운 중에 회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 항상 스스로 점검하되 아직 공부에 힘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니 다만 회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하는 곳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서 점검을 한다면 도리어 멀어질 것입니다. 옛날에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은 “불법은 일상 생활하는 곳과 행주좌와하는 곳과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 말로써 서로 묻는 곳, 만들고 행하는 곳에 있으니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회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면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점검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조사 스님들이 이르시기를 “분별이 생기지 않으면 마음이 스스로 비춘다.”고 하셨으며 또 방거사는 “일상의 생활은 별다른 것이 없다. 오직 나 스스로와 짝하여 어울리니 모든 것을 취사(取捨)하지 않고 처해 있는 곳마다 어긋나지 않는다. 옳고(正) 그름은(邪) 누가 이름하였는가? 언덕에는 티끌조차 없도다.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은 물 긷고 땔감을 옮기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또 선성(先聖)은 “다만 마음에 분별 계교(分別計較)가 있다면 자기의 마음에 보고 헤아리는 것이 모두가 꿈이다”라고 말씀 하셨으니 간절히 기억하십시오. 회피할 수 없을 때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헤아리는 마음이 없을 때 일체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근기가) 날카롭다 아는 것도 둔하다고 아는 것도 소용이 없나니 모두가 저 이둔(利鈍)의 일에는 간여되지 않으며 또한 저 고요함과 시끄러운 일에 간여되지 않습니다. 바로 회피할 수 없을 때를 만나거든 문득 육신(肉身)을 잊어버리면 자기도 모르는 결에 손바닥을 치면서 대소(大笑)할 것입니다. 제발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만약 한 터럭만큼이라도 공부에 증득(證得)함을 취한다면 마치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아 만지려는 것과 같으니 다만 더욱 스스로 수고롭게 할 뿐입니다. 응접(應接)할 때에는 다만 응접하고 고요히 앉고자 하면 다만 고요히 앉되 앉을 때에 앉는 것에 집착하여 구경(究竟)으로 삼지 마십시오. 요즘 삿된 스승들은 대개 묵묵히 비추어 보고 고요히 앉는 것으로 구경법을 삼아 후학들을 의혹(疑惑)하게 하니 나는 원수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써 그것을 배척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말법의 폐단을 구하고 있습니다.



조대제 도부에게 답함


편지를 보니 모든 것은 불성(佛性)을 다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은 세간의 번뇌하고 망상하는 마음이 아니라 무상(無上)의 대보리심(大菩提心)을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불(成佛)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움에 대개가 스스로 장애를 만듦은 결정코 이루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또 말씀하시되 “믿음이란 도의 근원이며 공덕(功德)의 어머니이다. 일체의 모든 선한 법을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물결을 벗어나 열반의 위없는 길을 열어 보여준다.” 또 이르시되 “믿음은 지혜와 공덕을 키우며 믿음은 반드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편지를 보니 근기가 둔하여 깨달을 수 없다면 또한 마음에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심겠다고 하니 이 말이 비록 얕고 비근(卑近)하나 또한 깊고 원대합니다. 다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당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요즘 도를 배우는 선비가 종종 느긋해야 하는 곳에는 도리어 급하게 하고 급하게 해야 할 곳에는 도리어 느긋하게 하니 방거사가 “하루아침에 죽음이 몸에 닥쳐오면 한번 종사(宗師)에게 묻겠는데, 이것이 무슨 시절입니까?” 하셨으니 어제의 일도 오늘에는 오히려 기억할 수 없는데 하물며 딴 생(生)의 일을 어찌 잊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결정코 금생에 깨달아 부처와 조사를 의심하지 않고 생(生)과 사(死)를 의심하지 않게 되고자 할진대 반드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생각 생각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공부를 하는데 깨닫지 못할 때 비로소 근기(根機)가 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스스로 이르되 나는 근기가 둔하여 금생에는 깨칠 수가 없으니 장차 불종자(佛種子)를 심고 인연(因緣)을 맺으리라하면 곧 이것은 가지도 않고 이르고자 하는 것이니 옳은 것이 못될 것입니다. 나는 매번 이 도를 믿는 자를 위하여 일상의 하루 가운데 점점 힘을 드는 것을 느낄 때가 곧 부처를 배워 힘을 얻는 곳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힘을 얻은 곳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으며 또한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혜능선사가 도명상좌에게 이르시되 “네가 만약 자기의 본래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볼 수 있으면 밀의(密意)가 다 너에게 있다.”고 하심이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밀의(密意)란 곧 일상의 힘을 얻은 곳이며 힘을 얻은 곳은 곧 힘을 든 곳입니다. 세간(世間)의 번잡한 일은 하나를 집어 들고 하나를 놓고 하는 것이 무궁무진하여 일상의 가운데 일찍이 서로 버리지 못함은 무시(無始)로부터 그것과 맺은 인연이 깊기 때문이고 반야의 지혜는 무시로부터 맺은 인연이 엷기 때문입니다. 문득 선지식이 법문하는 것을 듣고 한결같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니 만약 무시로부터 세간의 잡다하고 수고로운 인연이 엷고 반야의 인연이 깊다면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인연이 깊은 것은 놓아 엷게 하고 얕은 것은 놓아 깊게 하고 생소한 것은 놓아 익게 하고 익은 것은 놓아 생소하게 하십시오. 막 세상의 번잡하고 수고로운 일을 생각한다고 느끼면 애써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다만 생각하는 곳에서 가볍게 화두를 굴린다면 무한한 힘을 들 것이고 또한 무한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당신은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짓되 마음을 깨닫기를 기다리는데 두지 않는다면 문득 스스로 깨달아 버릴 것입니다. 참정공과 아마도 매일 서로 만날 터인데 바둑을 두는 것 이외에 또한 일찍이 그와 더불어 이러한 일을 이야기했습니까? 만약 바둑만 두고 이러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다만 바둑을 두기 전에 바둑판과 바둑알을 제쳐 두고 다시 그에게 마음을 찾는 것을 물으십시오. 만약 찾아주지 못한다면 이는 진실로 둔한 근기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허사리 수원에게 답함


부처님께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며, 일체의 모든 선법(善法)을 기른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믿음은 지혜와 공덕을 길러주며 믿음은 반드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리(千里)를 가고자 하면 한걸음이 시초가 됩니다.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장애를 끊고 법문(法門)을 증득한 것도 처음 열 가지 믿음을 따른 연후에 법운지(法雲地)에 올라 정각(正覺)을 이루나니, 처음 환희지(歡喜地)도 믿음으로 인해 환희가 생깁니다. 만약 확고하게 척추를 세우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뛰어난 사람(沒量漢)이 되고자 할진대 마땅히 무쇠로 부어 만든 놈이라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반은 밝고 반은 어둡고,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인정(人情)이 없어 전하여 줄 수가 없으니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밝혀야 비로소 향상해 나갈 수 있는 부분(趣向分)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로 판단을 하면 영겁토록 쉴 날이 없을 것이니 제발 하루 종일 가운데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날마다 일어나 응(應)하여 쓰는 것이 원만하여 부처 달마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건만 스스로 본인이 보아 뚫지 못하고 투과하지도 못하고 온 몸을 나타난 현상 속에 뛰어들어 있으면서 도리어 이 속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니 점점 교섭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또한 오랫동안 선지식을 찾아뵙고 총림(叢林)을 두루 돌아다님에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수가 총림에 있으면서 머리가 희어지고 이가 누렇게 되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수는 총림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한번 화두를 들고 모든 화두를 타파하는 사람이 있으니 발심은 선후(先後)가 있지만 마음을 깨침에는 선후가 없습니다. 옛날에 이문화(李文和) 도위(都尉)가 석문자조(石門慈照)선사를 찾아뵙고 한 마디 말에 깨치고 곧 모든 화두를 타파하고 일찍이 게송을 지어 자조스님에게 바쳐 이르되 ‘도를 배우는데는 마땅히 철로 된 놈이라야 마음에 손을 대면 곧 판단한다. 바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고자 한다면 일체의 시비(是非)를 관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생활 가운데 공부를 지어 나가되 죽어야만 곧 화두를 놓고 앞(과거)과 뒤(미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번뇌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는 곧 도를 방해가 됩니다. 빌고 빕니다.



허사리 수원에게 답함(2)


그대가 바른 믿음을 갖추고 바른 뜻을 세웠으니 이것이 곧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입니다. 내가 그로 인해(바른 믿음 바른 뜻을 세웠기 때문에) 담연(湛然)으로 그대의 도호(道號)로 이름하니 물의 맑음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텅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어 마음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간, 출세간의 일이 담연(湛然)을 벗어나지 않아 털끝도 샘이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도장으로 모든 곳에 찍어 정(定)하면 옳은 것도 없으며, 옳지 않은 것도 없어 하나하나가 해탈(解脫)이며 낱낱이 밝고 오묘하며 낱낱이 진실(眞實)이게 될 것입니다. 쓸 때도 또한 담연하며 쓰지 않을 때도 또한 담연일 것입니다. 조사가 이르시되 “다만 마음에 분별 계교가 있으면 스스로 보고 헤아림이 다 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심식(心識)이 고요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임이 없다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고 이름합니다. 깨달아 이미 바르면 생활하는 가운데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법을 알며,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이 담연(湛然) 아님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전도된 생각을 내지 않아 생각이 있거나 없거나간에 모두 청정할 것입니다. 이미 청정함을 얻었다면 움직일 때는 담연의 용(用)을 드러내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담연의 체(體)에 돌아가니 체용이 비록 다르나 담연한 것은 하나입니다. 마치 전단나무를 쪼개도 조각조각이 다 전단인 것과 같습니다. 근래 한 부류의 알지 못하는 무리는 자기의 근본도 실답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 숨소리를 죽이라고 가르치니 이런 무리들은 이름하자면 진실로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청컨대 그대는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지으십시오. 내가 비록 그대에게 이와 같이 지시하지만 진실로 부득이해서입니다. 만약 진실로 이렇게 공부를 짓는 일이 있다면 곧 그대를 오염시키는 것일 것입니다. 이 마음은 실체가 없는데 어찌 억지로 거두어 둘 수가 있으며 거두어 두고자하나 어느 곳에다 두겠습니까? 이미 둘 곳이 없다면 시절(時節)도 없으며 고금(古今)도 없고 범부와 성인도 없고 잃음도 없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없고 생(生)과 사(死)도 없으며 또한 담연이란 이름도 없으며 담연의 체도 없으며 또한 담연의 용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담연을 이야기하는 자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담연을 설한 것을 받는 자도 없으리니 만약 이와 같이 보아 깨치면 나도 또한 이러한 호를 지음도 헛되지 않고 그대도 또한 이 호를 받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니 어떠합니까?



유보학 언수에게 답함


오늘따라 찌는 듯이 더우니 집에 있으면서 편안하며 뜻과 같이 자재(自在)하여 모든 마장(魔障)에 흔들림이 없습니까? 생활하는 가운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가 일여(一如)합니까? 동정(動靜) 가운데 분별하지는 않습니까? 꿈을 꾸는 것과 꿈에서 깨어남이 일치합니까? 이(理)와 사(事)가 합치합니까? 마음과 경계가 모두 한결같습니까? 방거사는 “마음이 여여(如如)하면 경계 또한 여여하여 실다움도 또한 허황함도 없다. 유(有)에도 관계되지 않고 무(無)에도 걸림이 없으면 성현이 아니라 일을 마친 범부(凡夫)다.”라고 이르셨습니다. 만약 진실로 일을 마친 범부가 되었다면 부처님과 달마는 무엇인고? 진흙과 흙덩어리입니다. 3승12분교는 무엇인가? 끓는 사발의 우는 소리입니다. 그대가 이미 이 문중에 스스로 믿어 의심하지 않으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생소한 것은 놓아 익게 하고 익은 곳은 놓아 생소하게 하여야 비로소 이 일과 더불어 약간 상응(相應)함이 있을 것입니다. 종종 사대부가 대개 뜻과 같지 않을 때에 언뜻 본 곳을 얻었다가 도리어 여의(如意)한 중에 잃어버리니 그대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의한 가운데에 마땅히 항상 여의하지 않았을 때를 마음에 두고 잠시도 잊지 마십시오. 다만 근본을 얻을 것이지 말단적인 것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부처가 되는 것만 알뿐이지 부처가 말을 설명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 한마음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가 어려우니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마땅히 처음과 끝을 바로 하여 넓혀 채운 뒤에 자기의 나머지를 미루어 다른 것에 미치게 해야 합니다. 그대의 얻은 것이 한 구석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아마도 일상의 가운데 마음을 일으켜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관찰하거나 마음을 메마르게 하여 생각을 없게 함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선(禪)과 불법(佛法)이 매우 쇠퇴하여 어떤 엉터리 장로(長老)는 근본을 스스로 깨달은 바 없으면서 업식(業識)이 아득하여 의지할만한 근본이 없고 실제의 기량(伎倆)도 없으면서 배우는 자를 모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이하여 깜깜해 옻을 칠한 것과 같이 눈을 꼭 닫아버리고 묵묵히 항상 비추어보라고 부르짖으니 언충(彦冲)이 이러한 무리의 가르침에 무너짐을 당했으니 매우 가슴 아픕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만약 그대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깨치지 않았다면 나도 또한 설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발 안면을 몰수하고 간절히 수단을 베풀어 이 사람을 구해 내십시오. 지극히 빌고 빕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충은 청정하게 스스로 머물러 세간의 맛이 담박한지가 몇 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에 집착하여 기특하다고 여기니 만약 그를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그에게 동사(同事)를 베풀어 그로 하여금 환희(歡喜)케 하여 마음에 의혹이 생기지 않게 해야 거의 믿고 생각을 돌리려고 할 것이니, 유마(維摩)거사가 이르신바 “먼저 하고자 하는 것으로 끌어들이고 뒤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함이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앞뒤를 관찰하여 지혜로써 분별하며 옳고 그름을 살펴서 결정해 법인(法印)을 어기지 말고 차례대로 수많은 수행의 문(無邊行門)을 건립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의심을 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중생을 위해 법칙을 만든 것이며 만세(萬世)의 모범인 것입니다. 하물며 이 사람은(此公: 언충을 가리킴)은 근성이 그대와 더불어 아득하여 같지 않으니 천상에 태어남은 진실로 영운(靈運)보다 앞에 있으나 부처가 됨은 분명히 영운보다 뒤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코 지혜로써 포용할 수 없고 마땅히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포용해야 하니 날과 달로 탁마한다면 아마도 스스로 그릇됨을 알고 문득 버리고자함은 또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생각을 돌이키려 한다면 또한 이것은 역량(力量)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대도 마땅히 한걸음 물러나 그로 하여금 한 번 벗어나게 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근래 위(暐)수좌가 그(언충)가 자암노자(紫巖老子)에게 답한 편지 하나를 베껴서 돌아 왔거늘 내가 한번 읽고 수희(隨喜)하였고 여러 날 찬탄하고 기뻐하였으니 바로 문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의 대의(大義)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그것과 더불어 답을 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달마대사가 혜가(慧可)스님에게 “너는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지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혜가스님이 가지가지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했으나 모두 계합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홀연히 달마가 보인 바의 요긴한 법문을 깨닫고 곧 달마대사께 사뢰어 말하되 “제가 이번에 비로소 모든 반연을 쉬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아시고는 다시 깊이 캐묻지 않고 다만 이르시되 ??아마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이룬 것이 아닌가?”??아닙니다.”??그대는 어떠한고?”??분명히 항상 알기 때문에 말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달마대사께서 이르시되 “이것이 곧 위로부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마음을 전한 요체이니 너는 지금 이미 얻었으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충이 이르되 “밤에 꿈을 꾸고 낮에 생각함이 십여 년이 흘렀건만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했습니다. 고요하고 묵묵히 단정히 앉아 그 마음을 한결같이 비워서 생각이 끄달림이 없게 하며 경계가 들러붙는 바 없게 하여 자못 경쾌하고 편안함을 느낍니다.”라고 하니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각이 끄달림이 없음이 어찌 달마께서 이르신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는 것이 아니며, 경계가 들러붙는 바 없다는 것이 어찌 달마께서 말씀하신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혜가대사도 처음에 달마께서 보이신 방편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마음과 성품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도리를 설할 수 있다고 하며 문자를 끌어서 증거를 대어 인가(印可)를 구하고자 하니 그런 까닭으로 달마께서 낱낱이 찢어버리시어 마음 쓸 곳을 없애고야 비로소 물러나서 마음이 담벽(墻壁)과 같다는 말은 달마의 실법이 아님을 알고 문득 장벽위에 문득 모든 반연을 쉬니 즉시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고 곧 분명히 항상 알기 때문에 말이 미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도 또한 때에 닥쳐 달마대사의 닥달해 냄을 입은 소식이라, 또한 혜가의 실법(實法)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장로들이 이미 스스로 증득한 바 없으면서 곧 쫓아다니면서 날조(捏造)하여 모으고는 비록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쉬게 하나, 그 스스로 마음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밤낮으로 멈추지 않음이 마치 봄, 가을로 낼 세금이 모자란 백성과도 같습니다. 언충은 도리어 허다하게 힘을 소비함은 없으나 단지 독을 맞음이 깊어서 오로지 밖으로 어지럽게 달려서 동정(動靜)을 말하고 어묵(語黙)을 말하며 득실(得失)을 말하며 다시 주역(周易)과 불경(佛經)을 끌어다가 억지로 끼워 맞추어 이해하니 진실로 쓸데없는 일을 하여 무명(無明)을 기르고 있습니다. 생사(生死)를 끊는 화두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일찍이 맺어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절충하겠습니까? 눈빛이 떨어지려고 할 때에 또 염라대왕에게 말하되 제가 정신이 맑아지고 생각이 조금 안정될 때를 기다려 다시 가서 당신을 뵙겠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는 종횡(縱橫)으로 걸림이 없는 말도 또한 소용이 없으며 마음이 나무와 돌 같아도 또한 소용이 없습니다. 마땅히 본인의 생사심(生死心)을 부수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만약 생사심을 부수면 다시 무엇하러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안정되게 함을 말하며, 다시 무엇하러 종횡으로 걸림이 없게 말하며 다시 무엇하러 내전(內典), 외전(外典)을 말하리요. 하나를 요달(了達)하면 일체를 요달하며 하나를 증득(證得)하면 일체를 증득하게 됩니다. 마치 한 타래의 묶여진 실을 끊을 때에 한번 자르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과 같아 끝없는 법문을 증득함도 또한 그러하여 다시 차례(次第)가 없습니다. 그대가 이미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깨달았으니 또한 이와 같음을 얻었습니까? 바로 마땅히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이 법문을 통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고 역순(逆順)의 경계에 진흙을 묻히고 물을 묻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업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건져내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이 비로소 대장부의 할 일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옳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언충이 공자(孔子)가 일컬은 ‘주역(周易)의 도의 작용이 자주 옮긴다’를 이끌어서 경전 중에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며 또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음을 끌어다가 흙과 나무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더욱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에게 말하는데 무간(無間)의 업(業)을 부르지 않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경전에 이르기를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하시니 이 광대하고 적멸한 오묘한 마음은 색으로 볼 수도 소리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이 마음이 실체(實體)가 없음을 말한 것이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은 이 마음은 진리를 떠나 설 곳이 없으며 설 곳이 곧 진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자가 일컬은 ‘주역의 도의 작용이 자주 옮긴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屢)는 자주라는 뜻이고 천(遷)은 바꾼다는 뜻입니다. 길흉회린(吉凶悔悋)은 움직임에서 생기니 루천(屢遷)의 뜻은 상도(常道)에 돌아와 합쳐진다는 것인데, 어찌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과 합쳐서 한 덩어리를 이룰 수 있으리요. 언충은 불교의 뜻을 모를 뿐 아니라 또한 공자의 뜻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공자의 가르침에 자재(自在)함이 정원을 노니는 것과 같으며 또한 불교에 대해서도 깊이 문지방에 들어왔으니 나의 이와 같은 억척(杜撰)이 옳습니까? 규봉(圭峯)선사가 이르시되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하늘의 덕이니 한 기운에서 시작되고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은 부처님의 덕이니 한 마음에서 비롯한다. 한 기운을 오로지 하여 부드러움을 이루고 한 마음을 닦아서 도를 이룬다.”고 하셨으니 규봉(圭峯)스님의 이와 같은 이해라야 비로소 유교와 불교의 두 가지 가르침에 치우침이 없으며 남은 한이 없을 것인데 언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역지루천(易之屢遷)의 뜻과 같다함은 감히 허락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언충의 억지로 끼워 맞춤에 의거한다면 공자와 부처님에게 신속히 짚신을 사서 신겨야지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자주 옮기고 한 사람은 머무르는 바 없으니 아마도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배를 잡고 웃을 것입니다.



유통판 언충에게 답함


당신의 형 보학공이 처음부터 관법(觀法)과 묵조에 대해 알지 못하고 마음을 찾았으며, 비록 제방(諸方)의 삿되고 바름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기본이 견고하여 삿된 독은 침범할 수가 없었으며, 관법과 묵조선도 (그를) 침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결같이 묵조와 관법을 하여 생사의 마음을 부수지 못하면 오온(五蘊)의 마(魔)가 그 틈을 얻고 허공을 잡아 잘라서 두 갈래로 만듦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 있을 때는 한없는 즐거움을 받고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 한없는 고통을 받으니, 고통과 즐거움이 한결같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로지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주시(注視)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아무 생각도 없게 하지도 말며 하루 중에 놓아버려 걸림이 없게 하여 문득 당신의 옛 습기가 별안간 일어나더라도 또한 마음을 써서 내리 누르려고 하지 말고 다만 문득 일어난 곳에서 화두를 들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바로 이러한 때 달아오른 화로 위의 한 점의 눈과도 같으니 눈으로 판단하고 손에 익은 것을 한번 뛰어넘어야지 바야흐로 나융(懶融)선사가 말한 바로 마음 쓸 때가 바로 마음 씀이 없는 것이니 자세히 말함은 이름과 모양이 번거롭고 바로 말함은 번거롭거나 중복됨이 없으니 무심(無心)이 바로 마음 쓰는 것이고 항상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무심(無心)인 것입니다. 지금 말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나니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 바수반두(婆修盤頭)가 항상 한끼만 먹고 눕지도 않으며 여섯 때로 예불을 하며 청정하여 욕심이 없어 대중들이 귀의하였습니다. 20조(祖)인 사야다(闍夜多)가 장차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그의 문도(門徒)에게 “이렇게 두루 두타(頭陀)를 행하고 깨끗한 행을 닦으면 불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정진(精進)이 이러한데 무엇 때문에 할 수가 없겠습니까?” 사야다가 이르되 “당신들의 스승은 도(道)와 거리가 멉니다. 설사 고행을 티끌과 같은 겁(劫)을 지내도 모두가 허망의 근본입니다.” 그 무리가 분(憤)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고 소리를 높여 사야다에게 일러 말하되 “존자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의 스승을 비난하십니까?” 사야다가 “나는 도를 구하지 아니하되 또한 전도(顚倒)되지도 않으며, 나는 예불(禮佛)을 하지 않지만 또한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나는 오래 앉지 않지만 또한 게으르지 않으며, 나는 한끼만 먹지 않으나 또한 잡식(雜食)하지도 않으며 나는 만족함을 알지 못하나 또한 탐욕(貪慾)스럽지 않습니다. 마음에 바라는 바 없음이 이름하여 도라고 합니다.”라고 이르시니 바수반두가 듣고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터졌으니 이른 바 먼저 정(定)으로써 움직이게 하고 뒤에 지혜로써 구제한다고 했습니다. 엉터리 장로(長老)들이 그대로 하여금 고요히 앉아서 부처되기를 기다려라하니 어찌 허망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말하되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없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음이 있다고 하니 어찌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나융선사가 말한 지금 설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름이 없다는 것과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대는 자세히 마땅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수반두도 처음에 또한 장차 이르되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겨우 사야다의 점검(點檢)으로 부숨을 당하고 곧 말 떨어지자마자 깨달아 무루(無漏)의 지혜가 열렸으니 진실로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립니다. 중생은 미쳐 날뜀이 병이어서 부처님께서 적정바라밀(寂靜波羅蜜)의 약으로 치료하시니 병이 물러갔는데 약은 남아 있다면 그 병은 더욱 심합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으니 어느 때에 마치겠습니까! 생사(生死)가 닥쳐오면 고요함과 시끄러움 두 가지는 모두 한 점도 소용이 없으니 시끄러운 곳에서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적고 많음, 얻음과 잃음,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묶어 한 다발을 만들어 다른 세계에 보내 놓고, 다시 바로 일상의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며, 고요한 것도 시끄러운 것도 아니며,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닌 곳에서 오로지 <이뭣고?>를 들어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백년의 세월이 손가락 퉁기는 사이 곧 지나가니 다시 어찌 한가하게 공부하면서 얻음과 잃음을 따지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따지며 많고 적음을 따지고 묵조니 관법이니 하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석두(石頭)화상께서는 “삼가 현묘(玄妙)한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에게 말하겠는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한 구절을 눈을 떠도 염두해 두고 눈을 감아도 간직하고 망회(忘懷)할 때도 간직하고 관대(管帶)할 때도 간직하고 광란할 때도 간직하고 고요할 때도 간직하십시오. 나는 이와 같이 배치하여 맞추나 아마도 엉터리 장로들은 달리 배치하여 맞추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돌(咄) 이만 줄이겠습니다.



유통판 언충에게 답함(2)


그대가 고요히 앉아서 공부한지가 몇 년이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사물을 대하는 것에 마음이 편안함을 얻었습니까? 만약 편안하지 않다면 이것은 고요히 앉아서 한 공부가 힘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오래하여도 오히려 힘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지름길로 힘을 얻는 곳을 구해야만 비로소 평소에 허다하게 한 공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평소에 고요히 앉아서 하는 공부는 오로지 (마음의) 시끄러운 것을 막아 물리치고자 함이니 바로 시끄러운 때에 도리어 시끄러운 것에 자신의 마음이 어지럽게 되면 도리어 평소에 고요히 앉아 공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이 도리는 너무나 가까이 있어 멀어도 자신의 눈동자 속을 벗어나지 않아 눈을 뜨면 곧 보이고 눈을 감은 곳에도 모자람이 없으며 입을 열면 곧 말하고 입을 닫는 곳에 또한 자연히 드러나 있으니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나 어긋나 버리고 맙니다. 바로 당신이 마음을 쓰는 곳이 없어야지 이것이 가장 힘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개 힘을 써서 구하고자하니 그것을 구한다면 점점 잃게 되고 향할수록 더욱 어긋나 버리게 되니 어찌 얻고 잃음을 따지는 알음알이에 떨어져 있으면서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고요한 곳에 20여년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험삼아 조금이라도 힘을 얻은 것을 가져온다면 옳을 것이나 만약 말뚝처럼 오래 앉아 있는 것을 가지고 고요히 앉아 하는 공부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어버립니까? 지금 힘을 든 것을 얻고 고요함과 시끄러운 것에 한결같기를 원한다면 다만 조주의 <무(無)>자를 뚫어십시오. 문득 뚫으면 비로소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방해되지 않음을 알 것이며 또한 힘을 써서 지탱(고요함에 집착하여 고요한 곳에만 있고자 하는 것)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지탱함이 없다는 견해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진국태 부인에게 답함


도겸(道謙)수좌가 돌아옴에 써준 바의 편지와 친히 쓴 몇 게송을 받고 처음에는 또한 매우 의심했는데 도겸수좌에게 자세히 묻고서 비로소 스스로 속이지 아니함을 알았습니다. ‘오랜 겁(劫)동안 밝히지 못한 일이 활연히 앞에 드러나되 사람을 쫓아 얻은 것이 아니다. 비로소 법희선열(法喜禪悅)의 즐거움은 세간의 즐거움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나는 국태부인(國太夫人)을 위해 여러 날을 기뻐하여 자고 먹는 것을 모두 잊었습니다. “아들은 재상이 되고 몸소 국태부인이 됨이 귀한 것이 아니며 똥무더기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를 거두어서 백겁천생토록 받아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 비로소 참으로 귀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절대로 귀하다고 한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만약 집착한다면 존귀함 속에 떨어져 있어 다시 자비와 지혜를 일으켜 중생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장승상 덕원에게 답함


공손히 생각해보니 아란야(阿鍊若: 절)에 한가히 거쳐하면서 저 스님과 더불어 한 곳에 함께 모여 비로자나의 깊은 세계를 즐거이 담론하면서 마땅함을 따라 불사(佛事)를 행하되 병과 번뇌가 없고 몸은 편안하십니까? 위로부터 모든 성인이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른 바 생각 생각 가운데 온갖 법이 멸(滅)하여 다 없어진 삼매(三昧)에 들어서 보살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보살의 일을 버리지 않았고 대자비심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익히되 일찍이 쉬지도 않았으며 모든 불국토를 관찰함이 싫어하거나 태만함이 없었고 중생을 제도하는 원(願)을 버리지도 않았으며 법륜(法輪)을 굴리는 일도 중단하지 않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그만둔 적도 없었으며 혹 가지고 있는 수승한 원(願)을 다 원만함을 얻어 모든 국토의 차별을 알아 부처님의 근본성품에 들어가서 피안(彼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장부가 일상생활 가운데 받아 쓸 집안일입니다. 그대는 이것에 힘써 행하여 게으름이 없으니 나도 이것에 대해서는 또한 그대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내가(대혜스님) 손댐을 허락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으니 장사(長沙)에 이르러 곧 비야(毗耶)에서 입을 막고 불이문(不二門)에 깊이 들어갔다고 하니 이것 또한 본본 밖의 일이 아니라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이와 같이 수용한다면 모든 마(魔)와 외도들이 반드시 와서 법을 수호하는 착한 신장(神將)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가지가지 차별의 다른 뜻도 모두 본인의 마음이 보고 듣고 하는 경계(註441 참조)이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제형 양숙에게 답함


거사의 행하는 것이 그윽히(암암리에) 도와 더불어 합하되 다만 한번 와지(?∫?)함을 얻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날마다 인연(경계, 사물)을 대할 때 옛 걸음(지금까지 공부해 오던 것)을 잃지 않으면 비록 한번 와지(?∫?)함을 얻지 못했으나 죽음이 닥쳐오면 염라대왕이 마땅히 손을 모으고 와서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하물며 한 생각아 서로 맞으면(깨달으면) 어떠하겠습니까! 내가 비록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행한 일을 보건대 작고 큼이 알맞아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으니 다만 이것은 곧 도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번뇌라는 생각도 또한 불법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불법이다 번뇌다 하는 것은 모두 (본분)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밖의 일이라는 생각도 내지 마십시오. 다만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되 ‘이와 같은 생각(불법이니 번뇌니 하는 생각)을 일으킴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일을 할 때는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가?’ 행한 일을 이미 처리하고서는 ‘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자람과 남음도 없으니 바로 이러한 때에 누구의 은혜를 받는가?’ 이와 같이 공부하면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 과녁을 맞히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중생이 전도되어 스스로 미혹케 하고 외부경계를 쫓아 조그만 욕심의 맛에 탐착하여 무량한 고통을 달게 받으니 날마다 눈뜨지 않았을 때,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 반쯤 잠에서 깼을 때 의식은 이미 어지러이 휘날려 망상을 따라 흘러 다닙니다. 선악(善惡)을 지음이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 천당과 지옥이 마음 가운데 있어 이미 일시에 성취되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제 8식(八識)에 떨어져 있게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일체의 모든 감각기관(根)이 마음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며 국토와 몸 등의 곳집(藏)이 망상으로부터 펼쳐져 나타난 것이니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고, 종자와 같고, 등불과 같고, 바람과 같고, 구름과 같아 순간 변화하니 마음이 성급히 움직임은 원숭이와 같고 더러운 곳을 좋아함은 날파리와 같고 싫증내거나 만족해함이 없음은 바람과 불과 같으며, 무시(無始)의 거짓된 습기의 씨앗은 물 긷는 도르레등과 같은 일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것에 대해 알면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없는 지혜라고 부릅니다. 천당과 지옥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인의 반쯤 깨어 아직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지 결코 밖을 쫓아 온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았을 때, 잠이 깼을 때와 깨지 않았을 때 간절히 비추어 보되 비추어 돌아볼 때 또한 그것과 더불어 (일어나는 망상을) 힘을 써서 다투지 말지니 (애써 망상심을 물리치려 하지 말라) 다투면 힘을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조사가 또한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게 하면 그침은 다시 더욱 움직이게 된다.” 하셨으니 비로소 일상의 번뇌 가운데 점점 힘을 드는 때가 곧 본인이 힘을 얻는 곳이며, 본인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곳이며, 지옥을 변화시켜 천당을 만드는 곳이며, 본인이 편안히 앉는 곳이며,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곳이며, 시들어 피폐한 때에 피로한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곳이며, 자손들을 덮어 감싸주는 것이니 이에 이르러야 부처와 조사를 말하고 마음과 성품을 말하고 현묘한 것을 말하고 이(理)와 사(事:차별적인 현상계)를 말하며 좋고 나쁨을 말하더라도 또한 바깥쪽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일도 오히려 밖에 속하거늘 하물며 다시 번뇌 가운데 성인들이 꾸짖는 바의 일을 하겠습니까! 좋은 일을 함도 오히려 즐겨하지 않거늘 어찌 좋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말한 것을 믿는다면 영가(永嘉)선사가 이르신바 “행함도 선이요, 앉음도 선이라. 어묵동정에 몸이 편안하다.”고 하셨으니 헛된 말씀이 아닙니다. 청컨대 이것에 의지해서 실천하여 시종 바꾸지 않는다면 비록 자기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깨닫지 못하며 비록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설은 곳(生處)은 이미 익고 익혀온 것은 이미 설게 될 것입니다. 제발 기억하십시오. 비로소 힘을 든 것을 느끼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내가 매번 이 가운데(공부에 뜻을 둔)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니 종종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을 보고 대개 소홀히 하여 그것으로 일을 삼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사는 시험삼아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단지 십 여일(十餘日)에 곧 스스로 힘을 든 것과 힘을 들지 않은 것, 힘을 얻은 것과 힘을 얻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아뢸 수 없습니다. 선덕(先德)께서 말씀하시기를 증득함을 말함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으며 이치를 말함은 증득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스스로 증득하며 스스로 믿고 깨달은 곳은 오직 일찍이 증득하며 일찍이 믿고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묵묵히 서로 계합하지 증득하지 못하고 믿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경계가 있음도 믿지 못합니다. 그대는 천성적인 자질(資質)이 도에 가까워 현재 확고하여 행하는 것이 애써지 않아도 또한 쉬우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만분(萬分) 가운데 이미 구천 구백 구십 구분(九千九百九十九分)을 덜어 버렸고 다만 문득 한 번 터져서 곧 깨달아 버림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움에 대개가 착실히 이해하지 않고 말로 논(論)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곧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 어찌할 바를 모름이 바로 좋은 곳임을 믿지 않고 다만 마음속에 사량하여 이름(到: 진리에 도달함)을 얻고자 하며 입으로 말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하니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모든 비유로써 가지가지 일들을 말씀하셨지만 비유로써 이 법을 설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져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량, 분별은 도를 방해함이 필연적임을 믿고 아십시오. 만약 앞, 뒤가 끊어짐을 얻는다면 마음과 지혜의 길이 저절로 끊어질 것입니다. 만약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지면 가지가지 일들을 말함이 모두가 이 법(法)입니다. 이 법이 이미 밝아지면 곧 밝은 곳이 곧 사의(思議)할 수 없는 해탈경계이며, 단지 이러한 경계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경계를 이미 사의할 수 없으면 일체의 비유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가지가지의 일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단지 이렇게 사의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이 말도 또한 둘 곳이 없으며 단지 이렇게 둘 곳 없는 곳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계속해서 따져 가면 사(事)와 법(法), 비유와 경계 같은 것이 둥근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아 일어나는 곳도 없으며 없어지는 곳도 없으니 모두가 사의할 수 없는 법이 됩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이르되 “보살이 이렇게 사의하지 않는 곳에 머물러 그 속에서 사의함이 끝이 없다. 이 사의할 수 없는 곳에 들어오면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이 모두 적멸(寂滅)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니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법계량(法界量)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일러 법진번뇌(法塵煩惱)라고 하니 법계량(法界量)를 멸(滅)해 버리고 가지가지의 수승함을 한 번에 없애고 바야흐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건시궐(乾屎橛)>,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등의 화두를 잘 들어보십시오. 문득 한 언구(一句)를 투과하면 비로소 그것을 일러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回向)이라고 합니다. 여실(如實)히 보며 여실히 행하며 여실히 써서 곧 한 털 끝에 불국토를 드러내며 미세한 티끌 속에 앉아서 대법륜(大法輪)을 굴리게 됩니다. 가지가지 법을 성취하며 가지가지 법을 파괴함이 모두가 나로 말미암은 것인데 장사(壯士)가 팔을 뻗음에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獅子)가 돌아다님에 짝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갖가지 수승하고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마음에 놀라지 않으며 갖가지 악업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일상생활 가운데 인연을 따라 뜻대로 자재(自在)하며 성품을 따라 유유자적하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천당, 지옥이 없다는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영가(永嘉)선사께서는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대천(大千)의 모래 같은 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聖賢)들은 번개가 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잘못 아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진실로 근원을 뚫지 못하면 말을 의지해 알음알이를 냄을 면치 못하여 곧 말하되 일체가 다 없다. 인과를 무시하여 없다고 하고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언교(言敎)가 다 거짓이라고 하니 그것을 일러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미혹케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한다면 곧 한없이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허망하게 들뜬 마음이 모든 계교(計巧)스러운 견해가 많다.”고 하셨으니 만약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무(無)에 집착하고 만약 이 두 가지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유, 무(有無)의 사이에 사량하며 헤아리며 비록 이 병을 알았으나 반드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곳에 이르러 있으니 때문에 선성(先聖)이 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게 말씀하시어 사구(四句)를 버리고 모든 잘못된 것을 끊게 하시어 바로 한 칼에 두 동강을 내어 다시 앞,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성인의 머리를 끊게 하셨습니다. 사구(四句)는 곧 有, 無, 非有, 非無, 亦有亦無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 사구(四句)를 투과하면 일체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따라 그와 함께 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실제로 있다는 것에 장애를 입지 않으며 일체 모든 법이 실제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없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세상의 공허한 무(無)가 아니며 일체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내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허황된 이론이 아니며 일체 모든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닙니다. 유마거사가 말씀하신 “외도육사(外道六師)가 떨어진 바에 너 또한 따라 떨어져라.” 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움에 대개 마음을 비워버리고 선지식께서 지시함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선지식이 막 입을 열면 그는 이미 말 앞에 있어서 한번에 알았다가도 그로 하여금 토로(吐露)케 하면 모두가 한번에 잘못 아니 바로 말 이전에 알아버린 것이 말에 걸려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어떤 한 종류는 한결같이 총명을 내어 도리를 말하여 세간의 갖가지 재주는 내가 알지 못함이 없으나 다만 선(禪)이란 한 가지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관직에 임(臨)하는 곳에서 몇 명의 엉터리 장로들을 불러다가 한 끼 식사를 대접하여 먹이고는 그들로 하여금 방자한 뜻으로 어지럽게 말하게 하고 곧 심의식(心意識)으로 엉터리로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도리어 사람들을 감정하되 한 구절씩 주고받는 것으로 선(禪)을 겨룬다고 말하며 끝에 내가 한 구절이 많고 다른 사람이 말이 없을 때 곧 내가 마땅함을 얻었다고 하다가도 참된 눈 밝은 사람을 만나면 또한 도리어 알지 못하며 비록 알았더라도 또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서 사지를 땅에 내려놓고 선지식에게 나아가 깨달으려 하지 않고 예전대로 인가(印可)를 구하려 하다가 선지식이 역순의 경계 가운데 본분감추(本分鉗鎚)를 보이면 또한 도리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그대는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에 올라 집을 일으키고 사는 곳에서 때를 따라 이익된 일을 행하며 문장과 사업 모두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다만 물러나 이 일대사인연을 착실히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지극한 정성을 보았기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단지 그대가 이러한 병을 알게 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또한 처음 마음을 낸 보살도를 닦는 사람을 격려하여 도에 들어가는 양식으로 삼고자 합니다.

 


더보기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


받아보니 문을 닫고 면벽(面壁)한다고 하니 이것은 마음을 쉬는 좋은 약입니다. 만약 다시 옛 종이를 연구한다면 반드시 정식(藏識:8식) 중에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생사의 근본의 싹을 끌어 일으켜서 선근(善根)의 어려움을 만들며 도를 장애하는 어려움을 만듦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고 또한 마음을 쉬고는 과거의 일에 선(善), 악(惡), 역(逆), 순(順) 같은 것은 모두 생각하지 말며, 현재의 일은 없앨 수 있는 대로 없애되 한 칼에 두 동강내어 머뭇거리고자 하지 않으면 미래의 일은 자연 이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에 망령되이 과거의 법을 취하지 말며, 또한 미래의 일에 집착하지 말며, 현재에 머무르는 바 없으면 삼세가 모두 공적함을 깨달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없다>고 한 것을 들고 청컨대 쓸데없이 사량하는 마음을 잡아 무(無)자에 돌이켜 두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문득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 한 생각 깨뜨릴 수 있다면 곧 삼세를 요달한 곳입니다. 깨달았을 때는 안배(安排)할 수 없으며, 계교할 수 없으며, 인증(引證)할 수도 없으니 왜냐하면 요달한 곳에는 안배(安排)도 용납하지 않고, 계교도 용납하지 않으며, 인증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증하고 계교 안배하더라도 요달한 것과는 전혀 교섭함이 없습니다. 다만 놓아 걸림이 없게 하여 선과 악을 모두 사량하지 말며 또한 뜻을 두지도 말고 또한 망회(忘懷)하지도 마십시오. 뜻을 두면 곧 산란해지고 망회(忘懷)하면 혼침이 있게 됩니다. 뜻을 두거나 망회 하지 않으면 선(善)이 선이 아니요, 악(惡)이 악이 아닙니다. 만약 이와 같이 요달한다면 생사의 마(魔)가 어느 곳을 엿 볼 수 있겠습니까? 일개 왕언장(汪彦章)의 명성(名聲)이 천하에 가득하니 평생에 안배하고 계교하고 인증한 것은 문장(文章)이며 명예(名譽), 관직(官職)입니다. 만년(晩年)에 인(因)을 거두고 과(果)를 맺는 곳에 어느 것이 실체입니까? 한없이 쓸데없는 것만 행했으니 어느 한 글귀에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명예가 이미 드러났으니 덕을 숨기고 빛을 감추는 것과는 차이가 얼마입니까? 관직이 이미 대양제(大兩制)에 이르렀으니 벼슬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와 차이가 얼마입니까? 지금 이미 70에 가깝습니다. 그대의 기량(技倆)을 다 발휘했으니 무엇을 바랍니까?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타협하겠습니까? 무상(無常)한 살귀(殺鬼)가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설봉진각(雪峯眞覺)선사께서 이르시되 “시간이 너무 빨라 잠깐이다. 뜬세상 어찌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겠는가 재를 넘은 때가 32세더니 민중(閩中)에 들어오니 이미 40이로다. 다른 이의 잘못은 자주 들추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도리어 마땅히 재빨리 없애라. 성(城)에 가득한 벼슬아치에게 알리나니 염라대왕은 금어(金魚) 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고인이 입이 아프도록 간절히 말씀하심은 무슨 일을 위함이겠습니까?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배고프고 추운 것에 핍박을 받아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몸이 조금 따뜻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곧 끝나니 다만 이 두 가지 일 밖에는 없습니다. 생사(生死)의 마(魔)가 도리어 번뇌(煩惱)롭게 하지 못하니 부귀한 자와 비교하면 가볍고 무거움이 크게 같지 않습니다. 부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이 이미 항상 따뜻하고 뱃속이 항상 배불러서 이미 이 두 가지 것에 핍박을 받지 않지만은 말할 수 없이 일이 많아 형용 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항상 생사의 마의 그물 가운데에 있어 그로 말미암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다만 숙세의 선근이 있는 자는 막 보아 꿰뚫고 알아 버립니다. 선성(先聖)이 말씀하시되 “문득 (생각이) 일어남은 병이요, 이어지지 않음이 약이니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늦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란 깨달음입니다. 그는 항상 깨달아 있기 때문에 대각(大覺)이라고 부르며 또한 각왕(覺王)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두 범부(凡夫)에서부터 지어 나왔습니다. 그도 이미 장부니 내가 어찌 그렇지 않으리요! 백년 세월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 생각을 마치 머리에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십시오. 좋은 일을 행함도 도리어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생각 생각이 번뇌 가운데에 있어 깨닫지 못함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두렵고 두렵습니다. 근래 여거인(呂居仁)의 사월 초에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증숙하(曾叔夏)와 유언래(劉彦禮)가 죽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거인이 교유(사귐)하는 중에 때때로 다시 한 두 사람 빠져나가니 바로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는 요사이 이 일을 매우 간절하게 하면서 또한 문득 생각을 돌이킴이 조금 늦은 것으로 후회한다고 하거늘 근래에 편지를 써서 답장하여 단지 마지막에 잘못됨을 아는 한 마음으로 바른 것으로 삼고 (생각을 돌이킴이) 더디고 빠름은 묻지 마십시오. 그릇된 줄을 아는 한 마음은 곧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며 마(魔)의 그물을 부수는 날카로운 무기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단지 이와 같이 공부를 해나가십시오. 지어나가는 공부가 점점 익으면 온종일 가운데 곧 힘을 든 것을 느낄 것입니다. 힘을 든 것을 느꼈을 때에 놓아 느슨하게 하지 말고 오로지 힘을 든 곳에서 공부를 지어 나가십시오. 공부를 지어감과 이렇게 힘이 들린 곳이 또한 알지 못하는 어느 때는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이 무(無)자를 들지언정 얻고 얻지 못함은 관여하지 마십시오. 지극히 빕니다.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2)


편지를 받아보니 문을 닫고 사귐을 쉬며 세간의 일을 소홀히 하고 오직 아침, 저녁으로 내가 지난번에 언급한 화두를 든다고 하니 매우 좋고 좋습니다.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었다면 마땅히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야 합니다. 만약 스스로 퇴굴심(退屈心)을 내어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고 하면서 다시 들어가는 곳을 구한다면 바로 함원전(含元殿) 속에서 장안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바로 (화두를) 들 때에 누가 드는 것이며,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함을 아는 것은 또한 누구이며, 들 곳(깨달아 드는 곳)을 구함은 누구입니까? 내가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분명히 거사를 위해 설하겠습니다. 다만 하나의 왕언장이지 다시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왕언장만 있다면 다시 어디에서 화두를 들며 근성이 보잘것없고 낮다함을 알며 들어갈 곳을 구함을 얻겠습니까? 마땅히 모두가 왕언장의 그림자이지 전혀 다른 왕언장이 간여하는 일이 아님을 아십시오. 만약 진실한 왕언장은 근성이 반드시 열등하지 않으며 들어갈 곳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주인공을 믿는다면 결코 허다한 수고로움을 소비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앙산(仰山)스님께 여쭈되 “선종은 단박에 깨닫는 것입니다. 필경에 입문(入門)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이 뜻은 지극히 어렵다 만약 선종의 문하에 지혜와 근기가 뛰어나면 한 번 듣고 모든 것을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얻나니 이러한 근기의 사람은 얻기가 어렵다. 대개 근기와 지혜가 미약하고 낮아 그러한 까닭으로 고덕(古德)께서 이르시되 만약 선정(禪靜)에 안주하지 않고 생각을 고요히 하지 않으면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땅히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 스님이 말하되 “이 격식을 제외하고는 도리어 다른 방편이 있어 학인들로 하여금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까?”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별도로 있다 없다 하면 너의 마음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는 것이니 내가 지금 너에게 묻겠다. 너는 어디 사람인고?” “유주 사람입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너는 또한 그 곳을 생각하는가?” “항상 생각납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그 곳의 누대(樓臺)와 수풀 동산에 사람과 말이 아울러 찼으니 너는 생각나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라. 또한 허다한 것들이 있는가?” “제가 이 곳에 이르러서는 일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앙산스님이 이르시되 “너의 견해가 오히려 경계에 있다. 신위(信位)는 옳으나 인위(人位)는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노파심(老婆心)이 간절하여 마땅히 다시 설명을 달 것이니 인위(人位)는 곧 왕언장이요 신위(信位)는 곧 근성이 낮음을 아는 것과 들어갈 곳을 구하는 것이니 만약 화두를 들 때에 드는 곳에서 여전히 왕언장인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속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 털끝도 용납하지 않으니 만약 생각에 머물고 근기에 머문다면 그림자의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청컨대 정신을 차리고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기억해 보니 이전에 답장한 편지 중에 일찍이 써서 보내되 마음을 쉼을 얻어 또한 마음을 쉬고는 과거의 일에 선이니 악이니 역순을 모두 생각하지 말며 현재의 일은 없앨 수 있는한 없애되 한 칼에 두 동강내어 의심하고 머뭇거리지 않는다면 미래의 일은 자연히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이와 같이 엿보아 잡아가고(화두를 들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곧 가장 힘을 들어 공부하는 곳입니다. 지극히 빕니다.



왕내한 언장에게 답함(3)


편지를 받으니 다섯째 아들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니 아버지와 자식의 정(情)은 오랜 생(生)에 은애습기(恩愛習氣)가 흘러 모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일을(자식이 병듦) 만나면 옳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탁악세(五濁惡世) 가운데 가지가지가 모두 헛된 환영이어서 한가지도 진실함이 없으니 청컨대 행주좌와에 항상 이렇게 관(觀)하면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점점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할 때에 자세히 헤아려 궁구(窮究)해 따지되 ‘어느 곳을 따라 일어나는가?’ 만약 일어나는 곳을 궁구할 수 없으면 ‘현재 번뇌하는 것은 또한 어느 곳을 따라 왔는가?’ 번뇌할 때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헛된 것인가, 진실한 것인가?’ 계속 궁구해 가면 마음이 갈 곳이 없으니 사량하고자 하면 다만 사량하고 울고 싶거든 다만 우십시오. 울다가 사량해 가다가 의식 중에 허다한 은애의 습기를 털어 다할 때 자연히 얼음이 녹아 물로 돌아감과 같아서 나의 본래 번뇌도 없고 근심 기쁨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세간에 들어와 있으면서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다면 세간법이 곧 불법이요, 불법이 곧 세간법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천성(天性)은 하나이니 만약 자식이 죽었는데 아버지가 번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며, 만약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이 번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도리어 옳겠습니까? 만약 억지로 참아 울 때에 또한 울지 않고 생각날 때에 또한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천성(天性)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 메아리를 그치게 하고 기름을 부어 불을 끄려함입니다. 번뇌 할 때에는 모두가 본분사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니 또한 벗어난 일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영가(永嘉)스님께서는 “무명(無明)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요, 환(幻)과 같이 변하는 헛된 몸뚱이가 곧 법신(法身)이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참된 말이며 속이거나 망령된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량하거나 번뇌하고자 하려 해도 또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관하는 자는 이름하여 바른 관(觀)이라고 하고 만약 다르게 관하는 자는 이름하여 삿된 관(觀)이라고 합니다. 삿되고 바름을 구분하지 못했다면 곧 힘을 잘 쓸지니 이것이 나의 확고한 뜻이니 지혜 없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운사 지굉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도와 계합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며 뜻이 다른 즉 얼굴을 마주 대하더라도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같이 멀다고 하니 이 말은 진실한 것입니다. 곧 이것이 전하지 못하는 오묘한 것입니다. 그대가 뜻을 내어 나에게 편지를 쓰고자 할 때 글을 쓰고 종이를 털기 전에 이미 두 손으로 분부(인가)했습니다. 또한 어찌 굳게 참아 구경까지 기다려 다른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도리는 오직 증득한 자라야 비로소 묵묵히 서로 계합하니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연평(延平)은 곧 민령(閩嶺)의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대가 스스로 조복(調伏)하여 역순의 문빗장(화두)에 움직인바 되지 아니하였으니 곧 크게 해탈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일체의 화두를 굴려 일상생활에 자유자재하여 그를 얽매여 끌거나 이끌어 묶을 수 없습니다. 만약 즉시 곧 이렇게 깨달으면 자연히 털끝만큼도 나에게 장애됨이 없습니다. 고덕이 말씀하시되 “부처님께서 설한 모든 법은 일체의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내가 일체의 마음이 없으면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며 또한 나융(懶融)선사는 “바로 마음 쓸 때가 마음 씀이 없을 때니 자세히 말함은 이름과 모양이 번거롭고 바로 말함은 번거로움이 없다. 무심이 바로 마음 쓰는 것이요, 항상 쓰되 마음 씀이 없는 것이다. 지금 말한 무심처가 유심과 다르지 않다.” 하셨으니 다만 나융스님만 이와 같지 않고 나와 그대도 또한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 속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잡아내어 보이기가 어려우니 앞서 말한 묵묵히 서로 계합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나니 화두에서 의심이 깨어지면 모든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지게 됩니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면 또한 그 위에 나아가 더불어 서로 지어 가십시오. 만약 화두를 버려두고 달리 문자상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상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 번뇌 가운데에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들입니다. 첫 번째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한 사량하고 헤아리지 말고 오로지 뜻을 두어 사량 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가 없으니 마치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마음이 만약 시끄럽거든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드십시오. 부처님과 조사들의 말씀, 제방의 노숙(老宿)의 말씀의 천 가지 만 가지 차별들은 만약 <무(無)>자만 꿰뚫으면 한꺼번에 통과할 것이니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마십시오. 만약 한결같이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말씀은 어떠하며, 조사의 말씀은 어떠하며, 제방의 선지식의 말씀은 어떠한가 묻는다면 영겁에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여랑중 융체에게 답함


당신의 형 거인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아보니 이 일을 위해 매우 바쁘다고 하니 그러나 또한 마땅히 서둘러야 합니다. 나이가 이미 60이요 관직에 종사함도 또한 마쳤으니 다시 무엇을 기다리리요. 만약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정리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들으니 그대도 근래에 일찍이 서두른다고 하니 다만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 곧 죽음에 대처할 소식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 속을 투과하지 못하면 죽음이 닥쳐오면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서생(書生)들은 일생토록 낡은 종이만 파고들되 이 일(일대사인연)을 알고자 하여 널리 여러 책을 열람하며 고상하고 넓은 담론으로 공자(孔子)는 또한 어떻고, 맹자(孟子)는 또한 어떠하며 장자(莊子)는 또한 어떻고 주역(周易)은 또한 어떻고 고금(古今)의 평화로울 때와 혼란할 때는 어떻다 하여 이런 사소한 말들의 부림을 당하여 칠전팔도(七顚八倒: 마음이 어지럽다)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막 어떤 사람이 한 자를 드는 것을 듣고는 곧 책을 이루도록 생각하되,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으로 삼다가 그 자신의 본분사를 물음에 이르러서는 전혀 한 사람도 아는 이 없으니 종일토록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다가 스스로는 반푼의 돈도 (얻은 것이) 없다고 이를만합니다. 공연히 세상에 와서 한 평생 살다가 이 몸뚱이를 벗어버리면 천상에 오르는지, 지옥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하고 업력(業力)을 따라 육도(六道)에 들어감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의 크고 작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사대부가 읽은 책이 많은 것은 무명(無明)이 많은 것이고, 읽은 책이 적은 것은 무명이 적은 것이며, 행한 관직이 낮은 것은 아상(我相)이 적은 것이고, 행한 관직이 높은 것은 아상(我相)이 높은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말하다가도 아주 작은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총명함을 볼 수도 없고 영리함을 볼 수 없으며 평생 읽은 책은 한 자도 소용이 없으니 대개 어린 시절로부터 곧 어긋나 다만 부귀함을 얻고자 합니다. 부귀함을 취하는 자 중(中)에 몇 사람이나 생각을 돌려 자기 근본에서 추궁하여 ‘내가 이렇게 부귀를 취하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지금 부귀함을 받는 것은 다른 날에 다시 어느 곳을 향해 가는고?’ 하겠습니까! 이미 온 곳도 모르며 또한 간 곳도 모르면 곧 마음이 어둡고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바로 어둡고 답답한 때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속에 나아가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 오로지 이 화두를 들다 보면 문득 기량이 다 할 때 곧 깨닫게 됩니다. 절대로 문자를 찾아 증거를 대어 어지러이 헤아려 주해(注解: 풀어서 이해하다)하지 마십시오. 비록 분명하게 주해하며 설명하여 낙처(落處)가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의 살림살이입니다. 의정(疑情)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서로 더해가며 의정을 만약 부수면 생사심이 끊어질 것입니다. 불견(佛見), 법견(法見)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의 번뇌의 견해를 일으키겠습니까?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건시궐(乾屎橛)> 위에 옮겨 놓아 한 번 겨룸에, 겨루다 보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둡고 답답한 마음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총명함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행해지지 않음을 느꼈을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홀연 겨루는 곳에서 소식이 끊어지면 평생에 경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식이 끊어짐을 얻으면 불견(佛見), 법견(法見), 중생견(衆生見)을 일으키며 사량, 분별하고 총명을 일으켜 도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상관이 없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다만 항상 놓아 걸림이 없게 하여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항상 <건시궐(乾屎橛)>을 든다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물소(마음)가 자연히 익어(순수)질 것입니다. 첫째로 밖에서 달리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건시궐>에서 의심이 깨어지면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질 것입니다. 이전에 일찍이 또한 이와 같이 써서 여거인에게 주었는데 근래 조경명(趙景明)이 옴에 편지를 받아보니 편지 중에 재차 물어 와서 이르되 이것을 여의고는 달리 공부를 착수하는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 먹을 때는 마땅히 어떻게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다시 다만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또한 별도로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또한 평생에 일대사를 지금에 이르도록 끝내지 못했으니 단지 죽은 후에 단멸(斷滅)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어떻게 확실히 볼 수 있습니까? 또한 경론(經論)에서 설한 바를 인용하지 말고 조사의 공안을 가리키지 말고 오로지 눈앞을 의거하여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은 실처(實處)를 분석 판단하여 지시해 달라고 하니 그의 이와 같이 말함을 보면 도리어 서너 마을집의 할일 없는 놈이 도리어 허다한 분별망상이 없어 죽으면 죽어서 문득 벗어버림만 못합니다. 분명히 그에게 말하기를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에서 의심이 깨지면 천만가지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진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했다면 오로지 화두에 나아가 공부를 지어가라. 만약 화두를 버리고서 달리 문자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조사의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하는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이다. 또한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고 또한 알음알이로 헤아려 재지 말고 오로지 사량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감에 뜻을 두어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 없음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써 준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였는데 또한 도리어 다시 (편지를) 보내와서 어지럽게 물으니 그 많던 총명한 지견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말한 것을 믿지 못합니까? 평생에 책을 읽은 것은 이 속에 이르러서는 한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부득이하여 다시 그를 위하여 나쁜 냄새를 조금 피우겠습니다. 만약 단지 이렇게 그만 둔다면 도리어 내가 그에게 질문을 받고 다시 대답하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 편지가 막 도착하면 곧 그에게 보내어 한 번 보게 하십시오. 거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이 일을 끝내지 못했다고 하니 그에게 묻는데 밝히지 못한 것은 다시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끝내지 못했습니까? 만약에 손을 들고 발을 움직임과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라면 또한 무엇을 하려고 끝내려고 합니까? 그는 단지 이렇게 죽은 후에 단멸(斷滅)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를 알고 반드시 보고자함이 곧 염라대왕 앞에 철로 된 몽둥이를 맞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의심(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생사에 떠돌아다녀 마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말했는데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를 만약 타파하면 죽은 후에 단멸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라는 의심도 즉시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듯 다 풀릴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음을 지시하여 판단해 달라고 물으니 이와 같은 견해는 외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평생에 쓸데없는 것만 행하여 무엇에 쓸려고 합니까? 그는 이미 많이 먼 곳에다가 이러한 나쁜 냄새를 풍겨서 사람에게 배어들게 하니 나도 다만 이렇게 쉴 수가 없어(방관할 수가 없어) 또한 조금 나쁜 냄새를 풍겨서 그에게 배어들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그는 경전과 조사의 공안을 인용하지 말고 다만 눈앞에 의거해서 바로 분명히 단멸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시하라고 하니 옛날에 지도(志道)선사가 혜능(慧能)대사께 묻기를 “제가 출가하면서부터 열반경을 본지가 거의 1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큰 뜻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원하건대 스님께서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느 곳에서 밝히지 못했는가?” 대답하기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생멸법(生滅法)인데 생멸(生滅)이 이미 없어지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이 의심이 되고 미혹합니다.” 육조스님이 이르시기를 “너는 어떻게 의심하는가?” 대답하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두 가지 몸을 가지고 있으니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입이다.(이것이 곧 여거인도 똑같이 말하는 것이다) 색신은 무상하여 생(生)과 멸(滅)이 있으나 법신은 변함이 없어(常) 느끼어 아는 것이 없는데 경전에 이르시기를 생멸(生滅)이 이미 멸(滅)하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이며 어떤 몸이 즐거움을 받습니까? 만약 색신이라면 색신이 없어질 때에 사대(四大)가 흩어지니 모두가 고통이니 즐겁다고 말할 수 없고 만약 법신이라면 적멸이 곧 풀, 나무, 기와, 돌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즐거움을 받겠습니까? 또한 법성(法性)은 생멸의 바탕(體)이고 오온(五蘊)은 생멸의 작용이니 하나의 바탕과 다섯 가지 작용이 생멸이 일정하여 생(生)하면 체(體)를 따라 작용을 일으키고 멸(滅)하면 작용을 거두어 체(體)에 돌아가는데 만약 다시 생한다고 한다면 곧 유정(有情)의 무리가 단멸(斷滅)하지 않으며 만약 다시 생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적멸에 돌아가 무정(無情)의 무리와 같게 되니 이와 같다면 일체의 모든 법이 열반(涅槃)에 감금되어 오히려 생(生)할 수가 없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마땅히 여거인과 더불어 한 문서에다 허물을 다스려야 한다) 육조스님께서는 여기에 이르러 임제(臨濟),덕산(德山)의 방식을 쓰지 않고 곧 조금 냄새를 피워서 다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어찌 외도의 단견과 상견을 익혀서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는가? 네가 이해한 바에 의거하면 색신 외에 별도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 또 열반상락(涅槃常樂)을 미루어 짐작하여 말하되 몸소 받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것은 곧 생사를 집착해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을 탐착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마땅히 알라. 일체의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이 모인 것을 알아서 본인의 모양으로 삼고 일체의 법을 분별하여 육진(六塵)의 모양으로 삼아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여 생각생각 이어져서 꿈이나 환(幻)같은 헛되고 거짓인줄을 모르고 그릇 윤회를 받아서 항상 즐거운 열반으로 도리어 고통의 모양으로 삼고 종일 (오욕의 낙을) 치달려 구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으로 곧 보이시어 열반의 참된 즐거움은 찰나에 생하는 모양도 없고 찰나에 멸하는 모양도 없고 다시 없앨 생멸도 없다고 하셨다. (여기에 이르러 청컨대 눈여겨  보십시오.) 이러하다면 곧 생멸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분명히 나타날 때에 또한 나타난다는 생각이 없어야 곧 항상 즐겁다고 이름하니 이 즐거움은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는 사람도 없다.(또한 조금 명백하다) 어찌 하나의 바탕(體)과 다섯 가지 작용(用)의 이름이 있으며 어찌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감금하여 영원히 생(生)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리요! 이것은 곧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다.(여거인도 또한 (불법을 비방하는 것을) 조금 가지고 있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시비(是非)를 낼 수 없다)  


위없는 대열반이 두루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거늘

어리석은 중생은 죽음이라고 이르며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이라고 말하며

모든 이승(二乘)을 구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고서 지을 것이 없다고 여기니

모두가 망령된 정(情)으로 헤아린 것에 속하니

육십이견(六十二見)의 근본이로다

망령되이 헛되고 거짓된 이름을 세우니

무엇을 진실한 뜻이라 하리요.(거인은 실다운 곳을 보고자 할진대 오로지 이 한 글귀를 보라)

오직 역량이 뛰어난 사람은(아직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통달하여 취하고 버림이 없어(거인은 또한 30년을 의심하라)

오온법과 오온 가운데 나(我)와 (거인은 이 속에서 허다히 벗어남을 구하였으나 문이 없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든 색상과 (허공 꽃을 보지 말라)

낱낱의 음성 모양이(사람을 속인다.)

평등하여 꿈과 허깨비 같음을 알아서 (반쯤은 구원했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열반의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않으며(또한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양변과 삼세가 끊어져 항상 모든 근(根: 六根)을 응해 쓰되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체법을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나니

겁화(劫火)가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산을 때려 서로 부딪히더라도

진실로 항상 고요하고 즐거우니 열반의 모양이 이와 같다.

내가 지금 힘써 말하여 너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버리게 하니(오직 거인만은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너는 말을 쫓아 이해하지 않는다면(거인은 기억해라)

네가 조금은 알았다고 인정하겠다.” (다만 이러한 조금도 얻을 수 없다)


지도스님이 게송을 듣고 문득 크게 깨달으니(말이 적지 않았다) 오로지 이러한 말이 곧 분명히 바로 결단내어 거인에게 지시한 손가락입니다. 거인이 이것을 보고 만약 말하되 여전히 경전에서 말한 바이고 고인(古人)의 공안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여 만약 오히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면 지옥에 들어감이 화살을 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받아보니 평소에 공부를 함을 쉬지 않는다고 하니 공부가 익으면 화두를 쳐서 깨뜨릴 것입니다. 이른 바 공부라는 것은 세간의 잡다한 일들을 헤아리는 마음을 <건시궐(乾屎橛)>에 돌이켜 두어 정식(情識)으로 하여금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흙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과 같아 어둡고 답답함을 느껴 붙잡을만한 근거가 없을 때가 곧 좋은 소식입니다.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앞과 뒤를 헤아려 어느 때 깨달을까 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곧 삿된 길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은 사량, 분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르셨으니 이해하면 곧 화가 생깁니다. 사량, 분별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아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하나의 여거인이니 곧 머리를 굴려 따지지 마십시오. 이 앞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에서 선병(禪病)을 다 말했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결코 한 법도 사람에게 주신 것이 없고 다만 본인이 스스로 믿고 스스로 수긍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다만 다른 사람이 입으로 말한 것만 취했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었으며 문자상(文字相)을 여의었으니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을 아는 자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저 죽은 후에 단멸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를 의심함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나에게 (대혜스님) 바로 끊음을 지시해 달라는 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다만 여거인이며 평상시 하루 종일 혹 성내고 혹 기뻐하며 혹 사량, 분별하며 혹 혼침하고 혹 마음이 들뜸도 모두가 다만 여거인이니 다만 이 여거인이 가지가지 기특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과 함께 더불어 적멸대해탈광명(寂滅大解脫光明)의 바다 가운데 노닐어 세간 출세간의 일을 성취 할 수 있건만 다만 여거인이 믿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믿을진대 청컨대 이 주석(註釋)에 의거하여 삼매(三昧)에 드십시오. 홀연 삼매로부터 일어나 식심(識心)을 잊는다면 곧 깨달을 것입니다.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2)


당신의 아우 자육(子育)이 지나가면서 편지를 내놓기에 그것을 읽고 기뻐하고 안심해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상(無常)이 신속하여 백년의 세월이 번개가 번쩍하는 것과 같아 곧 죽을 때가 닥쳐옵니다. <건시궐(乾屎橛)>은 어떠합니까? 단서(巴鼻)가 없고 재미가 없음을 느껴 가슴이 답답함을 느낄 때가 곧 좋은 소식입니다. 첫째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 (화두의 의심을) 다 날려 버리고 공적(空寂)함 속에 있지 말며 (화두를) 들 때에 의심이 있다가도 들지 않을 때는 곧 없게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세간의 번잡함을 사량(思量)하는 마음을 가지고 <건시궐>에 돌이켜 두어 사량하다가 어찌 할 수 없는 곳에서 기량(技倆)이 문득 다하면 곧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에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영겁(永劫)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전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에 사대부의 병통을 다 말했습니다. 받아보니 오직 곁에 둔다고 하니 만약 이것에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비록 깨닫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삿되고 바른 것은 가려 삿된 마구니의 장애를 입지 않을 것이며 또한 깊은 반야의 종자를 심게 되니 비록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생에 태어남에 다 성취하여 받아써서 또한 힘을 소비하지 않으며 또한 나쁜 업에 빼앗김을 당하지 않고 죽을 때에 또한 업(業)을 굴릴 수 있으니 하물며 한 생각 서로 상통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날마다 제발 다른 일을 사량하지 말고 다만 <건시궐>을 사량하되 어느 때 깨달을까하고 묻지 마십시오. 지극히 빕니다. 깨닫는 시기는 (정해진) 때가 없으며, 또한 대중들을 놀라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지 않고 곧장 편안해져서 자연 부처님과 조사를 의심하지 않고 생사(生死)도 의심하지 않으니 의심하지 않는 곳을 얻음이 곧 부처님의 지위입니다. 부처님의 지위에서는 본래 의심이 없으며, 깨달음도 미혹함도 없으며, 생사도 없고, 유무(有無)도 없고, 열반과 반야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설하는 자도 없으며, 이 말도 또한 듣지 않으며, 또한 듣지 않는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음을 아는 자도 없으며, 또한 이렇게 받지 않음을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 여거인이 이와 같이 믿으면 부처님도 다만 이러하고 조사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깨달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미혹도 다만 이와 같으며, 의심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생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죽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평소에 번뇌하는 것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죽은 후에 단멸(斷滅)한가 단멸하지 않는가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조정에 있어 관직에 종사함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휴직하여 고요한 곳에 있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경산(徑山)에 머물러 천 칠백 대중이 에워쌈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며, 귀양 가서 형주(衡州)에 있음도 다만 이와 같으니 당신은 또한 믿습니까? 믿는 것도 또한 다만 이와 같고 믿지 못함도 또한 다만 이와 같으니 필경에 어떠한고? 이와 같음을 이와 같다고 한 이와 같음도 또한 다만 이와 같습니다.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


그대가 어린 나이에 자립하여 곧 모든 사람의 정상에 있으되 부귀함에 얽힌바 되지 않았으니 오랜 겁에 원력을 지닌바 아니면 어찌 이러한 것에(부귀한데 있으면서 부귀함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일대사에 간절하고 절실하여 한 순간도 물러섬이 없으며 확고한 믿음이 있으며 확고한 뜻을 갖추었으니 이것은 어찌 얕은 장부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하나의 일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청컨대 채찍질하여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세간의 일은 다만 이러하니 선성(先聖)이 어찌 이르지 않았습니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는데 듣는 것은 무슨 도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찌 엿봄을 용납하리요! 다시 불도(佛道)를 ‘나의 도는 일이관지(하나로써 꿴다)’에다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모름지기 스스로 믿고 스스로 깨달을지니 설(說)한 것은 결국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믿으면 설(說)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더라도 도리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설하고 형용하여 보여 주어도 도리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이 두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리켜 증상만인(增上慢人)이라고 했으며 또한 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한 대망어(大妄語)를 짓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한 불혜명(佛慧命)을 끊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천불(千佛)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투과하면 이러한 말들은 도리어 망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곧 망어라는 견해를 내지 마십시오. 여거인(呂居仁)에게서 근래 연이어 두 번의 편지를 받으니 편지 가운데 모두 이르기를 여름에 융례(隆禮)에게 답한 편지를 항상 곁에 두고 얻는 것으로 목표를 삼는다고 하며 또한 일찍이 그대에게 적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근세의 귀공자로 그와 같은 사람은 마치 우담발화(優曇波羅)가 삼천년에 한 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근래 산에 있으면서 매번 그대와 더불어 이러한 이야기를 해보니 그대의 안목의 정동(定動)을 보니 구분구리(九分九釐)를 알아차려 보고 다만 한번 와지(?∫?)함이 모자랄 뿐입니다. 만약 한번 와지(?∫?)함을 얻는다면 유교가 곧 불교요, 불교가 곧 유교이며, 승(僧)이 곧 속(俗)이요, 속이 곧 승이며, 범부가 곧 성인이요, 성인이 곧 범부이며, 내가 곧 너이며, 네가 곧 나이며, 하늘이 곧 땅이며, 땅이 곧 하늘이며, 파도가 곧 물이며, 물이 곧 파도이며, 유락(酥酪)과 제호(醍醐)를 섞어 한 맛을 이루며 단지 쟁반, 비녀, 팔찌를 녹여 한 덩어리의 금(金)이 되게 함이 나에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면 나의 지휘로 말미암게 되니 이른 바 내가 법왕(法王)이 되어 법에 자재(自在)하니 득실시비(得失是非)에 어찌 걸림이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무구노자(無垢老子)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으며 비록 믿는다 해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미 그르고(邪) 옳은가(正)를 가릴 수 있으나 다만 손에 넣지 못했을 뿐입니다. 손에 넣는 때는 늙음과 젊음을 가리지 않고 지혜롭고 어리석음에 있지 않습니다. 마치 범천왕위(梵位)를 가지고 바로 범부에게 줌과 같아 다시 계급차례가 없습니다. 영가(永嘉)스님께서 이르신바 "한 번 뜀에 곧장 여래(如來)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오로지 들으십시오. 결코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2)


제(왕장원)가 모든 반연을 쉬고 평소에 다만 이와 같이 번뇌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대의 분상(分上)에 모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으면서 천만가지를 갖추었다고 이를만합니다. 만약 이 문중에 몸을 돌이켜 전심전력한다면 어찌 다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며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뿐이겠습니까? 옛날에 양문공대년(楊文公大年)이 30세에 광혜연공(廣慧璉公)을 보고 가슴에 걸린 물건을 제거하고 이후로부터 조정에 있거나 마을에 머묾에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節槪)를 공명(功名)에 움직이는바 되지 않고 부귀의 빼앗기는바 되지 않고 또한 공명과 부귀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가 있는 곳에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께서 “모든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부림을 당하나 나는 종일토록 부린다.”고 하셨으니 조주스님의 이와 같은 말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대개 배움과 도를 닦음이 하나인데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배움을 삼고 격물(格物), 충(忠), 서(恕)와 일이관지(一以貫之)같은 것을 도로 삼고 있어 다만 수수께끼(博謎子)와 같고 또 여러 맹인(盲人)이 코끼리를 만짐에 각각 다른 부위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유(思惟)하는 마음으로 여래원각경계(如來圓覺境界)를 헤아려 잰다면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당할 때에 전혀 힘을 얻지 못함은 모두가 이것 때문입니다. 양자(楊子)는 “배움이란 성품을 닦는 방법이니 성품이 곧 도다.” 했으며 부처님께서는 “성품은 무상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셨으며 규봉(圭峯)선사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깨달은 마음이요,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광란(狂亂)하는 마음이니 광란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아 생긴다. 목숨이 끝날 때에 업에 끌림을 당하게 된다. 깨달음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지 않으니 죽을 때 업을 굴리나니 이른 바 의(義)라는 것은 의리(義理)의 의(義)요, 인의(仁義)의 의(義)가 아니다.”고 하셨으니 지금 보면 이 늙은이도 또한 허공을 쪼개 두 쪽을 만듦을 면치 못했습니다. 인(仁)이란 곧 성품(性品)의 인(仁)이요 의(義)란 곧 성품의 의(義)요, 예(禮)는 곧 성품의 예(禮)요, 지(智)는 곧 성품의 지(智)요, 신(信)은 곧 성품의 신(信)이라. 의리(義理)의 의(義)도 또한 성품이니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곧 이 성품을 거역하는 것이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이 성품을 따르는 것이나 따르고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음이요, 성품에 있지 않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음이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있으나 성품에는 없습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어진 사람에게 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있지 않는다면 성인의 도는 가리고(揀擇) 취하고 버림이(取捨) 있어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림에 땅을 골라 내림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르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지 성품에 있지 않습니다. 양자(楊子)가 말한 성품을 닦는다는 것은 성품 또한 닦을 수가 없으니 또한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일 뿐이며 규봉(圭峯)선사가 말씀한 깨달음과 광란함이 이것이며 조주(趙州)스님이 말씀하신 온종일 부림과 온종일 부림을 당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성품이 일어나는 곳을 안다면 격물(格物), 충(忠), 서(恕), 일이관지(一以貫之)도 그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승조법사(僧肇法師)가 이르시되 “하늘의 일을 모두 알고 인간의 일을 모두 아는 자가 어찌 하늘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배우고 도를 닦음은 하나입니다. 대개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功績)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봄이 초목(草木)에 행해지는 것과 같이 이 성품을 갖춘 자는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나 그 근기와 성품을 따라 크고 작음, 네모와 둥글고, 길고 짧음, 혹은 푸르고 혹은 누렇고 혹은 붉고 혹은 푸름과 혹은 냄새나고 혹은 향기로움이 동시에 피어나니 봄이 크게 하고 작게 하며 네모지게 둥글게 하며 길게 하며 짧게 하며 푸르게 하며 누렇게 하며 붉거나 푸르게 하며 냄새나거나 향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 인연을 만나서 피어났을 뿐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보라 시절이 만약 이르면 그 이치는 자연히 드러난다.”고 하셨으며 또 회양(懷讓)선사께서 마조(馬祖)스님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네가 마음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要諦)를 말함은 저 하늘의 혜택에 비유할 수 있다. 너의 인연이 맞기 때문에 곧 마땅히 그 도리를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르시되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품을 보아 도를 이루게 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무구노자(無垢老子)가 말하기를 도가 한 겨자씨만큼 있으면 겨자씨만큼 무겁고 도가 천하에 있으면 천하만큼 무겁다함이 이것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무구(無垢)의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겉은 보고서 그 속은 보지 못했습니다. 백년의 세월이 단지 한 찰나간에 있으니 찰나간에 깨달아 버리면 위에 말한 것들이 모두가 실다운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깨달으면 사실이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고 사실이 아니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으니 마치 물위의 조롱박이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도 항상 안정되지 않아서 만지면 곧 움직이며 누르면 곧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으니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의 <구자무불(狗子無佛性)> 화두를 그대는 마치 사람이 도적을 잡음에 이미 소굴은 알았으나 단지 아직 잡지 못함과 같으니 청컨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금도 (화두가) 끊어짐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 수시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과 책을 보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닦는 것과 웃어른을 시봉하는 것과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죽을 먹고 밥을 먹는 가운데 공부를 지어간다면(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화두의 의심을 놓지 않는다면) 홀연히 몸뚱이를 잊게 되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종직각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연(緣)을 만나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되 일찍이 불법 가운데 있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상의 움직이는 가운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육근육진) 을 부숴 제거한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이 공부 할진대 마침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근본자리에서 비추어 보십시오. 차별경계는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며 움직이며,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어떻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를 부숴 제거하며 번뇌를 제거함을 아는 자는 또한 누구인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중생이 전도되어 스스로를 미혹하게 하고 사물을 쫓는다.”고 하셨으니 사물은 본래 자성이 없건만 자기를 미혹하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쫓을 따름이며 경계는 본래 차별이 없거늘 스스로 미혹하게 한 자가 스스로 차별할 뿐입니다. 이미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는다 하고 또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니 이미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면 차별경계가 아니요, 이미 차별경계에 있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버리면 어찌 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요? 광액도아(廣額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으면서 짐승 잡는 칼을 놓고 선 자리에서 곧 성불하였으니 어찌 허다히 말을 많이 하리요? 일상에 연(緣)을 만나는 곳에 곧 차별경계(差別境界)를 겪음을 느낄 때 다만 차별하는 곳에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들지언정 부숴 제거하겠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번뇌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차별(差別)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불법(佛法)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만 드십시오. 다만 <무(無)>자만 들지언정 또한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경계가 차별이며 불법이 차별이며 번뇌(情塵)가 차별이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가 차별이며 끊어짐이 있는 곳이 차별이며 끊어짐이 없는 곳이 차별이며 번뇌를 만나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 편안하지 못하는 곳이 차별이며 허다한 차별을 아는 것도 차별이니 만약 이 병을 없애고자 한다면 다만 <무(無)>자만 들며 다만 광액도아가 칼을 놓고 이르되 나는 천불(千佛) 중(中) 하나다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보십시오. 만약 허(虛)와 실(實)을 헤아린다면 또한 차별경계에 들어가게 되니 한 칼에 두 동강내어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만 못하니 앞뒤를 생각함도 또한 차별입니다. 현사(玄沙)스님께서 “이 일은 기약할 수가 없다. 마음과 생각의 길이 끊어짐은 장엄(莊嚴)함에 말미암지 않는다. 본래 참되고 고요하여 움직이며 쓰고 말하고 웃으매 그 곳을 따라 분명하여서 다시 모자람이 없거늘 지금 사람들은 이 가운데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일을 겪고 경계를 만나 곳곳마다 물들고 제각기 얽히어 매이나니 비록 깨닫더라도 잡다한 경계가 어수선하며 이름과 모양이 실답지 않아 곧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어 일을 거두어 공으로 돌이키려고 하여 눈을 닫고 눈동자를 감추고 생각이 일어남을 따라 자주 부숴 제거하며 미세한 생각이 막 일어나면 곧 막아 누르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곧 공에 떨어져 죽은 외도이며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며 어둡고 막막하여 느낌도 앎도 없나니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과 같아 한갓 스스로 속일 따름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대의 온 편지에 운운(云云)함이 모두가 현사스님께서 꾸짖은 바의 병이며, 묵조의 삿된 스승이 사람을 매장하는 구덩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화두를 들 때에 모두 허다한 기량을 쓰지 말고 오로지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곳에 화두가 끊어짐이 없게 하며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운 곳에 분별을 내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어봄에 이치의 길도 없고 재미도 없어 마음이 애타고 갑갑함을 느낄 때가 곧 본인이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곧 물러서는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지금 묵조의 그릇된 스승들은 오로지 말이 없는 것으로 지극한 이치로 삼아 위엄나반(威音那畔) 전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공겁이전(空劫已前)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속인다하고(깨달음이 있다고 함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깨달음으로 이구(二句)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방편의 말이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끌어들이는 말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무리는 다른 사람을 속이며 스스로 속이며 다른 사람을 그르치며 스스로도 그르치는 것이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차별경계를 겪으면서 힘을 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은 곳이 곧 지극히 힘을 든 곳이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면 반드시 삿된 법이지, 불법이 아닙니다. 오로지 장원심(長遠心)을 갖추고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지어 가십시오.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마음이 갈 바가 없어져 홀연히 꿈을 꾸다가 깨어남과 같으며 연꽃이 핀 것과 같으며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는 자연히 한 덩어리를 이룰 것입니다. 오로지 일상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지 이 <무(無)>자를 들되 깨닫고 깨닫지 못함과 뚫고 뚫지 못함을 관여하지 마십시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만 일개 무사인(無事人)이며 모든 조사(祖師)스님도 또한 단지 일개 무사인(無事人)입니다. 고덕께서는 “단지 事(일체 차별의 모양 곧 현상계)에서 무사(無事)함을 통달한다면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들음에 귀머거리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며 또 고덕(古德)이 말씀하시되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없애지 않으나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없애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모든 곳에 무심(無心)하다면 가지가지 차별경계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사대부는 대개가 성질이 급하여 곧 선(禪)을 알고자 하여 경전과 조사의 언구(言句)에서 널리 헤아려 설(說)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하나 분명히 밝히는 것이 도리어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일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무(無)>자를 투과한다면 분명히 밝히고 밝히지 못함을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대부로 하여금 놓아 둔하게 하라함은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잘못된 방(鈍牓)으로 장원(狀元)이 됨은 나쁜 것이 아니나 단지 백지(白紙)를 낼까 두려워 할 뿐입니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참정 태발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중중법계(重重法界)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고 하니 이미 헛된 말이 아니라면 반드시 인정(分付)하신 곳이 있었을 것이며 스스로 긍정하는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읽고 오랫동안 찬탄하였습니다. 사대부가 평소에 배운 바가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만났을 때 손발을 다 드러낸 자가 십중팔구(十中八九)입니다. 그 행한 일을 살펴보건대 서너너덧 집 되는 촌의 하릴없는 놈에게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이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비교해 보건대 지혜는 어리석음만 못하고 귀함은 천한 것과 같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드러나면 거짓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참상공(大叅相公)은 평소에 배운 바가 이미 행한 일에 드러났으니 화복(禍福)을 만날 때에 순금이 불에 들어가면 더욱 밝게 되는 것과 같으며 또 결코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중중법계(重重法界)가 단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다른 생각은 내지 마십시오. 그 나머지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 혹은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혹은 바름과 삿됨도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그대는 항상 이와 같이 관(觀)하십시오. 나도 또한 그 가운데에 있으니 다른 날에 열반의 물가에서 서로 만나 미래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중중법계를 성취하여 이 일을 실천한다면 어찌 작은 도움이리요. 다시 모름지기 주석(註釋)을 내리니 지금 이러한 말은 우언(寓言)로 사물을 지시한 것이란 생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증종승 천은에게 답함


그대가 천성이 도에 가까워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다른 반연의 장애됨이 없으니 단지 이러한 것은 어떤 사람이 미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내가 보인 바 힘을 드는 요긴한 곳에서 수시로 공부하십시오. 일념(一念)이 서로 맞아 모든 공안에 막힘이 없을 때만이 곧 옳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이렇게 지어 죽음에 이르면 염라대왕도 마땅히 도리어 삼천리 밖으로 물러나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 생각이 반야(般若) 속에 있어 다른 생각도 없고 끊어짐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도가(道家)와 같은 무리들은 망령된 마음으로써 생각에 두더라도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오히려 공적(功績)을 이룰 수 있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부림을 당하지 않는데 하물며 온 생각을 반야의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면 죽음이 이르렀을 때 어찌 업을 굴릴 수 없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대개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도를 배우니 이것은 망상 가운데 진짜 망상하는 것입니다. 다만 놓아 자유롭게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급하게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되니 다만 이렇게 공부를 하면 무한히 마음의 힘을 들 것입니다. 그대는 생소한 곳은 이미 익고 익은 곳은 이미 생소해지면 온 종일 가운데 자연히 묵조선의 수행이나 관법의 수행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깨우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모든 마구니와 외도가 이미 그 틈을 엿볼 수 없고 또 스스로 모든 마(魔)와 외도와 더불어 손을 맞추고 눈을 맞추어 저 일을 이루더라도 그 무리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대 한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그대의 수행과 같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반드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화두를 드십시오. 들다보면 단서도 없고 재미도 없음을 느껴 마음이 답답할 때에 바로 잘 힘을 쓸지언정 절대로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다만 이렇게 답답한 곳이 곧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어 천하 사람들의 시비를 끊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왕교수 대수에게 답함


그대는 헤어진 후 일상생활 가운데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일찍이 이성(理性)에서 재미를 얻거나 경(經)에서 재미를 얻거나 조사(祖師)의 언구(言句)에서 재미를 얻거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발을 들고 걷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곳에서 재미를 얻으면 모두가 일(깨닫는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바로 쉬고자 할진대 마땅히 앞의 재미를 얻은 곳에서 전혀 다른 것은 관여하지 말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없는 곳에 시험 삼아 뜻을 두어 보십시오. 만약 뜻을 둘 수 없으며 잡거나 더듬을 수 없을진대 점점 잡을만한 자루(단서)가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치의 길과 뜻의 길에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행해지지 않음이 마치 흙, 나무, 기와, 돌과 비슷할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본인의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대개 총명의 장애를 입어 이 때문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어떤 경계를 만나면 막히게 되니 중생은 무시(無始)이래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해 생사에 떠돌아 다녀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쾌활한 놈이 되고자 할진대 마땅히 한칼에 두 동강내어 심의식(心意識)의 길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약간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영가(永嘉)스님께서 “법재(法財)을 감하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의식(心意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얼마 전에 편지를 받으니 그 가운데 가지가지의 마음 쏠린 것들이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던 병입니다. 이러한 일을 알진대 다 날려 생각 밖에 두고 또 근거도 없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에서 시험 삼아 공부를 지어보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없다>를 들어 보십시오 평소에 총명한 사람은 막 들어 일으키는 것을 듣고 곧 심의식(心意識)으로 이해하여서 널리 헤아려 끌어다가 증거로 삼아 말하고자 하니 인가하는 곳은 끌어다가 증거를 댐을 용납하지 않으며 널리 헤아림을 용납하지 않으며 심의식(心意識)으로 앎을 용납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끌어 증거로 대고 널리 헤아려 알았더라도 모두 촉루(髑髏: 8식) 이전의 정식(情識)의 일입니다. 생사의 언덕에는 결코 힘을 얻지 못합니다. 지금 온 천하에 선사(禪師), 장로(長老)라고 일컫는 자들이 분명히 알았다고 하는 것들이 조금 전에 말한 소식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가지가지 삿된 견해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밀(密)수좌는 그와 함께 평보융(平普融) 회하(會下)에 있을 때 서로 모여 모두 보융(普融)의 깊은 뜻을 다 얻어 그는 스스로 안락(安樂)으로 삼으나 도달한 바가 또한 그대의 편지 가운데 소식을 벗어나지 않더니 지금 비로소 그릇됨을 알고 따로 이 안락처를 얻고 비로소 내가 추호(秋毫)도 그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특별히 그로 하여금 가서 당신을 보게 하니 일이 없을 때에 시험 삼아 그로 하여금 말해보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대의 뜻과 계합합니까? 80 먹은 늙은이가 과거시험장에 들어감은 진실로 정성스러울 것이니 아이들 장난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생사(生死)가 닥침에 힘을 얻지 못하면 비록 말하여 분명히 알고 이해하여 낙처(下落)가 있으며 인증(引證)하여 차별이 없더라도 모두가 귀신집의 살림살이입니다. 나에게는 조그만 일도 전혀 관계되지 않습니다. 선문(禪門)의 가지가지 차별의 다른 견해는 오직 법을 아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법(大法)을 밝히지 못한 자는 종종 대개 병으로 약을 삼으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시랑 계호에게 답함


받아보니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니 요컨대 일상에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면 세간의 잡다한 마음들이 자연히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잡다한 마음이 이미 녹아 없어지면 다음 해(來日)도 예전처럼 초봄은 여전히 차가울 것입니다.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살펴보라.”고 하셨으니 이 시절은 곧 부처님께서 세속을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금강좌(金剛座)에 앉으셔서 마군중(魔軍衆)을 항복 받고 법륜(法輪)을 굴리어 중생을 제도하며 열반에 드신 시절이 그대가 말한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의 시절로 다름이 없습니다. 이 속에 이르러 다만 이와 같이 살펴볼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을 이름하여 바른 관이라고 하며 이와 달리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삿된 관이라고 합니다. 삿되고 바름을 가리지 못하면 저 시절을 따라 뒤바뀜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시절을 따르지 않고자 할진대 다만 한꺼번에 놓아버려서 놓아도 놓을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이 말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전과 같이 다만 그대이지 다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유시랑 계호에게 답함(2)


우리 부처님 대성인께서 모든 상(相)을 비우시어 모든 법(法)에 대한 지혜를 이루셨으나 정업(定業)은 바로 없애지 못하셨거늘 하물며 땅에 묶여있는 범부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거사는 이미 불법에 들어온 사람이니 아마 또한 이 삼매(三昧)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한 노숙(老宿)에게 묻기를 “세계가 이렇게 뜨거우니 어느 곳으로 회피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노숙(老宿)이 이르시되 “끓는 가마 속이나 화로 숯불 속에 회피하라” “끓는 가마 속이나 화로 숯불 속으로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모든 고통이 이를 수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원하건대 거사는 일상의 생활하는 가운데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하여서 노숙의 말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가 효험을 얻은 처방입니다. 거사와 더불어 이 도가 서로 계합하고 이 마음을 서로 알지 못했다면 또한 쉽게 전수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일념이 상응한 약을 쓰지 다시 별도의 탕약(湯藥)은 쓰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탕약을 쓴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게 할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념이 상응한 탕약은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거사의 일상생활 가운데 있어 밝은 곳은 밝기가 해와 같고 어두운 곳은 어둡기가 옻칠한 것과 같으니 만약 손을 펴서 잡고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 한 번 비추면 어긋남이 없어 또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또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들이 항상 이 약으로써 끓는 가마 속과 화로 숯불 속에서 고뇌하는 중생의 나고 죽는 큰 병을 치료하시니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릅니다. 거사는 또한 믿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나는 스스로 부자(父子)가 전하지 못하는 묘한 처방이 있어 끓는 가마 속과 화로 숯불 속에서 회피할 묘술(妙術)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거사의 보시(布施)를 바랍니다.



이랑중 사표에게 답함


사대부가 이 도를 배움에 총명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너무 총명함을 근심하며 지견(知見)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지견이 너무 많음을 근심하십시오. 항상 식(識)이 먼저 한걸음 앞서 행하여 본분의 쾌활자재(快活自在)한 소식을 어둡게 하나니 삿된 견해의 좀 나은 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알아서 자기 몸으로 삼으며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경계로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삼으며 하열(下劣)한 자는 8식을 굴리고, 들어가는 문의 입구를 가지고 두 입술을 나불거려 현묘한 것을 이야기하며 심한 자는 발광(發狂)하여 글을 써서 혼란스럽게 이러쿵저러쿵하며 더욱 하열한 자는 묵묵히 비추어 말을 하지 않음과 고요한 것으로 귀신의 굴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구경안락(究竟安樂)을 구하니 그 나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충밀(冲密)등이 돌아옴에 편지를 받아서 읽고 기쁘고 안심이 됨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또 세간의 이치를 늘어놓아 서로 문답하지 않고 다만 그대가 도를 향한 용맹한 뜻으로 곧 갈등선(葛藤禪)에 들어갔으니 덕산(德山)과 임제(臨濟)가 다름이 없고, 법안(法眼)과 조동(曺洞)이 다름이 없건만 다만 배우는 자가 광대하고 확고한 뜻이 없고 스승도 또한 광대하고 융통한(두루 통달한) 법문이 없기에 들어가는 것이 차별이 있으나 구경(究竟)에 귀착하는 곳은 전혀 이와 같은 차별이 없습니다. 편지에 내가 편지를 통해 지름길을 지시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니 다만 이렇게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이미 아교단지(膠盆)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격이니 다시 (내가) 눈 위에 서리를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물음에 답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평소에 경전을 보고 화두를 드는 것으로부터 혹 사람들이 들어 깨우치고 가리켜 보임으로 인해 재미와 환희를 얻는 곳을 모두 놓아버리고 전과 같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와 같이 성식(性識)이 있으나 행해지지 않게 하여 다시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서 들어 보십시오 계속 들다가 보면 점점 단서가 없음을 느껴 마음이 점점 편안하지 않을 때에 놓아 느슨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 속이 천성(千聖)의 머리를 끊는 곳입니다. 종종 도를 배우는 사람이 대개 여기에서 물러나니, 그대가 만약 믿는다면 오직 지름길을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서 들어 보십시오. 들다가 보면 문득 잠자다가 꿈을 깬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평소에 수행해서 힘을 얻은 공부이니 그대가 확고한 뜻이 있음을 알기에 진흙을 끌고 물을 묻혀 한바탕의 허물을 적어봅니다. 이외에 다시 지시할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지시할 것이 있다면 지름길이 아닐 것입니다.



이보문 무가에게 답함


저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근성이 어리석고 둔하여 힘써 수행하여 지니되 끝내 깨닫는 방법을 얻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근래 쌍경(雙徑)에 있으면서 부계신(富季申)이 물은 바에 답한 것이 바로 이 물음과 더불어 같습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는 결코 둔하지 않으니 다시 어느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합니까? 사대부가 이 도를 배움에 마땅히 어리석고 둔한 것을 빌려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스스로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이른다면 혼둔(昏鈍)의 마장(魔障) 걸리는 바가 될 것입니다. 대개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아 깨달아 증득함을 구하는 마음이 앞에 있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기의 바른 지견이 드러날 수가 없는데 이 장애도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둔한 것을 아는 주인공입니다. 단엄(瑞巖)화상이 평상시 방장실에 계시면서 스스로 불러 이르되 “주인공아”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성성하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의 속임을 받지 말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예”하였습니다. 옛부터 다행히 이러한 모범이 있었으니 마음껏 이 속에서 <이 뭐꼬?>하고 들어 보십시오. 다만 이렇게 드는 것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일뿐입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곧 이보문의 본분자리입니다. 이것이 내가 병에 대해 약을 주는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간략히 거사를 위해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는 길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곧 죽은 말을 인정하여 진실로 본분자리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식신(識神)을 알아 자기로 삼는 것이니 더욱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사(長沙)화상께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함은 다만 예전의 식신(識神)때문이니 무량한 겁으로부터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고 하셨으니 앞에서 말한 어리석고 둔함을 빌려 들어간다 함이 이것입니다. 다만 이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것이 필경에 무엇인지를 살펴볼지니 다만 이 속에서 살펴볼지언정 뛰어넘어 깨달음을 구하지 마십시오. 들다가 보면 문득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이외에 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향시랑 백공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과 꿈과 깸이 하나인가? 라고 물었는데 하나의 인연입니다. 부처님께서 “너는 끄달리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또한 마음에 끄달린다.”라고 하시고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 고 이르시니 ‘있다, 없다’의 무(無)가 아닙니다. 꿈과 깸이 하나임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부처님께서 금고(金鼓)를 꿈꾸심과 고종(高宗)이 꿈에 열(說)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두 기둥에 잔을 바치는 것을 꿈꾼 것을 또한 꿈과 꿈 아니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다시 세간(世間)을 보건대 꿈속의 일과 같다고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으니 오직 꿈은 곧 전부 망상이거늘 중생이 전도되어 일상의 눈앞의 경계를 진실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꿈인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다시 허망한 분별을 내어 망상심으로 생각을 얽어매어 신식(神識)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정말로 꿈이라고 여기니 바로 꿈속에서 꿈을 말하는 것이며, 전도된 가운데 전도됨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자비심과 노파심이 간절하시어 다 일체법계 모든 존재하는 국토의 있는바 미진 속에 두루 들어가시어 낱낱 티끌 가운데 꿈으로써 자재(自在)하게 법문하시어 세계해(世界海)의 미진수(微塵數) 중생이 사정취(邪定聚)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개오(開悟)시켜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전도된 중생이 눈앞에 있는 경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세계로 삼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꿈과 꿈 아님이 모두가 환(幻)임을 깨닫게 한다면 모든 꿈이 실(實)이며 모든 실(實)이 꿈이어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음을 널리 보이신 것입니다. 지인(至人)이 꿈이 없다는 뜻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내 온 편지의 물음을 보니 곧 내가 36세에 의심하던 바입니다. 그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이것을 원오(圓悟)선사께 여쭈었더니 다만 손으로 가리키며 멈추고 멈추어 망상을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말씀드리기를 제 경우는 잠자지 않을 때는 부처님이 찬탄하신 것을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는 것은 감히 어기지 않으며 예전처럼 스승을 의지함과 스스로 공부를 지어 자질구레하게 얻은 것도 깨어있을 때는 모두 수용하다가 침상에 올라 반쯤 깨었을 때 이미 주인이 되지 못하여 꿈에 금과 보배를 보면 기쁨이 끝이 없고 꿈에 다른 사람이 칼과 몽둥이로 나를 핍박하거나 모든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속에서 두려워하고 겁에 질리니 스스로 생각컨대 이 몸은 오히려 있어도 오직 잠잘 때에 이미 주인이 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여러 고통이 번성하면 어떻게 뒤바뀜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르면 바야흐로 허둥지둥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원오(圓悟)선사께서 또 이르시기를 네가 말한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 네 스스로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인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듣고는 또한 그것을 믿지 않아 매번 내 스스로 돌아보니 깸과 잠듦이 분명히 둘인데 어떻게 감히 크게 입을 열어 선을 말하리요? 오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나의 이 병(病)을 마땅히 없애지 않을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면 곧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후에 오조스님께서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곳에 훈훈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고 법문하심을 들음으로 인해 홀연히 가슴에 뭉친 물건을 없애버리고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심이 참된 말씀이며 여여(如如)한 말씀이며 속이는 말씀이 아니며 허망한 말씀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대자비심(大慈悲心)임을 알았습니다. 몸을 가루를 내어 목숨이 다하더라도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에 걸린 물건을 이미 제거하고 비로소 꿈꿀 때가 곧 깰 때며 깰 때가 곧 꿈꿀 때임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매(寤寐)가 항상 하나라는 것을 비로소 스스로 알았으니 이러한 도리는 다른 사람에게 잡아내어 보여줄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꿈속의 경계와 같은 것은 취할 수도 없으며 버릴 수도 없습니다. 받아보니 나에게 묻되 깨닫기 이전과 이미 깨달은 후에는 다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나도 모르게 사실에 의지하여 대답하겠습니다. 자세하게 온 편지를 읽으니 글자마다 지극한 정성이어서 선(禪)을 묻지도 않으며 또한 힐문(詰問)을 당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옛날에 의심하던 것으로 말해줌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거사는 시험 삼아 방(龐)거사가 말씀하신 모든 있는 것을 비우고 절대로 모든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는 것을 마음껏 들어 보십시오. 먼저 눈앞의 일상적인 경계로써 꿈이라고 이해한 후에 다시 꿈속의 것을 가지고 눈앞에 옮겨오면 부처님께서 꿈꾸신 금고(金鼓) 고종(高宗)이 열(說)을 얻은 꿈과 孔子가 두 기둥 사이에 잔을 올리는 것을 꿈꾼 것은 결코 꿈이 아닐 것입니다.



진교수 고경에게 답함


이 도가 쇠퇴함이 지금보다 심한적은 없었습니다. 삿된 스승이 법을 설함이 악착취(惡叉聚)와 같아 각각 스스로 무상도(無上道)를 얻었다고 말하고 모두 삿된 말을 제창하여 범부를 미혹케 하기 때문에 내가 매번 이것에 이를 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도와서 광명종자(光明種子)로 하여금 불가의 본분사(本分事)가 있음을 알게 하여 삿된 견해의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니 만에 하나 중생계에서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으면 또한 부처님의 음덕(蔭德)을 헛되이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른 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티끌 국토를 받듦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때를 알지 못하고 힘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대는 이미 불법에 들어 온 사람이니 이 가운데의 일을 설하지 않을 수 없어 붓을 잡고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임판원 소첨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한 말씀을 구하여 신도인(信道人)과 더불어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이미 원각경(圓覺經)을 보았다면 경에는 어찌 한 마디 말뿐이겠습니까? 모든 대보살들이 각기 스스로 의심하는 곳을 따라 묻거늘 세존께서 의심하는 것에 의거하여 낱낱이 분명히 분석하신 큰 단락(段落)이 분명하고 명확하며 전에 주었던 화두도 또한 그 속에 있습니다. 경전에 이르시되 모든 때에 있으면서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며 또한 모든 망상에 대해 쉬어 없애려고 하지 말며 망상의 경계에 있으면서 분명히 앎을 보태지 말며(이 말은 가장 친절하다) 분명히 앎이 없는데서 진실을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 내가 옛날에 운문암(雲門庵)에 거처할 때 일찍이 송(頌)하여 말하기를


   연잎은 둥글고 둥글기가 거울과 같고

   마름뿔은 뾰족뾰족하기가 송곳과 같다

   바람이 불면 버들강아지 털이 날리고

   비가 배꽃을 때리니 나비가 날아간다


다만 이 게송을 원각경에다 두고 다시 원각경의 글을 옮겨 송(頌)에 두면 송(頌)이 도리어 경(經)이요, 경(經)이 도리어 송(頌)이니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하되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초초하거나 애달음을 쉬고 또한 놓아 느슨하게도 하지 말지니 마치 거문고 줄을 고르는 방법과 같이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으면 곡조는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돌아가서 오직 충밀(冲密)의 무리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번갈아 서로 탁마(琢磨)하면 불도의 수행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빌고 빕니다.



황지현 자여에게 답함


편지를 받고 이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매우 노력함을 알았습니다. 대장부의 하는 일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무상(無常)함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크니 하루가 지나면 하루의 좋은 일이 없어지는 것이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그대가 나이가 한창이어서 바로 무슨 일을 함에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때에 이 마음을 돌이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배우니 이것은 세상에서 일등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리한 사람입니다.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무슨 기특한 일이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기력이 강건함을 따라 일찍이 (수행함에) 생각을 돌리면 늙어서 마음을 돌이킴과 비교하면 그 역량이 백 천 만억 배(百千萬億倍) 뛰어난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대를 위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써준 법어를 일찍이 때때로 들어봅니까? 첫째로 기억할 것은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마음이 초초함으로 급하게 깨닫고자 하지 마십시오. 막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 곧 이 생각이 길을 막아 끊어서 영원히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사가 이르시되 “집착하여 정도(正度)를 잃으면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놓으면 근본(體)은 가고 머무름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조사가 심장과 쓸개를 내보여 사람을 위한 곳이니 다만 일상에 힘을 소비하는 곳에 공부를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문중은 힘을 소비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항상 사람들을 위하여 이 말을 하되 힘을 얻은 곳이 곧 힘을 든 곳이며 힘을 든 곳이 곧 힘을 얻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한 생각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깨달아 들어가는 곳을 구한다면 사람이 자기 집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머물 곳을 찾음과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생사(生事) 두 글자를 잡아 편안히 코끝에 두어 잊어버리지 말고 수시로 이 화두를 들으십시오. 들다가 보면 생소한 곳은 자연히 익고 익은 곳은 자연히 생소해질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공상도인(空相道人)의 편지에 적어 두었으니 청컨대 같이 이 편지를 서로 바꾸어 보면 곧 분명히 알 것입니다.


 

엄교수 자경에게 답함


진실로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은 온전한 강철로 만든 것과 같고 무쇠로 부어 이룬 것과 같아서 설사 천성(千聖)이 세상에 나와 무량하고 수승한 경계를 드러내더라도 그것을 보아도 또한 보지 않음과 같으니 하물며 이것에 대해 기특하고 수승한 도리를 일으키겠습니까? 옛날에 약산(藥山)스님이 좌선할 때에 석두(石頭)스님께서 묻기를 “그대는 이 속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는가?” 약산스님이 이르되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석두스님이 이르되 “이러하면 한가히 앉은 것이다.” 약산스님이 이르되 “한가히 앉는 것도 하는 것입니다.” 석두스님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저 고인(古人)을 보건대 한낱 한가히 앉음도 그를 어찌 할 수 없는데 지금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대개 한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근래 총림의 실없는 무리들이 묵조(黙照)라 부르는 것이 이것입니다. 또 한 종류는 근본자리가 확고하지 않으면서 문 입구의 빛 그림자만을 알아 한결같이 미쳐 날뛰어 (다른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말하나 모두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은 업식(業識: 8식)을 불러 본분자리라고 하니 다시 그들과 본분사(本分事)를 말하지 마십시오. 보지 못했습니까? 운문(雲門)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빛을 뚫어 벗어나지 못함이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모든 곳에 밝지 못하여 눈앞에 물건이 있음이 하나요, 또 일체가 법공(法空)임을 투과했으나 어슴푸레하게 어떤 물건이 있는 것 같으니 또한 빛을 뚫어 벗어나지 못함이다. 또한 법신(法身)에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법신(法身)을 얻었더라도 법집(法執)을 잊지 못하여 자기의 견해가 여전히 있어 법신변에 앉아 있음이 하나요, 설사 법신을 뚫었더라도 놓아버리면 곧 옳지 못하니 내가(운문선사) 자세히 점검해 보건대 무슨 소식(氣息)이 있겠는가! 이것이 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 실법(實法)을 배우는 자는 법신을 투과한 것으로 지극한 이치로 삼으나 나는 반대로 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신을 투과함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계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속에 이르면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화가 되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르되 진실로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는 온전한 강철로 만든 것과 같고 무쇠를 부어 만든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고 배부를 때에 다시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배부른지 안 부른지 묻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황벽(黃檗)스님이 백장(百丈)스님께 여쭙기를 “위로부터 고인(古人)이 어떤 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보입니까?” 백장스님이 다만 기대어 앉거늘 황벽스님이 이르되 “후대의 자손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전하여 주겠습니까?” 백장스님이 옷을 털고 곧 일어나 이르시되 “나는 장차 네가 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하시니 이것이 곧 사람을 위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스스로 믿는 곳에서 보십시오. 또한 스스로 믿는 소식이 끊어짐을 얻었습니까? 만약 스스로 믿는 소식이 끊어졌다면 자연히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제(臨濟)스님께서는 “네가 만약 생각, 생각 치달리는 마음이 다하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으니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 7지보살(第七地菩薩)이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만족치 못했기 때문에 번뇌라고 부릅니다. 바로 당신이 안배(安排)할 수 없는 곳에는 약간이라도 다른 헤아림을 둘 수 없습니다. 수 년 전에 허거사(許居士)가 문의 입구(8식)를 알아 글을 가지고 와서 견해를 보이어 이르되 일상생활에 텅텅 비어 마주 대할 한 물건도 없어 바야흐로 삼계(三界)와 만법(萬法)이 모두 원래 없음을 알아 바로 편안하고 즐거워 놓아버렸다 하거늘 게송을 그에게 보이어 이르되 깨끗한 곳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깨끗한 곳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즐거운 곳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즐거움이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마치 물이 그릇에 맡겨 모나고 둥글고 짧고 긴 것을 따름과 같으니 놓고 놓지 않음을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삼계와 만법이 돌아갈 어느 곳도 없다고 하니 만약 다만 이러하다면 이 일은 크게 어긋날 것입니다. 허거사에게 말하노니 부모가 재앙이 되니 천성(千聖)의 눈을 활짝 열지언정 마땅히 자주 묻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연히 새벽에 일어나니 조금 서늘하거늘 문득 기억해보니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오히려 혹시 빛 그림자가 아닌가 의심하여 드디어 종전의 의심하던 공안을 끌어 비추어 보고 비로소 조주(趙州)선사의 허물을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붓 가는대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장시랑 자소에게 답함


그대가 스스로 조금 깨달은 것을 가지고 지극한 이치로 삼고 겨우 이치의 길을 보고 경험하고는 노파선(入泥入水)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은 곧 없애 그것으로 하여금 종적(蹤迹)을 없애고자 하며 내가 모은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보고 곧 이르되 임제(臨濟)선사 밑에 무수한 암주(庵主)들은 기봉(機鋒)이 좋은데 어찌 기록하지 않고 충국사(忠國師) 같은 이는 의리선(義理禪)을 말해 마을의 남녀들을 그르치게 하니 반드시 빼 버려야한다고 하니 그대가 도를 보고 이와 같이 이해하여 충국사가 노파선을 말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고 깨끗하고 맑은 곳에 있으면서 다만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한 수(수단)만 좋아하여 이 외에 조금도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때문에 내가 힘을 다해 주장하는데 만약 법성(法性)이 관대하지 않고 물결이 광활하지 못하며 불법에 대한 지견(知見)이 없지 않고 생사의 뿌리(命根)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감히 이와 같이 몸을 땅에 붙이고 진흙과 물에 들어가 사람을 위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중생의 근기(根器)가 같지 않기 때문에 위로부터 모든 조사들이 각각 문을 세우고 베풀어 중생의 근기를 갖추어 근기에 따라 교화하셨으니 때문에 장사금대충(長沙岑大蟲)께서는 “내가 만약 한결같이 근본 가르침만 들어 말한다면 법당 앞에 반드시 풀이 한길(一丈)이나 자랄 것이니 사람을 고용해 절을 돌보게 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불문(佛門)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종사(宗師)라고 부름을 받는다면 마땅히 중생의 근기를 갖추어 설법해야 합니다.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수단은 이러한 근기라야(아주 뛰어난 근기라야) 비로소 알아차리니 근기가 맞지 않는 곳에 쓴다면 헛수고일 것입니다. 내가 어찌 한번 방망이질함에 문득 깨달아 일곱 내지 여덟 겹을 구멍 냄이 성질 급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모아 종문(宗門)의 종류를 나누지 않고 운문(雲門), 임제(臨濟), 조동(曺洞), 위앙(潙仰), 법안(法眼)종을 상관하지 않고 오직 바른 지견이 있어 사람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수록하였습니다. 충국사(忠國師), 대주(大珠) 두 노장을 보니 선(禪)에 모든 바탕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록하여 으뜸의 근기를 가진 자를 구제하고자 합니다. 그대의 편지에 이르되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고 하니 그대의 뜻으로 보면 정법안장에 모든 선문(禪門)을 제거하고 다만 그대와 같은 견해를 가진 자만 수록해야지 비로소 옳을 것이니 만약 이와 같다면 그대는 스스로 한 책을 모아 대근기(大根器)인 사람을 교화함을 어찌 하지 못하란 법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나로 하여금 그대의 뜻을 따라가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충국사가 진흙과 물에 뛰어드는 노파선(老婆禪)을 설해 곧 후손(법을 잇는 사람)이 끊겼다고 한다면 암두(巖頭), 목주(睦州), 오구(烏臼), 분양무업(汾陽無業), 진주보화(鎭州普化), 정상좌(定上座), 운봉열(雲峰悅), 법창우(法昌遇)같은 모든 대노장들은 당연히 자손이 땅에 가득 차야하거늘 지금 또한 비어 크게 교화하는 자가 없으니 앞서 말한 모든 선사들이 어찌 진흙과 물에 들어가는 노파선을 설했습니까? 그러하니 나는 충국사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대는 빼더라도 처음부터 서로 무방(無妨)합니다.



서현모 추산에게 답함


그대가 자주 편지를 부쳤기에 내가 생각해보니 (그대의 목적은) 물소(마음)를 조복하고자 하며 원숭이(식심)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래 총림(叢林)을 돌아다녀 흡족히 선지식을 찾아뵙는데 있지 않고 다만 일언일구(一言一句)에 바로 끊어 알아차림을 귀하게 여깁니다. 말을 돌리지 않고 사실에 의거하여 논하면 그 사이에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득이하여 바로 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굽어버린(어긋난) 것이며 알아차렸다 말함도 이미 어긋난 것이거늘, 하물며 가지와 넝쿨을 끌어다가(지엽적인 것) 경(經)을 들먹이고 이(理)와 사(事:현상계)를 말하여 구경(究竟)에 이르고자 합니까? 고덕(古德)께서는 “다만 털끝만큼이라도 있어도 곧 번뇌다.”라고 하셨으니 물소(마음)을 조복하지 않으며 원숭이(식심)를 죽이지 않으면 비록 항하사(恒河沙)와 같이 많은 도리를 말하더라도 전혀 나에게 조금도 관계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밖의 일이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강서(江西)노숙께서 “말할 수 있더라도 또한 너의 마음이요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너의 마음이다.”라고 하셨으니 결정코 바로 끊어 짊어지고자 할진대 부처와 조사를 보기를 살아있는 원수와 같이 해야 비로소 조금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오래되면 애써 마음을 일으켜 깨달음을 구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저절로 조복하며 식심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오로지 평소에 마음과 식심(識心)이 모여 머물 수 없는 곳과 취할 수 없는 곳과 버릴 수 없는 곳에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는 화두를 드십시오. 들 때 평소의 총명하고 영리하여 사량하고 헤아리지 말지니 마음을 헤아리고 사량하면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가 먼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량(思量)하지 않고 계교(計較)하지 않고 마음에 헤아리지 않음이 곧 옳은 것입니까? 돌(咄) 다시 이 무엇인고? 그럼 이만 줄입니다.



양교수 언후에게 답함


그대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强項) 도리어 불가사의한 유화(柔和)함이 있어 한마디 말에 깨달음에 이르니 이 일은 수승(殊勝)합니다. 만약 간혹 관직에 있으면서 깨달은 몇 사람이 아니었다면 불법이 어찌 오늘날에 있겠습니까! 반야의 근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을 수 없으니 장하고 장한 일입니다. 편지를 보니 내년 봄과 여름 사이에 밑 없는 배를 젓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다함이 없는 공양을 베풀고 말함이 없는 말을 하여 다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근거를 요달(了達)하고자 한다고 하니 다만 청컨대 와서 면목없는 놈(대혜스님)과 더불어 헤아려 보면 반드시 위에서 한 말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받아보니 도호(道號)를 구한다고 하니 바로 서로 더럽히고자 한다면 쾌연거사(快然居士)라고 칭함이 옳을 것입니다. 진정(眞淨)노인이 이르시되 “쾌연한(快然: 즐겁고 편안한) 대도(大道)가 오직 눈앞에 있으니 종횡(縱橫)의 십자(十字)에 헤아리며 머물러 즐긴다.”고 하시니 곧 이 뜻입니다. 나는 다만 장사(長沙)에 있어 오래 머무를 생각이니 그대가 후일 과연 여기로 온다면 숲 속이 적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출밀 중훈에게 답함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 후에 날마다 연(緣)을 만나는 곳에 바깥 경계에 빼앗김을 당하지 않습니까? 책상에 쌓인 글을 봄을 물리쳐 둡니까? 사물과 서로 마주칠 때에 화두를 굴립니까? 고요한 곳에 있을 때에 망상은 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몸소 궁구하되 잡념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망령되이 과거법(過去法)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일에도 탐착하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 없으면 삼세가 다 공적(空寂)함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과거의 일에 혹 좋고 나빴던 것을 마땅히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 생각하면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미래의 일을 마땅히 헤아리지 말지니 헤아리면 날뛰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일이 앞에 닥쳤거든 혹 역순(逆順)의 경계에 마땅히 뜻을 두지 말아야 하니 뜻을 두면 마음이 어지럽게 됩니다. 다만 모든 때에 임하여 인연을 따라 응(應)하면 자연히 이러한 도리에 계합할 것입니다. 역(逆)경계는 쉽게 칠 수 있으나 순(順)경계는 물리치기가 어렵습니다. 나의 뜻에 거슬리는 것은 다만 참을 인(忍) 한 자(字)로 녹여 조금 살피면 곧 지나가나 순(順)경계는 바로 당신이 회피할 곳이 없음이 마치 자석이 철과 서로 만날 때에 서로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한 곳에 붙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무정(無情)의 물건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온 몸이 현행(現行)하는 무명 속에 있어 살림살이로 삼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이 경계를 만나면 만약 지혜가 없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경계)이 그물 속으로 끌어들임을 당할 것이니 다시 이 속에서 벗어날 길을 구하고자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성(先聖)께서 이르시되 “세간에 들어가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게하라.”고 하심이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근세에 한 종류가 있어 수행함에 방편을 잃은 자가 종종 현행무명(現行無明)을 알아 세간에 들어가는 것으로 삼고 곧 출세간법을 가지고 억지로 차배(差排)하여 세간을 벗어남과 다름이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습니까! 오직 숙세에 서원(誓願)이 있는 자는 바로 알아버려 주인이 되어 다른 것에 이끌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유마(維摩)거사는 “부처님께서는 증상만인(增上慢人)을 위하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고 해탈하라고 설하셨다. 만약 증상만인이 아닌 자에게는 부처님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이 곧 해탈이라고 하셨다.”고 이르셨으니 만약 이 허물을 면(免)하면 역순경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양이 없어 비로소 증상만인이라는 이름을 벗어나게 되니 이러하여야 비로소 세간에 들어간 것이니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내가 평소에 겪어 지나온 것이며 지금 일상에 또한 이와 같이 수행합니다. 원컨대 그대는 기력(氣力)이 강건할 때에 또한 이 삼매에 드십시오. 이외에 때때로 조주(趙州)의 <무(無)>자를 들어 오래 오래하다 보면 순일하고 익어서 자연히 무심해져 무명(無明)을 쳐부술 것이니 곧 깨닫는 곳입니다.



누출밀 중훈에게 답함(2)


일상의 공부를 앞의 편지에서 이미 말함이 적지 않으니 단지 전과 같이 바꾸거나 움직이지 않고 사물이 오면 그것과 더불어 응하면 자연히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고덕(古德)께서 말씀하시기를 “걸림이 없이 가고 머무르는데 맡기고 고요히 비춰 원천을 깨달을지니 깨달음의 경지를 말해도 사람에게 보일 수 없고 도리를 말해도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얻은 곳은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몸소 증득하고 얻은 자라야 대략 눈앞에 조금만 드러내면 서로가 곧 묵묵히 계합(契合)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이로부터 사람의 속임을 받지 않아 공부함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니 대체적인 것이 이미 바르고 칼자루를 이미 얻었으니 마치 소 잘 치는 사람과 같아 고삐를 항상 손에 쥐고 있으면 어찌 다른 사람의 벼싹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고삐를 놓아버려 콧구멍에 잡을 곳이 없으면 평원(平原)의 얕은 풀밭에 마음대로 뛰어 놀 것입니다. 자명(慈明)노인께서는 “사방(四方)에 놓아 울타리를 막지 말고 팔방(八方)에 걸림이 없게 하여 마음대로 놀게 하라. 거두고자하면 다만 고삐를 다스리는데 있다.”고 하시니 이와 같지 못하면 마땅히 고삐를 꽉 잡고 또 순하게 쓰다듬어 따르게 할지니 공부가 이미 익으면 자연히 뜻을 써서 막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공부는 급하게 하지 말지니 급하게 하면 곧 조급히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해서는 안되니 느슨하면 허리멍텅해 질 것입니다. 생각을 잊거나(忘懷) 뜻을 둠(着意)이 모두 어긋나니 비유하자면 칼을 휘둘러 허공에 던짐에 미침과 미치지 못함을 논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엄양(嚴陽)존자가 조주(趙州)스님께 여쭙기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주선사께서 이르시기를 “놓아버려라.” 엄양스님이 이르되 “한 물건도 이미 가져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려라 하심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이르시되 “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엄양스님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으며 또 어떤 스님이 고덕께 여쭙기를 “학인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고덕이 이르시되 “나도 어찌할 수 없도다.” 그 스님이 이르되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거니와, 화상(和尙)께서는 대선지식인데 무엇 때문에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까?” 고덕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약 어찌 할 수 있다면 곧 너의 어찌할 수 없음을 잡아 물리쳤으리라.” 그 스님이 즉시 크게 깨치니 두 스님의 깨달은 곳이 곧 그대의 깨치지 못한 곳이며 그대가 의심하는 곳이 곧 두 스님이 여쭌 곳입니다. 법은 분별을 따라 생겨 또한 분별을 따라 없어지니 모든 분별법(分別法)을 없애면 법에는 나고 없어짐이 없습니다. 자세히 온 편지를 보니 병이 이미 다 물러가고 별다른 증후도 또한 생기지 않는다고 하니 큰 단락(段落)이 서로 가까우니 또한 점점 힘을 덜 것입니다. 청컨대 다만 힘 들린 곳에 나아가 놓아 걸림이 없게 하면 홀연히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 끊어 곧 마치리니 제발 힘쓰십시오.



조태위 공현에게 답함


내가 비록 나이가 들어가나 감히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안 되어 힘써 이 일로 납자의 무리를 떨쳐 분발시키니 한 끼 죽 먹은 후에 명패를 내어 많은 사람에게 돌리어 방에 들게 하니 간혹 목숨을 짊어진 자는 낚시에 걸려오고 또한 사람을 무는 사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법희선열(法喜禪悅)로 즐거움을 삼으니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조물(造物)이 어여삐 보아줍니다. 그대는 복과 지혜가 모두 온전하여 날마다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이 일대사 인연에 뜻을 두고 있으니 진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력이 있으면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기가 어렵고 부귀하면 도를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셨는데 수많은 생(生)에 일찍이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고 반야종자를 깊이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이렇게 믿는 곳이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오로지 믿는 곳에서 엿보아 잡아(화두를 들어) 오래하면 스스로 깨우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뜻을 두어 안배(安排)하여 깨달을 곳을 찾지 말지니 만약 뜻을 둔다면 어긋나버립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불도(佛道)는 사의(思議)할 수 없다 누가 부처를 사의할 수 있겠는가?” 또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물어 이르시되 “너는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어가는가?” 문수가 이르시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사의(思議)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사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부사의 삼매에 들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발심하여 이런 선정(禪定)에 들고자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마음의 생각이 없고서 삼매에 들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활 쏘는 것을 배움에 오래 익히면 솜씨가 생겨 뒤에는 비록 무심(내가 꼭 과녁의 중앙을 맞히겠다는 생각이 없으나)하나 오래 익혔기 때문에 화살을 쏘면 다 맞으니 나도 또한 이와 같이하여 처음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를 배울 때 한 곳(一緣)에 마음을 묶어 두었습니다. 만약 오래 익혀 성취하면 다시 마음의 생각이 없더라도 항상 정(定)과 더불어 함께하니 부처님과 조사의 수용처(受用處)가 둘이 아니며 다름도 없습니다. 최근 총림에 한 종류의 삿된 선이 있어 눈을 감아 눈동자를 숨기고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망상을 내어 부사의(不思議)한 일이라고 하며 또한 위음나반(威音那畔), 공겁이전(空劫以前)의 일이라고 하며 막 입을 열면 곧 업에 떨어졌다고 하며 (묵묵히 비추어 보는 것이) 또 근본상(根本上)의 일이라고 하며 또 깨끗함이 지극해 빛이 뚫고 이른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지엽적인 일이라고 하니 대개 그는 처음 걸음을 내디딜 때 곧 어긋나되 또한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깨달음을 방편으로 세워둔 것이라고 하니 이미 스스로 깨달을 문이 없습니다. 또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니 이러한 것은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끊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천불(千佛)이 세상에 오시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사람을 점검하는 안목을 갖춘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사자의 가죽을 쓰고 여우의 울음을 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그대와 더불어 비록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마음이 이미 묵묵히 서로 계합함이 여러 해(多年) 되었습니다. 이 앞에 대답한 글이 지극히 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특별히 법공(法空)선인을 보내어 대신 가서 공경하게 하기 때문에 선사유삼매(善思唯三昧)에 들 겨를도 없이 다만 이렇게 손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나도 모르게 말이 이와 같이하여 그나마 공손치 못함을 사과합니다.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이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자 한다하니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었다면 첫째로 급하게 구하지 마십시오. 급하면 더더욱 더디게 될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하지 말지니 느슨하면 나태해질 것입니다. 마치 거문고를 고르는 법과 같이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을 반드시 알맞게 해야 비로소 곡조를 이루게 됩니다. 다만 일상에 인연을 만나는 곳에 때때로 엿보아 잡되(화두를 들되) ‘내가 이렇게 사람과 더불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며, 결국은 어느 곳을 따라 흘러나오는고?’엿보아 잡아가다 보면(화두를 들다가 보면) 평소에 생소한 곳의 길은 자연히 익으리니 생소한 곳이 이미 익으면 익은 곳은 자연히 생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익은 곳인고? 오음(五陰), ․육입(六入),․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와 이십오유(二十五有)와 무명(無明)으로 사량(思量), 계교(計較)하는 식심(心識)이 밤낮으로 또렷함이 아지랑이와 같아 잠시도 쉼이 없음이 이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오음, 육입등등이) 사람을 부려 생사에 떠돌게 하고 사람을 부려 좋지 못한 일을 하게 하니 위에서 말한 것들이 이미 생소하게 되면 보리, 열반(菩提涅槃)과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날 때에 또한 드러났다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고덕께서 계합해 증득함에 대해 곧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볼 때는 일천 해와 같아 모든 모양이 그림자를 피할 수 없고 들을 때는 깊은 계곡과 같아 크고 작은 소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일은 따로 구함을 빌리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자연히 연(緣)을 만나는 곳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으면 장차 세간의 잡다함을 생각하는 마음을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돌이켜 두고 한번 사량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어떤 스님이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시되 없다.> 오직 이 한자에 어쨌든 무슨 기량이 있겠습니까? 안배(安排)해 보고 계교(計較)해 보십시오. 사량(思量), 계교(計較), 안배(按排)는 둘만한 곳이 없으니 오직 가슴속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마음에 번민하는 때가 곧 좋은 시절이니 제 8식이 서로 번갈아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느끼면 반드시 놓아버리지 말고 오직 이 <무(無)>자 위에 나아가 들어 보십시오. 들다가 보면 설은 곳은 자연히 익게 되고 익은 곳은 자연히 설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총림 가운데 한 종류의 삿된 말을 부르짖어 종사가 된 자들이 있어 배우는 자에게 일러 말하되 오로지 다만 고요함만 지켜라 하니 지키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고요한 것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대로 말하되 고요한 것이 기본이라고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지엽적인 것이라고 이르며 다시 어떤 스님이 앙산(仰山)스님께 여쭙기를 “지금 사람도 또한 깨달음을 빌립니까?” 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음을 어찌하랴.”라고 하셨으니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을 말할 수 없겠습니다. 곧 실법(實法)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어 깨달음이 이구(二句)에 떨어진다고 하니 앙산스님께서 스스로 배우는 자를 경책하여 깨닫게 한 말이 매우 간절하여 이르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하신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곳에다 두겠습니까? 앙산스님께서 후학에게 의심하게 하고 그르치게 해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게 하고자 했다함은 옳지 않습니다. 조합사(曺閤使)가 또한 이 일에 마음을 두었으되 그가 삿된 스승에게 그르친바 될까 두려워하여 근래에 또한 이 편지와 같이 많은 말을 써 주었는데 이 사람의 총명식견(聰明識見)이 모두 크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곳이 있어 결코 방편의 말을 그릇 알아 실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킴에 이르지 않을 것이지만 다만 내가 그와 더불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사로이 걱정함이 지나쳤을 뿐입니다. 들으니 그대가 또한 그와 더불어 수행하는 도반이라고 하니 붓을 잡은 차에 나도 모르게 말을 하니 일없이 서로 만날 때에 시험 삼아 그에게 물어 편지를 가져 한 번 보면 바야흐로 내가 확신함이 얼굴만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서로의 뜻이 서로 맞음에 있으며 또한 세력과 이익으로 사귀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한 장을 적고 종이가 다하여 또 한 장을 보태어 다시 글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 편지도 또한 이 앞의 편지와 같이 이 가운데 사람(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이가 많은데 (나를 등용함은) 무슨 연유인가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좋은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반드시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가 비록 간략한 것 같으나 또한 기감(機感)이 서로 맞아서 또한 나도 모르게 답장을 하니 그대가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벼슬을 하리라 여겨집니다. 일상의 인연을 만나는 곳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베풀어서 임금의 어진 사람을 구하여 천하를 편하게 할 뜻에 보답한다면 참으로 그 알아주신바(임금이 당신을 알아주어 등용한 것)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갖가지를 감내(堪耐)하여 시종(始終) 오직 지금과 같이 공부해 간다면 불법과 세간법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전쟁하고 한편으로 밭을 갈면서 오래오래 하여 익어 순일해지면 일거양득(一擧兩得)하리니 어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2)


편지를 받아보니 종명루진(鐘鳴漏盡)의 비방은 임금에게 정성을 다하고 아래로 백성을 편한케 하기 위함이니 자연히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 그 소리를 감상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그대는 모든 일을 굳게 참아 역순의 경계를 만나면 바로 잘 힘을 쓰십시오. 이른 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 티끌같이 많은 세계)을 받듦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평소에 도를 배움은 다만 역순경계 가운데 수용하고자함이니 역순이 앞에 드러날 때 고뇌를 내면 평소에 일찍이 이 가운데서 마음을 쓰지 않음과 거의 같을 것입니다. 조사가 말씀하시되 “대상(境)과 반연(緣)이 좋고 싫고가 없거늘 좋고 싫어함이 마음에서 일어나니 마음으로 만약 억지로 이름 붙이지 않는다면 망정(妄情)이 무엇을 따라 일어나리요? 망정(妄情)이 이미 일어나지 않으면 참된 마음이 두루 안다.” 고 하셨으니 청컨대 역순의 경계에 항상 이와 같이 살핀다면 오래하면 자연히 고뇌(苦惱)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뇌가 이미 생기지 않으면 곧 마왕(魔王)을 몰아서 호법선신(護法善神)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 이미 나이도 많은데 (나를 등용함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말이 귓가에 남아 있으니 어찌 잊겠습니까!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하십시오. 거사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스스로 한가로운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벼슬과 권세가 손에 있으니 곧 바쁜 시절입니다. 한가할 때는 누가 한가하며 바쁠 때는 누가 바쁜가를 생각하고 마땅히 바쁠 때에 도리어 한가한 때의 도리(道理)가 있고 한가할 때에 도리어 바쁜 때의 도리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로 바쁜 가운데에 임금이 그대를 기용(起用)한 뜻을 체달하여 잠시라도 잊지 말고 스스로 경책하고 살펴보아 무엇으로써 보답할까 생각하십시오. 만약 항상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키면 끓는 가마솥이나 화롯불, 칼산, 칼수풀 위에도 또한 마땅히 나아갈 수 있는데 하물며 눈앞의 사소한 역순경계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대와 이 도리가 서로 계합한 까닭에 생각을 남기지 않고 다 토로(吐露)하였습니다.



황문사 절부에게 답함


여기서는 따로 <보충설명>을 하지 않고 본문에 바로 설명을 붙이겠습니다.


편지와 많은 이야기를〔許多葛藤이란 장주가 자신이 깨달은 인연이라든지 깨달은 내용에 대해 대혜스님께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을 말한다〕받고 나도 모르게 곧 풀어서 이와 같이 나[대혜스님 자신]의 견해를 보였더니 바로 활발발(活鱍鱍)하게 대답해 왔습니다.〔이 부분은 현재 출판되어 있는 서장에는 “이처럼 솜씨 있게 다룰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스승은 제자가 깨달으면 낱낱이 점검한 후에 하나도 막힘이 없을 때 인가를 하듯이 장주가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서신을 통해 보내오니 대혜스님께서 다시 장주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였더니 장주는 막힘이 없이 다시 맞받아쳤다는 말이다. 拈弄은 註 867번 참조〕진실로 스스로 증득한 사람이니 기쁘고 기쁩니다. 다만 이와 같이만 한다면〔이 말은 ‘장주와 대혜스님이 서로 깨달은 경지만 주고받는다면’의 의미이다〕교학하는 사람들이〔여기서 從敎人은 그냥 從敎人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從은 종사한다는 뜻이고 敎는 敎學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따라서 從敎人은 교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말하기를 “이 관리는 본분을〔관리로써의 임무〕 따르지 않고 어지럽게 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他家〔여기서 他家란 從敎人에 반대되는 말로 참선을 하는 문중 곧 선종을 말한다고 여겨진다.〕에는 당연히 상통한 사람의 아낌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일찍이 증득하고 깨달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지 만약 메아리만 듣는 무리〔부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말씀만 쫓아가는 사람〕라면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鑽龜打瓦를 글자대로 해석하면 문맥이 어색해서 이렇게 해석했는데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다시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며 비판한다면〔안진호스님은 狀主의 비판이라고 했으나 나는 입장이 다르다.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장주가 아니라 從敎人, 메아리만 듣는 무리이다. 이들은 장주가 대혜스님과 법거량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여래선을 깨달은 경지다, 조사선을 깨달은 경지다라고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함을 말한다〕나의 주장자를 다 맞아야 할 것입니다. 자 한번 일러 보시오.〔장주에게 묻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을 상주는 것입니까, 벌주는 것입니까〔是란 주장자로 때리는 것. 伊란 從敎人, 메아리만 듣는 무리를 가리킨다〕제방(諸方)에서 다시 30년을 의심하도록 맡기겠습니다.



손지현에게 답함


받아보니 수정한 금강경(金剛經)을 나에게 보이니 즐거이 한번 수희(隨喜)함을 얻었습니다. 근세 사대부가 그대와 같이 불경(內典)에 마음을 두고자 하는 자가 진실로 드뭅니다. 뜻(意趣)을 얻지 못하면 이와 같이 믿을 수 없으며 경(經)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면 경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보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참으로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입니다. 자세히 오래도록 음미(吟味)해보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모든 성사(聖師)들이 번역함이 참됨을 잃고 본래의 진리를 어지럽히고 문장의 글귀의 보태고 뺌이 부처님의 뜻에 위배되었다고 꾸짖고 또 이르되 처음 지송(持誦)함으로부터 곧 잘못됨을 깨닫고 정본(正本:원본)을 구하여 그릇됨을 바로잡고자 하였건만 그러나 잘못 익혀 온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일률적으로 뇌동(雷同)하여 서울의 장경본(京師藏本)을 얻음에 이르러 비로소 의거함이 있다고 하며 다시 천친(天親), 무착(無着)의 논송을 자세히 비교해 참고하니 그 뜻이 들어맞아서 드디어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없었다고 하며 또 장수(長水), 고산(孤山) 두 스님은 모두 글귀만 의지하고 뜻을 어겼다고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대가 감히 이와 같이 비판한다면 반드시 육조시대의 번역한바 범본(梵本)을 자세히 보아 여러 스님들의 번역이 틀렸음을 다 얻어서야 비로소 얼음이 녹듯 의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범본(梵本)이 없는데 곧 자기 혼자의 견해로써 성인의 뜻을 없앤다면 또한 인(因)을 부르고 과(果)를 몸에 지닐 때 성인의 가르침을 훼방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짐은 논하지 않으려니와 아는 자가 그것을 보고 다시 그대가 여러 스님의 틀린 것을 점검한 것과 같이 본인에게 돌아올까 걱정합니다. 옛사람은 “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은 것은 허물을 부르는 길이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그대는 평소에 잘 알지 못하지만 그대가 이 경(經)으로 인증(認證)을 구하여 온 세상에 유포(流布)하여 중생계에서 불종자(佛種子)를 심고자하니 이것은 일등의 좋은 일이요, 또 나를 유포시켜 줄 사람으로 여기고, 수정한 금강경으로 서로 마음이 계합함을 바라기 때문에 감히 답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청량국사(淸凉國師)가 화엄소(華嚴疏)를 지어 번역한 스님의 잘못됨을 바르게 하고자하였으나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여 다만 경전에 끝에 썼을 따름이니 예컨대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가운데 이른바 『일체의 부처님이 끝없는 몸을 두시어 색상(色相)이 청정하여 모든 육도에 널리 들어가셔도 물듦이 없다.』고 한 대목에 청량국사께서 다만 이르시되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상권 제 3쪽 제17행에는 일체제불(一切諸佛)이거늘 구본(舊本)에는 ‘諸’자가 빠졌다고 하고 그 나머지 경본(經本)에 빠진 것도 모두 경전의 끝에 주(註)를 달았습니다. 청량국사도 또한 성사(聖師)이나 첨가하고 뺌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감히 경의 끝에 쓴 것은 법을 아는 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 경전 중에 대유리보(大琉璃寶)라는 말이 있는데 청량국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마 패유리(呔琉璃)를 구본(舊本)에 잘못 써넣은 것이라고 하시고 또한 감히 고치지 않고 다만 이와 같이 경의 끝에다가 주석을 달았습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번역한 모든 스님들도 모두 얕은 지식의 인물이 아닙니다. 번역하는 곳에서는 말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글을 다듬는 사람도 있으며 범어(梵語)를 증명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바로 잡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말과 범어(梵語)를 서로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대가 오히려 성인의 뜻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그대가 이미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고 곧 망령되이 간삭(刊削)을 더하여 도리어 살펴보고 믿도록 함이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장수(長水)스님을 논하여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어긋났다고 하니 범본의 증거도 없으면서 어찌 곧 결정하여 그를 잘못됐다고 하겠습니까? 장수스님은 비록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다른 강사와 다르니 일찍이 낭야광조(瑯琊廣照)선사를 참례하여 낭야스님께 수능엄경(首楞嚴經) 중에 부루나(富樓那)가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 홀연히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여쭌 뜻을 청익(請益)하니 낭야선사가 곧 소리 높여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홀연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라고 하시니 장수스님이 언하(言下)에 크게 깨친 뒤 곧 허물없이 지내면서 스스로 좌주(座主)라고 일컬으니 대개 좌주(座主)는 흔히 글줄을 찾고 먹 자국만 세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른 바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니 장수스님은 깨달음이 없지 않으며 또한 글줄만 찾고 먹 자국만 세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 경문(經文)의 큰 단원이 분명하여 이 글은 지극히 쉽고 평범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견해를 세워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따를 것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그대가 무착론(無着論)에서 말한 『법신(法身)으로 응당히 여래를 봄이요, 상(相)이 구족했기 때문이 아니다.』를 인용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여래를 비록 응당 상(相)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으나 마땅히 상이 구족됨이 인(因)이 되어 아뇩보리를 얻었으니 이런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시되 『수보리야 너의 뜻은 어떠한가? 여래는 상(相)을 성취한 것으로 아뇩보리를 얻었는가?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등의 것은 이 뜻은 상(相)이 구족함은 자체가 보리가 아님을 밝힌 것이요, 또한 상(相)이 구족한 것으로 인(因)으로 삼지 않으니 상(相)은 색(色)의 자성(自性)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論)의 큰 단락이 분명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잘못 보고 이해한 것일 따름입니다. 색(色)은 상(相)의 연기(緣起)요, 상(相)은 법계(法界)의 연기(緣起)입니다. 양(梁)나라 소명(昭明)태자가 “여래가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을 32분 중에 이 분(分)으로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으로 삼은 것은 수보리가 상을 갖추지 못하면 연기가 없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처음 어머니 태에 있을 때 곧 공(空)을 알아 다분히 연기상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편지의) 뒷부분에 인용한 공덕시보살론(功德施菩薩論)의 끝부분에 『만약 상(相)의 성취가 진실로 있다면 이 상(相)이 없어질 때 곧 단(斷)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나기 때문에 멸함이 있다』는 구절과 또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경에서 말한『무엇 때문인가? 일체법(一切法)은 생김이 없는 성품이므로 단상(斷常)의 두 변(邊)을 멀리 여의었으니 양변을 멀리 여윔은 법계의 모습이다.』는 구절은 성(性)을 말하지 않고 상(相)을 말함은 법계는 성품의 연기인 까닭이요, 상(相)은 법계의 연기이기 때문에 성품을 말하지 않고 상을 말한 것입니다. 양나라 소명태자의 이른바 무단무멸분(無斷無滅)이 이것입니다. 이 단원이 다시 분명하거늘 또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 억지로 조목(節目)을 낼 뿐입니다. 만약 금강경을 간삭(刊削)해야 한다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대개 보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에 따라 모두 간삭(刊削)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한퇴지(韓退之)가 논어(論語) 가운데 ‘畵’자를 가리켜 ‘晝’자라 하고 구본(舊本)이 틀렸다고 하니 한퇴지의 견식으로 고칠 수 있거늘 다만 이와 같이 글 가운데에 논함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또한 법을 아는 자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규봉밀(圭峰密)선사께서 원각소초(圓覺䟽鈔)를 짓되, 밀(密)선사가 원각경(圓覺經)에서 깨달은 곳이 있어 감히 붓을 대니, 원각경 중에 『일체중생이 모두 원각(圓覺)을 증득했다』는 대목을 규봉선사는 ‘證’자를 고쳐 ‘具’로 하고 번역자의 잘못이라고 하되 범본(梵本)을 보지 못하여 다만 이와 같이 소(疎)에서 논(論)하고 감히 경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늑담진정(泐潭眞淨)화상께서 개증론(皆證論)을 짓고서 논(論)중에 규봉선사를 매우 꾸짖어 이르시되 ‘파계한 범부 누린내 나는 놈이다. 만약 일체중생이 원각(圓覺)을 갖추고 증득하지 못하면 축생은 영원히 축생이 되고 아귀는 영원히 아귀가 되어 모든 시방세계가 모두 구멍 없는 쇠방망인지라 다시 한사람도 참됨을 일으켜서 근원에 돌아감이 없으며 범부도 마땅히 해탈을 구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이미 원각을 갖추고 있어 또한 마땅히 증득함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대가 서울의 장경본으로 옳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본으로 근거를 삼고 있습니다. 만약 서울장본이 지방 고을로부터 들여왔으며, 경산(徑山)의 두 장경(藏經)같은 것도 모두 조정의 전성기 때 주어서 이른 것이요, 또한 지방고을 경생(經生)들이 쓴 것이니 만에 하나 잘못이 있다면 또한 어떻게 고쳐 바로 하겠습니까? 그대가 만약 아상(人我)이 없어 반드시 나의 말이 지극한 정성이라고 여긴다면 반드시 고금(古今)의 큰 잘못됨에 빠져 있지 않을 것이며 만약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여 반드시 고쳐서 빼어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함을 받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간삭(刊削)하여 출판하십시오. 나도 다만 수희(隨喜)하고 찬탄하겠습니다. 그대가 이미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경(經)을 가지고 인가(印可)를 구하니 비록 서로가 (얼굴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법으로 친함을 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여 당신의 마음을 거슬렸습니다. 당신의 지성(至誠)을 보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음에 두지 않고 (다 吐露했습니다.) 그대가 반드시 교승(敎乘)을 궁구하여 깊은 뜻에 이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 이름난 강사(講師)를 찾아서 한마음 한뜻으로 그와 더불어 자세히 참구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하여야 일등으로 교망(敎網)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만약 무상(無常)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크지만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했다면 마땅히 한마음 한뜻으로 사람의 생사의 소굴을 부술 수 있는 본분(本分)을 밝힌 스승을 찾아 그분과 더불어 목숨을 건 공부를 해나가 홀연히 칠통(漆桶)을 타파하면 곧 깨닫는 곳입니다. 만약 단지 이야기자루만 돕고자 하여 이르되 나는 모든 서적을 널리 읽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 선(禪)도 내가 알고 교(敎)도 내가 안다하며 또한 이전의 모든 번역한 사람들과 강사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점검하여 나의 능력과 나의 이해함을 드러내면 삼교(三敎:유․불․선)의 성인을 모두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인가를 구한 후에 간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어떠합니까?  



장사인 장원에게 답함


그대가 결정코 이일을 궁구하고자 한다면 다만 항상 마음으로 하여금 활짝 비워서 사물이 오면 응함이 마치 사람이 활 쏨을 배움에 오래오래 하면 과녁을 맞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달마(達磨)대사께서 이조 혜가(慧可)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담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거늘 지금 사람들은 겨우 이 말을 듣고 문득 이리저리 꿰어 맞춰 미련스럽게도 지각없는 곳에서 억지로 스스로 막아 눌림으로써 마음이 담벽과 같게 되기를 바라니 조사가 “그릇(錯) 알면 어찌 방편인줄 알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암두(巖頭)스님께서 “겨우 이렇게 하면 곧 이렇지 못하니 옳은 글귀도 깎고 그른 글귀도 또한 깎아라.”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비록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한 말에 움직임 당하지 않아, 달을 보고 손가락을 보지 않고 집에 돌아감에 길을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식(情識)을 부수지 못하면 마음의 불꽃이(망상들이) 선명할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에 단지 의심하던 바 화두를 들되 예컨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여쭙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께서 답하시기를 없다>를 오로지 들고 깨어있을지언정 요리조리 (무언가를) 해보려 함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또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한 현묘(玄妙)한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있다, 없다’하는 헤아림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진짜로 없다는 무(無)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일없는 갑(匣)속에 앉아있지 말며 또한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하는 곳에서 이해하지 마십시오. 바로 마음 쓸 곳이 없어 마음이 갈 곳이 없을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곧 좋은 곳입니다. 문득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나니 오직 숙세에 일찍이 반야의 종지를 심음이 깊으며 일찍이 무시광대겁(無始曠大劫)으로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섬겨서 바른 지견을 닦아 익혀 영식(靈識)가운데 둔 사람은 경계에 부딪히고 인연을 만나 현행(現行)하는 곳에서 문득 깨달으니 마치 만인(萬人)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 자기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 굳이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자연히 구하는 마음이 치달려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문(雲門)스님께서 이르시되 “말할 수 없을 때 있다가 말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 상량(商量)할 수 없을 때는 곧 있다가 상량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고 하시고 또 스스로 들어 일으키면서 이르시되 “다시 일러라 헤아리지 않을 때 이 무엇인고?” 또 사람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또 스스로 이르시되 다시 “이 무엇인고?” 하셨습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선(禪)에 많은 길이 있어 혹은 한번 묻고 한 번 답하다가 끝에 한 글귀가 많음으로써 선으로 삼고 혹은 고인이 도에 든 인연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헤아리며 이르되 이 속은 비었고 저 속은 실다우며 이 말은 깊고 저 말은 묘하다하여 혹 대신 대답하고 혹 달리 대답하는 것으로 선을 삼고 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이해하여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이 오직 식(識)에 있다하여 선으로 삼고 혹은 말없이 컴컴한 산 속 귀신굴에 앉아 있으면서 눈썹을 닫고 눈을 감는 것으로 위엄왕불(威音王佛) 저편(이전)과 부모가 낳지 않을 때의 소식이라고 일컬으며 또 묵묵히 항상 비춘다고 일러 선으로 삼으니 이와 같은 무리들은 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사람을 속인다 하고 깨달음으로 (그냥 방편으로) 세워 둔 것이라고 하니 스스로 이미 일찍이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도 않습니다. 내가 항상 납자들에게 일러 말하되 세간의 솜씨 좋은 재주와 예술도 만약 깨달은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묘함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다만 입으로 고요함을 말하여 곧 끝장을 내려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파묻고 동쪽을 향해 달리면서 서쪽의 물건을 취하려고 함과 거의 비슷해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며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지니 이 무리들은 불쌍하다고 이름하겠습니다. 경전(經典)에서는 그것을 일러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며 불혜명(佛慧命)을 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가 통하지 않으니 비록 좋은 인(因)이나 도리어 나쁜 과보를 부르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 몸을 부숴 먼지와 같이 할지언정 끝내 불법으로 인정(人情)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결정코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무명(無明)을 쳐부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절대로 삿된 스승이 순하게 어루만지며 동과(冬瓜)도장으로 인정함을 입고 곧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무리가 벼, 삼, 대나무, 갈대와 같이 많은데 그대는 총명하여 식견이 있어 반드시 이러한 나쁜 독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씀이 간절하여 빠른 결과를 구하고자하여 모르는 사이 저들의 오염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붓 가는대로 말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한바탕의 허물일 것입니다. 제발 내 말을 들으십시오. 다만 조주(趙州)의 <무(無)>자로 평상시 연(緣)을 만나는 곳에서 들되 끊어짐이 없게 하십시오. 고덕이 말씀하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 하셨으니 만약 말하여 하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어리석고 미쳐서 바깥으로 내달리는 것이니 힘써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탕승상 진지에게 답함


그대가 이미 이 일대사인연에 마음을 두니 사바세계(缺減界)는 허망하여 참되지 않아서 혹은 거슬리고 혹은 순(順)하는 하나하나가 모두가 공부할 마음을 일으키는 계기(時節)입니다. 다만 마음으로 하여금 활짝 비게 하여서 평상시 합당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분수를 따라 덜어버리고 경계에 부딪히고 연(緣)을 만남에 수시로 화두를 들지언정 빠른 결과는 구하지 마십시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마음을 두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두어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에 도안(道眼)이 가려짐을 당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뎌집니다. 다만 화두를 들다가 문득 (화두를) 드는 곳에서 생사심이 끊어지면 이것이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을 얻는다면 자연히 고인의 무수한 방편을 뚫어 가지가지 다른 견해가 자연히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에서 “마음의 생사를 끊고 마음의 빽빽한 수풀을 베고 마음의 더러운 때를 씻고 마음의 집착을 푼다.”고 했으니 집착하는 곳에 마음으로 하여금 (화두를) 굴리되 굴릴 때 또한 굴린다는 도리도 없으면 자연히 두두(頭頭)가 분명하고 물물(物物)이 드러나서 평상시 연(緣)을 따르는 곳에 혹 깨끗하고 혹 더럽고 혹 기뻐하고 혹 성내고 혹은 순(順)하고 혹은 거슬림에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름과 같아 튕기지 않아도 저절로 구를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얻으면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남양충국사(南陽忠國師)가 말씀하시되 “법이 얻은 바 있다고 말하면 여우의 울음이 된다.”고 하시니 이 일은 맑은 하늘에 해와 같아서 한번 보면 곧 보이니 진실로 스스로 본 것은 삿된 스승이 흔들래야 흔들 수 없습니다.(註 227번 참조) 지난날에 또한 일찍이 대면해 말하되 이 일은 전해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겨우 기특하고 현묘하여 여섯 귀가 함께 꾀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서로를 속이는 것이니 곧 끌어다 놓고 얼굴에다 대고 침을 뱉어야 할 것입니다. 서생(書生)에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세간법(世間法) 가운데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만약 이 일을(일대사인연) 깨달아버리지 못한다면 곧 헛되이 남섬부주(南閻浮提)에 와서 한 번 만났다가 인(因)을 거두고 과(果)를 맺을 때 일신(一身)에 악업을 두르고 갈 것이니 경전에서는 “어리석게 복을 지음이 삼생(三生)의 원수다.”라고 했으니 어째서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하는가? 제 일생(第一生)에는 어리석게 복을 지어 견성하지 못함이요, 제 이생(第二生)에는 어리석게 지은 복을 받으나 부끄러움이 없어서 좋은 일을 하지 않고 한결같이 업을 지음이요. 제 삼생(第三生)에는 어리석게 지은 복을 받음이 다하고 좋은 일도 하지 않아 몸뚱이를 벗어버릴 때에 지옥에 들어감이 화살을 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받기가 어렵고 불법은 만나기가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서 이 몸을 제도하겠습니까? 이 도를 배움에 마땅히 확고한 뜻이 있어야 하니 만약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마치 소리를 듣고 점치는 자가 사람이 동(東)을 말하는 것을 보고는 곧 사람을 따라 동쪽으로 달려가고 서(西)를 말하면 곧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잡아 가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융(懶融)선사께서는 “설사 한 법이 열반보다 뛰어나더라도 내가 설함은 또한 꿈과 환과 같다”고 말씀 하셨으니 하물며 세간의 헛되고 꿈과 같아 실답지 못한 법에 다시 무슨 마음이 있어 세간과 더불어 교섭하겠습니까? 원컨대 그대는 이 뜻을 견고히 하여 손에 넣는 것으로 확고한 뜻으로 삼으면 비록 대지(大地)와 유정(有情)들로 하여금 다 마왕(魔王)이 되게 하여 와서 어지럽게 하고자 하더라도 그 틈을 얻을 수 없으니 반야(般若)상에서는 헛되이 버릴 공부가 없습니다. 만약 마음을 위에서 말한 것에 둔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종자를 깊이 심어 죽음이 닥쳐왔을 때 또한 업식(業識)의 끄달림을 당해 모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몸을 바꾸어 돌아오면 또한 나를 매(昧)하게 하지 못할 것이니 살피십시오.



번제형 무실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불사(佛事)는 행하나 선어(禪語)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니 불사를 행함과 선어를 이해하지 못함이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불사를 행하는 것이 곧 선어(禪語)임을 아십시오. 선어(禪語)를 알고 불사를 행하지 않으면 마치 사람이 물 속에 앉아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소리치는 것과도 같고, 음식 광주리 속에 앉아 있으면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땅히 선어가 불사이고 불사가 선어임을 아십시오. 행하는 것과 아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법에는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다시 이 속(법)에서 같음과 다름을 찾는다면 이것은 빈주먹 손가락 위에서 실다운 견해를 내는 것이고 근(根), 경(境), 법(法) 중에 헛되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입니다. 마치 물러가면서 앞으로 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급히 서두를수록 더디어지며 빨리 할수록 멀어질 것입니다. 바로 꺾어 마음을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해함과 이해하지 못함 같음과 다름 다름과 다르지 않음 이와 같이 사량함과 이와 같이 헤아리는 것은 타방세계(他方世界)에 쓸어버리고 다시 쓸어버릴 수 없는 곳에서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같은지 다른지를 살펴보면 문득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끊어질 것이니 마땅히 이러한 때에는 스스로가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성천규 화상에게 답함


이미 외호(外護)하는 사람을 얻고 (납자들을) 비추어 인도해 주는데 마음을 두었으면 스스로 마땅히 인사(人事)를 물리치고 자주 납자들과 불사(佛事)를 행하십시오. 오래하다 보면 자연히 수승(殊勝)해질 것입니다. 거듭 바라는데 방(조실채)에 있으면서 납자들에게 자세하게 점검하며 인정은 용납하지 말고 그들에게 낙초(落草)를 하지 말고 바로 본분초료(本分草料)로써 들어 보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얻게 하여야만 비로소 존숙(尊宿)이 사람을 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머뭇거리며 의심해서 답하지 못함을 보고 곧 그들에게 주각(注脚)을 내려주면 그들의 눈을 멀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본분의 수단마저 잃게 됩니다. 사람을 얻지 못하더라도 곧 우리들의 인연법(因緣法)이 다만 이와 같음이요, 만약 한 개 반개(一箇半箇)라도 본분을 밝힌 이를 얻게 된다면 또한 평소에 뜻한 것과 원(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산체 장노에게 답함


전사(專使)가 와서 편지와 신향(信香)등을 받고 법을 열어 출세하여 석문(石門)에서 도를 설하여 쫓아온 바를 잊지 않고 악장로(岳長老)를 위하여 향을 잡아 양기종파(楊岐宗派)를 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미 이런 일을 맡았으면 꼿꼿하게 하여 철두철미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평소에 실제로 증득하고 깨달은 마음으로 단정히 방장실에 있는 것이 백이십근(百二十斤)의 짐을 지고 외나무다리 위를 지나가는 것과 같으니 다리를 헛디디고 손이 미끄러질 땐 자신의 목숨도 보존할 수 없는 처지인데 하물며 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 못을 뽑고 쐐기를 뽑아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고덕(古德)이 “이 일은 80먹은 노인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아이들의 장난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고덕이 “만약 한결같이 종지의 가르침만 들면 법당 앞의 풀이 한길이나 자라 마땅히 사람을 고용해서 절을 돌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암두(巖頭)스님은 매번 이르시기를 일어나기 전에 한번 화두를 들고 눈을 부릅뜨라고 하셨고 안국사(晏國師)의 석문(石門)을 넘지 말라는 구(句)와 목주(睦州)선사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은 너에게 30방을 때리겠다는 것이다와 분양무업(汾陽無業)선사의 망상하지 말라와 노조(魯祖)선사의 무릇 승려가 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몸을 돌려 벽을 마주하고 앉는다 등을 사람을 위할 때는 마땅히 이러한 법식에 어둡지 아니하여야 비로소 위로부터의 종지(宗旨)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위산(潙山)스님이 앙산(仰山)스님에게 이르되 “한 곳에 종지를 세우려면 5가지의 인연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성취하게 된다.” 5가지의 인연이란 외호연(外護緣)과 단월연(檀越緣)과 납자연(衲子緣)과 토지연(土地緣)과 도연(道緣)입니다. 듣자니 어사대부(霜臺)인 조공(趙公)은 당신의 단월(檀越)이고 치정사업(致政司業)의 정공(鄭公)은 그대를 절에 들게 하였으니 두 사람은 천하의 (이름 있는) 선비입니다. 이로 볼 것 같으면 당신에게는 5가지의 인연이 조금은 갖추어졌습니다. 매번 납자들이 민중(閩中)으로부터 올 때 마다 법석의 성대함을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단월이 귀의하고 사대부들이 외호하며 절에 머물러 지킴에 마장(魔障)이 없으며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이니 마땅히 젊고 힘이 있을 때 이 일을 격려해야 합니다. 착수할 때는 마땅히 눈을 부릅뜨고 소홀히 함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근래에 한 종류의 장사치들이 곳곳에서 보잘것없는 선을 배워서 종종 종사가 소홀히 지나쳐 버리면 드디어 허공을 타고 메아리가 울리듯이 번갈아 서로 인가하여 주어 그릇 사람을 속이는데 이르러 바른 종풍으로 하여금 담박하게 하니 단전직지(單傳直指)의 가풍이 거의 없어지고 있으니 자세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조(五祖)스님께서 백운(白雲)에 계실 때 일찍이 영원(靈源)화상에게 답하여 올 여름 모든 농장에 낱알을 수확하지 못함은 근심되지 않지만은 근심하는 것은 선방의 많은 납자들이 여름 한철에 한사람도 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뚫지 못하여 불법이 장차 멸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법을 관장하는 종사의 마음씀을 보십시오. 또한 (그분들이) 언제 수입(收入)의 많음과 절의 크고 작음으로 경중(輕重)을 삼으며 쌀, 소금 같은 자질구레한 일로 급함을 삼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이미 출세하여 선지식이란 이름을 짊어졌으니 마땅히 한결같이 본분을 밝히는 일로 방문해 오는 이를 제접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과 곡식은 인과를 아는 소임자에게 맡기고 부서를 나누어 그들로 하여금 맡게 하고 때때로 전체적인 것만 살피시고 (소임)스님들을 배치함에 있어 많게 하지 말아 일상의 공양을 항상 뒷사람들로 하여금 남게 하면 자연 힘을 소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납자가 방에 이르면 칼 씀을 반드시 긴밀하게 하고 진흙을 묻히고 물을 적시는 일은 행하지 마십시오. 저 설봉공(雪峰空)선사를 근래 운거(雲居)의 운문암(雲門庵)에서 서로 만났는데 나는 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불법에 깊이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본분감추(本分鉗鎚)로 그에게 주었더니 뒷날 스스로 다른 곳에서 타파하여 대법(大法)을 이미 밝혀 지난번에 받아간 감추(鉗鎚)를 일시에 수용해서 바야흐로 내가 불법으로 인정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을 알았습니다. 작년에 한 권의 어록을 보내왔으니 정법이 쇠퇴한 위급한 시기에도 임제종지(臨濟宗旨)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대중처소에 보내두고 납자들과 더불어 보게 하고 내가 그참에 붓을 들어 그 뒤에 글을 써서 특별히 격려하여 본분납자들로 하여금 장래에 설법하는 법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처음에 그에게 진흙을 묻히고 물을 적셔 노파선을 설했던들 눈이 열린 후에 반드시 나를 욕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때문에 고인(古人)이 “나는 선사의 도(道)와 덕(德)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다만 선사가 나를 위해 설해주지 않는 것을 중히 여긴다 만약 나를 위해 설해 주었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니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조주(趙州)스님께서는 “만약 나로 하여금 너의 근기를 따라 사람을 제접하면 당연히 3승12분교(三乘十二分敎)로 그들을 제접해야 하지만 나의 분상(分上)에서는 본분사로 사람을 제접한다. 만약 제접할 수 없다면 본래 배우는 자의 근성이 둔할 뿐이지 나의 일에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으니 거듭 생각해 보십시오.


大慧普覺禪師書 終








후기(後記)

대혜선사께서 40여년동안 설법하심에 법문이 천하에 가득하였으나 평소에 참학(參學)하는 사람들이 모아서 기록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납자가 개인적으로 베껴 써서 드디어 책을 만들었다. 만년에 대중들이 힘써 간청을 하여 이에 유통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스님의 회상에 있음에 시간상 선후(先後)가 있고 보고 들은 것에도 그 내용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있다. 또한 어진 사대부가 얻은 바의 법문을 각자가 소장을 하고 있어, 다 볼 수 있는 인연이 없으니 지금 법문을 모은 것이 자못 미진하니 다시 수집하여 별도로 후록(後錄)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문창이 삼가 아룀



'서장(書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장/대강좌5/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4/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3/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2/무비스님  (0) 2007.09.12
서장/대강좌1/무비스님  (0) 200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