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제10권

通達無我法者 2007. 7. 9. 13:22

-행음(行陰)에서 생겨나는 열 가지 장애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지를 닦아서 상음이 다 없어지면
   그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사라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이 밝은 깨달음이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개인 허공과 같아서 다시는 앞에 나타나는 거칠고 무거운 그림자 같은 일들이 자취를 감추며
   세간의 큰 땅덩어리나 산과 강을 보되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 하여 와도 달라붙지 않고
   가도 종족이 없어서 걸림 없이 받아들여 비침에 따라서 묵은 습기는 분명하게 없어지고
   오직 유일한 참된 정기만 있을 뿐이다.

   나고 없어지는 근원이 이로부터 드러나서 시방에 흩어녀 있는 열두 종류의 중생을 모조리 보게 되리니
   비록 그들 각각의 생명에 대한 내역까지는 낱낱이 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함께 생겨나는 근본이
   마치 아지랑이[野馬]가 아른거리고 반짝이는 것과 같아서 허무한 감각기관이나
   그 대상인 물질의 궁극적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니 이것은 ‘행음의 구역’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아른거리고 반짝이는 원래의 성품이 본래 맑은데[識陰]로 들어가서
   본래의 습기[行陰種子]가 한 번 맑아지면 마치 파도가 가라앉아서 맑은 물로 변화되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이름하여‘행음이 다 없어진 경지’라고 한다.
    이 사람은 중생탁(衆生濁)*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니
   그 원인을 관찰해 보면 깊이 숨어 있는 허망한 생각이 그 근본이 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삼마지 가운데서 올바른 지혜를 증득한 모든 선남자가 옳은 마음이 굳게 엉켜서
   열 가지 천마가 틈을 노리지 못하리니
   비로소 정밀하게 연구해서 생겨나는 종류[行陰]의 근본을 다 알아내어
   그 본래 종류 가운데 생겨나는 근본[行陰]이 환하게 드러나나니.
   저 그윽이 맑고 원만하게 동요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그 원만한 근원 가운데 계산하여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두 가지 원인이 없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본래 원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겨나는 기미[行陰]를 완전하게 깨뜨리고 안근의 팔백 공덕을 의지해서
   팔만 겁 동안에 살고 있던 중생들의 업보의 흐름에 굽이쳐 돌아 여기서 죽으면 저기서 태어나는 모습만을 보나니,
   다만 중생이 그곳에서 윤회하는 것만 보고 팔만 겁 밖의 일은 캄캄하여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문득 ‘세간의 시방중생들이 팔만 겁 이전에는 아무 원인도 없이 저절로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올바르고 원만한 지혜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시키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뒤[末]에도 원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겨남에 대해서 이미 그 근본[本]을 보고 나면 사람은 사람을 낳고
   새는 새를 낳으며 까마귀는 본래부터 검고 따오기는 본래 희기 때문이며,
   사람과 하늘은 본래 서서 다니고 축생은 본래 기어 다니며 흰 것은 씻어서 희어진 것이 아니요
   검은 것은 물들여서 검게 된 것이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만 겁 동안에 한 번도 변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 형체가 다 없어지더라도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여 내가 본래 보리를 본 적이 없으니 어찌 또 보리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물질의 형상이 모두 본래 원인이 없으니 뒤에도 분명 원인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헤아리므로 올바르게 두루 아는 소견을 잃어버리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리니
   이것을 이름하여 제일 외도가 주장하는‘원인이 없다’는 논리이니라.

   아난아, 이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가 올바른 마음을 굳게 하면 마구니가 틈을 탈 수 없게 되리니
   태어남이 있는 무리들의 근본을 추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흔들리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원만하고 항상한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네 가지 두루하고 항상하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그 대상의 성질이 두 곳에 모두 원인이 없음을 추구해서
   이를 닦고 익혀서 이만 겁 동안에 시방 세계에 나고 죽음이 있는 것은 모두 순환하는 것이어서
  일찍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항상한 것이라고 여기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사대의 근원을 추구하여 네 가지 성질이 항상 머문다고 생각해서 이를 닦아 익혀
   능히 사만 겁 동안 시방중생들의 나고 죽는 본래 모습이 ‘모두 그 본체는 항상한 것으로서
   일찍이 흩어져 사라짐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항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말나식(末那識, 七識)*과 집수(執受)*를 추구하여
   심의식(心意識) 가운데 근원이 말미암은 곳은 그 성품이 항상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를 닦아 익혀서
   팔만 겁 가운데 모든 중생들이 업력을 따라 한없이 순환하므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으며
   본래부터 항상 머무는 줄로 알고는 잃어버리지 않는 성품을 궁구하였으므로 항상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이미 생각의 근원[想陰]이 다 없어졌으니 나는 이치로 다시 흐르거나
   그치는 작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나고 죽는 부질없는 마음이 지금 이미 다 없어졌으니
   그런 이치 가운데 저절로 나고 죽지 않음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그 마음이 헤아리는 것을 따라 항상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러한 견해로 말미암아 항상하다고 생각하므로 올바르고 두루한 지혜를 잃어버리고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게 하나니 이것이 제이 외도가 주장하는‘원만하고 항상하다’는 논리이다.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가 바른 마음을 굳게 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을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자기나 남 가운데 계산하여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한 부분은 항상하지 않은 것이고
   한 부분은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네 가지 뒤바뀐 논리’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을 보고는 맑고 고요한 것을 가지고
  ‘마지막 경지의 신비한 자기’라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헤아리기를 ‘나는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밝음이 뭉쳐서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중생이 나의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겨났다가는 죽고 하나니
   곧 내 심성(心性)은 항상한 것이요, 이 마음 속에 나고 죽는 성품은 항상함이 없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은 살피지 못하고 시방세계에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국토만을 두루 살펴보고서
   오랜 세월 동안에 무너지는 곳을 보고는 ‘궁극적으로는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다’라고 하고
   오랜 세월 동안에 무너지지 않는 곳을 보고는 ‘궁극적으로는 항상하다’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각별히 관찰하되 ‘나의 마음은 정밀하고 미묘하며, 세밀하기가 마치 작은 먼지 같아서
   시방세계에 흘러다녀도 그 성품은 변함이 없으나 이 몸은 나고 죽게 한다’고 생각하나니
   저 무너지지 않는 성품은 나의 항상한 성품이요,
   나로부터 흘러나온 나고 죽는 모든 것은 항상하지 못한 성품이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상음이 다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 행음이 유전함을 보고는
   행음이 항상 유전하는 것을 항상한 성품이라고 생각하고
   색음과 수음과 상음 등은 이미 다 없어졌으므로 항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일부분은 항상함이 없고 일부분은 항상하다고 분별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리니 이것이 제삼 외도가 주장하는‘한 부분만 항상하다’는 놀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탈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나누어진 위치 속에서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네 가지 유변론(有邊論)’에 빠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근원이 끊임없이 흘러서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과거와 미래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팔만 겁까지는 중생을 관찰할 수 있으나 팔만 겁 이전은 고요하여 듣고 볼 수가 없으므로
   듣고 볼 수가 없는 것은‘한계가 없다’고 하고 중생이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나는 두루 앎으로 한계가 없는 성품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알 만한 곳에 나타나되 나는 그가 아는 성품을 알 수 없으므로
   저들은 오직 한계가 없는 마음을 얻지 못하였고 다만 한계가 있는 성품만 지녔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그 사람이 행음은 본래 빈 것이라는 것을 궁구하다가 그가 본 마음으로 헤아려 생각하기를,
  ‘모든 중생의 몸 가운데 본래 반은 나는 것이고 반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세계의 모든 것들도 ‘반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반은 한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한계가 있는 것과 한계가 없는 것이라고 헤아려 생각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현혹하나니 이것이 제사 외도가 주장하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니라.

   또 주장하는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을 수 없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고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느끼고 본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생각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허황된 논리에 빠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변천하여 흐르는 곳을 보고는 ‘변화하는 것’이라 하고
   서로 연속되는 것을 보고는 ‘항상한 것’이라고 하며, 보이는 곳을 보고는 ‘나는 것’이라고 하고
   보아야 할 곳이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며, 서로 계속되는 원인의 성품이 끊기지 않는 것을
  ‘늘어나는 것’이라고 하고 서로 계속되는 가운데 중간이 떨어진 곳을 ‘줄어드는 것’이라고 하며,
   각각 생기는 곳을 ‘있는 것’이라고 하고 서로서로 없어지는 곳을 ‘없는 것’이라고 하여
   이치로는 한꺼번에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이치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늘어나기조 하고 덜어지기도 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그 말을 어지럽게 횡설수설 늘어놓아서
   저 앞사람으로 하여금 이치를 잃어버리게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의 각각 있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고서 있는 것을 인하여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마디로 다만 ‘시(是, 그렇다)’라고만 말하고
  ‘시’밖에 다른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한꺼번에 보고서 그 대상이 두 갈래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대답하기를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지만,
   또한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모두가 혼란해져서 끝까지 따질 수 없게 하느니라.

   이렇게 교란함을 허무하게 헤아리다가 허무해져서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나니
   이것이 제오 외도가 주장하는 ‘네 가지 뒤바뀐 생각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혼란을 일으키는 허황된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끝없는 흐름에서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는 뒤바뀐 마음에 떨어질 것이다.

   혹 스스로 색신을 고집하여 ‘색신이 곧 나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나는 원만해서
   국토를 두루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색을 지닌 존재’라 하기도 하며,
   혹은 저 앞에서 일어나는 인연들이 나를 따라 회복하기 때문에‘색신이 내게 속하였다’고 하며,
   혹은 내가 행동하는 것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니 ‘내가 색신 속에 있는 존재’라고 하여
   모두를 자신이 헤아리는 생각에 따라 말하되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그렇게 돌고 돌아서 열여섯 가지 현상이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 생각하기를‘번뇌는 어디까지나 번뇌이고 보리는 어디까지나 보리이므로
   이 두 성품이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것이 제육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도 일정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앞에서 제거해 없앤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 헤아리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는 아무런 모습도 없다고 하는 뒤바뀐 마음에 떨어질 것이다.

   저 색음이 없어진 것을 보고나서‘형체는 본래 원인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상음이 없어진 것을 보고 나서 ‘마음은 본래 얽매인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하며,
   수음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나서 또 ‘몸과 마음은 서로 관련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음의 성품[陰性]이 사라졌으므로 비록 다시 태어나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음과 상음이 없어졌기에 마치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그 형체가 앞에 나타나도
   오히려 얻을 수가 없는 것이거늘 죽은 뒤에 어떻게 다시 실상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그로인하여 헤아려 생각하기를 ‘죽은 뒤에는 실상이 없어서 그렇게 돌고 돌아 여덟 가지
   아무런 실체 모습이 없다’는 데 빠지게 되느니라.

   이를 좇아 혹 생각하기를 ‘열반의 원인과 결과도 모두 빈[空] 것이므로
   부질없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마침내는 없어지는 것’이라고 단정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칠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실상이 없다’고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모든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시키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게 되리니
   생겨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행음이 남아 있는 가운데
   수음과 상음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남아 있는 것과 사라져 없어진 것을 번갈아 생각하여
   자체를 서로 무너뜨린다고 하나니 이 사람은‘죽은 뒤에는 모두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바뀐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색음과 수음과 상음 가운데 있는 것을 보더라도 있는 것이 아니며 행음이 변천하여 흐르는 속에
   없는 것을 보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돌고 돌아 음계의 여덟 가지가 모두 아니라는 현상을 궁구하여 ‘한 가지 인연을 얻음에
   따라 모두 죽은 뒤에도 실상이 있는 것이며 또한 실상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모든 작용은 성품이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 속에 깨달아 통했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허(虛)와 실(實)을 분간하지 못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죽은 뒤에는 모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뒷세상이 어둡고 아득해서 말할 수가 없게 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게 하리니 이는 제팔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모두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음의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리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죽고 난 뒤
   그 다음 세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억측하여 생각하면
   그 사람은 일곱 가지 끊겨 없어진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혹 생각하기를 몸[欲界人天]은 없어지는 것이며, 혹 탐욕이 다 끊어진 곳[初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괴로움을 다한 곳[二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지극히 즐거운 곳[三禪]도 없어지는 것이며,
   혹 다 버린 곳[四禪. 無色界]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서 이와 같이 돌고 돌아 일곱 군데를 다 궁구해서
  ‘현재 눈앞에서 없어진 다음에는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끊겨 없어진다’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구 외도가 주장하는‘오음 가운데 죽은 뒤에는 끊겨 없어진다’고 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또 삼마지 가운데 선남자들이 바른 마음을 굳게 응집하면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게 되리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이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죽은 뒤 다음 세상에 대해 있다는 견해를 일으키면 그 사람은 다섯 가지 열반 논리에 빠지느니라.

   혹은 욕계천으로 죽고 난 뒤에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 이는 원만하게 밝음을 보고 애모하기 때문이며,
   혹은 초선이라고 하기도 하나니 이는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천(二禪天)이라고 하니 이는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천이라고 하니 이는 지나친 기쁨이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천이라고 하니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없어져서
   나고 죽음에 윤회하는 성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는 하늘임을 모르고‘작용이 없는 경지’라고 생각을 내어
  ‘다섯 곳의 현안한 곳을 수승하고 깨끗한 의지처’라고 생각하면서
   이와 같이 돌고 돌아 다섯 곳을 최상의 경지라고 주장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다섯 곳이 바로 현재의 열반’이라고 생각하므로 외도에 떨어져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리니
   이를 제십 외도가 주장하는 ‘오음 가운데 다섯 곳이 바로 현재의 열반이다’라고 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이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열 가지 선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은 모두가 행음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얽히고 설켰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거늘 중생들이 미련하고 혼미해서
   스스로 헤아려 알지 못하고 이렇게 앞에 나타난 형상을 만날 적마다 혼미한 것을 잘못 이해해서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큰 거진말을 하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말법세상에 전해 보여서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이 이치를 깨닫도록 하고, 마음의 마구니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재앙을 일으킴이
   없도록 하여 보호해 지켜서 삿된 소견을 소멸시키고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참다운 이치를 깨달아서
   최상의 도에 대해 갈림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며 마음이 바라는 것으로 하여금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말게 하고 대각왕(大覺王)의 깨끗한 지표가 되게 하라.

 

 

-식음(識陰)에서 생겨나는 열 가지 장애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지를 닦아 행음이 다 없어진 이는 모든 세간에 그윽이 맑고 요동하는
   같은 분업끼리 생겨나는 근본[行陰]의 깊고 미세한 기강이 홀연히 무너져 내리고,
   업보를 따라 움직이는 보특가라의 깊은 맥락에서 감응하는 것이 아주 끊어져서
   열반의 하늘에 장차 크고 밝게 깨달으려 함이 마치 닭이 두 번째 운 뒤에 동쪽을 돌아보면
   이미 은밀한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아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비고 고요해지고 전과 같이 분주하게
   치달리지 않아서 안과 밖이 맑고 밝아 들어가도 들어갈 데가 없어서 시방에 열두 종류의 생명을 받게 된
   근본 이유를 깊이 통달해서, 그 이유를 살펴보고 근원을 고집하여 모든 종류와 휩쓸리지 않아
   시방세계에서 이미 동일함을 얻고 정밀한 빛을 잃지 아니하여 그윽하고 신비함을 발하여 나타내리니
   이를‘식음의 구역’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여러 무리가 생겨나는 데에서 이미 동일함을 얻은 가운데 여섯 가지 문을 소멸시켜서
   합하여 열림을 성취하면 보고들음이 이웃처럼 통해서 서로 작용함이 깨끗해지게 되고
   시방세계와 몸과 마음이 마치 수정[吠琉璃]처럼 안팎이 환하게 통할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식음이 다 없어진 경지’라고 하나니 그 사람은 명탁(命濁)*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을 관찰하면 형상이 없이 허무하게 뒤바뀐 허망한 생각으로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선남자가 행음이 비었음을 궁구하여 식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오묘한 경지에 대해서는 원만하지 못하나
   자기 몸의 막힌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합하고 열리게 하며 시방의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깨달아
   아는 것이 서로 통하고 합해지면 원만한 근원[識陰]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만약 돌아갈 데가 참되고 항상하다는 원인을 세워 뛰어난 견해를 내면 이 사람은 원인할 만한 것을
   원인했다는 집착에 떨어져서 명제(冥諦)를 목적으로 하는 사비가라외도와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혜롭게 보는 능력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일의 ‘얻었다는 마음을
   내어 돌아가야 할 최상의 과위[果]를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저버려서 외도의 종자에 태어나느니라.

   아난아,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빈 것을 궁구하여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지 못하니 만약 돌아갈 곳에 대해서 그것들이 자기 몸이라고 여겨
   허공세계의 열두 종류에 속하는 모든 중생들이 모두 내 몸 속의 한 부분이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여
   뛰어나다는 견해를 내면 이 사람은 능하지도 못한 것을 능하다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서
   마혜수라와 같이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는 자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혜로운 견해를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이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게 일의 결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매우 거만한 하늘에 내가 두루 원만하다고 생각하는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빈 것을 궁구하여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지 못하니 만약 돌아갈 적에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도 거기에서 흘러 나왔다고 의심하여 시방의 허공도 모두 거기서 생겨났다고
   여겨서 곧 생겨나는 모든 것이 퍼져 흐르는 곳에 대해 참되고 항상한 몸은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견해를 내나니 나고 죽는 가운데 있으면서 항상 머무는 것인 줄로 미리 생각하여 이미 나지 않는다는 데에
   현혹되고 나고 죽는 이치까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혼미한 곳에 편안히 머물면서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면
   그 사람은 항상하지 못한 것을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집착에 떨어져서 자재천 하늘과 짝이 되어
   보리를 혼미하게 하고 지혜로운 견해까지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삼의 ‘의지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생각하는 결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뒤바뀐 원만한 종자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 끊겨 비어져서[空]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한 경지가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만약 아는 것에 대해 그 아는 것이 두루 원만하다 하여 저 아는 것으로 인해 견해를 일으키고
   시방의 풀이나 나무들도 모두가 정이 있어서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풀이나 나무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어 다시 시방의 풀,나무가 된다’고 하며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물이 두루 안다고 고집하여 수승하다는 견해를 내면
   이 사람은 곧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안다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 바타(婆咤). 선니(霰尼, 先尼)와 같이
   모든 것이 느낌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와 짝이 되어서 부처님의 보리를 혼미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사의 ‘원만한 지혜의 마음을 헤아려 허망하고 잘못된 과(果)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함을 어기고 열반성을 등지게 되어 뒤바뀐 지혜종자에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 끊겨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만약 원융해진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미 마음대로 순하게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얻으면 문득 원융하게 변화하는 데서 모든 것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여
   불의 광명을 찾고 물의 깨끗함을 좋아하며 바람이 두루 흐름을 사랑하게 된다.
   모든 물질이 성취된 이치를 관찰해서 각각 숭상하고 섬기면서 이 많은 물질을 만들어 내는
   근본 원인이라고 하여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견해를 내면 이 사람은 곧 생겨나게 할 수 없는 것을
   생겨나게 한다는 집착에 떨어져서 가섭파와 바라문과 같이 몸과 마음을 괴롭혀가면서 불을 섬기고
   물은 숭상하며 나고 죽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이와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혼미하게 하고
   깨달음의 지혜를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오의‘숭상하고 섬기는 데 집착하여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사물을 따르면서 부질없이 구하는 원인을 성립하여 부질없이 희망하는 결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뒤바뀌어 변화하는 종류에 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 끊겨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만약 원만하게 밝은 데서 밝은 속은 비었다고 생각하여
   변화하는 모든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영원히 없어지는 것으로써 돌아가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하여
   수승한 견해를 내면 이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는 데를 돌아갈 곳이라고 집착하게 되어
   무상천 가운데 순야다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혼미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육의‘원만하게 비어 없어진 마음으로 비어 없어진 결과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끊어 없애는 종류에 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끊겨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만약 원만하게 항상한 데에 견고하게 항상 머물기를 바라면서
   정밀하고 원만한 데 맞추어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수승한 견해를 내면 그 사람은 탐해서는 안 될 것을
   탐하는 집착에 떨어져 오래 살기를 구하는 아사타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칠의 ‘목숨의 근원에 집착하여 견고하게 하려는 부질없는 원인을 세워 길이 수고로운
   결과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부질없이 목숨이나 연장하려는 종류에 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 끊겨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목숨이 서로 통하는 이치를 관찰해서 문득 번뇌를 머물러 두려는 생각이 일어나면,
   사라져 없어질까 염려하여 문득 이때 연화궁(蓮華宮)에 앉아 일곱 가지 보배를 널리 변화시켜
   예쁜 여인을 많이 모아 마음대로 즐기면서 수승한 견해를 내나니 이 사람은 참되지 못한 것을
   참된 것이라고 하는 집착에 떨어져 타지가라(咤枳迦羅)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팔의 ‘삿된 것을 생각하는 원인을 일으켜 치솟는 번뇌의 과업을 세운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천마의 종자에 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하여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목숨의 근원이 밝아진 가운데 정밀하고 거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함과 거짓됨을 판단해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 관련이 있다고 해서 오직 느껴 감응하기만을 구하고
   깨끗한 도를 저버리나니 이른바 괴로움을 보고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적멸해지기를 희망하여
   적멸하게 되는 방법을 닦아 적멸해진 경지에 만족하여 다시 전진하지 아니하고 수승한 견해를 내면
   그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 떨어져 더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로서 증상만(增上慢)에 빠진 무리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구의 ‘정밀하게 감응하는
   마음을 원만히 하여 적멸의 결과에 취향함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허공에 속박되는 종류에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행음이 다하여 비어져서 이미 나고 죽음이 없어졌으나
   적멸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오묘함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니
   만약 원융하고 깨끗한 밝은 깨달음에 대해 깊고 오묘한 이치를 연구하여 밝혀내고는
   이것을 열반이라고 주장하며 더 전진하지 않으면서 수승한 견해를 일으키면
   이 사람은 정성벽지(定性辟支)에 떨어져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연각이나 독각들과 짝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게 하고 지견을 잃어버리는데 이것이 제십의 ‘원만하게 깨달아 합해진
   마음으로 맑고 고요하고 밝은 결과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원만하게 통한 경지를 어기고
   열반성을 저버려서 깨달음이 원만하게 밝아지고 변화하지 않는 원만한 종류에 태어나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열 가지 선나가 중도에서 잘못된 견해를 이루어서 미혹함에 의지함으로 인해
   만족하지 못한 가운데 만족하게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모두 식음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얽히고 설키기 때문에 이 지위에 생겨나거늘 중생들이 미련하고 혼미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게 앞에 나타나는 현상을 만날 적마다 각각 옛날부터 좋아했던 습관으로 마음을 미혹하게 하여
   스스로 쉬어 그쳐서 ‘언젠가는 돌아가 편안히 쉴 곳’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최상의 보리를 깨달았노라’고 하면서 크게 거짓말을 하면 외도와 삿된 마구니는 감응하여
   받은 업보가 끝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성문과 벽지는 더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부처님의 도를 받들어 이 법문을 가지고 내가 멸도한 뒤
   말법세상에 전하여서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분명히 깨닫게 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마구니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죄를 짓지 않게 하며 편안하게 보호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구제해서 삿된 인연이 사라지게 하여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끝가지 어려운 갈림길을 만나지 않게 하라.

   이러한 법문은 앞선 과거세상에 항하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겁을 지내오면서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를 의지하여 마음이 열려서 최상의 도를 증득하셨으니
   식음이 만약 다 없어지면 네 앞에 나타나는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작용하리라.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보살의 금강간혜(金剛乾慧)에 들어가 원만하게 밝고 정밀한 마음이
   그 가운데에서 발하여 변화된이 마치 맑은 유리 속에 보배의 달을 넣은 것과 같아지리라.

   이와 같이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의 마음과 보살이 수행하는
   금강십지(金剛十地)를 초월하여 등각(等覺)이 원만하게 밝아져서 부처님의 오묘하고 장엄한 바다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히 이루고 더 이상 증득할 것이 없는 데로 돌아가리라.

   이는 과거에 먼저 태어나셨던 부처님께서 사마타 가운데 비바사나로 깨달아 밝아진 것을 분석하신
   미세한 마구니의 일이니 마구니의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네가 이를 잘 알아서 마음의 때를 씻어버리고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음마(陰魔)가 소멸하고 천마가 부서지며 큰 힘을 가진 귀신이 넋을 잃고
   도망하여 산도깨비와 무도깨비들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며 곧바로 보리에 이르러서 모자라거나
   비열함을 막론하고 더욱 정진하여 큰 열반에 대해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으리라.

   만약 말법세상에 어리석고 우둔한 중생이 선나를 알지 못하며, 설법할 줄을 모르되 삼매 닦기를 좋아하지만
   네가 볼 때 삿되게 될까 두렵거든 일심으로 권유하여 나의 불정다라니주(佛頂陀羅尼呪)를 지니게 하라.
   만약 외울 수 없거든 공부하는 방에 써 두거나 혹 몸에 지니거나 하면 일체의 마구니가
   조금도 동요할 수 없으리니 너는 마땅히 시방 부처님께서 최후의 경지까지 닦아 나아가는
   마지막 가르쳐 주신 법을 공경히 받들어야 하리라“라고 하셨다.

 

 

-오음의 근본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자옵고 이마를 대어 절하며
받들어 기억하여 잃어버림이 없이 대중 가운데서 다시 부처님게 아뢰었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오음의 현상 가운데 다섯 가지 부질없이 생각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었다고 하시니 저희들은 평상시에 부처님의 미세한 데까지 열어 보이심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오음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입니까, 차례로 없어지는 것입니까?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를 펴시어 이 대중들을 위해서 마음의 눈을 맑고 밝게 하시며
   말세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장래의 눈이 되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밀하고 참되고 오묘하고 밝은 본각이 원만하고 깨끗해져서 나고 죽는 것과 온갖 티끌과
   나아가 허공까지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건만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이는 원래 본각으로서 오묘하고 밝고 참되고 정밀한 것인데 허망하게 온 세상을 발생시키는 것이
   마치 연야달다가 제 머리를 모르고 그림자로 잘못 인정한 것과 같느니라.

   허망한 것은 본래 원인이 없는 것이거늘 부질없는 생각 속에 인연의 성품이 성립되는 것이다.
   인연을 모르는 이는 자연이라고 하는데 그 허공의 성품도 오히려 환상으로 생긴 것이므로
   인연과 자연이라 함은 모두가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헤아려 생각한 것이니라.

   아난아, 허망한 것이 생긴 이유를 알면 허망한 인연을 말할 수 있으려니와
   만약 허망한 것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허망한 인연을 말하려고 하여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거늘
   더구나 알지도 못하면서 자연이라고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여래께서 너에게 발기토록 하여 밝히시되
   오음의 근본 원인이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너의 몸이 처음엔 부모를 생각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네 마음이 만약 생각이 아니었다면 생각 가운데 와서 생명을 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내가 먼저 말하기를
  ‘마음으로 신맛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생기고
    마음으로 높은 데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저려온다’고 한 것과 같느니라.
   그러나 높은 절벽이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신 물건이 이른 것도 아니니,
   네 몸이 반드시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신물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하여 입에 침이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너의 현재 색신이 견고한 제1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여기서 말한 바 높은 데 오를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네 몸으로 하여금 참으로 시거나 발바닥이 저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나니
   수음이 생기므로 인하여 색신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의 앞에 나타나는 순하면 유익하고 거스르면 해로운
   두 가지로 치달리는 것을 비고 밝은 제2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네 생각으로 말미암아 너의 색신을 부리나니
   몸은 생각과 같지 않거늘 네 몸은 무슨 까닭으로 생각을 따라 부림을 당해서
   갖가지 형상을 취해 마음이 생각을 일으키면 몸은 취하여서 생각과 서로 내응하느냐?
   깨면 생각하는 마음이요, 자면 모두가 꿈이니
   네 생각으로 요동하는 허망한 정을 이름하여
   융통하는 제3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변화하는 이치 때문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쉬지 않고 은밀하게 옮겨가서
   손톱과 발톱이 자라고 모발이 나며 기운이 사라지고 얼굴이 쭈그러져서
   밤낮으로 서로 교대하는데도 일찍이 깨닫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이것이 만약 네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몸이 변하여 달라지며
   만일 반드시 진실한 너라면 어찌하여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의 모든 작용이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그윽하고 은밀한 제4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또 네가 정밀하고 밝으며 맑고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항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몸에 보고 듣고 느껴서 아는 것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참으로 정밀하고 진실한 것이라면 허망한 것 익히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무슨 까닭으로 너희들이 옛날에 어떤 기이한 물건을 보고
   여러 해를 지내면서도 기억하고 있는지 잊었는지 알 수 없다가,
   뒤에 홀연히 앞에 것과 다른 것을 보면 기억이 완연하여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느냐?
   이것이 정밀하고 밝고 맑아 요동하지 않는 가운데
   생각마다 훈습(薰習)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맑고 고요함이 참된 것이 아니라 마치 급히 흐르는 물과 같아서
   고요한 듯 보이나 빠르게 흐르는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일 뿐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생각의 근원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부질없는 습기를 받아들이겠느냐?
   너의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서로 작용하여 합하거나 열리지 아니하면
   그 허망한 생각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현재에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습관의 기미이니
   이것을 맑고 또렷한 가운데 형상이 없어 허무한
   제5의 뒤바뀐 미세하고 정밀한 생각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다섯 가지 쌓인 음은 다섯 가지 망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라.
   네가 지금 인계(因界)의 깊고 얕음을 알고자 하면
   색질과 빈 것은 색음의 변제(邊際)이고 접촉하고 떨어지는 것은 수음의 변제이고
   기억하고 잊음은 상음의 변제이고 없어지고 생겨나는 것은 행음의 변제이고
   맑고 고요한 데 들어가서 [識陰中의 有爲] 맑고 고요함과 어울리면 [識陰中의 無爲]
   식음의 변제로 돌아가느니라.

   이 오음의 근원이 겹겹이 쌓여서 생긴 것이라서
   식음으로 인해 생겨나고 색신을 따라 없어지나니
   이치인즉 단번에 때달을 수 있는지라 깨달음에 의지하여 모두 사라지지만
   그 일은 단박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차례를 따라서 하나하나 없어지느니라.
   내가 이미 너에게 겁바라수건으로 매듭짓는 것을 보여 주었거늘
   무엇이 분명치 않아서 다시 묻느냐?

   너는 마땅히 이 망상의 근원을 통달해서
   미래 말법세계 속에서 수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전해 주어라.
   그리하여 허망함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 싫증을 내어서 열반이 있음을 알고
   삼계에 연연하지 않게 하라.

 

 

-이 경을 아난에게 부촉하다 (終)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시방에 가득하고 허공에 꽉 차 있는
   일곱 가지 보배를 가지고
   작은 먼지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공양을 드리며
   마음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그렇게 부처님께 보시한 인연으로 복을 많이 받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허공이 다함이 없으며 보배도 한량이 없사오니
   옛적에 어떤 중생이 부처님께 돈 일곱 푼을 보시하고서도
   죽은 뒤에 전륜왕이 되었거늘 더구나 현재 무한한 허공과
   부처님의 세계에 가득한 보배로 보시함이겠습니까?
   겁이 다하도록 생각하더라도 오히려 미칠 수가 없을 터이니
   그 복이 어찌 한계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부질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몸으로 네 가지 중죄(음행. 살생. 도적질. 거짓말)와
   열 가지 바라이죄를 범하여 순식간에 이곳저곳의 아비지옥을 돌아다니며
   시방의 무간지옥가지 빠짐없이 다 돌아다녀야 할 터인데도
   능히 한 생각으로 이 법문을 가져다가 말법세계 속에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의 죄와 업장이 생각을 따라 소멸되어서
   저렇게 받아야 할 지옥의 괴로운 원인이 변하여 안락한 나라가 될 것이요,
   복을 얻음이 앞서 보시한 사람보다 백배. 천배. 만배. 억배나 더할 것이며,
   이와 같이 숫자로 계산하거나 어떠한 비유로도 미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난아, 어떤 중생이 경전을 외우고 이 주문을 받아 지니면
   내가 말한 것과 같이 겁이 끝나도록 다할 수 없으리니
   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법대로 수련하면
   곧 보리를 이루어서 다시는 마구니의 업장이 없으리라.“

세존께서 이 경전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비구. 비구니.우바새. 우바이와
모든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와 다른 곳의 보살들과 이승(성문. 연각)과 성선동자(聖仙童子)와
처음 발심한 큰 힘을 지닌 귀신들이 모두들 크게 기뻐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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