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15

 

 

 

○ 三空如來藏과 三觀의 實體


진실한 마음의 근원은 담적(湛寂)하여 생멸의 실마리가 끊겼고, 법계일심(法界一心)의 이치는 유현(幽玄)하여 성범(聖凡)의 자취가 단절하였다. 이같은 법계일심의 진실한 근원자리는 수행과 증오의 차별적 모습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깨달음과 미혹이라는 상대적 모습에 치우쳐 소속하랴.
 
그러므로 지금은 본래적으로 미혹함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미혹한 부처인 중생의 마음을 의지해서 수행 없는 가운데 수행의 모습을 건립하므로 이는 깨달음이 없는 가운데의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진실하여 미혹의 모습 없는 마음을 미혹하여 망상을 실체로 오인하므로 이윽고 생사의 흐름에 끝없이 부침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의 망상을 돌이켜 진실한 근원인 법계일심의 이치로 귀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진실한 마음을 자체로 의지한 올바른 수행을 건립해야만 한다.
 
본 능엄경은 한결같이 청정한 법계여래장성진심을 그 자체로 삼고, 이같은 일심을 그 자체로 의지하여 삼관수행법문을 건립하며, 이 삼관법문을 의지함으로써 다시 일심의 이치를 증득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이 법계일심을 따라 일어나고, 다시 이 법계일심으로 귀결한다”고 하였을 것이다.

아난이 미혹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법계일심의 이치를 미혹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한결같이 많이 듣기만 하고 생사 없는 본래의 마음을 증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생사의 근본인 망상을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음란한 마등가 여인의 허깨비 술수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아난은 이윽고 부처님께 삼관수행법문을 은근히 청하였다. 그러므로 세존께선 우선적으로 법계일심으로써 우주만법을 조명하게 하면서 그에게 고하셨다.
“일심중생들의 생사 상속하는 모습 그 모두가 상주진심성정명체(常住眞心性淨明體)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삼마제(三摩提)가 있는데 그 이름을 수능엄왕삼매(首楞嚴王三昧)라고 하며, 거기에는 모든 선공덕행이 빠짐없이 갖추어 있고, 시방세계의 모든 여래가 이 하나의 삼매문을 통해서 생사를 초월한 오묘한 공덕으로 장엄한 수행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두 말씀을 관찰해 본다면 본 능엄경의 전체대의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즉 부처님께선 아난으로 하여금 우선 일심법계의 이치를 알고 나서 그것을 자체로 의지하여 삼관을 건립하고, 이 삼관을 수행함으로써 다시 일심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부처님이 본경문에서 아난의 질문에 많은 답변을 하시면서 그의 병통을 타파해 주고 계시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본다면 일심의 근원을 나타냄으로써 삼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진술하지 않음이 없다. 제1권으로부터서 제4권 중반부까지가 모두 이 내용에 해당한다.
 
이를 의지해서 수행을 일으키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이십오성인(二十五聖人)의 수행방편을 이끌어냄으로써 그 가운데서도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선택하여 삼관수행의 최초방편을 삼는데, 제4권 중반부부터 제6권 초반부까지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최초로 발심한 수행인으로 하여금 삼관방편의 수행모습을 분명하게 바로 알고 나서 일심의 이치에서 그들 근기의 심천정도에 따라서 미혹을 끊고 진실한 마음을 증득해 가는데 수준고하에 따른 응용이 있도록 치밀하게 배려했다 할 것이다. 이는 제7권 초반부로부터 제8권 중반부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삼관수행을 통해서 쌓인 미혹을 끝까지 끊고 나선 수행관문을 결론지어 시종일관 하나의 근원인 수능엄대정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후반부에서 이 경전의 제목을 나열함으로써 삼관수행문을 종결하고 있다. 이것이 능엄경의 시종일관된 대지이다.

우선 삼관의 실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삼관의 실체는 다름 아닌 상주진심성정명체(常住眞心性淨明體), 즉 일진법계여래장심이다. 본 경전에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삼관의 실체를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그 일심의 이치를 삼관수행의 실체적 대상경계로 삼게 하였다. 즉 삼관수행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일심의 실체로써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실체를 의지해야만 그에 따른 대지혜의 작용, 즉 삼관을 통해서 나타난 실제적 일심의 효용이 열리기 때문이다.
 
삼관의 실체인 여래장성은 그 특성에 따라서 세 종류의 의미로 분류하는데, 첫째는 마음의 실체적 근본인 진제(眞諦)의 측면인 공여래장(空如來藏)이며, 두 번째는 속제(俗諦)의 측면인 실체에 갖추고 있는 지혜공덕상으로서의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며, 세 번째는 공덕과 실체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중도일심으로서의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이다.

우선 공여래장부터 말해보기로 한다.
여래장성의 자체엔 모든 차별, 즉 우리의 마음과 세계현상의 차별이 본래 공적하여, 이 마음의 이치를 떠나선 그 어떤 따로의 독립된 개체성도 실체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을 진제의 측면에서 불유(不有)라고 한다. 즉 우리 마음의 근본 자체를 떠난 따로의 개체는 존재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면 마니보주의 자체는 그 어떤 따로의 색상도 없이 텅비고 공적하다. 비록 방향을 따라 각자의 다른 색깔로 비춘다해도 그 색상은 보주를 떠나서 따로 존재해 있지 않음과도 같은데, 그들 색깔은 보주와 상즉했기 때문에 나타난 그 자리에서 보주와 함께 진공이다.
 
이처럼 여래장성진심자체는 본래 청정하여 허망한 분별인연의 실재적 모습이 끝내 단절하였다. 설사 이 마음이 생멸번뇌의 인연을 따른다 해도 그 망상은 변함없는 진실한 마음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망상인데, 이는 망상이 진심과 하나의 상즉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망상이 진심과 상즉관계라면 망상이 일어난 근원인 진심은 절대 공적한 자체이므로 그것을 의지해서 일어난 생멸망상의 모습인 현상의 차별도 실제로는 절대진공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근본마음의 실체를 진공여래장(眞空如來藏)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이같은 진공여래장이 그 마음의 근원적인 실체임을 제시하여, 이로써 공관수행의 자체를 삼게 하였다.
이러한 진공의 실체를 관찰하는 수행을 진공관(眞空觀), 즉 삼관 가운데서 공관(空觀)이라고 한다. 이 관법을 본경전에선 사마타라고 했으며, 천태학(天台學)의 삼지삼관(三止三觀) 수행법문에선 체진지(體眞止)라고 한다.
 
경전의 첫 머리에서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신 “有三摩提, 名大佛頂首楞嚴王, 具足萬行, 十方如來一門超出, 妙莊嚴路” 로부터서 칠처징심팔변(七處徵心八辨) 까지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처음엔 진심과 망심을 구별하여 “이는 망심일 뿐 진심은 아니다”하여 오온신심(五蘊身心)은 실제로 있지 않으며, 세계까지도 본래 공적함을 밝혀 아법이집(我法二執)을 타파하고 “본각진여(本覺眞如)를 나타냈다. 다시 삼과칠대(三科七大)에 이르러선 이 모두를 여래장성 자체의 모습으로 회귀시킨 뒤에 진심과 망심이 본래 둘이 아닌 이치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처음엔 얕은 경지로부터 차츰 깊은 경지로 이르러 가는 경문의 대단락 모두가 공여래장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제1권부터서 제3권 끝까지가 모두 이 내용에 해당한다.

두 번째 불공여래장을 말해보기로 한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공여래장의 실체가 진공이라곤 하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단멸이 아니라 그 진공여래장성의 차별 없는 원만보편성에 걸맞는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지혜공덕을 자체성에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는 마치 마니보주가 그 자체는 공적하고 청정하나 그 안에 모든 색깔을 빠짐없이 비출 수 있는 이치를 동시에 갖춘 경우와도 같다. 마니보주는 방향을 따라서 주변 일체의 모든 빛깔이 그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 빛깔들이 보주와 하나의 상즉관계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보주의 투명성과 그곳에 나타난 모든 빛깔이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장성의 자체는 모든 차별성이 진공적멸이라곤 하나 다시 생멸의 인연을 따라서 십법계 의보 정보의 인과차별의 모습(十法界依正因果相)을 동시에 나타내는데, 이같은 의보 정보의 인과차별상이 진공여래장성과 상즉하여, 그 본성과 하나의 이치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여실하게 공적한 공여래장성의 자체인 동시에 여실하게 공적하지 않은 불공여래장성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인에게 이러한 측면의 불공여래장성을 제시하여 그들이 가관수행(假觀修行)의 자체로 삼게 한다. 이같은 불공여래장을 관찰하는 수행의 측면을 불공관(不空觀), 즉 가관(假觀)이라고 하는데, 이를 경전에선 삼마(三摩)라고 했으며, 천태학에선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라고 한다.
 
본경문에선 부루나존자가 현상에 집착하여 본성의 이치를 따져 물으면서 삼종상속(三種相續)으로써 그 상속이 생기(生起)한 이유를 심도있게 추궁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삼종상속은 모든 중생들이 지은 업(業)의 정도를 따라서 그에 걸맞는 모습으로 나타남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같은 경문의 내용은 불공여래장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제4권 초반부로부터 중반부에 “發妙覺明性”까지 총 일천오백여 단어가 모두 이 내용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 공불공여래장의 개요를 고찰하기로 한다.
이 여래장성은 그 자체가 청정하여 모든 주변상황이 부딪쳐 오는 데로 그에 걸맞는 작용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마니보주가 그 자체는 청정하고 원만함과도 같다. 보주의 자체는 청정하기 때문에 색상이 아닌 상태에서 대상의 색상과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관계를 이룰 수 있으며, 원만하기 때문에 색상이 아님으로써 색상과 상즉하지 않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따로의 색상도 아니며, 따로의 보주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장성의 자체도 청정하고 원만하다. 청정하기 때문에 따로의 모습 아님으로써 여래장성과 상즉관계를 이루며, 원만하기 때문에 따로의 모습 아닌 여래장성으로써 따로의 모습과 상즉관계를 이루면서 감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도 역시 따로의 모습도 아니며, 따로의 여래장성도 아니다. 이를 공불공(空不空)이라고 한다.
 
여래장성은 대상경계와 따로의 모습이 아니므로 그 자체는 대상과의 차별이 공적하며, 그렇다고 대상경계를 떠난 따로의 여래장성도 아니기 때문에 따로의 진공도 아니다. 장성과 대상경계는 아예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관계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경계와 전혀 별개의 사물로 떨어진 관계도 아니다.
 
이는 대상과 장성이 평등여여(平等如如)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때문에 마음자체의 진공과 대상경계의 불공이 둘인 듯하면서도 둘이 아닌 치우침 없는 중도라고 한다.
수행인에게 이러한 공불공의 여래장성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중도관(中道觀)의 실체를 삼게 한다. 이러한 장성의 실체를 수행관찰하는 마음을 중도관이라고 한다.
 
본경전에선 이를 선나(禪那)라고 하며, 천태학에선 이이변분별지(離二邊分別止)라고 하며, 또는 등지(等持)라고도 한다.
이는 제4권 중반부의 “如來藏非心” 등의 구절로부터 “常樂我淨”에 이르기까지 삼백여 단어, 두 문단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공가중삼제(空假中三諦)의 자체는 따로의 모습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어느 하나만 들어도 이 셋은 동시에 상즉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끝내 언어논리의 한계성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이는 순차적인 수행이력의 차별을 면치 못하므로 절대평등한 법계일심의 이치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형식으론 삼제가 원융한 중도일심의 종지엔 끝내 일치하질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반드시 삼제상즉과 삼제차별을 동시에 떠나야만 차별과 평등이 동시에 끊긴 오묘한 여래장성의 이치를 철저하게 추궁하여 모든 상대적 모습이 끝내 단절할 수 있다.
본체의 측면에서 삼제의 차별을 동시에 떠나면 그에 따른 분별이 모두 끊기게 되고, 현실적으론 삼제의 차별을 동시에 긍정한다면 그것은 차별성으로 뚜렷이 떠오른다. 이를 선문(禪門)에선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관조의 측면에서 삼제 차별성이 존재하면 삼제는 신령하게 분명하고, 본체의 측면에서 그 차별성이 일체 부정되면 평등한 일심은 삼제 가운데 그 어느 쪽에도 따로의 한정된 의탁이 있을 수 없다.
 
본체의 고요와 삼관의 응용이 동시이고 [寂照同時], 현실긍정과 본체의 부정이 서로가 장애없어 언어적 차별이 끊겨야만 그 경지에 신령하게 일치하고, 사려의 분별이 단절해야만 마음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삼제를 모두 열어 보이시고 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이상에서 말했던 여래장성의 이치는 이처럼 심오하고 오묘하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상대적 분별심으로서 헤아리고, 세간의 언어로써 깨달으려 하느냐”라고 책망하셨다.
 
이같이 오묘한 삼제의 이치는 사람마다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으나 단지 망상에 가리워 나타나질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비유하면 거문고엔 원래부터 오묘한 음률을 자체에 간직하고 있으나 뛰어난 솜씨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들마다 오묘한 여래장심을 낱낱이 갖추고 있다곤 하나 신령하고 분명한 차별적 삼제삼관수행이 아니면 모든 차별이 끊긴 일심의 이치는 끝내 나타나질 않는다.
 
부처님은 이같이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증득하고 나서 수능엄대정에 안주하여 삼공여래장법계를 끝까지 원만하게 관조하신다. 따라서 모든 행동거지가 삼관대정(三觀大定)의 발현 아님이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러한 이치를 미혹하여 행동거지 모두가 번뇌악업의 작용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나는 발가락으로 대지를 누르면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지혜광채가 발현하나 너희들은 마음분별을 했다하면 모든 번뇌가 우선적으로 일어난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부지런한 수행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작은 깨달음의 결과가 전체인양 만족심을 내기 때문이다.”
 
아난은 무슨 인연 때문에 이같은 망상이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부처님은 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망상을 일으키는 인연은 근본일심 자체엔 그 실체가 본래 없다 하여, 실체없는 망상이 우리의 진심을 떠나지 않았음을 알게 하려 하였다. 그것은 마치 본래 있는 머리를 거울 속에서 따로 얻을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오묘한 본성의 이치는 인위적인 수행에 의해서 없던 마음이 새삼 이루어지진 않는다. 단지 현전일념(現前一念)에 그 마음의 이치를 안으로 반조한다면 신령한 마음은 본래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언어적 희론을 끊고 마음으로 실제적 수행을 하도록 권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계시다.
“너희들이 삼승십이부경(三乘十二部經)을 빠뜨림 없이 모두 기억한다 해도 그것은 잠시 무루업(無漏業)을 수행함만 못하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자신의 마음 이치를 속이면서 단지 법문을 듣기만 하고 실제적 수행을 하지 않느냐.”
이 때문에 아난은 그같은 법문을 듣고 나서 그 동안의 의혹이 모두 소멸하여 제법실상의 이치를 알았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실제적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수행법문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관찰해 본다면 부처님이 본경문에서 한결같이 여래장성의 이치를 열어 보이신 이유는 우선적으론 일심. 즉 여래장성의 실체를 알게 하여 이를 자체로 의지해서 삼관의 오묘한 수행문을 건립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뒤에야 수행이 완성되고 분별심이 단절하여 일심의 이치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고구정영한 뜻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삼관의 실체는 견도분(見道分)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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