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상당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11:56

상당  2

 

1-2 불교의 대의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這箇師僧 却堪持論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만하구나.”  


강의 ; 청천백일에 천둥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 쓴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계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할”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 “할”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活鱍鱍)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 “할” 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육신통(六神通)이 이 “할”에 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 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할”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임제할, 덕산방이라 하여 임제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 “할”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 “할”과 “방”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

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 “할”을 하였다.   

어느 비구니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스님이 여름 한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스님들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 ‘할’이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임제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 “할”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의 흉내를 낸다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