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위진인(無位眞人)
上堂云, 赤肉團上에 有一無位眞人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未證據者는 看看하라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고 師下禪牀把住云, 道道하라 其僧擬議한대 師托開云, 無位眞人이 是什麽乾屎橛고하시고 便歸方丈하다
법상에 오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 임제록에서 한 구절만 택하라면 바로 이 무위진인이다.
불교는 달리 표현하면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를 구가하는 종교다.
그 대자유, 대해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무위진인이 답이다.
여기에는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런대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있고 없고 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다.
차별이 있는 사람은 가짜사람이다.
차별이 없는 사람은 참사람이다[차별 없는 참사람].
대개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한다. 그
리고 이 사람의 값은 백두산 크기의 백 만개만한 다이아몬드의 값보다도 억 만 배 더 나간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 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 소소영영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임제일구 치천금(臨濟一句置千金).
임제록의 이 한 구절의 법문이 천금의 값을 한다.
아니 어찌 천금으로 그 값을 대신하겠는가.
만고에 빼어난 말씀이다.
어느 해(1971년) 겨울철 봉암사에서 서옹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선사는 전쟁을 맞아 원자폭탄으로 일본열도가 불에 탈 때 “일본이 다 타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있으면 된다”라고 하였단다.
필자는 이 한마디로써 일본에 사람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지 않는다.
임제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나는 도반의 절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족자가 하나만 걸려 있으면 그 도반을 달리 본다.
속으로 두려워하면서 더 친해지고 존경하게 된다.
글씨야 졸필이든 말든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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