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39/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3:54

 

시중 39

 

14-17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道流

儞欲得如法見解댄

但莫受人惑하고

向裏向外하야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脫하야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

강의 ; 여법한 견해나 진정견해나 모두가 같은 것이다.

수처작주도 같다.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유혹하는 순조로운 경계도 같은 것이다.

부처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경계고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다.

어떤 사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다.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조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셔라는 뜻이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강도 높은 언어를 써도 강강(强剛)한,

억세고 미련한 중생들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깊은 사유가 없어서이다.

경계는 경계의 일이고 나는 나의 일이다.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나는 내 할 일 하면 된다.

내 자신을 굳게 지키고 타인의 잘잘못을 보지 말라.

흔들리고 따라가면 그 순간 내 생명은 벌써 상처를 입는다.

그가 부처든 조사든 부모든 칭찬이든 욕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각하는 일은 그처럼 중요하다.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

참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고 입처개진(立處皆眞)라하.

불여물구(不與物拘)하고 투탈자재(透脫自在)하라.

제대로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이 말대로 하라.

如諸方學道流

未有不依物出來底

山僧向此間

從頭打하야

手上出來手上打하고

口裏出來口裏打하고

眼裏出來眼裏打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

皆是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벗들은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다만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지식이나 언어나 행위들[閑機境]을 숭상하고 받드는 것이었다.”

강의 ; 임제스님이 법을 쓰는 것은 매우 독특하다.

그 표현이 독창적이다.

파격적이고 상상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하고 기상천외하다.

밝은 대낮에 청천벽력이다.

구름 한 점 없는데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진다.

그 밝기로는 일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수수만년을 비추고 있다.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근거를 대어 나타내는 경우가 없다.

그런대 다른 모든 이들은 그동안 불교역사에서 축적되어진 표현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변형을 시킨 것들이다.

원래로 법이 그렇지가 않은데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모두 쳐 없앤다.

어떤 입장에서 나오든지 모두 쓸어버린다.

옛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이나 행위들을 흉내 내어 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할”을 하고 방을 써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큰 참선 법회에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왈, ‘외계인들이 와서 놀다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는 말을 했다.

매우 적절한 평이었다.

이제는 되지 않은 옛 스님들의 격외 법문을 문자로 적어서 그것을 다시 번역하고 떠듬떠듬 읽어서 법문이랍시고 토해내는 그런 것은 그만 하는 것이 좋다.

차라리 자신이 알고 있고 확신이 가는 것만 이야기 하자.

전설 따라 삼천리도 좋고 소를 팔러 다니던 이야기도 괜찮다.

진실하게 소신이 있는 말이면 되지 않는가.

공연히 옛 사람들의 흉내를 낸다고 자신이 옛 사람처럼 존귀하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