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41 |
14-19 삼계는 삼독심이다 道流야 是儞目前用底가 與祖佛不別이어늘 祇麽不信하고 便向外求로다 莫錯하라 向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라 儞取山僧口裏語는 不如休歇無事去니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이 없으며 안에도 또한 얻을 것이 없다. 그대들은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는 모든 생각을 쉬어서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강의 ; 불교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도를 이룬 부처님이나 조사는 또 무엇인가? 그대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면서 작용하는 그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그놈이 부처님과 조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단지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 외의 것들을 찾아 밖으로 법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안에서 얻을 수도 없다. 내가 하는 이 말은 이 지상에서 제일가는 법문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법문은 없다. 팔만사천법문과 온갖 시시비비를 다 쓸어버리는 어마 어마한 태풍과도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산승의 이 말을 듣는 것 보다는 한 생각 쉬는 것이 더 낫다. 한 생각 쉬고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훨씬 훌륭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지만 나는 놈보다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놈이 백배 훌륭하다.
已起者莫續하고 未起者不要放起하라 便勝儞十年行脚이니라 約山僧見處하면 無如許多般이요 祇是平常이니 著衣喫飯하고 無事過時니라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이렇게 한다면 10년을 행각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허다한 일[소승, 대승, 출가, 속가, 수행의 단계 등]은 없는 것이니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니라.”
강의 ; 스승을 잘못 만나고 한 생각 잘못하여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일으켰다면 더 이상 지속하지는 말라. 만약 일어나지 않았거든 어떤 좋은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그렇게만 하면 그대들이 공부를 위해서 10년을 행각한 것 보다 훨씬 낳으리라. 산승의 소견으로는 그 허다한 5위 75법이니, 5위 100법이니 하는 것이 없다. 5온 12처 18계니, 4성제 8정도 12인연도 없다. 3승 4과도 없다. 보살의 수행계위인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도 없다. 6바라밀, 10바라밀도 없다. 참선 염불도 없다. 간경 주력 기도도 없다.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인연 따라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다. 만약 산승의 소견이 틀린다고 생각이 들거든 맞는 길을 찾아서 알아서 살아라. 한국의 모든 선지식들은 이 정신 이 가르침이 좋아서 모두들 임제스님 밑으로 줄을 대고 있다.
儞諸方來者가 皆是有心이라 求佛求法하며 求解脫求出離三界하나니 癡人이여 儞要出三界하야 什麽處去오 佛祖是賞繫底名句니라 儞欲識三界麽아 不離儞今聽法底心地니 儞一念心貪은 是欲界요 儞一念心瞋은 是色界며 儞一念心癡는 是無色界라 是儞屋裏家具子니라 三界不自道我是三界요 還是道流의 目前靈靈地照燭萬般하야 酌度世界底人이 與三界安名하나니라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가 마음이 있다. 부처를 구하려고 하며, 법을 구하려고 하며,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어리석은 이들아! 그대들이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부처와 조사란 보기 좋은 올가미로 만든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니라. 이 삼계는 바로 그대들의 집속에 있는 살림살이들인 것이다. 삼계가 스스로 ‘내가 바로 이 삼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만물을 비추어 보고 세계를 가늠하는 그 사람이 삼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강의 ; 모든 사람들은 다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고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다 옳은 일이다. 그런데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삼계라는 것이 진실로 있기나 한가? 참으로 있어서 벗어나려 하는가? 가나오나 지금 있는 이 자리뿐인 것을. 동쪽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서방으로 간다지만 서방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어디로 가는가? 동쪽으로 오는가? 그대들이 참으로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대들 한 생각 탐욕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들이 곧 욕계, 색계, 무색계다. 이 삼계란 그대들의 집에서 쓰는 가구들이다. 삼계 25유(有)를 모두 그대들의 목전에서 역역한 그것이 이름 붙인 것이다. 온갖 만물을 살피고 온 세계를 헤아리는 바로 그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또 그대들이 오매불망 구하려고 하는 부처나 조사라는 것도 모두가 금이나 은 같은 그럴듯한 좋은 올가미를 만들어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에 불과하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말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가? 사람들을 얽어매기 아주 좋은 금과 은으로 만든 올가미다. 그 올가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여 속박을 당하는가.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도 올가미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올가미일 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대 해탈, 대 자유인이 곧 그대 자신이거늘 왜 올가미에 걸려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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