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5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7:06
 

시중52

14-30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2

大德

儞莫認衣하라

衣不能動이요

人能著衣하나니

有箇淸淨衣하며

有箇無生衣

菩提衣

涅槃衣하며

有祖衣有佛衣니라

大德

但有聲名文句하야

皆悉是衣變이라

從臍輪氣海中鼓激하야

牙齒敲磕하야

成其句義

明知是幻化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도 있느니라.

큰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로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옷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 나와서 이빨이 딱딱 부딪쳐 그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강의 ;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옷을 입는 것에 따라 달리 보인다.

도둑놈 사기꾼도 승복만 입고 있으면 수행하는 스님으로 알고 있다.

옷으로써 의식의 변화와 법을 쓰는 작용을 상징하여 말씀하신 것은 매우 뛰어난 발상이다.

선지식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법어가 아니다.

옷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불교의 여러 가지 고급스런 옷들을 걸어놓고 전을 편다. 가끔씩 입어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옷만 입고 있어도 실제로 그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으로 속는다.

눈이 없는 사람들은 곧 바로 사기를 당한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그 사람은 옷에 관계없이 늘 그 사람이며 차별 없는 참사람이다.

청정이니, 생사가 없느니, 보리니, 열반이니, 조사니, 부처니 하는 명칭을 일컫는 소리는 모두 옷에 불과하다.

그 소리들은 사람이 소리를 질러서 나오는 음성이다.

먼 하늘가에 메아리 되어 흩어지고 만다.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타지 않는다.

아무리 조사와 부처를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즉시 흩어지고 만다.

그보다 천만 배 수승한 말을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허망 그 자체다. 환영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있는 것은 있는가?

무위진인을 말하고 있으나 그 역시 옷이다.

본체는 공적한 것이다.

먼 하늘 가로 흩어지고 마는 메아리 일뿐이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잠간 존재할 뿐이다.

그 역시 환영이요, 환상일 뿐이다. 공이다.

원인과 조건이 효과가 있는 동안만 잠간 있는 듯 하다가 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본래 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위진인도 연기며 공이다. 공이며 연기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인 중도의 원리다.

大德

外發聲語業하며

內表心所法하고

以思有念

皆悉是衣

儞祇麽認他著底衣爲實解하면

縱經塵劫하야도

祇是衣通이라

三界循環하야

輪廻生死하나니

不如無事니라

相逢不相識하고

共語不知名이로다

“큰스님들이여!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안으로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며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그렇게 걸치고 있는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여긴다면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더라도 다만 옷에 대해서만 통달할 뿐이다.

삼계에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하게 되니 차라리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서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해도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강의 ; 생각하고 말하는 것 모두가 옷이다.

주의 주장과 사상과 개념이 모두 옷이다.

의식 사량 계교 분별이 모두 옷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에서 펼치는 모든 것이 옷이다.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헛일이다.

다만 옷에 대해서만 도통을 했을 뿐이다.

사량 분별과 세지변총(世智辯聰)만 발달해봐야 삼계를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할 뿐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로 만나도 알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연 알기나 하는 것인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실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알고 이치를 알고 진리를 알고 부처를 알고 조사를 알고 보살을 알고 나한을 안다는 것이 역시 그렇다.

다만 그와 같은 말과 외형을 따라 끝없이 윤회할 뿐이다.

불여무사(不如無事). 상봉불상식(相逢不相識). 공어불지명(共語不知名). 다시 음미해볼 말이다. 사유하고 반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