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55/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7:50
 

시중 55

14-33 眞佛, 眞法, 眞道

問, 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垂開示하소서

師云, 佛者

心淸淨是

法者

心光明是

道者

處處無礙淨光是

三卽一이니

皆是空名而無實有니라

如眞正作道人

念念心不間斷이라

“무엇이 참 부처며, 참 법이며, 참된 도인지 비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이란 마음이 밝은 것이며, 도란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이다.

이 셋이 곧 하나이니 모두가 헛이름일 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마음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

 

강의 ; 불교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이다.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부처도 만들고 조사도 만들고 보살과 아라한도 만든다.

부처니 법이니 도니 하는 여러 가지의 이름을 쓰고 있으나 그 또한 한 마음이다. 한 마음이면서 또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일체다.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한순간이 한량없는 시간이고,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순간이다.

먼 과거의 그 많은 오욕과 영광과 숱한 우여곡절들이 모두 지금 이 한순간이다. 끝없는 미래도 역시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한순간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 한순간의 이 마음밖에는 모두가 공이다. 무다. 없다. 마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없다. 모든 것은 없다.

진정으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궁극적 진리의 현현이며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보고 듣는 이 모든 것이 곧 진리의 현현이며 이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라는 사실이다.

自達磨大師

從西土來

祇是覓箇不受人惑底人이니

後遇二祖하야

一言便了하고

始知從前虛用功夫니라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오신 것은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뒤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곧 깨닫고 비로소 종전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강의 ;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뜻에 대하여 그 말이 분분하다.

오고 간 행적도 이야기 하려면 장황하다.

어떤 사람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하였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라고도 하였다.

임제는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달마는 2조 혜가(慧可)대사를 만났다.

혜가는 달마에게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가기 위해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찾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라는 말에 곧 바로 깨달았다.

알고 보니 종전의 공부가 헛된 공부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마음도 없는데 불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 혜가, 달마는 그런 혜가를 찾았다.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하니

若第一句中得하면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하면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하면

自救不了니라

“산승의 금일의 견해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만약 제 일구에서 깨달으면 할아버지 부처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이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과 천상계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삼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강의 ; 법어나 경문이나 기연(機緣)에 제 일구 제 이구 제 삼구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법어라도 듣는 사람이 받아드리는 데 따라 차별이 나눠진다.

경문이나 기연도 역시 그렇다.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도 역시 그렇다.

육조 혜능스님이 불교를 전혀 모를 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일이 있다. 마치 부드러운 흙 위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뚫어지도록 읽어도 깜깜 무소식이다.

마치 차돌위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다.

육조스님에게는 금강경이 제 일구가 되었다.

책이 뚫어지도록 읽은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제 삼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작은 한 소리의 “할”에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스피커를 틀어놓고 고막이 터지도록 “할”을 외쳐대도 깜깜 무소식인 사람이 있다. 

삼구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제 일구로 듣는 것은 마치 허공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이구로 듣는 것은 마치 물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삼구로 듣는 것은 마치 진흙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한 차이를 표현한 말이다.

도는 우주에 꽉 차있고 우리들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슨 흔적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