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5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3. 18:33
 

시중 58

14-35 밥값을 갚을 날이 있으리라

大德

山僧今時

事不獲已하야

話度說出許多不才淨하니

儞且莫錯하라

據我見處하면

實無許多般道理

要用便用하고

不用便休니라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오늘 부득이해서 쓸데없는 더러운 소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착각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실로 이처럼 허다한 도리는 없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하고 작용하지 않으면 곧 쉰다.”

 

강의 ; 임제스님은 자신이 부득이해서 이런 저런 소리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쓸데없고 더러운 소리들이다.

그 소리들을 주어모아 기록한 이 임제록도 역시 똥을 닦는 휴지에 불과하다.

여타의 무수한 경전 어록들이야 물어 무엇 하랴?

수많은 사람들이 남남거린 말들이야 물어 무엇 하랴?

왜 그런가?

그와 같은 허다한 도리가 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떠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그것에 의지하여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간경도하고 주력도하고 기도도하며 살아왔는데.

작용할 일이 있으면 곧 작용하고 작용할 일이 없으면 그대로 쉬면 된다.

볼 일이 있으면 보고, 들을 일이 있으면 들으라.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라.

사람을 만나면 대화를 나누고 혼자 있으면 그대로 있으라.

해는 뜨고 지고 계절은 오고 간다.

바람은 불고 멎고, 꽃은 피고 지고 한다.

지금의 필요한 인연을 따라 물이 흐르듯 살면 된다.

이것이 임제가풍이다.

한국불교는 모두가 임제가풍을 표방하고 있다.

또 그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랑으로 여긴다.

한국의 스님들은 목탁을 쳐서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는 축원을 들어보면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영원히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臨濟門中 永作人天之眼目].’라고 한다.

이것은 돌아가신 스님들을 빌 때 가장 요긴하고 핵심이 되는 축원문이다.

그만치 임제스님의 가르침과 그의 사상을 흠모하여 길이 이 세상의 눈이 되어 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든 스님들은 이 임제록에 있는 모든 가르침을 최상의 바른 법으로 숭상하여 따르고 실천해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요용변용(要用便用) 불용변휴(不用便休). 불교공부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것이 참선이다.

곧 사람 사는 일이다.

祇如諸方

說六度萬行하야

以爲佛法하나

我道是莊嚴門佛事門이요

非是佛法이니라

乃至持齋持戒하며

擎油不㴸하야도

道眼不明하면

盡須抵債하야

索飯錢有日在니라

何故如此

入道不通理하면

復身還信施하나니

長者八十一

其樹不生耳라하니라

“다만 제방에서는 육도만행을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장엄하는 것이고 불사를 짓는 일이지 불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계를 지키고 계행을 가지며,

기름이 가득찬 그릇을 들고 가도 출렁거리지 않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도를 보는 안목이 밝지 못하면 모두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으니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신도들의 시주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가 81살이 되자 그의 집에 있는 나무에서 비로소 버섯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강의 ;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불교가 권하는 여섯 가지 덕목은 승속을 막론하도 불자들이 실천해야할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장엄일 뿐이다.

불교를 위한 일거리[佛事]일 뿐이다. 그냥 해보는 모양새 갖추기다.

재계를 잘 행하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더라도, 삼천 가지 위의와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에 아무런 결손이 없더라도,

그리고 부처님 앞에서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이 아무리 빼어나더라도 도안(道眼)이 어두우면 모두가 빚을 짊어진 것이다.

언젠가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약간 옆길로 새는 이야기를 덧붙일까 하는데,

그렇다면 밥값을 따로 갚지 않아도 되는 육도만행과 불교를 위한 일은 무엇일까?

영명연수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부한 소리 같지만 보시를 하는 마음의 흔적 없이 보시를 하라.

계를 지키더라도 지키는 마음의 흔적 없이 계를 지키라. 등이다.

또 우리들의 몸은 텅 비어 없음을 보면서 몸을 단장하고 위의도 갖추고 화장도 아름답게 하라.

본래로 설할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닫고 설법을 하라.

사찰을 건립하되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고 하라.

등상불(等像佛)에게 꽃과 향과 과일 등 온갖 공양거리를 올리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환영이며 헛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올리라.

그림자요 메아리인 여래에게 공양 올리라.

죄란 그 성품이 텅 비어 없음을 알고 참회하라. 등등이다.

육바라밀과 불교의 제반 신행활동들을 중도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이며 공인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공이며 연기이며 중도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일체 사물과 일체 사건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중도의 원리에 맞게 육바라밀을 닦고 신행활동과 불사를 해야 된다는 뜻이다.

중도의 원리에 맞게 하면 따로 밥값을 갚을 일이 없다.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운운한 것은 제 15조 가나제급존자의 게송이다.

존자는 인도의 비라국을 찾았을 때 79세 된 장자와 그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수행하는 한 비구를 성의를 다해서 공양했다.

그 비구는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뒤에 그 장자의 집에 나무버섯으로 환생하여 그 장자가 81세가 될 때까지 계속 돋아나면서 공양 받은 빚을 갚았다고 한다.

또 그의 부인은 평소에 공양드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버섯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가나제급존자로부터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된 장자의 아들은 뒤에 출가 수행하여 제 16조 라후라다존자가 되었다.

금생에 마음의 도리를 밝히지 못하면 물 한 방울의 빚도 갚기 어렵다는 무서운 말도 있다.

그러나 불법을 잘 아는 사람은 하루에 일 만양의 황금 써도 다 녹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