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26 깨닫고 교화하는 일은 혼자서만으로는 될 수 없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09
26  깨닫고 교화하는 일은 혼자서만으로는 될 수 없다  묘희 종고(妙喜宗)스님 / 1089∼1163 
 

1. 담당스님은 옛 현인의 서첩(書帖)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예불하고 열어보았으며, 더러는 "앞 성인의 커다란 인격과 명성을 어떻게 차마 버려두겠는가"라고 하면서 돌에다 새기곤 하였다.
스님은 이토록 고상했기 때문에 죽는 마당에 단돈 열 냥을 모아놓은 것이 없고 다만 당송(唐宋) 모든 현인들의 저서 두 바구니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이에 납자들이 앞다투어 말을 전하여 돈 8만 냥을 모아 다비식을 도왔다. 『가암집(可庵集)』

2. 불성(佛性)스님이 대위산(大山)에 머물 때, 행자(行者)와 농부가 서로 치며 싸우는 것을 보고 행자만을 나무라자 문조 초연(文祖超然)스님이 한마디 하였다.
"농부를 놓아두고 행자만 꾸짖고 욕을 보이려 한다면 위 아래의 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소인이 그 틈을 타 업신여기고 태만하여 일이 진행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나 불성스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과연 소작인이 일 맡은 사람을 죽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암집(可庵集)』

3. 문조 초연스님이 앙산(仰山)에 머물 때, 지객(地客)이 절에서 일용할 곡식을 훔쳤다. 스님은 평소 지객(地客)을 의심해 왔으므로 그를 내보내려는 뜻으로 창고 맡은 행자〔庫子行者〕에게 그가 바쳤던 그 동안의 공납문서를 만들라고 하였다. 행자는 지객을 감싸주고자 스님의 의도를 살피고서 도리어 지객 소임에서 물러나는 문서를 만들라고 그에게 알려주고는 되돌아와 울부짖게 하였다. 그리고는 곡식 관리에 대한 책임 추궁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스님은 행자가 권세를 멋대로 한다고 노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죽비로 결단했을 뿐이다.
스님은 행자에게 은근히 속임수를 당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 - 아, 소인의 교활함이 이러하다.

4.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된 감정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인격이 트이고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야 그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옛날 원오스님이 운거산에 머물 때, 고암스님은 동당(東堂)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원오스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암을 싫어하였고, 고암스님과 함께 하는 자는 원오스님을 괴이하게 여겼다. 이렇게 하여 총림이 어수선해져서 원오 무리·고암 무리가 나뉘게 되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두 스님을 관찰해 보았더니 변두리까지 큰 명성을 떨칠 정도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애석하다, 소인이 아첨하는 말을 경솔하게 믿고 총명한 이를 혼란시켜 드디어는 식견있는 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도다. 이 때문에 양좌주(亮座主)*나 은산(隱山)* 같은 부류가 되어야 고상한 인재라 할 수 있다.
* 마조스님에게서 깨친 후 산에 숨어 살며 도를 간직했던 분들.

5. 옛사람은 선(善)을 보면 실천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쳤다. 덕을 닦아 실천하고 죄 면하기를 생각하여 허물이 없도록 했다. 또한 자기의 단점을 모르는 것보다 심한 병통이 없으며, 자기 허물에 대해 충고 듣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훌륭한 장점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긴 하나 어찌 옛사람이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고 식견이 분명하질 못하여 그렇게 했겠는가. 실로 자신의 잘난 점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후학에게 경계를 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광대한 총림과 세상의 많은 무리들을 혼자서 다 알 수는 없다. 반드시 좌우의 이목과 사려를 의지해야만 극진한 이치를 깨닫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다.
혹은 자기만 높은 체하면서 자잘한 일에 엄격하고 큰 일은 소홀히 하며, 훌륭한 사람인지 어질지 못한 자인지도 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릇된 일도 고칠 줄 모르고 옳은 일은 따르지 않으며 미친 듯이 제 뜻대로만 하면서도 거리낌 없다면 이것이 실로 재앙의 기반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혹 좌우에 물어 볼 만한 사람이 없다 해도 옛 성인을 본받으면 될 것이니, 마치 튼튼한 성벽, 날랜 군사로 지키는 것처럼 들어갈 틈이 없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이른바 모든 시냇물을 받아들여 바다를 이룬다고 하는 큰 도량이 못된다. 『여보화상서(與¿和尙書)』

6. 곳곳에서 큰스님〔長老〕을 추천하려면 반드시 도를 지키며 담담하게 물러나 있는 자로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추천하면 지조와 절개가 더욱 견고하여 가는 곳마다 절 물건을 축내지 않고 총림의 일을 해내며, 또한 법을 주관하는 자로서 오늘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런데 아첨하는 교활한 무리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높은 사람에게 가서 붙기도 하고 권력 있는 집과 결탁하기도 하니, 하필 그런 사람을 추천하려 하는건지……

7. 묘희스님이 초연거사(超然居君)에게 말하였다.
"모든 일에 대중의 여론을 폐지해서는 안됩니다. 시행되지 못하도록 억누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론일진대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총림에서 도 있는 인재를 하나 추천하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칭찬하고, 혹 한번이라도 진실치 못하고 합당하지 않은 자를 추천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근심스럽게 탄식을 하니, 이는 실로 다름이 아니라 공론(公論)이 시행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 - 아, 이로써 총림의 성쇠를 점칠 수 있겠다. 『가암집(可庵集)』

8. 단속〔節儉〕과 자재〔放下〕는 자기를 닦는 기반이며, 도에 들어가는 요체이다. 옛사람을 쭉 관찰해 보았더니 이러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 요즈음 납자들은 형초(荊楚)에 유람하면서 갖가지 이불을 사들이고 절강(漸江) 가를 지나면서 비단을 구하니,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9. 고덕(古德)들은 주지를 하면서 상주물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모두 일 맡은 자에게 일임했다. 그런데 근래의 주지하는 자들은 재력을 믿고서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조리 방장(方丈)으로 되돌려 버린다. 그리하여 일을 맡은 사람은 부질없이 헛된 이름만 있을 뿐이다.
슬프다, 구차하게 제 한 몸 편하자고 굳이 온 절의 일을 쥐고 흔들면서, 소인에게 속지 않고 기강의 문란없이 지당하고 공평한 의론에 맞기를 바라나, 어렵지 않겠는가.[여산당기(廬山堂記)]

10. 양(陽)이 다 되면 음(陰)이 생기고 음이 끝간 데서 양이 생기니, 성쇠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천지 자연의 운행법칙이다. 형통하다는 뜻을 가진 풍괘〔豊亨:〕는 한낮〔日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해가 정오가 되면 기울고, 달도 가득 차면 이지러진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듯 천지의 가득 차고 이지러지는 것도 시절에 따라 꺼지고 불어나니, 더구나 사람의 경우이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혈기가 한창일 때 세월이 쉽게 가버림을 염려하여 아침저녁으로 반성하고 삼가하여 더욱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감정과 욕구를 멋대로 하지 않고 도만을 구하여 드디어는 명예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방일한 욕구에 떨어지고 방자한 감정으로 잘못되어 거의 구제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 그제서야 팔다리를 걷어붙이며 돌이키려 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기회란 만나기는 어려워도 놓치기는 쉽기 때문이다. 『임향서(林書)』

11. 옛사람은 우선 도 있는 이를 선택하고, 다음으로 재주와 학문 있는 이를 추천하여 필요한 시기에 등용하였다. 그런데 실로 쓸만한 그릇이 아닌데도 자기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자에겐 주위 사람이 천박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납자들이 명예와 절개를 가다듬어 남 앞에 설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총림이 시들고 상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더니 납자들이 도덕은 돌아보지 않고 절개와 의리를 좀스럽게 여기며 염치를 무시하는 한편,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을 촌스럽다 나무라고, 들떠서 떠들어대는 사람을 빼어나고 민첩하다고 부추기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후배들이 식견이 분명하질 못하여 대강 한 번 훑고 남의 이론 베낀 것을 말재주나 채우는 밑천으로 삼는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하여 드디어는 얄팍한 풍조를 이루었다. 
더구나 성인의 도에 대해 대화하는 데 있어서는 깜깜하기가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도 같으니, 거의 구제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여한자창서(與韓子蒼書)』

12. 옛날 회당스님이 황룡스님의 『제명기(題名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옛날 납자들은 바위굴에 거처하며 풀뿌리를 먹고 풀껍데기를 입고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관부(官府)에는 이름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위(魏)·진(晋)·제(齊)·양(梁)·수(隋)·당(唐) 이래로 비로소 절을 지어 사방의 납자를 모으고서 훌륭한 사람을 선택하여 못난 이를 바로잡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를 이끌어주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손님과 주인이 있게 되었고, 상하의 질서가 나뉘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한 절에 모여들었으니,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은 실로 잘 해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큰 문제는 잘 다루고 자잘한 것은 버리며, 급한 일부터 하고 덜 급한 일은 뒤로 돌려 사사로운 계책을 꾸미지 않고 오로지 대중을 이롭게 하는 데에 요점을 두었던 것이니, 요즈음 허둥지둥 한 몸만을 도모하는 자와는 실로 천지차이였다.
지금 황룡스님께서 뒷날 보는 자들이 하나씩 지목해 가며 `어느 스님은 도덕이 있었고, 어느 스님은 인의(仁義)가 있으며, 누구는 대중에게 공정하였고, 아무개는 자기만을 위하였더라'할 수 있도록 역대 주지의 이름을 돌에다 새겨 놓았으니, 아 - 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석각(石刻)』

13. 시랑(侍郞)인 장자소(張子韶)가 묘희스님에게 말하였다.
"선림에서 수좌라는 직책은 훌륭한 사람을 선발하는 지위입니다. 그러나 지금 총림에서는 잘난 이, 못난 이 할 것 없이 으례 이것을 요행을 바라는 미끼로 여기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주지의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상법·말법 시대엔 실로 그 적임자를 만나기 어렵다 하겠읍니다. 가령 그 행동이 보다 우수하고 인격과 재주가 더욱 갖추어져 염치(廉恥)와 절의(節義)를 아는 자를 그 자리에 앉게 한다면 약간은 나아질 것입니다." 『가암집(可庵集)』

14. 묘희스님이 자소에게 말하였다.
"근대의 주지로는 진여 모철(眞如慕喆)스님만한 이가 없고, 총림을 보필하는 자로는 양기(楊岐)스님만한 이가 없다. 또한 알 만한 사람들은 자명(慈明)스님의 진솔(眞率)함에 대해 `하는 일은 소홀하였으나 전혀 꺼리고 숨기는 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양기스님은 자기 몸을 잊고 그를 섬기면서 빠진 일은 없을까, 혹은 완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심한 추위나 더위에도 자기의 급한 일로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남원(南源)에서 시작하여 흥화(興化)에서 마치기까지 근 30년 동안 자명스님의 세대가 다할 때까지 기강을 총괄하였다.
진여스님의 경우는 처음 보따리를 싸들고 행각하면서부터 세상에 나가 대중을 거느릴 때까지 주리고 목마른 사람보다도 더 법을 위해 자신을 잊고 지냈다. 아무리 급한 경우라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말을 정신없이 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않았고,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 방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책상에는 먼지가 가득하였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납자가 안으로 고명한 지혜와 넓은 안목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좋은 도반이 없다면 큰 인물 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당시에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고집스럽기는 영부 철각(永孚鐵脚)스님과 같았고, 굽히지 않기로는 수원 통(秀圓通)스님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그의 풍모만 바라보아도 바람에 풀이 눕듯 하였던 것이다.
아 - 아, 이 두 노스님은 천년에 한 번도 있기 어려운 납자의 귀감이라 하겠다." 『가암기문(可庵記聞)』

15. 자소와 묘희·만암도안(萬菴道顔:1094∼1164) 세 스님이 함께 앞채 수좌 오본(悟本)스님에게 문병을 갔다. 묘희스님이 "수행자라면 몸이 편안해야지 도를 배울 수 있다"라고 하자, 만암스님은 곧바로 "그렇지 않다. 꼭 도를 배우려 한다면 몸 따위를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반박하였다.
묘희스님이 말하였다.
"이런 꼭 막히고 틀어진 사람 보게나."
자소는 묘희스님의 말을 소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끝내 만암스님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아끼게 되었다. 『기문(記聞)』

16. 자소가 묘희스님에게 물었다.
"지금 주지는 무엇을 우선해야 합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납자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은 재정문제를 잘 관리하면 될 뿐이다."
그때 만암스님이 좌중에 있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상주물의 소득을 계산하여 불필요한 경비를 잘 조절하고 그것을 쓰는 데 도가 있으면 돈과 곡식은 이루 세지도 못할 것이니 뭘 그다지 염려하겠는가? 그렇다면 현재 주지는 도를 간직한 납자를 얻는 것을 우선해야 할 뿐이다. 설사 주지가 지모(智謀)가 있어 10년 먹을 양식을 비축할 수 있다 해도 이 자리에 도를 간직한 납자가 없다면 옛 성인이 말씀하신 `앉아서 신도들의 시주만 소비하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라고 한 것이니, 주지에게 무슨 도움이 되랴."
자소는 말하였다.
"수좌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묘희스님은 만암스님을 되돌아보며 말하였다.
"모두가 그럴 듯한 얘기로군."
그러자 만암스님이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