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서촉의 수좌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4:05

“티끌 속에 우주 녹아있어”

 

중중무진 화장세계 상징 ‘옥돌’

돌멩이 아닌 보배로 봐야 ‘선법’

 

서촉의 어떤 수좌가 백마화상을 참방하여 화엄의 교학에 대하여 물었다. “한 티끌이 법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백마화상이 말했다. “그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지.” 그러자 수좌가 말했다. “선문에는 특별히 기특한 것이 있다고들 말하던데 알고보니 그것도 교학을 벗어나지는 못하는구료.” 그리고는 마침내 마을로 돌아가버렸다.

 

수좌는 후에 협산선회 선사의 도가 높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제자를 보내서 이전의 백마화상과 있었던 일화를 묻도록 시켰다. 그러자 협산선회가 말했다. “모래를 조각하는 것으로는 옥을 조각한다고 말할 수가 없고, 초막을 짓는 것으로는 도인을 생각할수도 없다.” 그 제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자 수좌는 마침내 선법의 도리를 수긍하고 선법의 뜻을 참문하였다.

 

백마화상은 남전보원(748~834)의 법을 전승한 백마담조(白馬曇照)로서 용아거둔(835~923)에게 선법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협산선회(805~881)는 석두희천 - 약산유엄 - 화정덕성의 법을 계승한 선자이다. 경론과 삼학에도 달통하였으며 선자로서 조동종의 가풍을 크게 떨친 인물이다.

 

서촉에서 온 수좌는 화엄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화엄의 도리에 대하여 의기양양하였다. 그런데 선사들의 경우 어떤 대단한 경지를 가르쳐준다기에 의도적으로 백마화상을 찾아가 법거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같은 일화는 교학자와 선자들 사이에 늘상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분별심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출발부터 어그러지고 만다. 선자는 그와 같은 교학자의 입장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때문에 언제나 처음부터 그 결과는 뻔한 게임일 뿐이다.

마침내 백마를 참방하여 화엄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도리를 질문하였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진부한 답변을 듣고는 실망하고 말았다. 각자 자신의 깜냥만큼만 진리를 파악한다는 말이 있다. 새의 두 날개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백마의 답변은 참으로 완전무결하고 더없이 훌륭한 도리를 상찬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좌는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 백마의 답변을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옥돌을 보배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에 협산선회의 명성을 듣고는 백마에게 질문했던 똑같은 질문을 그것도 제자를 시켜서 묻도록 하였다. 그러나 협산은 백마와는 달랐다. 백마는 은근히 상징적인 답변만 제시해 준 것으로 지극히 온유하였지만 협산은 질문자의 의표를 찌르면서 비웃어주는 수단을 발휘하였다. 모래를 조각하는 하찮은 재주를 가지고 감히 옥돌을 조각하는 예술가의 도를 넘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옥돌은 중중무진한 화장세계를 상징한다. 또한 도인의 흉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행하는 총림을 가리킨다. 때문에 몇 푼어치도 안되는 알량한 교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커다란 도의 세계를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아주 검소하게 초막을 지어놓고 안빈낙도하는 도인의 흉내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암자만 지어두면 명성이 높은 선사들처럼 도속이 모여들 것이라는 생각일랑은 과대망상일 뿐으로 감히 흉내조차 내자 못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수좌는 그와 같은 법담을 전해듣고는 마침내 크게 참회하면서 마음을 바꾸었다. 자신이 터득했다고 자신하던 화엄의 안목으로 세상을 저울질하던 태도를 버리고 직접 협산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서촉의 수좌는 이전에 교학을 맹신하던 수좌가 아니었다. 하나의 티끌속에 우주가 녹아있다는 도리를 선법의 체험을 통하여 맛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교학적인 지식과 그 교학의 체험이 마치 새의 두 날개처럼 그리고 수레의 두 바퀴처럼 어느 것 하나라도 부실하다면 온전히 운행할 수 없음을 알고는 완벽하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도리를 깨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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