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염관과 화엄학승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4:04

“분별은 송장의 꿍꿍이속 같아”

 

<화엄경>을 강의하던 승이 염관제안 선사를 참문하였다. 제안이 물었다. “화엄경에는 몇 가지 법계가 있는가.” 승이 말했다. “간략하게 설하면 네 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설하면 중중무진입니다.” 제안이 불자를 세우고 말했다. “이 불자는 몇 번째 법계에 속하는가.” 승이 양구하자 제안이 말했다. “분별하여 알고 따져보아 해석하는 것은 무덤에서 송장이 하는 꿍꿍이속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태양 앞의 등불과 같아서 곧 빛을 상실하고 만다. 썩 나가거라.”

 

염관제안(?~842)은 마조도일의 제자로서 속성은 이(李)씨이고 강소성 사람으로 당나라 황실의 인척이다. 운종선사에게 출가하였고 지엄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남강의 공공산으로 마조를 참방하여 그 법을 계승하였다. 만년에 강소성의 법흔(法昕)의 청을 받아 크게 선풍을 진작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에는 분주부업이 있고 남방에는 염관제안이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여기에서도 화엄교학을 강의하던 승이 등장하고 있다. 이 무렵에 교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던 화엄의 법계를 언급하여 선법과는 다르다는 차별화 전략은 비일비재한 주제였다. 해동에 남종의 선법을 처음으로 전래하였던 도의선사의 경우도 지원승통과의 법계에 관한 문답을 통하여 선법의 뛰어남을 강조했던 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화엄의 법계설은 연기론의 교설로서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연기론과 실상론으로 구분해왔다. 연기론은 모든 현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현상생기의 원인을 탐구하는 교리이다. 실상론은 이미 생기한 현상세계에 대하여 그 가치를 비판하는 교리이다.

 

마조도일의 법맥 계승한 염관

“우주법계=연기의 도리”설파

연기론에도 업감연기론, 아뢰야연기론, 진여연기론, 법계연기론, 육대연기론 등이 있다. 업감연기론은 업력에 의하여 일체의 만유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 업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행위를 인하여 형성되는 선악에 의하여 현상의 차별이 생기한다는 주장이다. 아뢰야연기론은 제팔아뢰야식이 일체의 현상을 생기하는 본원(本源)이라는 주장이다.

 

그 제팔아뢰야식은 선천적으로 일체현상을 생기하는 본유종자가 있고,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신훈종자가 있어 두 종자의 화합에 따라 활동이 일어나는 곳에 일체의 현상이 생기한다는 것이다. 진여연기론은 일체의 현상에 공통하는 진실불변의 체성을 상주진여를 설정한다. 이 정적인 상주불변의 진여 곧 물이 동적인 작용 곧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파도의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법계연기론은 일체의 현상은 평등하여 진여 그 자체의 현성이므로 낱낱의 현상이 상호간에 관계하여 일대우주를 구성하므로 그간에는 어떤 우열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즉일체이고 일체즉일로서 중중무진의 관계이므로 법계연기를 무진연기라고도 한다. 육대연기론은 지.수.화.풍.공.식의 육대요소는 전우주에 편재하여 일체의 현상을 조작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육대가 곧 대일여래의 본체이기 때문에 일체만유는 육대로부터 생기 내지 대일여래의 현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을 인격적으로 전개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언급된 간략하게 설한 4종법계는 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로서 화엄종의 두순과 청량의 체계적인 설명이 있다. 나아가서 자세하게 말하자면 온 우주법계의 존재가 그대로 가없는 연기의 도리로서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토록 치밀한 교설의 구조도 사려분별을 통한 지혜라면 무심법의 입장에 있는 조사선법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나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분별사식은 마치 무덤속의 송장처럼 아무런 지혜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국집하는 견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제안선사는 불자를 내세워 선법의 도리가 교학의 언설을 초월하여 직지인심하는 것임을 지적하자 승이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승은 정녕 선법의 도리를 알아들었을까.

 

현각스님 / 동국대 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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