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2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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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2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모든 부처의 경계는 고요하고 중생의 경계는 비었거늘 무슨 인연이 있기에 교(敎)의 자취를 일으키는가?
  [답] 하나의 실제(實諦) 안에는 비록 일어남과 다함[起盡]이 없다손 치더라도 방편의 [문]안에는 큰 인연이 있다.
  때문에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는 “모든 법은 항상 성품[性]이 없으며/부처 종자[佛種]는 인연으로부터 일어난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언제나 성이 없되 성이 공(空)하지 아니함이 없을 때에 저절로 능히 인연을 따르며 인연을 따르되 성(性)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또 교(敎)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인연이 한량없다. 고덕(古德)이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저절로 그러하기[法爾] 때문이요, 둘째는 서원의 힘[願力] 때문이요, 셋째는 근기로 받아들이기[機感] 때문이요, 넷째는 근본[本]이 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덕을 드러내기[顯德] 때문이요, 여섯째는 지위를 나타내기[現位] 때문이요, 일곱째는 개발(開發)하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보고 듣기[見聞] 때문이요, 아홉째는 행을 이루기[成行] 때문이요, 열째는 과위를 얻기[得果] 때문이다.
  이제 여러 보살들이 찬집한 『유식론(唯識論)』 등에는 대의(大意)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온갖 법의 바른 종[正宗]을 통달하여 이공(二空)의 삿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둘째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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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해탈(解脫)과 보리(菩提)의 문을 증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곧 스스로가 법의 근원을 증득하여 본래 깨달음의 참된 자리요 문자와 글귀 뜻을 펴 들날리는 데 있지 않으므로 이제 뒤의 학인으로서 도(道)를 사모하는 사람을 위하여 방편으로 책을 엮는 것이다.
  또 스스로도 두 가지의 뜻이 있으며 그로써 본래의 품은 생각임을 표시하였다.
  첫째는 간략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 가장 요긴하고 종요로운 것만을 추려서 확실한 뜻을 자세히 알게 하면서 번거로운 글을 보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한곳에 합하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면 따로따로의 이치에 밝지 못하므로 미세하게 열고 펴서 성상(性相)을 뚜렷이 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두 가지 생사(生死)의 뿌리를 싣고 한맛의 보리(菩提)의 길을 밟으면서 뭇 경전의 큰 뜻을 우러르면 바로 제 마음을 깨닫고 모든 성인의 은밀한 말씀을 따르면 단번에 깨달음의 곳간[覺藏]이 열리리라.
  저 남을 의지해서 통하려는 소견을 버리고 그 삿된 집착의 정(情)을 깨뜨리며 깊이 바른 종[正宗]을 믿어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고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廻光返照] 심성을 보고 글을 따르지 않게 한다.
  증득해야만[證] 상응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므로 멋대로 지해(知解)를 내어 소견의 강물에 빠지거나 얻음이 없는 관[無得觀] 안에서 취향(趣向)의 뜻을 품거나 참으로 공한 이치[眞空理] 지위에 나아가서 취사(取捨)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소견을 따르면 뒤의 학인을 깨치게 하는 데에 의심스러우니, 모름지기 친히 견성(見性)하여야 비로소 이 종지[宗]를 환히 안다.
  [문] 이미 손가락에 고집하고 글을 따르는 것을 염려하면서 또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교(敎)를 모으는가?
  [답] 자기를 저버리고 티끌에 합하며 글과 함께 이해[解]를 짓는 이가 가르침에 막히고 뜻에 걸릴까 해서 짐짓 이런 설명을 한다. 만약 언어를 따라 뜻을 알고 곧 교(敎)로 마음을 밝히는 이라면 무슨 취사(取捨)가 있겠는가?
  그 까닭에 장 법사(藏法師)가 이르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교(敎)를 찾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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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서 참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理]와 교법[敎]에 걸림이 없다”고 했다. 언제나 도리를 관찰하면서 교법을 지니는 데에 걸리지 아니하고 항상 외우고 익히면서 공(空)을 살피는 데에 걸리지 아니하면 도리와 교법이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관(觀)을 이루게 되며 그제야 구경이므로 전하여 유통시킬 뿐이다.
  이야말로 교법과 관이 일여(一如)한 것이며 설명하는 뜻의 근원이 같은 것이다.
  [문] 여러 큰 경론에 스스로 조각조각 이루어져서 과목의 마디와 차례며 글귀의 뜻이 분명하거늘 어째서 간추린 기록과 넓은 글을 빌려서 그 요략(要略)을 이루는가?
  [답] 교법의 바다는 크고 깊은지라 그를 궁구해도 그의 끝을 모르며 이치의 하늘은 높고 넓은지라 그를 우러러도 그의 끝[邊] 얻지 못하므로 이제 대통[管]으로써 하늘을 엿보고 소라로써 바닷물을 풀 뿐이다. 마치 큰 바다[滄溟]에서 물방울을 움키는 것과 같고 태화(太華:華山)에서 하나의 티끌을 잡는 것과 같다.
  본래는 뜻이 넓어서 두루하기 어려운지라 뜻에 싫증내고 게으름 피우는 이를 위해서요, 또한 일승교(一乘敎)의 바른 도리에 의하지 않는 이를 위해서이다.
  다만 불요의(不了義)의 인연을 따르고 횡수(橫豎)의 문을 궁구함이 거의 없으며 일어남과 다하는 곳을 모르므로 그 까닭에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기이한 것은 선방하며 묘한 것은 채취하고 깊은 것은 찾았다. 비록 글은 부족하다 해도 큰 뜻은 온전하며 인연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른 도리는 밝다.
  일승(一乘)의 뜻을 다 더듬고 온갖 법의 근원을 긁어서 열며 반야(般若)의 현묘한 핵심[玄樞]을 위하고 보리(菩提)의 요점이 되는 길[要路]을 지으면 양식이 쉬이 마련되어 빨리 대승에 이를 것이요 의심 없는 데에 증득하여 들어서 멀고 좁은 길을 면하게 되리라.
  그 까닭에 마명(馬鳴) 보살이 『기신론(起信論)』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혹 어떤 이는 자신이 지혜 힘이 없는지라 남의 자세한 이론으로 인하여 뜻을 알게 되는 이가 있기도 하고, 또한 자신이 지혜 힘이 없는지라 자세한 설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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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워하고 간략한 이론을 듣기 좋아하면서 광대한 뜻을 껴잡아 바르게 수행하는 이가 있기도 하다. 나는 지금 그 최후 사람을 위하여 간략하게 여래의 가장 훌륭하고 심히 깊은 그지없는 뜻을 거두어서 이 논(論)을 짓는다”라고 한 것이다.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짐짓 이 논을 설명한다. 첫째는 여래의 위없는 법이 오랫동안 세상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평등하게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또 여래의 감로법인 거룩한 가르침[聖敎]이 이미 숨어 없어진 이에게는 기억하고 잡아 모아서 거듭 열어 드러내기 위해서며, 아직 숨어 없어지지 않은 이에게는 문답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면 배나 더 흥성하기 때문이다. 또 간략한 언론을 원하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이를 거두어 뭇 경전의 넓고 요긴한 법의 뜻을 잡아 모아서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 기록은 비록 광대하게 만들어진 공은 없다손 치더라도 작으나마 한 시기에 이루어진 저술로의 공은 있으며, 또한 베껴 기록한 앞뒤의 문세(文勢)가 온전하지 아니함을 알거니와, 바라는 바는 바로 요긴한 설명을 취하여 종지(宗旨)를 밝게 하는 것이니, 마치 돌에서 옥(玉)을 가리는 것과 같고 모래를 헤쳐 금을 가리는 것과 같다.
  저 많은 약(藥) 가운데서 아타(阿陀)의 묘한 것만을 취하고 뭇 보물 안에서 여의주(如意珠)를 더듬으며, 하나를 들어 모든 것을 감싸 근본으로써 끝을 껴잡으면 한마디 말도 거의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설명은 다르나 다시는 다른 길이 없다.
  또한 뒤의 어진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비웃거나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요, 바라는 바는 의심을 끊고 믿음을 내게 하는 것이니, 오직 견도(見道)를 품을 뿐 헛된 이름을 따르면서 세상의 명예를 맞이하지 말 것이다.
  소원은 미래의 세상이 다하도록 두루 법계(法界)의 안을 궁구하고 겁(劫)을 지나며 더욱 더 살면서 언제나 이 도를 넓히는 것이요, 마음이 있는 이면 모두 이 종(宗)에 들게 하여 집착을 버리고 의심을 없애면서 보고 듣는 것에 이익을 얻게 하며 3보(寶)의 힘으로 가피(加被)와 호지(護持)를 입어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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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널리 함식(含識: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다.
  허공이 다할지언정 이 소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요, 법계가 끝날지언정 이 글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문] 요의 대승(了義大乘)은 자세함과 간략함이 두루 갖추어져서 하나의 뜻을 알면 원통(圓通)의 소견이 갖추어지고 한 게송을 들으면 성불(成佛)의 공이 있거늘 어째서 저술을 빌어 오히려 번거롭게 해석하는가?
  [답] 상상근(上上根)의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치며 성상(性相)이 한꺼번에 바르게 되고 이사(理事)가 함께 뚜렷하거니와, 만약 중간과 아래의 무리라면 모름지기 열어 펴는 것을 빌려야 한다.
  장엄(莊嚴)의 도와 찬식(讚飾)의 문은 그 공을 헤아림에 미쳐서는 비유로도 할 수 없다. 그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는 “마치 우담발라 꽃[優曇華]은 모두가 다 사랑하고 좋아하지만/천상과 인간에 있기 드[문]바라/간간이 이에 한 번 피는 것 같네./법 들으면 기뻐하고 찬탄하거나/그리고 한 마디의 말을 하기에 이르면/이는 곧 온갖 3세(世)의 부처님께/이미 공양을 한 것이 되는지라/이 사람이야말로 심히 희유(希有)하여/우담발라 꽃보다 훌륭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반야경』의 게송에서는 “반야는 무너짐이 없는 모양이라/온갖 언어를 벗어난 것이요/나아가되 의지할 바 없는 것이라/누가 능히 그의 덕을 찬탄하리오./반야는 비록 찬탄할 수 없으나/나는 이제 능히 찬탄할 수 있으며/비록 아직 죽는 자리 벗어나지 못했으나/이미 벗어날 수 있게 되었네”라고 하였다.
  또 고성(古聖)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로서 논(論)을 짓는다면 경을 장엄하는 것이라 하겠으나,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비록 기쁨을 낸다 하더라도 이지 펴서 향기가 자욱한 것보다는 못한 것과 같고, 마치 금을 아직 쓰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비록 더 기쁨을 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장엄구(莊嚴具)를 만든 것보다는 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敎)를 넓히려는 한 생각의 착함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은혜를 능히 갚겠다는 것인 줄 알 것이다. 희유한 것을 논함은 마치 꽃에 우담발라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이는 것과 같고, 빛나고 드러나는 것을 말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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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금으로 장신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보살은 대승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여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 깊은 의심을 끊고 뚜렷한 믿음을 이루게 하는 것이니, 법의 이익이 어찌 다 하겠는가? 그 공덕도 그지없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하였다.
  “‘교시가(憍尸迦)야, 섬부주(贍部州)의 모든 유정들은 차치하고라도 4대주(大洲)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소천(小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중천(中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대천(大千)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거나, 다시 시방(十方)의 각각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의 모든 유정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에서 불퇴전(不退轉)을 얻고 같이 말하기를 는 이제 즐거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빨리 증득하여 유정(有情)들의 나고 죽는 뭇 고통을 구제하여 훌륭하고 마지막인 안락을 얻게 하겠다>고 한다고 하자. 어떤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 등이 그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심오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써서 온갖 보배로 장엄하고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널리 그들에게 보시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이치대로[如理] 생각을 잘하고 환히 통하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선남자와 선여인 등이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얻는 복이 많겠느냐?’
  하늘 제석(帝釋)이 말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심히 많습니다. 선서(善逝)이시여.”
  그때 부처님께서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써서 온갖 보배로 장엄하고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그 대중 안의 어느 한 사람에게 보시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이치대로 생각을 잘해서 환히 통하게 하되, 무량문(無量門)의 교묘한 글 뜻으로써 널리 그를 위해 해석하며 뜻을 분별하여 그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고 가르쳐 주며 가르쳐 경계하여 부지런히 닦고 배우게 하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 등이 얻게 되는 복 무더기는 앞의 것보다 아주 많아서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헤아릴 수조차 없느니라.’”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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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남자야, 일천제(一闡提)를 제외한 그 밖의 중생들이 이 경을 듣고 나서 모두 다 보리의 인연을 능히 지어서 법의 음성과 광명의 털구멍에 들어가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여야 비로소 『���대열반경』을 들을 수 있게 되며 박복한 사람이면 들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종경(宗鏡)에 기록된 바 한 마음의 실상(實相)인 상주 법문(常住法門)을 듣게 된다면, 모두가 전생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일찍이 부처님의 모임을 가까이 한 것인 줄 알 것이니, 아주 큰 일이요 작은 인연에 속한 것이 아니며, 만약 아직 들었거나 훈습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만날 까닭이 있겠는가?
  또 『대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항상 마음을 잡아맨다[繫心]고 하는 이 두 가지 글자를 닦아야 하나니, 부처는 여기에 항상 머무느니라. 가섭아,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두 글자를 닦으면 이 사람은 나의 행한 바를 따르고 내가 이르는 곳에 이르게 되는 줄 알아야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법을 믿는 사람은 범부이면서 그대로 성인인지라, 닦아 지님이 합치되어 부처님께서 머무르던 그 안에서 머무르고 나아가고 그쳐 그 거동이 부처님께서 가시던 자취를 간다.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말하였다.
  “첫째는 의심을 여읜 믿음을 드러내어 공덕에 드는 문[顯離疑信入功德門]이니, 어떤 중생이 이 마하연(摩訶衍)의 심히 깊고 극히 묘하고 광대한 법문을 들은 뒤에 곧 그 마음 안에서 의심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비방하지도 않으면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고 견고한 마음을 내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고 좋아하며 믿는 마음을 낸다면, 이 사람은 진실한 부처의 제자로서 법(法)의 종자를 끊지도 않고 승(僧)의 종자를 끊지 않고 불(佛)의 종자를 끊지 않으면서 언제나 계속하여 차츰차츰 더욱 자라고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부처님에게서 친히 수기(授記)를 받게 되고 또한 온갖 한량없는 보살들에게서도 보호하고 생각함을 받는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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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들은 뒤에 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결정코 부처 종자를 이을 것이요, 반드시 모든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받게 될 줄 알아야 한다.
  또 “둘째는 비교하여 다스리면서 훌륭함을 보이는 문[比類對治示勝門]이니,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찬 중생들을 잘 거두어 교화하여 모두 남음 없이 열 가지 선행[十行]을 하게 한다 하자. 혹은 어떤 중생들이 한 끼의 밥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이 매우 깊은 법을 관찰하고 헤아린다고 하자. 만약 이 두 사람의 공덕을 비교하여 헤아리면, 그 첫 번째 사람이 얻게 되는 공덕은 아주 적어서 마치 겨자씨를 부순 2백 분의 1과 같고, 이 두 번째 사람이 얻게 되는 공덕은 아주 넓고 커서 마치 시방세계의 작은 티끌을 부순 수의 분량과 같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찬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행을 하게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한 끼의 밥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이 법을 바로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며 앞의 공덕보다 뛰어나서 비유할 수조차 없다.
  또 “셋째는 받아 지니는 공덕을 들어서 찬양하는 문[擧受持功讚揚門]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논(論)을 받아 지니어 이치를 관찰하되 하루 낮이거나 하룻밤 동안이거나 하면 얻게 되는 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말할 수조차 없고 헤아릴 수조차 없으므로, 가령 시방 3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시방 3세의 온갖 보살들이 시방 3세의 작은 티끌 수 같은 혀로써 각각 모두 다 시방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아 말로 다할 수 없는 겁(劫) 동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 공덕을 찬양하여도 다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법신진여(法身眞如)의 공덕은 허공의 경계와 같아서 갓[邊]과 끝이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범부와 이승(二乘)의 사람으로서야 그를 찬탄할 수 있겠는가? 하루 낮ㆍ하룻밤보다 많지 않은 동안을 받아 지녀도 오히려 얻는 바 공덕이 불가사의하거늘, 하물며 2일이거나 3일이거나 4일이거나, 내지 백 일 동안을 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며 생각하고 관찰한다면 그 불가사의는 불가설(不可說) 안의 불가설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다시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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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하루 낮ㆍ하룻밤을 관찰하고 수행하면 모든 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말할 수조차 없다. 가령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각각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겁(阿僧祇劫)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하여도 다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법성(法性)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이 사람의 공덕 또한 그러하여 갓과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의 종[心宗]을 믿으면 마하연(摩訶衍)이 이루어져서 3세의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바와 같으므로 그 의리(義理)를 어찌 다하랴? 시방 보살이 탄[乘] 바와 같아서 공덕이 그지없다.
  이 오묘한 교화를 만나서 경사스러운 일이 한층 더 깊으리니, 부처님의 뜻을 따르면서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은 법을 넓히는 것보다 우선이 없으며 불일(佛日)을 밝히면서 불안(佛眼)을 뜨는 것은 다만 마음을 밝힘에 있을 뿐이다.
  이 종경(宗鏡) 안에서 한 글귀라도 영묘한 지경에 들어가면 겁(劫)을 지나면서 종자가 되겠거늘, 하물며 바로 오묘함을 말하고 뭇 경전을 하나로 모음이겠는가? 이 하나야말로 무량(無量) 중의 하나이다.
  만약 이 법에 물이 들면 이는 곧 원돈(圓頓)의 종자이니, 단 이슬이 정수리에 들어가고 제호(醍醐)가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어서 불이(不二)의 지혜 등불이 빛나서 정근(情根)의 어두운 미혹이 깨뜨려지고 한 맛의 지혜 물을 쏟아서 의지(意地)의 망령된 티끌을 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폭풍이 나무 잎을 말아 위태롭게 하듯이 두꺼운 막이와 깊은 가림을 말아 올리고 그와 같이 무성한 의심과 쌓인 걸림이 빛나는 해에 살얼음을 녹이듯 하게 한다.
  마치 모든 왕 가운데서 금륜(金輪)의 왕이 되고 모든 비춤 안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되며 모든 보배 가운데서 마니보(摩尼寶)가 되고 모든 꽃 안에서 푸른 연꽃이 되며, 모든 진리 가운데서 진공(眞空)의 문이 되고 모든 법 안에서 열반의 집이 되는 것과 같다.
  때문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한 맛의 법인(法印)이요/일승(一乘)이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일체 중생 안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스승이 되고 광명이 되고 길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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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 중에서 마음이 우두머리가 된다”라고 한 것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으로써 스승을 삼는다”라고 한 것과 조사(祖師)가 이르기를 “온갖 광명중에서 마음 광명이 으뜸이 된다”라고 한 것과, 『법화경』의 게송에서 “첫째가는 길잡이는/이 위없는 법을 얻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만약 아직 종경(宗鏡)에 들지 못하면 도를 보지[見道]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진리에 대한 수행을 끊는 것이다.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기고 뿌리에 돌아가면 구경(究竟)이다. 이는 마치 본 바탕[本質]을 보면 그림의 형상은 진짜가 아님을 아는 것과 같고 감추어진 성품을 깨달으면 외부 경계[塵境]가 망령임을 보는 것과 같다.
  때문에 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진여(眞如)를 증득하지 않으면/모든 행을 능히 알지 못하나니/마치 요술로 된 일 따위가/있는 것 같으면서 진짜 아님 같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근본을 얻으면 곧 구경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해회보살(海會菩薩)이 법계의 작은 티끌로써 삼매(三昧)를 삼았던 것이다.
  또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기를 “이 법문을 여래의 비밀한 곳이라 하며, 내지 여래의 근본 실성(根本實性)을 연설하는 부사의한 구경의 법이라 한다”고 하셨다.
  때문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작은 티끌의 경권(經卷)을 쪼개면 생각생각마다 과(果)가 이루어지고, 중생의 원문(願門)을 다하면 티끌티끌마다 행(行)이 원만하여진다”라고 했다.
  아직 종경을 깨치지 못했다면 어찌 이 글을 믿겠는가? 만약 잠시라도 믿으면 공력이 모두 평등하여져서 익혀야 할 것이 쉽지 않으나 법문을 모두 갖출 것이니 막힌 것이 곧 통한 것이요, 삿된 것이 곧 바른 것이다.
  그 까닭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이 가르침을 만난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경하하여야 하리니, 그것은 마치 큰 바다에 빠졌다가 꽃다운 배를 만난 것과 같고 긴 허공에서 떨어지다가 신령한 학을 탄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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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넓은 가르침을 펴 열어 보이면서 사람을 교화함에는, 모름지기 자신의 행과 공(功)이 원만하고 지위를 겪으면서 친히 증득하여야 비로소 본래 서원을 보답하며, 그로써 방편의 문을 열면 이롭게 한 바가 헛되지 않고 바른 가르침을 어긴 것이 아니다. 지금의 기록된 것에는 어떤 증명이 있는가?
  [답] 이것은 조사와 부처님과 보살들의 언교(言敎)를 모았을 뿐이므로 녹(錄)이라 했으며, 설령 문답하고 해석함이 있다 하여도 모두가 고덕(古德)의 큰 뜻에 의하여 곁에서 칭찬하고 닦기를 권하면서 지교(至敎)를 저술하는 것이다. 어찌 감히 알맞게 열어 보이면서 망령되이 지시하고 진술하겠는가? 이는 또 조사와 부처의 바른 종이라 참 유식(唯識)의 성품이며, 약간의 믿음만 있는 곳이면 모두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만약 닦아 증득하는 문[修證門]을 논하면, 제방(諸方)이 모두 이르기를 “공이 아직은 모든 성인과는 같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또 가르침[敎]안에서 허락한 바다. 처음 마음 낸 보살은 모두가 비교하여 알 수[比知] 있으며, 또한 가르침[敎]을 의거하여 아는 것을 허락하였다.
  먼저는 들음[聞]으로써 이해하고 믿어 들어가며, 뒤에는 생각이 없음[無思]으로써 합치하여 같아진다. 만약 믿음의 문에 들어가면 문득 조사의 지위에 오른다.
  이제 모은 이 종경(宗鏡)은 증험이 그지없어서 생각함에 따라 모두 통하고 눈여겨보면 모두가 옳다.
  이제 또 현재 세간의 일에 맞추면 중생 세계 안에서는 첫째 견주어서 아는 것[比知]이요, 둘째 현상 그대로 아는 것[現知]이요, 셋째 성교에 의거하여 아는 것[約敎而知]이다.
  첫째 견주어서 아는 것이란, 이는 또 바로 지금의 샘이 있는 몸[有漏身]이 밤에는 모두가 꿈이 있으며 꿈속에서 본 바 좋고 나쁜 경계에서 조심하고 기뻐한 것이 완연(宛然)한데 깨나면 평상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잤으니 어느 것이 바로 진실인가. 이는 다 같이 몽중의식(夢中意識)으로서의 생각에서 행한 것임을 견주어서 알 수 있다. 깨었을 때 보는 바의 일도 모두가 꿈속에 진실이 없는 것과 같다.
  과거ㆍ미래ㆍ현재 3세의 경계가 이는 원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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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상분(相分)으로서 본식(本識)으로 변한 바다. 가령 현재의 경계는 이는 명료의식(明了意識)으로서의 분별이요, 가령 과거ㆍ미래ㆍ경계는 이는 독산암의식(獨散暗意識)으로서의 생각이다.
  꿈과 깨었을 적의 경계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모두가 의식(意識)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마음일 뿐[唯心]이란 뜻과 비교하면 분명하다.
  둘째 현상 그대로 아는 것이란, 바로 현상을 대할 적에 분명한 것으로서 견주어 아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비유하면 현재 푸르고 흰 물건을 보는 때와 같다. 물건은 본래 스스로 비어서 ‘나는 푸르다. 나는 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는 안식(眼識)의 견분(見分)인 제 성품이 저절로 분별하고 그와 동시에 명료의식이 헤아리고 분별하여 푸른 것이 되고 흰 것이 된다.
  뜻[意]으로써 나누면 빛[色]이 되고, 말[言]로써 설명하면 푸른 것[靑]이 된다. 이는 모두가 뜻[意]과 말[言]로써 스스로 망령되이 결정한 것이다.
  또 6진(塵)의 둔함 때문에 바탕[體]이 스스로가 성립되지 아니하고 이름[名]이 제 스스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의 색이 이미 그러하므로 온갖 법이 다 함께 그렇다.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이는 모두가 뜻과 말이다. 때문에 이르기를 “온갖 법은 본래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가 시끄럽다”고 했다.
  그러므로 만약 존재의 마음[有心]이 일어날 때에는 만가지 경계가 다 존재하고, 만약 공의 마음[空心]이 일어나는 곳에는 온갖 경계가 다 공하다. 곧 공은 스스로 공하지 않고 마음으로 인하여 본래 공하며,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인하여 본래 존재한다. 이미 공이 아니고 존재가 아니라면, 식(識)일 뿐이요 마음[心]일 뿐이다. 만약 마음이 없으면, 만 가지 법이 어디에 붙으리오. 또 과거의 경계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홀연히 앞에 나타나는 것이요, 만약 생각이 나지 않으면 경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모두는 바로 중생들이 날마다 쓰는 것으로서 현상 그대로 알 수 있다. 공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거늘, 어찌 닦아 얻음[修得]을 빌리겠는가? 마음이 있는 이면 다 같이 증명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큰 근기[大根] 지닌 사람으로서 식(識)일 뿐인 줄 아는 이는 항상 제 마음의 뜻과 말[意言]이 경계가 되는 줄 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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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과 같다”고 했다. 즉 처음 관(觀)할 때에, 비록 아직은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손 치더라도 뜻과 말임을 분명히 알면 이는 보살이다.
  셋째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아는 것이란, 경에 이르기를 “3계(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식(識)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로 증득할 대상[所證]인 본래 진리요, 설명하는 주체[能詮]인 바른 종(宗)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글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증명한 것이 하나만이 아니다.
  가령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했다.
  “부처님께서 안[內]과 밖[外]과 중간(中間)의 말씀을 하시다가 마침내 선정에 드셨다. 그때 5백의 아라한들이 저마다 이 말을 해석하다가 부처님께서 선정에서 나오신 뒤에 같이 세존께 아뢰었다.
  ‘어느 것이 부처님의 뜻에 맞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다 같이 나의 뜻이 아니니라.’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미 부처님 뜻에 맞지 않았다면, 죄를 얻지는 않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나의 뜻에는 맞지 않았으나 저마다 바른 이치를 좇았는지라 성교(聖敎)가 될 만하다. 복이 있을지언정 죄는 없느니라.’”
  이는 또 소승(小乘)의 자증 법문(自證法門)을 설명함에서도 오히려 바른 이치를 따랐다 하셨거늘, 하물며 순전히 일승(一乘)을 인용하여 부처님 뜻만을 말함이겠는가?
  『육행법(六行法)』에서 이르기를 “여러 큰 지혜 있는 이로서 도를 배우려 하는 이들은,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모두가 이교(理敎)에 의지하는지라, 만약 권교(權敎)를 보면 비록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참 말씀이 아님을 알므로 곧 의지하거나 쫓지 아니하며 만약 범인으로서 설명에 진리가 있음을 보면 비록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곧 의지하고 행한다”고 했다.
  지혜 있는 이로서 불법을 배우는 이면 여래의 교(敎)에 권과 실[權實]이 있음을 잘 알므로, 부처님의 실교(實敎)에 의지하여 도리를 펴 말하면 곧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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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인 어리석은 이로서 그릇 권(權)에 집착하는 이보다 뛰어나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만약 말하는 바가 있으면 사람은 비록 이는 범인이지만 범인은 곧 부처님과 같다. 마치 병으로 물을 전하면서 딴 병에 쏟아 넣으면 병은 비록 다름이 있다손 쳐도 쏟아진 물은 동일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범부로서 번뇌[結]가 비록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해함이 있어서 진실한 이치를 능히 설명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하며, 다만 이해한 이치로 하여금 마음에 자주자주 헤아리게 할 뿐이니, 이것이 처음 이치를 관(觀)한 이로서 딴 범부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인공(人空)을 생각하면 이는 이승(二乘)이요, 만약 법공(法空)을 관찰하면 바로 보살이다.
  그러므로 『섭론(攝論)』에서 이르기를 “처음 관(觀)을 닦으면, 이는 범부인 보살이다”라고 했다.
  이 글로써 증명하건대 처음 관을 배우는 이는 비록 아직은 번뇌를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곧 보살이니, 이치를 잘 알아 큰 성인과 같기 때문에 말을 하면 곧 이치에 계합되므로 낱낱이 의지할 만하다.
  『보협경(寶篋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가릉빈가 새[迦陵頻伽鳥]의 알 안의 새끼 새가 그 부리조차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문득 가릉빈가의 묘한 음성을 내는 것처럼 불법의 알 안의 모든 보살들이 아직 아견(我見)도 무너뜨리지 못했고 아직 3계(界)를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불법의 미묘한 음성을 내나니,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행(無作行)의 음성이니라. 가릉빈가가 공작새들에게로 가면 끝내 울지 않다가도 가릉빈가 새들 안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우는 것처럼, 보살이 만약 온갖 성문과 연각들 안으로 가면 끝내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지 않다가도 보살들에게로 오면 그제야 비로소 연설한다”고 하셨다.
  이 글로써 증명하건대 범부 자리 안에서 비록 허물을 아직은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깊은 이해는 장애하지 않는다. 설명에 진리가 있으면 모두 믿어 받아야 한다. 다만 모든 범부로서 설명에 진리가 있는 이라면, 모두가 이는 전생에 익힌 것일 뿐이요, 금생에 비로소 배운 것이 아니다. 만약 전생에 배운 것이 아니고 금생에 배웠다면 늙어서는 다른 이의 말을 했을 뿐이라 스스로가 오히려 진리에 미혹된다. 진리에 미혹하기 때문에 비록 많은 말을 얻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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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손 치더라도 권(權)과 실(實)을 알지 못하며, 말을 하면 곧 진리에 어긋난다.
  만약 진리를 아는 이라면 어른이거나 어린이를 가리지 말라. 도만을 구할지언정 일을 구하지 말며, 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마치 아습바시(阿濕婆恃)의 경우와 같다. 사리불(舍利弗)이 그를 만나서 법을 구하자, 이내 게송으로 대답했다.
  “나의 나이가 어린데다가/배운 시일도 시작이요 얕거늘/어찌 지극한 진리를 펼 수 있어서/자세히 여래의 뜻 말씀하리까?”
  그러자 사리불이 말하였다.
  “간략하게 그 요점만을 말씀하십시오.”
  그리고는 이내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인연(因緣)으로 생긴지라/이 법을 인연법이라 하나니/이 법은 인연으로 다한다고/대사(大師)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은 한 번 듣고 이내 초과(初果)를 얻었으며, 그 가르침[敎]을 목련(目連)에게 전해 재차 설명하자 도를 얻게 되었다.
  이것으로 증명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구하되 다른 이의 덕(德)을 중히 여길 뿐 아랫사람이라 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아만(我慢)으로 제가 높은 체하면서 비록 다른 이가 훌륭한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하며 배우지 않으려는 것과는 같지 않다. 범부가 끝없이 도에 들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서 법을 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들로서 실교(實敎)에 미혹된 이는 아직 스스로 깨치지 못했으면 반드시 덕 있는 이를 찾아야 할 뿐이다. 진리에 미혹된 이는 비록 세간의 지혜가 있다손 치더라도 만약 훌륭한 벗이 없으면 언제나 도에 미혹되기 때문이다.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나면서부터의 소경은 빛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번뇌로 인해 눈먼 모든 중생들은 법을 보지 못한다. 마치 사람에게 눈이 있지마는 바깥에 광명이 없으면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비록 지혜가 있다하더라도 선지식(善知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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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으면 법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이것으로 증명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비록 지혜가 있다하더라도 아직 스스로 깨치지 못했으면 반드시 어진 벗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법장경(付法藏經)』에서 말씀하기를 “선지식이란 곧 도를 얻는 데에 전 부분[全分]의 인연이니라”고 하였다.
  부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선지식을 따르라’고 권하셨으니, 어리석음을 지키면서 일생을 헛되이 지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유지(遺旨)를 두시되 ‘다만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며, 뜻에만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하셨다.
  보살도 오히려 몸을 변화시켜 축생(畜生)이 되어서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는 이런 기이함을 드러내어 듣는 이로 하여금 믿어 받게 하고 모두 도를 깨쳐서 평등한 법에 들게 하거늘, 어찌 마음에 높고 낮음을 내겠는가?
  그러므로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힐난하되 “이 뜻은 미묘하고 은밀하여 궁극의 지위에 이르러야 알 것이거늘 어찌하여 범인의 생각으로써 문득 대교[大敎]를 엿보는가?” 하고서, 풀이하기를 “교리에 의지하는 것은 성교에서 허락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구박(具縛) 범부도 여래의 비밀한 갈무리[秘密藏]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치 햇빛의 조명으로 인하여/도리어 해를 보는 것처럼/부처의 지혜 광명으로써/부처의 행한 바의 도를 보게 된다”고 하였으니, 곧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를 환히 알 수 있다.
  이제 종경(宗鏡)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지혜인 가르침의 광명을 인용하여 부처님의 행한 바 도의 자취를 드러낸다. 만약 믿음이 깊은 이라면, 이 중생의 마음의 빛으로써 중생의 행적(行跡)을 보리라. 만약 힐난하기를 ‘범부로서는 안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삿된 소견이요 믿지 않는 사림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내가 다르고 부처가 다르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바로 악마의 제자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분명하게 보면, 온갖 법에 두 가지 모양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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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을 알리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모든 법이 평등함을 관찰하면, 그를 부처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 까닭에 학인이 충국사(忠國師)에게 말하기를 “여래께서 ‘반야(般若)는 곧 반야가 아니니 그 이름을 반야라 한다’고 하셨는데 이미 모든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반야입니까?” 하고 묻자, “이름 아닌 그것을 능히 보면 이것이 반야니라” 하고 대답하였고, 또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자,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얻으면 곧 천 부처와 같은 마음이요 만 성인이 같은 바퀴 자국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문] 모든 부처님의 방편과 교문(敎門)은 모두가 중생의 근기에 의지하여 일으켰으므로, 근기 성품이 같지 않으면 법도 티끌과 모래 같아서 37품(品)의 도를 돕는 문과 52위(位)의 수행하는 길이 있거늘, 어떻게 한마음[一心]만을 세워 종경(宗鏡)으로 삼는가?
  [답] 이 한 마음의 법은 이사(理事)가 뚜렷이 갖추어졌으므로 이는 대비(大悲)의 아버지요, 반야(般若)의 어머니요, 법보(法寶)의 광이요, 만행(萬行)의 근원이다.
  온갖 법계(法界)의 시방의 부처님들과 여러 큰 보살과 연각ㆍ성문과 일체 중생들은 모두가 곧 마음이 같다. 모든 부처님은 이미 깨달으셨고 중생들은 모르고 있다.
  이제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방편을 써 바로 지시하는 것이니, 본래 갖추었기 때문에 헛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게송에서는 “비유하면 마치 세간의 사람이/보물의 광이 있는 곳을 듣고/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마음에 큰 기쁨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보물의 광이 있는 곳이란 곧 중생의 마음인데 믿음의 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저절로 나타난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깨치기만 하면 되는 것을 어찌 공을 빌어서 이루리오.
  비로소 본래 성품이 차별이 없고 인행(因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줄 알면, 가장 신령한 물건이요 지극한 도의 근원이며 매우 미묘한 문이요, 아주 진실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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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와 성인의 근본이 되고 미혹과 깨침의 근원이 되며, 마치 만물이 땅을 만나서 발생하듯 온갖 행이 도리를 증득하여 성취한다. 모든 문이 다투어 들고 뭇 덕(德)이 돌아갈 바며, 천 성인이 나아갈 길의 터가 되고 모든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눈[眼]이 된다.
  이 때문에 만약 제 마음을 깨달아 단박에 부처의 지혜가 이루어지면, 백 갈래의 하천이 모여 하나의 습기가 되고 여러 개의 티끌이 뭉쳐 한 개의 환(丸)이 되며, 고리와 팔지가 녹아 하나의 금이 되고 소와 타락(酥酪)이 변하여 한 맛이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화엄경』의 게송에서 “제 마음을 능히 알지 못하면/어찌 부처의 지혜 알 수 있으랴”고 한 것과 같으며, 『아차말경(阿差末經)』에서 “제 마음을 바르게 할 뿐이요, 다른 학문을 숭앙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선요경(禪要經)』에서 이르기를 “안의 비춤[照]으로 열어서 알면, 곧 대승의 문(門)이니, 자기 심성을 보는 그것을 말하여 비춤이라 하고 뭇 성인이 노니는 바 그것을 말하여 문이라 한다”고 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마음은 법의 갈무리[法藏]를 갖추어서/아견(我見)의 때[垢]가 떠나 없으며/세존은 모든 행(行)을 말씀하시면서/내심(內心)에서 알 바의 법이라 하셨네”라고 했으며, 『월등삼매경(月燈三昧境)』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어떤 이가 이 한 법을 받아 지니면/보살의 바른 수행 따를 수 있고/이 한 법의 공덕으로 말미암아/빨리 위없는 도[無上道] 이룰 수 있네”라고 하였다.
  『승만경(勝鬘經)』에서 이르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정법(正法)을 섭수(攝受)하여 이런 큰 힘이 있음을 보았으며, 여래는 이로써 눈[眼]을 삼고 법의 근본을 삼고 인도하는 법을 삼고 통달하는 법을 삼았습니다”라고 했다.
  해석하건대 정법이란 곧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의 마음이다. 마음 밖에서 망령되이 헤아리거나 이치 밖에서 따로 구하면, 모두가 치우침과 삿됨[邊邪]에 떨어져서 정견(正見)을 미혹하게 된다. 그 까닭에 여래는 바른 눈으로 시방의 끝을 껴잡아 다하고 법계(法界)의 끝을 비추어 다하면서 통틀어 하나의 마음에 돌아오게 하므로 이를 정법을 섭수한다고 한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은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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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와 성문ㆍ연각ㆍ보살과 모든 부처님에게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며, 전제(前際)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후제(後際)에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항상 구경(究竟)이다. 끝없는 때로부터 본성(本性)은 온갖 공덕을 완전히 갖춘 것이니, 큰 지혜 광명이라는 이치요, 법계에 두루 비춘다는 이치요, 사실대로 환히 안다는 이치요, 본래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라는 이치요,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는 이치요, 고요하고 변하지 않으며 자재(自在)하다는 이치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것은 항하의 모래 수보다 더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 법은 끊어짐이 없다. 이런 이치에 의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또한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문] 위에서 진여(眞如)는 온갖 모양[相]을 떠났다고 설명했거늘, 어찌하여 지금은 온갖 공덕의 모양을 두루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답] 비록 실로 온갖 공덕을 갖추고 있다 해도 차별된 모양이 없어서 그 온갖 법은 모두가 같은 한 맛[一味]이요, 하나의 참됨[一眞]이다. 분별의 모양을 떠나고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업식(業識) 등이 생멸하는 모양에 의하여 저 온갖 차별된 모양을 세운다.
  이를 어떻게 세우느냐 하면, 온갖 법은 본래 마음뿐이요 실은 분별이 없는데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분별된 마음으로 견해를 일으켜 경계(境界)가 있는 것이니, 그를 무명(無明)이라 한다. 심성(心性)은 본래 청정하여 무명이 일어나지 아니하므로 곧 진여에 큰 지혜 광명이라는 이치를 세운다.
  만약 마음에서 보는 경계를 내면 곧 보지 않음의 모양[不見相]이 있거니와, 심성이 보는 것이 없으면 곧 보지 않은 것도 없으므로 곧 진여에서 법계에 두루 비춘다는 이치를 세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곧 참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요, 본래 성품이 청정한 것이 아니며 상ㆍ낙ㆍ아ㆍ정이 아니요 고요한 것이 아니며 이는 변하여 달라지고 자재하지 않은지라, 이로 말미암아 항하의 모래보다 더한 허망(虛妄)과 잡염(雜染)이 모두 일어나거니와 심성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곧 진실로 환히 안다는 이치를 세우며, 내지 항하의 모래 수보다 더한 청정한 공덕의 모양이라는 이치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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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마음의 일어남이 있고 다른 경계가 있음을 보아 분별하여 구하면 곧 안의 법[內法]에서 부족한 바가 있겠거니와, 그지없는 공덕을 지닌 것이 바로 한 마음[一心]의 자성(自性)이므로 딴 법이 있어서 다시 구해야 함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 수보다 더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법이 만족하여 끊어짐이 없다. 때문에 진여를 말하여 여래장이라 하고 또한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한 마음은 허망하게 연려(緣廬)하여 능히 추구하는 마음을 내어 오인하여 결정코 색신(色身) 안에 붙어 있다고 하는 범부의 것과는 같지 않다. 지금 시방세계에 두루한 것이, 모두가 미묘하게 밝은 참 마음[妙明眞心]이다.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화장 세계의 바다[華藏世界海] 안에 있는 산이거나 하천이거나 대지거나 허공이거나 초목이거나 우거진 숲ㆍ티끌ㆍ털 등의 것을 묻지 말라. 다 함께 참된 법계(法界)에 합하여 그지없는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덕이 이르기를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하늘의 덕이어서 일기(一氣)에서 비롯하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은 부처의 덕이어서 일심(一心)에서 근원하며 일기를 오로지 하여 유연함에 이르고 일심을 닦아서 도를 이룬다. 마음이라는 것은 텅 비어서 미묘하고 청수하며 환히 빛나서 신령하고 밝다. 간 것도 온 것도 없어서 3제(際)를 그윽이 꿰뚫었고 중간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어서 시방(十方)에 환히 사무쳤도다. 사라지지도 않고 나지도 않거니 어찌 4산(山)이 해칠 수 있으며, 성(性)을 여의고 상(相)을 여의었거니 어찌 5색(色)이 눈멀게 할 수 있겠는가? 생사(生死)의 흐름에 처(處)하되 여주(驪珠)는 큰 바다에 홀로 빛나고, 열반(涅槃)의 언덕에 걸터앉되 계륜(桂輪)이 푸른 하늘에 외로이 밝다. 거룩하구나. 만 가지 법이 의지하고 비롯하도다. 온갖 법은 거짓이라 인연이 모이면 나고, 나는 법은 본래 없어서 모두가 식(識)일 뿐이며, 식(識)은 환영[幻]과 꿈과 같아서 이는 한 마음일 뿐이다. 마음이 고요하면서 아는 것을 일컬어 원각(圓覺)이라 하나니, 충만하고 청정하여 그 안에서는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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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다. 때문에 덕의 작용이 그지없어서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니 성(性)이 일어나 상(相)이 되어서 경계와 지혜[境智]가 뚜렷하고 상이 만족하고 성이 원융하여 몸과 마음이 텅 비었도다. 그를 해인(海印)에다 견주고 저 태허(太虛)를 뛰어넘은 것이니, 넓고도 넓으며 빛나고도 빛나서 멀리 생각하거나 헤아림의 모습을 벗어났다”라고 했다.
  또 선덕이 이르기를 “여래장이란 곧 일심(一心)의 다른 이름이다. 어찌하여 한 마음이라 하느냐 하면, 참된 것[眞]ㆍ망령된 것[妄]ㆍ더러운 것[染]ㆍ깨끗한 것[淨]의 온갖 모든 법에는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하며, 이 두 가지가 없는 곳의 모든 법은 그 안이 차서 허공과도 같지 않고 성품 스스로가 신령하게 알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만약 밖에서 따로 구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망령되이 배우면, 마치 얼음을 뚫으면서 불을 찾고 모래를 누르면서 기름을 짜는 것과 같다. 얼음과 모래는 기름과 불의 바른 인연이 아니므로, 이용하려 한다면 그저 공력만 고달프리라.
  또 만약 점행(漸行)만을 닦고 공연히 권승(權乘)에만 머무른다면, 곧 그림에 아교가 없는 것 같고 아직 굽지 않은 날기와와 같다. 날기와와 그림은 단단한 그릇이 아닌지라 완성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제 마음을 진실로 알아서 망령되이 바깥으로 구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마치 나무로부터 불을 내고 깨로부터 기름을 짜는 것과 같아서 바른 인연을 무너뜨리지 않았는지라 빨리 이룩될 수 있다. 또 마치 그림에 아교를 얻은 것 같고 날기와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그릇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일이 헛되지 아니한다. 실지로 시행함이 있어도 모두가 다 마지막의 것이 된다.
  만약 아직 믿어 들지 못해서 취사(取捨)만 가지면 경계에 따라 미혹함이 생겨서 법에게 해를 당할 것이다. 공(空)을 관(觀)함으로써 누(累)를 버리지 않고 공만을 취하면서 선행을 폐지하거나 존재[有]를 통달함으로써 인자함[慈]을 일으키지 않고 존재만에 집착하여 죄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가 공과 존재가 한 마음임을 깨닫지 못한 데서 이런 득실(得失)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만약 종경(宗鏡)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마음을 내게 된 때면 행(行)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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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진리가 단번에 갖추어지고 문득 옛 부처와 같아져서 하나의 끝도 차이가 없어진다.
  『대열반경』에서 말하기를 “구시나성(拘尸那城)에 환희(歡喜)라는 전타라(旃陀羅)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수기하시되, ‘하나의 발심(發心)으로 말미암아 장차 일 천 부처[千佛]의 세계 안에서 빠르게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리라’라고 하셨다”고 한 것과 같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법이란 전부터 밝은 법이니 어찌 다른 마음일 수 있겠는가? 다만 중생의 법이 너무도 넓고 부처의 법이 너무도 높아서 처음 배우는 이에게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세 가지는 다를 것이 없으므로 자기의 마음을 관(觀)하기만 하면 쉽게 된다”고 하였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은 세 가지 정(定)을 두루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상정(上定)이란, 불성(佛性)을 말한다. 심성(心性)을 잘 관하면 상정이라 하는 것이니, 위는 아래까지 겸할 수 있어서 곧 중생의 법을 껴잡아 얻는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을 법계(法界)에 노닐되 허공과 같이 하면 곧 모든 부처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계는 곧 중(中)이요, 허공은 곧 공(空)이요, 마음과 부처는 곧 가(假)이니, 세 가지는 곧 부처의 경계이다. 이는 관심(觀心)이 되면서 오히려 불법을 갖추었다.
  또 법계에 노닌다 함은 근진(根塵)의 상대인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니, 십계(十界) 중에 반드시 일계(一界)가 속하고 만약 일계가 속하면 곧 백계(百界)의 천 가지 법을 갖추게 되므로 한 생각 안에는 모두가 다 갖추어져 있다.
  이 마음은 요술쟁이라 하루의 밤 동안에도 언제나 갖가지의 중생과 갖가지의 5음(陰)과 갖가지의 국토를 만드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세계의 가짜ㆍ진짜의 국토까지 만든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길을 따라야 되는가를 선택하여야 한다.
  또 허공과 같다 함은 마음을 관하되 스스로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인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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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있되 마음에는 내는 힘이 없으며, 마음에 내는 힘이 없으면 인연 또한 나는 것이 없으므로 마음과 인연은 저마다 없거늘 합한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합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면 떨어짐도 생기지 않아서 오히려 하나도 나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백계(百界)와 천 가지 법이 있겠는가?
  마음이 공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모두가 다 공이고 이 공 또한 공이며, 만약 공이 공이 아니라면 공이라고 가리킨 것은 가(假)를 시설한 것이며, 가(假) 또한 가가 아니면 가도 없고 공도 없으므로 마침내 청정하거늘, 어찌 삼관(三觀)에 그치리오? 만 가지 행으로부터 시방 허공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마음을 따라 변하거늘, 하물며 공중에서 생기는 바 물질의 형상이겠는가?
  『수능엄경』에서 게송으로 말씀하기를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기나니/바다에서 한 개의 거품이 생긴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화엄소(華嚴疎)』에서 이르기를 “공과 존재[空有]의 두 가지 법을 다 함께 참된 도리[理]에 맞춘다면, 존재와 공은 모두가 성품이 공이다”라고 했다.
  초석[鈔]에서 해석하기를 “공과 존재를 참된 도리에 맞춘다면, 이 공은 바로 외공(外空)이다. 만약 이 공(理空)으로써 외공에 대비하면, 외공은 법을 떠난 것이라 단멸공(斷滅空)이요, 이 공은 곧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만약 외공도 마음이 나타난 것이고 역시 빛을 대(對)하므로 말미암아 빛을 없애야 비로소 드러난다면 이는 단공(斷空)이니, 인연을 따르는 것이어서 성품이 없으므로 곧 성품이 공(空)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팔공(十八空)중에서 큰 것으로 밝힌 것은 시방공(十方空)이니, 곧 시방의 허공 또한 성품이 공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성인들이 만나기 어려운 기연(機緣)들에게 부촉하였으니, 만약 상근(上根)을 대하면 환히 증험할 수 있다”고 했다.
  한산자(寒山子)의 시(詩)에서는 “예로부터 많고 작은 성인들께서/말의 길[語路]로 간절하게 일렀건마는/사람들의 근성(根性)이 같지 아니하고/높낮이에 영리함과 둔함이 있는지라/참 부처를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공력을 들이면서 곤욕 받누나/마음을 깨끗이 밝힘이 으뜸이니/곧 이것이 마음 왕의 인[心王印]이라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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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이 이르기를 “만약 법요(法要)를 알고자 하면 마음이 바로 12부경(部經)의 근본이요, 도(道)에 드는 요긴한 문이니라. 이 마음의 문이란, 3세의 부처와 조사다.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두 가지는 곧 참된 것이 아니다. 일승(一乘)의 법이 있을 뿐 둘도 없고 셋도 없다. 일승의 법이란 곧 한 마음이요, 다만 한 마음을 지킬 뿐이니 곧 마음의 진여문[心眞如門]이다. 온갖 모든 법이 이지러졌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온갖 법의 행[法行]이 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마음일 뿐임을 스스로가 알면 다시는 다른 마음이 없다.
  마음은 형색이 없어서 뿌리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또한 각관(覺觀)으로서 행할 만한 것도 없다. 만약 관행(觀行)이 있어야 한다면, 이는 곧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이는 본래 마음이 아니요, 모두가 유위(有爲)의 공용(功用)이다. 모든 조사는 이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고 통달하면 인가(印可)하였으며 다시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화엄경』에서 “문수 동자(文殊童子)가 5백 동자를 교화하여 보리심(菩提心)을 내었으나, 한 사람 선재(善財) 동자만이 본마음의 근원을 통달하고 1백 10성(城)에 노닐며 보리의 온갖 행을 물었으며, 배운 바의 삼매문(三昧門)은 모두가 허깨비[幻化]와 같아서 실체(實體)가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모두가 환영과 같으며, 똑바로 참 마음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진실이다.
  『유식추요(唯識樞要)』에서는 “경(境)ㆍ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의 다섯 가지 유식(唯識)에 의거해서 이 논(論)은 어떤 뜻에서는 경유식(境唯識)만을 밝혔으니, 마음을 여의어 버리고 그 밖에서 대경[境]을 취함은 온갖 대경은 마음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어떤 뜻에서는 교유식(敎唯識)만을 설명하였으니 논(論)을 이루는 본래의 교[本敎]로 그 설명을 풀이하기 때문이요, 어떤 뜻에서는 이유식(理唯識)만을 취하였으니 본래 교에 말한 바 도리를 성립시켜 유식의 성상(性相)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어떤 뜻에서는 행유식(行唯識)만을 취하였으니 5위(位)로 유식을 닦는 행(行)을 밝히기 때문이요, 어떤 뜻에서는 과유식(果唯識)만을 취하였으니 큰 결과[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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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하기 때문이요, 안락하고 해탈한 몸과 큰 모니(牟尼)의 이름이며 법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그의 설명을 풀이하였으나 교와 이치[敎理]의 설명만을 취하는 것이니 교와 이치에 의하여 저 성상(性相)을 이루며 성상은 곧 온갖 것을 다 거두기 때문이다. 온갖 것은 모두가 이치[理]에서 취하면 훌륭한 것이니, 이는 유식의 이치가 부처가 되는 바른 종(宗)이요 이치로써 널리 망라하면 법마다 옳지 않음이 없는 줄 알 것이다. 때문에 이르기를 “온갖 법이 식일 뿐이다[萬法唯識]”라고 한 것이다.
  종경(宗鏡)의 바른 뜻을 기술하여 조사와 부처의 본마음[本懷]을 궁구하는 것이니, 하나의 법으로써 하나의 기연(機緣)에 머무르게 할 뿐 다시는 다른 뜻이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시방의 불국토 안에는 일승법(一乘法)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고, 『대열반경』에서 이르기를 “사자후(獅子吼)란 결정코 일체 중생에게 모두가 불성(佛性)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중생 또한 그러하여 모두 다 마음이 있다[有心]”라고 하였나니, 마음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것이다.
  [문] 3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식일 뿐이라 하면 이는 온갖 법에 해당되는데, 따로 진여(眞如)를 세워 종(宗)을 삼아야 하는가?
  [답] 진여는 바로 식(識)의 성품이요, 식은 이미 만법을 포괄한 것이므로 이는 곧 유위(有爲)거나 무위(無爲)인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이다.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일찍이 하나의 법도 법성(法性)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사마표(司馬彪)가 말하기를 “성품[性]이란, 사람이 근본[本]이다”라고 했고, 채옹(蔡邕)이 말하기를 “성품이란, 마음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이르기를 “유식론(唯識論)은 바로 열 가지[十支] 중에서 높이 세운 법 당기[法幢]의 가지이니, 무슨 법인들 거두지 않겠으며, 어느 종(宗)인들 세우지 않겠는가? 유(唯)는 가림[簡]으로써 뜻을 삼고, 식(識)은 요별[了]로써 뜻을 삼는다. 식을 떠나 그밖에 다른 것이 없고 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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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體)가 곧 식이며, 마음 밖의 용(用)을 부정하기 때문에 유(唯)라 한다. 유라는 이름은 홀로 성상(性相)을 다 함께 거둔다. 진여는 바로 식의 성(性)이요, 다른 상분(相分)에 의한 색(色) 등은 바로 식의 상(相)이다. 심소(心所)는 식으로써 주인을 삼으며, 모두가 식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통틀어 식일 뿐[唯識]이다’고 하였다.
  [문] 3계(界)는 바로 유루법(有漏法)이다. 3계에 속한 애의 번뇌[愛結]에 매이기 때문에 3계라고 하거니와, 그 무위(無爲)의 무루법(無漏法)은 3계의 애의 번뇌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곧 3계의 법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3계가 마음일 뿐’이라 하였는가? 즉 무위의 무루법 등의 법을 섭수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식뿐이라고만 할 수 없는데도 무엇 때문에 ‘3계가 마음일 뿐’이라고만 하였는가?
  [답] 3계는 다스릴 대상[所治]인 미혹하여 어지러운 법이기 때문에 식일 뿐이라고 하거니와, 무위의 무루법의 성품은 바로 다스리는 주제[能治]의 체[體]여서 미혹하여 어지러운 것이 아니어서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3계는 마음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 『제부총구(諸部總句)』에서 이르기를 “유위ㆍ무위와 염(染)ㆍ정(淨)의 모든 법은 모두 마음이 근본이 된다”고 했고, 살바다(薩婆多) 등에서 이르기를 “무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나고, 유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으킨다”고 했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으키는 염ㆍ정의 법의 세력은 인연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이 근본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문] 마음을 세워 종(宗)으로 삼아서 몇 가지 공덕의 문을 갖추면, 보고 들음의 믿음[見聞之信]을 일으킬 수 있는가?
  [답] 참 마음 자체는 말로 설명할 바 아니어서 맑기는 마치 끝없는 허공과 같고 밝기는 마치 뚜렷이 밝은 거울과 같으며, 훼방과 칭찬이 미치지 아니하고 뜻과 도리가 통하기 어려운 것이니, 공덕과 허물인 두 가지 문의 대대(對待)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선덕이 상(相)에 의거해서 마음을 분별한 것에 의하면 대강 다섯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취할 바[所取] 차별상(差別相)을 멀리 여읨이요, 둘째는 능히 취함[能取]의 분별의 고집을 해탈함이요, 셋째는 사제(三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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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하여 처소마다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음이요, 넷째는 허공의 지경과 같아서 처소마다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음이요, 다섯째는 유무(有無)와 일이(一異) 등의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아 마음 가는 곳을 벗어나고 말의 길을 넘어선 것이다.
  또 이 머무름이 없는[無住] 마음은 두 가지 진리를 함께 부정한다. 때문에 속제(俗諦)를 벗어나서 진제(眞諦)에 드는 것의 다름이 없고, 이미 나고 듦이 없으므로 공과 존재[空有]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경에서 “마음의 처소가 있지 않다. 있는 데가 없는 자리가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라고 했다.
  한 마음의 체(體)는 본래 고요히 사라져서 유무(有無)와 처소(處所)로 그의 깊숙한 자취를 궁구할 수 없고 식지(識智)와 전량(詮量)으로 그 오묘한 바탕을 말할 수 없다.
  들어가는 이가 있을 뿐이요 마음으로 아는 것만이 있으니, 마치 온갖 종자를 찧어서 향기로운 환(丸)을 만들고 하나의 티끌을 불살라서 뭇 향기를 두루 갖춘 것과 같으며, 큰 바닷물 속에 들어가 목욕하면서 조그마한 물방울을 움켜도 벌써 백 갈래의 시냇물을 쓴 것과 같다.
  조약돌을 집으면 모두가 진짜 금으로 되고, 풀을 잡으면 묘한 약(藥)이 아님이 없다. 빈 그릇에 모두 감로(甘露)의 맛이 차고, 방 가득히 치자꽃의 향기를 맡을 뿐이다. 뭇 이치가 한 곳으로 돌아감은 마치 하늘이 온갖 형상을 포함하는 것 같고, 천 갈래길이 다투어 들어오는 것은 마치 많은 그림자가 맑은 못을 자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한 마음의 성기(性起) 공덕을 논하면 그지없고 끝이 없거늘, 어찌 한량 있는 마음으로써 함이 없는[無爲] 덕을 찬탄하겠는가? 극진하고 신령한 힘에 맡길지언정 아직 한 털끝만큼도 기술하지 못했다. 믿음으로써 들어가는 사람이면 모두 다 실제로 증득한다.
  범부가 곧 그대로 성인이라 감응(感應)이 헛되지 아니하며, 믿음이 굳건하고 옮겨가지 않으면 법공(法空)의 빈 소리가 저절로 쉬고, 밝은 정성으로 증험할 수 있으면 영윤(靈潤)의 아지랑이가 갑자기 멎으리라. 어찌 신통을 빌려서 마음의 악마를 단번에 끊겠는가? 다른 이의 재주에 의지하지 않아도 식(識)의 불은 저절로 꺼지리라. 다만 미련한 사람뿐이라면 어찌 이런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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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히리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지혜[智]에 의지할지언정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식이 현행(現行)하여 티끌[塵]을 따르면서 눈의 빛깔과 귀의 소리를 분별하여 깊숙이 미혹해서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한다.
  큰 성인은 가르쳐 보이시되 “대경[境]은 바로 제 마음이니라”고 하는데도, 못난 어리석은 이가 굳이 고집하며 “티끌[塵]은 식(識)의 밖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입으로 그 공을 외면서도 마음은 아직 존재[有]가 없어지지 못했다. 허공을 오르려 해도 오르지 못하고 불에 들기는 더욱 어렵다. 다 같이 이는 심상(心相)이 막히고 미혹했기 때문에 그렇다. 뒤에 통달하게 되어 마음대로 바꾸어 쓰면, 어찌 내가 공중에서 놀되 스스로 언제나 그러한 것과 같지 않겠는가? 베[布]를 불로 씻는다 해도 괴상할 것이 없으리라.
  다만 군생(群生)들의 식성(識性)이 같지 않으므로 큰 성인들이 생각 따라 따로따로 말씀하게 된 것일 뿐, 지극한 도[至道]에 의거하면 곧 ‘자기 마음뿐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3계의 위와 아래의 법 이치가 마음일 뿐[唯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세계의 의보(依報)에 나아가서 마음을 밝힌 것이다. 또 말씀하기를 “여여(如如)와 진제(眞際)ㆍ열반(涅槃)ㆍ법계(法界) 및 갖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내는 심량(心量)이라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출세법(出世法)의 체(體)에 의거하여 마음을 밝힌 것이다.
  마침내 지극한 진실을 궁구하고 끝내 이 근원에 이르면, 흐름을 따라 결과[果]를 감득하여 종(宗)에 돌아가 이치를 알리라.
  [문] 한 마음으로 종(宗)을 삼는 것을 강요(綱要)라 일컬을 수 있다면, 교(敎) 중에서 무엇 때문에 여러 길을 자세히 말하면서 각각 경의 종[經宗]을 세우는가?
  [답] 갖가지 모든 법이 비록 많다손 쳐도 이 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 하나의 성인의 도에서 한량없는 이름을 세우는 것은, 마치 하나의 불이 나서 타면 “풀에 불이 났다. 나무에 불이 탄다”라고 하는 가지가지 이름이 붙는 것과 같고, 하나의 물을 이용하면서 “혹은 국이다. 혹은 술이다”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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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가지 이름이 붙는 것과 같다.
  이 한 마음의 [문]역시 그러하여, 작은 근기[小機]에 대(對)하면 소승법[小法]이라 하고, 큰 양[大量]에 머무르면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크고 작음은 비록 나누어지나 참된 성품[眞性]은 동떨어짐이 없다. 만약 결정코 부처님의 말씀에 많은 법이 있다고 고집하면, 곧 법륜(法輪)을 비방한 것이요, 양설(兩舌)의 허물을 이루리라.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도(道)를 여의지 아니하고 도는 마음을 여의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가섭 보살(迦葉菩薩)을 칭찬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선남자야, 너는 이제 보살의 대승의 미묘한 경전[大乘微妙經典]에 있는 비밀을 알고자 하여 짐짓 질문을 하는구나. 선남자야, 이러한 모든 경은 모두 도제(道諦)에 들었느니라. 선남자야, 내가 먼저 말한 바와 같아서 만약 도를 믿으려면 이렇게 도를 믿으라. 이 믿음은 근본이요, 이는 보리(菩提)의 도를 능히 돕는다. 그러므로 나의 설명은 잘못이 없느니라.
  선남자야, 여래는 한량없는 방편을 잘 알므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갖가지의 설법을 하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훌륭한 의사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병의 근원을 알므로 그의 증상에 따라 약을 짓고, 약에서 금해야 할 것을 말하되 물 한 가지만은 금하는 예가 없어서, 혹은 생강의 물을 먹으라 하기도 하고 혹은 감초의 물이거나 혹은 세신(細辛)의 물이거나 혹은, 흑사탕[黑石蜜]의 물이거나 혹은 아마륵(阿摩勒)의 물이거나 혹은 니바라(尼婆羅)의 물이거나 혹은 발주라(鉢晝羅)거나 혹은 찬 물을 먹으라 하기도 하며 혹은 더운 물이거나 혹은 포도의 물이거나 혹은 안석류(安石榴)의 물을 먹으라고 하기도 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이렇게 훌륭한 의사가 중생들이 앓고 있는 바를 잘 알므로 갖가지의 약이 비록 많기는 하나 물을 금하는 예가 없는 것처럼, 여래도 그와 같아서 방편을 잘 알므로 하나의 법 모양에서 여러 중생들에 따라 분별하여 가지가지 명상(名相)을 널리 말하며 그 중생들은 말한 바에 따라 받고 받은 뒤에는 닦고 익혀서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이, 저 병든 사람들이 훌륭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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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가르침을 따르면 앓던 병이 낫게 됨과 같으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어떤 한 사람이 대중의 말을 잘 이해하는데 이 여러 대중들이 더워서 몹시 목이 마르므로 다 함께 소리내어 말하기를 리는 물이 먹고 싶구나. 우리는 물이 먹고 싶구나>라고 하면, 이 사람은 즉시 맑은 찬 물을 그의 종류에 따라 이 물을 설명하되, 혹은 파니(波尼)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울지(鬱持)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리람(婆利藍)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리(婆利)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파야(波耶)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감로(甘露)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우유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한량없는 물 이름으로써 대중들을 위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여래 또한 그러하여 하나의 거룩한 도(道)로써 여러 성문들을 위하여 갖가지로 연설하되, 신근(信根) 등으로부터 8성도(聖道)에까지 이르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금공(金工)이 하나의 금을 가지고 마음대로 갖가지 영락(瓔珞), 이른바 칼ㆍ쇠사슬ㆍ고리ㆍ팔찌ㆍ비녀ㆍ솥ㆍ천관(天冠)과 팔가락지를 만들되 비록 이렇게 서로 다르고 같지 않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금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여래 또한 그러하여 하나의 불도(佛道)로써 모든 중생들에 따라 갖가지로 분별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말하되 혹은 한 가지인, 이른바 모든 부처는 하나의 길이요 둘이 없음을 말하기도 하고, 또 두 가지인 이른바 정(定)과 혜(慧)를 말하기도 하고, 또 세 가지인 이른바 견(見)과 혜(慧)와 지(智)를 말하기도 하고, 또 네 가지인 이른바 견도(見道)ㆍ수도(修道)ㆍ무학도(無學道)ㆍ불도(佛道)를 말하기도 하고, 내지 또 스무 가지 도로서 이른바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대자(大慈)ㆍ대비(大悲)ㆍ염불삼매(念佛三昧)와 3정념처(正念處)를 말하기도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 도는 일체(一體)이건마는 여래는 옛날부터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로 분별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하나의 불이 나서 타게 되면 가지가지의 이름인, ‘나무에 불이 났다, 풀에 불이 났다, 겨에 불이 났다, 조에 불이 났다, 마소의 똥에 불이 났다’고 하는 것처럼, 선남자야, 부처의 도(道)도 그리하여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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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둘이 없는데도 중생들을 위하여 가지가지로 분별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하나의 식(識)을 분별하여 여섯으로 말하되, 만약 눈이면 안식(眼識)이라 하고 차츰차츰 하여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선남자야, 도(道) 또한 이와 같아서 하나이고 둘이 없는 데도 여래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가지가지로 분별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야, 마치 하나의 색을 눈으로 보는 것이면 빛이라고 하고, 귀로 듣는 것이면 소리라 하며, 코로 맡는 것이면 냄새라 하고, 혀로 맛보는 것이면 맛이라 하며, 몸으로 깨닫는 것이면 감촉[觸]이라 하는 것처럼, 선남자야, 도(道) 또한 이와 같아서 하나이고 둘이 없는 데도 여래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가지가지로 분별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이치 때문에 8성도분(聖道分)을 도성제(道聖諦)라고 한다. 선남자야, 이 4성제(聖諦)는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차례로 말씀하셨으며, 이런 인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생사(生死)를 건너갈 수 있었느니라.”
  또 말씀하기를 “만약 10선(善)과 10악(惡)을 말하면서 선도(善道)와 악도(惡道)와 백법(白法)과 흑법(黑法)을 지어야 한다거나 짓지 않아야 한다 하면, 범부는 두 가지로 여기거니와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에 둘이 없음을 깨달아 아나니, 둘의 성품이 곧 실성(實性)이니라”고 하였다.
  『다라니경(陀羅尼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모든 법이 없는 이것을 일자범문(一字法門)이라 한다”고 하였고, 또 경에 이르기를 “3세(世)의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법을 나는 이제 49년 동안 한 글자도 보태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의 문은 지극한 도를 능히 이루는 줄 알 것이다.
  만약 상근(上根)으로서 똑바로 들어가는 이라면 아침내 다른 문을 세우지 않겠지만 중근(中根)ㆍ하근(下根)으로서 아직 들어가지 못한 이를 위하여 곧 수단으로 여러 길을 나눈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와 부처가 같이 지시했고 현성(賢聖)이 가만히 돌아간다. 비록 이름은 다르나 체(體)는 같으며, 인연은 나누어지나 성(性)은 합치한다.
  반야(般若)는 둘이 없음[無二]을 말할 뿐이요, 법화(法華)는 일승(一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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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을 말하며, 정명(淨名)은 도량(道場) 아님이 없고, 열반(涅槃)은 다 함께 비장(秘藏)에 돌아가며, 천태(天台)는 오로지 삼관(三觀)에 힘쓰고 강서(江西)는 전체가 모두 진리라 하며, 마조(馬祖)는 곧 부처가 이 마음이라 하고, 하택(菏澤)은 똑바로 지견(知見)을 지시했다.
  또 교(敎)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현료설(顯了說)이요, 둘째는 비밀설(秘密說)이다.
  현료설이란, 『능가경(楞伽經)』ㆍ『밀엄경(密嚴經)』 등의 경과 『기신론(起信論)』ㆍ『유식론(唯識論)』 등의 논과 같은 것이다.
  비밀설이란, 각 경의 종[經宗]에 의거하여 그 다른 이름을 세운 것이다. 저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부사의(不思議)로써 종을 삼고,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무주(無住)로써 종을 삼으며,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법계(法界)로써 종을 삼고,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佛性)으로써 종을 삼았으니, 멋대로 갈래 길을 세웠으되 이는 모두가 한 마음의 다른 뜻이다. 그 이유는 참 마음인 묘한 바탕[妙體]은 유와 무[有無]에도 있지 않고 지혜로도 알 수 없으며 말로도 미칠 수 없고 정식(情識)으로써 헤아림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不思議)라고 했다.
  바탕은 비고 모양은 고요하며 상대가 끊어지고 신령하게 통하며 법계(法界)에 나타났으되 남[生]이 없고 3세(世)를 벗어나 자취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를 무주(無住)라 한다.
  세로는 삼제(三際)에 사무치고 가로는 시방(十方)에 뻗쳤으되 지경과 분량이 없고 가와 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법계(法界)라고 일컬으며 만물의 근원이 된다.
  군생의 원시(元始)가 되지만 범부에 있어도 줄어짐이 없고 성인에 처하되 불어나지 아니하며 영묘하게 깨닫고 사리가 뚜렷하며 언제나 그대로의 바탕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이라 한다.
  내지 혹은 영대(靈臺)ㆍ묘성(妙性)ㆍ보장(寶藏)ㆍ신주(神珠)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가 한 마음이요 인연 따라 다르게 일컫는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3아승기(阿僧祗)의 백천의 모든 곧 명호가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모든 부처의 방편을 몰라서 이름에 미혹되고 모양에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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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며 이해에 따라 차별을 내는 이를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종(宗)을 알기만 하면 탁 트여 비고 고요하거늘, 무슨 명상(名相)을 헤치고 진술할 것이 있겠는가?
  마치 용왕(龍王)의 한 맛의 비가 사람과 하늘의 선악의 업(業)에 따라 비내리는 바가 같지 않고 저마다 차별되게 보는 것과 같다.
  『화엄경(華嚴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사갈라(娑渴羅) 용왕이 용왕의 크고 자재한 힘을 나타내서 중생을 이롭게 하여 다 함께 기쁘게 하려고 4천하(天下)로부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및 지상(地上)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비를 내리되 같지가 않나니, 이른바 대해(大海) 안에서는 맑고 찬 물을 비 내리므로 이름이 끊어짐 없음[無斷絶] 이라고 하고, 타화자재천에서는 퉁소와 피리 등의 음악 소리를 비 내리므로 이름을 아름답고 묘함[美妙]이라 하며, 화락천(化樂天)에서는 큰 마니보(摩尼寶)를 비 내리므로 이름을 큰 광명 놓음[放大光明]이라 하고, 도솔천(兜率天)에서는 큰 장엄구를 비 내리므로 이름을 상투 드리움[垂髻]이라고 하며, 야마천(夜摩天)에서는 크고 아름다운 꽃을 비 내리므로 이름을 갖가지 장엄구[種種莊嚴具]라고 하고, 삼십삼천(三十三天)에서는 뭇 아름다운 향을 비 내리므로 이름을 뜻 기쁘게 함[悅竟]이라 하며,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는 하늘 보배의 옷을 비 내리므로 이름을 덮어 가리움[覆蓋]이라 하고, 용왕궁(龍王宮)에서는 적진주(赤眞珠)를 비 내리므로 이름을 광명이 솟아나옴[跳出光明]이라고 하며, 아수라궁(阿修羅宮)에서는 여러 무기들을 비 내리므로 이름을 원수를 항복시킴[降伏怨敵]이라 하고, 북울단월(北鬱單越)에서는 갖가지 꽃을 비 내리므로 이름을 꽃 핌[開敷]이라고 하며 그 밖의 3천하(天下)에서도 모두가 이와 같다. 그러나 각각 그 처소에 따라 비 내리는 바가 같지 않다. 비록 그 용왕은 그 마음이 평등하여 피차(彼此)가 없건만 중생들의 선근(善根)이 다르기 때문에 비에 차별이 있을 뿐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용왕의 한 맛의 비는 모든 하늘에 따라 감응(感應)하는 처소가 같지 않나니, 마치 모든 부처님의 일심(一心)의 법문이 중생이 보는 때를 따라 차별이 있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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