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6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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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6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종경(宗鏡)에서의 본 생각은 그 도(道)를 논할 뿐이다. 설령 빠짐없이 글과 뜻을 진열한다 하여도 뭇 기류(機類)에게 널리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지남(指南)과 같아서 끝내 따로의 뜻이 없는 것이니, 남몰래 글에 의지하여 그 종취(宗趣)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도를 깨친다면, 이어받을 수도 있고 옷을 전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남전 화상(南泉和尙)에게 물은 것과 같다.
  “황매(黃梅)의 문하(門下)에는 5백 사람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노행자(盧行者) 혼자만 옷과 발우[衣鉢]를 얻었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499인은 모두가 불법(佛法)을 알았을 뿐인데, 노 행자 한 사람만은 불법은 모르고 그 도(道)를 알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옷과 발우를 얻었느니라.”
  물었다.
  “그러한 도를 어떻게 압니까?”
  대답하였다.
  “본사(本師)께서는 ‘여래가 도량(道場)에서 얻은 법은 법이로되 법이 아니며 또한 법 아님도 아니다. 나의 이 법에서는 지혜로도 행할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으며 행할 곳이 없어서 슬기로도 통달하지 못할 바요 총명으로도 알 수 없는 바며 물어도 대답이 없다’고 하셨다.
  또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공(空)한 것 같지마는 공하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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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것[有] 같지만 있지 아니하며 은은하게 늘 보이는데 그 처소를 구하면 얻을 수 없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약 결정코 공이라 하면 단견(斷見)에 돌아가고, 만약 실제로 있다 하면 상정(常情)에 떨어지며, 만약 처소가 있다 하면 그 경계[境]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일은 마음으로 측량할 바가 아니요, 지혜로써 알 바가 아니다.”
  향엄(香嚴) 화상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앞뒤를 헤아리고 중간에 놓아두어도/깊은 샘에 빠져들어 한 법도 얻지 못하리라./도무지 이러하여 나와 나의 앞에 나타나지 않나니/시방의 학자(學者)들은 어떻게 참선(參禪)할꼬./만약 이렇다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바로 미묘하게 회통(會通)하여야 비로소 옳다”고 했다. 이야말로 회통하지 않는 회통이어서 미묘하게 그 속에 계합한다.
  그러므로 선성(先聖)의 오도송(悟道頌)에서 말하기를 “있다ㆍ없다ㆍ간다ㆍ온다는 마음이 영영 쉬어서/안팎과 중간에 통틀어 없구나./여래의 참 부처의 처소 보려 하거든/돌 염소[石羊]가 망아지를 산 채로 잡음을 보라”고 했다.
  이렇게 미묘하게 통달한 뒤에도 도(道)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거늘, 어찌 다시 안다 모른다는 망상(妄想)을 논할 수 있겠는가?
  고덕(古德)의 게송과 같다.
  “그대에게 권하나니 도를 배우되 탐구(貪求)하지 말라./만사가 무심(無心)이면 도는 끝[頭]에 합하리니/무심해야 비로소 무심의 도 체득하며/체득한 무심의 도 또한 쉬리라.”
  옛날 동산(洞山) 화상의 게송에 이르기를 “이것[者箇]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하물며 장삼 이사(張三李四)이겠는가?/진공(眞空)과 비공(非空)을/가지고 오되 서로 비슷하지 않으며/분명하여 마치 눈앞의 것 같지만/털끝 만큼의 헤아림도 용납되지 않네”라고 했다.
  이것[者箇]이라 해도 오히려 옳지 않다 했거늘, 하물며 그 밖의 미친 근기들의 잘못 앎이겠는가?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마음은 도(道)를 잡아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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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아니하고 또한 업(業)을 맺지도 아니한다”고 하셨다.
  도조차도 오히려 잡아매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종경(宗鏡) 안에 들면 저절로 계합하리라.
  [문] 각의 체[覺體]는 옮기지 않고 거짓 이름에만 다름이 있을 뿐이다. 범부와 성인이 이미 평등하거늘 중생은 어찌하여 깨달아 알지 못하는가? 만약 미혹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교(敎) 안에서 무엇 때문에 미혹과 깨침[迷悟]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다만 본각(本覺)의 진심(眞心)으로 인하여 불각(不覺)을 일으키게 되고, 불각으로 인하여 시각(始覺)을 이를 뿐이다. 마치 땅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방향으로 인하여 미혹함과 같으며, 또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고 방향으로 인하여 깨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깨닫는 때에 비록 깨쳤다손 치더라도 깨친 처소는 언제나 공(空)이요, 깨닫지 않으면 미혹한 것 같으나 미혹한 때 본래 고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과 깨침이 한 즈음[一際]인데 정상(情想)이 저절로 나누어져서, 허망한 마음이 있게 되었으므로 도리어 허망한 약을 베푸는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3승(乘) 12분교(分敎)를 말한 것은, 마치 빈주먹으로 어린아이를 속인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 일을 모르면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조사(祖師)의 게송에 “여래의 온갖 법은/나의 온갖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나에게 온갖 마음이 없거니/어찌 온갖 법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자기 눈이 뜨이면 참 광명이 저절로 나타나서 다스릴 대상[所治]인 미혹과 깨침에는 소견의 병이 벌써 없어졌을 것이고 능히 다스림[能治]의 방편권도와 진실[權實]에는 법의 약이 저절로 쓸모없어질 것이다.
  이 법을 깨치는 것은 다른 이의 지혜와 다른 기술을 빌리지 아니한다. 혹은 바로 보는 이는 마치 광을 열어서 보배를 취하고 조개를 쪼개서 진주를 얻는 것과 같아서 광채가 가슴 속에서 나타나고 그림자가 법계(法界)를 머금으리라.
  경의 게송에서 “마치 사람이 보배광을 얻게 되어/영원히 가난의 고통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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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듯/보살이 부처의 법을 얻으면/때[垢]를 떠나 마음이 청정하여진다”고 하였는데 혹시 깨치지 못한 이는 저절로 장애가 생긴다.
  그러므로 『통심론(通心論)』에서 이르기를 “참되고 항상하여 변하지 않건마는 생멸에 막힌 이는 지극한 진리의 원만한 통달에서 저절로 멀어지고, 모나고 둥근 것에 고집하여 막히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제 성품[自性]을 미혹하여 의통(依通)을 따르는 것일 뿐이니 자기 눈이 뚜렷이 밝아져서 남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융(融) 대사의 게송에서 “눈먼 개가 우거진 띠풀을 보고 짖자/소경은 도둑이며 범이라고 외치네./소리 따라 본래 헷갈리게 되었거니/진실한 눈으로 봄이 없는 탓일세”라고 했다. 만약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비추는 때가 되면, 모든 소견이 다 끊어져서 불법이 옳다고도 보지 아니하고 세간법이 그르다고도 보지 않으리니, 제 성품 안에서는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옳은 것 없는 이것이 바로 보리(菩提)니, 부처의 보리를 옳은 것이 있는 이 극단[邊]에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그대로요 편히 놓아 둘 필요가 없을 뿐이다. 체(體) 스스로가 비고 현묘함은 마치 유리보배가 있는 곳을 따라서 본성은 잃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이 일을 알아 얻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마음대로 이 온갖 범부ㆍ성인과 훌륭함ㆍ하열한 빛이며 그림자가 그 안에서 나타나되 그 성품은 동요하지 않는데,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은 곧 앞의 빛깔이 변화함에 따라 곱고 누추함을 분별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낸다. 그런 까닭에 조사가 이르기를 “흐름[流]에 따라 성품을 알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고 했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생멸문[心生滅門]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여 생멸의 마음이 굴리게 되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화합해서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능히 온갖 법을 포섭하고 능히 온갖 법을 내는 것이다.
  또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첫째는 각(覺)의 뜻이요,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각의 뜻이란 마음의 첫째가는 이치의 성품[第一義性]으로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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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망념(妄念)의 모양을 여의며 온갖 망념의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허공의 경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법계의 일상(一相)이 그대로다. 이것은 온갖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며, 이 법신에 의지하여 온갖 여래가 본각(本覺)임을 설명하고 시각(始覺)을 상대(相待)하여 본각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일 때에 곧 이것이 본각이라 따로 각(覺)의 일어남이 없다.
  시각을 세운다는 것은 본각에 의지하여 불각이 있음을 말하며,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닫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않기 때문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내지 망상의 마음이 있게 되기 때문에 능히 명의(名義)를 알며, 진각(眞覺)을 말하게 되거니와 만약 불각의 마음이 없으면, 진각이라는 제 모양을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없다”고 했다.
  소석(疎釋)에 이르기를 “만약 물듦[染]을 따르고 흐름[流]을 따라 불각을 이루면 세간의 법을 포섭하고, 가령 변하지 않은 본각과 흐름을 거스르는 시각은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한다”고 했다.
  초해(鈔解)에 이르기를 “본각과 시각의 두 각(覺) 중에서 포섭하는 법으로 논한다면, 가령 본각을 포섭한 바는 바로 대지혜 광명의 이치[大知慧光明義]요, 법계를 두루 비춤의 이치[遍照法界義]요, 진실하게 앎의 이치[眞實識知義] 등이다. 만약 시각의 포섭한 바라면, 바로 3명(明)ㆍ8해탈(解脫)ㆍ5안(眼)ㆍ6신통(神通)ㆍ10력(力)ㆍ4무외(無畏)ㆍ18불공법(不共法) 등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실에 의거하면 곧 같고, 뜻으로 말하면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소(疎)에 이르기를 ‘생멸문(生滅門) 안에서 흐름을 따르면 불각(不覺)이요 흐름을 거스르면 시각(始覺)이다’라고 했다. 뜻의 용(用)에서라면 포섭하는 법이 같지 않거니와, 만약 진여문(眞如門) 중에서라면 녹아서 하나로 포섭되므로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이 다르지 않다. 한 진여(眞如)의 이치가 그를 융합하여 더러움이 곧 더러움이 아니게 하고 깨끗함이 곧 깨끗함이 아니게 하므로, 더러움 그대로가 깨끗함이어서 깊이 한 맛이 되기 때문에 다르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논(論)에서 “온갖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言說)의 모양을 여의고 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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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字)의 모양을 여의고 마음으로 반연하는[心緣] 모양을 여의어서 마침내는 평등하여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나니, 이는 한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고 했다. 이것으로 각과 불각의 반연을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내는 것 같지만 연생(緣生)에 성품이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이 다 함께 비었음을 알게 된다.
  또 이르기를 “언설의 모양을 여의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말로써 말하며,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마음으로써 헤아릴 수 있겠는가? 실로 마음은 말의 길이 끊어졌고 증득해야만 상응하는 것임을 말한다.
  또 언설이라는 것은 각관(覺觀)으로부터 나며, 이는 공통의 모양[共相]이 어울려서 분별(分別)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의식(意識)으로 인하여 나는데 이것은 헤아리고 견주면서 일어난다.
  요약하여 말하면 불각(不覺)의 교관(敎觀)으로부터 따라 나므로 만약 불각의 마음이 없으면 온갖 모든 법 모두가 제 모양[自相]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방편문(方便門)을 제거하고 그들을 위하여 구경(究竟)을 열어 보이며 말이 없는 도[無言之道]에 지시하여 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기를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의면 일체 모든 법은 제 모양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없다”고 했다. 각(覺)은 불각(不覺)에 대(對)하여 공통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구르는 것이니, 만약 불각이 없으면 각의 제 모양은 없다. 마치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다 역시 그렇다. 모두가 상대하면서 있게 되며, 마침내 자체(自體)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만약 긴 것을 여의면 어떻게 짧은 것이 있겠으며, 높은 것을 여의면 어떻게 낮은 것이 있겠는가? 만약 종경(宗鏡)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상대가 끊어지리라.
  또 초(鈔) 가운데에서 말하였다.
  “‘생멸과 진여가 저마다 모든 법을 포섭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 포섭의 뜻은 다릅니까, 같습니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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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다. 왜냐 하면 생멸[문]중에서는 골고루 포섭한다[該攝]고 하고, 진여[문]중에서는 녹여서 포섭한다[融攝]고 하나니, 골고루 포섭하기 때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함께 존재하고, 녹여서 포섭하기 때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같이 없어진다. 같이 없어지기 때문에 한 맛으로 나누어지지 아니하며,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차별이 분명하다.’”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말하였다.
  “이 두 가지 각(覺)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간략히 설명한 본각의 안립문[本覺安立門]이요, 둘째는 간략히 설명한 시각의 안립문[始覺安立門]이다. 본각문(本覺門) 중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본각문[淸淨本覺門]이요, 둘째는 염정의 본각문[染淨本覺門]이다. 시각[문]중에도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시각문[淸淨始覺門]이요, 둘째는 염정의 시각문[染淨始覺門]이다.
  무엇 때문에 청정한 본각이라 하느냐 하면,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本有法身]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항하 모래보다 더한 덕(德)을 완전히 갖추고 원만하여서 언제나 밝고 조촐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염정의 본각이라 하느냐 하면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 무명(無明)의 훈습(熏習)을 받아 생사에 유전하며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청정한 시각이라 하느냐 하면, 무루의 성품인 지혜[無漏性智]는 온갖 한량없는 무명을 벗어나서 온갖 무명의 훈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염정의 시각이라 하느냐 하면, 반야(般若)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 능히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각(覺)은 모두가 지혜의 권속인데 무슨 도리[理]를 증득하여 체분(體分)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면, 성품의 진여[性眞如]와 허공의 도리[虛空理]이다. 이와 같은 두 도리에는 저마다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을 두 가지의 진여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청정한 진여[淸淨眞如]요, 둘째는 염정의 진여[染淨眞如]이다. 허공의 도리도 역시 그와 같다.
  무엇 때문에 청정한 진여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청정한 각[淨覺]으로 증득할 바 진여로서 훈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염정의 진여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염정의 각[染淨覺]으로 증득할 바 진여로서 훈습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공의 도리 역시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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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이치 때문에 억지로 본각(本覺)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글자와 일[字事]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본과 각에는 저마다 열 가지가 있으며/체(體)는 비록 같으나 글자와 일은/저마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니/뿌리[根] 등으로 박히는 이치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본(本)과 각(覺)에는 각각 열 가지씩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 본(本)이냐 하면, 첫째는 뿌리라는 글자와 일의 본[根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本有法身]이 온갖 공덕을 잘 머물러 지님은 마치 나무의 뿌리가 온갖 가지와 잎과 꽃 및 열매를 잘 머물러 지녀서 무너뜨리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본이라는 글자와 일의 본[本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저절로 성품[性]이 존재하며 어디로부터 비롯했거나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멀다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遠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그 덕(德)이 존재하는 때가 겹겹으로 오래고 멀어서 분한이나 지경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스로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自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나[我] 스스로가 나를 이룬 것이요 남이 나를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탕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體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모든 곁가지의 의지(依止)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성품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性字事本]이니, 바꾸어지지 아니하는 이치로서 언제나 이룩되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머무름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住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머무름이 없는 데에 머물러서 가거나 옴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항상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常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결정코 실제(實際)여서 유전함(流轉)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굳건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堅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바람의 형상[風相]을 멀리 여의고 견고하여 동요하지 아니함이 금강(金剛)과 같기 때문이다. 열째는 통틀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總字事本]이니, 넓고 크고 원만하여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통한 체[通體]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본(本)이라 한다.
  무엇이 열 가지 각(覺)이냐 하면, 첫째는 거울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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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薩般若慧]는 깨끗하고 밝고 희어서 티끌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다라는 글자와 일의 각[開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통달하고 나타남이 환하여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나라는 글자와 일의 각[一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홀로 높고 하나뿐이어서 견주어 헤아림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여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離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제 성품이 해탈하여 온갖 가지가지의 속박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득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滿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저절로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을 완전히 갖추어서 적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비춤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照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큰 광명을 놓아 온갖 한량없는 경계를 두루 비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살핌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察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항상 분명하여 미혹함과 어지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나타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顯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청정한 바탕 안에서 깨끗한 품류의 권속들이 모두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앎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知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온갖 법에서 깊이 궁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깨달음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覺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가 지닌 바 공덕은 깨달아 비춤이 있을 뿐 하나하나의 법마다 깨달은 것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각(覺)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본(本)과 각(覺)에 관한 글자의 뜻은 한 가지 본래 성품인 법신(法身)에 의하여 뜻을 따르면서 해석이 다른 것일 뿐, 그 자체(自體)에 의거하건대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안에서 말한 바의 두 가지 본각 중에서는 어느 본각이어야 하느냐 하면, 청정한 본각이요 염정의 본각이 아니다. 염정의 본과 각의 글자의 뜻의 차별에는 그 모양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정의 본과 각 중에는/저마다 열 가지씩의 뜻이 있으니/앞에서 해설한 열 가지 일 중에서/저마다 여읨[離]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말하기를 “이 본각 중에서도 저마다 열 가지 씩이 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앞의 열 가지 뜻 가운데서 저마다 제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글자와 일의 배속(配屬)되는 향방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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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각(覺)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이 아니지만 같고, 다른 것이 아니지만 다르다. 이런 이치 때문에 혹은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하며, 혹은 바로 같은 것이 아니기도 하고 혹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것이기도 하고 모두가 아니기도 할 따름이다.
  무슨 이치 때문에 억지로 시각(始覺)이라 이름 붙였으며,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미혹하고 어지러운 때가 없었으나/오늘에야 비로소 처음 깨달았기에/그 때문에 시각이라 이름한다네.”
  논(論)에서 말하기를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시각이란 반야(般若)는 미혹하고 어지러운 때가 없었으며, 그리고 미혹한 때가 있었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처음 깨달았기 때문에 시각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시각이 전에는 미혹했고 뒤에 깨달았다면, 시각이 아니다. 그리고 미혹된 때가 없었고 진리는 항상 나타났지마는 지금에야 항상함이 처음이기 때문에 시각이 된다.
  이와 같은 시각은 두 시각 중에서 어느 시각이어야 하느냐 하면 청정한 각이요 염정의 각이 아니다.
  염정의 시각에 관한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한 시각의 지혜가/제 성품을 지키지 않았기에/물들음[染]과 훈습을 잘 받았나니/그 때문에 염정의 각이라 한다.”
  비록 미혹한 때는 없다손 치더라도 제 성품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물들음과 훈습을 받아 연(緣)을 따라 유전한 것이니, 이런 이치 때문에 염정의 시각이라고 하였다.
  무슨 이치 때문에 억지로 진여(眞如)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품인 진여의 도리의 체(體)는/평등하고 평등하여 하나인 것이며/많은 모양이 없는 까닭이니/이 때문에 진여라 이름하느니라.”
  논(論)에서 말하기를 “성품인 진여의 도리는 평등하고 평등하며, 비록 동일한 모양이기는 하지마는 하나의 모양도 없고 많은 모양도 없다”고 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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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같은 연[同緣]을 멀리 여의었고, 많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다른 연[異緣]을 멀리 여의었다. 이런 이치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여는 두 가지의 깨끗한 지혜로 친히 내증(內證)할 바다.
  다시 진(眞)과 여(如)에도 각각 열 가지 씩의 뜻이 있다. 첫째 뿌리라는 글자와 일의 진[根字事眞]으로부터 열째의 통틀어라는 글자와 일의 진[總字事眞]까지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진은 열 가지 본(本)의 뜻과 상응하고 똑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그 때문에 같은 이름으로 표시했을 따름이다.
  무엇이 열 가지의 여(如)라 하느냐 하면, 첫째의 거울이라는 글자와 일의 여[鏡字事如]로부터 열째의 깨달음이라는 글자와 일의 여[覺字事如]까지이다. 이와 같은 것은 열 가지 각(覺)의 뜻과 상응하며 똑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이름으로 표시할 따름이다.
  왜냐 하면 열 가지 진(眞)의 도리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법신이기 때문에 덕의 방편[德方便]이 있으며, 열 가지 진여(眞如)의 도리에는 살바야의 지혜와 각의 방편[覺方便]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다시 거듭된 말로 이렇게 지어서 보인 것이다.
  이 안에서 말한 바의 두 가지 진여 중에는 무슨 진여에 해당하느냐 하면, 청정한 진여를 말한 것이요 염정의 진여가 아니다. 염정의 진여에 관한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한 진여의 도리는/제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물들음과 훈습을 잘 받나니/염정의 진여라 이름한다네.”
  논(論)에서 말하기를 “청정한 진여는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평등하고 평등하며 제 성품이 청정하여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데도 없다. 그러나 진여의 도리 성품은 제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옮는다. 이 때문에 염정의 진여라고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진여는 두 가지 염정의 지혜[染淨智]로 친히 내증할 바며, 상응하고 같이 존재하며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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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는 앞에서 말한 바의 종류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알아야 된다.
  무슨 이치 때문에 억지로 허공(虛空)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허공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그 체(體)는 비록 같으나 이치의 일은 저마다 차별되기 때문이니, 걸림 없다[無礙]는 따위의 일들을 말한다.
  논(論)에서 말하기를 “성품인 허공의 도리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막거나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니 모든 물질의 법[色法] 안에서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루 하다는 뜻이니,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평등하다는 뜻이니, 가리거나 고름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넓고 크다는 뜻이니, 분한과 끝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모양이 없다는 뜻이니, 물질의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깨끗하다는 뜻이니, 티끌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요동하지 않는 다는 뜻이니, 이루어지거나 무너짐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유공(有空)의 뜻이니, 한량 있음[有量]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공공(空空)의 뜻이니, 집착을 여의기 때문이다. 열째는 얻음이 없다[無得]는 이치이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일은 뜻의 용[義用]의 차별인데, 만약 그 체(體)에 의거하면 차별이 없을 따름이다. 이 허공의 도리도 두 가지 청정한 지혜로 친히 내증할 바며, 상응하고 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두 가지 허공중에서 어느 허공이어야 하느냐 하면, 청정한 허공이요, 염정의 허공이 아닌 것이다.
  염정의 허공에 관한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한 허공의 도리가/제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훈습을 잘 받은 것이니/염정의 허공이라 이름한다네.”
  논(論)에서 말하기를 “청정한 허공은 열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으며, 더러움의 모양도 없고 깨끗한 모양도 없다. 그러나 허공의 성품이 제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염정(染淨)의 훈습을 받고 연(緣)을 따라 유전한다. 이 때문에 염정의 허공이라고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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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기신론소(起信論疎)』에서 말하기를 “본각(本覺)이란 시(始)에 대(對)하기 때문에 그를 설명하며 본(本)이라 한다”고 하였다.
  ‘생각을 여읜다[離念]’고 함은, 망령된 생각을 떠나서 불각(不覺)이 없어지는 것이 나타난다. ‘허공 등과 같다’고 함은, 불각의 어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 지혜 광명의 뜻 등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서 본각에서와 같이 비유한다. 첫째는 두루 하다[周遍]는 뜻이니, 가로는 삼제(三際)에 두루 하고 세로는 범부와 성인에 통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한다. 둘째는 차별이 없다[無差別]는 뜻이니, 얽매임에 있거나 장애를 벗어나는 성품이 항상 둘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법계(法界)는 한 모양이다’고 한다.
  깨달음[覺]의 뜻을 밝히고자 하여 얽매임[纏]을 벗어나는 모양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이르기를 ‘바로 이것이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라고 하며, 이미 법신의 깨달음의 도리가 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이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했다.
  『무성섭론(無性攝論)』에서 말하기를 “때가 없고 걸림이 없는 지혜[無垢無慧礙智]를 법신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법신이라 한다”고 한 것 등이, 모두 이런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라고 함은 그 이름 붙인 것을 책망하는데 두 가지로 책망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르기를 ‘위의 문장을 전개하는 가운데는 바로 각(覺)이라는 뜻으로 말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이제는 맺으면서 이에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가’라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르기를 ‘이 안에서 이미 본각이라 일컬었으면서, 무엇 때문에 논(論) 중에서는 바로 각이라고 말하는가’라는 것이니, 진(進)과 퇴(退)로 책망하고 있다.
  해석하여 보자.
  ‘시(始)에 대(對)하기 때문에 본(本)이라 한다’고 하여 처음 것의 뜻에 대답한 것이요, 처음[始]은 곧 근본[本]과 같으며, 마음의 근원에 이르렀을 적에는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아서 두 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論) 중에서는 그 각(覺)이라고 말했을 뿐이니, 뒤의 것의 뜻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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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로 본각이 물듦[染]을 따라 시각을 내되, 도리어 이 시각을 상대하여야 비로소 본각이라는 이름 붙이게 된다. 이 때문에 본각이라 하는 것은 시각에 상대하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바로 본각에서 이루어지므로 도리어 마음의 근원에 계합하여 동일한 체(體)로 융합되어야 비로소 시각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그 때문에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말한다.
  [문] 만약 시각(始覺)이 본(本)과 다르면서 시(始)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만약 시가 본과 같으면 시각이라는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시에 상대하여 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는가?
  [답] 지금은 생멸문(生滅門) 안에 있으면서 물들음을 따른다[隨染]는 이치에 의거해서이니, 본래의 불각(不覺)에 대하여 시각(始覺)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시각이 마음의 근원에 이를 때에 물듦의 연[染緣]은 이미 다하였으므로, 시각과 본각은 다르지 아니하며, 평등하여 말이 끊어져서 바로 진여문(眞如門)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본각의 이름은 생멸[문]안에 있는 것이요 진여문의 것이 아니다.
  둘째의 시각이라 함은 이름을 풀이하는 것이니, ‘본각(本覺)에 의하여 불각(不覺)이 있다’ 함은 시각이 일어난 소유(所由)를 밝힌 것으로서 바로 이 마음의 체(體)가 무명의 연(緣)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妄念)을 짓되 본각 안의 훈습한 힘 때문에 점차로 조금씩 깨달음이 있고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도리어 본각과 같게 된다. 때문에 ‘본각에 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 논(論)에 이르기를 ‘본각이 물듦을 따라 지정상(智淨相)을 낸다’ 함은 바로 이 시각이다.
  이 안의 대의(大意)는 본각은 불각을 이루고 불각은 시각을 이루고 시각은 본각과 같으며 본각과 같기 때문에 곧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곧 본각이 없고 본각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여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졌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부처의 과위는 원융하고 소연하여 붙어 있는 데가 없으며, 오히려 시각과 본각의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삼신(三身)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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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물(物)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보화(報化)의 용(用)을 설명할 따름이다.
  또 이제 진여에서 보면 이것은 본각이요 무명에서 보면 이것은 불각이다.
  진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불변(不變)이요. 둘째는 수연(隨緣)이다. 무명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체(體)가 없어서 그대로가 공한 것이요, 둘째는 용(用)이 있어서 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수연진여(隨緣眞如)와 성사무명(成事無明)에는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違自順他]이요, 둘째는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違他順自]이다.
  무명 중에서 처음의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반대로 성품의 공덕을 보이고, 둘째는 명의(名義)를 능히 알아서 깨끗한 용(用)을 이루는 것이다.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리를 덮고, 둘째는 망심을 이루는 것이다.
  진여 중에서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망령된 물듦[妄染]을 뒤집어서 자신의 덕을 드러내고, 둘째는 안에서 훈습한 무명으로 깨끗한 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에서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신의 참된 체[眞體]를 숨기는 것이고, 둘째는 망령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명 중에서 반대로 보인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망을 뒤집어서 덕을 드러낸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이치로부터 본각이 있게 된다.
  또 무명 중에서 명의를 능히 안다는 이치와 진여 안에서 훈습한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이치로부터 시작이 있게 된다.
  또 무명 중에서 진리를 덮는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참된 체를 숨긴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근본불각(根本不覺)이 있게 된다.
  또 무명 중에서 망심을 이룬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망령된 법을 드러낸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지말불각(枝末不覺)이 있게 된다.
  각(覺)과 불각(不覺)이 만약 융합되면 한데 포섭되어 생멸의 한 문에 있을 뿐이다. 진여문의 체는 모양이 끊어져 있다는 학설[體絶相說]에서 보거나 본각문의 성품 공덕의 학설[性德說]에서 보거나 하면, 대지혜(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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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광명(光明) 등의 이치를 각(覺)이라 한다. 본(本)이란 성품의 뜻이요, 각이란 바로 지혜의 마음이다.
  초석(鈔釋)에 이르기를 “진(眞) 중의 불변(不變)과 망(妄) 중의 체공(體空)은 진여문을 이루고, 진 중의 수연(隨緣)과 망 중의 성사(成事)는 생멸문을 이루며, 온갖 정연(淨緣)의 분제(分劑)인 법상(法相)은 두 가지 각[二覺]에 속하고 온갖 염연(染緣)의 분제인 법상은 두 가지 불각[二不覺]에 속한다.
  또 그 중에서 깨끗한 법의 체[淨法之體]는 본각에 속하고, 깨끗한 법의 용(用)은 시각에 속한다. 또 더러운 법[染法]의 체는 근본 불각에 속하고, 더러운 법의 상(相)은 지말 불각에 속한다. 또 시각은 바로 끝[末]이로되 본각의 근본을 여의지 않는다. 논(論)에 이르기를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실로 시각으로서의 다름이 없으며, 내지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말 불각은 근본 불각을 여의지 않나니, 논(論)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무명은 온갖 더러운 법을 능히 내나니, 온갖 더러운 법은 모두가 이는 불각의 모양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각은 바로 체와 용[體用]이 다를 뿐이며, 본말(本末)의 두 가지 불각은 바로 추(麤)와 세(細)가 다를 뿐이다. 어찌 체를 여의고 용이 있겠으며, 세를 여의고 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중생의 근본 미혹[根本迷]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에 미혹한 것[迷法]이니, 무명이 머무는 자리(無明住地)가 법(法)의 체를 미혹하여 가리어진 것이다.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니, 가리어진 뜻[敝意]을 말한다. 때문에 이 무명은 참된 것을 미혹하게 하는 시초요, 망령되게 미혹시키는 근본이다.
  둘째는 이치에 미혹한 것[迷義]이니, 4주(住)의 미혹에 다 통한다. 앞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인연(因緣)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잘 모르고, 망령되이 모든 법을 세우되 미혹한 모든 법은 안이 있고 바깥이 있는 것이니, 교만의 삿된 소견 이것은 미혹함에 의한 안의 것이요, 망령되이 나라는 법을 세워서 스스로가 높은 체하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사랑스레 생각하는 삿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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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견 이것은 헷갈림에 의한 바깥의 것이다.
  망령되이 내 것[我所]과 바깥 경계를 말하면서 탐애(貪愛)를 내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달려가고 어리석은 원숭이가 달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될 수 없는데 잘못 헤아려서 억울하게 괴로움의 바퀴로 들어가는 것이니, 모두 스스로가 마음을 헷갈린 것이요. 다른 이의 허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두정론(杜正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바로 여래의 말씀이라 높이 성인 자리에 미루고, 몸은 곧 보리(菩提)의 설명이라 스스로 범부 무리에 막힌다. 공덕이 한량없되 방촌(方寸)의 가운데 있을 뿐이라 함과, 상호(相好)가 완연(宛然)하되 음계(陰界)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했다.
  또 『비사(碑詞)』에서 이르기를 “법성(法性)은 평등하고 진실한 지혜[實慧]는 비고 꿰뚫었다. 나는 다른 데서 같고 남은 같은 데서 다르며, 유(有)를 무너뜨리지 않고 공(空)을 취함이 없나니, 도(道)는 마음 밖의 것이 아니고, 부처는 곧 마음속이다”라고 했다.
  [문] 망심(妄心)이 원래 자체(自體)가 없음을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미 깨달았다. 망심이 일어난 때에 처음의 모양이 없으면 온전하게 진각(眞覺)을 이루는데, 이 진각의 모양은 다시 망(妄)을 따라 함께 쫓아보내는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건립되어 있어야 하는가?
  [답] 망(妄)으로 인하여 진(眞)을 설명하므로 진은 제 모양[自相]이 없고, 진으로부터 망을 일으키므로 망의 자체는 본래가 비었으며, 망이 이미 공으로 돌아갔으므로 진 또한 건립되지 아니한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불각(不覺)이란 뜻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사실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면서 망념(妄念)이 있되 스스로 실상(實相)은 없고 본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 마치 길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여 본래 미혹하였으나 미혹함은 제 모양이 없고 방향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그러하여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고 망념은 미혹해서 생긴다. 그러나 그 불각은 스스로 실제 모양은 없되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며, 다시 불각을 기다려서 진각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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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하게 되며, 불각이 이미 없는지라 각각 또한 쫓아보낸다”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진각이란 이름은 망상(妄想)을 상대하여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만약 불각을 여의면 곧 진각이라는 제 모양조차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한 바 진각은 반드시 불각을 상대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상대하지 아니하면 곧 자타(自他)가 없고 타를 상대하면 서 있으므로 또한 제 모양이 없으며, 제 모양이 이미 없다면 어찌 다른 모양[他相]이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법은 얻을 바가 없다[無所得]는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
  논(論)에 이르기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온갖 더러운 법과 깨끗한 법은 모두 다 상대(相待)하는 것이므로 제 모양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세제(世諦)에 털끝만큼의 것이라도 진실이 있다 하면, 제일의제(第一義諦) 또한 진실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또 게송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계실 때/한 법도 진실임을 얻지 않았나니/빈주먹으로써 어린아이 속이듯/꾀어서 일체 중생 제도하셨네”라고 했다.
  또 진망(眞妄)을 세우되 모두 이것은 다른 이의 뜻을 따라 말로 교화하는 [문]안에서 그친다. 만약 단박에 견성(見性)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을 논하겠는가? 지금처럼 바로 한 마음을 깨치지 않은 이는 모두가 사곡(邪曲)이 되며, 바깥으로 부처의 과위를 구하는 이도 모두가 바르지 아니하다.
  한산자(寒山子)의 시(詩)에서 “남아의 대장부가/일을 짓되 소홀하게 하지 말라./곧장 철석(鐵石)같은 마음을 빼내어/바로 보리(菩提)의 길을 취하라./삿된 길은 가도 소용없어서/가면 갈수록 고통만 심하나니/부처의 과위 구하려 말고/심왕(心王)이 주인임을 알아 취하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만약 구할 만한 법이 있거나 행할 만한 도가 있다고 보면, 모두가 심왕인 자종(自宗)의 이치를 잃게 된다. 만약 바로 종경(宗鏡)에 들면 만사를 쉬고, 범부와 성인의 정(情)이 다하여 편안하고 즐겁고 미묘하며 항상하리니, 이 타고난 마음을 여읜다면 모두가 고달프고 고통스럽게 된다.
  이 때문에 부 대사(傳大士)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동쪽 산은 물 위에 뜨고/서쪽 산은 가며 머무르지 않누나/북두(北斗)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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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염부제(閻浮提)가/바로 참된 해탈의 처소일세.
  가는 길은 쉽다/길은 쉬운데 사람들이 모르고서/한밤중에 해의 끝이 돋아 밝을 것임을/깨치지 못하니 참으로 고달프네.”
  또 동산(洞山) 화상의 오도게(悟道偈)에서 말하였다.
  “종전대로 물건 위에서 통달을 구함은/애초부터 종(宗)을 몰랐기 때문이니/지금처럼 환히 보아 온전히 일 없어야/비로소 온갖 법이 본래 공함을 알리라”고 했다.
  [문] 진제(眞諦)는 그릇되지 아니하고 본각은 헛된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망(妄)과 한꺼번에 함께 버리는가?
  [답] 미혹함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세우고 망령됨을 설명하여 참됨을 드러낸다. 모두가 근기의 마땅함에 따르되 저마다 자체가 없다. 세속에서 보면 있지만 실제(實諦)에 의하면 없다. 상대의 이름을 제거할 뿐이요, 한 신령한 성품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성품은 상대가 끊어졌으나 일[事]에는 다스림이 있다.
  쓸어 없애는 것은 집착한 정(情)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이룩하여 세우는 것은 단견(斷見)을 제거하기 위해서며, 고행(苦行)은 모든 외도를 항복 받고 신통은 저 어리석은 이들을 교화하며, 삼매(三昧)는 뭇 하늘 악마를 항복시키고 공관(空觀)은 그 서로 얽어매는 것을 버리며, 괴로움을 보고 쌓임을 끊는 것[見苦斷集]은 증상만인(增上慢人)을 대치하기 위해서요, 사라짐을 증득하고 진리를 닦는 것[證滅修眞]은 모두가 쓸모없는 이론을 주장하는 이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모두 권지(權智)로 이 종(宗)에 끌어들인다면 하나의 법도 일으킬 만한 것이 없고 하나의 법도 버릴 만한 것이 없어서, 4마(魔)가 줄일 수 없고 대각(大覺)이 불릴 수 없으며, 마음을 돌리면 의리(義理)가 완전히 소멸되고 뜻[旨]을 회통하면 명언(名言)이 저절로 끊어진다.
  [문] 이미 진심(眞心)은 자취가 끊어졌고 도리[理]는 있고 없음을 벗어났다 하면서, 어떻게 교(敎) 중에서 무생(無生)과 무상(無相)의 뜻을 널리 말하는가?
  [답] 한 마음[一心]의 문은, 미묘하여 연구하기 어렵고 공덕이 두루 갖추어져서 이사(理事)가 원통하며 알음알이[知解]로 궁구하기 어려우며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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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미치지 못한다.
  모양 없다[無相]고 일컫기는 하나 실로 모양이 없다는 이름으로 일컬을 만한 법이 없고, 남이 없다[無生]고 이름 붙이기는 했으나 역시 남이 없다는 도리를 드러낼 만한 법이 없다.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온갖 선(善)ㆍ불선(不善)과 아(我)ㆍ무아(無我)와 실(實)ㆍ부실(不實)과 공(空)ㆍ불공(不空)과 세제(世諦)ㆍ진제(眞諦)와 정정(正定)ㆍ사정(邪正)과 유위(有爲)ㆍ무위(無爲)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와 흑법(黑法)ㆍ백법(白法)과 생사(生死)ㆍ열반(涅槃)과 법계(法界)와 같은 성품의 일상과 무상[一相無相]을 자세히 살피되 ‘이 중에서는 모양 없다고 이름할 만한 법이 없고, 모양 없다고 삼을 만한 법조차도 없다. 이것을 곧 온갖 법인[一切法印]이요 무너뜨릴 수 없는 인[不可壤印]’이라고 한다. 이 인(印) 안에서도 인의 모양[印相]이 없나니, 이것을 진실한 지혜라고 한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온갖 법인이란 이 마음의 인[心印]으로써 온갖 법을 표[印]하면 바로 진실임이 정해지며, 무너뜨릴 수 없는 인이라 함은 온갖 있고 없음과 안팎 등의 법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 인(印) 가운데서도 인의 모양이 없다. 만 가지 법은 모두가 공(空)이라 역시 표할 바가 없으며, 표할 바[所印]의 법이 이미 없으므로 능히 표함[能印]의 지혜도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진실한 지혜라고 한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이 법을 돌아보건대 중생의 본래 근원[本原]은 모든 부처가 증득한 것이어서 온갖 도리를 벗어나고 온갖 모양을 여의어서, 언어와 지식과 있고 없음과 숨고 드러남으로써 추구하여 얻을 수 없다.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표하고 인과 인[印印]이 서로 계합하여 스스로 광명을 증득하고 알아서 수용하게 될 뿐이다”라고 했다.
  [문] 마음을 세워 종(宗)을 삼는다면, 무엇으로써 취(趣)를 삼는가?
  [답] 믿고 행하여 과를 얻음[信行得果]으로써 취(趣)를 삼는다. 그러므로 먼저 큰 종(宗)을 세우고 뒤에는 취에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말이 숭상하는 것을 종(宗)이라 하고 종이 돌아갈 바를 취(趣)라 하나니, 나아가 깊은 의심을 끊고 분명한 믿음을 일으키고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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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를 내면 참되게 원만한 보리를 닦아 마지막 항상함의 과위[常果]를 이룬다”고 했다.
  또 유식(唯識)의 성품은 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의 네 가지 법을 골고루 포섭하였으니, 마음의 능전(能詮)은 교요, 마음의 소전(所詮)은 리요, 마음의 능성(能成)은 행이요. 마음의 소성(所成)은 과이다.
  법장 법사(法藏法師)는 『화엄경(華嚴經)』에 의하여 인과연기(因果緣起)와 이실법계(理實法界)를 세워서 종취로 삼았다.
  『석(釋)』에서 이르기를 “법계(法界)와 인과(因果)는 두 가지가 융화(融和)하되 다 같이 여의며 성상(性相)이 혼연(渾然)하여 걸림이 없고 자재하다. 열 가지 이치의 문[十義門]이 있으니, 첫째는 상(相)을 여의기 때문에 인과는 법계와 다르지 아니하다. 곧 인과는 인과가 아니다. 이것은 상에 즉함[卽]을 종(宗)으로 삼고 상을 여읨을 취(趣)로 삼으며, 혹은 상을 여읨을 종으로 삼고, 인과 없음을 취로 삼기도 한다. 아래 아홉 가지는 이것에 준(准)하여 생각하라.
  둘째는 성(性)을 여의기 때문에 법계는 인과와 다르지 않나니, 곧 법계는 법계가 아니다. 셋째는 성을 여의되 성을 없애지 않기 때문에 법계가 인과에 즉할 때에 법계는 완연(宛然)하며, 곧 법계가 아닌 것이 법계가 된다. 넷째는 상을 여의되 상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인과가 법계에 즉할 때에 인과는 역연(歷然)하며, 곧 인과가 아닌 것이 인과가 된다. 다섯째는 상을 여의되 성을 여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과와 법계는 둘 다 없어지고 함께 융화하여 말과 생각을 멀리 초월한다. 여섯째는 무너뜨리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고 앞에 환히 나타나서 볼 수가 있다. 일곱째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존재와 없어짐이 다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보고 듣는 미묘한 법을 뛰어나서 항상 보고 듣는 것에 통하지 않음이 없으며 생각하고 헤아림의 깊은 이치가 끊어지고, 일찍이 말과 생각에 걸리는 일이 없다. 여덟째는 법계의 성품은 원융하여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곧 법계의 인과가 각각 동시에 온전히 법계를 포섭하여 모두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 아홉째는 인과가 저마다 온전히 법계를 포섭할 때에 인과가 법계를 따라 저마다 서로가 인과 중에서 나타나며, 그 때문에 부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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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보살이 있고 보현(普賢) 안에 부처가 있다. 열째는 인과의 두 자리가 저마다 차별된 법에 따라 법계를 갖춰 포섭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법과 하나하나의 행과 하나하나의 자리와 하나하나의 덕이 모두가 각각 그지없고 그지없어서 제석의 보배 그물처럼 겹겹으로 된 법문(法門)의 바다를 온통 포섭하였나니, 이것을 화엄의 무진종취[華嚴無盡宗趣]라고 한다”고 했다.
  화엄의 실교(實敎)로써 뭇 경전을 온통 포섭하고 무진의 원종[無盡圓宗]을 드러내어 만 가지 법을 능히 갖추었으니, 두루하고 걸림 없고 자재하고 융통하여야 비로소 나의 마음을 나타내어 종경(宗鏡)을 능히 이룬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문]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 것이 선문(禪門)의 정맥(正脈)이다. 또 마음이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체(體)를 삼는가?
  [답] 요즈음의 학자(學者)들은 대부분 글에 집착하여 뜻을 저버리고 체(體)에 어두우면서 이름만을 안다. 이름은 알면서 체를 잊은 사람이 어찌 진실한 자리를 궁구하겠으며, 글만을 따르면서 뜻에 미혹한 이가 어찌 도(道)의 근원에 계합하겠는가?
  마음이란 바로 이름이요 앎[知]으로써 체를 삼는다. 이것은 바로 신령한 앎[靈知]이라 성품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니, 망식(妄識)이 연(緣)을 의지하고 대경에 의탁하여 뜻을 지으면서 아는 것과는 같지 않다. 또 곧 허공처럼 탁 틔고 아주 없어서 앎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조론(肇論)』에서 말하기를 “반야(般若)는 앎이 없다[無知] 함은 모양을 취하는 앎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가 ‘반야는 바로 지혜[智]이다’라고 하는데, 지혜라면 앎이 있는 것이다. 만약 앎이 있다면 취착(取着)이 있고 만약 취착이 있다면 남이 없음[無生]에 계합하지 아니한다. 이제 반야는 참된 지혜라 모양이 없고[無相] 연이 없음[無緣]을 밝힌 것이니, 비록 진제(眞諦)를 본다 해도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앎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성스런 마음은 앎이 없되 모르는 바가 없다’고 하셨고, 또 경에 말씀하기를 ‘참된 반야란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앎이 없고 소견도 없고 지음[作]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하셨다. 이것이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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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스스로 앎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니, 어찌 반조(返照)를 기다린 연후에야 앎이 없겠는가? 이것은 성품 스스로 앎이 없음을 아는 것이요, 잊음[忘]을 의지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로써 참된 앎은 있다ㆍ없다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비밀이 있으셨고 비밀의 가르침을 조사(祖師)는 묵묵히 전했으며, 은밀하게 부촉한 종(宗)은 몸소 살펴보아야만 상응하는 것이요, 언전(言詮)으로 표시할 바는 아니다.
  만약 종(宗)에 밝은이가 환히 알아서 어둡지 아니하면 고요하여 언제나 아는지라, 분명하면서 눈에 가득히 밝게 빛나거늘 어찌 신통으로 나타내려 하겠으며, 번쩍번쩍하면서 티끌마다 투명하지 아니함이 없거늘 어찌 미묘한 변재로 들날리려 하겠는가?
  통달하지 못한 이를 위하여 방편의 문을 드리워서 이 앎에 의지하여 깊숙한 데마다 다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문] 모든 법이 난 것은 유심(唯心)으로 나타난 바라 하는데, 마음으로부터 변하는 것인가, 바로 마음의 제 성품[自性]인가?
  [답] 이것은 마음의 본래 성품[自性]이요, 마음의 변하는 것만이 아니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의 깨침을 연유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셨고, 『법화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삼천세계 중에/온갖 모든 중생들인/하늘ㆍ사람ㆍ아수라와/지옥ㆍ아귀ㆍ축생들의/이러한 모든 빛깔과 형상들은/모두가 몸속에서 나타나느니라”고 하셨으니, 바로 심성(心性)이 온갖 처소에 두루한 줄 알 것이다.
  그런 까닭에 4생(生)과 9류(類)들 모두는 제 성품의 몸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자기의 진심(眞心)은 온갖 만유(萬有)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색(色)과 공(空)이 됨에 따라 법계(法界)에 두루하며, 업(業)을 따라 나타나되 과보는 같지 않다. 범부에 처하면 업의 바다[業海]에 뜨고 잠기면서 생사가 계속되며, 모든 성인에 있으면 법신(法身)이 원만하여 미묘한 작용[妙用]이 그지없다. 숨고 드러남은 비록 다르나 하나의 성품은 동요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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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만약 온갖 법이 그대로 마음의 제 성품이라면, 어떻게 또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니라[非性]고 설명하는가?
  [답]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이라 하면, 이것은 바로 표전(表詮)이니, 온갖 법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곧 나의 마음의 진실한 성품인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니라고 함은 이것은 바로 차전(遮詮)이다.
  만약 차전과 표전의 글을 초월할 수 있으면, 즉리(卽離)라는 뜻의 고집을 없애고 비로소 견성(見性)하여 자기 눈이 뚜렷이 밝게 되리라.
  지금처럼 만약 제 마음을 단박에 깨치고 부처의 지견(知見)이 열리기를 바란다면, 제 성품이 온갖 처소에 두루 하다 함을 환히 알 뿐이다. 보고 듣는 것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나타나고 마음 이외에는 한 털끝만큼의 법도 체성(體性)이 있는 것이 없으므로 저마다 서로가 알지 못하고 저마다 서로가 이르지[相到] 아니한다. 왜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법이기 때문에 서로가 알고 서로가 이를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두 개의 법이 있어서 곧 서로가 갔다 왔다 한다면,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경계거나 지혜이거나 간에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어서 이른바 성품이 없음[無性]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성품이 없다는 뜻이야말로, 바로 도의 근원[宗]을 얻고 평등의 실마리를 지으며 공을 설명하는 까닭이 되리니, 마침내 부처가 되어 공부(工夫)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법성(法性)은 본래 공하고 고요하여/취하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다./성품의 공이 바로 부처여서/헤아림으로써는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곧장 이것을 믿지 않고 생각을 일으켜 내달아 구한다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허공을 피하려는 것 같고 머리를 잃고 미쳐서 달려 다니는 것과 같으리라.
  융 대사(融大師)가 이르기를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면 번뇌는 더욱더 치성하리니, 헤아려 견줌은 떳떳함[常]에 어긋나고 참됨을 구함은 바름[正]을 저버린다”고 했으며,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살피고 살피면서 부지런히 힘씀은, 한낱 헛된 생각만을 일으키는 것이요, 몹시 두려워하면서 바깥으로 찾음은 더욱 현묘(玄妙)한 길을 잃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바르게 생각하여 진실한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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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근원에 드셨으니, 그 때문에 평등하고 큰 지혜의 문을 능히 열었고 중생들의 청하지 않은 벗[不請之友]이 되어 주셨다.
  그 까닭에 「문명품(問明品)」에서 말했다.
  “그 때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각수(覺首) 보살에게 물었다.
  ‘불자(佛子)여, 심성(心性)은 바로 하나이거늘, 어떻게 갖가지의 차별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까? 이른바 착한 갈래[善趣]와 나쁜 갈래[惡趣]로 가고, 모든 감관이 완전하거나 결함이 있고, 생을 받되 같거나 다르고 단정하거나 누추하며,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지 아니하고, 업(業)은 마음을 모르고 마음은 업을 모르며, 받음[受]은 과보[報]를 모르고 과보는 받음을 모르며, 마음은 느낌[受]을 모르고 느낌은 마음을 모르며, 인(因)은 연(緣)을 모르고 연은 인을 모르며, 지혜[智]는 경계[境]를 모르고 경계는 지혜를 모릅니다.’
  그때 각수 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어진이여, 이제 그런 뜻을 물어서/여러 중생들을 깨우치려 하는구려./나는 그의 성품 그대로를 답하리니/어진 이는 자세히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법이란 작용(作用)이 없고/또한 체성(體性)도 없는 것이라/그러므로 저 온갖 것들은/저마다 서로가 알지 못합니다.
  비유하면 강물 속의 흐르는 물이/여울 되어 물살이 빠르게 가면서도/저마다 서로가 모르는 것처럼/모든 법 또한 그러합니다.
  또한 마치 큰 불 무더기가/사납게 불길 일어 동시에 타면서도/저마다 서로가 모르는 것처럼/모든 법 또한 그러합니다.
  또 마치 세찬 바람이 일어서/물건에 휘몰아쳐 모두 불어대면서도/저마다 서로가 모르는 것처럼/모든 법 또한 그러합니다.
  또 마치 뭇 땅의 지경에/점차로 의지하고 머무르면서도/저마다 서로가 모르는 것처럼/모든 법 또한 그러합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마음과 뜻이며 여러 가지 감관이/이로써 언제나 유전(流轉)하면서도/그러나 굴릴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법성(法性)은 본래부터 남[生]이 없건만/나투어 보이면서 남이 있거니와/이 속에선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고/또한 나타낼 바 물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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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마음과 뜻이며 여러 가지 감관이/모두가 공하여 성품이 없거늘/망심으로 있다고 분별합니다.
  이치대로 자세히 살피어 보면/온갖 것 모두가 성품이 없으며/법안(法眼)은 생각하거나 말로 할 수 없어서/이것으로 보는 것[見]만으로 뒤바뀜은 아닙니다.
  진실이거나 진실하지 않거나/망령된 것이거나 망령된 것 아니거나/세간이거나 출세간(出世間)이거나 간에/가정으로 언설이 있을 뿐입니다.’”
  『소석(疎釋)』에서 말하였다.
  “묻는 뜻은 ‘심성은 바로 하나거늘, 어떻게 과보들은 갖가지가 있음을 보게 되는가’라고 함을 밝히고 있다. 만약 성품이 일[事]을 따르면서 다르다면 진제(眞諦)를 잃고, 만약 일이 성품을 따르면서 하나라면 속제(俗諦)를 무너뜨린다. 설령 저들이 두둔하여 말하되 ‘과보들은 서로가 다르고 마음대로 지은 업(業)들은 식(識)에 훈습되어 변하여 나타난다. 심성에 관여하지 않은 까닭에 서로 어긋남이 없다’고 하면, 이 두둔을 막기 위해서도 거듭 문난(問難)하면서 ‘업은 마음을 모른다’라고 하는 것 등을 말한다.
  마음과 업은 서로가 의지하되 저마다 제 성품이 없다. 제 성품조차 오히려 없거늘, 어찌 서로가 능히 알면서 모든 법을 내겠는가? 이미 참된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저마다 스스로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가 심성에 의지하면서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심성은 이미 하나이므로 일이 많지 않아야 하고, 일의 법이 이미 많으므로 성품은 하나가 아니어야 된다. 이것은 바로 근본과 끝이 서로 어긋나는 문난이다.
  이 묻는 뜻에 준(准)한다면, 여래장(如來藏)을 여의고는 8식(識)의 능훈(能熏)과 소훈(所熏) 등이 따로 자체가 있어서 모든 법을 능히 낸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오직 여래장만이 의지하여 낼 바라는 것이다. 문수는 실교(實敎)의 도리를 나타내려고 짐짓 심성으로써 문난의 근본을 삼았고, 각수로 하여금 법성으로써 남을 보여 모인 대중들에게 결정적으로 대답하려 한 것이다.
  심성은 하나라고 동일하게 증명한 것은, 마음의 성품이기 때문에 이것은 여래장임을 말한다. 또 마음 그대로가 성품이기 때문에 이것은 제 성품이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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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한 마음이다.
  또 망심(妄心)의 성품은 성품 없는 성품이므로 공여래장(空如來藏)이요, 진심(眞心)의 성품은 실제 성품의 성품이므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니, 모두가 평등하여 둘이 없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한다.
  또 망심의 성품은 마음을 이루는 성품이요, 망심은 바로 상(相)이어서 성상(性相)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진심의 성품은 진심 그대로가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앞의 두 가지 마음의 성품’이라 한 것은 따로따로 두 장[二藏]임을 밝혔으며, 앞의 두 성품은 모두가 두 장을 갖추었다. 다만 망(妄)이 가리어졌으므로 여래장이라 할 뿐이요, 바른 대로 말하면 장의 체[藏體]가 그대로 제 성품인 마음이다. 때문에 이 제 성품이 청정한 진심은 망과 더불어 합하지 않으므로 공장(空藏)이라고 하며, 항하 모래만큼 많은 덕을 갖추었으므로 불공장(不空藏)이라 한다. 앞의 것은 즉리(卽離)를 밝힌 것이고 여기서는 공유(空有)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거듭 나온다.
  ‘모두가 평등하여 둘이 없다’ 함은 위의 두 가지는 즉(卽)과 이(離)가 같지 않아서 마음의 성품이기 때문에 즉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곧 성품이기 때문에 여의지 않았다.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은 것이 마음의 성품이다.
  뒤의 두 가지는 곧 공의 실제[空之實]이므로 불공(不空)이 되고, 곧 실제의 공[實之空]이므로 공장(空藏)이 된다. 공과 존재[有]가 둘 아닌 것이 마음의 성품이다. 그러나 공과 존재는 둘이 없는 성품이어서 곧 이것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은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라고만 말하거니와, 또 본래의 성품은 바로 하나만이 아니다.
  나는 자세히 추구하면서 일마다 서로가 모르는 것[不相知]을 나타내겠다.
  이미 갖가지[種種]가 있거늘, 무슨 일로 서로가 모르는가? 이미 서로가 모른다면, 누가 갖가지라고 가르쳤는가?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봐도 아직 갖가지라고 한 까닭을 모르겠다. 이미 서로가 모른다면 이것은 하나의 성품인가, 이것은 갖가지의 것인가?
  또 문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본식(本識)에서 보자. 업(業)은 능의(能依)요 마음은 소의(所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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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소(所)를 여의면 능(能)이 없기 때문에 업은 마음을 모르며, 능을 여의면 소가 없기 때문에 마음은 업을 모른다. 저마다 체(體)와 용(用)이 없으므로 서로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미 저마다 서로가 모르거늘, 누가 갖가지를 냈겠는가?
  둘째 제6식(識)에서 보자. 업은 소조(所造)요, 마음은 능조(能造)이다. 모두 다 같이 빨리 소멸되는데, 일으킬 때에도 ‘내가 일으킨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소멸할 때에도 ‘내가 소멸한다’고 말하지 않거늘, 어찌 체(體)가 능히 있어서 서로가 내며 갖가지를 이룰 수 있겠는가?
  또 경지(境智)에서 보아도 서로가 대(對)하고 서로가 본다는 것이 허무한 문난이다. 경계는 마음의 변화이므로 경계는 마음을 모르며, 마음은 경계에 의탁하여 나므로 마음은 경계를 모른다. 경계 밖의 마음이 마음 밖의 경계를 능히 취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가 모른다.
  업(業)은 마음을 모르고 마음은 업을 모른다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식(本識)에서 보자. 업은 심소(心所)이기 때문에 마음에 의지하며, 마음은 제8식(識)이 근본의(根本依)가 된다. 곧 소(所)를 여의면 능(能)이 없다. 왜냐 하면 소의의 심왕(心王)이 없으면 능의의 업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에 의하여 업이 있으며, 업은 연(緣)을 따라 나기 때문에 제 성품이 없고 마음을 알 수 없다. 만약 능을 여의고 소가 없거나 하여 능의의 업을 여의면 마음은 소의가 아니다. 이제 업으로 말미암아 소(所)를 이루나 소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업을 알 수 없다. 저마다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 성품은 공(空)하여 체가 없으며, 서로 의지하되 무력(無力)하기 때문에 용(用)이 없다고 한다. 그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체와 용이 없기 때문에 본래 서로가 모른다’고 하셨다.
  둘째 제6식에서 보자. 업은 소조(所造)요, 마음은 능조(能造)의 것이다. 곧 제6식을 마음이라 함은 쌓이고 모임[積集]에 따르는 통상(通相)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6식은 사람들이 무명(無明)에 집착하여 진실한 이치와 이숙(異熟)의 도리를 미혹했기 때문에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것과 상응한 생각으로 죄 등을 지으며, 죄와 복과 부동(不動) 등의 세 가지 행[三行]으로써 아뢰야식(阿賴耶識)에 훈부(熏府)하여 다섯 갈래[五趣]의 좋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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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좋지 않은 등등의 갖가지 과보의 모양을 받게 하는 것이니,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이치이다.
  통상(通相)으로서 말하면 모두가 체와 용이 없는 데에 요약되기 때문이나 별상(別相)으로서 말하면 용(用)의 문은 같지 않다.
  이 용(用)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무상의 문[無常門]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두가 다 같이 빨리 사라진다’고 하셨으며, 『정명경』의 「제자품(弟子品)」에서는 ‘온갖 법은 마치 환영과 같고 번개와 같으며, 모든 법은 서로가 기다리지 아니한다. 내지 한 생각조차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아니함은 모두가 망령된 소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마음과 업은 모두가 공한 것이다.
  『화엄경』의 게송에서는 ‘뭇 과보는 업을 따라 나는데/마치 꿈이 진실하지 않음과 같다/생각마다 언제나 사라지고 무너지며/앞과 같이 뒤의 것도 그러하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상하기 때문에 서로가 알 수 없다.
  둘째는 무아의 문[無我門]이다. 곧 일으킬 때에도 ‘나는 일으킨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사라질 적에도 ‘나는 사라진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법무아(法無我)에서 보아 서로가 알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받음[受]은 과보[報]를 모르고 과보는 받음을 모른다고 함은, 받음은 능히 받음[能受]의 인(因)이요 과보는 받을 바[所受]의 갚음[報]이니, 바로 명언종(名言種)이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생사가 서로 이어짐은 모든 습기(習氣)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러나 모든 습기에는 통틀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요,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요,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이다. 명언습기라 함은 유위(有爲)의 법이 각각 따로따로 종자(種子)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명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의명언(表意名言)이니, 곧 능전(能詮)과 뜻[義]과 음성(音聲)으로 나누어 가른다. 둘째는 현경명언(顯境名言)이니, 곧 경계를 능히 깨달아 아는 심왕(心王)과 심소법(心所法)이다. 두 가지 명언의 소훈(所熏)에 따라 종자를 이루며, 유위의 법은 각각 따로따로의 인연(因緣)을 짓는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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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따로따로 종자를 가까이 한다고 함은 세 가지 성품[三性]의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능전과 뜻과 음성이라 함은 글[詮]과 소리가 없음을 가린 것이니, 그것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은 바로 음성 위의 굴곡(屈曲)이어서 무기의 성질[無記性]일 뿐 물질과 정신[色心] 등의 종자에 훈성(熏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름으로 인하여 종자가 생기고 명언의 종자가 성립된다.
  현경명언은 곧 7식(識)의 견분(見分) 등의 마음이요 상분(相分)의 마음이 아니다. 상분의 마음이라 함은 경계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견분 등은 실제는 명언이 아니로되, 마치 언설과 이름이 소전(所詮)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 심ㆍ심소는 알 바의 경계를 능히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저 이름과 비슷한 능전의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명언에 따라 모두가 종자를 훈성한다.
  논(論)에 이르기를 ‘셋째의 유지습기(有支習氣)는, 3계(界)의 이숙(異孰)의 업종자(業種子)를 부른다’고 했다.
  유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루의 선[有漏善]이니, 곧 사랑할 만한 과업[可愛果業]을 능히 초래한다. 둘째는 모든 불선[諸不善]이니, 곧 좋지 않은 과업[非愛果業]을 능히 초래한다. 두 가지 유지의 소훈(所熏)에 따라 종자를 이루며, 이숙의 과보로 착한 갈래와 나쁜 갈래가 구별되게 한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모든 업(業)의 습기와/이취습기(二取習氣:名言ㆍ顯境)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앞의 이숙(異熟)이 이미 사라지면/다시금 다른 이숙이 생긴다’라고 했다.
  이 능히 이끌음[能引]의 업은, 곧 모든 업의 습기이다. 이 명언종자가 바로 이취습기이다. 업에 이끌린다 함은, 곧 그것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친히 갖춘 과의 체[親辦果體]는 바로 명언을 말미암는 것이다. 만약 업종자가 없으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종자가 밭에 없으면 끝내 싹이 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명언이 업을 이끌고 일으킴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장차 오늘 세상에 이숙의 과인 괴로움과 즐거움의 응보(應報)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업은 밭이 되고 식(識)은 종자가 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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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갖가지로 ‘서로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문난의 이치를 마치고, 이제는 연기의 모양[緣起相]을 말미암아[由]라고 하는 문(門)의 해석으로써 답하겠다.
  첫째 구절의 인연(因緣)은 서로가 임시여서 둘 모두가 힘이 없는 것이요, 둘째 구절의 과법(果法)은 허망을 머금었기 때문에 체성(體性)이 없다.
  그러므로 허망한 연기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서로서로가 의지함으로 말미암아[由互相依] 각각 체와 용[體用]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르며, 둘째는 이 앎이 없고 성품이 없는 것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由依此無知無性] 비로소 연기가 있으며, 셋째는 이 허망한 법으로 말미암아[由此妄法] 저마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진리로 하여금 항상 나타나게 한다.
  또 과(果)는 인(因)으로부터 생기므로 과는 체성이 없으며, 인은 과로 말미암아 성립되므로 인은 체성이 없다. 인은 체성이 없거늘 어찌하여 과를 받는 용[感果之用]이 있겠으며, 과는 체성이 없거늘 어찌 인을 갚는 능[酬因之能]이 있겠는가?
  또 서로서로 상대(相對)하기 때문에 무력하며, 남의 것으로써 자기를 삼기 때문에 체가 없다. 그러므로 체와 용이 다 함께 없다. 그런 까닭에 온갖 법은 저마다 서로서로가 모른다.
  이제 처음에 4대(大)로써 비유하겠다. 첫째 물에 의하여 흘러듦이 있고[依水有流注], 둘째 불길에 의하여 일어나고 꺼짐이 있고[依火焰起滅], 셋째 바람에 의하여 동작이 있고[依風有動作], 넷째 땅에 의하여 유지함이 있다[依地有任持].
  법의 이 네 가지는 첫째 진망(眞妄)에 의하여 서로가 이어지며, 둘째 진망에 의하여 생기고 소멸되며, 셋째 망의 용(用)은 진에 의하여 일어나며, 넷째 망은 진에게 지님을 받는다.
  그러나 이 법의 비유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세 가지씩의 이치가 있다. 첫째는 능의에 나아갈 뿐[唯能能依]이요, 둘째는 소의에 의하며[依所依], 셋째는 소의일 뿐[唯所依]이다.
  이제 첫째 비유를 능의에 나아갈 뿐이란 것에 맞추어 보면, 물의 흐름[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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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의 흘러 들어감[流注]에는 열 가지의 서로가 모르면서 흐른다는 이치가 있다.
  첫째는 앞의 흐름은 저절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뒤의 흐름이 밀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니, 곧 앞의 흐름은 제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에 뒤를 모른다. 둘째는 뒤의 흐름이 비록 앞의 흐름을 민다 해도 앞의 흐름에 이르지 못하므로 역시 서로가 모른다. 셋째는 뒤의 흐름은 저절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앞의 흐름이 이끌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니, 곧 뒤의 흐름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앞의 것을 알 수 없다. 넷째는 앞의 흐름이 비록 뒤의 것을 끈다 해도 뒤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서로가 모른다. 다섯째는 미는 것[能排]과 이끌리는 것[所引]은 둘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여섯째는 이끄는 것[能引]과 밀리는 것[所排]은 둘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일곱째는 미는 것과 밀리는 것 또한 둘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여덟째는 이끄는 것과 이끌리는 것 또한 둘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아홉째는 미는 것과 이끄는 것과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열째는 밀리는 것과 이끌리는 것 또한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이것은 곧 앞뒤가 서로 상대에게 이르지 못하므로 저마다 제 성품이 없으며, 이와 같은 앎이 없고 성품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흘러 들어감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흐르지 않으면서 흐르는 것이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강물은 다투어 흘러들면서도 흐르지 아니한다’라고 했으니, 바로 그런 뜻이다.
  둘째의 소의에 의한다[依所依] 함은, 앞의 흐름과 뒤의 흐름이 저마다 모두가 물에 의하되 모두가 자체가 없어서 서로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흐름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물의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셋째의 소의일 뿐[唯所依]이라 함은, 흐름이 이미 통틀어 없다면 이것은 물일뿐이며, 앞의 물과 뒤의 물에는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알 수 없다. 이것이 곧 본래 흐름이 없는데도 흐름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두 가지 법[二法]에 세 가지 이치를 맞추어 본다면, 첫째 흐름의 비유는 능의의 망법[能依妄法]이며, 둘째 망은 진에 의하여 성립되며[妄依眞立], 셋째 망이 다하면 진일 뿐[妄盡唯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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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것을 허망한 연기(緣起)의 법에 맞추면, 서로서로가 의지하는 것 같지만 저마다 서로가 도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성품이 없고 앎이 없다. 이것이 곧 있으면서도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번의 소의에 의한 것[依所依]은 이 허망한 법은 저마다 서로가 텅 비어 있으므로 진(眞)을 포함해야 비로소 성립하리니, 어찌 체와 용이 있어서 서로가 알고 서로가 이룰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앎이 없고 이룸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진을 포함하기 때문에 있게 된다. 이것이 곧 있는 것이 아니면서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번의 소의일 뿐[唯所依]이라는 것은, 능의(能依)의 망법(妄法)은 아득하여 체와 용이 없고 진심이 우뚝하게 나타날 뿐이니, 이미 피차(彼此)가 없거늘 어찌 서로가 앎이 있겠는가? 바로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망법은 있는 것이며, 곧 있는 것이 아니면서 있게 된다. 다시 참된 성품이 숨은 것으로도 설명하는데, 숨은 것이 아니면서 숨은 것이 된다.
  또 앞과 뒤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고 없어짐의 앞과 뒤[生滅前後]요, 둘째는 이것과 저것의 앞과 뒤[彼此前後]이다. 나고 없어짐의 앞과 뒤라 함은, 앞의 것이 없어지면 뒤의 것이 나서 서로가 이끌고 민다. 이것은 바로 수설(竪說)로서 마치 장년과 노인처럼, 이 흐르는 물이 찰나(刹那) 동안에 나고 없어지는데, 앞의 것이 찰나 동안에 없어지면 뒤의 것이 찰나 동안에 나게 된다.
  이것과 저것의 앞과 뒤라 함은, 이것은 바로 횡설(橫說)로서 마치 두 사람이 같이 좁은 길을 갈 때에 뒷사람은 앞 사람을 밀고 앞 사람은 뒷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조각조각의 물이 모두 앞과 뒤가 있고 작은 물방울에 이르기까지도 앞의 작은 물방울과 뒤의 작은 물방울이 있다. 그러므로 많이 모여서 흐름을 이룬다면 성품은 없는 것이다.
  소승(小乘) 역시 이곳에서 나고 없어짐을 말하면서 이로부터 딴 지방으로 옮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함은 성품이 없는 연기[無性緣起]의 이치를 몰라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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