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3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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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교(敎)에서 일체 만법은 지극한 도리[至理]라 비고 오묘하여 유무(有無)의 언전[詮]이 아니고 자타(自他)의 성(性)이 끊어졌다고 밝혔는데, 만약 하나의 법도 자체(自體)가 없다면 어떻게 종(宗)을 세우는가?
  [답] 만약 종(宗)이 서지 않는다면, 배움은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만약 자타와 유무를 논하면, 모두가 이는 중생의 식심(識心)의 분별이어서 이는 다스림의 문[對治門]이라 상대를 따라서 있는 것이다. 법신(法身)의 자체(自體)는 치우치지 않고 충만한 진리인 마음이거늘, 어찌 환상의 유(有)와 같겠으며 환상의 무(無)를 따르지 않겠는가?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혜(大慧)여, 마치 소와 말의 성품[牛馬性]은 소와 말의 성품이 아니어서 그 실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지만, 그것에 자상(自相)이 없지는 않느니라’라고 하였다”고 했다.
  고석(古釋)에서 이르기를 “말의 몸 위에 소의 성품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의 자체(自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로써 비유하건대 법신(法身)의 위에서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법신의 자상(自相)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법공(法空)의 도리로서 유무를 초월했으므로, 곧 법신의 성품이다. 그러나 나아감이 있고 향함이 있어서 지혜[智]는 천진(天眞)을 저버리고 얻음이 없고 돌아감이 없어서 정(情)은 단멸(斷滅)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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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있으면 구할 필요가 없어서 참된 법[眞規]이 그대로요, 없으면 저절로 만족해서 묘한 뜻[妙旨]이 환히 빛날 뿐이니, 곧 고요하여 돌아갈 데가 있고 평안하여 간격이 없다. 단번에 능소(能所)를 뛰어나서 유무(有無)에 있지 않다면, ‘참된 돌아감[眞歸]이요, 지극한 도[至道]를 능히 통하였다’고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문]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다면, 어떤 것이 곧 종통(宗通)의 모양인가?
  [답] 안으로 자기 마음의 첫째가는 이치를 증득하여 자각의 자리[自覺地]에 머무르고 성지의 문[聖智門]에 들어서 이것과 상응하면 종통의 모양이라 한다.
  이는 바로 작용[行]하는 때요, 이는 알음알이[解]의 때가 아니다. 알음알이로 인하여 작용이 이루어지고 작용이 이루어져서 알음알이가 끊어지면, 곧 말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의 작용이 사라지는 것[心行處滅]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대혜(大慧)에게 ‘종통이라 함은, 자득(自得)으로 말미암아 승진상(勝進相)으로서 언어와 문자의 망령된 생각을 멀리 여의고, 무루계(無漏界)에 나아가는 자각의 자리인 자상(自相)으로서 온갖 허망한 거친 생각[覺想]을 멀리 여의고서 온갖 외도와 뭇 악마를 항복시키고 자각(自覺)으로 말미암아 나아가서 광명을 떨쳐 드러내는, 이것을 종통의 모양이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깨치면 조사가 되는 것이며 앞의 성인들이 서로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達磨) 대사가 말하기를 “부처 마음의 종(宗)을 밝히면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행해(行解)가 상응하나니, 그를 조사[祖]라 한다”고 했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악(惡)을 보면서도 싫증 내지 아니하고/선(善)을 보면서도 힘써 하지 아니하며/어리석음 버리고서 성현 가까이 하지도 않고/복을 던지고서 깨침으로 나아가지도 않네./큰 도[大道] 체달하면 교량(較量)할 수 없게 되고/부처 마음 통달하면 벗어나며 건너는도다/범부와 성인이 함께 하지 않되 자취가 같아서/초연(超然)하는 그것을 조사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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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도를 깨치고 종(宗)에 밝으면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적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그 행상(行想)을 설명하겠는가?
  [답] 전에도 이미 말하였지마는, 모든 부처님의 방편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아서 은밀하게 깊은 자비를 펴서 외로이 버려지게 하지 않았다. 이미 분명하게 통달한 이라면 끝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다만 의심나기 때문에 묻고 묻기 때문에 대답할 뿐이다.
  이는 바로 본사(本師)가 능가회상(楞伽會上)에 시방의 여러 큰 보살들이 와 법을 구하자 이들을 위하여 친히 이 두 가지 통[二通]을 말씀하셨으니, 첫째가 종통(宗通)이요, 둘째가 설통(說通)이다.
  종통은 보살들을 위한 것이요, 설통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조사와 부처는 고개 숙여 초기(初機)를 위하였고, 아이들에게는 적게 열어 보였다.
  여기에 설통을 요약하면, 다만 다른 이로부터 법을 찾으면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기 위한 것이며, 방편을 고집하여 진실을 삼고 종통에 미혹할까 해서였다. 이 때문에 분리하여 두 가지 통의 이치를 열었다.
  종통이란 자득(自得)으로 말미암은 승진상(勝進相)으로서 언어와 문자의 망령된 생각을 멀리 여의고, 내지 자각(自覺)으로 말미암아 나아가서 광명을 발휘하는 것이다.
  만약 친히 자각의 자리에 도달하여 광명을 낼 때에는 이르기를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적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과 같고, 마치 뭇 소경이 눈을 뜨면 분명히 대경[境]을 보는 것과 같다”라고 할 수 있다.
  코끼리의 진짜 몸을 증험하였다면 마침내 그의 꼬리와 어금니를 만지지는 않으며, 우유의 바른 빛깔을 보았다면 어찌 그것을 “꼬리요, 눈이요”라고 말하였겠는가? 완전한 눈을 지니게 될 사람 앞에서 만약 다시 말을 해 보일 때, 안다고 하지 않으면 그를 대법사(大法師)라고 일컬으리라.
  실제로 달을 본 사람이면 마침내 손가락을 보지는 않으며, 친히 집에 이른 이면 저절로 길을 묻지 않게 된다. 증득해야만 상응하는 것이어서 말을 기다리지 않으니, 마침내 손가락을 고집하여 달이라 하지도 않고, 또한 손가락을 떠나서 달을 보지도 않는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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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왕이 한 대신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끌어다가 소경들에게 보이시오.’
  그러자 그 때에 대신은 왕의 명을 받고서 소경들을 많이 모으고 코끼리를 보였다. 때에 그 소경들은 저마다 손으로 만져 보았다. 대신은 즉시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벌써 다 보였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이내 소경들을 불러서 각각 물었다.
  ‘너희들은 코끼리를 보았느냐?’
  소경들은 저마다 말하였다.
  ‘저희들은 다 보았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코끼리는 어떠한 종류더냐?’
  그러자 그 어금니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 형상은 마치 무 뿌리와 같았습니다.’
  그 귀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키와 같았습니다.’
  그 머리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돌과 같았습니다.’
  그 코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절굿공이와 같았습니다.’
  그 다리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나무절구와 같았습니다.’
  그 등을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평상과 같았습니다.’
  그 배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항아리 같았습니다.’
  그 꼬리를 만진 이가 말하였다.
  ‘코끼리는 마치 줄과 같았습니다.’
  선남자야, 마치 저 소경들이 코끼리 몸을 설명하지는 못했으나 또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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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못한 것도 아닌 것과 같다. 만약 이 뭇 모양이 모두가 코끼리가 아니라면, 이것을 떠나서 그 밖에 다시 따로의 코끼리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왕은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에 비유하였고, 대신은 방등(方等)ㆍ대열반경(大涅槃經)에 비유하였고, 코끼리는 불성(佛性)에 비유하였고, 소경은 모든 무명(無明)의 중생에게 비유하였느니라.
  이 모든 중생들은 부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빛[色]이 곧 불성입니다. 왜냐 하면 이 빛이 비록 사라지기는 하나 차례로 서로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없는 여래의 32상(相)을 얻게 되셨으니, 여래의 항상한[常] 빛입니다. 여래의 빛이란 언제나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니, 이 빛을 말하여 불성이라 합니다. 마치 진짜 금이 형질은 비록 옮아 변하나 빛은 언제나 달라지지 않아서 때로는 팔찌가 되기도 하고 대야가 되기도 하지마는 그러나 그 누런빛은 처음부터 바꿔지지 않는 것처럼, 중생의 불성도 이와 같아서 형질은 비록 덧없기는 하나 빛은 바로 항상합니다. 이 때문에 빛을 말하여 불성이라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까지를 말하면서 불성이라 하였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음(陰)을 여의면 나[我]가 있으므로 내가 불성입니다. 마치 저 소경들이 저마다 코끼리를 말하면서 비록 진실은 얻지 못했으나 코끼리를 말하지 못한 것도 아닌 것처럼, 불성을 말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곧 6법(法) 그것이 아니면서 6법을 여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이 때문에 나는 중생의 불성은 빛이 아니로되 빛을 여의지도 않았고, 내지 내가 아니로되 나[我]를 여의지 않았다고 말하느니라.
  선남자야, 여러 외도들이 비록 나가 있다고 말하나 실은 나가 없느니라. 중생의 나란 곧 5음(陰)이니, 5음을 떠나서 그 밖에 다시 따로의 나는 없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줄기ㆍ잎ㆍ술ㆍ받침이 합쳐서 연꽃이 된 것과 같아서, 이것을 떠나서 그 밖에 다시 따로의 꽃은 없느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여러 외도들은 어리석기가 어린아이와 같다. 슬기와 방편이 없는지라 항상함과 덧없음ㆍ괴로움과 즐거움ㆍ깨끗함과 더러움ㆍ나[我]와 나 없음ㆍ목숨과 목숨이 아님ㆍ중생과 중생이 아님ㆍ진실과 진실이 아님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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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와 존재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느니라.
  불법 중에서는 조그만 허망으로라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다고 헤아리면 실로 상ㆍ낙ㆍ아ㆍ정을 모르는 것이니, 마치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우유 빛깔을 모르는지라 다른 이에게 물은 것과 같으니라.
  ‘우유 빛깔은 무엇과 같습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하였다.
  ‘빛깔의 희기가 마치 조개와 같습니다.’
  소경이 다시 물었다.
  ‘이 우유 빛깔이란, 마치 조개의 껍데기 같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조개의 빛깔은 무엇과 같습니까?’
  ‘마치 쌀죽과 같습니다.’
  소경이 다시 물었다.
  ‘우유 빛깔의 부드러운 것이 쌀죽과 같습니까? 그러면 쌀죽은 무엇과 같습니까?’
  ‘마치 내리는 눈과 같습니다.’
  소경이 다시 물었다.
  ‘저 쌀죽의 찬 것이 마치 눈과 같습니까? 그러면 눈은 또 무엇과 같습니까?’
  ‘마치 흰 고니와 같습니다.’
  나면서부터의 소경이 비록 이러한 네 가지의 비유를 들었다손 치더라도 끝내 우유의 참 빛깔을 알게 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외도들도 그러하여 끝내 상ㆍ낙ㆍ아ㆍ정을 알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이치 때문에 나의 불법 중에는 진실한 진리[眞實諦]가 있지마는 외도(外道)의 것이 아니니라.”
  진실한 진리란 종경(宗經)의 돌아갈 바이다. 아직 듣고 깨치지 못한 때에 믿고 알지 못한 이는, 온갖 설법이거나 스스로의 수행이 모두 생멸에 굴복하는 문을 이루고 생멸 없는 구경(究竟)의 도에 들지 못한다.
  『암제차녀경(菴提遮女經)』에서 말하였다.
  “그때 문수사리(文殊舍利)가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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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되 나지 않은 모양[不生相]을 분명히 알면서 생(生)에 장애를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대답하셨다.
  ‘있다. 비록 스스로가 분명히 보기는 하나 그 힘이 넉넉하지 못한지라 생(生)에 머무름을 당하는 이가 바로 그다.’
  또 물었다.
  ‘아는 것이 없는지라 생의 성품[生性]을 모르면서 마침내 생(生)에 장애를 당하지 않는 이가 있습니까?’
  대답하셨다.
  ‘없다. 왜냐 하면 만약 생(生)의 성품을 보지 않으면 비록 조복(調伏)으로 인하여 조금은 편안한 곳을 얻기는 하나, 그 불안한 모양은 언제나 대치(對治)가 되거니와 만약 생(生)의 성품을 능히 보면 비록 불안한 곳에 있다손 치더라도 편안한 모양이 언제나 앞에 나타나느니라.’
  만약 이렇게 알지 않으면 비록 갖가지의 훌륭한 변재로 매우 깊은 전적(典籍)을 설명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곧 생멸하는 마음으로서 저 실상(實相)의 비밀스런 요의[密要]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소경이 빛깔을 말하되 다른 이의 말로 인하여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검은 것을 말하게 되므로 자신은 빛깔의 바른 모양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지금 모든 법을 보지 못한 이도 역시 그와 같다.
  다만 지금 생(生)에 의해 생겨나게 되고 죽음[死]에 의해 죽게 된 이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곧 나고 죽는 이치가 없다는 것인가? 만약 항상함[常]과 무상(無常)에 매임을 받는 이도 역시 그와 같다. 크게 공(空)을 얻어야 될 이가 역시 스스로가 공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짐짓 공이 있다는 이치를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온갖 법의 무생(無生)의 성품을 환히 알면 바로 도(道)를 얻게 되는 줄 알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善現)아, 온갖 법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으며 모두가 자재하지 않고 거짓이어서 견고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남이 없고[無生],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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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고[無起], 앎[知]이 없고, 봄[見]이 없느니라. 다시 선현아, 온갖 법의 성품[性]은 의지한 바가 없고 매인 바가 없으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남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앎이 없고 봄이 없느니라.’”
  『화엄경』에서 말씀하셨다.
  “실다운 법인(法印)으로 모든 업(業)의 문을 드러내고, 법의 남이 없음[無生]을 얻어 부처의 머무는 바에 머무르며, 남이 없는 성품을 관(觀)하여 모든 경계(境界)를 드러낸다.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생각으로 발심(發心)한 회향(廻向)은 모든 법성(法性)과 상응한 회향이어서 지음 없는 법[無作法]에 들며 지을 바[所作] 방편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마음일 뿐[唯心]이라는 뜻을 환히 알지 못하고 아직 종경(宗鏡)에 들지 못한 사람은, 무생(無生) 가운데에서 탐냄과 어리석음의 때[垢]를 일으키고 참된 공(空) 안에서 경계의 연(緣)에 집착하여 다스림[對治]이 되어 그 윤회(輪廻)를 이루거니와, 만약 돌이켜 비추면[返照] 마음과 경계가 다 함께 고요하여진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탐냄의 끝[貪欲際]을 보면 바로 이것이 진제(眞際)이고, 성냄의 끝[瞋恚際]을 보면 바로 이것이 진제이며, 어리석음의 끝[愚癡際]을 보면 바로 이것이 진제이니, 곧 업장(業障)의 죄를 다 없앨 수 있다. 내지 범부인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법은 마침내 소멸되는 그 모양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의 몸을 보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본다. 이 보는 것 때문에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업(業)을 일으킨다. 내지 부처를 보지 아니하고 가르침[法]을 보지 아니하고 승가[僧]를 보지 아니하면 이는 곧 온갖 법을 보지 않는 것이니, 만약 온갖 법을 보지 않으면 모든 법 중에서 의심을 내지 아니하며, 의심을 내지 않기 때문에 곧 온갖 법을 받지 아니하며,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곧 스스로 고요히 사라지느니라.”
  『부사의불경계경(不思議佛境界經)』에서 말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다시 문수사리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동자(童子)여, 그대는 여래가 머무는 바 평등한 법[如來所住平等法]을 환히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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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리 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환히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자여, 어느 것이 곧 여래가 머무는 바 평등한 법인가?’
  문수사리 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온갖 범부로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곳, 이것이 여래가 머무는 바 평등한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자여, 어떻게 온갖 범부로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곳이 여래의 머무는 바 평등한 법이 되는가?’
  문수사리 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온갖 범부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법 안에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온갖 범부로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곳이 곧 이는 여래가 머무는 바 평등한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자여, 공이 어찌하여 있는 법이기에 그 안에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있다고 말하는가?’
  문수사리 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공은 바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은 역시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자여, 공이 어떻게 있으며,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또 어떻게 있는가?’
  문수사리 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공은 언설(言說) 때문에 있으며,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또한 언설 때문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야, 무생(無生)과 무기(無起)와 무작(無作)과 무위(無爲)가 있는데 모든 행[諸行]이 아닌 법이며, 이 무생과 무기와 무작과 무위가 모든 행이 아닌 법이로되 있지 아니함이 없다. 만약 있지 않다면, 곧 나고[生]ㆍ일어나고[起]ㆍ짓고[作爲] 하는 모든 행의 법은 마땅히 벗어남[出離]이 없어야 되거니와 있기 때문에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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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난다고 말할 뿐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또한 그와 같아서 만약 공이 없다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서 벗어남이 없거니와 있기 때문에 탐냄 등의 모든 번뇌를 여의라고 말할 뿐입니다.”
  『중관론(中觀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법으로부터는 법을 내지 아니하고/또한 법이 아님[非法]도 내지 아니하며/법이 아님으로부터도 법을 내지 아니하고/그리고 법이 아님도 내지 않네”라고 했다.
  바로 게송의 뜻을 해석하면, 법은 곧 있는 것이어서 마치 빛[色]과 마음[心] 등과 같고, 법이 아님[非法]은 곧 없는 것이어서 마치 토끼의 뿔 따위와 같다. 만약 법으로부터 법을 내면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것과 같고, 법이 법이 아님을 내면 마치 사람이 석녀(石女) 아이를 낳은 것과 같으며, 법이 아님으로부터 법을 내면 마치 토끼 뿔이 사람을 낳는 것과 같고, 법이 아님으로부터 법이 아님을 내면 마치 거북 털에서 토끼 뿔을 낳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야가명론(般若假名論)』에서 이르기를 “다시 생각해 보라. 만약 여래께서 무소득(無所得)만을 증득하셨다면, 불법은 곧 하나이어서 그지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에서 ‘여래는 온갖 법은 모두가 곧 불법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곧 무소득이다. 일찍이 하나의 법도 얻을 수 있는 성품[可得性]이란 없다. 그러므로 온갖 것은 불법 아님이 없나니, 어떻게 온갖 것 모두가 무소득이겠느냐?
  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이란, 곧 온갖 법이 아니다. 어찌하여 법이 아닌가 하면, 무생(無生)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생이라면 곧 무성(無性)이니, 어떻게 온갖 법이라 하겠느냐? 무성 중에서 언설을 빌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온갖 법에 성품이 없다 함은, 곧 중생의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방(龐) 거사(居士)의 게송에 말하기를 “겁화(劫火)가 하늘을 태우되 하늘은 뜨겁지 아니하고/이내 바람이 불어오나 소리 들리지 않듯/백천(百川)이 다투어 흐르되 바다 넘치지 않고/오악(五嶽)의 명산(名山)도 형상 보이지 않듯/맑디 맑은 정려(靜慮)는 종적이 없지마는/천 갈래 길 모두가 다 무생(無生)에 드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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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모든 법은 뜻[意]으로부터 모양이 이루어지고 천 갈래 길은 마음으로부터 형상이 있게 된 줄 알 것이다. 한 생각이 맑고 고요해지면 만 가지 경계가 텅 비어서, 원래 불이의 문[不二之門]과 같아지고 모두 다 무생의 뜻[無生之旨]에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부(傳) 대사(大士)의 행로난(行路難)에 이르기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모든 법은 거짓이라 헛되이 시설했네./고요하여 [문]없음이 법의 문이며/온갖 법 안에서는 마음이 주인이나/나는 지금 다시는 마음 근원 못 얻었네/마음 근원 궁구해도 이미 얻지 못했으니/모든 법은 다 같이 근원 없음 알지니라”라고 했다.
  또 무생(無生)에는 둘이 있다. 『통심론(痛心論)』에서는 “첫째는 법성(法性)의 무생이니, 묘한 이치[妙理]를 법이라 말하고 지극히 빈 것[至虛]을 성이라고 말하는데 본래부터 저절로 그러한지라 무생이라고 한다. 둘째는 연기(緣起)의 무생이니,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마음은 경계를 빌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저절로 나지 아니한다. 마음과 경계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함께 나지 아니하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원인 없이 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첫째는 이(理) 무생이니,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본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事) 무생이니, 연생(緣生)의 모양은 남[生]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관(止觀)에 이르기를 “만약 『���금강경(金剛經)』을 해석하자면, 무생(無生)이라는 뜻을 굴려서 머무르지 않은 문[不住門] 안에 들어가 가지가지로 머무르지 아니하며, 색(色)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布施)하며 성(聲)ㆍ향(香) 등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한다.
  비록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무름이 없는 법[無住法]으로써 반야(般若) 안에 머무르면, 곧 이는 공(空)에 드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는 법으로써 세제(世諦)에 머무르면 곧 이는 가(假)에 드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는 법으로써 실상(實相)에 머무르면, 이는 곧 중(中)에 드는 것이다. 이 머무름이 없는 지혜[無住慧]는 곧 금강삼매(金剛三昧)로서 반석과 모래와 조약돌을 깨뜨릴 수 있어서 본체(本際)에 사무쳐 이르며, 또 석가모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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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적정(大寂靜) 금강삼매에 드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천친(天親)과 무착(無著)의 논(論)은 아주 자세한 해석을 열어서 무생(無生)과 무주(無住)의 뜻을 크게 드러내었으니, 만약 이 뜻을 얻으면 천경(千經)ㆍ만론(萬論)에 탁 틔어서 의심이 없으리라.
  이것이 바로 관(觀)을 배우는 첫 장(章)이요, 생각하고 헤아림[思議]의 근본이며, 다름[異]을 풀이하는 묘한 지혜요, 도(道)에 드는 지귀(指歸)이다. 강골(綱骨)이 광대하고 사리(事理)가 구족하며, 하나를 이해하면 천 가지가 따르고 법문이 자유 자재하다.
  그러므로 모든 온갖 법은 모두가 무생(無生)의 성품을 따르되 공이면서 존재[有]인 줄 알 것이다.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님[非有]은 속(俗)을 여의지 않으면서 언제나 진(眞)이요, 존재가 아니면서 존재임은 진을 여의지 않으면서 항상 속이다. 곧 환상의 존재가 서면서 무생이 들어나는 것이어서 공과 존재가 역연(歷然)하며, 두 모양이 없어지면서 두 일이 있게 되는 것이어서 진과 속이 분명하다. 이야말로 남[生]이 없으면서 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니, 두 가지 치우침[二邊]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덕(古德)이 게송에서는 “남이 없음[無生]은 마침내 머무르지 않음[不住]인데/온갖 것들이 공연히 널리 퍼지는구나./만약 무생(無生)의 알음알이[解]를 일으키면/도리어 무생(無生)의 고집에 얽매이리라”라고 했다.
  [문]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으면 도리로서는 구경(究竟)이어야 할 터인데, 유정(有情)세계에다 결합시키면 참됨과 망령됨이 분리된 것 같으나 덩달아 원각(圓覺)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치 금과 놋쇠를 함께 불리면 진짜 가짜로 이내 나눠지고 모래와 쌀을 같이 찌면 날 것과 익은 것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잘 모르겠는데, 어느 것으로 종을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답] 진실로 물은 바와 같아서 모름지기 식심(識心)을 살펴야 한다. 이 오묘한 것은 알기가 어려워서 부처님만이 가릴 수 있다. 다만 삼승(三乘)으로서 도(道)를 사모하되 소견에 차이가 있고, 잘못 망령된 마음을 가리켜 진실을 삼으며, 망령된 도둑을 오인하여 진짜 아들로 삼는 이들을 위해서 집안 보물을 도둑질하고 탕진하고서 생선 눈을 거두어서 여주(驪珠)를 만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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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련하여 지혜의 눈이 멀게 되면, 마침내 어리석은 아들로 하여금 존재[有]라는 감옥의 무거운 관문에 떨어지게 하고, 삿되어 뒤바뀐 사람으로 하여금 소견[見]이라는 강물의 놀란 파랑에 빠지게 한다. 장난삼아 썩은 집에다 불을 지르고서 괴로움을 잊고 고달픔을 잊으며, 누워 긴긴 밤에 오랜 꿈을 꾸고서 마음이 헷갈리고 성품이 헷갈렸다. 모두가 이 연려(緣慮)를 고집하여 자기 몸을 삼았도다.
  이 참 마음을 버리고 다른 소리와 빛을 오인하였으니, 이는 곧 세속을 떠난 외도[出俗外道]와 집에 사는 범부들의 잘못이다. 내지 삼승으로서 도법(道法)을 사모하는 학인과 선종(禪宗)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 마음을 미혹하여 부처의 방편을 고집하므로, 극진히 교(敎)로 8망(網)을 열고 승(乘)으로 4기(機)에 대(對)하게 한다.
  한 생각을 지나쳐서 멀리 3기(祇)를 달리어 공(功)을 대겁(大劫)에서 허비하고 보물 있는 곳을 떠나서 오랫동안 요술의 보루(堡壘)에 머물러 자취[跡]는 긴 거리[長衢]에서 지쳤도다. 이는 곧 권기(權機) 소과(小果)로부터 선종에 이르기까지 뜻을 얻지 못한 이의 잘못이다.
  그런 까닭에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말씀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들이 끝없는 때로부터 갖가지로 뒤바뀌어서 업(業)의 종자가 저절로 남이 악차(惡叉)의 무더기와 같으며, 수행하는 사람들도 위없는 보리(菩提)를 이루지 못하고, 내지 성문이나 연각이 되거나 외도나 하늘이나 악마의 왕이나 악마의 권속이 되는 것은, 다 두 가지 근본(根本)을 알지 못하고 착란(錯亂)해서 닦아 익힌 탓이니, 마치 모래를 삶아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것이라, 비록 티끌과 같은 많은 겁(劫)을 지낸다 하더라도 끝내 될 수 없느니라.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면 아난아, 첫째는 비롯함이 없는 생사의 근본[生死根本]이니, 지금 너와 중생들이 반연(攀緣)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삼는 것이다. 둘째는 비롯함이 없는 보리열반(菩提涅槃)이 원래 청정한 본체[元淸淨體]이니, 지금 너의 식정(識精)의 원래 밝은 것이 능히 모든 연(緣)을 내는 데 그 연(緣)으로 유실(遺失)하는 것이니라. 모든 중생들이 이 본래 밝은 것을 잃어버리므로 종일토록 행하면서도 스스로 깨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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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못하고 억울하게 모든 갈래[趣]로 들어가게 되느니라.’”
  해석하건대 이 두 가지 근본[二種根本]이란 곧 참됨과 망령됨[眞妄]의 두 가지 마음이다. 첫째 비롯함이 없는 생사의 근본이라 함은, 곧 근본무명(根本無明)이다. 이것은 바로 망령된 마음[妄心]으로서 맨 처음에 미혹(米惑)하여 하나의 법계(法界)가 깨닫지 못한[不覺] 사이에 문득 일어나면서 그의 생각을 두는 것이니, 문득 일어나는 바로 이것이 비롯함이 없는 것[無始]이어서 마치 눈동자가 피로하면 꽃이 나타나고 잠이 깊이 들면 꿈을 꾸는 것과 같다. 본래가 근원이 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결정코 생(生)하는 곳이 없으니 모두가 망령된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다른 그 밖의 인연이 아니다. 이로부터 미세(微細)한 업식(業識)이 이루어지면서 전식(轉識)을 일으켜 옮아가 마음이 되고 뒤에는 현식(現識)을 일으키며 바깥 경계가 나타난다. 일체 중생들은 다 같이 이 업식ㆍ전식ㆍ현식의 세 가지 식(識)으로써 안팎의 반연을 일으켜 마음의 자성(自性)을 삼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생사가 상속되는데 이것이 근본이 된다.
  둘째 비롯함이 없는 보리 열반이 원래 청정한 본체라 함은, 이는 곧 참된 마음[眞心]이다. 또한 자성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 하고, 청정한 본래의 깨달음[淸淨本覺]이라고도 한다. 일어남도 없고 남[生]도 없어서 자체(自體)가 움직이지 아니하며, 생사에 물들게 되지도 않고 열반에 깨끗하게 되지도 않으므로 일컬어서 청정이라 하는 것이니, 이 청정한 본체가 바로 8식(識)의 오묘하고 본래 스스로 원명(圓明)한 그것이다. 물듦[染]을 따라 깨닫지 못하고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빈 골짜기에 제멋대로 메아리가 인연 따라 소리를 내는 것처럼, 이것 또한 그러해서 능히 모든 법을 내어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두 가지를 세우며 마음과 경계가 서로 나서 염정(染淨)의 인연을 따를 뿐, 이 원상(圓常)의 성품을 유실하는 것은 마치 물이 바람을 따라 여러 파랑을 내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중생들은 근본을 잃고 지말[末]을 쫓으면서 한결같이 침몰하며 도무지 깨달아 알지 못하고 억울하게 허망한 고통을 받는다. 비록 허망한 고통을 받는다손 쳐도 참된 즐거움은 항상 존재하며 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나 본래의 깨달음[本覺]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치 물이 물결을 내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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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습성(濕性)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 오직 마음이 변하여 경계를 짓고 깨달음[悟]으로써 미혹[迷]을 삼으며, 미혹으로부터 미혹이 쌓여서 공연히 티끌과 모래 같은 많은 겁(劫)을 지나고 꿈으로 인하여 꿈을 꾸면서 영원히 오랜 세월 동안을 혼미하게 되는 줄 알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생사가 계속됨은 모두가 항상 머무르는 참된 마음의 성품이 청정하고 원명한 본체임을 모르고 여러 망상(妄想)을 쓴 탓이니, 이 망상은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윤전(輪轉)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분명히 모르면서 윤회(輪廻)의 망령된 식(識)을 따르나 이 식은 자체가 없고 참된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며, 원래 모양 없는 참된 근원에서 옮아가 정(情)이 있는 망상을 짓는 것은 마치 바람으로 맑은 못에 파랑을 일으켜 파랑이 비록 움직이기는 하나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근원에 있는 것과 같고 눈병으로 허공에 꽃을 내고 꽃이 비록 나타나기는 하나 허공의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눈병이 소멸되면 허공은 깨끗하여지고 파랑이 쉬면 못은 맑아지는 것이니, 하나의 참된 마음이 법계(法界)에 두루할 뿐이다.
  또 이 마음은 전제(前際)로부터 나지 아니했고, 중제(中際)에 있으면서 머무르지 아니하며, 후제(後際)에서 소멸되지도 아니한다.
  오르락내리락 하되 움직이지 아니하고 성상(性相)은 한결같으며 위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 난 이 참된 마음을 종(宗)으로 삼을 것이니, 이것을 여의고 수행하면 모두가 악마의 덫에 걸리며 따로 얻는 바가 있다면 모두 삿된 숲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깊은 자비(慈悲)를 움직여 갑절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니, 이조(二祖)가 이 망령된 마음을 구했으나 얻지 못하자 초조(初祖)가 그에게 옷[衣]을 전하였고 아난이 이 망령된 마음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여래께서 꾸짖고 내친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아서 생사에서 벗어나려 하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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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너에게 물으리라.’
  그리고는 여래께서 금색(金色)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보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저의 마음과 눈에 비추는 것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저와 대중이 똑같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대답하기를 래가 손가락을 구부려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네 마음과 눈에 비춘다> 했으니, 네 눈은 보겠다마는 무엇이 마음이어서 나의 주먹이 비침을 받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지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매 제가 마음으로 추궁하고 찾아보는데 이렇게 추궁하고 찾아보는 것을 저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아난아, 그것은 너의 마음이 아니니라.’
  그러자 아난은 놀라면서 자리에서 비켜서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진(前塵)의 허망한 모양의 생각이어서 너의 참된 성품을 미혹되게 하는 것이니, 네가 끝없는 때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도적을 오인(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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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認)하여 아들인 줄 여기고 너의 원래 항상한 것[元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윤전(輪轉)함을 받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사랑하는 아우로서 마음으로 부처님을 사랑하여 출가하게 되었으나 저의 마음이 어찌 여래만 공양하겠습니까? 내지 항하 모래같이 많은 국토를 다니면서 여러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섬기며 큰 용맹(勇猛)을 내어 모든 해하기 어려운 법사(法事)를 행하는 것도 모두가 이 마음으로 할 것이며, 비록 법을 비방하고 선근(善根)에서 영원히 물러나는 것 역시 이 마음으로 할 것인데, 만일 밝힌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저는 마음이 없어서 토목(土木)들과 같습니다. 이렇게 지각하고 알고 함을 여의고는 다른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놀라우며 이 대중들도 의혹이 없지 않으니, 대비(大悲)를 드리우셔서 알지 못하는 저희들을 깨우쳐 주십시오.’
  그 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여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려 하시면서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셨다.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든 법이 생기는 것이 마음이로 나타나는 것이며, 온갖 인과(因果)와 세계의 작은 티끌까지도 마음으로 인하여 자체(自體)가 된다>라고 하셨느니라. 아난아, 모든 세계의 온갖 것 중에 풀잎과 맺힌 실[縷]까지라도 그 근원을 따지면 모두 체성(體性)이 있고 허공까지라도 이름과 모양이 있거늘, 어찌 하물며 청정하고 오묘한 밝은 마음이 온갖 마음을 성품으로 삼는데 자체(自體)가 없겠느냐? 만약 네가 분별하고 각관(覺觀)하며 분명하게 아는 성품을 고집하여 마음이라 한다면, 이 마음이 온갖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모든 티끌[塵]의 일을 여의고도 따로 완전한 성품이 있어야 하리라. 마치 네가 지금에 나의 법문(法門)을 듣는 것은 소리로 인하여 분별이 있는 것이며 비록 온갖 보고ㆍ듣고ㆍ깨닫고ㆍ아는 것을 소멸하고 속으로 유한(幽閑)함을 느끼더라도 오히려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그림자니라. 내가 너에게 명령하여 마음이 아니라고 고집하라는 것은 아니다. 네가 마음으로 자세하게 헤아려 보라 .만약 전진(前塵)을 여의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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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너의 마음이겠거니와, 분별하는 성품이 전진을 여의고는 체성(體性)이 없다면 그것은 전진을 분별하는 그림자일 뿐이니라. 전진은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변하여 소멸할 때에는 마음이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과 같으리니, 그렇다면 너의 법신(法身)이 단멸(斷滅)함과 같은 것이다. 그 무엇이 무생법인을 닦아 증득하겠느냐?’”
  고석(古釋)에서 이르기를 “추궁하고 찾아보는 것[能推者]은 바로 망령된 마음으로서 모두가 연려(緣慮)의 작용이 있으므로 마음이라고도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마음이 아니다. 망령된 마음은 이 참된 마음 위의 영상(影像)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의 몸과 너의 마음은 모두가 이는 미묘하게 밝고 참으로 깨끗한 오묘한 마음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사물이거늘, 만약 이 영상을 고집하여 참된 것이라 한다면 영상이 소멸될 적에는 이 마음도 이내 없어지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만약 연진(緣塵)을 집착하면, 곧 단멸과 같다”고 하였다. 망령된 마음으로 전진을 잡아 자체를 이루는 것은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물 위의 거품과 같다. 물을 헷갈려 파랑을 고집하다가 파랑이 잠잠하여지면 마음도 소멸하고 거울을 헷갈려 형상을 집착하다가 형상이 사라지면 마음도 없어지리니, 마음이 만약 소멸될 적에는 이내 단견(斷見)을 이루게 된다. 만약 습기의 성질이 무너지지 않고 거울의 자체는 언제나 밝은 것인 줄 알면 파랑은 본래 공하고 영상(影像)은 원래 고요하리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의 경지(境智)는 경계[界]에 두루하고 허공에 두루하며 범부의 신심(身心)은 그림자와 같고 형상과 같은 줄 알 것이다. 만약 지말[末]을 고집하여 근본을 삼거나 망령된 것을 참된 것으로 삼는다면, 생사가 나타나는 때에야 비로소 진실하지 않음을 증험하리라. 그러므로 옛 성인이 말하기를 “광석을 보면서도 금인 줄 모르다가 용광로에 넣어서야 비로소 잘못이었음을 안다”라고 하였다.
  [문]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의 두 가지 마음을 저마다 무슨 뜻에서 마음이라고 하며, 무엇으로 체(體)를 삼고 무엇으로 상(相)을 삼는가?
  [답] 진심은 신령하게 알고 고요하게 비추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고 공하지 아니하고 머무르지[住] 아니한 것으로 체를 삼으며 진실한 모양[實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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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을 삼는다. 망심은 6진(塵)의 연영(緣影)으로써 마음을 삼고 성품[性]없는 것으로 체를 삼으며, 반연(攀緣)과 사려(思慮)로 상을 삼는다.
  이 연려(緣慮)하고 깨달아 알며 능히 아는 망심은 자체(自體)가 없는 것이며, 이것은 전진(前塵)의 경계가 있고 없음에 따를 뿐이어서 경계가 오면 이내 나고 경계가 가면 이내 사라진다. 경계로 인하여 일어나므로 온전히 경계가 바로 마음이요, 또 마음으로 인하여 경계를 비추므로 온전히 마음이 바로 경계이다. 저마다 자성(自性)이 없고 이 인연(因緣)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구경(法句經)』에서 이르기를 “아지랑이 속에는 물이 없고 양기(陽氣)일 뿐이며, 5음(陰) 속에는 색(色)이 없고 연기(緣氣)일 뿐이다. 뜨거울 때의 타는 기운은 햇빛으로 인하여 빛나는데 멀리서 보면 물과 같지마는 생각[想]으로부터 생길 뿐 양기일 따름이다. 이 허망한 색심(色心) 또한 그러하여서 자기 업(業)으로 인(因)이 되고 부모라는 외진(外塵)이 연(緣)이 되어 화합하여 색심을 나타내는 것 같지마는 오직 연기(緣氣)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망령되이 6진의 연영(緣影)을 오인하여 자심의 성품[自心性]으로 삼는다”고 하였나니, 그러므로 알라. 이 추궁하고 찾아보는 마음[能推之心]은 만약 인연이 없다면 이내 생기지 아니하며 인연으로부터 생길 뿐이다. 인연으로 나는 법은 모두가 이는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마치 거울 속의 형상에 자체가 없어서 온전히 바깥 경계로 인함과 같고, 물속의 달은 실체가 아니어서 허공에 나타난 달 바퀴인 것과 같다. 이를 오인하여 진실이라 하면, 그 어리석음 이야말로 아주 심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희(慶喜)가 고집하다가 근거가 없자 7처(處)에서 어리둥절하였고, 2조(祖)가 나지 않음[不生]을 환히 깨달아서 한 마디 말에 도(道)에 계합하였다.
  곧 2조는 이 연려(緣慮)의 불안한 마음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이내 진실은 온갖 처소에 두루한 것인 줄 알았고 이를 깨달아 종(宗)을 삼았기 때문에 마침내 맨 처음 조사의 자리[祖位]를 이어 받았으며, 아난은 여래가 추구하면서 망심을 깨뜨리고 5음(陰)ㆍ6입(入)ㆍ12처(處)ㆍ18계(界)ㆍ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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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大性)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미세하고 철저하게 따져 들자 공일 뿐 모두가 자성(自性)이 없었다.
  이미 인연과 자타(自他)의 화합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연(自然)과 인연 없이 생긴 것도 아니고 모두가 곧 뜻[意]과 말[言]과 의식[識]과 생각[想]으로 분별한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오묘하고 밝은 진심은 광대하게 포용하여 온갖 초소에 두루한 것인 줄 환히 깨달았으며, 바로 대중들도 같이 이 마음을 통달하였으므로 소리를 같이하여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아난과 여래 대중들은 부처님 여래께서 미묘하게 열어 보임을 받고 몸과 마음이 깨끗해져서 걸림이 없어지고, 대중들은 마음이 시방에 가득함을 저마다 알았고, 시방의 허공을 보되 손에 가진 잎사귀를 보듯 하며, 온갖 세간에 있는 것들이 모두 보리(菩提)의 오묘하게 밝은 마음인 줄 알았다. 심정(心精)이 두루하고 원만하여 시방을 머금었는지라 부모가 낳아 준 신체를 돌이켜 보고, 마치 시방의 허공에 한 작은 티끌을 날린 것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맑고 큰 바다에 하나의 뜬 거품이 흐르면서 있었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 자취가 없는 듯함을 분명히 알았으면, 본래 묘한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소멸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부처님께 예배하고 합장하여 미증유(未僧有)함을 얻고는 여래의 앞에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미묘하고 맑으며 총지(總持)하고 부동(不動)하시는 세존께서는/수능엄(首楞嚴)의 왕이어서 세상에 희유(希有)합니다./억겁(億劫) 동안 뒤바뀐 망상(妄想)을 소멸하고/아승기겁(阿僧祗劫) 지내지 않고 법신(法身) 얻게 했습니다.’”
  바로 초조(初祖)가 곧장 사람의 마음을 지시하여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되게 한 것과 같다.
  [문] 진심의 행상(行相)에는 어떻게 증명하는 글이 있는가?
  [답] 『지세경(持世經)』에서 이르기를 “보살이 마음을 관(觀)하되, ‘마음 안에는 마음이란 모양이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성품은 언제나 청정한데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이 들었기 때문에 분별이 있다.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또한 마음을 보지도 못한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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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면 이 마음은 공하고 성품은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근본도 있는 바가 없고 이 마음에는 일정한 법도 없다.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마음은 법이 합한다거나 흩어지다거나 함이 없다. 이 마음은 전제(前際)ㆍ후제(後際)가 있을 수 없고 이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있는 이도 없다. 마음은 스스로가 보지 못하고 자성(自性)도 모른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 때에 이것이 마음이다, 이것이 마음이 아니다라고 분별하지 아니하며, 다만 마음이 남이 없는 모양[無生相]을 잘 알고 이 마음이 남이 없는 성품[無生性]을 통달한 뿐이다. 왜냐 하면 마음은 결정된 성품이 없고 결정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마음이 더럽다는 모양도 얻지 못하고 마음이 깨끗하다는 모양도 얻지 못하며, 단지 이 마음은 언제나 청정한 모양임을 알 뿐이다”라고 했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에서 비록 취할 바가 없다고는 하나 온갖 사업(事業)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해석하건대 만약 제 마음은 깨달으면 일마다 이룩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혹은 망령되이 앞의 경계를 위하여 도리어 안에서 스스로 부족함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기를 “보살이 본래의 성상(性相)을 관(觀)하되 스스로가 만족하게 여기면서, 천 생각ㆍ만 생각을 일으킴은 도리어 이롭지 아니하며, 한갖 동요와 어지러움 때문에 본래의 심왕(心王)을 잃는다”라고 했다.
  논석(論釋)에서 이르기를 “한량없는 공덕은 바로 이 한 마음이어서 한 마음이 주인이기 때문에 심왕이라 하며, 나고 없어지고 동요하고 어지러운 것은 이 심왕을 어기고 도로 돌아올 수가 없으므로 잃는다. 또 마음[心]이란 모든 법을 도맡아 다스리므로 온갖 것에서 가장 훌륭하며 하나의 법도 다스리지 아니함이 없다. 왕(王)이란 4해(海)를 도맡아 다스리므로 8표(表)에서 조종(朝宗)이며 한 백성도 신하가 아님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을 구하지 아니하는 이것을 자기 몸[己身]이라고 한다”고 했고, 『진취대승방편경(進趣大乘方便經)』에서 말하기를 “참으로 사실대로 관한다[眞如實觀]는 것은,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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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心性)은 남[生]도 없고 없어짐[滅]도 없음을 생각하여 보고ㆍ듣고ㆍ깨닫고ㆍ아는 것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영원히 온갖 분별하는 생각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 마음은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은 중생도 될 수가 있다. 진심(眞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부처가 되고 망심(妄心)을 고집하기 때문에 중생이 된다. 만약 부처가 되면 모두 원통(圓通)의 5안(眼)과 무루(無漏)의 5음(陰)을 갖출 것이다. 그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무상함의 색[無常色]이 소멸되면 분별의 색[常色]을 획득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묘한 색[妙色]은 담연(湛然)해서 언제나 안주(安住)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모든 법의 모양[相]을 잘 분별한다”고 하였거늘, 어찌하여 “진심은 보고ㆍ듣고ㆍ깨닫고ㆍ아는 것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영원히 온갖 분별하는 생각을 떠나 있다”고 말하는가?
  [답] 만약 이 망심이 보고 듣고 한다고 하면, 인연과 능소(能所)를 빌려서 생기는 것이니, 눈[眼]은 아홉 가지 인연 등을 갖추어야 생긴다고 함과 같다. 만약 색(色)과 공(空)과 화합(和合)의 인연이 없다면 보는 성품이 발생할 수가 없다. 5근(根) 또한 그러하여 모두가 인연을 의지하여 일어나므로, 이것은 인연이 모이면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소멸하여 스스로의 주재(主宰)가 없으므로 마침내 성품은 공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마음[心]은 교묘한 재주를 부리는 이요/뜻[意]은 재주꾼에 어울리는 이 같고/5식(識)은 그들의 벗들이며/망상(妄想)은 재주를 구경하는 이들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마치 노래하고 춤을 추며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남의 박자를 따라 옮아갈 적에 박자가 느리면 걸음이 느리고 박자가 빠르면 걸음이 빠른 것처럼, 5근(根)도 역시 그러하여 뜻[意]을 따라 옮아갈 뿐이니, 마치 ‘몸은 생각하는 수레바퀴가 아니건마는 생각에 따라 구른다’고 한 것과 같다. 왜냐 하면 의지가 몸의 수레바퀴를 내어 동작하는 것 같지만 의지는 근경(根境)이 쉬어지면 고요하여지기 때문이다.
  진심은 그렇지 아니하여, 언제나 비추고 항상 나타나기 때문에 철위산(鐵圍山)도 그 빛을 숨길 수 없고, 대지와 허공과 하늘도 그 몸을 가릴 수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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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순일하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기 때문에 온갖 법이 그의 참됨을 숨길 수 없고, 머무름이 없고 의지함이 없는지라 진로(塵勞)도 그 성품을 바꿀 수가 없다. 어찌 전진(前塵)을 빌어서 빛이 나며 경계에 대(對)하여 앎[知]이 일어나겠는가? 저절로 고요히 비추고 신령하게 알며 잠잠하면서도 끝이 없다.
  그러므로 『수능엄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6근(根)은 저 각(覺)의 밝은 데에 밝히려는 명각(明覺)이 있으므로 그 맑고 환함[精了]을 잃어버리고 망령된 것에 들러붙어서 빛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어둠[暗]을 여의고 밝음[明]을 여의면 보는 체성(體性)이 없을 것이요, 움직임[動]을 여의고 고요함[靜]을 여의면 듣는 성질이 없을 것이요, 통함[通]이 없고 막힘[塞]이 없으면 맡는 성품이 나지 못할 것이요, 변함[變]이 아니고 담담함[恬]이 아니면 맛보는 것이 생기지 못할 것이요, 떨어짐[離]이 아니고 합함[合]이 아니면 감촉[觸]을 깨달음이 본래 없을 것이요, 사라짐[滅]이 없고 남[生]이 없으면 깨달아 앎[了知]이 어디에 있겠느냐? 네가 다만 움직임ㆍ고요함ㆍ합함ㆍ떨어짐ㆍ담담함ㆍ변함ㆍ통함ㆍ막힘ㆍ남ㆍ사라짐ㆍ밝음ㆍ어두움의 열두 가지 유위(有爲)의 모양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의 감관[根]을 뽑아내어 들러붙은 것을 벗기어 속으로 굴복시키고 원래 참된 것[元眞]에 돌아가서 본래의 빛을 내게 되며 비치는 성품이 밝아지면, 다른 다섯 감관의 들러붙은 것도 한 감관을 뽑음에 따라 분명하게 해탈하게 되리라. 전진(前塵)으로 일으킨 지견(知見)으로 말미암지 아니하여 밝음이 감관을 따르지 않고 감관에 맡겨 밝음이 나게 되면, 이로 말미암아 여섯 감관은 서로서로 작용하리라.
  아난아,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지금 이 모임 안의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이 없으면서도 보고, 발난타용(跋難陀龍)은 귀가 없어도 듣고, 긍가여신(殑伽女神)은 코가 아니고도 향기를 맡고, 교범발제(驕梵鉢提)는 혀가 다르면서도 맛을 알고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이 없어도 접촉이 있으니 여래의 광명에 잠깐 나타나나 바람의 체질이 되었으므로 그 몸은 원래 없었던 것이며, 멸진정(滅盡定)으로 고요함을 얻은 성문으로서 이 모임 안의 마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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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摩訶迦葉)은 오래 전부터 의근(意根)이 소멸되었으나 마음의 생각으로 인하지 않고 뚜렷하게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냐?
  아난아, 네가 여러 감관을 모두 뽑아버리고 속으로 환히 빛을 내기만 하면, 이러한 부진(浮塵)과 기세간(器世間)의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생각에 따라 위없는 지각(知覺)을 이루게 되리라. 아난아, 마치 세간 사람들이 보는 것[見]을 눈에 모았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 어두운 것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이 서로 같은 것이 되거니와,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바깥을 만지면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와 발을 낱낱이 분별하여 알게 되는 것이 밝을 때와 같으리라. 연진(緣塵)을 보는 것은 밝음을 인하므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거니와 밝음이 아니라도 스스로 깨달음이 생긴다면, 모든 어두운 모양이 영원히 어둡게 하지 못하리라. 근진(根塵)이 소멸하면, 어떻게 각명(覺明)이 뚜렷하고 미묘함을 이루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풀이하여 보자.
  ‘저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見]을 눈에 모았다가’라고 함은, 이는 세상에서 보는 것은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밝힌 것이다. 만약 갑자기 눈을 감게 되면, 보이는 것이 없게 되어서 귀 등의 다섯 감관과 비슷하게 된다.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바깥을 두루 만지면 비록 눈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나, 이것은 참으로 보는 것[眞見]은 바깥 경계를 빌리지 않는다는 것에 비유한다.
  ‘연진(緣塵)을 보는 것은 밝음[明]을 인하므로 어두우면 보는 것이 없어진다’고 함은, 이것은 세간에서 눈으로 보는 것은 밝고 어두운 인연에 의거하여야 하고 근진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보게 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없어지되 밝음이 아니라도 스스로 깨달음이 생긴다’라고 함은, 이것은 바로 참으로 보는 것[眞見]일 때에 보는 성품은 눈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벌써 눈에 속하지 않았나니, 또 어째서 밝고 어두움과 근진을 빌려서 깨닫게 되겠는가. 밝음이 아니라도 밝은 것[不明之明]과 보는 것이 없어도 보게 되는 것[無見之見]은 저절로 고요히 비추고 신령하게 알거늘, 어찌 일찍이 간단(間斷)이 있겠는가? 또 세간의 밝고 어두운 것은 허깨비로 나타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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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숨었다 하는 모양이거늘, 또 어찌 가리고 덮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밝음도 능히 밝히지 못하고 어두움도 능히 어둡게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말하기를 “모든 어두움의 모양이 영원히 어둡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참된 성품은 본래 생긴 그대로의 상태거늘, 어찌 뚜렷하고 오묘하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학인(學人)이 선덕(先德)에게 “어떤 것이 곧 대비(大悲)의 천 개의 손과 눈입니까”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밤에 더듬어서 베게를 찾아 갖는 것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문] 망심(妄心)의 행상(行相)에는 어떠한 증명의 글이 있는가?
  [답]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이 마음은 무상한 것을 항상 머무른다[常住]고 여기며,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며, 무아(無我)를 나라 여기며,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이라 여긴다. 자주자주 움직이고 머무르지 않으며 빠르게도 바뀐다. 결사(結使)의 근본이요 모든 나쁜 갈래의 문[惡趣門]이며, 번뇌의 인연은 착한 길을 무너뜨려 없앤다. 이것이야말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의 주인이다. 온갖 법안에서는 마음이 우두머리이므로, 만약 마음을 잘 알면 여러 가지 법이 모두 풀린다. 갖가지 세간은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어지는 것이며, 마음은 스스로를 보지 못하며, 선이거나 악이거나 간에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심성(心性)이 빙빙 돌음은 마치 불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 같고 바뀌고 옮는 것은 마치 말과 같고 태우는 것은 마치 불과 같고 사납게 일어나는 것은 물과 같다고 한다. 이렇게 살펴보면 생각에서 동요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며, 마음으로 하여금 따르게 한 뒤에 마음을 조복할 수 있으면 뭇 법을 조복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선남자야, 마음이 만약 항상[常]하다면 역시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자색 등의 모든 빛깔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니라. 선남자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모든 기억하는 법을 잊지 않아야 되느니라. 선남자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읽고 외운 것은 더 진보되지 않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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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느니라. 또 선남자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이미 지어졌고 지금 짓고 장차 지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된다. 만약 이미 지어졌고 지금 짓고 장차 지을 것이 있다 하면, 이 마음은 틀림없이 무상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원수거나 친한 이가 없어서 원망하지 아니하고 친하지도 않으리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의 물건이다 남의 물건이다 죽는다 산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되느니라. 마음이 만약 항상하다면, 비록 하는 일이 있더라도 더 진보되지 않아야 되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이치 때문에 심성은 각각 따로따로요 다른 줄 알아야 하며, 때문에 무상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또 말하였다.
  “무엇을 현유(現喩)라 하느냐 하면, 경 안에서 ‘중생의 심성(心性)은 마치 원숭이와 같다. 원숭이의 성격은 하나를 버리면 하나를 취한다. 중생의 심성 또한 그와 같아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취하고 집착하되 잠시도 머무르는 때가 없다. 이것을 현유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증험하여 보자. 지금 중생의 마음은, 마치 원숭이가 높은 나무에 있으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멈추지 않는 것과 같고, 미니(彌泥)가 바르게 흐르는 물에 있으면서 들락날락하되 걸림이 없는 것과 같고 요술쟁이가 대중들의 모임에 놀되 이름과 형상이 모두 거짓인 것과 같고, 재주부리는 이가 놀이터에서 한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서 말씀하셨다.
  “저 비구야, 다시 마음의 원숭이를 관찰하되, 마치 원숭이 보듯 하라. 마치 저 원숭이는 참을성 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갖가지의 나무와 가지와 꽃과 열매며 숲에서와 산골짜기ㆍ바위ㆍ굴 등의 굽이진 곳을 다니되 걸리적거림이 없는 것처럼 마음의 원숭이도 그와 같으니라. 다섯 갈래[五道]의 차별은 마치 갖가지의 숲과 같고, 지옥ㆍ축생ㆍ아귀의 모든 갈래는 마치 저 나무들과 같고, 중생이 한량없는 것은 마치 여러 나뭇가지들과 같고 욕망[愛]은 마치 꽃과 잎사귀와 같고, 소리를 사랑하며 모든 냄새와 맛 등을 분별하는 것으로 뭇 열매로 삼아 3계(界)의 산을 다니며, 몸은 곧 굴과 같아서 다니는 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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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리적거림이 없으니, 이것이 마음의 원숭이이다. 이 마음의 원숭이는 언제나 지옥ㆍ아귀ㆍ축생의 나고 죽는 땅을 다니느니라.
  또 저 비구야, 선(禪)에 의지하여 마음의 재주를 부리는 이를 관찰하되, 마치 재주부리는 이를 보듯 하라. 저 재주부리는 이가 여러 악기를 가지고 놀이터에서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재주부리는 이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갖가지 일의 변화를 의복으로 삼느니라. 놀이터란 다섯 갈래[五道]의 땅을 말하며, 여러 가지의 장식과 가지가지의 인연과 갖가지의 악기는 자신의 경계(境界)를 말하며, 재주부리는 이의 놀이라 함은 생사의 놀이이며, 마음이 재주부리는 이의 가지가지의 놀이가 된다 함은 비롯함도 없고 끝도 없이 오래오래 나고 죽는다는 것이니라.
  또 저 비구야, 선(禪)에 의지하여 마음의 미니어(彌泥漁)를 관찰하되, 마치 미니를 보듯 하라. 마치 미니어는 강물 속에 있되 강물이 세고 파랑이 어지럽고, 깊으면서 빨라 다니기가 어렵거나 한량없는 갖가지 나무들이 떠내려 오면서 세력이 사나워서 막을 수가 없거나, 산골의 물이라 너무도 빠르고 세거나 간에 저 미니어가 잘도 들어가고 잘도 나오고 잘도 가고 잘도 멈추는 것처럼 마음의 미니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욕계(欲界)라는 강물의 세고 빠르고 파랑이 어지러운 데서 잘도 나오고 잘도 들어가고 잘도 가고 잘도 서느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범부는 때로 몸의 무상함은 알면서도 마음의 무상함은 알지 못한다. 만약 범부인 사람이 몸이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대수롭지 않거니와 마음이 항상 하다고 여긴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미혹이다. 왜냐 하면 몸은 10년ㆍ20년을 머무르기도 하거니와 이 마음은 날마다 지나가면서 나고 없어지고 하며 각각 달라지고 생각생각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려고 하면 다르게 나고 없어지려 하면 다르게 없어진다. 환상 같은 일이라 진실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것인 줄 알면 이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 마음이 어디에 속했을까? 누가 이 마음을 부릴까?’라고, 생각하고 살펴본 뒤에도 주인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온갖 법은 인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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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합하기 때문에 자재하지 아니하고,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나[我]가 없고, 만약 나가 없다면 누가 이 마음을 부리겠는가?”
  『지관(止觀)』에서 말하였다.
  “한 생각으로 헤아려 아는 마음을 일으키면, 선과 악에 따라서 열 종류의 세계[十道]에 가서 난다. 첫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만을 오로지 하여 껴잡아도 돌아오지 않고 뽑아도 나오지 않으면서 날로 더하고 날로 심하며 상품(上品)의 열 가지 악[十惡]을 일으키면, 5선제라(扇提羅)와 같아서 이것은 지옥의 마음을 내는 것이므로 화도(火塗)의 길로 간다. 둘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권속이 많기를 바람은 마치 바다가 흐르는 물을 머금는 듯 불이 땔나무를 불태우듯 하기를 바라면서 중품(中品)의 열 가지 악을 일으키면, 마치 조달(調達)이 대중을 유혹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축생의 마음을 내는 것이므로 혈도(血塗)의 길로 간다. 셋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이름과 소문을 얻어 사원팔방(四遠八方)에서 칭찬하고 공경하고 읊기를 바라며 안으로는 진실한 덕이 없는데 거짓으로 성현에다 견주면서 하품(下品)의 열 가지 악을 일으키면, 마건제(摩犍提)와 같아서 이것은 귀신의 마음을 내는 것이므로 도도(刀塗)로 간다.
  넷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언제나 남에게 이기려고 하여 아랫사람을 들볶고 남의 진귀한 것을 업신여기며 마치 솔개가 높이 날면서 아래를 보며 겉으로만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드날리듯 하면서 하품의 선심(善心)을 일으키면, 아수라(阿修羅)의 길로 간다. 다섯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세간의 즐거움을 기뻐하고 그 냄새나는 몸을 편안히 하며 그 어리석은 마음을 즐겁게 하면, 이것은 중품의 선심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사람[人]의 길로 간다. 여섯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삼악(三惡)의 고통이 많고 인간의 고락은 서로가 섞였으며 천상은 순전히 즐거움뿐임을 알고서 천상의 낙을 위하여 추악한 것을 꺾어 조복시키면, 이것은 상품의 선심이므로 하늘[天]의 길로 간다.
  일곱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큰 위세로써 몸과 입과 뜻으로 겨우 할 일을 하고서 모두를 복종시키려하면, 이것은 욕계(欲界)의 주인이 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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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마음을 낸 것이므로 마라(摩羅)의 길로 간다. 여덟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영리한 지혜와 변재ㆍ총명ㆍ높은 재주ㆍ용맹ㆍ통달로 육합 시방(六合十方)에서 공경받기를 바라면 이것은 세간의 지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니건(尼乾)의 길로 간다. 아홉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5진(塵)ㆍ6욕(欲)의 바깥 즐거움은 대개가 미미하고 3선(禪)의 즐거움은 오히려 돌샘의 물과 같아서 그 즐거움이 중하다고 하면, 이것은 범천의 마음[梵心]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무색계(無色界)의 길로 간다. 열째 만약 그 마음이 생각생각마다 선악(善惡)이 순환할 때, 범부는 빠져 들고 성인은 꾸짖으며 악을 깨뜨리는 데는 깨끗한 지혜로 말미암고 깨끗한 지혜는 깨끗한 선(禪)으로 말미암고 깨끗한 선은 깨끗한 계율로 말미암는 줄을 알아서 이 세 가지 법을 숭상하기를 마치 배가 고프듯 목이 마르듯 하면, 이것은 무루(無漏)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이승(二乘)의 길로 간다.
  이 위의 열 가지 마음을, 혹은 마음이 아니라고 먼저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이것은 마음이라고 먼저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마음이다, 아니다’라고 함께 일으키기도 한다. 비유하면 코끼리와 물고기와 바람이 똑같이 못물을 흐리게 하는 것과 같다. 코끼리는 자신 이외에서 일어난 것이 아님을 비유하고, 물고기는 속에서 구경만 할 뿐 연약해서 두 쪽에서 움직이는 것을 받는다는 것에 비유하며 바람은 안팎이 뒤섞이고 더러운 것이 섞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앞의 아홉 가지 마음은 바로 생사라 마치 누에가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과 같고, 뒤의 한 가지 마음은 바로 열반이라 마치 노루가 혼자 뛰노는 것과 같다. 비록 스스로 벗어날 수 있기는 하나 아직은 불법을 갖추지 못했다. 모두가 다 아니기 때문에 둘이 다 대수롭지 않으며, 3계(界)를 분명히 알면 따로의 도리가 없다.
  이것은 망심(妄心)으로 생길 뿐인데, 8도(倒)의 뿌리와 줄기가 되고 4류(流)의 원천과 구멍이 된다. 빠르게 번쩍이는 번개와 같고 사납기가 광풍(狂風)과 같으며, 언뜻 진로(塵勞)가 일어나서 빠르기가 마구 쏟아지는 냇물보다 심하고, 갑자기 5욕(欲)을 내서 급하기가 불바퀴 도는 것보다 더하다.
  그러므로 4마(魔)에 얽매이고 10사(使)에 내달으며, 2사(死)의 강물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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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잠기고 8고(苦)의 불길 속에 떨어진다. 취하여 옷 속의 구슬을 모르고 한갖 고생만 하며, 싸우다가 이마 속의 보물을 빼앗기고 공연히 스스로가 슬퍼하기만 한다. 모두가 망심으로 인하여 이 참된 깨달음[眞覺]에 헷갈린 것이니, 마침내 따로 잃은 것이 없다.”
  여기에 나오는 글은 위에서와 같이 교(敎)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이다.
  진심과 망심을 뜻으로 묶으면 구분된 것 같지마는, 종(宗)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왜냐 하면 진심은 이치[理]로 보면 체(體)요, 망심은 모양[相]에 의거하면 용(用)이다. 이제 이치는 항상 이 마음이라 심상(心相)을 얻지 못하며, 마음은 항상 이 이치라 심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물 그대로가 파랑이라 파랑의 모양을 얻지 못하고 파랑 그대로가 물이라 파랑의 모양이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고요함이 끝이 없고 성품과 모양이 한 근원이다. 범부 마음에서 대하면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세제(世諦)에서 보면 진제(眞諦)이다.
  그 까닭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을 관찰하되, 모두가 마음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머무르면서 만약 경계를 껴잡아 마음으로 삼으면 이것은 세속의 승의제[世俗勝義諦]요, 마음의 자성이 그대로 진여(眞如)라 하면 이것은 승의의 승의제[勝義勝義諦]이다. 이렇게 하여 머무르면서 얻을 바 없음[無所得]으로 방편을 삼아 진속(眞俗)을 한꺼번에 비추고 머무름이 없음[無住]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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