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4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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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심법(心法)이라고 하는 데 무엇을 심(心)이라 하고 무엇을 심법이라 하는가?
  [답] 티끌의 통상(通相)을 아는 것을 심왕(心王)이라 하는데, 그 근본인 한 마음[一心]이 모든 법의 총체적인 근원이다. 티끌의 별상(別相)을 취하는 것을 심수법(心數法)이라 하는데, 진실로 그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인하여 평등한 성품을 헷갈리기 때문이다.
  [문] 『변중변론(辯中邊論)』에서 이르기를 “진의 통상을 아는 것을 심이라 하고 진의 별상을 취하는 것을 심법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묻겠다. 이 한 심법은 몇 가지 이치로 이루어지는가?
  [답] 심법에는 통틀어 네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사(事)로서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요, 둘째는 법(法)으로서 자체(自體)를 논함이니, 이는 생멸하는 법의 수(數)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이치는 속(俗)으로 논하면 본래 있고 진(眞)에 의거하면 본래 없다. 셋째는 이(理)로써 그를 궁구함이니 비고 고요한 것이요, 넷째는 실(實)로써 그 본래 성품을 논함이니 이것은 진실한 여래장(如來藏)의 법일 뿐이다.
  [문] 마음의 네 가지 이치 가운데서 앞의 두 가지 이치는 바로 연려(緣慮)인 망심(妄心)이요, 뒤의 두 가지 이치는 바로 상주(常住)하는 진심(眞心)이다. 진심에서 보면 본래 성품은 오묘하여 도리로 궁구하면 비고 고요한 것이라, 수량(數量)이 없고 다시 지시하거나 설명할 것이 없으며, 다만 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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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벌써 보고 듣는 것을 간섭했을 뿐이다. 또 물으리니 생멸하는 이 연려심(緣慮心)에는 몇 가지의 행상(行相)이 있는가?
  [답] 다섯 가지의 마음이 있다 첫째는 솔이심(率爾心)이니, 법을 듣고 처음 생기거나 경계를 만나서 문득 일으키는 마음을 말한다. 둘째는 심구심(尋求心)이니, 경계를 아직 통달하지 못하고 바야흐로 찾고 구하는 마음이다. 셋째는 결정심(決定心)이니 법의 바탕을 살펴서 알고 결정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넷째는 염정심(染淨心)이니 법의 도리에 기뻐하거나 싫어하면서 물들거나 깨끗함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다섯째는 등류심(等流心)이니, 생각 생각마다 경계를 반연하되 앞뒤가 같기 때문이다.
  『법원의림(法苑義林)』에서 이르기를 “다섯 가지 마음의 행상을 가리자면, 이는 안식(眼識)이 처음 경계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므로 솔이타심(率爾墮心)이라고 하며, 동시에 의식(意識)은 먼저 이것을 반연하지 못하고 이제야 처음과 같이 일으키므로 역시 솔이(率爾)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기를 “의식(意識)은 저절로 산란하게 반연하지마는 익숙하지 않은 경계를 만났을 때에는 같이 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의 의식을 솔이타심이라고 하는데, 나려고 할 적에는 찾고 구하는 따위가 포섭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해심밀경(解深密經)』과 『결택론(決擇論)』의 해설에서는 “5식(識)은 동시에 반드시 하나의 분별이 있고 의식(意識)이 같은 때에 작용하기 때문에 눈[眼]은 뜻[意]과 함께 함을 솔이심이라고 하는 것이니, 갑자기 맨 처음으로 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 반연하여 아직은 무슨 경계이며,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모르므로 분명히 알기 위하여 그 다음에는 심구심을 일으키는 것이니, 하고자 함[欲]과 함께 작용하면서 경계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찾고 구한 뒤에는 앞의 경계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 다음에는 결정심을 일으키는 것이니, 환히 경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결정한 뒤에는 식계(識界)의 차별로 바른 원인 등의 행상을 취하면서 원한이 있는 이에게는 악심(惡心)에 머무르고 친한 이에게는 선심(善心)에 머무르고 원한도 친함도 없는 그 중간에서는 사심(捨心)에 머무르는 염정심이 생긴다. 이 염정으로 말미암아 의식(意識)이 우선이 되어 안식(眼識)을 이끌어 내어 같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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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으로 잘 물들면서 앞을 쫓으며 일으키는 것을 등류심이라고 한다. 안식을 내는 것처럼 이식(耳識)등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문] 다섯 가지 마음이 8식(識) 중에 저마다 몇 가지 마음이 있는가?
  [답] 전5식(前五識)에는 네 가지 마음이 있되 심구심만이 제외된다.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제6에는 다섯 가지 마음이 다 갖추어져 있고, 제7에는 솔이심과 심구심의 두 가지는 없고 결정심ㆍ염정심ㆍ등류심의 세 가지가 있는데, 제7은 언제나 현재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솔이심은 없다고 말한다.
  [문] 제7은 현재 헤아리고 분별함이 있는데 어째서 심구심이 없는가?
  [답] 심구심은 모두가 솔이심에 의거하게 되고 그 후에 찾고 구하는 것이 비로소 생긴다. 제7에는 솔이심이 없으므로 심구심 또한 없다.
  [문] 전5식에는 솔이심이 있는데도 왜 심구심이 없는가?
  [답] 심구심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 첫째는 솔이심이 이끄는 것이요, 둘째는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다. 앞의 다섯 가지에는 비록 솔이심은 있기는 하나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 없다. 제8에는 세 가지 마음인 솔이심ㆍ결정심ㆍ등류심이 있거니와 염정심과 심구심은 없다.
  [문] 제8은 제7과 같아서 언제나 현재의 경계를 반연하고 있는데, 어째서 솔이심이 있을 수 있는가?
  [답] 제7은 경계를 반연하되 간단(間斷)이 없거니와 제8은 경계를 반연하되 경계에 간단이 있다. 제8은 처음 받아 났을 때에 비로소 3계(界)인 세 가지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문] 처음 받아 났을 적에 제7도 3계를 반연하였는데, 제7식에는 어째서 솔이심이 없는가?
  [답] 제7은 매인 바를 따르거니와 언제나 당장의 경계[當界]를 반연하는 것은 제8식이다. 이제 하나의 이해를 돕겠다. 제7은 언제나 안에서 하나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솔이심이 없거니와 제8은 바깥에서 많은 경계를 반연하므로 솔이심이 있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곧 심구심이 없다.
  [문] 다섯 가지 마음 가운데서 어느 마음이 종자로 배어들며[熏種], 어느 마음이 종자로 배어들지 아니하는가?
  [답] 솔이심에는 두 가지의 해설이 있다. 첫째는 종자로 배어들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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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데 저절로 경계를 반연하되 강하거나 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만약 생소한 경계를 반연하게 되면 종자로 배어들지 않거니와 만약 일찍이 들었거나 익숙한 경계를 반연하게 되면 종자로 배어들게 되는 것이니, 익힌 힘 때문이다. 그 밖의 마음을 통틀어서 종자로 배어든다. 지금 해설하는 것은, 또 갑자기 소리를 듣는 경계와 같은 때에는 생소하거나 익숙한 소리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실성(實聲)의 종자로 배어든다.
  또 아홉 가지 마음으로 수레바퀴를 이루는 것이 있다. 자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되 진리는 바로 하나이다. 그 마음은 수레바퀴와 같아서 경계를 따라 굴러간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몸은 생각의 수레바퀴가 아니로되, 생각에 따라서 구른다”고 하였다. 그 뜻은 무엇인가? 상좌부(上座部)의 스님은 구심륜(九心輪)이란 것을 세웠다.
  첫째가 유분(有分)이요, 둘째가 능인발(能引發)이요, 셋째가 견(見)이요, 넷째가 심구(尋求)요, 다섯째가 관철(貫徹)이요, 여섯째가 안립(安立)이요, 일곱째가 세용(勢用)이요, 여덟째가 반연(返緣)이요, 아홉째가 유분체(有分體)이다.
  이는 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직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저절로 대경(對境)에 반연하여 작용하는 것을 유분심이라 한다. 가령 대경에 이르러서 마음이 반연하려 할 때면 문득 경각(警覺)을 내는 것이니, 능인 발심이라 한다. 그 마음이 이미 이 대경 위에 구르게 되면 견(見)이라는 비춤으로 그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고 나면 이내 찾고 구하면서[尋求] 그 선악을 살핀다. 이미 그것을 살핀 뒤에는 마침내 관철(貫徹)하게 되어 그 선악을 알며, 그리하여 안립심(安立心)은 말과 분별을 일으켜 그 선악을 말한다. 그 선악에 따라 이내 동작이 있는 것이 세용심(勢用心)이요, 동작을 이미 일으켰으면 그만두려고 짐짓 앞에 했었던 일을 돌이켜 반연하게 된다. 반연한 뒤에는 도로 유분심(有分心)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절로 대경을 반연하는 것을 9심(心)이라 하는데, 수레바퀴라는 뜻이 이루어질 만하다.
  그 중의 견심(見心)은 6식에 다 통하고 그 밖의 것은 의식(意識)에만 통한다. 유분심은 생각에 다 통하고 반연심은 죽음[死]을 얻을 뿐이다.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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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을 떠난 이면 죽음이 유분심일 뿐이니, 이미 나와 욕망이 없고 돌이켜 반연할 바도 없으며 그리워하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아직 욕심을 떠나지 못한 이면 돌이켜 반연하는 마음으로 죽게 되는 것이니, 사랑함과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대경에 이르면 바로 마음이 나게 되거니와 만약 다른 경계가 없으면 언제나 유분(有分)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절로 상속하게 된다. 그러나 견심과 심구심은 앞뒤가 일정하지 않다.
  [문] 만약 분별에 따르면 진심과 망심이 성립되는데, 이 두 가지 마음을 묶으면 통틀어 몇 가지가 있는가?
  [답]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는 필경에 공한 길[畢竟空道]이요, 둘째는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길[分別好惡道]이다. 필경에 공한 길도 오히려 하나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많을 것을 말하게 되겠는가?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길은 이(理)는 뜻을 쫓아 구별되고 사(事)는 항하 모래만큼 많을 것이로되 이는 또 하나의 마음에 요약된다”고 했다.
  고석(古釋)에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흘리타야(紇利陀耶)니, 중국말로는 육단심(肉團心)이라 번역한다. 몸 속의 5장(藏)에서 심장이니, 『황정경(黃庭經)』에서 밝힌 바와 같다. 둘째는 연려심(緣慮心)이니, 이것이 바로 8식(識)이다. 다 함께 자기 몫[自分]의 대경을 반연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빛[色]은 바로 안식(眼識)의 대경이고 감관과 종자와 기세계(器世界)는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대경이어서 저마다 한 가지 몫을 반연하기 때문에 자기 몫이라고 한다. 셋째는 질다야(質多耶)이니, 이것은 집기심(集起心)이라 번역한다. 제8식만이 종자를 쌓아 모으고 현행(現行)을 일으킨다. 넷째는 건율타야(乾栗陀耶)이니, 견실심(堅實心)이라 하기도 하고 정실심(貞實心)이라고도 번역한다. 이것이 바로 진심(眞心)이다. 그러나 제8식은 따로 자체(自體)가 없고 이것이 진심일 뿐인데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모든 망상(妄想)과 더불어 화합(和合)하고 화합하지 않는다는 이치가 있다. 화합한다는 이치라 함은 염정(染淨)을 능히 포함한다는 것으로서 장식(藏識)이라 하며,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체(體)는 항상 변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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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므로 진여(眞如)라고 한다. 모두 이것은 여래장(如來藏)이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적멸(寂滅)한 것을 한 마음이라 하나니, 한 마음이란 그대로 여래장이니라”고 하였는데 여래장 또한 속박되어 있는 법신(法身)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숨으면 여래장이요, 드러나면 법신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네 가지 마음은 본래 같은 일체(一體)인데 다만 미혹함과 깨침에 따라 많은 것으로 구분된다.
  경의 게송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장이/아뢰야(阿賴耶)인데/나쁜 슬기[惡慧]는 알지 못하네./장(藏) 그대로가 아뢰야식인 줄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장이라 함은 곧 법신이 번뇌 속에 있는 것을 아뢰야라고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장식(藏識)이다. 나쁜 슬기로는 여래장이 아뢰야식인 줄 알지 못한다. 진여와 아뢰야의 체(體)가 따로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이 나쁜 슬기이다. 그러나 비록 네 가지 마음이 체가 같다 해도 진심과 망심이라는 뜻은 구별되고 근본과 끝 또한 다르다. 앞의 세 가지는 바로 상(相)이요 뒤의 한 가지가 곧 성(性)인데 성상은 걸림이 없어서 모두가 곧 하나의 마음이다. 이것이 곧 제4의 진심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는 것이다.
  또 고덕(古德)이 자세하게 한 마음을 해석한 것이 있는데, 한 여래장의 마음에서 보면 두 가지의 이치를 포함시켰다. 첫째는 체에 맞추어서 상이 끊어진 이치[約體絶相義]이니, 바로 진여의 문[眞如門]이다. 물들지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움직이지도 아니하고 옮겨가지도 아니해서 평등하여 한 맛이요, 성품에 차별이 없고 중생 그대로가 열반이라 적멸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범부와 미륵(彌勒)이 동일한 곳[際]이다.
  둘째는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치[隨緣起滅義]이니, 바로 생멸의 문[生滅門]이다. 훈습(熏習)을 따라 옮겨가고 움직이면서 염정(染淨)을 이룬다. 염정이 비록 이루어지기는 하나 성품은 항상 동요하지 아니하며, 다만 동요하지 않는 것을 말미암아 염정을 이룬다. 그러므로 동요하지 않은 것도 역시 동요하는 문에 있다.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을 아뢰야식이라 하나니 무명(無明)의 7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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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함께 함이 마치 큰 바다에 파랑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여래장은 비롯함이 없이 거짓의 악습(惡習)에 훈습을 받으므로 식장(識藏)이라고 한다. 만약 이 한마음으로 끝을 추구하여 근본에 돌아가면 제일의(第一義)를 증득하여 해탈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제일의는 바로 인연의 성품이라 만약 인연의 성품을 보면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모두가 한 마음으로 짓느니라”고 하였고, 논(論)에 이르기를 “이 한 마음뿐이라 하는 것은 모든 3계(界)가 마음이 전별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모든 교(敎)애서 똑같이 마음일 뿐이라고 인용하여 증명했는데, 어떻게 한 마음으로 3계를 짓는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승(二乘)이니, 앞의 대경이 마음일 뿐임을 분명히 모르는지라 비록 한 마음이라고 듣기는 하나 진제(眞諦)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하는 것이로되 모두가 이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둘째는 이숙뢰야(異熟賴耶)를 한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바깥 대경이 없는 것을 간택하기 때문에 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여래장의 성품은 청정한 한 마음인 것이니, 진리에 두 체(體)가 없기 때문에 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서 범부ㆍ성인의 두 가지 법과 염과 정[染淨]의 두 가지 문이 한 마음이 아님이 없음을 알 것이다.
  또 이 한 마음은 성(性)ㆍ상(相)ㆍ체(體)ㆍ용(用)ㆍ본(本)ㆍ말(末)ㆍ즉(卽)ㆍ입(入) 등의 뜻에 맞추어서 열 가지 문으로 다시 나뉜다.
  첫째 가정[假]으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바로 2승(乘)의 사람으로서 실로 바깥의 법이 있되 마음으로 말미암아 전별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한 마음임을 말한다.
  아래의 아홉 가지 문은 실로 한 마음일 뿐이다.
  둘째 상분과 견분이 함께 존재[相見俱存]하기 때문에 한 마음임을 말한다. 이것은 통팔식(通八識)과 모든 심소(心所)이며 아울러 변현할 바의 상분(相分)이다. 근본과 그림자[本影]가 다 갖추어 있되 유지(有支)등의 훈습(熏習)의 힘 때문에 3계(界)의 의보(依報)ㆍ정보(正報)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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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별하여 나타낸다.
  셋째 상분을 포섭하여 견분으로 돌아가기[攝相歸見] 때문에 한 마음임을 말한다. 역시 심왕(心王)과 심수(心數)에 다 통한다. 다만 변현할 바 상분이 특별한 종자로 나눈 것이 없고 능히 보는 식[能見識]이 나는 것은 그 영상(影像)을 띠고 일어날 뿐이다.
  넷째 심수를 포섭하여 심왕으로 돌아가기[攝數歸王] 때문에 한 마음임을 말한다. 제8식에 통할 뿐이다. 저 심소가 심왕에 의지하되 체(體)가 없으며, 또한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다.
  풀이하여 보자. ‘상분을 포섭하여 견분으로 돌아간다’ 함은, 유식게(唯識偈)에 이르기를 “식일 뿐[唯識]이요 경계가 없거늘/전진(前塵)이 없는데 망령되게 본 것이/마치 사람 눈에 눈병이 있어서/털[毛]과 달[月] 따위의 것을 보는 것 같다”라고 했다.
  논(論)을 짓는 데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뜻을 세우는 것[立義]으로서 바로 첫 글귀요, 둘째는 인용하여 증명하는 것[引證]으로서 바로 둘째 글귀요, 셋째는 비유(譬喩)로서 바로 아래의 두 글귀이다.
  『소연연론(所緣緣論)』에서 이르기를 “안의 식(識)이 바깥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식의 소연연이 되는 것은, 저 모양이 식에 있고 능히 식을 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뜻을 말하면 안의 식의 바깥의 대경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소연연이 되는 것은 안 등의 식이 저 모양을 띠고 일어나며 그로부터 식을 나게 하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면 모든 식은 안에 있는 대경의 모양으로 소연연이 될 뿐이니 이치가 잘 성립되며 전혀 모양 없는 것이 아니다. 모양은 전적으로 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견분으로 돌아간다’고 한 것이다.
  ‘심수를 포섭하여 심왕으로 돌아간다’ 함은, 『장엄론(莊嚴論)』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자계(自界) 및 두 가지 광[二光]과/어리석음이 모든 미혹[惑]과 함께 생기나니/이와 같은 모든 분별의/두 가지 실제[二實]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풀이하여 보자. 자계라 함은 자신의 아뢰야식의 종자이며, 두 가지 광이란 능취광(能取光)과 소취광(所取光)을 말한다. 이들은 무명(無明)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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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의 모든 미혹을 연유한 분별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모든 분별의 두 가지 실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두 가지 실이란, 소취실(所取實)과 능취실(能取實)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실의 염오(染汚)를 멀리 여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런 까닭에 논(論)의 게송에 이르기를 “능취(能取) 및 소취(所取)의/이 둘은 마음의 광명[心光]일 뿐이며/탐광(貪光) 및 신광(信光)의/두 가지 광명은 둘이 없는 법이다”라고 했다. 해석하면 유식(唯識)을 구하는 사람은 능취와 소취의 이 두 가지는 마음의 광명일 뿐이라고 알아야 한다.
  다섯째 끝을 근본에 돌아가게[以末歸本] 하므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7전식(轉識)은 모두가 곧 본식(本識)이요 차별된 공능(功能)이나 따로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니,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치 큰 바다의 파랑이/여러 가지의 모양이 없는 것처럼/모든 식심(識心)도 이와 같아서/다르게 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여섯째 상을 포섭하여 성에 돌아가므로[攝相歸性] 한 마음임을 말한다. 이 8식은 모두가 자체가 없어서 여래장으로서만 평등하게 나타날 뿐이요, 그 밖의 모양은 모두 없어지므로 일체 중생이 그대로 열반의 모양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고 여덟 가지가 있으며, 모양 없는 것 또한 모양이 없다”고 했다.
  일곱째 성과 상이 함께 융화[性相俱融]하므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여래장은 온 몸이 인연을 따라 모든 일들을 이룩하게 하되 그 자성(自性)은 본래 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이와 사[理事]가 혼융하여 걸림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음의 두 가지 진리[二諦]가 모두 장애가 없다.
  여덟째 사가 융화하여 상입[融事相入]하므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심성(心性)이 원융하여 걸림 없음으로 말미암아 성(性)으로써 사(事)를 이루며 사 또한 혼융하여 서로 장애하지 않으므로, 하나가 온갖 것을 들이고 낱낱의 티끌 속에서 저마다 법계(法界)를 보는 것이니, 하늘ㆍ사람ㆍ아수라가 하나의 티끌을 여의지 않았다.
  아홉째 사가 온전하여 상즉[全事相卽]하므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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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에 의한 사(事)이며, 사는 따로의 사가 없다. 심성에 이미 피차(彼此)의 다름이 없으므로 사 또한 일체가 즉 하나요 하나와 같다.
  열째 제망의 걸림 없음[帝網無礙]으로 한 마음임을 말한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그 일체 안에 다시 일체가 있어서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음은 모두가 심식인 여래장의 성품이 원융하여 그지없고 진여의 성품이 마침내 그지없기 때문이며 온갖 법이 곧 진여라고 관찰하기 때문이요, 온갖 때와 처소가 모두 제석의 보배 그물[帝網]이기 때문이다.
  선복송(漩洑頌)에서는 “어떤 이가 진공의 이치[眞空理]를 알려고 하면/몸속의 진여가 도리어 밖에 두루하며/ 정(情)과 비정(非情)이 한 가지 일체(一體)라/곳곳마다 다 참된 법계와 같다./환색(幻色)을 여의지 않고 바로 공을 보면/이것이 곧 진여라 일체를 포함하며/한 생각의 비춤으로 많은 겁(劫)을 들이고/낱낱 생각의 겁으로 일체를 거두며/한 대경 안에 온갖 지혜를 넣고/한 지혜 안에 온갖 경계가 찬다./다만 한 생각으로 모든 대경 관찰하면/모든 온갖 대경 동시에 모이나니/때와 처소 제망(帝網)처럼 겹겹으로 나타나되/온갖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네”라고 했다.
  선복(漩洑)이라 함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돌아 흐르는 곳이다. 첫째는 매우 깊기 때문이요, 둘째는 돌아 흐르기 때문이요, 셋째는 건너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의 바다의 선복 또한 그러하여서, 첫째는 부처님만이 구명할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망(眞妄)이 서로 돌면서 처음과 나중을 다하기 어렵기 때문이요, 셋째는 공(空)을 들으면 공이라 하고 존재[有]를 들으면 존재라 하기 때문에 선복에 잠기게 된다.
  만약 이 종(宗)을 분명히 모르면, 존재의 바다[有海]를 뛰어넘기 어려워서 선악의 파랑에 따라 고락(苦樂)의 섬에 표류하리니, 자비의 배를 만나지 못하면 어찌 깨달음의 언덕[覺岸]에 오르겠는가?
  게송에서는 “진여의 청정한 법계는/한결같이 없어져서 존재한 일 없건마는/염과 정[染淨]의 인연을 따라서/마침내 10법계(法界)를 이루게 되네”라고 했다.
  염연(染緣)을 따라 6범(凡)의 법계를 이루며 정연(淨緣)을 따라 4성(聖)의 법계를 이룬다. 6범의 법계란, 첫째 하늘[天] 법계요, 둘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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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 법계요, 셋째 아수라(阿修羅) 법계요, 넷째 지옥(地獄) 법계요, 다섯째 아귀(餓鬼) 법계요, 여섯째 축생(畜生) 법계이다. 4성 법계란, 첫째 성문(聲門) 법계요, 둘째 연각(緣覺) 법계요, 셋째 보살(菩薩) 법계요, 넷째 불(佛) 법계이다.
  중생이 참된 성품 위에서 정상(情想) 때문에 스스로 달라지면 6취(趣)에 오르락내리락하고, 모든 성인이 무위법(無爲法) 안에서 지행(智行)으로써 달라지면 4성(聖)에서 높고 낮다. 그러나 범부 성인의 자취가 비록 오르고 내리고 속박하고 해탈하는 것이 다른 것 같으나 하나의 참된 법계 안에서는 처음부터 이동(移動)이 없다.
  또 화엄종(華嚴宗)에 의하면 한 마음을 이사(理事)에 따라 네 가지 법계를 세운다. 첫째 이법계(理法界)라 함은 계(界)는 바로 성(性)의 뜻으로서 그지없는 일의 법이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법계(事法界)라 함은 계는 바로 분(分)의 뜻으로서 하나하나의 뜻으로 구별되어 분제(分劑)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라 함은 성과 분[性分]이 갖추어진 뜻으로서 원융(圓融)하고 무애하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 함은 온갖 분제의 사법(事法)이 낱낱 그대로의 성품이라 융통하여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법계는 이사(理事)의 네 가지 법계로 인한 성상(性相)이므로 곧 진속(眞俗)이 융통하고 걸림과 벗어남[滯出]이 끝없음에 들어서 겹겹의 그지없는 법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한 마음의 법계요 온전한 법계의 한 마음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힘이 없음에 따라서 하나가 성립되고 다수가 성립되며 서로가 의뢰하고 서로가 껴잡음으로 인하여 혹은 숨기도 하고 혹은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마치 하나의 허공에 삼라(森羅)의 물상(物像)이 두루한 것과 같고 하나의 물이 만 겹으로 포개진 물결과 같다. 종경(宗鏡) 안에 들면 평온하게 나타나리라.
  또 소입(所入)과 능입(能入)의 두 가지 법계가 있다. 『청량소(淸凉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소입은 온통 하나뿐인 참된 무애법계(無礙法界)라 그 성상(性相)을 말하고 사리(事理)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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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뜻의 구별에 따르면 간략하게 다섯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유위법계(有爲法界)요, 둘째는 무위법계(無爲法界)요, 셋째는 역유위역무위법계(亦有爲亦無爲法界)요, 넷째는 비유위비무위법계(非有爲非無爲法界)요, 다섯째는 무장애법계(無障礙法界)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에는 각각 두 가지씩의 문이 있다.
  첫 번째 유위(有爲)의 두 가지 것에는, 첫째 본식(本識)이 모든 법의 종자(種子)를 능히 지니므로 법계라고 한다. 논(論)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계(界) 등은 곧 인(因)이라는 뜻이요, 그 계의 체[界體]는 법신(法身)을 말한 것이 아니다. 둘째 3세(世)의 법의 차별인 변제(邊際)이므로 법계라고 한다. 「부사의품(不思議品)」에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은 과거의 온갖 법계를 알되, 모두 남음이 없다’고 한 것 등이니, 이것이 바로 분제(分劑)의 뜻이다.
  두 번째 무위법계(無爲法界)의 두 가지 것에는 첫째가 성정문(性淨門)이니, 범부 지위 안에 있되 성품은 항상 깨끗하기 때문이요 진공(眞空)의 한 맛이라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구문(離垢門)이니, 다스림[對治]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끗함이 나타나기 때문이요, 행(行)의 얕고 깊음에 따라 열 가지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역유위역무위법계(亦有爲亦無爲法界)의 두 가지 것에는, 첫째가 수상문(隨相門)이니, 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과 다섯 가지 색[五種色] 및 여덟 가지 무위[八無爲]의 이 열여섯 가지 법은 뜻[意]만 알 수 있으므로 18계(界)의 안의 것을 법계라 한다. 둘째는 무애문(無礙門)이니, 한 마음의 법계는 두 가지 문을 다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마음의 진여문[心眞如門]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생멸문[心生滅門]이다. 비록 이 두 가지 문이 모두가 저마다 온통 온갖 법을 포섭하고 있기는 하나, 그 두 자리가 언제나 섞이지 않는 것은 마치 물을 겸한 파랑이 고요한 것이 아니고 파랑을 겸한 물이 움직인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회향품(廻向品)」에서 이르기를 ‘유위계(有爲界)에서 무위의 법을 보이면서도 유위의 형상[相]을 무너뜨리지 않고 무위계(無爲界)에서 유위의 법을 보이면서도 무위의 성품[性]을 분별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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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무애(事理無礙)를 밝힌 것이다.
  네 번째 비유위비무위법계(非有爲非無爲法界)의 두 가지 문이란, 첫째가 형탈문(形奪門)이니, 연(緣)은 이(理)의 연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유위가 아니요, 이(理)는 연(緣)의 이가 아님이 없기 때문에 무위가 아니다. 법체(法體)는 평등하여 형상이 빼앗기고 두 가지가 다 없어졌다.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였다.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법은 평등한데 이것은 유위입니까, 무위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유위법을 여의면 무위법이 있을 수 없고 무위법을 여의면 유위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은 유위의 성품과 무위의 성품인 이 두 가지 법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느니라.>’
  위의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는 무기문(無奇門)이니, 이 법계는 상(相)을 여의고 성(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이것은 둘이 아니며, 또 두 가지 진리[諦]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 두 가지의 명언(名言)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 함께 여읜 것이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 말씀하기를 ‘온갖 법이란, 요약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유위와 무위이니라. 이 안의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는 무위가 아니고 유위도 아니니라’고 한 것 등이다.
  다섯 번째의 무장애법계(無障礙法界)의 두 가지 문이란 첫째가 보섭문(普攝門)이니 위의 네 가지 문에서 어느 하나가 그대로 나머지 온갖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재(善財)가 혹은 산과 바다를 보기도 하고 혹은 집을 보기도 한 것을 모두 법계에 들었다고 했다. 둘째는 원융문(圓融門)이니, 이(理)로 사(事)를 융통하기 때문에 사(事)로 하여금 분제(分劑)가 없게 한다. 작은 티끌이 작은 것이 아니어서 시방의 세계를 능히 용납하며, 세계의 바다가 큰 것이 아니어서 은밀히 하나의 티끌에 들어간다. 사(事)로 이(理)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理)로 하여금 분제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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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게 한다. 하나와 다수가 걸림이 없는 것이니, 혹은 일법계(一法界)라 하기도 하고 혹은 제법계(諸法界)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큰 모든 것[諸]이요,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하나이며, 나아가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다. 그러므로 선재가 잠시 동안 손을 잡고서 마침내 많은 겁(劫)을 지냈었고, 겨우 누각에 들어가자마자 널리 그지없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런 종류이다.
  위에서 다섯 가지 문의 열 가지 이치로써 통틀어 소입(所入) 법계를 밝혔는데, 6상(相)으로써 융화하여야 한다.
  둘째 능입(能入)을 밝히는 것 역시 다섯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정신(淨信)이요, 둘째는 정해(正解)요, 셋째는 수행(修行)이요, 넷째는 증득(證得)이요, 다섯째는 원만(圓滿)이다.
  이 다섯 가지는 앞의 소입(所入) 법계에서도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어느 하나의 능입도 다섯 가지 소입에 다 통하고, 어느 하나의 소입도 다섯 가지 능입에 다 두루 하다. 둘째는 이 다섯 가지의 능입을 그의 차례대로 저마다 하나의 문에 든다.
  이 위의 마음과 대경[心境]의 두 가지 이치는 열 가지 문[十門]과 6상(相)으로 원융한지라, 통틀어 한 무더기가 되어 무장애법계(無障礙法界)가 된다.”
  『백문의해(百門義海)』에서는 “법계에 든다[入法界] 함은 곧 진(塵)의 연기(緣起)로서 이것은 법(法)이니 법은 지혜를 따라 나타나고 용(用)은 차별이니 곧 계(界)이다. 이 법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분제(分劑)가 없고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어서 진제(眞際)와 같으며, 허공과 같아서 일체에 두루 통하고 곳에 따라 나타나서 명료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나 하나의 진[一塵]과 온갖 법은 저마다 서로 보지 못하고 서로 알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저마다 전혀 원만한 법계라 널리 일체를 포섭하며 다시는 다른 법으로 알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에서 이르기를 “곧 법계(法界)에는 법계가 없고 법계를 모른다”고 했는데, 만약 이렇게 다시는 다른 법으로 알거나 볼 수 없다 하면, 어떻게 ‘든다[入]’고 말하는가? 깨쳐서 아는 곳[悟了之處]을 든다고 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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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또 비록 든다 하더라도 들 바가 없으며, 만약 들 바가 있다면 모든 법성(法性)의 공한 이치를 잃는다. 성품이 없되 도리[理]가 같기 때문에 곳곳마다 법계에 든다고 한다.
  앞에서 요약한 정지(情智)의 범상한 작은 소견으로 염정(染淨)의 인연을 따라 열 가지 법계를 이룬 것으로 곧 그 허물을 이루었다. 이제 화엄(華嚴)의 성기법문(性起法門)에 의하면, 모두가 참된 법계이다. 이루어지거나 무너지거나 때가 끼거나 깨끗하거나 간에 온전히 법계를 이룬다.
  경에서는 “모든 색(色)의 한량없는 괴상(壞相)을 분별하면, 이것을 상지자(上智者)라고 한다”고 했다. 고석(古釋)에 이르기를 “6도(道)의 색(色)은 선(善)을 무너뜨리고 정(定)을 무너뜨리며, 이승(二乘)의 색은 원인을 무너뜨리고 결과를 무너뜨리며, 보살의 색은 있음[有]을 무너뜨리고 없음[無]을 무너뜨리며, 부처의 색은 위의 모든 무너뜨림을 무너뜨리는지라 무너뜨림이 법계가 되어 무너뜨림이 아니고 무너뜨리지 아니함도 아니어서 모두가 곧 법계이다”라고 했다.
  [문] 마음을 네 가지 이름[四名]으로 나누고 뜻[義]을 열 가지로 열었는데, 식(識)의 이름과 뜻은 요약하여 몇 가지가 있는가?
  [답] 만약 같은 문의 자상(自相)으로 요약하면 분별할 수 없고, 만약 다른 문의 공상(共相)으로 요약하면 뜻에 따라 나누어진다. 이름은 성상(性相)으로 요약하여 아홉 가지가 있고, 뜻은 안팎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를 갖추고 있다.
  이름의 아홉 가지는 첫째가 안식(眼識)이요, 둘째가 이식(耳識)이요, 셋째가 비식(鼻識)이요, 넷째가 설식(舌識)이요, 다섯째가 신식(身識)이요, 여섯째가 의식(意識)이요, 일곱째가 말나식(末那識)이요, 여덟째가 아뢰야식(阿賴耶識)이요, 아홉째가 정식(淨識)이다.
  뜻의 다섯 가지는 첫째는 식의 자상(自相)으로서 식의 자증분(自證分)을 말한다. 둘째는 식의 소변(所變)이기 때문에 일체 경계가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며 일어난다. 셋째는 식의 상응(相應)이기 때문에 동시에 느낌[受]과 생각[想] 등의 심법(心法)이다. 넷째는 식의 분위(分位)이기 때문에 식은 위의 4상(相) 등이다. 다섯째는 식의 실상(實相)이기 때문에 2공(空)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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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眞如)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식의 실성(實性)이다.
  위에 든 모든 법은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통틀어 유식(唯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相)이거나 성(性)이거나 대경[境]이거나 마음이거나, 나아가 차별의 분위(分位)까지 모두가 이것은 유식인 줄 알 것이다. 마르거나 펴거나 아니거나 여의거나 모두거나 따로거나 동시이거나 간에 구름과 안개가 허공을 의지하는 것과 같고 물결이 바다에서 용솟음치는 것과 같다.
  또 고덕(古德)이 유식의 이치를 널리 해석한 것에 열 가지 문이 있다.
  이 유식이란 두 글자를 먼저 분리시켜서 풀이하고[離解] 다음에 합쳐서 풀이[合解]하겠다.
  먼저 분리해서 풀이하면 처음에 유(唯)를 풀이하고, 나중에 식(識)을 풀이한다. 처음의 유(唯)의 글자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가 간지(揀持)의 뜻이다. 간(揀)은 아(我)와 법(法)의 집착을 가려서 버린다[揀去]는 것이고, 지(持)는 지녀 가진다[持取]는 것이니, 의(衣)와 원(圓)의 두 가지 성품을 지녀 가진다는 것이다.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유(唯)는 보낸다[遣]는 것으로서 식(識)의 아법(我法)을 여읜다는 말이니, 식을 여의지 않은 심소(心所)와 무위(無爲) 등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둘째는 결정(決定)의 뜻이다. 결정코[決] 마음을 떠난 경계가 없고, 반드시[定] 속에서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니, 소승(小乘)이 “마음을 떠나 경계가 있다”고 말하므로 청변(淸辯)이 속마음[內心]이 없다고 논파한 것이다.
  셋째는 현승(顯勝)의 뜻이다. 심왕(心王)은 훌륭하고 심소(心所) 등은 하열한데, 지금은 훌륭한 것만을 나타내고 하열한 것은 나타내지 아니한다. 구파논사(瞿波論師)의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 주석에 이르기를 “여기에서 유식을 말하면서 심왕(心王)의 훌륭함만을 들을 뿐이나 도리로는 심소를 겸한 것이다. 마치 왕이 왔다 하면 신하가 없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다.
  다음에 식(識)의 글자를 풀이하면, 곧 잘 분별[了別]한다는 뜻이니, 여덟 가지의 심왕이 곧 식의 자성(自性)이라 하는 것 등이다. 오위 백법(五位百法)의 이(理)와 사(事)가 모두 식을 떠나지 아니했다. 그렇지 않다면 진여는 유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 밖의 것을 포섭하여 식에 돌아가므로 통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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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이라는 이름을 세웠다. 경에서 이르기를 “3계(界)는 유심(唯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에 유식을 합쳐서 풀이한다면, 유(唯)는 가려서 버리는 것[揀去]으로서 바깥 경계가 없다고 부정한 것이니, 경계는 없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식(識)은 능히 잘 분별하는 것으로 속의 마음이 있다고 말한 것이니, 마음은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합하여 유식이라 한다.
  유(唯)는 차전(遮詮)으로 없는 것이라 이것은 용(用)이요, 식(識)은 표전(表詮)으로 있는 것이라 이것은 체(體)이다. 용을 포섭하여 체에 돌아가므로, 유는 그대로가 식이며 지업석(持業釋)이다.
  6석(釋)의 글은 간편한 방법으로서 묘(妙)가 된다. 이제 성상(性相)을 함께 가리려고 하면, 이는 또 간략하게 지업석과 의주석(依主釋)의 두 가지를 인용하는 것이 이 글에 알맞다.
  첫째 지업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지업(持業)이요, 둘째가 동의(同依)이다. 지업이라는 것의 지(持)는 임지(任持)를 말하고 업(業)은 업용(業用)을 말한다. 법의 체(體)는 용(用)을 능히 지니고 용은 체를 능히 나타내므로 지업이라고 한다. 마치 장식(藏識)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식(識)은 체요 장(藏)은 용이므로 식의 체는 장의 용을 능히 지니는 까닭에, 곧 지업이라 한다. 또 묘법(妙法)은 곧 연화(蓮華)라고 함과 같은 것 등이다. 동의석(同依釋)이란 곧 많은 용(用)이 똑같이 하나의 체(體)에 의지한다는 것이니, 마치 “분단생사(分段生死)가 곧 몸이요, 변역생사(變易生死)도 곧 몸이다”라고 함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온갖 만법은 마음으로 체를 삼으며, 만법(萬法)은 바로 용이다. 법은 마음을 여의지 않고 용은 체를 여의지 않으므로 마음의 체는 능히 만법을 지니며, 법이 곧 마음이요 용이 곧 체라 지업석이라고 한다. 만약 온갖 법이 스스로 마음의 임지(任持)를 얻지 못하면, 하나의 법도 성립될 만한 것이 없다. 또 법이 없다면 업용(業用)이 없고 업용이 없다면 체(體)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곧 마음이요 마음은 곧 온갖 법이어서 체와 용은 서로가 이루어져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줄을 알 것이다.
  둘째 의주석(依主釋)에서도 둘이 있는데, 첫째가 의주석이요, 둘째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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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석(依士釋)이다. 의주(依主)라 함은 어떤 법을 뛰어난 것[勝]으로 하열한 것[劣]을 해석하며 하열한 것을 가지고 뛰어난 것에 나아가 그것으로 이름을 나타낸다. 마치 안식(眼識)을 말할 적에, 눈[眼]은 소의(所依)라 뛰어나고 식(識)은 능의(能依)라 하열한 것인데 뛰어난 눈으로 하열한 식을 해석하기 때문이며, 하열한 것을 가지고 뛰어난 것에 나아가 그것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눈의 식이기 때문에 의주석이다. 혹은 별(別)로써 통(通)을 구별하는 의주(依主)이니, 곧 별(別)의 이름이 뛰어나고 통(通)의 이름이 하열하기도 하다. 둘째가 의사석(依士釋)이니, 하열한 법은 이것이 뛰어난 법의 사용(士用)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열한 법을 가지고 뛰어난 법을 해석하며, 뛰어난 법은 하열한 법을 따라 이름을 나타낸다. 마치 택멸무위(擇滅無爲)를 말할 적에, 택멸은 유위(有爲)라 하열하고 무위는 뛰어나므로 훌륭한 것을 가지고 하열한 것에 나아가 이름을 나타내어 의사석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심왕은 뛰어난 것이요, 온갖 법은 모두가 이는 심법(心法)인 줄 알 것이다. 또 마음은 소의(所依)여서 뛰어나고 법은 능의(能依)여서 하열한 것이니, 하열한 것으로 뛰어난 것을 나타내는 마음의 법이기 때문에 의주석이다. 하나의 법도 마음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면, 온갖 법으로 마음을 나타내어 하열한 것으로 뛰어난 것을 나타내는 법의 마음이기 때문에 바로 의사석이다.
  그런 까닭에 종경(宗鏡) 안에서 말한 것은 지업(持業)ㆍ유재(有財)ㆍ의주(依主)ㆍ의사(依士)ㆍ인근(隣近)ㆍ대수(帶數)의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서 지업석과 의주식의 두 가지 해석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아래의 글에서 다시는 하나하나 자세히 밝히지 않을 것이니 하나로 모든 것에 견주어보면 저절로 의혹이 없으리라.
  [문] 여기에서 유(唯)를 말하여 바깥 경계는 있지 않다고 부정[遮]하였는데, 마음을 여읜 경계를 부정하는 것인가,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경계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인가?
  [답] 설령 그렇다면 무슨 잘못이기에 나무라겠는가마는 두 가지 모두가 다 허물이 있다.
  [문] 만약 마음을 여읜 경계는 없고 나머지는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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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것이 없거니와 마음을 여의지 않은 상분(相分)이 존재하거늘 어째서 유식이라고만 말하고 유경식(唯境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만약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경계를 부정한다면 능변(能變)의 3분(分)만 있을 뿐 소변(所變)의 상분(相分)은 없다는 과오가 있게 되는데, 어떻게 회통해서 해석하겠는가?
  [답] 말한 바 유식이라 함은 마음 밖의 경계는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요 안의 경계[內境]로서 식(識)을 여의지 않은 상분이 없다고 부정하지는 아니한다.
  [문] 안의 경계와 식은 다 같이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유식이라고만 말하고 유경식(唯境識)이라고는 말하지 아니하는가?
  [답] 왜냐 하면 호법보살(護法菩薩)이 “경계라는 이름은 안팎으로 다 통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여읜 경계와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경계가 있는데 바깥 경계[外境]를 혼통할까 염려해서 유식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에서 이르기를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바깥 경계를 잘못 집착하여 번뇌의 업(業)을 일으키고 생사하며 윤회하면서 마음 관(觀)할 줄을 모른다고 한 것이지, 안의 경계인 상분이 바깥 경계처럼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문] 유식성(唯識性)과 유식(唯識)은 어떤 같고 다름이 있는가?
  [답] 저마다 두 가지씩의 뜻이 있다. 유식성의 두 가지 뜻이란 첫째는 허망(虛妄)한 유식성이니, 곧 변계성(遍計性)이어서 버려야 할 청정(情淨)이다. 둘째는 진실(眞實)한 유식성이니, 곧 원성실성(圓成實性)이어서 증득해야 할 청정이다.
  유식을 말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쩨는 세속(世俗)의 유식이니, 곧 의타기(依他起)여서 끊어야 할 청정이다. 둘째는 승의(勝義)의 유식이니, 곧 원성실성이어서 얻어야 할 청정이다.
  또 유식의 성(性)과 상(相)은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상은 바로 의타기(依他起)니, 이것은 유위(有爲)일 뿐이어서 유루(有漏)ㆍ무루(無漏)에 다 통하며, 성은 바로 원성실성이니 이것은 진여(眞如)일 뿐이어서 무위(無爲)요, 무루이다.
  또 말하기를 “식(識)이라고만 말하면, 이것은 잘 분별[了別]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뜻을 말하자면 오위백법(五位百法)의 이(理)와 사(事)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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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포섭하여 식으로 귀결시켜 통틀어 식이라는 이름으로 말한 것이니, 만 가지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의 식과 하나의 식뿐만 아니라 또 그 밖의 식들도 없다.
  유식의 체[唯識體]를 드러내는 것에서, 첫째는 소관(所觀)으로 출체하는 것이다. 곧 오위 백법을 취하여 체(體)를 삼는 것은 유위와 무위의 법을 꿰뚫어 살피기 때문이니, 곧 식의 상[識相]과 식의 성[識性]을 합하여 유식의 체로 삼는 것은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관(能觀)으로 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곧 심심소(心心所)만을 취하여 체로 삼는 것은 심소와 식은 언제나 상응(相應)하기 때문이니, 곧 능(能)일 뿐이요 소(所)가 아니다. 만약 유식의 관[唯識觀]에 맞추면 곧 경계 안의 지혜를 취하여 체를 삼는 것이니, 소관(所觀)의 경계에서 훌륭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또 유식의 차별(差別)을 밝힘에는, 모든 연(緣)과 이(理)를 포함하여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견허존실의(遣虛存實義)이다. 견(遣)은 없애버리는 것[除遣]이요, 허(虛)는 허망(虛妄)이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은 허망하게 일어날 뿐 도무지 체용(體用)이 없다고 관(觀)하여 바르게 없애 버리는 것이니, 정(情)으로는 있고 이(理)로는 없기 때문이다. 존(存)은 머물러 둔다[留]는 뜻이요, 실(實)은 실유(實有)를 말한다. 곧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법체(法體)는 바로 실유여서 이것은 본래와 나중의 두 가지 지경(智境)이라고 관하여 바르게 머물러 두는 것이니, 이(理)로는 있고 정(情)으로는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온갖 범부와 소승(小乘)들은 끝없는 때로부터 아법(我法)을 망령되이 고집하여 존재[有]로 삼았고, 청변(淸辯) 보살 등은 이사(理事)를 망령되이 제거하여 공으로 삼았다. 이제 유식관(唯識觀) 중에서 허망을 버리게 하는 것은 공관(空觀)이고 존재의 집착[有執]을 버리고 실유에 머물러 두는 것은 유관(有觀)이며 공의 집착[空執]을 버리면 존재가 아니고 공이 아닌 것이니, 법은 분별이 없고 언전(言詮)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유순의(捨濫留純義)다. 사(捨)는 버리고 여의는 것[捨離]이요, 람(濫)은 서로 탐낸다는 것[相濫]이며, 유(留)는 머물러 둔다는 것[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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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留]이요, 순(純)은 뒤섞임이 없다는 것[無雜]이다. 비록 사(事)와 이(理)로 경계가 있고 마음이 있다고 관찰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홀로 일어난 것이 아니요 경계를 의지하여야 비로소 나며, 경계도 스스로 나지 아니하고 식(識)이 변하여야 비로소 일어난다. 경계를 탐냄이 있어서 그것을 버린다 하여도 유심(唯心)이라 일컫지 아니하고, 체(體)가 이미 순수하게 머물러야 유식(唯識)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나[我]는 안에만 있고 경계는 바깥에 통하기도 하므로 바깥 경계를 혼동할까봐 유식이라고만 말한 것이지 안의 경계가 바깥 경계처럼 전혀 없다는 것 아니다”라고 하였고, 『화엄경』에서 말씀하기를 “3계(界)가 유심(唯心)이니라”고 한 것이다.
  셋째는 섭말귀본의(攝末歸本義)이다. 섭(攝)은 한데 몰아서 포섭한다는 것[綰攝]이요, 말(末)은 곧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두 가지이며, 귀(歸)는 곧 근본으로 향한다는 것[向本]이니, 식의 자증분(自證分)을 말한다. 이것은 소의(所依)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末)의 견분과 상분을 한데 몰아서 본래의 자증분의 체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식의 소연(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넷째는 은열현승의(隱劣顯勝義)이다. 심왕과 심소로 다 같이 나투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심소의 하열한 것은 의타기(依他起)때문이니, 하열한 것을 숨기고 취하지 아니한다. 심왕이 뛰어난 것은 소의의 체[所依體]이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유식이라 말하며 바로 이름이 뛰어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장엄론(莊嚴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두 개라고 인정한 듯함은 이러한 탐냄[貪]과 같은 따위들이 나타난 것이다”고 했다.
  다섯째는 견상증성의(遣相證性義)이다. 식(識)이라는 말로 표시한 바는 사(事)와 이(理)가 갖추어져 있다. 사는 상용(相用)이라 버려서 취하지 아니하며, 이는 체성(體性)이라 증득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섭론(攝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새끼를 뱀이라고 알음알이[解] 내었다가/새끼를 보고서야 아닌 줄 알듯이/그것이 분명함을 증득하고 보아야/비로소 밝은 성품[明性]이 어지러워진 줄을 아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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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는 경의(境義)이다. 경계[境]는 소관(所觀)의 경계를 말하며, 식(識)은 능관(能觀)의 마음이다. 이 소관의 경계는 식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나타나며 경계는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경계에 유식이라는 차별 상태[義]를 세운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경전에 말하기를 “귀신과 사람과 하늘들이 보는 바는 저마다 다르다”라고 했다.
  일곱째는 교의(敎義)이다. 곧 능전(能詮)의 교(敎)이니, 설명에 유식의 차별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는 “자기 마음의 집착으로 말미암아/마음이 바깥 경계와 작용하는 듯하지마는/그의 보는 바가 있지 않나니/이 때문에 유심(唯心)이라 말하느니라”고 했다.
  여덟째는 이의(理義)이다. 도리(道理)의 유식이다. 『���유식송(唯識頌)』에서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식(識)이 전변한 것이어서/분별하는 주체와 분별되는 대상/이것과 그것은 모두가 없는지라/그 때문에 온갖 것은 유식이니라”고 했다.
  아홉째는 행의(行義)이다. 행(行)은 관행(觀行)을 말한다. 보살이 선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네 가지의 심사관(尋伺觀) 등을 짓는 것이니, 곧 관행과 선정은 다 함께 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가론(瑜伽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보살이 선정의 자리에서/경계는 유심이라 관찰하느니라”고 하는 것 등이다.
  열째는 과의(果義)이다. 불과(佛果)의 4지(智)와 보살의 모든 공덕은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장엄론(莊嚴論)』에서 이르기를 “진여(眞如)에 경계와 식(識)이 없는 것이 깨끗한 무루계(無漏界)니라”고 한 것 등이다.
  위에서와 같은 열 가지 차별 상태인 성(性)ㆍ상(相)ㆍ경(境)ㆍ지(智)ㆍ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 등은 모두가 곧 식(識)일 뿐이어서 하나의 법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 경전의 요의(了義) 중의 왕으로서 모든 성인이 의지해야 할 아버지라 일컬으며, 만약 만난다면 단박에 바라는 것이 사라져 하나의 법도 구할 것이 없고 한 가지 일도 부족한 것이 없어서 온전히 여래의 위없는 값진 보배를 얻으리니 어찌 형산(刑山) 굴 속의 옥덩이와 같겠으며, 이미 교해(敎海)의 비밀한 영주(靈珠)를 찾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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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검은 용의 턱 밑의 구슬에다 견주리오. 나아가 중생의 괴로움의 끝[苦際]을 다하고 번뇌의 병의 근원을 끊었으며, 한 생각의 공(功)이 온전하여 천 갈래 길이 스스로 바르게 된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마치 맑고 시원한 못이 온 목마른 이들을 만족시키는 것과 같고 추운 이가 불을 얻은 것과 같고, 벌거숭이가 옷을 얻은 것과 같고, 장사꾼이 우두머리를 만난 것과 같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난 것과 같고, 건널 적에 배를 만난 것과 같고, 병든 이가 의사를 만난 것과 같고, 어둔 데서 등불을 만난 것과 같고,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백성이 왕을 만난 것과 같고, 장사꾼이 바다를 만난 것과 같고, 횃불이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아서, 이 『법화경』도 역시 그러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고통과 모든 병통(病痛)을 여의게 하며 온갖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것만이 진실하고 만 가지 법이 모두가 공한 줄 알 것이니, 이 표종(標宗)이야말로 다시는 견줄 이 없이 뛰어난 것[無等等]이다.
  『관법경(觀法經)』에서 말하였다.
  “거기에 상수(上首)라는 보살이 있었다. 하나의 걸사(乞士)가 되어서 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는데, 그때 항가(恒伽)라는 비구가 걸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진실(眞實)안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진실이라 합니까?’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진실이라 합니다.’
  또 물었다.
  ‘적멸한 모양 안에서는 구할 바가 있습니까. 구할 바가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구할 바가 없습니다.’
  ‘구할 바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구하십니까?’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나는 일부러 구하고 있습니다.’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뭐하러 구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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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할 바 있는 것이면 모두가 다 공한 것이니, 얻는 것도 공이요, 담는 것도 공이요, 채우는 것도 공이요, 오는 것도 공이요, 말한 것도 공이요, 묻는 것도 공이며, 적멸 열반과 온갖 허공의 분계(分界) 또한 모두가 공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차례대로의 공한 법을 위하여서 진실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법과 법의 위에서 공을 구할 수 있다면, 문과 [문]안에서 해탈한 줄 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법으로 문답하며 언어가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마치 종경(宗鏡) 속의 형상과 같으며, 만약 반야(般若)지혜로 적멸 열반을 비추면 마치 종경 중의 광명과 같다. 그런 까닭에 형상이거나 광명이거나 간에 모두가 다 공한 것이니, 거울의 바탕은 항상 드러나 있을 뿐 온갖 처소에 두루 하여 일찍이 나타나거나 숨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차례대로의 공한 법을 위하여서 진실을 구하나니, 온갖 법이 모두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 구할 바 없는 가운데서 나는 짐짓 그것을 구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역시 법을 구한다 하면, 온갖 법에서 구한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융대사(融大師)가 말하기를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 하면, 바로 이것은 때 아닐 적[非時]에 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정명경(淨名經)』에서 말하였다.
  “‘공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62견(見)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또 물었다.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모든 부처님의 해탈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일체 중생의 심행(心行)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고석(古釋)에 이르기를 “공지(空智)는 소견[見]을 인해서 나온다. 그렇다면 공지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공하므로 공지라고 한다. 삿된 소견[邪見]은 모든 부처님의 해탈로 인해서 존재하되, 삿된 원인[邪因]이 바로 삿된 소견을 내는 것이라 역시 공하다. 모든 부처님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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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은 깨친 중생으로 인한 마음의 행(行)이므로 해탈이요 공이다. 그러므로 그 공(空)의 체(體)에서 보면 둘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서로 구한다는 도리가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보자. 삿된 것과 바른 것은 체가 똑같이 공의 도리에 근본을 둔 것이다. 또 일찍이 잠시라도 숨은 일이 없다. 만약 이 평등한 성품 안에서라면, 구할 필요가 없지만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구한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무생의경(無生義經)』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모든 부처의 지혜를 원하고 구하는 것[願求] 또한 원하거나 구하는 것에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것조차도 오히려 탐착하지 않게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착한 법이겠는가? 또 보살은 본래 원을 세우면서, 다만 말하기를 ‘제가 불도를 원하고 구하는 것은 중생들이 이로 인하여 비로소 알고 발심하면서 불도를 구하게 함입니다. 뜻을 얻으면 스스로가 구할 바가 없음을 알게 하여지이다’라고 할 뿐이다.”
  위에서 해석한 바는 생각과 생각이 실상(實相)과 상응하여 다시는 그 밖의 생각이 없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낱낱의 모양[相]이 상응하면, 모든 소견의 허물을 멀리 여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약 모든 모양에서 언제나 실상과 상응하면 저절로 모든 허물을 여의고 제일의(第一義)를 알게 된다는 것인 줄 알 것이다.
  청정한 참된 마음은 밝고 사무쳐서 염착(念着)이 없고 사(事) 그대로가 여(如)이다. 유심으로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부처님께서 허락한 바며 스스로가 깨달음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논(論)의 게송에서 “스스로가 알면 남을 따르지 않고/고요히 사라지면 쓸모없는 이론 없다/다름이 없고 분별이 없는/이것을 바로 실상(實相)이라 한다”고 했다.
  [문] 이 유식은 크게 요약하면, 몇 가지가 있는가?
  [답]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갖춘 갈래[具分]요, 둘째는 갖추지 않은 갈래[不具分]이다.
  갖춘 갈래의 유식이라 함은, 성(性)이 없다는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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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을 따르는[眞如隨緣] 이치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생멸하지 않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화합하여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리니, 바로 이것이 갖춘 갈래이다.
  만약 전혀 참된 마음의 사(事)에 의하지 아니하고 이(理)에 의하지 않는다면, 생멸에서만 본 것이기 때문에 갖추지 않은 갈래가 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림자 밖에 바탕[質]이 있다면 반쪽 유식이다”라고 했다. 바탕의 그림자와 함께 하는 그림자라야 갖춘 갈래의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유식종(唯識宗) 중의 갖춘 갈래일 뿐이다.
  또 만약 결정신(決定信)으로 들면, 이것이 유식의 바른 도리여서 속히 보리(菩提)에 이르러서 마치 수레를 타고 서서 먼 데까지 이르는 것 같으며 배를 타고 앉아서 저 언덕에 오르는 것과 같다.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에서 말하기를 “대승(大乘)에 의하여 3계(界)가 성립되니, 이것은 식(識)일 뿐이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경에서 말씀한 대승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보리살타(菩提薩埵)가 행하는 길이요, 부처의 훌륭한 결과[果]이다. 이것을 얻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을 닦는 것이니, 이것은 과실이 없는 방편이요 바른 길이다. 이런 것들을 위하여 저 방편을 나타냈고 모든 경전 가운데서 갖가지로 널리 펴 말씀하셨으니, 마치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과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물건의 품류를 알기가 어렵고 방향과 처소가 그지없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의 형상이 나타난 것을 자세히 알고, 나아가 모든 처소에서 그 바깥 형상을 버리며 기쁨과 근심을 멀리 여의고서 다시 존재 바다[有海]의 시끄럽고 고요함이 차별 없다는 것을 관(觀)하여 저 작은 길을 버리고 대승(大乘)을 바라는 것도 희망도 끊으며, 모든 존재에서 탐착하는 무리들을 험한 낭떠러지 보듯 하여 깊이 두려움을 내면서 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간다.
  만약 이것이 자기 마음만으로 하는 일인 줄 알면 그지없는 양식이 쉽게 쌓여서 많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음이 마치 적은 공을 들여 큰 일을 능히 이룬 것과 같고 수행 처소에 잘 노니는 것은 마치 손바닥 안과 같으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모든 원하고 구하는 것이 원만하게 되고 뜻대로 작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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