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5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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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5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참 마음[眞心]은 바뀌지 아니하고 묘한 성[妙性]은 생(生)이 없어서 범부와 성인이 같은 무리이거늘 어떻게 망(妄)을 말하는가?
  [답] 본래 마음[本心]은 맑고 고요하여 모양이 끊어지고 말을 떠났다. 성품[性]이 비록 스스로 그렇다고는 하나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더러워지고 깨끗하여진다. 마치 하나의 물에 만약 구슬이 들어가면 맑아지고 티끌이 섞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또 하나의 허공에 구름이 가리면 어두워지고 달이 나타나면 맑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깨끗한 못 물에 미친 코끼리가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혼탁하게 했을 때 만약 물을 맑게 하는 구슬을 물에 넣으면 청정해지므로 물 밖에 코끼리가 없고 구슬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 또한 그러하여 번뇌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을 흐리게 하고 모든 자비(慈悲) 등의 착한 법이 마음에 들어가면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더러움과 깨끗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진실[眞]과 허망[妄]은 연[緣]을 따른다. 만약 그를 어둡게 하면 생각 생각마다 윤회(輪廻)하여 참된 성품을 잃어버리고, 만약 그를 비추면 마음과 마음 마음마다 고요히 사라져서 열반(涅槃)을 뚜렷이 증득한다. 그러므로 진실과 허망은 원인[因]이 없고 공연히 언설(言說)만이 있는 줄 알 것이다.
  진실에서 보면 언설이 없고, 언설에서 보면 진실이 없다. 이는 모두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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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고 미혹한 정상(情想)으로 세워진 것이다. 천 갈래 길이 다투어 일어나서 공연히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모르게 되었고, 한 법이 겨우 나자마자 달바(闥婆)의 그림자가 나타났을 뿐이다.
  함생(含生)들이 실제(實際)를 궁구하지 않고 다만 미친 정[狂情]을 쫓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이 몸을 굽혀 기의(機宜)를 따르면서 모두가 그와 사업을 같이 한다.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듯 허망을 말하여 허망으로부터 진실에 돌리며, 거친 것을 가지고 거친 것에 접붙이므로 모양[相]을 들어서 모양으로 인하여 성품[性]을 통한다. 만약 허망을 잡지 아니하면 오히려 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 허깨비인 그림자가 소멸되자마자 지혜의 광명도 불길을 쉰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진(精眞)이 미묘하고 밝으며 본각이 뚜렷하고 깨끗하여 생사(生死)와 모든 진구(塵垢)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내지 허공도 모두가 망상(妄想)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니라. 이것은 원래 본각의 미묘하고 밝은 정진(精眞)인데 허망하게 기세간(器世間)을 발생시키나니,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제 머리를 모르고 그림자를 오인한 것과 같으니라. 망(妄)은 원래 인(因)이 없거늘 망상 중에서 인연(因緣)의 성품을 세우는 것인데 인연을 미혹한 이는 자연(自然)이라 일컫는다. 저 허공의 성품도 실은 환(幻)으로 생긴 것이므로 인연인데, 자연이라 함은 다 중생의 망령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니라. 아난아, 망(妄)이 생긴 데를 알면 망의 인연을 말할 수 있겠거니와 만약 망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망의 인연을 말하더라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알지도 못하면서 자연이라 추측함이겠느냐.”
  조법사(肇法師)가 망이 일어나는 원유를 궁구하여 본제를 세운 품[窮起妄之由立本際品]에 이르기를 “본제(本際)란 곧 일체 중생의 걸림이 없는 열반의 성품이다. 어찌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망심(妄心)과 갖가지 뒤바뀜이 있게 되느냐 하면, 다만 한 생각[一念]으로 마음이 미혹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한 생각이란 하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또 이 하나란 부사의(不思議)로부터 일어나며, 부사의란 곧 일어나는 데가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도(道)가 처음에 하나를 낸다”고 하셨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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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란 무위(無爲)인데 하나는 둘을 내며, 둘은 망심(妄心)이며 이렇게 하여 셋은 만법(萬法)을 내기에 이른다. 이미 무위를 반연하여 마음이 있게 되었고, 다시 마음이 있음을 반연하여 물질[色]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갖가지의 마음과 물질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만 가지 생각을 내고 물질은 온갖 실마리를 일으키며, 화합한 업연(業緣)으로 마침내 3계(界)의 종자를 이룬다”고 하셨다.
  3계가 있게 되는 까닭은 근본에 잡착하여 참된 하나[眞一]을 미혹했기 때문에 이내 탁욕(濁辱)이 있어서 그 망령된 기(氣)를 낸 것이다. 깨끗하여 미묘함[淸微]을 맑게 하면 무색계(無色界)이니 이른바 마음이요, 흐리고 욕됨(濁辱)을 맑게 하면 색계(色界)이니 이른바 몸이요, 찌꺼기와 더러움[滓穢]을 흩뜨리면 욕계(欲界)이니 이른바 티끌의 대경[塵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3계는 허망하니 한 망심이 변화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안에서 하나가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무위(無爲)가 있게 되고, 안에서 둘이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유위(有爲)가 있게 되며, 안에서 셋이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3계가 있게 된다. 이미 안팎이 상응하면 마침내 갖가지 모든 법과 항하의 모래[恒沙]같은 번뇌가 생긴다.
  그러므로 알아라. 3계 안에는 하나의 법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함으로 인하여 조작하는 것은, 마치 요술의 힘으로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바깥에서 나타남이 없는 성품이 발현(發現)하는 것 같지마는 제 마음에서 생길 뿐이다. 뒤바뀐 사람은 집착하여 바깥 경계로 삼아 경계를 따르면서 곱고 추한 제 분수를 요별(了別)하다가 겨우 기쁘고 싫은 감정이 생기기만 하면, 문득 진로(塵勞)의 자취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원법사(遠法師)가 이르기를 “본래의 바른 끝[端境] 어디서 나왔는가/있고 없는 데서 일어나고 없어진다./한 작은 것이 움직이는 경계에 관계하면/이는 산을 무너뜨리는 세력을 이룬다”고 했다. 안에서 하나도 내지만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
  번뇌의 소굴을 막고 생사의 뿌리를 끊으려면, 다만 안으로 한 생각이 남이 없음을 관(觀)하라. 그러면 허공 꽃인 3계가 마치 바람에 연기 말리듯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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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각의 영상인 6진(塵)이 끓는 물에 눈 뿌리듯 하리니, 텅 비고 끝이 없어서 하나의 진심(眞心)일 뿐이리라.
  『진취대승방편경(進趣大乘方便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의 진실한 경계[一實境界]란 중생의 심체(心體)를 말한다.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내지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일체 이승(二乘)의 마음과 일체 보살의 마음과 일체 부처님들의 마음도 모두가 똑같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진여(眞如)의 모양이기 때문이니, 시방 허공의 온갖 세계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형상을 구한다 하여도 하나의 구분(區分)도 얻을 수 없다. 다만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어두워져 훈습(熏習)한 인연 때문에 망령된 경계를 나타내어 염착(念着)을 내게 될 뿐이니, 이른바 이 마음은 스스로 알 수가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가 깨닫고 아는 생각[覺知想]을 일으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헤아린다. 그러나 실로 지각하고 아는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 망심(妄心)은 마침내 자체(自體)가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각하고 알며 분별할 수 없다면, 온갖 법 모두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망심에 의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이른바 온갖 경계는 저마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존재하게 되지 않거늘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으로 알고 저것은 남을 위한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구별되거나 다를 것이 없나니, 망심에 의하여 안에 스스로 없는 줄을 지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과 밖에 아는 바 경계가 있다 하며 허망하게 갖가지 법이라는 생각[法相]을 내면서, 있다ㆍ없다ㆍ좋다ㆍ나쁘다ㆍ옳다ㆍ그르다ㆍ얻었다ㆍ잃었다고 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이라는 생각을 내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망상으로부터 생기고 망심에 의지하여 근본이 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망심은 스스로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역시 경계에 의지하여 존재하나니, 이른바 생각을 반연하여 앞의 경계를 지각하고 알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이 망심은 앞의 경계와 함께 하므로 비록 다 같이 서로가 의지하여 일어나고 앞뒤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 망심은 능히 온갖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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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근원이요 주인이 된다.
  왜냐 하면 망심에 의지하여 법계(法界)의 한 모양[一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다고 마음을 설하며 무명의 힘의 인(因)에 의지하기 때문에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었다가 역시 무명의 소멸에 의지하여 온갖 경계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온갖 경계에 의지하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명이 있다고 경계를 설하지 않으며, 또 경계를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을 낸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은 온갖 경계에서 무명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계의 소멸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이 소멸하나니, 온갖 경계는 본래부터 체성(體性)이 스스로 소멸되어서 일찍이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다만 온갖 모든 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근본이 된다고 할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느니라. 온갖 모든 법을 모두 마음이라고 함은 이치거나 자체(自體)가 마음에게 포섭당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온갖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어서 마음과 더불어 모양을 지어 화합하면서 존재하며, 함께 나고 함께 없어지면서 똑같이 머무름이 없다. 온갖 경계는 마음의 소연(所緣)을 따라 생각생각마다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머물러 지닐 수 있고 잠시 동안 존재하게 된다.”
  위에서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자세하고 간곡하게 널리 인용한 것은 다만 후학(後學)의 믿음을 이루고 우리의 자심(自心)을 밝히기 위해서일 뿐이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옛 거울에 아름다운 것을 비추면 그 아름다움이 저절로 나타나며, 옛 가르침에 마음을 비추면 그 마음이 저절로 밝아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한 마음이 온갖 마음에 두루 하여 티끌만큼도 다를 수가 없으며 온갖 성품[性]은 한 성품을 포함하여 법마다 모두가 똑같다.
  형상이 없으면서 텅 비어 사무친 허공을 그 누가 저것이니 이것이니 분별하겠는가? 자취를 찾으면서 법계(法界)를 궁구해도 가는 털만큼도 얻지 못하리라.
  무엇 때문에 중생 경계 안에서 바로 지금 나타나느냐 하면, 이것은 곧 모두가 망령된 생각으로 인하여 쌓고 훈습하여 이룩된 것이니, 마치 거울 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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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가 빛과 그림자를 막는 것 같고 공중의 안개가 맑은 하늘을 잠시 동안 흐리게 함과 같다.
  한 법이라도 앞에 나타남이 있으면 이것은 모두가 제 마음에서 분별한 것일 뿐이다. 설령 장차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난다 하여도 모두가 환영[幻]의 경계로 인하여 끌어낸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같은 때라 다시는 앞뒤가 없다. 만약 능소(能所)에 체(體)가 없는 줄 알면,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단박에 깨쳐서 문득 물아(物我)가 의지함이 없음을 환히 알고 비로소 경계도 고요하고 마음도 고요함을 믿으리라. 또 마음이 생겨도 이것은 그것으로 인한 것이 아니니, 경계가 일찍이 생긴 일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이 없어져도 역시 다른 것으로 인하지 않았으니 경계가 일찍이 없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경계는 마음으로 인하여 일어났다가 도로 마음을 따라 없어진다.
  마음이 생길 뿐 경계가 생긴 것이 아니며, 마음이 없어질 뿐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미 고기가 새끼 고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벌의 왕이 뭇 벌들을 거두어 줌과 같다. 만약 어미 고기가 생각하지 아니하면 새끼 고기는 죽을 것이요, 벌 왕이 거두어 주지 않으면 뭇 벌들은 흩어지게 되리라. 그러므로 마음에 반연한 생각이 있으면 온갖 경계가 무성하게 일고, 생각하고 지님이 없으면 가는 티끌만큼도 나타나지 아니한다. 끝내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과 함께 반연이 되나니, 다만 이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서 도리어 마음과 더불어 상대가 된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제 마음에서 나타나는 바 분제(分劑)를 깨닫지 못하고, 내식(內識)이 바꾸어져서 바깥으로 나타나 빛깔[色]이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제 마음에서 나타난 것일 뿐인데 이와 같은 분제를 통달하지 못하므로, 나쁜 소견의 이론[惡見論]이라고 한다. 마음에서 나타나 일어나는 차별된 소견을 모르기 때문에 분제(分劑)라 한다.
  만약 종경(宗鏡)의 바른 뜻 안에서가 아니면, 모든 지해(知解)는 다 삿된 도[邪道]요, 종당(宗黨)이어서 형상과 언설을 시설한다 하여도 모두가 나쁜 소견의 논의에 떨어진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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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종경(宗鏡)의 법의 뜻이야말로 기대어 준(準)할 만하며, 바른 도리이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어서 의지하고 행할 만하다. 바로 그 앞에서 힘을 얻게 되면, 만 가지 삿됨도 작용하지 못한다. 그것은 천(千) 성인이 위의(威儀)를 고치지 않고서도 능히 미혹의 티끌[惑塵]을 씻고 막힌 생각[滯慮]을 녹이며 그윽한 포부를 맑게 하고 신묘한 심금(心襟)을 환히 알 수 있나니, 홀로 미묘하고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기 때문에 아무 것에도 견줄 수 없다.
  [문] 만약 진(眞)도 있고 망(妄)도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법상종(法相宗)이요, 만약 진도 없고 망도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파상종(破相宗)이다. 지금은 법성종(法性宗)을 논하거늘, 어찌하여 진을 세우고 망을 세우며, 또 진이 아니고 망이 아니라고 설명하는가?
  [답] 지금 종경(宗鏡)에서 논한 바는 법상(法相)으로서 있다[有] 함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파상(破相)으로서 공(空)에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종(性宗)의 원교(圓敎)에 의거하여 바른 도리를 밝히는 것뿐이니, 곧 진여(眞如)로서 불변(不變)이 수연(隨緣)을 장애하지 아니하는 바로 그 원만한 이치이다.
  법상종은 한결같이 진(眞)이 있고 망(妄)이 있다고만 말하며, 파상종은 한결같이 진이 아니고 망이 아니라고만 말한다. 이 두 가지 문(門)은 저마다 한 편을 집착한 것이어서 다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가 있다. 지금의 이 원종(圓宗)은 앞의 공(空)과 유(有)의 두 문이 다 같이 존재하고 또 어기거나 장애하지도 아니하니 이것이야말로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조차 없는 것[不可思議]이다.
  만약 결정코 있다[有]ㆍ없다[無]는 두 문을 말한다면, 모두가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있다. 이제 물들지 않으면서 물든다[染] 하면 불변수연(不變隨緣)이요,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다 하면 수연불변(隨緣不變)이다. 있다ㆍ없다 함으로써 실로 생각할 수가 없고 또한 진(眞)과 망(妄) 때문에 미혹될 수도 없다. 이야말로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없는 종취(宗趣)로서 정식(情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가정으로 글과 뜻[文義]을 시설하여 다스리는 것은 그 삿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만약 정식(情識)이 비면 지혜가 끊어지고, 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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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으면 약이 없어진다. 처음과 끝의 유래를 잘 궁구하여야 비로소 뚜렷하고 항상하는[圓常] 뜻을 환히 안다.
  그 때문에 복례 법사(復禮法師)가 천하의 학사(學士)들에게 물은 진망게(眞妄偈)에 이르기를 “참된 법성(法性)은 본래 깨끗하거늘/망심은 어디서 일어나는가./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면/이 망이 어찌 그칠 수 있으랴./처음이 없으면 곧 끝이 없으며/마지막이 있다면 마땅히 시작도 있어야 한다./시작이 없으면서 마지막도 없거늘/길이 품어서 이 이치에 어둡구나./그대들을 위하여 현묘한 것[玄妙] 여나니/분석하여 생사에서 벗어나지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징관 화상(澄觀和尙)이 대답하기를 “진을 미혹하면 망념이 생기고/진을 깨치면 망이 곧 그친다./능미(能迷)는 소미(所迷)가 아니거늘/어찌 온전히 비슷할 수 있으랴./종래(從來)로 일찍이 깨치지 못했기에/망에 비롯함이 없다고 말한다./망을 알면 본래 스스로 진이거니/비로소 이것이 항상하는 도리이다./분별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했는데/어떻게 생사에서 벗어나겠는가”라고 했다.
  종밀 선사(宗密禪師)가 해석하였다.
  “대승경교(大乘經敎)에는 통틀어 세 가지 종(宗)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법상종(法相宗)이요, 둘째는 파상종(破相宗)이며, 셋째는 법성종(法性宗)이다. 이제 이 질문은 바로 법성종 중의 살촉[鏇]을 깨무는 관절(關節)로서 두 가지 종(宗)은 묻지 않았다. 만약 법상종으로 말한 것이라면 온갖 유루(有漏)의 망령된 법과 무루(無漏)의 깨끗한 법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저마다 종자가 있고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으면서 연(緣)을 만나 훈습(熏習)하며 이내 저마다 자성(自性)을 쫓아 일어나되 도무지 진여(眞如)와는 관계되지 않거늘 누가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그 진여는 한결같이 무위적멸(無爲寂滅)이요 일어남도 없고 그침이 없음을 말한 것이므로, 저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힐난할 수 없다. 파상종의 경우에는 한결같이 범부와 성인ㆍ더러움과 깨끗함 등 모든 것이 공(空)이어서 본래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 것이므로, 설령 하나의 법이 열반보다 더 뛰어나게 나타난다 하여도 역시 허깨비요 꿈과 같다. 그것은 또 본래가 진(眞)조차 세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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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거늘, 하물며 망(妄)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힐난하지 아니한다.
  다만 법성종이 의심될 뿐이다. 이 종(宗)의 경론(經論)대로 진에 의지하여 망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마치 법신(法身)이 다섯 갈래[五道]에 헤매고 여래장(如來藏)이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을 깨치면 그대로가 진이라고 말하면, 마치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이내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이루며 망을 알면 본래 스스로 진인지라 부처가 나타나고 이내 청정하여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범부와 성인은 한 덩어리요 차별이 없다고 말하면, 마치 온갖 중생들은 본래 정각(正覺)을 이루었고 반열반(槃涅槃)하며 비로자나(毘盧蔗那)의 몸 안에 여섯 갈래[六道]의 중생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진망(眞妄)은 서로가 즉리(卽離)하나니 번뇌와 보리(菩提)에 처음과 마지막이 없다고 말하며, 또 번뇌가 끝까지 없어져야 비로소 묘각(妙覺)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화엄경(華嚴經)』과 『기신론(起信論)』 등의 첫머리와 끝의 글과 뜻의 종취(宗趣)에는 걸림이 있고 스스로의 말이 서로 어긋난다. 헤아려서 그를 가리려고 하나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릴 수가 없다. 그를 합하려고 하여도 또 화합하기 어려우며, 다 함께 그를 쓰려 하여도 또 서로가 어긋난다. 시험 삼아 천하의 학사들에게 묻거니와 통달한 이는 곧바로 진(眞)을 알아 도(道)에 들리라. 만약 모든 스승들의 대답한 바가 모두 묻는 뜻에 미혹하였고, 모두가 모양이 소멸되고 진리에 귀착하는 것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이라면, 도무지 저 묻는 바는 진으로부터 망이 일어나는 원유와 망을 닦아 진을 증득하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진을 미혹하여 망을 일으키는 데는 대개 연유가 있다. 망을 쉬면 진으로 돌아감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하다. 복례 법사가 어찌 진망이 다 같이 고요하고 이사(理事)가 모두 여여(如如)함을 몰라서였겠으며, 여여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어찌 문답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두 가지 문이 있어서 뜻과 도리가 쉽게 분별되며, 곧 어기거나 방해됨이 없다. 첫째는 한결같이 망이 있으므로 끊어야 하고, 진이 있으므로 증득하여야 한다 함을 설명하는 것이요, 둘째는 한결같이 진도 아니고 망도 아니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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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은 모두가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승만경(勝鬘經)』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제 성품[自性]의 청정한 마음은 번뇌에 물드는 바가 없다. 물들지 않으면서 물이 들고 물들면서 물이 들지 아니하므로, 모두는 말하기를 환히 알기 어려워서이다’라고 한 것이다. 복례 법사는 바로 이런 뜻으로 물었거늘, 모든 스승들의 대답한 바는 다만 때와 더러움이 없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징관 화상이 대답한 것만이 진여의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에 장애하지 아니함에서 보아 비로소 타당하다.
  이제 종밀(宗密)이 시험 삼아 대답하겠다.
  ‘본래 깨끗함을 본래 깨닫지 못해서/이로 말미암아 망념이 일어났다./진과 망을 알면 이내 공이요/공인 줄 알면 망은 이내 그친다./그치는 그 곳에 마지막이 있다 하고/미혹하는 때에 비롯함이 없다 한다./인연(因緣)이란 허깨비요 꿈과 같거늘/무엇이 마지막이요 무엇이 시작인가./이것이 바로 중생의 근원이라/그를 궁구하면 생사에서 벗어나리.’
  또 사람들 대부분이 진은 능히 망을 낸다고 하며 그 때문에 망이 다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므로 이 이치를 결단하기 위하여 거듭 앞의 게송에 대답하리라.
  ‘이 진은 망을 내지 아니하며/망이 진을 미혹하여 일어난다./망을 알면 본래가 스스로 진이요/진을 알면 망은 이내 그친다./망이 그치면 종말(終末)인 듯하고/깨치고 나면 시작인 듯 하거니와/미오(迷悟)의 성품은 모두가 공이라/성품이 공이므로 종시(終始)가 없다/생사란 이 때문에 미혹한 것이므로/이를 통달하면 생사에서 벗어나리.’
  또 시종(始終)에서 보면 네 구절의 분별이 있다. 첫째는 시작은 있되 마지막이 없는 것이니, 바로 이것은 시각(始覺)이다. 둘째는 마지막은 있되 시작이 없는 것이니, 바로 이것은 무명(無明)이다. 셋째는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이니, 이른바 실제(實際)이다. 넷째는 시작도 있고 마지막도 있는 것이니, 바로 일기(一期) 동안의 생사이다.
  또 해석하겠다.
  ‘시작이 없으면서 마지막이 없거늘, 길이 품어서 이 이치에 어둡구나’라고 함은 곧 법상(法相)의 일이어서 예(例)를 들어 그것을 힐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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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말하기를 ‘망이 있되 그대로 진이라면, 똑같이 마지막과 시작이 없다’고 했다. 만약 분별하여 설명하자면, 네 구절이 있어야 한다. 진리에서라면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망념에서라면 시작은 없되 마지막은 있으며, 참된 지혜[眞智]에서라면 마지막은 없되 시작은 없으며, 문득 일어나는 망념에는 마지막도 있고 시작도 있다.
  만약 원융(圓融)에 의거하면, 똑같이 마지막과 시작이 없다. 이미 마지막과 시작이 없으므로 마지막이 없다, 시작이 없다는 것조차도 없어서,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서 이 현묘(玄妙)함을 회통(會通)할 수 있다.
  위에서 답한 뜻을 자세히 살피면, 깊이 원종(圓宗)에 계합하리라. 저 수연문(隨緣門)의 처음에서 이내 진을 미혹하여 망을 일으켰고 뒤에야 망이 곧 진임을 깨쳤으므로 미혹하고 깨친 가운데서는 마지막과 처음이 나누어진 것도 같거니와, 불변문(不變門)에서 보면 망 스스로가 본래 공(空)이거니 누가 앞과 뒤를 논하겠는가.”
  진리와 세속에 성품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란 이름뿐이니, 마치 새끼를 모르고서 뱀이라 하며 말뚝을 의심하여 귀신이라 함과 같다.
  진제(眞諦)도 있지 아니하고 세제(世諦)도 없지 아니하다. 두 진리가 서로 이루어져서 삿된 소견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속제도 하는 수 없이 있되 있음은 언제나 스스로 공하며, 진제도 하는 수 없이 공이로되 공은 항상 있음에 통한다.
  오늘날의 학자(學者)는 대부분이 공과 있음의 두 가지 문에 미혹하여 모두 편견(偏見)을 이루는데, 오직 온갖 것을 세우지 말고 자취를 털며 공으로 돌아가라. 서로가 어긋나고 차별된 이치 안에서는 전혀 지혜의 눈이 없으며, 이미 미혹을 가리지 못하거늘 무엇으로 의심을 풀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열반의 마음은 환히 알기 쉽되, 차별의 지혜는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만약 공과 있음의 [문]가운데서 쌍차(雙遮)하고 쌍조(雙照)하며 진제와 속제 안에서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면[不卽不離], 비로소 법을 넓히고 사람들을 위하여 깨달음의 지위[覺位]를 계승하여 흥하게 하리라.
  [문] 법상종(法相宗)과 법성종(法性宗)의 두 종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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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법상종은 대부분이 사(事)와 상(相)을 설명하고 법성종은 이(理)와 성(性)을 말할 뿐이다.
  법상종에서는 제팔식(第八識)을 여의는 것을 안(眼) 등의 모든 식(識)이 없는 것과 같다 하고, 법성종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을 여의는 것을 8식(識)이 없는 것과 같다 한다. 만약 진여(眞如)에서라면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식이 변화할 때에는 이 8식이 곧 바로 참된 성품[眞性] 위의 연을 따르는[隨緣] 뜻이로되, 혹 종(宗)을 나누어 상(相)과 사(事)를 분변(分辯)한다 하면 양쪽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만약 성상(性相)에서라면 서로가 이루어져서 도리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불변수연(不變隨緣)이요 수연불변(隨緣不變)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체가 물결이로되 물이요 전체가 물이로되 물결인 것과 같다.
  『청량기(淸凉記)』에도 『밀엄경(密嚴經)』에서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여래의 청정한 장(藏)이/세간의 아뢰야(阿賴耶)다./마치 금과 가락지가/변하며 바뀌되 차별 없음과 같다”라고 했다. 곧 아뢰야식의 체(體)가 바로 여래장이요, 망염(妄染)과 합하여서 아뢰야라 한 것이니, 다시 따로의 체가 없다. 또 금색(金色)은 가락지와 같으며, 금의 체는 곧 금이다.
  그러나 이 위에서 다른 것[異]에는 통틀어 네 글귀가 있다. 첫째는 근본[本]으로써 끝[末]을 이루면 근본은 숨고 끝은 존재한다. 이것은 곧 존재하고 숨은 것이 다른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허망은 체성이 없어서 진실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진실은 숨지 아니함이 없고 허망만이 나타난다”고 했다.
  둘째는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끝은 다하고 근본이 나타난다. 이것은 곧 드러남과 없어짐이 다르지 않은 까닭을 밝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진실한 체성은 진실하여 허망이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진실만이 나타난다”고 했다.
  셋째는 근본을 거두어 끝을 따르면 끝이 존재하고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근본이 나타난다. 이것은 곧 두 법이 다 같이 존재하며 진실과 허망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곧 진실이 있고 허망이 있어서 다르지 않은 까닭을 밝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체성이 없는 허망이 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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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진실한 진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이르기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이다.
  넷째는 근본을 거두어 끝을 따르면 근본이 숨는 것으로서 이것은 없지 않다[不無]는 뜻이며,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끝이 다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있지 않다[不有]는 뜻이다. 이것은 곧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서 다르지 아니함을 밝힌 것이니, 또한 이것은 마지막의 두 글귀이다.
  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자리[邊]가 아니며,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이 아니며, 중간이 아니므로 가장자리가 아니다. 이것은 의탁하지 않는 법계[無寄法界]여서 묘한 지혜로서 증득할 바요, 깊고 고요하여 항상 머무르며 의탁한 곳이 없다.
  또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항상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곧 중간과 같으며, 또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생사이고 다름이 아닌 것이 곧 열반이라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항상 생사에 머무르되 곧 열반에 처(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중생이어서 미혹했기 때문에 아뢰야(阿賴耶)를 이루고, 여래여서 깨쳤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을 이룬다. 마치 금이 공장(工匠)의 연(緣)을 따라 이루어질 적에 바뀌어 가락지가 된 것과 같고, 가락지가 용광로 불의 연을 따라 무너질 적에는 다시 금이 된 것과 같다.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서로 바뀌되, 이것은 하나의 금일뿐이요 다시는 차별이 없다. 여래장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더러운 연을 따를 적에는 미혹해서 아뢰야가 되고, 깨끗한 연을 따를 적에는 깨쳐서 여래장을 이룰 뿐이다. 근본과 끝이 서로 바뀌되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요, 마침내 구별이 없다.
  『무생의경』에서는 “중생의 몸 안에 열반이 있으니 바로 이것은 끝[末] 가운데에 근본[本]이 함유된 것이요, 중생이 곧 열반의 가용(家用)이니 바로 이것은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며, 탐욕이 곧 도(道)이니 바로 이것은 끝 가운데에 근본이 함유된 것이요, 탐욕이 곧 도의 가용이니 바로 이것은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범부는 언제나 정(定)에 있다”고 하였다. ‘언제나 무슨 정에 있느냐’고 묻자, ‘법성(法性)을 무너뜨리지 않는 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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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昧)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바로 끝 가운데에 근본이 함유된 것이요, 법성 가운데에 중생이 함유된 것이라 이것은 바로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 말씀하기를 “유위(有爲)를 여의지 않고 무위(無爲)를 설명하며, 무위를 여의지 않고 유위를 설명한다”고 하셨다. 또 끝이 곧 근본이요 근본이 곧 끝이라는 뜻이니, 마치 물결이 곧 물이요 물이 곧 물결이라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생사가 바로 열반’이니, 없어짐이 없고 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진식(眞識)과 현식(現識)은 마치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와 같으니라. 내지 대혜(大慧)야, 만약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가 다르다면 그것으로 이루어진 바가 아니건마는 실은 그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아서 전식(轉識)과 장식(藏識)과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因)이 아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소멸할 때 장식도 소멸되어야 하나, 실로 진상은 스스로 소멸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진상은 소멸한 것이 아니고 업상(業相)만이 소멸할 뿐이니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진상이 바로 여래장이요, 전식은 바로 칠전식(七轉識)이며, 장식은 바로 아뢰야이다.
  또 이르기를 “모든 식(識)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이다”라고 했다. 이 세 가지 상(相)은 8식(識)에 다 통한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전(轉)이라 하는데, 여덟 가지 것을 다 함께 일으키기 때문이요 모두가 생멸이 있기 때문에 전상(轉相)이라 한다. 움직이면 이것은 업(業)이라 마치 3세(細) 중의 처음 업상과 같기 때문이며, 8식은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에 모두를 업상이라 한다. 여덟 가지 참된 성품을 다 진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식(識)이 있고, 자세히 설명하면 여덟 가지 모양[相]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진식(眞識)과 현식(現識)과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라고 했다. 망과 합하지 않는 데서 보면 여래장의 마음이니 진식이요, 나타나는 것은 곧 제8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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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에서 말씀하기를 “마치 밝은 거울이 뭇 빛과 형상을 지니는 것과 같다. 현식이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며, 나머지 일곱 가지는 모두 분별사식이라고 한다”고 했다.
  경에서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因)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세 가지를 말한 것이다. 만약 장식과 다르다면 진상(眞相)과 전식(轉識)이 인(因)이 되지 않아야 하며, 이미 전식이 훈습했기 때문에 진식은 연(緣)을 따르면서 장식을 이루므로 다르지 않음을 알겠고, 장식이 두 가지 식[二識]의 인(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진상이 소멸한 것이 아니요, 업상만이 소멸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곧 세 가지 일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경의 비유 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티끌이요, 둘째는 물이요, 셋째는 진흙이다. 물로 티끌을 이기면 진흙 뭉치가 비로소 이루어지듯이, 업(業)을 진상에 훈습하면 업식(業識)이 문득 생긴다.
  경에서 “만약 스스로 진상이 소멸되면, 장식이 곧 소멸한다”고 한 것은, 도리어 장식이 진과 망이 화합하여 이루어졌으되 그 망만이 소멸할 뿐 진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스스로의 진상[自眞相]이라 함을 효(曉) 법사가 해석하기를 “본래 깨달음[本覺]의 마음은 망연(妄緣)을 빌리지 않고 성품 스스로가 신령하게 알므로 스스로의 진상이라 한다”고 했으니, 동일하지 않다[不一]는 뜻에 맞추어서 해설한 것이다. 또 “무명(無明)의 바람을 따라 생멸을 지을 때에는 신령하게 아는 성품과 근본은 다르지 않으므로 역시 스스로의 진상이라고 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다르지 않다[不異]는 뜻에 의지하여 해설한 것이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은 비롯함이 없는 나쁜 습기(習氣)에 훈습을 받으므로, 장식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대혜(大慧)야, 여래장은 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으로 온갖 갈래[趣]에 가 나는 것을 두루 일으킨다. 마치 재주꾼이 모든 갈래를 변화로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교(敎)에서는 모두가 여래장을 식(識)의 체(體)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심성(心性)이 곧 여래장이요, 이 밖에는 법이 없는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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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식론(唯識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또 모든 법의 훌륭한 이치[勝義]이며/또한 바로 이것이 진여(眞如)이니/언제나 그 성품 그대로이기 때문이며/곧 식(識)의 실성(實性)일 뿐이니라”고 했다.
  천친(天親) 역시 여래장으로써 식의 체를 이룬다 함을 분명히 알았으나, 다만 뒤에 논(論)을 해석하는 사람이 불변(不變)을 세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허물은 후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요약하여 말하면 통틀어 위의 모든 뜻에는 곧 모두가 진과 망이 화합한 것이되 동일함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면서 한 마음이 두 가지 진리의 문을 능히 이루고 단상(斷常)에 떨어지지 않는 처중(處中)의 미묘한 뜻이어서 사리(事理)가 서로 통하고 성상(性相)이 융통하여 법마다 거두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모두가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문] 진심과 망심의 두 마음은 행상(行相)이 저마다 다르거늘, 어떻게 자세하게 이해하여야 법성(法性)의 원종(圓宗)에 들어갈 수 있는가?
  [답] 망념(妄念)은 남이 없는 줄은 분명히 아는 것일 뿐이니, 바로 이것이 진심(眞心)으로서 움직이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것 외에 다시는 가는 털끝만큼의 법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경에서는 “예류(預流)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이와 같은 모든 성인이 모두 마음에 의지하여 허망하게 있다”고 하셨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선현아,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모든 법을 분석하여 극미(極微)의 양보다 더하여도 마침내 조금만큼의 진실한 것도 얻을 만한 것을 보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이름이 반야바라밀다이다”라고 하셨다.
  또 진실과 허망은 체성이 없지만 다 같이 이름과 글자가 있으며, 이름과 글자에 체성이 없으므로 모두가 언설(言說)에 의지하며, 언설의 성품은 공하므로 다함께 일어나는 처소가 없다. 그렇다면 일체의 언어는 모두 다 평등하며,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이다.
  그러므로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천이 문수(文殊)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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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진 이의 말씀한 바는 모두가 곧 진실이십니다.’
  문수가 말하였다.
  ‘선남자야,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진실이니라.’
  물었다.
  ‘허망한 언설도 역시 진실입니까?’
  답하였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선남자야, 이 모든 언설은 허망하여 처소도 없고 방향도 없기 때문이니, 만약 법이 허망하여 처소가 없고 방향이 없으면 바로 이것은 진실이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진실이니라. 선남자야, 제바달다(提婆達多)의 모든 언설도 여래의 것과 다르거나 구별이 없다. 왜냐 하면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여래의 언설이며, 여(如)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일은 모두가 말할 바가 없기 때문에 말할 바가 있게 되느니라.’”
  또 『보행기(輔行記)』에서 한 생각의 마음을 풀이하여 그로써 관(觀)하는 경계[境]를 삼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선(禪)으로써 경계를 삼으면 세간의 마음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요, 둘째는 곧 경계에 대한 마음의 집착을 여의고 선의 마음[禪心]을 향하여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한 생각을 말하면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즉하나니[一多相卽] 어떤 한 마음이 능히 갖추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간별하여 보이면서 이르기를 “망령된 헤아림의 한 생각에서와 같을 수 없고 망념에는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모양이 없음을 능히 깨달아 안다”고 했다. 이 모양이 없음을 통달하여 온갖 마음을 갖추고 삼천대천세계가 두루 갖추어져야 비로소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즉함을 능히 비춘다.
  이것은 처음 낸 마음에 의거하여 관(觀)을 익히는 사람이 함부로 망정(妄情)의 경계에서 관할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므로 간별하여 보여서 문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만약 이(理)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법계(法界)가 아님이 없거늘 또한 어찌하여 망정에 취착함을 막겠는가? 생각은 본래 공(空)이어서 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있음[有]에 집착하는 이를 위하여 공을 관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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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아직 생각하지 못했을 때의 생각은 아직 나지 않은 것이며, 아직 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있지 아니하며, 있지 않은 법은 역시 제 모양[自相]이 없다”고 했다.
  현재의 생각은 연(緣)을 따라서 생기며, 생각이 만약 스스로 있다면 연을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 연을 기다려서 생겼기 때문에 곧 자체(自體)가 없으며, 그러므로 마음은 자성(自性)이 없고 연기(緣起)가 곧 공인 줄 알 것이다. 마치 그 흐름을 끊고자 하면 그 근원을 막을 뿐이며 그의 생(生)을 면하고자 하면 그 뿌리를 끊을 뿐인 것과 같다.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 가장 힘을 덜고 요긴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통심론(通心論)』에서 이르기를 “속박은 마음으로부터 속박하고, 풀림도 마음으로부터 풀린다. 묶고 푸는 것이 마음을 쫓으며 다른 데는 관계하지 않으므로, 벗어나는 기술은 마음을 관함[觀心]에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마음을 관하여 깨치게 되면 온갖 것을 다 함께 깨닫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먼저 마음을 관하여야 한다. 마음을 관하여 깨끗함을 얻으면, 돌이켜 ‘제 마음은 속이고 진실하지 아니하여 마치 환영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조급하고 경망함은 또 원숭이와 같고, 날뛰며 달아남은 들에서 놓아먹인 말과 같다’고 관할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을 여러 겁(劫)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가를 모르고 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있으면, 마음의 허물과 환난을 살펴볼 것이다.
  또 모든 경계를 추구하건대 경계는 자성이 없으며 봄[見]으로 말미암아서 있고 보지 않으면 곧 없는 것이다. 또 보는 것[見處]을 추구하건대 봄은 자성이 없으며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움직임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곧 없는 것이다. 또 움직이는 마음을 추구하건대 움직임은 자성이 없으며 홀로 깨닫지 못하기[不覺]때문이요, 깨달으면 움직이지 아니한다. 또 깨닫지 못함을 추구하건대, 근본이 없으며 바로 이것은 끝없는 허망한 습기[虛習]라 생각 생각에 스스로 미혹되었으므로 생각이 벗는 진심에는 아무 것도 없다.
  논(論)에 이르기를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 하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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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향은 실로 바꾸어지지 않은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에 미혹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여기지마는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한다. 만약 잘 마음을 관(觀)하여 마음에 일어남이 없음을 알면, 이내 수순(隨順)함을 얻어 진여(眞如)의 문에 들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것 모두가 허망한 마음의 생각에서 생긴다. 마음에 있으면 곧 있고, 마음에 없으면 곧 없다. 있고 없음이 마음을 따르므로, 더더욱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 마음에 속임을 당하지 말라.
  이미 마음이 속인 줄 알면 다시는 마음에 머물러 두지 말고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일시에 온통 놓아버리면 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어질 것이며, 마음에 머무르는 곳이 없어지면 마음이 없어질 것이며, 이미 마음이 없어지면 역시 마음이 없다는 것조차 없어져서 있다ㆍ없다 하는 것이 온통 없게 되고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다할 것이며, 몸과 마음이 다하기 때문에 똑같이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경계에 모양이 없어지면 본래 하나인 그윽한 데에 계합되며, 깊고 고요히 비추면 비추는 데마다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고 고요함으로써 체(體)를 삼으면 체마다 텅 비지 아니함이 없으며, 비고 고요함이 그지없으면 똑같이 법계(法界)에 통하고 법계와 연기(緣起)가 자연스럽지 아니함이 없어서 와도 온 데가 없고 가도 이르는 데가 없다.
  또 법은 일정한 모양이 없고 진과 망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일어나고 다함은 근원이 같아서 달리 다른 뜻이 없다.
  그런 까닭에 옛 스승이 진실과 허망[眞妄]이 서로 통하는 뜻을 자세히 해석하여 말하기를 “진실과 허망이란, 만약 삼성(三性)에 맞추어서 보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곧 진이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허망이 되며,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진실에도 통하고 허망에도 통하며, 정분(淨分)은 진실과 같고 염분(染分)은 허망이다”라고 한 것이다.
  변계소집성을 허망의 입장에서 보면, 정(情)으로는 있지만 이것은 곧 이치[理]로는 없는 것이라 허망은 진실에 통하며, 이치로는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곧 정으로는 있는 것이라 진실은 허망에 통한다.
  만약 염분(染分)의 의타(依他)를 허망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으로 생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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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품이 없으므로 허망은 진실에 통하며 성품이 없되 인연으로 이루어지므로 진실은 허망에 통한다.
  만약 세속을 따라 진실과 허망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보면, 진실과 허망이 본래 비었으면 거연(居然)히 서로 통하며, 진실과 허망이 모두 참되면 본래 하나의 맛[一味]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실과 허망은 언제나 서로가 통하고 또한 진실과 허망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허망을 갖춘 진실이므로 진실은 진실이 아니면서 맑고 고요하며, 진실에 통한 허망이므로 허망은 허망이 아니면서 구름처럼 일어난다. 마치 물은 물결을 갖추면서 물의 습성(濕性)이 아니고, 엉키고 멈춘 물결은 물이면서도 큰 파도를 일으키는 물결이 아닌 것과 같다.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은 성상(性相)을 뚜렷하게 알 수 있으며, 하나하나가 융통하고 겹겹이 서로 통하여 막음이 없고 걸림이 없으며, 체성[體]과 작용[用]이 서로 거두어 종경(宗鏡) 안에 들어감이 스스로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그러나 그 진과 망이 서로 통하는 까닭은 한 마음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원집(禪源集)』에서 말하였다.
  “온갖 범부와 성인의 근본은 모두가 곧 한 법계(法界)의 마음이며, 성각(性覺)의 보배 광명이 저마다 원만하여 본래 모든 부처이므로 부처라고 이름하지 아니하고 또한 중생이라고 이름하지도 아니한다. 다만 이 마음은 영묘(靈妙)하고 자재하거늘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미혹함과 깨침의 반연[迷悟之緣]을 따라서 범부와 성인의 일을 이룰 뿐이다. 또 비록 반연을 따른다 하더라도 제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언제나 허망한 것이 아니며, 언제나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서 이것은 하나의 마음일 뿐인지라 마침내 진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은 언제나 두 가지 문(門)을 갖추어 있어서 일찍이 잠시라도 빠뜨리는[闕] 일이 없다. 다만 수연문(隨緣門) 안에서 범부와 성인이 일정함이 없어서 본래 전에 깨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번뇌는 비롯함이 없다고 설명하거니와, 만약 닦아 증득하면 이내 번뇌를 다 끊었기 때문에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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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이 있다고 설명할 뿐이다. 그러나 실은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이 따로 없고 깨닫지 아니함도 없으므로 마침내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에는 언제나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의 두 가지 문을 갖추고 있다.
  또 진망(眞妄)에는 저마다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진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이 있고, 둘째 망에는 체공(體空)과 성사(成事)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한 망의 체는 진여의 문이 되고, 진은 연을 따르기 때문에 망식(妄識)은 일을 이루어서[成事] 생멸의 문이 된다. 생멸이 곧 진여이기 때문에 모든 경에서는 ‘부처가 없고 중생이 없고 본래 열반이며 항상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양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진여가 곧 생멸이기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법신(法身)이 다섯 갈래[五道]에 헤매면 이름을 중생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미 미혹함ㆍ깨침과 범부ㆍ성인이 생멸의 문에 있음을 알았으므로 이제 이 문에서 범부와 성인이란 두 모양을 갖추어 나타낸다. 곧 진과 망이 화합하였으되 동일함이 아니고 다름이 아니므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은 범부에 있되 본래 깨달음[覺]과 깨닫지 않음[不覺]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깨달음은 바로 3승(乘)의 현성(賢聖)의 근본이요 깨닫지 않음은 바로 6도(道) 범부의 근본이다.
  지금 이 불각의 마음을 추구하건대 체(體)가 없으면 참된 깨달음[眞覺]의 성품이 앞에 나타난다.
  『보적경(寶積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구한다. 어느 것이 곧 마음인가? 탐욕하는 것이냐, 성을 내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이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것이냐? 만약 마음이 과거라면 이것은 다 없어졌을 것이요, 만약 마음이 미래라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만약 마음이 현재라면 머무른 것이 없다. 이 마음은 안이 아니고 바깥이 아니며, 또한 중간도 아니다. 이 마음은 빛이 없고 모양도 없고 상대도 없고 인식[識]도 없고 아는 것[知]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다.
  이러한 마음은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보지 못하셨고 지금도 보지 못하시며 장차도 보지 못하실 것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들이 과거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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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ㆍ현재에 보지 못한 바라면 어떻게 있는 것이 되는가? 다만 뒤바뀐 생각 때문에 마음은 모든 법의 갖가지 차별된 것을 내었으니 이 마음은 마치 허깨비와 같으며, 기억하고 생각하는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業)을 일으키고 갖가지 몸을 받을 뿐이다.
  이러하니라. 가섭(迦葉)아, 이 마음의 모양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만약 얻을 수 없다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며, 만약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라면 3세를 벗어났으며, 만약 세상을 벗어났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만약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곧 이것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만약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곧 이것은 성품이 없으며, 만약 성품이 없다면 곧 이것은 남이 없으며, 만약 남이 없다면 곧 이것은 없어짐이 없으며, 만약 없어짐이 없다면 여의는 바가 없으며, 만약 여의는 바가 없다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으며, 만약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으면 행업(行業)도 없으며, 만약 행업도 없으면 이것은 무위(無爲)이며, 만약 무위라면 이것은 온갖 성인들의 근본이니라’라고 하셨다.”
  『지세경(持世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그때 생각하였다.
  ‘세간은 아주 미치고 어리석구나. 이른바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식(識)으로부터 세간을 일으키는구나.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이 합하거니와 3계(界)는 모두가 곧 식일 뿐이다. 이 마음과 뜻과 의식 또한 형상이 없고 장소도 없으며 법의 안에 있지도 아니하고 법의 바깥에 있지도 않거늘 범부가 허망과 상응한 것에 속박을 당한 까닭에 식음(識陰) 가운데에서 나와 내 것[我所]에 탐착한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명색(名色)은 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어리석은 마음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는지라 다시는 다른 일이 없나니, 명색에서 벗어나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글과 말을 따르지 않고 마음과 마음이 의(義)에서 나[我]를 분별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논석(論釋)에 이르기를 “이것은 방편관(方便觀) 중에 두 가지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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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힌 것이다. 첫째는 유식심사(唯識尋思)를 밝혔다. ‘다시는 명색에서 벗어날 다른 일이 없다’고 한 것 중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바로 색온(色蘊)이다. 모든 불상응(不相應)은 모두가 가정으로 세우는 것이므로 이 명색을 여의고서 달리 다른 체(體)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有爲)의 일은 모두가 명색에 소속된 것이니, 이러한 모든 법은 마음만으로 짓는 것이므로 마음을 여의면 경계가 없으며 경계를 여의면 경계가 없으므로, 이와 같은 것을 유식심사라고 한다. 둘째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글과 말에 따르지 아니한다’라고 한 이것은 심사(尋思)로 이끄는 바 여실지라 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의(義)에서 나를 분별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이 의(義)가 심사로 이끄는 여실지이기 때문이다.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두 가지 아(我)는 모두가 의(義)가 없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서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진망(眞妄)의 두 가지 마음과 정분(情分)의 두 가지는 지혜로 알면 하나일 뿐이니, 하나거나 둘이라 함이 함께 없어져야 비로소 종경(宗鏡)에 든다.
  그 까닭에 『���유마경(維摩經)』에서 묘비보살(妙臂菩薩)이 말하기를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은 두 가지이나, 마음의 모양은 공하여 마치 허깨비와 같은 줄 관(觀)하면 보살의 마음도 없고 성문의 마음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마음에 나타나는 마음이 없으면 법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 줄 알 것이다. 왜냐 하면 온갖 경계는 생각에 따라서 생기기 때문이니, 생각이 이미 본래가 공이거늘 법이 또 어찌 있겠는가?
  『대법거다라니경(大法矩陀羅尼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금이 대중들이 먹을 음식 거리를 만들려면 공이 얼마나 드느냐?>고 하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하늘 제석(帝釋)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지금 저의 이곳 삼십삼천(三十三天)에서는 필요한 옷과 음식 거리들은 생각하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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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면 앞에 나타나는데 조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온갖 법 모두가 그러하여 모두가 마음속에 머무르므로 생각한 바의 때를 따라서 이내 성취하게 되느니라. 교시가야, 마치 난생(卵生)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생각만으로 이내 받아 나는 것처럼 온갖 모든 법도 그러하여 모든 마음에서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법이 이내 앞에 나타나느니라. 교시가야, 온갖 습생(濕生)의 무리인 물고기ㆍ자라ㆍ규룡(虯龍)과 지미의라(坁彌宜羅)들의 모두는 난생(卵生)에 속해 있으므로 이들이 혹은 1유순(由旬)을 가기도 하고, 혹은 2유순, 혹은 3, 4유순, 혹은 7유순을 넘어 가기도 하는데 그 땅에 도달한 뒤에는 편안히 있으면서 알을 까되 고달프지 않게 하기 때문에 잘 성숙시키는 것처럼, 교시가야, 이 삼장(三藏)의 교(敎)도 그러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는 때를 따라 그 업이 앞에 나타나며, 차례로 어지럽지 아니하고 계속 끊이지 않으면서 그 글귀의 뜻과 함께 화합하고 상응하느니라.’”
  또 『불지론(佛地論)』에서 이르기를 “삼십삼천에는 하나의 잡림(雜林)이 있다. 모든 하늘들의 화합된 복(福)의 힘으로 감통하므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이 숲에 있지 않게 하며 궁전 등의 일과 함께 즐거움 따위를 받는 데에는 훌륭함과 열등함에 다름이 있고 나와 내 것이 있어서 차별되게 수용하거니와, 만약 이 숲에 있게 되면 일이거나 받는 것이나 간에 도무지 훌륭함과 열등함이 없고 모두가 똑같이 훌륭하며 나와 내 것이 없이 화합하여 수용한다. 평등하고 화합하여 수용하게 하므로, 이름이 잡림이다”라고 했다.
  이 여러 하늘들은 저마다 평등하고 화합된 복업(福業)의 뛰어난 힘 때문에 그 여러 하늘들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하여금 이 숲의 똑같은 곳, 똑같은 시기,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나타나게 할 것이며, 이 잡림의 뛰어난 힘 때문에 그 전식(轉識)으로 하여금 역시 똑같이 변화하여 나타나게 한 것이니, 비록 저마다 수용한다 하더라도 구별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법이 모두가 마음으로 생각함에서 생기는 줄 통달하면, 곧 세속의 문을 쫓되 이것은 성행(聖行)의 것이다.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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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사리불(舍利佛)이 무진의(無盡意)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어디서 오십니까? 부처님 명호는 무엇이며 세계의 이름은 무엇이며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
  무진의가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온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저는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무진의가 말하였다.
  ‘만약 생각을 안다면 두 가지 모양이 없어야 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묻기를 디서 오느냐>고 합니까? 사리불이여, 오고 감이 있으면 화합한다는 뜻이 되며, 화합하는 모양 같은 것은 바로 합하고 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합하고 합하지 않음이 없으면 곧 가거나 오거나 하지 아니하며, 가거나 오지 아니하면 이것이 성행의 것입니다.’”
  『불장경(佛藏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일으키는 온갖 생각들도 모두가 곧 삿된 소견이니라. 사리불아, 따라서 아무 것도 없으면 거친 생각[覺]도 없고 세밀한 생각[觀]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나니, 이를 통달하면 염불(念佛)이라 이름하느니라”고 하셨다.
  『해룡왕경(海龍王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왕이여,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생각함으로부터 일어나며 그 짓는 바에 따라 각각 모두가 이루어지거니와 모든 법은 머무름도 없고 있는 곳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하느냐 하면, 보살의 안팎의 마음을 자세히 살핀다. 이 안[內]의 마음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나고[生]ㆍ머무르고[住]ㆍ없어지는[滅]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고 사라져도 간 데가 없으며 안팎의 인연을 따라 화합하여 났을 뿐이다. 이 마음은 정해진 진실한 모양이 없고 실로 나고 머무르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상 안에도 있지 않다. 이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바깥에도 있지 아니하며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다. 이 마음은 또한 성품[性]이 없고 모양[相]이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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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것도 없고 나게 하는 것도 없다. 바깥에는 갖가지로 여럿이 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에는 뒤바뀐 마음의 생각으로 나고 없어지는 것이 계속되므로, 억지로 이름 붙여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속은 실로 마음의 모양을 얻을 수 없고, 이 마음 성품으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이것은 깨끗한 모양인데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서로 달라붙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 모양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끝에 진실한 법이 없고, 이 마음은 모든 법과 더불어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전제(前際)ㆍ후제(後際)ㆍ중제(中際)도 없고 빛깔도 없고 형용도 없고 상대도 없으며, 뒤바뀌고 거짓으로 생길 뿐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항상함이 없고 진실도 없나니, 이것을 수순하는 마음[隨順心]이라고 한다. 마음의 모양이 남이 없음을 관하여 알면 남이 없는 법[無生法] 가운데에 든다. 왜냐 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양이 없음을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알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가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모양을 관한다 하더라도 또 진실로 생멸하는 법을 얻지 못하며,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청정함을 얻는다. 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이렇게 안의 마음을 관하고 바깥 마음을 관하며 안팎의 마음을 관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법은 본래 잇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인하여 본래 나며 생각을 여의면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 있고 분별을 제거하면 티끌만큼도 나타날 만한 것이 없는 줄 알 것이다.
  또 돌이켜 생각과 분별이 마침내 남이 없는 줄 관하면 3제(際)를 따라 구하고 구하여도 보이지 아니하고 시방을 향하여 찾고 찾아도 자취가 없다. 이미 능히 일으키는[能起] 마음이 없다면, 또한 사라질 바[所滅] 자취도 없다. 일으킴과 사라짐이 함께 떠나면 떠날 바도 공(空)하여 마음과 경계가 환히 트이는 것을 견도(見道)라고 한다.
  견도 안에서 그를 상대(相對)하면 참됨과 허망함[眞妄]이 저절로 녹고, 그를 대치(對治)하면 능(能)과 소(所)가 모두 끊어진다. 능과 소가 다하는 곳에서는 저절로 성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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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론(華嚴論)』에서는 “이 경에서 ‘조그마한 방편을 가지고서도 빨리 보리(菩提)를 얻음은, 권교(權敎)의 보살이 같이 하는 일이어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능증(能證)과 소증(所證)을 세웠다. 한 생각 동안에도 능소가 없고 능소가 다한 곳을 정각(正覺)이라 한다. 또한 소승(小乘)에 능소가 소멸한 것과는 같지 않나니, 능소가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법성(法性)에 맡겼기 때문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가 평등하여 본래 지혜[本智]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기 때문이다. 망령되이 움직인 것이라 하여 어리석은 범부가 깨닫지 못하고서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며 큰 고생을 한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5수음(受陰)을 통달하면 이 괴로움[苦]의 의미이다”고 했다. 소승에게 기뻐함과 싫어함이 있기 때문에 곧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문] 여기서 설명하는 진심과 망심의 두 가지 마음은 곧 법상종의 것인가, 법성종의 것인가?
  [답]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말한 것을 준하건대, 논(論)에 말한 “3계(界)는 허망하며,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다”라고 한 것에서 만약 3계의 허망함을 취하면 곧 이것은 소작(所作)이라 세제(世諦)에 속하지만, 지금은 능작(能作)을 취하여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논(論)의 해석은 바로 능작일 뿐이다.
  이제 경에서 “3계(界)는 오직 마음이 전(轉)한 것이다”고 한 것은 능ㆍ소에 다 통한다. 그러나 능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약 법성종 안에서 제일의로써 연(緣)을 따라 있음[有]을 이룬다면 곧 능작이 되고 온갖 마음과 경계는 모두 소작에 통하는 것이니, 부사의훈(不思議熏)과 부사의변(不思議變)은 바로 현식(現識)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만약 법상종의 제일의의 마음이라면, 이것은 “소미(所迷)일 뿐이요 능작이 아니다. 삼능변(三能變)이 있는데 제8식(識) 등을 말한다”고 했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또 다시 뜻이 있나니, 대승경(大乘經) 중에서는 ‘3계는 오직 마음일 뿐[唯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일 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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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은, 안의 마음이 있을 뿐이요 빛깔[色]ㆍ냄새[香] 등의 바깥 모든 경계는 없다는 것이다”고 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십지경(十地經)』에서는 “3계는 허망하며, 이것은 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 및 요별(了別) 등의 이러한 네 가지 법은, 뜻은 하나로되 이름이 다른 것이니, 이것은 상응심(相應心)에 의한 설명이요, 불상응심(不相應心)에 의한 설명이 아니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응심이다. 이른바 온갖 번뇌ㆍ결사(結使)ㆍ수(受)ㆍ상(想)ㆍ행(行) 등은 모두가 마음과 상응한 것이니, 그 때문에 마음ㆍ뜻ㆍ의식ㆍ요별의 뜻은 하나로되 이름이 다르다고 말한다. 둘째는 불상응심이다. 이른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니, 언제나 머물러서 변하지 아니하고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3계가 허망하며, 한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상응심이다.
  지금 법성(法性)에 의하기 때문에 “제일 의의 마음으로 능작을 삼는다”고 하였다. 전(轉)이라 함은 일으키고 짓는다[起作]는 뜻이기도 하고 바뀌고 변한다[轉變]는 뜻도 된다.
  [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진심과 망심의 두 가지 마음은 문리(文理)로서 알게 했을 뿐인데 어떤 방편의 문으로 성품을 친히 볼 수 있겠는가?
  [답] 망(妄)이 쉬면 마음이 공(空)하여져서 참된 앎[眞知]이 저절로 나타나겠지만 만약 헤아리고 견주게 되면, 더욱 망심만이 더할 뿐이다. 미묘히 깨치는 때에 모든 연(緣)이 저절로 끊어지리라.
  옛날의 부처님 오도송(悟道頌)에서 “별을 봄으로 인하여 깨쳤거니와/깨치고 나니 별이 아니로다./물(物)을 뒤쫓지 아니하니/이는 무정(無情)한 것 아니로다”고 했다.
  또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있음[有]이 아니고 공이 아닌 것이 만물의 근원[宗]이요, 공이 아니고 있음이 아닌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나서도 방향이 없고 들어도 처소가 없다. 온갖 존재[萬有]를 포함하되 선비[士]가 되지 않고, 만 가지[萬端]를 따라 교화하되 주인 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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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道)의 성품이 이러하거늘,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견성(見性)하는 때에 저절로 드러나게 되리라.
  그런 까닭에 옛 게송에 이르기를 “망(妄)이 쉬면 고요함이 생기고/고요함이 생기면 앎이 나타나며/앎이 나타나면 고요함도 버려지고/분명하게 진(眞)을 볼 뿐이다”고 했다.
  또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전제(前際)가 공임을 알면/아는 곳이 모두 종(宗)이며/분명하게 경계를 비추면/비춤에 따라 어두워진다./한 마음이라도 걸림 있으면/만 가지 법이 통하지 않으리./과거와 미래가 저절로 그렇거니/끝까지 따지어 밝힐 필요 없네”라고 했다.
  또 다음의 경우와 같다.
  “학인(學人)이 황벽 화상(黃蘗和尙)에게 물었다.
  ‘눈앞의 허공 같은 것은 경계라 하지 못하겠지만 어찌 경계를 지시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어떤 마음으로 경계 위를 향하여 볼 것인가? 설령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여도 원래 이것은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다. 마치 사람이 거울로 얼굴을 비추면 비록 눈썹과 눈이 분명하게 된다손 쳐도 원래 이것은 영상(影像)에 불과할 뿐인 것과 같으니, 그대의 일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었다.
  ‘만약 비춤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관계하고 의지한다 하면, 언제나 사물을 빌어야 하리니, 어찌 마칠 때가 있겠는가? 그대는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손을 놓고 그대에게 보여도 한 물건도 없으니 애만 썼을 뿐 거짓말한 것은 수천 번이나 될 것이다.’
  물었다.
  ‘다른 이가 만약 비추는 것을 아는 때에도 물건이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만약 이 물건이 없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비출 수 있겠는가? 그대는 눈 뜨고 잠꼬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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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스님은 말했다.
  ‘백 가지를 많이 아는 것은, 구하는 것 없는 맨 첫째의 도인(道人)보다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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