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9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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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9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수행하여 깨침[悟]에 계합하는 법은 티끌과 모래만큼 많거늘, 어떻게 홀로 한 마음을 세워 종(宗)을 삼아서 절묘(絶妙)하다 일컫는가?
  [답] 만약 마음의 종[心宗]을 깨닫지 아니하면 모두가 미혹하고 뒤바뀌어 가는 길마다 막혀서 증득하여 들어갈 문이 없다. 마치 속제(俗諦) 중에서도 비밀한 법이 있으나 만약 요결(要訣)을 얻지 못하면 배워도 이룩됨이 없고 그 문을 얻어야만 할 일을 다 이룩하는 것과 같다.
  이제 교승(敎乘)은 비밀의 법을 일컬었고 선종(禪宗)은 전하지 않는 글[不傳之文]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어느 길을 향하여 닦아 나아가고 어느 문으로부터 나아가 들겠는가? 만약 유심(唯心)의 비결을 얻지 아니하면, 바른 믿음이 이룩될 수 없다.
  이 종(宗)을 얻기만 하면 천 가지 문이 저절로 열리어서 도(道)는 구함을 기다리지 않고 단박에 나타나고 행(行)은 수행을 빌지 않고 스스로 원만해지리니, 마치 땅이 양춘(陽春)을 만나면 싹이 돋아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만약 관해(觀慧)가 없으면, 일 또한 이룩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또 이 마음은 온갖 것을 능히 이루고 온갖 것을 능히 파괴하기도 하나니, 이루면 천진(天眞)의 부처를 단박에 이룰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진각 대사(瞋覺大師)가 노래하기를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 마음을 깨달으면/단박에 남이 없는[無生] 자인력(慈忍力)에 들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남이 없는 하나의 문으로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지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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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身)ㆍ4지(智)ㆍ8해(解)ㆍ6통(通)ㆍ무루(無漏)ㆍ무위(無爲)와 보현의 만행[普賢萬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이 없음에서 일시에 원만해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처음 아자문(阿字門)을 들으면 이내 온갖 뜻을 이해하나니, 이른바 온갖 법의 나지 않음[不生]이다”라고 했다.
  무너지면 점차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공덕문을 파괴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노래하기를 “법과 재산[法財]을 손해나게 하고 공덕을 없앰은/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마음은 깊숙한 데까지 비치지 아니함이 없어서 어떠한 법이든 모두 알며, 비밀을 살피어 은미함[微]에서 지금을 궁구하여 옛날을 환히 안다. 때문에 그것을 영대(靈臺)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마 표(司馬彪)가 말하기를 “마음은 신령한 돈대이다”라고 했고, 장자(壯子)가 말하기를 “만 가지 악은 영대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정명소(淨名疏)』에서 말했다.
  “물었다.
  ‘오묘한 이치[玄義]를 처처에서 관심(觀心)이라고 대부분 밝혔으나 옳지 못한 듯 하니 문장에 들어가서도 역시 그러하다. 장차 경교(經敎)를 파괴하고 어지럽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대답하였다.
  ‘경을 해설하는 근본은 도에 들게 하기 위함이니 만약 도의 어짊을 품는다면 접촉하는 데마다 관행(觀行)이거늘, 어찌 열반의 성전(聖典)을 찾고 구하면서 관행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다만 교묘한 설명에서 마땅함을 얻으면 글의 뜻을 손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관혜(觀慧)가 분명하게 되며, 법문(法門)을 분별하되 관(觀)이 아니면 어떻게 미칠 수 있겠으며, 어찌 파괴하고 어지럽히는 허물이 있겠는가?’”
  말한 바는 뜻이 그 말의 이전에 있다. 조사와 부처의 본뜻은 모두가 마음을 밝히고 도를 통달하게 하기 위하여 임시로 글의 뜻으로써 곧장 마음의 근원을 지시한 것이거늘, 어찌 언전(言詮)에 집착하여 뜻[旨]을 미혹하여 마음을 저버리고 도를 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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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까닭에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하늘ㆍ용ㆍ아수라와/지옥ㆍ아귀ㆍ나찰은/마음이 언제나 인도하는 주인 되어/마치 왕(王)이 3계(界)를 다님과 같이 한다.
  마음은 장차 천상으로 나갔다가/다시금 인간의 안을 다니며/마음은 장차 나쁜 길[惡道]에 이르나니/마음이 세간을 바퀴 돌 듯한다.”
  『보우경(寶雨經)』에서 말하였다.
  “어떻게 보살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의 교묘함[善巧]을 얻는가? 이 보살의 마음의 선교방편일 뿐이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은 줄 자세히 살핀다. 모든 법은 이것이 바로 착한 법이요, 이것은 착한 법이 아니며 이것은 벗어나는[出離] 법이요, 이것은 벗어나지 않는 법이라 생각하나니, 모든 보살이 온갖 법은 모두가 마음에 의하고 마음이 제 성품이 되며 마음이 우두머리가 된다 함을 자세히 살피어, 마음을 능히 섭수(攝受)하고 마음을 잘 조복하며 마음을 잘 깨달아 안다. 때문에 이 온갖 모든 법을 능히 거두어 이미 잘 조복하며 또 잘 깨달아 안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사마타법을 닦아 익힐 수 있나니, 이와 같이 마음을 집중시키고 이와 같이 마음을 멈추며 그리고 마음에 편안히 머무른다. 이렇게 사마타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심일경성(心一境性)에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느니라.”
  『홍도광현정의경(弘道廣顯定意經)』에서 말하였다.
  “저 덕의 근본[德本]이란 마음의 근본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써 자비를 행하여 중생에게 미치며, 공하여 아(我)ㆍ인(人)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안다. 그 마음은 덕의 근본이라 도를 돕고 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덕의 근본이 되는 줄 알 것이니, 바로 이것이 총상(總相)이요, 마음[心]ㆍ부처[佛]ㆍ중생(衆生)의 세 가지가 별상(別相)이다.”
  마음 이것이 총상이라 함은, 법계의 염정(染淨)과 온갖 종류의 만 가지 법은 하나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이 마음이 곧 온갖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하기 때문에 총상이라고 한다.
  그 밖의 염정의 두 가지 인연은 저마다 두 가지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총상으로 10법계(法界)를 해설하는 가운데서는 6도(道)가 염(染)이 되고 4성(聖)이 정(淨)이 된다. 그렇다면 10법계 중의 염과 정 두 가지 인연은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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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와 성인의 두 가지 길이요, 다 같이 한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능히 세간을 인도하나니 곧 자재(自在)하다는 이치요, 마음은 능히 두루 거두어 주나니 바로 행을 따른다[隨行]는 이치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한 마음의 법은 모두가 자재하며 행을 따른다.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에서 이르기를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은 실상(實相)에 드는 관(觀)이요, 세간을 벗어나는 결과는 한 맛의 해탈(解脫)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신심(信心)으로 도(道)에 들고 뒤에는 마음을 증득하여 과위를 얻는 것이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종경(宗鏡)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오직 마음일 뿐이어서/모든 행(行)과 부처의 지위[佛地]도 있는 바 없나니/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께서/3세(世) 동안 이러함을 말씀하셨네.”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에서 말하였다.
  “온갖 모든 법은 근원이 모두 그러한 것으로 평등하게 볼 것이니, 실로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이것을 한 마음이라 한다.”
  『화엄경』의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화가[工畵師]가/여러 가지 채색(彩色)을 흩어 펴놓고/이것저것 다른 색깔 허망하게 취한다 해도/원소[大種]에는 차별이 없는 것 같다.
  원소 속에는 색깔이 없고/색깔 속에도 원소가 없되/또한 원소를 여읜 것이 아니어서/어떠한 색깔이든 얻을 수 있다.
  마음속에는 채화(彩畵)가 없고/채화 속에도 마음은 없되/그러나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니어서/어떠한 채화든 얻을 수 있다.
  저 마음은 언제나 머무르지 않아/한량없고 생각하거나 의논하기 어려우며/온갖 색깔을 나투어 보이되/저마다 서로가 모르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화가가/제 마음을 잘 아지 못하나/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는 것처럼/모든 법의 성품[法性]도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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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마치 화가가/모든 세간을 그릴 수 있듯/5온(蘊)의 모두는 그로부터 나며/법마다 만들지 못함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 역시 그러하고/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부처와 마음의 체성(體性)의 모두가/그지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만약 사람이 마음의 행(行)으로/널리 모든 세간을 짓는 줄 알면/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를 보았고/부처의 진실한 성품을 깨달은 것이다.
  마음은 몸에 머무르지 아니하고/몸 또한 마음에 머무르지 아니하되/그러나 부처 일[佛事]을 능히 지으며/자재하기 일찍이 없던 일일세.
  만약 사람이 3세(世) 동안의/온갖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법계 성품[法界性]의 온갖 것이/유심(唯心)으로 짓는 줄 관(觀)하여야 한다.”
  그러자 「소석(疏釋)」에서 말하였다.
  “이 게송은 전부분[具分]의 유식(唯識)을 나타냈고 이것은 서로가 모른다는 이치이다. 그려지는 대상[所畵]의 법이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변할 바[所變]의 경계는 체성(體性)이 없고 그리는 주체[能畵]인 마음도 생각생각에 나고 없어지면서 서로가 모른다는 것을 비유하였다. 때문에 역시 그려지는 대상도 알지 못하므로 마음과 경계 모두가 제 성품이 없어서 저마다 서로가 모른다는 것을 쌍으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또 ‘비록 그리는 마음은 모른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릴 수 있다’ 함은, 중생이 비록 마음의 현량[理量]에 미혹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경계를 변화시킨다는 데에 비유했다. 또 ‘그려지는 대상을 알지는 못하지만 제 마음에서 그리기 때문에 그리는 대상을 이룩한다’ 함은, 중생이 미혹한 경계를 말미암는데 마음만으로 허망한 경계를 나타낸다는 데에 비유했다. 또 성품이 없는 탓으로 비로소 만 가지 경계를 이룬다는 데에 비유했다. 때문에 이르기를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니라’고 했다.
  ‘법계 성품을 관해야 한다[應性觀法界性]’고 함은 곧 진여의 이치로 관하는 것[眞如理觀]이요, ‘온갖 것이 마음만으로 지어진다[一切唯心造]’고 함은 곧 유식의 사로 관하는 것[唯識事觀]이다. 이(理)로써 유식의 성품[性]을 관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증득하여 부처가 되는 체(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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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으며, 사(事)로써 유식의 모양[相]을 관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이것을 통달하여 벗어나는 문으로 삼는다.”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말하였다.
  “진실로 한 줄 글[一文]의 미묘함으로써 거두는 이치는 빠진 것이 없고, 한 게송[一偈]의 공덕은 지옥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보현(普賢) 보살이 선재(善財)에게 “우리 이 법의 바다[法海] 안에는 한 줄의 글도 한 마디 글귀도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서 구해 얻지 않은 것이 없고 온갖 소유물(所有物)을 버리고서 구해 얻지 않은 것도 없다”라고 했다.
  해석하면 하나[一] 이것은 온갖 것의 하나[一切之一]이기 때문이요, 성품에 부합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찬령기(纂靈記)』에서 말하였다.
  “경조(京兆)에 성(姓)은 왕씨(王氏)이고 이름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 계행이 없었고 일찍이 착한 일을 닦지 않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끌려 지옥으로 갔는데, 지옥의 [문]앞에 한 스님이 계셨다. 그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 하면서 게송을 외게 하며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3세의/온갖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법계 성품의 온갖 것이/유심으로 짓는 줄 관하여야 한다.’
  보살은 경을 준 뒤에 말하였다.
  ‘이 게송을 외게 되면, 지옥의 고통도 깨뜨릴 수 있다.’
  그 사람은 외고 난 뒤에 드디어 들어가서 왕을 뵙자 왕이 물었다.
  ‘이 사람은 무슨 공덕이 있는가?’
  대답하였다.
  ‘네 글귀로 된 한 게송을 외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와 같은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왕은 이내 풀어주었고 이 게송을 외울 때 소리가 이르는 데마다 고통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가 해탈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일 후에 소생하고서는 이 게송을 기억하고서 여러 도속(道俗)들에게 설명해 주었고, 참고로 게송의 글을 조사하다가 비로소 이것이 『화엄경』의 야마천궁(夜摩天宮)에서 한량없는 보살들이 구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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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럼 모여서 말한 바 즉 각림(覺林) 보살의 게송임을 알게 되었다.”
  뜻을 말해보면 지옥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짓는다는 것을 깨달아 알면 부처와 지옥은 저절로 공하다는 것을 밝혔을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약 이 마음을 관(觀)하면 언하(言下)에서 고통을 여의며 지옥세계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10법계(法界)에 이르기까지 한꺼번에 깨뜨린다.
  진공(眞空)의 한 즈음 법[一際法]에 들기 때문이니, 곧 평등한 참된 법계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어서 미묘한 도술과 신통으로 남의 세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법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제 마음의 불가사의한 신기하고 미묘한 힘을 증험한다면, 높으면서도 위가 없고 깊숙하면서도 깊지 아니하며 늘어졌으면서도 길지 아니하고 뭉뚝하면서도 짧지 아니하며 넓으면서도 모양이 없고 드러나면서도 자취가 없으며 있으면서도 항상하지 아니하고 없으면서도 소멸하지 아니한다.
  비추는 체(體)가 홀로 섰고 성(性)에 부합하면서 두루하여, 만 가지 물건을 미묘하게 하기 때문에 정신[神]이라 일컫고, 온갖 것을 잉태하기 때문에 어머니[母]라 이름한다. 도맡아 다스리고 골고루 거두며 신통 변화가 무궁하다. 마음대로 비추되 고달픔을 잊음은 마치 밝은 거울에서 형상 비치는 것 같고, 인연을 따르되 지음[作]이 없음은 마치 빈 골짜기에서 소리 전하는 것 같다. 모난 데에 있으면 모난 모양이 분명하고 둥근 데에 처하면 둥근 무늬가 나타나며, 깨침[悟]에 있으면서 깨치면 모든 부처가 되고 미혹[迷]에 떨어져서 미혹하면 중생이 된다. 자취는 천 갈래 길에 맡겼고 본 자리[本地]는 움직이지 않는다.
  태교(台敎)에 이르기를 “마음은 허깨비와 같고 이름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마침 그것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빛과 바탕이 보이지 아니하고 마침 그것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다시 생각을 일으킨다.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미묘함[妙]이라 하는데, 이것은 거칠음[麤]을 상대[待]하여 미묘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끊어짐[絶]으로써 미묘함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대사(傅大士)는 묘한 정신[妙神]이라 일컬었고 또한 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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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妙識]이라고도 하였다. 묘한 정신이 바로 법신불(法身佛)이니, 만약 묘한 정신이 없으면 누가 적멸의 즐거움[寂滅樂]을 받겠는가?
  『보장론(寶藏論)』에서 말하였다.
  “그가 일을 하면 나타나고 그가 고요하면 캄캄하다. 본래 깨끗하여서 빛나는 것이 아니며 본래 저절로 이루어졌다. 광명은 해와 달보다 뛰어나고 덕(德)은 하늘[太情]보다 월등하며 만물은 지음이 없고 일체는 이름이 없으며 하늘과 땅을 뒤바꾸고 거침이 없이 자재하며 항하의 모래알로 작용하고 혼돈(混沌)으로 이루어졌다. 누가 듣고 기뻐하지 않겠으며 누가 듣고 놀라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를 음(陰:5陰)ㆍ입(入:12入)의 구덩이에 숨겨 놓는가?
  그러므로 그를 체달하면 미묘함에 즉[卽妙]하고 정신에 즉[卽神]하여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가 나타나고, 그를 미혹하면 거칠음[麤]을 이루고 어둠[昧]을 이루어서 5음ㆍ6입의 구덩이에 떨어진다. 원만한 글[圓詮]을 두루 보아 그를 해석한다 해도 다하지 못하고, 모든 성인을 우러러 생각하며 그를 찬탄한다 해도 그지없는 것이니, 도(道)에 드는 오묘한 문이요, 부처가 되는 미묘한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내지 범부ㆍ성인과 원인ㆍ결과와 만행[行]ㆍ과위[位]와 나아감[進]ㆍ닦음[修]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을 여의면 이루어지지 못한다. 심성(心性)에 계합하게 되면 무슨 덕인들 거두지 않겠는가? 온갖 법은 의지할 바[所依]에 따라 머무르되 모두가 한 마음에서 단박에 원만해지기 때문이니 이와 같을 일에 어찌 절대(絶待)의 미묘함이 아니리요?”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말하였다.
  “상대가 끊어져서 밝고 미묘한 것[絶待明妙]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정(情)에 따르는 3가법(假法)에서 일으켜 만약 진제(眞諦)에 들면 대대(待對)가 이내 끊어진다. 그러므로 신자(身子)가 이르기를 ‘나는 듣건대, 해탈 안에는 언설(言說)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3장(藏)의 경 안에서 상대가 끊어지는 뜻이다.
  둘째, 만약 이치[理]에 따르는 3가법이라면 온갖 세간은 모두가 허깨비와 같나니, 곧 사(事)이면서 진(眞)이다. 하나의 일도 진리 아님이 없거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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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무슨 물건을 상대하여 진리가 아니라 하겠는가? 저 3장의 절대(絶對)로 본다면 도리어 절대가 아니다. 곧 사이면서 진이라 이것은 절대이다. 이는 통교(通敎)의 절대(絶對)이다.
  셋째, 별교(別敎)에서 만약 일으켜 곧 진리의 절대로 본다 하면, 도리어 이것은 세제(世諦)이다. 왜냐 하면 대열반(大涅槃)이 아니고 오히려 생사하는 세제이기 때문이니, 절대는 도리어 상대가 있다. 만약 별교의 중도(中道)에 든 상대라면 절대이다.
  넷째, 원교(圓敎)에서 일으켜 분별이 없는 법으로 설명하면, 곧 가장자리이면서 중간이다. 불법이 없어져서 청정함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다시 불법으로 불법을 상대하겠는가? 여래의 법계는 그대로 법계 밖을 벗어났으므로, 다시는 모양과 형상으로 견줄 만한 법이 없다. 누구를 상대하여 거칠음[麤]을 삼으며 누구를 상대하여 미묘함[妙]을 얻겠는가? 상대할 만한 것도 없고 절대도 없다. 뭐라 이름할지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말하여 절대라 한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크다[大]라는 이름은 헤아릴 수 없다. 생각하거나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크다고 한다. 마치 허공은 조그마한 빈 것[空]을 따라 크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열반도 그와 같아서 조그마한 모양을 따라 대열반(大涅槃)이라 한 것이 아니다.”
  미묘함[妙] 또한 그와 같아서 미묘함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거나 말로 할 수 없고 거칠음으로 인하여 미묘함이라 함이 아니다.
  만약 결정코 법계는 광대하여 홀로 절대가 있다고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크게 있는 바가 있다. 무엇을 절대라 하느냐 하면, 지금의 법계는 청정하여 보고ㆍ듣고ㆍ깨닫고ㆍ아는 것이 아니어서 설명하여 보일 수 없다.
  경에 말씀하기를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미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으니,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말하지 말라’고 함은 바로 말이 끊어졌다[絶言]는 것이요, ‘나의 법은 미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함은 바로 생각이 끊어졌다[絶思]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이 법은 보일 수가 없고 말의 모양도 고요히 사라졌다” 함은 또한 찬탄도 끊어졌다는 글이니, 상대[待]로써 보일 수도 없고 절대로써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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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수 없어서 상대도 소멸하고 절대도 소멸한 것이다. 그 때문에 고요히 사라짐[寂滅]이라 한다.
  또 이르기를 “온갖 모든 법은 언제나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라 함은, 마침내 공으로 돌아가나 이 공도 공이어서 다시는 상대와 절대가 없다는 것이다.
  『중론(中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법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이 법은 도리어 상대를 이룬다. 지금의 것은 상대를 연유함이 없는지라 역시 이루어지는 바가 없다.”
  『법화수경(法華首經)』에서 말하였다.
  “이미 무생인(無生忍)을 얻었으니, 이것은 나지도 않고[不生] 남도 없는 것[無生]이다. 나는 그대로가 남이 없음이라 이것은 절대라고 한다.”
  이로부터 이외에 다시 짓는다 하면, 무슨 물건을 끊고 어느 이치를 드러내겠는가? 이리저리 방랑함이 그지없으면, 쓸모없는 이론[戱論]에 떨어진다. 이 미정(迷情)으로 절대를 분별하면 절대하지 않아서 절대도 아니고 상대도 아닌데 상대와 절대를 상대하는 것이니 말만을 서로 따르면서 영원히 끊어짐이 없으리라.
  왜냐 하면 언어는 각관(覺觀)으로부터 나기 때문이니, 마음에서 생각이 쉬지 아니하면 말이 무엇으로 인하여 끊어지겠는가? 마치 미련한 개가 흙덩이를 쫓아감은 한갓 고달프기만 할 뿐, 흙덩이는 끝내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진리를 미묘하게 깨쳐서 각관의 바람이 쉬면, 마음의 물은 맑고 고요하여 말과 생각이 모두 끊어진다. 마치 영리한 사자가 흙덩이는 그만두고 사람을 쫓을 때 흙덩이는 본래 벌써 제거했으므로 흙덩이는 곧 끊어져버린 것과 같다.
  미묘히 깨쳤을 적에 법계 밖에는 법이 없고 이론이 끊어졌음을 환히 알면 유의 문[有門]에서 보아 절대임을 밝힌 것이요, 이 절대조차도 끊어졌으면 공의 문[空門]에서 보아 절대임을 밝힌 것이다. 마치 준마[駃馬]는 채찍 그림자만 보고서도 눈치 채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절대의 미묘함[絶待妙]이라 한다.
  이 두 가지 미묘함을 이용하여 미묘한 위의 세 가지 법에서 중생의 법[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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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法]도 두 가지 미묘함을 갖추었으므로 미묘함이라 일컫고, 부처의 법[佛法]과 마음의 법[心法]도 두 가지 미묘함을 갖추었으므로 미묘함이라 일컫는다.
  [문] 무슨 뜻에서 절대[絶]를 미묘함[妙]이라 해석하는가?
  [답] 미묘함을 절대라고 부를 뿐이니, 절대는 바로 미묘함이라는 다른 이름이다. 마치 세간 사람들이 절대를 능(能)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또 미묘함은 바로 끊는 주체[能絶]이고 거칠음은 바로 끊어지는 대상[所絶]이다. 이 미묘함은 거칠음을 끊는 공(功)이 있기 때문에 절대를 미묘함이라 하는데 이 절대는 단절(斷絶)이 아닌 것이니, 그지없음으로써 절대를 삼는다.
  『환원관(還原觀)』에서 말하였다.
  “한 티끌[一塵]이 나와서 한 티끌의 안에 그지없이 두루하나니, 이(理)이면서 사(事)요, 인(人)이면서 법(法)이요, 의(依)이면서 정(正)이요, 염(染)이면서 정(淨)이요, 인(因)이면서 과(果)요, 동(同)이면서 이(異)요, 피(彼)이면서 차(此)요, 일(一)이면서 다(多)요, 광(廣)이면서 협(狹)이요, 정(情)이면서 비정(非情)이요, 3신(身)이면서 10신(身)이다. 왜냐 하면 이와 사의 걸림 없는 법[理事無礙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10신은 서로서로 작용하기 때문이니, 보안(普眼)의 경계일 뿐이다.”
  위와 같은 사상(事相) 안에서는 하나하나가 서로서로 용납하고 섭수하는 것이므로 저마다 겹겹의 그지없는 경계[重重無盡之境界]이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온갖 법문의 그지없는 바다에/같이 한 법의 도량 안에 모이나니/이렇게 차례대로 차츰차츰 이루는/이 무애인(無礙人)이라야 깨치게 된다네.”
  [문] 그 말한 바에 의거하건대, 한 티끌의 위에는 이(理)가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고 사(事)가 원융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글[文]이 해석되지 아니함이 없고 뜻[義]이 통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의 닦고 배우는 무리들은 어떻게 알아야 티끌[塵]의 처소를 통달하여 뭇 의심을 단박에 결단하겠는가? 또 한 티끌의 위에서, 어느 것이 염(染)이고 무엇을 정(淨)이라 하며, 어느 것이 진(眞)이고 무엇을 속(俗)이라 하며, 어느 것이 생사이고 무엇을 열반이라 하며, 어느 것이 번뇌이고 무엇을 보리(菩提)라 하며, 어느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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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승(小乘)의 법이고 무엇을 대승(大乘)의 법이라 하는가? 청컨대 결단하여 아직 듣지 못한 바 듣게 하라.
  [답] 큰 지혜가 뚜렷이 밝아서 가는 털을 보면서도 성품의 바다를 보고, 참된 근원이 밝게 나타나서 한 티끌의 처소면서도 온 몸을 본다. 만 가지 법이 나타나되 반드시 시기가 같고, 한 끝의 진리에는 앞뒤가 없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한 티끌의 허망한 모양이 참된 것을 능히 가리므로 바로 염이요, 티끌의 모양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으므로 바로 정이며, 티끌의 성품이 본래 체(體)는 여(如)와 같으므로 바로 진이요. 이 티끌 모양은 인연으로 생기고 환영으로 있으므로 바로 속이며, 티끌의 모양은 생각생각마다 옮아가 변하므로 바로 생사요, 티끌의 나고 없어지는 모양을 관하면 모두가 공이요, 진실이 없으므로 바로 열반이며, 티끌 모양의 크고 작음은 모두가 허망된 마음의 분별이므로 바로 번뇌요, 티끌의 자체는 본래 공하여 연려(緣慮)가 스스로 다하므로 바로 보리며, 티끌 모양 자체에는 변계(遍計)가 없으므로 바로 스승의 법이요, 티끌의 성품은 남[生]이 없고 없어짐[滅]이 없어서 의타(依他)가 있는 듯하므로 바로 대승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략하게 설명하였거니와 만약 자세하게 말하면 가령 일체 중생이 의심을 품고서 저마다 다르게 한꺼번에 똑같이 여래에게 묻는다 하여도 여래는 다만 한 개 티끌[塵]의 글자로써 그들에게 해석하리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온갖 법문의 그지없는 바다를/한 말로 연설하여 남김없이 다한다네.”
  이런 이치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 티끌이 나와서 그지없이 두루하다’라고 한다.
  말한 바 그대로 즉[卽]함은, 지금 현재 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한 마음의 법문[一心法門]이다. 마치 거울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단박에 나타나는 것 같고, 도장은 앞뒤가 없이 찍히는 것과 같다.
  한 번 보면 온갖 것이 보이고 한 번 들으면 온갖 것이 들리는 것이니, 추구하거나 찾음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만약 깨달아 앎을 기다려서 이루어진다면, 모두가 권(權)과 점(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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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심성(心性)의 하나를 관찰할 수 있다면, 이것은 한 도의 심히 깊은 것[一道甚深]이요, 바로 바른 도의 하나[正道之一]며 이는 하나뿐인 하나[唯一之一]이니, 천 부처님의 같은 길이요, 옛날과 지금이 바뀌지 않는 하나의 도이다.
  또한 이르기를 “한 길의 열반의 문”이라 했고, 또한 “한 도(道)로 생사를 벗어난다”고 했으며, 또 대불정수능엄왕(大佛頂首楞嚴王)이 만행을 두루 갖추고[具足萬行] 여래가 한 문으로 뛰어나는[如來一門出超] 미묘한 장엄의 길[妙莊嚴路]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백 가지 꽃이 함께 하나의 꿈을 이루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 가지 법이 똑같이 이 종(宗)에 모인다.
  만약 진실로 온갖 것이 나에게 있다 함을 깨달아 알면 오르고 잠기고 가고 서고 하는 것을 인연 따라 마음대로 하며, 성인을 보이고 범부를 나타내며 삶[生]을 벗어나고 죽음에 든다.
  변화가 측량하기 어려워서 짓고자 함이 없는 신통[無作之神道]을 운용하고 숨거나 나타남이 때를 같이하여 환술과 같은 삼매[如幻之三昧]를 열며, 시비(是非)가 가만히 합하여지고 역순(逆順)이 같은 데로 돌아오며, 말하고 잠잠하고 마르고 펴는 것이 언제나 하나의 참된 도[一眞之道]를 따르고 생활을 도모하는 산업이 실상의 문[實相之門]에 어기지 아니하며, 운용하고 하는 일이 생각생각마다 법계를 떠나지 아니하고 가고ㆍ서고ㆍ앉고ㆍ누움이 걸음걸음마다 언제나 그 속에 있으리니, 만약 믿어 받지 않은 사람이면 얼굴을 맞대어도 멀기가 천리(千里)이다.
  한산자(寒山子)의 시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귀히 여길 만한 천연(天然)의 물건이/혼자뿐이요 짝이 없으며/그것을 말아들이면 방촌(方寸)에 있고/그것을 늘이면 온갖 곳에 있다네.”
  그대가 만약 믿어 받지 않으면 서로가 만나도 만나지지 않는다. 만일 밝게 통달한 이라면 눈에 뜨이고 생각에 미치리니, 모두가 먼저 깨달아 아는 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일로써 알아야 하므로 거동이며 하는 일이 끊기는 일이 없다.
  채순(蔡順)의 자(字)는 군중(君仲)인데 효자로 소문이 났다. 순은 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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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부터 어머니를 외로이 봉양하느라고 언제나 산에 가서 나무를 했다. 어떤 손이 갑자기 왔는데, 그 어머니는 바라보아도 순이 돌아오지 않는지라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순이 이내 마음이 동하였으므로 나무를 그만두고 달려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그 까닭을 묻자,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갑자기 손님이 왔으므로,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서 너에게 알렸을 뿐이다”라고 했다.
  또 당(唐)나라 배경이(裵敬彛)는, 그의 아버지가 진왕(陳王) 전(典)에게 살해를 당했다. 경이는 그 때에 성(城)에 있었는데, 갑자기 스스로 깨달고 눈물을 흘리며 먹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말하기를 “나의 대인(大人)께서 아픈 데가 계시면 내가 이내 불안해진다. 오늘은 마음이 아프고 손발이 모두 말을 듣지 않는데, 알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하고, 마침내 돌아가 그의 아버지를 뵈었더니 과연 벌써 죽어 있었다.
  또 당나라 장지안(張志安)은 마을에 살 적에 효자로 불렸으므로 이윤(里尹)으로 차출되어 고을[縣]에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구나”라고 하므로, 현령(縣令)이 묻자, 지안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병환이 있으면 이 지안 역시 아프게 됩니다. 지안이 마음이 아픈 것으로 보아 어머님께서 병환이 있는 줄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현령은 그를 감금해 두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더니, 과연 말대로였다. 그래서 곧 그것을 높은 데에 아뢰어 문려(門閭)를 짓고 배(拜)하여 산기(散騎)의 상시(常侍)로 삼았다.
  [문] 이 종(宗)에서 깨치는 것에는 스승이 있는가?
  [답] 이것은 바로 스스로가 거룩한 지혜[聖智]를 깨치는 것이요, 스승의 지혜거나 자연의 지혜로 증득하는 처소가 없어서 다른 이를 따라 깨치지는 아니한다. 스스로가 증득하는 때에 법이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요. 밖에서부터 오지 않기 때문에 스승이 없다. 계합되면 스스로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게 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였다.
  “대혜(大慧)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스스로가 거룩한 지혜 모양과 일승(一乘)을 잘 깨달았다 하면, 저와 그 밖의 보살들이옵니다. 만약 스스로가 거룩한 지혜 모양과 일승을 잘 깨달으면 다른 이로 말미암아 불법을 통달하지 않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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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경에서 말하였다.
  “사리불(舍利佛)이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여러 어진 이들은 늘부터 비로소 부처님을 거룩한 스승으로 삼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여러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오늘부터는 자신이 그 땅에 있게 되고 타향(他鄕)에 있지 아니하며, 스스로가 자기에게 귀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귀의하지 않는 것이므로, 스승을 삼되 다른 스승은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일부러 가서 부처님을 거룩한 스승으로 삼지는 않겠습니다.’
  이때 세존은 여러 비구들을 칭찬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그 모든 법에서 얻을 바가 없다면, 이에 참된 것을 얻었도다. 이것이야말로 자신만이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진실을 본 것이니라.’”
  그러므로 천 성인께서 손을 마주잡고 계교를 짠다 하여도 이룩되지 않는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언어로 모든 법을 말한다 하여도/진실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요/평등(平等)이라야 능히 보는 것이니/법과 마찬가지로 부처도 또한 그러하니라.”
  그런 까닭에 영가(永嘉)가 노래하기를 “제 자리[當處]를 여의잖아 언제나 담연(湛然)한데/찾는다면 그대여 볼 수 없음 알아라”고 했고, 또 선덕(先德)의 게송에 이르기를 “번거롭게 스승에게 묻지 않아도/심왕(心王)께선 스스로 안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비춤은 비춤이 없고 참으로 앎은 알음이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만약 비춤이 있다면 대(對)할 처소가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비춤을 따르면 종(宗)을 상실한다”고 하였다. 만약 앎이 있다면 앎의 장애를 받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법은 보고ㆍ듣고ㆍ깨닫고ㆍ아는 것을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였다.
  “가로 세로로 비춤 없음이/가장 미묘한 것이 되며/법을 알되 앎이 없나니/앎이 없어야 요문(要門)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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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요문을 통달하면, 곧 한 법도 같을 만한 것이 없고 한 법도 다를 만한 것이 없으며 한 법도 옳을 만한 것이 없고 한 법도 그를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밖에서 지혜(知解)를 구하려는가?
  고덕(古德)이 노래하였다.
  “옛 사람은 금(金)보다 의(義)를 중히 여겼으니/곡(曲)은 높은데 화답(和答)이 작으며 음(音)을 아는 사람이 없네./오늘날의 학사(學士)들 도리어 이러하여/어묵(語黙)과 동용(動用)의 자취 찾기 어렵구나.
  슬프다, 세상에 갈림길 가는 이여/종일토록 험한 길에 잘못 마음 쓰거니/평탄한 데 전단(栴檀)은 취하려 하지 않고/올라가서 참죽나무 찾으려 하는구나.
  거지 아들 부모 두고 멀리 도망가서/도리어 본집에는 소식조차 끊었으며/가난한 여자 집 안에는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이 있는데/도리어 작은 저울로 남의 금을 사누나.”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평탄한 길에, 일체 중생들이 모두 중간을 가게 되면 장애라는 것이 없고 중로에는 나무가 있으며 그 그늘은 맑고 시원하여 길 가던 사람들이 그 아래서 쉬고 수레도 멈추며 쉰다. 그러나 그 나무 그늘은 언제나 달라지지 아니하여 녹아 없어지는 것도 없고 가져가는 이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기서 길은 거룩한 도[聖道]에 비유했고 그늘은 불성(佛性)에다 비유했다. 그러므로 이 종(宗)을 통달하면 제 땅으로 돌아가며, 방 속 보배의 광이거늘 어찌 이것이 밖에서 오는 것이겠는가? 옷 속의 명주(明珠)는 남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만약 비밀히 간직된 것을 열어 헤치면 눈앞에서 수용하는 영화를 누리며, 신령스런 명주[神珠]를 팔아 바꾸면 오랜 겁(劫)의 가난했던 고통이 쉬리라. 남의 보배를 셀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로부터 구하겠는가? 그렇다면 제 몸을 윤택하게 하는 지혜의 광인데 어찌하여 궁(窮)하겠는다. 남을 이롭게 하는 법의 재산은 그지없으리라.
  [문] 만약 스승이 없이 스스로가 증득한다 하면 바로 자연(自然)이란 계교[計]에 떨어지며, 남으로부터 알게 됨을 집착한다면 그대로 인연(因緣)이란 문(門)을 거치리라. 큰 도[大道]의 성품은 자연도 아니요 인연도 아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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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어떻게 열어 보이면서 도의 체[道體]를 어기는가?
  [답] 다른 이로부터 구한다 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짐짓 스스로가 증득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스스로가 이해한다 함을 고집하기 위하여 짐짓 다른 이로부터 인가(印可)를 받는다. 만약 친히 살피는 때면 미혹과 깨침[迷悟]이 모두 공(空)하고 자기와 남이라 함이 함께 끊어진다. 한량(限量)으로 미칠 바가 아니거늘, 어찌 언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두 초조(牛頭初祖)가 말하였다.
  “도(道)란, 만약 한 사람만이 얻게 된다면 도는 곧 두루하지 아니하고, 만약 여러 사람들이 얻게 된다면 도는 곧 궁함이 있으며, 만약 저마다 지니게 된다면 도는 곧 수(數)가 있고, 만약 온통 다 같이 지니게 된다면 방편(方便)은 곧 공이며, 만약 수행으로 얻게 된다면 조작(造作)은 진(眞)이 아니요, 만약 본래 스스로 지니게 된다면 만행(萬行)을 헛되게 시설했다. 왜냐 하면 온갖 한량과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자기라 설명하고 남이라 설명하며 얻는다 말하고 잃는다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것이니, 만약 성인의 가르침에서 보면 이것은 세속의 말을 따르면서 집착을 깨뜨리는 방편이며, 만약 뜻에 의하여 이해하면 모두가 이 한량과 분별은 정진(情塵)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다만 가르침[敎]에 집착하여 미정(迷情)을 쫓지만 않으면, 비로소 견성(見性)하여 도를 통달하리라.
  [문] 처음 마음 내어 배우는 사람이 이 종(宗)에 깨쳐 들어가 믿고 이해[信解]함이 뚜렷이 통하면, 어떤 뛰어난 힘이 있는가?
  [답] 만약 바른 이해가 뚜렷이 밝고 결정코 믿어 들어가면, 겁(劫)을 초월하는 공덕이 있고 단박에 이룩되는 힘을 얻는다. 비록 생사에 있다 해도 언제나 열반에 들며, 항상 진로(塵勞)에 처해 있으면서도 길이 깨끗한 세계에서 산다.
  현재 갖춘 육안(肉眼)으로서도 지혜 눈[慧眼]의 광명이 열리고 범부 마음을 바꾸지도 않고 이내 부처 마음의 지견(知見)과 같으리니, 마치 태자는 왕으로서의 거동을 갖추고 가릉(迦陵)은 뭇 새들의 음성보다 뛰어나며 사자의 힘줄을 가지고 거문고 줄을 만들면 그 밖의 음은 끊어져 버리고 잘 듣는 약으로 병을 다스리면 뭇 질환이 낫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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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나라 화살[那羅箭]의 공과 세력이 쇠북을 뚫는 것과 같고 금강 철추[金剛鎚]의 힘으로 금산(金山)을 부수는 것과 같다. 곧 번뇌의 진로가 끊어짐을 기다리지 않고 저절로 소멸되며, 보리(菩提)의 미묘한 과위가 수행을 빌지 않고 절로 원만해질 것이다. 내지 원수와 친한 이가 평등해지고 다툼의 이론이 화해되며 범부와 성인이 같아지고 자기와 남이 없어지며 가고 오는 것이 동일해지고 같음과 다름이 분명해지며, 길고 짧음이 융화되고 중간과 갓이 뒤섞인다.
  세간ㆍ출세간이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말로 할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그 힘이야말로, 보다 지나갈 수 있는 이가 없다. 또한 부처의 힘[佛力]이라 하고, 반야의 힘[般若力]이라고도 하고, 대승의 힘[大乘力]이라고도 하고, 법의 힘[法力]이라고도 하고, 머무름이 없는 힘[無住力]이라고도 한다.
  그런 까닭에 선덕(先德)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머무름이 없는 힘으로 지니는 이면, 대겁(大劫)도 한 생각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빛깔이 평등한 이것이 부처의 힘이다”라고 했다. 빛깔이 이미 평등하면 마음만[唯心]의 이치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관심(觀心)하는 문의 도리는 그보다 뛰어난 것이 없어서 가장 높고 가장 귀하며 절묘하고 짝할 이가 없다. 찰나 동안에 부처가 되는 공(功)이 있고, 단박에 고통의 수레바퀴의 힘이 끊어진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약 나무를 나무 왕[樹王]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다. 모든 약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여 모든 병을 능히 없애면서도 나무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가지와 잎과 껍질 및 줄기 등을 취할 때 비록 생각을 하지 않으나 모든 병을 나을 수 있는 것처럼 열반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만약 종경(宗鏡)에 원만한 믿음과 뚜렷한 수행이 있거나, 내지 보고 듣고 따라 기뻐하면서 한 생각이나마 마음을 내면 8만의 진로(塵勞)며 3장(障)과 2사(死)의 병을 제거하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마니주(摩尼珠)가 있는 데는 온갖 비인(非人)이 그 틈을 얻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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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구슬을 몸에 차면 어둠 속에서도 광명을 얻고 더울 적에는 시원하여지며 추울 때에는 따뜻해지며 만약 물속에 있으면 물건 따라 빛깔을 나타내나니, 곧 제 마음의 여의신주(如意神珠)를 아는 것에 비유한다.”
  원만한 마음이 견고하여 온갖 때와 처소에서 무명과 진로와 비인에게 침해를 받지 않으면, 번거로운 데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험한 곳을 밟으면서도 항상 편안하며, 높으면서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가득 찼으면서도 넘치지 않는다.
  태교(台敎)에서 『불장경(佛藏經)』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명상(名相)이 없는 가운데서 명상을 빌어서 설명함은 모두가 여래의 부사의(不思議)한 힘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수미산(須彌山)을 물고 허공을 날아다니고 돌 떼[筏]로 바다를 건너거나 4천하와 수미산을 지고 모기 다리로 사다리를 삼아 범궁(梵宮)으로 올라가거나 겁(劫)이 다하여 불이 탈 때에 침을 한번 뱉어서 겁화(劫火)가 이내 꺼지거나 입김을 한 번 불어서 세계가 이루어지거나 연꽃 실뿌리로 수미산을 매달아 놓고 손으로는 4천하의 비를 움켜쥔다 하더라도, 여래가 말씀한 바 온갖 모든 법은 모양[相]이 없고 함[爲]이 없고 남[生]이 없고 없어짐[滅]이 없는 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매우 있기 어려운 것이요, 심히 있기 드[문]것이다.”
  만약 조금 얻은 바가 있으면 불ㆍ법ㆍ승과 다투며 삿된 도에 들어가는지라, 출가하여 계(戒)를 받고 한 잔의 물을 마실 것조차도 허락되지 아니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經)은 남이 없음[無生]의 그 밖의 작용을 밝혀 미묘한 도리와 인과와 남이 없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일체(一體)의 삼보(三寶)가 항상 머문다[常住]는 것을 알지 못해서 출가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허락되지 않는다[不聽]’고 함은, 만약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계율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관심(觀心)에서 보면, 한 찰나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한 중생[一衆生]이라 하고, 이내 일어났다가 이내 없어지는 것을 한 시기[一期]라 한다.
  생각생각 동안에 항상 3독(毒)이 일어나는데, 겁(劫)이 다할 제의 3재(災)를 당하면 3독의 탐냄[貪]이 우두머리가 되고 삼재의 불이 실마리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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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부사의한 지관(止觀)으로 이 3독을 관하면 한 생각의 탐내는 마음은 일어나는 곳이 없다. 바로 이것이 겁화(劫火)에 침을 한 번 뱉으면 꺼진다는 것이요, 생각을 깨달아 지혜를 이루는 바로 이것이 입김을 한 번 세계에 불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온갖 부사의하고 있기 드[문]일에 이르기까지 한 생각 무명(無明)의 마음을 통달하여 모든 부처의 지혜가 이룩되면,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출가가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만 가지 선행조차도 모두 성취하지 못할 것이니, 불법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이 땅[地]은 견고하고 마음은 형질(形質)이 없다고 말하나 모두가 이는 허망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힘은 크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행하기 때문에 이 대지(大地)를 흩뿌려서 작은 티끌로 만든다’고 하셨다.”
  땅은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과 무거움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지을 바가 없고, 물[水]은 냄새가 적기 때문에 동작(動作)은 땅보다 나으며, 불[火]은 냄새와 맛의 세력이 적어서 물보다는 낫고, 바람[風]은 빛깔ㆍ냄새ㆍ맛이 적기 때문에 동작이 불보다 낫다. 마음은 이 네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하는 일의 함은 크다.
  또 마음은 번뇌와 결사(結使)와 계박(繫縛)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하여금 적게 하며, 유루(有漏)의 착한 마음은 비록 번뇌는 없으나 마음으로 모든 법의 모양[法相]을 취하기 때문에 그 힘 역시 적다.
  2승(乘)의 무루(無漏)의 마음은 비록 모양은 취하지 않는다 하나 지혜는 한량이 있고 무주의 도(道)를 벗어날 적에 6정(情)은 세속을 따라 분별하며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마음의 힘을 다하지 못하거니와 모든 부처와 큰 보살의 지혜는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언제나 선정에 처하고 세간과 열반에 대해 분별한 바가 없으며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실로 다르지 않고 다만 지혜에 우열(優劣)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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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함은 마침내 청정하여 걸리는 바가 없어서 한 생각 안에서 시방의 온갖 항하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국토의 대지와 모든 산의 작은 티끌까지 능히 흩뿌린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심(眞心)은 이런 큰 힘이 있는데 중생들이 망령되이 동떨어지면서 깨달아 알지 못한다.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에서 이르기를 “마치 햇빛이 천하를 능히 비추되 도리(道理)는 비출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으나, 마음의 지혜 광명은 지혜를 일으키고 도리를 비출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은 빛[光]이다. 만약 마음이 어리석고 어두운 체(體)라면 초췌(憔悴)할 것이나 마음은 지혜의 빛이 있어서 피부 색깔이 윤택해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반야(般若)는 크기 때문에 빛깔이 크며 반야는 깨끗하기 때문에 깨끗한 것이니, 바로 이것이 밝음[明]이다. 천하의 만물에는 사람만이 귀하고, 일곱 자[七尺]의 몸뚱이는 신령한 지혜[靈智]보다는 귀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관하는 마음[觀之心]은 귀하고 그 마음은 바로 금(金)이다. 또 의(依)를 알고 정(正)을 아는 것은 빛이요, 온갖 법과 온갖 법이 없음을 아는 것은 밝음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종경(宗鏡)에 들어서 믿어 들어감이 있기만 하면, 이내 원만한 이해가 나서 참되고 바른 보리 마음[菩提心]을 능히 내는 것이니, 이보다 으뜸가는 것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견줄 데 없으면서 같은 마음[無等等心]을 능히 내는 것이니, 다시는 보다 으뜸가는 것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견줄 데 없으면서 같은 마음이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마음이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마음이다.
  『지관(止觀)』에서 말하였다.
  “이 마음을 내는 이는 낱낱의 진로(塵勞)의 문을 뒤집을 수 있나니, 바로 이것이 8만 4천의 모든 삼매의 문[三昧門]이다.”
  무명(無明)이 굴러서 명(明)으로 변화되는 것은, 마치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과 같다. 더 이상 먼 데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다른 데서 오지 아니한다.
  다만 한 생각의 마음은 넓고 모두를 두루 갖추는 것이 마치 여의주(如意珠)와 같지만 보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없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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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이요, 있다고 하면 삿된 소견이다. 마음으로 알 수도 없고 언어로 말할 수도 없다.
  중생들은 이 불가사의하고 속박하지 않는 법안에서 생각으로 속박을 짓고, 해탈 없는 법 가운데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므로 큰 자비(慈悲)를 일으키고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을 세워서 두 고통을 뽑아주고 두 안락을 줄 것이다. 때문에 속박이 아니고 해탈이 아닌 진정한 보리 마음이라고 한다.
  이 한 보리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온갖 보리 마음이다. 마치 좋은 의사에게 한 비방(秘方)이 있으면 모든 처방을 온통 섭수하고 아가타약(阿伽陀藥)의 공은 모든 약을 겸하는 것과 같으며, 우유죽을 먹고 나면 다시는 구할 바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온갖 것을 두루 갖추는 것은 마치 여의주와 같다.
  내지 이 한 마음은 바로 큰 것 가운데서도 크고, 으뜸가는 것 가운데서도 으뜸가며, 둥근 것 가운데서도 둥글고, 가득 찬 것 가운데서도 가득 차며, 익은 것 가운데서도 익고, 참된 것 가운데서도 참되며, 요의(了義) 가운데서도 요의이고 깊은 것 가운데서도 깊으며, 묘한 것 가운데서도 묘하고 불가사의 가운데서도 불가사의하다. 만약 이렇다 하면, 그른 것을 드러내며 권(權)을 체득하고 실(實)을 안다.
  그리고 발심(發心)이란 것은 모든 부처가 되는 종자이니, 마치 금강(金剛)은 금의 성품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다.
  부처가 되는 보리의 마음[菩提心]은 대비(大悲)로부터 일어나고, 이것이 모든 행에서 우선한다. 마치 아사라약(阿娑羅藥)을 먹을 적에 먼저 맑은 물을 이용하는 것과 같다. 모든 행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니, 마치 모든 근(根) 안에서 명근(命根)이 으뜸인 것과 같다.
  부처의 바른 법과 바른 행 안에서 이 마음이 첫째가는 것이다. 마치 태자가 태어나면 왕으로서의 위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대신들이 공경하고 큰 명성이 있는 것과 같고, 가릉빈가새[迦陵頻伽鳥]가 새알 속에서 울어도 그 소리가 벌써 다른 여러 새들보다 훌륭한 것과 같다.
  이 보리 마음은 큰 세력이 있어서 마치 사자 힘줄로 된 거문고 줄과 같고 사자의 젖과 같으며 금강의 철추와 같고 나라연(那羅延)의 화살과 같다.
  뭇 보배를 두루 갖추어서 가난의 고통을 없애는 것은 마치 여의주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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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조금 게으르고 조금 위의를 상실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2승(乘)의 공덕보다는 훌륭하다.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이 마음은 온갖 보살의 공덕을 갖추어서 세 세상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능히 이룬다. 만약 이 마음을 알면, 저절로 지관(止觀)을 통달한다. 일으킴[發]이 없고 걸림[礙]이 없는 바로 이것이 관(觀)이요, 그 성품이 고요히 사라지는 바로 이것이 지(止)다. 지관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지관이다.
  위에서 널리 찬탄한 것과 같이, 이 원만한 믿음의 보리 마음을 낸 사람은 실로 있기 어렵다.
  만약 범부와 외도가 이 마음을 미혹하면 분단생사(分段生死)가 되고, 장통(藏通)의 2승이 이 마음을 저버리면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짓는다.
  내지 통교(通敎)의 보살로서 비로소 대승(大乘)을 낸 사람은 이 마음을 체달하여 자성공(自性空)을 이룰 뿐이며, 별교(別敎)의 보살로서 대승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마음을 깨치면 비록 불공(不空)이 10법계(法界)의 소의(所依)가 됨을 아나, 당장은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따로따로 닦아 차례로 일으키면서 제 마음의 한 생각이 단박에 원만하고 평등하고 바른 성품이요, 범부ㆍ성인이 같이 있고 한 끝[一際]이며 차이가 없다 함을 다함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이 위없고 견줄 데 없고 가장 훌륭하고 광대하며 불가사의한 보리의 마음을 내지 않으며 모든 비원(悲願)과 지행(智行)이 다 같이 구족하지 않는다. 만약 한 번 이 마음을 내면 공덕이 끝이 없고 생각생각에 10바라밀(波羅蜜)이 원만해진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에서 말하였다.
  “유마힐(維摩詰)이 말하기를 ‘그러나, 그대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면 바로 그것이 출가(出家)요, 바로 그것이 두루 갖춘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제 종경(宗鏡)은 바로 이 마음을 열어 보이기 위하여 낱낱이 찾아 궁구하고 겹겹으로 증거를 인용하면서 널리 온 법계의 함생(含生)으로서 마음 있는 이를 위하여 모두가 믿어 받기를 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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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믿어 들기만 하면 본래 자연스럽게 위없는 보리 마음을 내며, 이내 도량에 앉아 동체대비(同體大悲)를 행하고 무연자화(無緣慈化)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 마음 아는 것을 찬탄하셨으니, 보리를 낼 수 있으면 공덕이 그지없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보리의 마음[菩提心]은 마치 종자와 같나니 온갖 모든 불법을 능히 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밭과 같나니 중생의 희고 깨끗한 법[自淨法]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대지(大地)와 같나니 온갖 모든 세간을 능히 지니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깨끗한 물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때[垢]를 씻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바람과 같나니 널리 세간에서 걸린 바가 없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훨훨 타는 불과 같나니 온갖 모든 소견의 나무를 태우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깨끗한 해와 같나니 널리 온갖 세간들을 비추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다 찬 달과 같나니, 모든 희고 깨끗한 법이 모두 원만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밝은 등불과 같나니 갖가지 법의 광명을 놓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깨끗한 눈과 같나니 널리 온갖 편안함과 위험한 처소를 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길[道]과 같나니, 널리 큰 지혜의 성[大智城]에 들 수 있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른 나루[濟]와 같나니 그들로 하여금 모든 삿된 법을 여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수레와 같나니, 널리 모든 보살을 실어 운반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문호와 같나니 온갖 보살의 행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궁전과 같나니 편히 머무르면서 삼매(三昧)법을 닦아 익히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동산과 같나니 그 가운데서 재미있게 놀며 법의 즐거움을 받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사택(舍宅)과 같나니 온갖 중생들은 안온하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로 돌아갈 데가 되나니 온갖 모든 세간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바로 의지할 데가 되나니 모든 보살의 행의 의지 할 바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인자한 아버지와 같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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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모든 보살을 가르쳐 인도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인자한 어머니와 같나니 온갖 모든 보살을 나서 자라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유모(乳母)와 같나니 온갖 모든 보살을 양육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착한 벗과 같나니 온갖 보살들을 이룩하고 이롭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군주와 같나니 온갖 2승(乘)의 사람들보다 훌륭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제왕과 같나니 온갖 소원 가운데서 자재할 수 있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바다와 같나니 온갖 공덕을 모두 그 안에 들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수미산과 같나니 모든 중생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철위산(鐵圍山)과 같나니 온갖 모든 세간을 거두어 지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설산(雪山)과 같나니 온갖 지혜의 약을 자라게 하고 기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향산(香山)과 같나니 온갖 공덕의 향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모든 미묘한 공덕이 넓고 그지없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연꽃과 같나니 온갖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길이 잘든 지혜로운 코끼리와 같나니 그 마음은 착하고 온순하여 흉포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어질고 좋은 말과 같나니 온갖 모든 나쁜 성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잘 다루는 스승과 같나니 대승의 온갖 법을 수호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약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병을 잘 다스리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구덩이와 같나니 온갖 모든 나쁜 법을 빠뜨려 없애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금강(金剛)과 같나니 온갖 법을 모두 꿰뚫을 수 있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향 상자와 같나니 온갖 공덕의 향을 저장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아름다운 꽃과 같나니 온갖 세간이 보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흰 전단(栴檀)과 같나니 중생의 욕심의 열(熱)을 없애고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검은 침향(沈香)과 같나니 법계에 모두 두루 배어들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잘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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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병을 잘 깨뜨리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비급마약(毘笈摩藥)과 같나니 온갖 모든 미혹의 화살[箭]을 능히 뽑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제석(帝釋)과 같나니 온갖 임금 안에서도 가장 높은 이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비사문(毘沙門)과 같나니 온갖 가난의 고통을 끊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공덕천(功德天)과 같나니 온갖 공덕이 장엄한 곳이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꾸미개와 같나니 온갖 모든 보살을 잘 꾸미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겁소화(劫燒火)와 같나니 온갖 모든 유위(有爲)를 태울 수 있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무생근약(無生根藥)과 같나니 온갖 모든 불법을 자라게 하고 기르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용의 구슬[龍珠]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독을 씻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수정 구슬[水精珠]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흐림을 밝히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여의주(如意珠)와 같나니 온갖 가난한 이들에게 두루 대주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공덕의 병(甁)과 같나니 온갖 중생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여의수(如意樹)와 같나니 온갖 꾸미개들을 비 내리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거위의 날개와 같나니 온갖 생사의 때[垢]를 받지 않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흰 모직물의 올과 같나니 본래부터 성품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카로운 쟁기와 같나니 온갖 중생들의 밭을 잘 갈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나라연(那羅延)과 같나니 온갖 아견(我見)의 적(敵)을 꺾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랜 화살과 같나니 온갖 모든 고통의 과녁을 깨뜨리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카로운 창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갑옷을 뚫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견고한 갑옷과 같나니 온갖 이치대로의 마음[如理心]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잘 드는 칼[刀]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머리를 베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카로운 검(劍)과 같나니 온갖 교만의 투구를 끊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용감한 장수의 당기[幢]와 같나니 온갖 악마 군사들을 항복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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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카로운 톱과 같나니 온갖 무명(無明)의 나무를 자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날카로운 도끼와 같나니 온갖 고통의 나무들을 베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무기와 같나니 온갖 고난(苦難)들을 막아 주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착한 손과 같나니 온갖 도신(度身)을 막아 수호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발과 같나니 온갖 모든 공덕을 편안히 세우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안약(眼藥)과 같나니 온갖 무명의 베개를 없애 주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족집게와 같나니 온갖 신견(身見)의 가시를 뽑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침구와 같나니 생사의 모든 노고를 쉬게 하고 없애 주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선지식(善知識)과 같나니 온갖 생사의 속박을 풀어 주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고 값진 재물과 같나니 온갖 빈궁한 일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길잡이와 같나니 보살로서 벗어나는 길을 잘 알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땅에 묻힌 광과 같나니 공덕의 재물을 내어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솟아나는 샘물과 같나니 지혜의 물이 나와 그지없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나니 온갖 법문(法門)의 형상을 널리 나타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연꽃과 같나니 온갖 죄의 때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강물과 같나니 6도(度)와 4섭법(攝法) 등을 흘러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용왕(龍王)과 같나니 온갖 미묘한 법의 비를 내리기 때문이요, 보리 마음은 마치 명근(命根)과 같나니 보살의 대비(大悲)의 몸을 메어 지니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감로(甘露)와 같나니 죽지 않은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그물과 같나니 온갖 중생들을 널리 거두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덫의 줄과 같나니 온갖 교화해야 할 바를 섭취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낚싯밥과 같나니 깊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내오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아가타약(阿伽陀藥)과 같나니 병 없이 영원히 안온하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독약을 없애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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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나니 탐애(貪愛)의 독을 모두 녹아 쉬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주문을 잘 지니는 것 같나니 온갖 뒤바뀜의 독을 없애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질풍과 같나니 온갖 장애의 안개를 걷어 나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보물섬과 같나니 온갖 깨달음 갈래[覺分]의 보물을 출생시키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종자 성품과 같나니 온갖 희고 깨끗한 법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주택과 같나니 모든 공덕이 되는 법의 의지할 바 처소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저자와 같나니 보살인 상인이 무역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금을 단련하는 약[鍊舍藥]과 같나니 온갖 번뇌의 때를 다스리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꿀과 같나니 온갖 공덕의 맛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바른 도[正道]와 같나니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 성(城)에 들게 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좋은 그릇과 같나니 온갖 희고 깨끗한 물건을 지니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때 맞춰 오는 비와 같나니 온갖 번뇌의 티끌을 없애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로 머무르는 데가 되나니 모든 보살들이 머무는 바 처소이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바로 수기의 행[援行]이 되나니 성문의 해탈 과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깨끗한 유리(瑠璃)와 같나니 제 성품이 밝고 깨끗하여 모든 때[垢]가 없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제청보(帝靑寶)와 같나니 세간의 3승(乘)의 지혜를 벗어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경루의 북[更漏鼓]과 같나니 모든 중생들의 번뇌의 잠을 깨우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맑고 깨끗한 물과 같나니 성품은 본래 맑고 깨끗하여 때와 흐림[垢濁]이 없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마치 염부금(閻浮金)과 같나니 온갖 유위(有爲)의 선행을 압도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큰 산과 같나니 온갖 모든 세간을 뛰어 나오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로 귀의할 데가 되나니 온갖 오는 이들을 거역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바로 의리(義利)가 되나니 온갖 쇠뇌(衰惱)의 일을 없애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로 미묘한 보배가 되나니 온갖 사람의 마음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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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게 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큰 보시 모임[施會]과 같나니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충만시키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바로 높고 훌륭하나니 모든 중생들의 마음으로는 견줄 데가 없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은 마치 땅에 묻힌 광과 같나니 온갖 불법을 포섭하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인다라 그물[因陀羅網]과 같나니 번뇌의 아수라(阿修羅)를 조복하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바루나 바람[婆樓那風]과 같나니 온갖 교화해야 할 바를 움직이기 때문이요, 보리의 마음은 인다라 불[因陀羅火]과 같나니 온갖 미혹의 습기[惑習]를 태우기 때문이며, 보리의 마음은 마치 부처님의 지제(支提)와 같나니 온갖 세간이 공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보리의 마음은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라. 요점을 들어 말하면, 모두가 온갖 부처님 법과 함께하는 모든 공덕들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보리의 마음으로 인하여 온갖 보살행이 출생하고 3세의 여래는 보리의 마음으로부터 출생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면, 이미 한량없는 공덕을 출생하였고 일체지(一切智)의 도를 널리 섭취하였느니라.
  그리고 선남자야, 마치 자재왕(自在王)이라는 보배 구슬과 같다. 해와 달의 광명으로 비추는 바 처소는 온갖 재보와 의복 등의 물건이로되 그가 지니고 있는 값어치까지에는 모두 미칠 수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낸 보리의 마음의 자재왕 보배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지혜 광명의 비추는 바 처소에는 3세의 모든 하늘ㆍ사람ㆍ2승(乘)의 누(漏)와 무루(無漏)의 선(善)의 온갖 공덕이 모두가 미칠 수 없느니라.
  선남자야, 바다 속에는 해장(海藏)이라는 보배가 있어서 널리 바다 속의 장엄하는 일을 널리 나타내는데, 보살마하살의 보리의 마음 보배 역시 그와 같아서 일체지의 바다의 모든 장엄하는 일을 널리 나타내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천상의 염부단금(閻浮檀金)은 심왕(心王)인 대마니보(大摩尼寶)를 제외하고는 그 밖의 것은 미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낸 보리 마음의 염부단금 역시 그러하여서 일체지의 심왕인 대보(大寶)만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것은 미칠 것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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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지 선남자야, 보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말로 할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자못 훌륭한 공덕에 이르기까지 성취하는 것이니, 만약 어떤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면 이와 같은 훌륭한 공덕의 법을 얻게 되느니라.”
  위에서 대강 기록한 바와 같거니와, 화엄대교(華嚴大敎)의 120문(門)은 이 마음을 내는 공덕이 광대하고 그지없음을 찬탄했다.
  그러나 경 안에서 비록 모든 희귀하고 값진 보배를 인용하여 견주었다 해도 모두가 세간의 한량이 있는 물건이라 거칠음[麤]으로써 미묘함에 견주고 얕은 것으로 깊은 것에 견주었다. 어찌 출세간의 그지없는 진보와 같겠으며, 어찌 불법의 생각하기 어려운 뜻[旨]에 같겠는가? 마치 사자가 기세를 떨쳐서 위엄과 용맹이 가장 뛰어나며 코끼리 왕이 차고 밟고 함에 세력이 견줄 데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대수긴나라왕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듣건대 보살에게는 보주(寶住)라는 삼매(三昧)가 있는데, 만약 어떤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법보(法寶)의 모든 공덕의 법은 저절로 얻는다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긴나라왕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불보(佛寶)의 종성(種性)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법보의 종성과 승보(僧寶)의 종성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 하면 여든 가지의 보배를 닦아 쌓고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지의 보배 마음을 잊지 아니하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문(解脫門)을 관(觀)하는 것까지니라. 보배의 마음[寶心]은 감로의 문[甘露門]에 들기 때문에 온갖 법이 남이 없음[無生]을 관하며, 보배의 마음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기 때문에 온갖 법이 환영 같고 꿈 같고 아지랑이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물속의 달과 같은 것으로 보며, 보배의 마음은 모든 소견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인연의 법을 관찰하며, 보배의 마음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여의기 때문에 모든 변견(邊見)의 때[垢]를 여의며, 보배의 마음은 둘을 여의었기 때문에 둘이 없는 법의 문[無二法門]에 들며, 보배의 마음은 하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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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道]을 깨달았기 때문에 온갖 행(行)을 여의며, 보배의 마음은 정위(正位)에 이르기 때문에 법위(法位)를 바르게 관찰하며, 보배의 마음은 온갖 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온갖 보리(菩提)의 법을 쌓고 도우며, 보배의 마음은 온갖 불법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내지 마치 큰 바다가 뭇 법의 주인이 되어 온갖 보물을 쌓고 온갖 보물들이 모두 돌아오며 이 바다 안에서 모든 보물이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긴나라왕아, 보살이 이 보주삼매(寶住三昧)를 얻어서 모든 중생들의 주인이 되고 온갖 보배를 쌓으며 온갖 법의 보배[法寶]가 모두 다 돌아오느니라.’”
  그러므로 조사(祖師)가 이르기를 “온갖 보배 가운데서 마음의 보배[心寶]가 으뜸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법의 보배는 모두가 종경(宗鏡) 안으로 돌아오며, 법의 재산과 값진 보배로서 쌓아 모이지 아니함이 없다.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슨 인연으로 삼매를 보적(寶積)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큰 마니보(摩尼寶)를 잘 갈고 빛나게 한 뒤에 깨끗한 곳에 놓아두면 그 땅의 방소에 따라 모든 값진 보물이 그지없이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문수사리야, 내가 이 삼매에 머물면서 동쪽을 살펴보면 한량없는 아승기(阿僧祇) 세계에 현존하신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아라하삼먁삼불타(阿羅訶三藐三佛陁)를 보며, 이렇게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도 그러하며,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도 그러하여 나는 모두 현재 이 여래들이 이 삼매에 머물러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느니라. 문수사리야, 나는 이 삼매에 머물러서 법계(法界)가 아닌 한 가지 법도 보지 않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보적 삼매(寶積三昧)라 함은, 바로 일체 중생의 마음이니 한량없는 공덕의 무더기가 마치 세간의 보배가 쌓여진 것과 같다. 만약 이 한 마음인 보적 삼매에 머무를 수 있다면, 무슨 공덕의 보배인들 모르겠는가?
  그러므로 시방의 부처 보배[佛寶]가 남김없이 널리 비춤을 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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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기를 “법계가 아닌 한 가지 법도 보지 않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 가지 가운데서 마음만[唯心]이 귀하니, 마치 금시조(金翅鳥)가 죽은 뒤에는 뼈와 살은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마음만이 남을 뿐인데, 난타 용왕(難陀龍王)은 이 새의 마음을 가져다 명주(明珠)로 삼고 전륜왕(轉輪王)은 이것을 가져다 여의주(如意珠)로 삼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의 마음 역시 그와 같아서 몸은 비록 소멸되나 참 마음은 무너지지 아니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마치 겁소화(劫燒火)가 허공을 태우지 아니함과 같다”고 했고, 또 조사가 이르기를 “모든 뼈는 비록 무너져 흩어지나 하나의 물건[一物]은 길이길이 신령하다”라고 했다.
  만약 이 항상 머무는 참 마음을 깨달아 알면, 바로 여의주 보배를 얻게 된 것과 같다. 만약 그를 얻게 되면 널리 법계를 구제하고, 그를 쓰게 되면 널리 시방을 윤택하게 하리라.
  이 모든 대승경(大乘經) 중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함께 이 보리의 마음을 찬양하신 것이 끝없는 허공의 조그마한 부분조차도 말하지 못한 것과 같거늘, 지위가 낮고 지혜가 얕은 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열반교의(涅槃敎義)를 해석하며 말하기를 “갖가지 명목(名目)이 바로 한 마음의 법일 뿐이다. 이 법이 바로 부처의 스승이요, 모든 보살의 어머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조차도 말로써는 해설할 수 없거늘, 범부 천(千) 명의 혀로 어찌 알아서 칭찬하겠으며 이승(二乘) 백(百) 명의 장님이 어찌 가지고 놀아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믿음[信]을 열어 내어 공덕의 그지없음에 드는 것을 논하는 것이니, 만약 보고 들을 뿐 설령 믿고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히려 선근(善根)을 심는 것이요, 헛되이 지나친 이는 없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셨다.
  “불자(佛子)야, 마치 장부가 조그마한 금강(金剛)을 먹어도 끝내 소화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몸을 뚫고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금강은 육신과는 섞여서 같이 머물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에게 심는 조그마한 선근도 그러하여서 반드시 온갖 유위(有爲)의 마지막인 지혜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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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도달한다. 왜냐 하면 이 조그마한 선근조차도 유위의 모든 행인 번뇌와는 함께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야, 가령 마른 풀을 수미산만큼 쌓아 놓았다 하여도 불 속에 던지면 겨자씨만한 것도 모두 타버린다. 왜냐 하면 불이 능히 태우기 때문이다. 여래의 처소에서 심은 조그마한 선근도 역시 그러하여 반드시 온갖 번뇌를 다 태워버리고 마지막에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는다. 왜냐 하면 이 조그마한 선근의 성품은 구경이기 때문이다.
  불자야, 마치 설산(雪山)에 있는 선견(善見)이라는 약왕나무[藥王樹]를, 보는 이는 눈이 청정하게 되고 듣는 이는 귀가 청정하게 되며 맡는 이는 코가 청정하게 되고 맛보는 이는 혀가 청정하게 되고 닿는 이는 몸이 청정하게 되며, 어떠한 중생이건 그 땅의 흙을 가져 와도 병을 없애는 이익이 되는 것과 같다.
  불자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인 위없는 약왕(藥王)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것을 지어서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나니, 여래의 색신(色身)을 보게 되면 눈이 청정하게 되고 여래의 명호를 듣게 되면 귀가 청정하게 되며 여래의 계향(戒香)을 맡게 되면 코가 청정하게 되고 여래의 법 맛[法味]을 맛보게 되면 혀가 청정하게 되어 광장설(廣長舌)을 갖추어서 언어의 법을 알며 여래의 광명을 접촉하면 몸이 청정하게 되어 마침내 위없는 법신(法身)을 얻으며 여래를 생각하면 염불삼매(念佛三昧)가 청정하게 되고 어떠한 중생이건 여래가 지나셨던 토지거나 탑묘에 공양하면 역시 선근이 갖추어져서 온갖 번뇌의 우환이 없어지고 성현의 즐거움을 얻는다.
  불자야, 나 이제 너에게 말하리라. 설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듣고 하였으나 업장(業障)이 가려서 믿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선근을 심는 것이요, 헛되이 지나친 이가 없으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열반에 들게 된다.
  불자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하리니, 여래에게서 보고 듣고 친근하면서 심게 된 선근은 모두가 온갖 착하지 않은 법은 여의고 착한 법을 완전히 갖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보거나 듣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모두가 마지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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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없는 선근을 얻는 것이니, 뚜렷이 깨달은 부처님과 넓은 문[普門]의 가르침[法]을 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뚜렷하기 때문에 모자람이 없고 가르침이 넓기 때문에 저절로 구족하거늘 어찌 마지막이 아니겠느냐?
  그런 까닭에 『���화엄경(華嚴經)』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발심한 공덕의 분량은/억 겁 동안 찬양해도 다할 수 없나니/모든 여래와 독각과 성문의/안락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 시방 국토의 모든 중생들에게/한량없는 겁 동안 모두 안락을 베풀고/5계(戒)와 10선(善)과 4선(禪)이며 4등지(等持)의/모든 선정[定]의 것 지니도록 권하며,/ 다시 많은 겁 동안 안락을 베풀고/모든 번뇌 끊어서 아라한이 되게 하는/저 여러 복 무더기 비록 한량없으나/발심의 공덕과는 비교조차 안 되네./ 억의 대중 가르쳐서 연각(緣覺)이 되게 하고/다툼 없는 행[無諍行]과 미묘한 도(道) 얻게 하는/그것들로써 보리의 마음 비교하면/산수(算數)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네./ 한 생각에 티끌 수의 세계 능히 지내고/이렇게 한량없는 겁을 지내며/이런 모든 세계의 수(數) 헤아릴 수 있어도/발심의 공덕은 알지 못하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말하는 바 갖가지의 여러 가지 비유로도/보리 마음에는 미칠 수 없나니/3세 동안의 인간 안의 어른께서/모두가 발심에서 나게 되셨느니라.”
  『화엄지귀(華嚴指歸)』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열 가지 이익[益]이 있음을 밝혔다.
  첫째는 보고 듣는 이익[見聞益]이다. 이것은 이 여래를 보고 듣는 것과 이 분이 계신 법에 심는 선근은 금강종성[金剛種]을 이루어 파괴할 수 없고 반드시 성불하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성기품(性起品)」에서 말하기를 ‘불자야, 믿지 않은 삿된 소견을 지닌 중생이 부처님을 보고 듣는다면, 그 중생들은 보고 듣는 가운데서 선근을 심게 되며 과보가 헛되지 아니하여 마지막에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둘째는 발심의 이익[發心益]이다. 신위(信位)가 원만해지면 저 부처의 생각과 일치한 이런 큰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 마음이 바로 보현의 법[普賢法]에 속한다. 그러므로 융통(融通)하면 곧 그지없는 때와 처소에 두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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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法界)가 평등하다. 이미 그 소속에 들면 그것은 바로 온전한 모든 계위[位]여서 모두 다 원만하여진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초발심(初發心)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모두 3세의 여래와 평등하다’라고 했다.
  셋째는 행을 일으키는 이익[起行益]이다. 하나의 보현행(普賢行)을 일으킬 때에, 곧 온갖 행(行)과 온갖 계위[位]와 온갖 덕(德)과 온갖 법(法)과 온갖 처소[處]와 온갖 때[時]와 온갖 원인[因]과 온갖 결과[果]에 두루하여 법계를 다하고 온갖 것을 두루 갖추는 것이니, 마치 제석의 보배 그물[帝網]과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이 이 법을 듣게 되면, 적은 방편으로써도 빨리 보리(菩提)를 얻는다’고 했다.
  넷째는 계위를 관섭(綰攝)하는 이익[攝位益]이다. 신(信) 등의 5위(位)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하나의 계위 안에 온갖 계위를 관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문이 있다. 첫 번째는 전위상시문(全位相是門)이니, 곧 온갖 계위가 바로 한 계위이기 때문에 10신(信)이 원만해진 곳에서 이내 부처가 된다. 두 번째는 제위상자문(諸位相資門)이니, 한 계위 안에 온갖 계위를 갖추는 것이 마치 10신 안에 10주(住)로부터 10지(地)까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한자리[地]에 머무르면 널리 모든 자리의 공덕을 관섭하나니 마치 10현문(玄門)과 같다’라고 했다.
  다섯째는 속히 증득하는 이익[速證益]이다. 이 넓은 문[普門]에 의하여 하나가 증득되면 온갖 것이 증득되는 것이니, 마치 경에 밝힌 ‘지옥의 중생들이 빛을 받아 고통이 없어지고 겨우 지옥문을 나서자마자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고 이 넓은 법[普法]을 듣자마자 이내 10지(地)를 얻는다’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법의 깊고도 이익 됨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는 장애를 없애는 이익[滅障益]이다. 이 넓은 법에 의하여 역시 하나가 끊어지면 온갖 것이 끊어지는 것이, 마치 앞의 도솔천자가 자신만이 10지를 단박에 얻을 뿐만 아니라 역시 털구멍의 향훈(香熏)을 중생들에게 온전히 보이어 한량없는 번뇌를 단박에 없애는 것과 같다. 다 같이 이것은 넓은 법의 뛰어난 이익이다.
  일곱째는 널리 이익 되게 하는 것[轉利益]이다. 넓은 행[普行]이 또한 이루어지면 곧 단박에 그지없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여서 모두가 역시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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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10지의 법을 얻게 되는 것이, 마치 앞의 도솔천자가 10지를 얻고 나서 털구멍 속에서 일산 구름[蓋雲]을 내어 부처님께 공양한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이 일산 구름을 보면, 그 중생들은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전륜왕(轉輪王)에게서 심은 선근과 같다’라고 했다.
  여덟째는 닦아 나아가는 이익[造修益]이다. 마치 선재(善財)가 이 넓은 법에 의하여 하나를 얻자 온갖 것을 얻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니, 전생에도 일찍이 넓은 법을 보고 듣고 하여 금강의 종성을 이루었고 드디어 금생에는 단박에 해행(解行)을 이루게 되었다.
  아홉째는 단박에 얻는 이익[頓得益]이다. 마치 경에서 밝힌 ‘6천의 비구가 여래를 단박에 뵙자마자 10안(眼)의 경계를 얻었으며, 기원림(祇洹林) 안의 말로 할 수 없는 티끌 수 같은 보살들이 단박에 그지없는 자재한 법 바다[自在法海]를 얻은 것’과 같다.
  열째는 성품에 일치한 이익[稱性益]이다. 이 넓은 법에 의지하는 온갖 중생은 모두가 다 그 본래 성품에 일치되어 불과의 바다[佛果海] 안에 있지 아니함이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은 예부터 본래 있는 이익이니, 마치 경에서 밝힌 ‘부처 몸 안에서 모든 중생을 보면, 이미 부처가 되었고 이미 열반한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종경록』 안에서는 다 같이 이는 성품에 일치시켜서 말했고 근본에 맞추어서 설명했다.
  인(因)과 과(果)는 모두 실제요, 이(理)와 사(事)가 다 함께 진실이다. 이 원만한 종(宗)과 넓은 문의 법(法)으로써 넓은 법을 보기 때문에 보안(普眼)이라 한다.
  넓은 법[普法]이라 함은, 하나가 온갖 것을 갖추고 하나하나의 일치된 성품이 동시에 두루 갖추어져서 눈[眼] 밖에는 법이 없으므로 보안이라 하며 ‘보안경(普眼經)’이라고도 하는데, 마침내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가 똑같은 성품이 얻어지게 한다. 이 성품이 그지없다면 이익되는 바가 어찌 다하겠는가? 그러므로 그지없는 것을 총괄하고 온갖 것을 통한다. 앞을 포섭하면 뒤도 포섭되는 것은 마치 첫 걸음을 내어 디딜 때 이내 천 리의 길에 도달된 것과 같고, 하나를 얻으면 나머지 것도 얻게 되는 것은 마치 하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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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을 보고 이내 온갖 물속의 달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가르침[敎]이 있으면 그 계위가 있고, 법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이 있다. 마치 지옥의 중생은 보고 듣는 것이 종자(種子)가 되어, 8난(難) 안에 처하면서 10지의 계위에 뛰어오르며, 선재동자(善財童子)는 행해(行解)가 몸에 있어서 한 생[一生] 동안에 많은 겁의 과보가 원만해진 것과 같다.
  글과 이치에 근거가 있어서 과보는 헛된 것이 아니므로, 뒷날의 어진 이들에게 보여서 똑같이 이 종자가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여래의 장경(藏經) 안에서 공덕을 비교하고 헤아려 이 경을 받아 지니는 것이니, 과거의 항하 모래알만큼 많이 계신 부처님들께 공양하면서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7보로 된 높이 10유순(由旬)의 대(臺)를 만들되 날마다 이렇게 하여 50의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7보의 대를 만들어서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여래를 공양한다 하여도, 어떤 사람이 보리(菩提)를 좋아하면서 이 경을 받아 지니는 것보다는 못하리니, 내지 산수(算數)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해석하여 보자.
  7보는 바로 한량이 있는 재물이요, 공양은 유위(有爲)의 복이다. 만약 이 경을 지니면 1승(乘)의 항상 머무름[常住]의 보배이다. 진여(眞如)는 그지없는 복이라 법계(法界)와 같은 것으로 작은 티끌에 견주는 것이거늘 어찌 견주면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문] 이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내는 데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떠한 보리에 의하여 내는 마음이 이러한 공덕을 얻게 되는가?
  [답] 만약 횡적(橫的)으로 말하면 근기[根]에 따라 증득할 바 네 가지의 보리가 있고 수적(竪的)으로 말하면 처음ㆍ중간ㆍ나중에 의한 세 가지 보리가 있다.
  또 내는 것[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으켜 냄[起發]과 둘째는 열어 냄[開發]의 것이다. 일으켜 냄은 바로 1승(乘) 중 10신(信)의 첫머리요, 열어 냄은 1승 중 10주의 첫째이다.
  지금 찬양한 것은 바로 네 가지 중의 상상근(上上根)에 의한 부처의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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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종경(宗鏡)에서 칭찬한 것은 대부분이 원만한 믿음을 일으켜 냄의 내는 것이요, 『���화엄경』에서 인용하는 것은 혹은 초주(初住)를 열어 냄의 내는 것이다.
  또 이제 낸다[發]고 말하는 것은 사람에 의하지 않고 법에 의하며 단박에 자기 마음을 깨쳐서 만행(萬行)이 원만해지기 때문에 낸다고 말한다.
  『화엄론(華嚴論)』에서는 말하였다.
  “발심(發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랜 동안의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고통을 싫어하여서 내는 발심이니, 얻음이 있는[有得] 3승(乘)이다. 1승의 과위[果]는 스스로가 깨달은 거룩한 지혜[自覺聖智]라 하고, 또한 불지(佛智)ㆍ자연지(自然智)ㆍ무사지(無師智)라고도 한다.
  둘째는 선각자(先覺者)의 권유에 의하여 고통의 근본을 알게 되어서야 내는 발심이다.”
  발심하는 것에는 이 두 가지가 있기는 하다. 만약 반드시 먼저의 부처님에 의하여 발심한다고 하면, 바로 항상하다[常]는 허물이 있으니, 곧 외도의 상견(常見)과 같다.
  바로 선각자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는 것인가? 차츰차츰 서로가 이어받았다면 상견을 여의지 못한다. 만약 옛날에 항상하신 부처님께서 계셨고 차츰차츰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면 곧 옛 부처님 자체는 스스로 진(眞)이어서 망(妄)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 곧 그 옛 자취를 밟을 수가 없고 진 자체가 항상 진인지라 진으로써 생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생사는 항상하는 생사일 것이요,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항상하는 부처님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이 결정코 생사가 있다 하면, 생사는 스스로 항상하는 생사라 진(眞)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바로 단견(斷見)이다.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잘못이어서 단견과 상견을 여의지 못했다.
  온갖 중생의 생사는 성품이 없어서[無性]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인데, 멋대로 생사가 본래 생사가 아니라고 헤아린다. 모든 부처도 본래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실은 보리도 없고 열반도 없는 것인데, 중생들이 망령되이 모든 부처에는 보리와 열반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중생이 이런 줄을 알 수 있으면, 발심했다 하고 모든 부처라 하고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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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見道)라 하며, 온갖 중생들을 깨우칠 수 있으면 바로 무명(無明)을 통달한 이라고 한다.
  무명은 본래가 없고 모든 부처도 또한 없다는 것을 알면, 각자(覺者)라고 한다. 다만 의지함[依]이 없고 머무름[住]이 없고 체(體)가 없고 성품[性]이 없는 미묘한 지혜[妙智]가 메아리에 따라 응대하고 색신(色身)에 나타날 뿐이다.
  이 도리로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면, 대비(大悲)라고 한다. 때문에 얻음[得]이 있고 증득[證]이 있으며 기쁨[忻]이 있고 싫음[厭]이 있으며 취함[取]이 있고 버림[捨]이 있으며 예전[古]이 있고 지금[今]이 있으며 진짜[眞]가 있고 가짜[假]가 있는 보리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내는 보리의 마음이라야 오랜 세월 동안 무명에 가리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선재 동자가 덕운(德雲) 비구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벌써 문수사리(文殊師利)의 처소에서 보리 마음을 냈는지라, 보리는 증득하거나 닦을 것이 없고 구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보살의 방편과 삼매의 가행(加行)을 구할 뿐이다.
  그 보리의 마음이 자연히 명명백백하여 때[垢]가 없는 것이, 마치 공중에 구름이 있다가 구름이 없어지면 그 허공은 본연의 허공인 것과 같아서 다시는 허공을 구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다만 보살이 삼매를 닦아 관조(觀照)하면서 집착하는 장애를 다스린다 함을 밝힐 뿐이다.
  그러나 보리의 마음은 닦거나 짓거나 머무르거나 없애거나 하는 체(體)가 없어서 범부에 있어서도 줄어지지 아니하고 성인에 있어어도 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제 묘봉산(妙峰山)으로써 지관(止觀)의 두 문과 7보리(菩提)의 돕고 드러내는 방편을 상징했다.
  보리의 마음은 저절로 명백하며, 보리에 이르기까지 명백하다. 곧 보살행(菩薩行)의 모든 삼매가 본래 보리요, 다시 별도의 보리가 있어서 저절로 명백한 것이 아니다. 보살이 세간에 있으면서 모든 만행(萬行)을 닦되 세간의 만행에서 보리와 열반에 이르기까지 성품 스스로가 여읜 까닭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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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법을 가지고 미혹한 무리들을 교화하되 이것을 알지 못하면 성품이 공(空)한 때 없는 지혜[無垢智]를 통달하게 하며, 모든 업(業)을 깨끗하게 하여 고통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대비(大悲)라고 한다. 마치 변화로 된 사람이 요술쟁이를 교화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써 업(業)을 관찰하여 때[時]를 따르고 근기를 따라서 시방(十方)을 평등하게 이롭게 하고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이 없는 지혜와 환술[智幻]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보살의 온갖 행을 구할 뿐이다. 행(行)이 곧 보리요 온갖 것은 생멸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나는 이미 위없는 보리 마음을 낸 사람이다”라고 했다. 믿는 마음의 보리가 비록 삼매와 가행(加行)을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이미 닦을 바가 없고 구할 바가 없는 까닭을 알았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보살행을 구하는 이는 방편과 삼매의 상인(相印)에 밝아야 비로소 행(行)과 보리가 사실대로 둘이 없음이 밝아진다. 이 안에서는 말로는 할 수 없다.
  모든 행은 무상하여 이것이 나는 것이요,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경에서 말하기를 “온갖 법은 나지 않고 모든 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이러함을 알면 모든 부처가 그 앞에 나타난다”라고 했다. 이것은 보리 마음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얻음이 없고 의지함이 없음을 알 게 한다. 보살행을 구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방편을 나타낸 것이니, 나타내는 때에는 이(理)와 행(行)이 둘이 없다.
  그런 까닭에 반야회(般若會) 중에서 사리불(舍利弗)이 생각하기를 ‘수보리(須菩提)는 무슨 법문에 의지하기에 반야를 잘 말하는 것일까?’라고 하자, 수보리가 말하기를 “나는 의지함이 없기[無依]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부처님 제자들이여, 만약 온갖 것에서 의지함이 없으면 모두가 본래 그렇게 되는 것이요 내가 능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묘선당(妙善堂) 안에 하늘 북[天鼓]이 설법하는 것을 무의인법문(無依印法門)이라고 일컫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 게송에 말하기를 “마음 알고 근본 통하면 여여한 부처[如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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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요/마침내 의지함 없는 자재[自在)한 사람일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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