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7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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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물을 진심(眞心)에다 비유하는 것은 물이 지닌 열 가지 이치가 진성(眞性)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 물의 체(體)가 맑고 깨끗한 것은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에 비유한다. 둘째 진흙이 들어가 흐리게 된 것은 청정한 마음은 물든 것이 아닌데 물이 들음[染]에 비유한다. 셋째 비록 흐리기는 하더라도 깨끗한 성품을 잃지 않는 것은 깨끗한 마음이 물들기는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것에 비유한다. 넷째 만약 진흙이 맑게 되면 깨끗함이 나타나는 것은 진심의 미혹이 다하면 성품이 나타나는 것에 비유한다. 다섯째 찬 것을 만나면 얼음이 되어서 딱딱한 작용[用]이 있는 것은 여래장과 무명이 합하면 본식(本識)의 작용을 이루는 것에 비유한다. 여섯째 비록 딱딱한 작용을 이룬다 해도 축축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은 사에 즉하되[卽事] 항상 진(眞)인 것에 비유한다. 일곱째 따뜻하면 녹아서 축축한 물로 되는 것은 본식이 도로 깨끗해짐에 비유한다. 여덟째 바람 따라 물결이 움직이면 고요한 성품으로 고쳐지지 않는 것은 여래장이 무명의 바람을 따라 파랑이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생멸하지 않은 성품은 변하지 아니함에 비유한다. 아홉째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밀고 끌고 하며 흘러들면서도 제 성품은 동요하지 않은 것은 진심이 연(緣)을 따라 흘러들면서도 성품은 언제나 깊고 고요함에 비유한다. 열째 그릇의 네모지고 둥근 것에 따르면서도 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은 진성(眞性)이 모든 유위법에 두루 하면서도 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에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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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서(書)에서 이르기를 “으뜸가는 덕[上德]은 물과 같나니, 네모지고 둥근 것은 그릇에 맡기고 굽고 곧은 것은 형상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소승의 『구사론(俱舍論)』 같은 데서도 역시 모든 유위법을 설명하면서, “존재[有]는 찰나 동안에 다한다”고 했다. 무엇으로써 존재를 알게 되느냐 하면, 뒤의 존재[後有]가 다하기 때문이다. 이미 뒤의 존재가 다한다면, 앞의 존재(前有)도 소멸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기를 “만약 이곳에서 났다가 곧 이 곳에서 없어진다 하면, 여기서부터 다른 곳으로 옮아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만약 여기서 나고 여기서 없어지며 다른 처소에 이르지 않는다면, 옮아가지 않는다[不遷]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법의 체[法體]가 있어서 이것이 나고 이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대승(大乘)은 아니다.
  대승의 법이란 연으로 나는 것[緣生]은 성품이 없는지라[無性], 나는 것이 곧 나는 것이 아니요. 없어지는 것이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옮겨가는 것이 곧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치야말로 매우 차이가 난다.
  또 『중론소(中論疏)』에서 이르기를 “항상함과 무상함의 문[常無常門]이라 함은, 항상함은 곧 사람과 하늘[人天]의 자리가 정하여졌기 때문에 가고 오는 것이 없고, 무상함은 바로 6취(趣)여서 저마다 하나의 형상이 다하면 역시 왕래가 없다. 항상함은 곧 응연(凝然)하여 동요하지 아니하고, 무상함은 생각생각마다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거늘 누구로 하여금 왕래하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항상하거나 항상함이 없는 법은 다 같이 서로가 이르지 아니하고 모두가 가고 오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조론(肇論)』에서 이르기를 “사람들이 이른바 움직임[動]이라 함은 옛 물건이 지금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면서 고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거니와, 나의 이른바 고요함[靜]이란 역시 옛 물건이 지금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고요하면서 움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움직이면서 고요한 것이 아님은 오지 아니함이요. 고요하면서 움직인 것이 아님은 그것이 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어진 것은 일찍이 다르지 않았고, 보는 것은 일찍이 같지 않다. 그것을 거스르면 이른바 막힘[塞]이요. 그것을 쫓으면 이른바 통함[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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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참으로 그 도(道)를 얻기만 한다면 다시 무엇이 걸리겠는가?
  슬프다. 사람들의 생각이 미숙한 지도 오래로구나. 눈으로 진(眞)을 마주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이미 옛날 물건이 오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지금의 물건이 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의 물건이 이미 오지 않았는데 지금의 물건이 어찌 갈 수 있겠는가?
  왜냐 하면 옛 물건을 옛날에서 구한다면 옛날에는 일찍이 없지 않았거니와 옛날 물건을 지금에서 구한다면 지금에는 일찍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에 있지 않다면 물건이 오지 않았음을 밝히는 것이요. 옛날에는 일찍이 없지 않았다면 본래 물건은 가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덮어놓고 지금 것을 구하여도 지금 역시 가지 않으리니, 이것이야말로 옛 물건을 스스로 옛날에 있었는지라 지금으로부터 옛날에로 가지 아니했으며, 지금의 물건은 스스로 지금에 있는지라 옛날에서 지금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회(回)야, 팔이 새로 교차하는 것을 보는 순간조차도 옛것이 아니니라’고 했다. 이렇다면 바로 물건이 서로 왕래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미 가고 오는 미미한 조짐조차 없거늘, 또 무슨 물건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회야, 팔이 새로 교차하는 것을 보는 순간조차도 옛것이 아니니라’라고 함은, 공자(孔子)가 안회(顔回)에게 말하기를 ‘나와 너의 일생 동안에 팔 한번 교차한 것도 벌써 사라진 것이거늘, 어찌 머리가 허옇게 센 연후에 변할 것을 기다리겠느냐’라고 했다. 그 뜻은 물건과 물건은 언제나 저절로 새롭고 생각생각마다 서로가 이르지 아니함을 밝힌 것으로서 ‘교차하는 동안조차도 오히려 기다리지 않고 벌써 앞 사람을 잃었거늘, 어찌 늙게 된 연후에 변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라는 것이다.
  또 앞의 생각이 벌써 옛것이요, 뒤의 생각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온 종일서로가 만나도 항상 이것은 새로운 사람이므로, ‘팔이 새로 교차하는 것을 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사람으로 보는 것도 교차하는 그 동안일 뿐이며, 벌써 이것은 뒤의 생각인 새로운 사람이요, 앞에 생각하고 있던 때가 아니다. 그러므로 ‘옛것이 아니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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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앞의 생각이 벌써 옛것이라면, 뒤의 생각은 벌써 새로운 것이다. 새것이 옛것에 이르지 아니하고 옛것이 새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앞뒤의 것이 서로 이르게 되지 않으면, 옮아가지 아니한다.
  또 비록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손 치더라도 손을 들고 교차하는 그 순간조차도 벌써 지나간 것이다. 이것은 몹시 빠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물건은 저절로 옛날에 있었고 지금의 물건은 스스로 오늘날에 있다. 마치 아름답던 얼굴은 저절로 어린아이 적의 몸에 있었고, 허옇게 센 머리는 스스로 늙은 나이의 몸에 있게 됨과 같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젊었을 때와 장년의 때가 같은 몸이요, 백 살이 하나의 바탕[質]이라 말하나, 한갓 해[年]가 간 것만을 알고 형상이 따라 변함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범지(梵志)가 출가하였다가 허옇게 센 머리로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이 보고 말하였다.
  ‘옛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구려.’
  그러자 범지가 말하였다.
  ‘내가 옛 사람 같아도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며 그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힘센 이가 메고 빨리 가는데도 몽매한 이는 깨닫지 못한다’라고 하는 그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라고 한 것이다.
  ‘내가 옛 사람과 비슷하나’에서 유(猶)는 비슷다는 것이니, ‘내가 비록 이 몸이 옛 사람과 같기는 하다. 그러나 어린아이 얼굴은 저절로 옛날에 있었고 지금의 쇠하고 늙은 모습은 스스로 지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한갓 해가 간 것만을 알았고, 형상이 따라 변함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세월이 옛날에 있었음을 아나, 어찌 당시의 모습을 깨달으랴. 역시 해를 따르되 옛적에 있었다면 어린아이는 늙은 몸까지 이르지 아니하고 늙은이는 어린아이에 이르지 아니한다.
  찰나 동안도 서로가 모르며 생각생각마다 서로가 기다리지 않거늘, 어찌 젊음과 장년이 같은 몸이며 백 살이 하나의 바탕일 수 있겠는가?
  또 세월이 가면 형상 역시 간다. 이것이 바로 옮아간다는 이치로서, 곧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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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아간다는 것 중에는 옮아가지 않는다[不遷]는 것이 있다. 지나간 해는 지나간 때에 있었고 옛날의 형상은 옛날에 있었으니, 이것이 옮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옛날의 사람이 오늘날까지 옮아왔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미혹된 것이다.
  또 옛날은 저절로 옛날에 있었거늘 어찌하여 지금으로 옮아와야 하며, 지금은 스스로 지금에 있거늘 어찌하여 옛날로 옮아가야 하는가.
  이 때문에 논(論)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지나갔다[往]고 말하나 반드시는 지나가지 않아서 예와 이제가 언제나 있으니 그것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요. 떠나갔다[去]고 일컬으나 반드시는 떠나가지 않아서 지금으로부터 옛적으로 이르지 않으니 그것은 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경(經)에서 ‘옮아간다’고 한 말은 반드시 옮아갔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옛날은 옛날에 있고 지금은 지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다[無常]는 말은 사람들의 항상하다[常]는 집착을 막는 것이요, 항상 머무른다[常住]는 말은 사람들의 아주 없다[斷]는 집착을 막는 것이다. 말은 비록 어긋난다 해도 도리는 다르지 않으며, 말은 비록 반대되는 듯하더라도 진리는 옮아가지 아니한다. 따라서 방편으로 있다ㆍ없다는 말을 따라서 마음이 옮아가지 않는 성품을 미혹해서는 안 된다.
  또 풀이하면 범지의 머리가 허옇게 세어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은 젊음과 장년이 똑같은 몸이라 여겼기 때문에 ‘옛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려’라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힘센 이[有力者]’라 함은, 바로 세 가지 감춤[三藏] 등의 일로서 무상(無常)이 가만가만 움직이면서 ‘힘센 이가 메고 밤에 빨리 간다’는 것이다.
  팔이 교차될 때 항상 새 것이어서 생각생각마다 옛것을 버리는데도 늘 보면서 그것에 어두우므로 ‘견고하다’고 말하나니, 이웃 사람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힘이 세다’라고 함은 바로 무상함의 큰 힘이다. 세간에서는 아직껏 무상함에 삼킴을 당하지 않은 법이란 하나도 없다.
  그 때문에 이르기를 “장생(壯生)이 산을 감춘다[藏山]고 한 것과 중니(仲尼)가 시내에 다달아서[臨川] 말을 한 것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을 멈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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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탄식한 것이다. 어찌 지금을 밀쳐서 가게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장자(壯子)의 본뜻은 머무르지 아니하는[不住] 법을 설명한 것이다. 생각생각마다 항상 새 것이요, 물건물건이 저마다 머무른다. 저마다 머무르며 서로 인(因)이 되면서도 서로가 이르지 아니하니 곧 옮아가지 아니함이다. 미혹된 이라면 무상함은 머무르지 않는지라 새록새록 나고 없어진다고 여기면서 그를 옮아감[遷]이라 말하나, 지혜로운 이라면 성품은 공하여 앎이 없고 생각생각이 남이 없는[無生] 줄 깨달아 알아서 그를 옮아가지 않음[不遷]이라 말한다.
  장자의 세 가지 감춤이 있다. 산을 못에다 감추고, 배[舟]를 골짜기에다 감추며, 천하(天下)를 천하에다 감춘다는 것이니, 그것을 견고하다 함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무상함이 한밤중에 그를 메고 빨리 가는데도 몽매한 이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감춤 중에 사람을 집에다 감추고 물건을 그릇에 다 감추는 것은 작은 감춤[小藏]이요,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은 큰 감춤[大藏]이다. 천하를 천하에다 감추는 이것은 감출 것이 없다. 그러나 크고 작은 것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감추는 것이 모두가 마땅함을 얻었다. 오히려 생각생각이 옮아 흐르고 새록새록 바뀌면서 변하는데, 이것으로 변화하는 길은 도망할 만한 곳이 없음을 알 것이다. 천하를 천하에다 감춘다는 것은, 어찌 그것을 감추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감출 것이 없다.
  공자가 시내 위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도다.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라고 했는데, 서(逝)라 함은 간다는 것이다. 쿨쿨거리며 빨리 흐르면서 잠깐 동안도 쉬는 일이 없이 밤낮 언제나 그러하고 있으므로 역시 세상 사람들의 깨닫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다.
  때문에 이르기를 “이것은 모두가 지나가는 일을 멈추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탄식한 것이다. 어찌 지금을 밀쳐서 가게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라고 했다.
  이것은 장자와 공자가 다 같이 가는 것을 멈추기 어렵다는 탄식으로서 모두가 덧없이 떠나감을 설명한 것이다. 어찌 오늘날의 물건을 밀어서 옛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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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랴? 만약 오늘이 옛날로 가지 않으면 바로 오늘은 저절로 지금에 있고 옛날은 옛적에 있다. 그렇다면 이제와 옛날이 환히 나타나서 다 같이 옮겨가지 아니한다.
  때문에 이르기를 “왜냐 하면 사람들은 옛것을 현재에서 구하면서 그것을 머무르지 아니한다 말하나, 나는 지금을 옛날에서 구해보고 그것은 가지 않았음을 안다. 지금이 만약 옛날에 이른다면 옛날에 지금이 있어야 하고, 옛날이 만약 지금에 이른다 하면 지금에 옛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에 옛날이 없는지라 오지 않았음을 알겠고, 옛날에 지금이 없는지라 가지 않았음을 알겠다. 만약 옛날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고 지금이 옛날에 이르지 않았다면 일이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르거니 무슨 물건이 있어서 가고 올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사람 목숨은 머무르지 않아서 산 물[山水]보다 더하다”라고 하셨으니, 무상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서져 무너짐의 무상함[敗壞無常]이요, 둘째는 생각생각마다 무상함[念念無常]이다. 사람들은 다만 부서져 없어지는 무상함만을 알면서 생각생각마다 무상한 줄은 깨닫지 못한다.
  논(論)에 이르기를 “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것 같고, 가면서도 멈춘 것 같다”라고 했고, 경에서는 “무상함의 빠름은 마치 흘러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치에 의거한다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무상함은 앞과 뒤가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고요한 것과 같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생각생각이 사라져 가고 옛날과 지금이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르면서 그 곳[當處]은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에 멈춘 것과 같다.
  또 비록 옛날과 지금이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르면서 그곳은 스스로 고요하해도 완연(宛然)히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아니하고 앞뒤가 서로 계속된다. 그렇다면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아니하며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아서 물질의 성품의 근원을 보게 된다.
  고덕(古德)이 물었다.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른다 하면, 마치 소승(小乘)이 모든 법에 저마다 제 성품[自性]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또 누더기를 걸친 범지[納依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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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志]가 말한 ‘온갖 중생은 그 성품이 저마다 다르다’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답하였다.
  “가고 옴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오고 감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런 까닭에 체(體)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때문에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른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결정적인 이치는 아니다. 그렇다면 성품 없음[無性]으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요. 외도와 이승(二乘)이 결정코 제 성품이 있어서 여기서 저기로 간다고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만약 결정된 성품이 오고 감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역시 저마다 성품대로 머무른다고 설명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논에 이르기를 “간다고 말하나 반드시 가지 않는다 함은 사람들이 항상하다고 생각함을 막는 것이요, 머문다고 일컬으나 반드시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사람들이 머문다고 하는 바를 풀어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유담(劉湛)의 주(注)에 이르기를 “장자가 산을 감추고 중니가 시내에 다다른 것에서 장자의 뜻은 앞산은 뒷산이 아니란 것을 밝혔고, 부자(夫子)의 뜻은 앞 물은 뒷물이 아니란 것을 밝혔다”고 했다.
  ‘한밤중에 힘센 이가 메고 빨리 간다’ 함은, 곧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네 때로서 생각생각마다 옮아 흐르면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 밖에서 법을 취하고 허망한 꿈에서 보는 바를 뜻[情]에 가고 오고 한다 하면, 생각생각마다 윤회하고 마음은 경계를 따라 바뀌어서 오히려 무상함의 거친 모양[麤相]도 깨닫지 못하거늘, 어찌 옮아가지 않는 비밀의 뜻[密旨]을 깨칠 수 있겠는가?
  만약 법은 바로 마음이라 보고 연(緣)을 따르되 성품을 깨달아 알 수 있으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법이란 하나도 없고 안으로부터 나는 법이란 하나도 없으며, 화합하여 있는 법이란 하나도 없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란 하나도 없다.
  이와 같다면 오히려 하나의 작은 티끌만큼의 머무르는 모양도 보지 않을 텐데 어찌 온갖 법이 오고 감을 보겠는가? 이야말로 철저하게 종(宗)에 밝고 투철하게 견성(見性)하여야 마음과 마음이 항상 도(道)에 합치되고 생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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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마다 종(宗)을 어기지 아니하며, 가고 머무름이 같은 때요 예와 이제가 하나로 통하리라.
  때문에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내가 오랜 옛적을 자세히 살펴보매, 마치 오늘날과 같았다”고 하셨고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법은 오고 감이 없나니, 언제나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만약 이 머무는 바 없는 참된 마음과 변하고 달라지지 않는 묘한 성품을 깨달아 알면, 마침내 옮아가지 않음[不邊]이 분명해진다.
  이상에서 논한 것 가운데서, 인용한 안팎의 경전으로 세간 모양의 예와 이제를 빌리어 옮겨가지 않음에 붙여 밝히면서 같이 진실에 들었다.
  그러므로 때[時]는 법으로 인하여 서고 법은 스스로 본래 없다. 소의(所依)의 법체(法體)가 오히려 공(空)이거니 능의(能依)의 고금(古今)이 어찌 있겠는가?
  만약 방우(方遇)를 빌려 법을 바로잡거나 손가락으로 인해 달을 본다 하면 무방하거니와, 혹은 방편을 따르면서 진(眞)을 미혹하고 앎[解]을 고집하여 종(宗)을 어기면서 도리어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둘이 아닌 것이 믿는 마음이니/말의 길이 끊어져 버려서/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다”라고 했다.
  두 번째의 불길에 의하여 일어나고 꺼짐[依火焰起滅]의 비유 안의 이치는 앞의 것과 같다.
  처음의 불길 뿐[唯焰]이라 함은, 불길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다. 그것에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앞의 불길이 사라져 꺼지면서 뒤의 불길을 끌어 일으키는데, 뒤의 불길은 앞의 것을 알 수 있는 체(體)가 없으며 앞의 불길이 벌써 꺼졌으므로 다시는 알 바가 없다. 그러므로 저마다 서로가 모두 모른다.
  둘째는 앞의 불이 만약 꺼지지 않았다면 역시 앞의 것에 의하여 이끌리나 체가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으며, 뒤의 불길이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 또한 저마다 서로가 모른다.
  허망한 법[妄法] 또한 그러하여 찰나마다 나고 없어져서 스스로 설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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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 이미 없어졌으면 아직 나지 못했으므로 알 만한 물건이 없고, 난 뒤에 이내 없어졌다면 알 만한 자체가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금석(金石)을 녹여서 흐르게 하여도 뜨겁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의 소의에 의한다[依所依] 함은, 저 불길을 말하는 것이니, 곧 이 체(體)가 없고 용(用)이 없는 데서는 서로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어나고 꺼지는 허망한 모양이 있다. 이것은 바로 있는 것이 아님[非有]을 통해서 있게 된다.
  허망한 법 또한 그러하여 이 의지할 바[所依] 없는 진리에 의하여야 비로소 이것이 허망한 법이니, 이 또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있게 된다.
  세 번째의 소의일 뿐[唯所依]이라 함은, 일어나고 꺼지는 불길을 추구하건대 체와 용이 다 같이 없으므로 불길이 없다는 도리가 우뚝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법의 있는 것이 없고 허망한 법의 없는 것이 있는 맑고 깊숙한 것이 드러나서 마침내 연기(緣起)의 모양으로 하여금 모양이 다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고, 성품 없는[無性] 도리로 하여금 도리가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게 한다.
  또 불은 땔나무에 의하여 있고 땔나무는 바로 탈 수 있는 것[可燃]이요, 불은 바로 태우는 것[燃]이다. 태우는 것이 탈 수 있는 것을 말미암는다면 태우는 것은 체(體)가 없으며, 탈 수 있는 것이 태우는 것을 말미암는다면 탈 수 있는 것은 체가 없다.
  또 앞의 불길이 벌써 사라지고 뒤의 불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면 중간이 머무르지 않은 것은, 마치 한 생각 위에 바로 세 때[三時]가 있는 것과 같다. 이미 사라졌다면 벌써 났던 것이 되고, 아직 나지 않았다면 아직 나지 않은 것이 되며, 난 뒤에 이내 사라졌다면 이것은 난 때이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과거에 났었다면 과거는 나서 이미 사라졌고, 만약 미래에 난다면 미래는 나는 것이 아직 이르지 못했으며, 만약 현재에 났다면 현재는 나서 머무름이 없다”고 했다.
  경에 이르기를 “비구야, 너는 지금 바로 이 때에 나기도 하고 늙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라고 하셨다. 때문에 세 때는 체가 없어서 서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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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바람에 의하여 동작이 있다[依風有動作] 함은, 망의 용은 진에 의하여 일어난다[妄用依眞起]는 것에 비유된다. 세 가지 이치는 앞에서와 같다.
  첫 번째의 움직일 뿐[唯動]이라 함은 움직일 바[所動] 물건을 여의면 바람으로서의 움직이는 모양[動相]은 마침내 얻을 수 없으므로 서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허망한 법 또한 그러하여 소의(所依)의 참된 체를 여의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알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비람풍[嵐]이 산악을 넘어뜨려도 언제나 고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소의에 의한다[依所依]고 함은 바람은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고 반드시 물건에 의지하여 움직임을 나타낸다. 움직임은 물건을 알 수 있는 자체가 없고 물건도 스스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바람을 따르는 것이라, 체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바람의 법 중에 능의의 허망한 법[能依妄法]은 반드시 진(眞)에 의지하여 성립되며 진은 알 만한 체가 없고 진은 망(妄)을 따라 숨으므로 망을 알 상이 없다.
  세 번째의 소의일 뿐[唯所依]이라 함은, 바람은 물건을 치고 움직임은 물건을 움직일 뿐이며, 바람의 모양이 모두 다하면 서로가 알 수 없다.
  허망한 법의 작용은 본래부터 성품이 공하여 소의(所依)의 진일뿐이어서 우뚝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허망한 법은 전혀 다하면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참된 성품은 온전히 숨으면서도 항상 드러난다. 능훈(能勳)과 소훈(所勳) 등의 법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넷째 땅에 의하여 유지함이 있다[能地有任持]고 함은 망은 진에게 지님을 받는다[妄爲眞所持]는 것에 비유된다. 세 가지 이치는 앞에서와 같다.
  처음의 땅 경계에 의지함[地界因依]에는, 두 가지의 이치가 있다. 첫째는 자류(自類)에서 보고, 둘째는 이류(異類)에서 본다.
  앞의 것 안에서는 금강의 끝[金剛際] 위로부터 지면(地面)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위는 아래를 의지하고 아래는 위를 지니며 차츰차츰 의지하면서 편안히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위는 능의(能依)이므로 모두가 소(所)를 여의면 아래를 알 수 있는 체가 없다. 그리고 아래는 능지(能持)이므로 모두가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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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를 여의면 위를 알게 할 수 있는 체가 없다.
  또 위는 위의 능의가 아래에 꿰뚫어 이르러도 아래를 서로 알 만한 것이 없으며, 아래는 아래의 능지가 위에 꿰뚫어 이르러도 위를 서로 알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의지하거나 지니거나 간에 서로가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
  나타난 바 허망한 법도 역시 그런 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추(麤)는 세(細)에 의지하는 것이니, 괴로움의 과보는 업(業)에 의하고 업은 무명에 의하여 지으며 무명은 지을 바[所造]에 의한다. 차츰차츰 체가 없는지라 서로가 알 만한 물건이 없다. 이것이 바로 만물을 두껍게 싣되 어진 체하지 아니함의 것이다.
  조공(肇公)이 또한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거꾸로 엎어져도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고,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천지는 어진 체하지 아니하여 만물로써 추구(芻狗)를 삼는다”고 했으며, 경에서 말씀하기를 “마치 대지(大地)가 네 개의 무거운 짐을 메고 있으면서도 고달파하거나 싫증냄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어진 체하지 아니한다[不仁]고 함은 인덕(仁德)을 뽐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오히려 초구(草狗)와 같거늘 어찌 짖고 지키는 능(能)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도(道)는 무심(無心)하여 만물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둘째의 이류(異類)에서 본다 함은, 경에서 말씀하기를 “지륜(地輪)은 수륜(水輪)에 의지하고 수륜은 풍륜(風輪)에 의지하고 풍륜은 허공(虛空)에 의지하고 허공은 의지할 바가 없다”고 하셨다.
  이에 준(准)하면 망경(妄境)은 망심(妄心)에 의지하고 망심은 본식(本識)에 의지하고 본식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며 여래장은 의지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여래장을 여의면 그 밖의 모든 허망한 법은 저마다 서로서로가 의지하되 서로가 알 수 있는 체가 없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법은 모두 다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의 소의에 의한다[依所依]고 함은, 땅의 경계는 바로 저마다 제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존립하게 된다. 이전부터 만약 체가 있다면 서로가 의지하지 않았고, 서로가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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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그러므로 이 성품이 없다는 것으로써 저 법을 이룬 것이니, 법에 결합은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소의일 뿐[唯所依]이라 함은, 성품 없음으로써 저 법을 이룬다고 함은 이것이 바로 그 법은 모두 다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 일찍이 소멸하지 않은 일이 없으며, 성품이 없다는 도리일 뿐이면서 홀로 앞에 나타난다.
  또 이미 서로가 모른다면, 무슨 인연으로 갖가지인가? 이것은 네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답하겠다. 첫째는 망으로 말미암아 분별하며[由妄分別], 둘째는 모든 식의 훈습[諸識熏習] 때문이며, 셋째는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모르며[由無性不相知], 넷째는 진여는 연을 따르기[眞如隨緣] 때문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원인은 일치(一致)하는 것이다.
  망으로 말미암아 분별하는 것이 연(緣)이 되어서 진여로 하여금 제 성품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존재[有]를 이룬다.
  모든 식은 훈습하여 차츰차츰 그지없게 되는데, 만약 망의 근원을 통달하면 깨달은 연기(緣起)를 이룬다.
  앞의 의심한 바에서 이르기를 “이것은 가지가지의 것인가? 바로 하나의 성품인 것인가?”라고 했다.
  이제 대답하리라.
  “언제나 갖가지요, 언제나 하나의 성품이다.”
  또 묻기를 “하나의 성품이 갖가지에 따른다면 진제(眞諦)를 잃게 되고, 갖가지가 하나의 성품에 따른다면 속제(俗諦)를 무너뜨린다”고 했다.
  이제 대답하리라.
  “이 두 가지는 서로서로가 성립되는 것인데, 어찌 서로가 어긋나서야 되겠는가? 성품은 일[事] 밖의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갖가지 것에 어그러지겠으며, 갖가지의 성품은 공이거늘 어찌하여 하나의 성품에 어그러지겠는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어서 하나의 성품은 갖가지 것을 능히 이루며, 인연으로 나기 때문에 공한 것이어서 갖가지는 하나의 성품을 능히 이룬다.”
  그러므로 연기(緣起)의 법에는 통틀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연으로 나기 때문에 있는 것[緣生故有]이다. 곧 망심의 분별로 있는 것과 모든 식(識)의 훈습이 이것이다. 둘째는 인연으로 나기 때문에 공한 것[緣生故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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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곧 모든 법의 작용이 없는 것과 또한 체성(體性)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는 것[無性故有]이다. 있음[有]과 공의 이치 때문에 온갖 법은 이루어지게 된다. 넷째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無性故空]이다. 곧 온갖 것이 공하여 성품이 없는 것이다.
  다시 성품에는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있음이요, 둘째는 공이다. 또 두 가지 이치는, 첫째는 불변(不變)이요, 둘째는 수연(隨緣)이다.
  있음의 이치 때문에 이공(二空)이 나타나는 바를 설명하는 것이니, 곧 법성(法性)은 본래 남이 없다. 공의 이치 때문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 성품 없음[依他無性]을 설명하는 것이니, 곧 이는 원성(圓成)이어서 저마다 서로가 모른다.
  있음의 이치 때문에 불변을 설명하고 공의 이치 때문에 수연을 설명한다. 이 두 가지는 둘이 아니어서 수연이 바로 불변이요, 불변이기 때문에 능히 연을 따른다. 만약 불변의 성품뿐이라면 어찌하여 법에 관여하겠으며, 만약 수연뿐이라면 어찌 진성(眞性)에 칭하겠는가?
  또 만약 성품이 법을 여읜다면 단멸(斷滅)을 이루고, 법이 성품을 여의면 본래는 없으나 지금에는 있으리라. 또 법이 만약 그대로 성품이라면 성품은 언제나 항상하여야 하고, 성품이 만약 그대로 법이라면 법은 없어져서 소멸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어서 항상한 것[常]도 아니고 아주 없는 것[斷]도 아니며, 이 두 가지는 서로가 부정하는 것[相奪]이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어서 중도(中道)의 이치가 된다.
  경의 게송에 말씀하기를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마음과 뜻과 여러 가지 감각은/이로써 언제나 유전(流轉)하건만/그런데도 능히 굴리는[輪] 이가 없다”라고 하셨다.
  눈(眼) 등의 8식(識)으로써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이 되어 차츰차츰 그를 인(因)으로 삼아 언제나 유전하건만 따로 아(我)와 인(人)이 없기 때문에 “능히 굴리는 이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체성(體性)이 공하여 바야흐로 유전을 하거니와, 곧 이 8식은 저마다 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아(實我)라는 법으로서 주인 되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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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부터 만약 성품이 있었다면 훈습하며 변할[熏變] 수가 없거늘, 어찌 유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취(趣)에 가서 남이 같거나 다르고 과보를 받음이 예쁘거나 못생긴 것 모두가 식(識)의 종자를 말미암고 다 마음을 의지하는 줄 알 것이니, 마치 흐름이 물에 의지하는 것 같고 불이 땔나무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앎이 없고 새롭고 새롭게 되면서 머무르지 아니하니, 착한 갈래와 나쁜 갈래가 바로 총보(總報)이다. 업(業)이 마음에 훈습함으로 말미암아 받을 바 과보를 받는 것은 마치 물이 흘러내리면서 끊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비록 유전하는데도 굴리는 이가 없기 때문에 “이로써 언제나 유전하건만/그런데도 능히 굴리는 이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석론(釋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사납게 흐르는 물이 끊이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게 오랜 동안을 계속하면 빠지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이 식(識)도 그러하여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찰나찰나마다 과(果)가 나면 인(因)이 사라지는데, 과가 나기 때문에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인이 사라지기 때문에 항상한 것도 아니어서 유정(有情)들을 빠뜨려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라고 했다.
  『화엄경』에서 말씀하기를“일체 중생들은 크고 사나운 물의 파랑에 빠지게 된다”라고 하셨고, 『능가경(楞伽經)』에서 말씀하기를 “장식(藏識)의 바다는 항상 머무르거늘, 경계(境界)의 바람에 의해 요동치게 된다”라고 하셨으며,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항상 구르는 것은 마치 사나운 흐름 같다”라고 했고,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큰 바닷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물결이 생기는 것 같다”라고 한 것 등이 이것이다.
  또 허망(虛妄)한 것 가운데서는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헛되이 구름[虛轉]이요, 둘째는 구름이 없음[無轉]이다. 때문에 언제나 갖가지요, 언제나 하나의 성품이다.
  헛되이 구르기 때문에 속(俗)은 진(眞)과 다르지 않아서 속의 상(相)이 성립되고, 구름이 없기 때문에 진은 속과 다르지 않아서 진의 체(體)가 존립한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어긋나지 아니한다.
  ‘법성(法性)은 본래 남이 없다[本無生]’고 하였는데, 법성에서, 법(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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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다른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등의 법이요. 성(性)은 그 법의 의지할 바[所依] 체성(體性)을 말한다. 곧 법의 법성이기 때문에 법성이라 한다.
  또 성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써 뜻을 삼으며 바로 이것이 법도[軌]로 삼을 만한 것이므로 역시 법이라 한다. 이것은 성 그대로가 법이기 때문에 법성이라 하며, 이 두 가지 이치는 다 불변(不變)에 의거해서 해석한 것이다.
  또 곧 온갖 법은 저마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법성이라 하며, 바로 수연(隨緣)의 성품이므로 법 그대로가 성품이다.
  ‘본래 남이 없다[本無生]’ 함의 본(本)에는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 불변에 의거하면, 본은 근본[原本]이란 말이다. 본래에는 나지 않는데 연을 따르기 때문에 난다. 둘째 수연에 의거하면, 이 법이 오는 것은 본래 스스로 나지 않으므로 소멸할 것을 기다려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곧 나는 것을 시현할 때 본래는 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안에서는 나타내는 것은 없고 나타나는 물건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망심으로 분별하고 망정으로 헤아려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있는 것이 바로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때문에 “온갖 것은 공(空)하여 성품이 없어서 언제나 있고 언제나 공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스스로 공허함[自虛]이거늘, 어찌 재할(宰割)을 기다려서 통함[通]을 구하겠는가?
  또 상대(相待)와 상탈(相奪)에 의거해서 서로가 모른다는 것을 풀이한다. 상대라 함은, 업(業)은 식의 종자[識種]가 없으면 자체를 형성하지 못하며, 식은 업의 종자[業種]가 없으면 고와 낙[苦樂]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서로 서로 상대한다면 저마다 성품이 없다.
  상탈이라 함은, 업(業)으로써 인(因)을 빼앗는 것이다. 업으로 말미암아 초래할 뿐이기 때문에 인은 마치 허공와 같다. 인으로써 연(緣)을 빼앗으면 마음만이 체가 되기 때문에 업은 마치 허공과 같다. 서로서로 빼앗아 혼자 존립하므로 역시 서로가 알 수 없으며, 서로서로 빼앗아 둘 다 없어지므로 서로가 알만한 것이 없다. 또 남[生]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모른다.
  연(緣)으로써 인(因)을 빼앗기 때문에 제 것[自]이 나지 아니하며, 인으로써 연을 빼앗기 때문에 다른 것[他]이 나지 아니한다. 인과 연은 합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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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누어지기도 하되 상대여서 성품이 없기 때문에 함께 나지 아니하며, 서로서로 빼앗아 둘 다 없어지면 인이 없거늘 어떻게 나겠느냐? 이 나지 아니함은 모르는 것과 유사하므로 분명해서 알기 쉽다.
  곧 인으로써 제 것을 삼고 연으로써 다른 것을 삼아, 이것을 합치면 한 가지가 되고 이것을 여의면 없는 것이 된다. 인(因)이 서로 있어도 오히려 서로가 모르거늘, 서로가 없는데 어찌 서로가 알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상대하는 것이어서 모두가 제 성품이 없는 줄 알 것이니, 마치 『중론(中論)』의 상대문(相待門)의 학설에서 “불공(不空)도 벌써 깨뜨렸으므로 공법(空法) 또한 없어진다”는 것과 같다.
  게송에 이르기를 “만약 참되지 않은 법[不眞法]이 있으면/바로 참된 법[眞法]이 있어야 하며/진실로 참되지 않은 법이 없다면/어찌하여 참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또한 때[垢]로 인하여 깨끗함[淨]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서, 때의 성품이 본래 없거늘 깨끗함의 모양이 어찌하여 있겠는가? 이것은 상대(相待)의 한 문[一門]으로서 모든 법을 모두 깨뜨리는 것이니, 모든 법이 다 이 상대로써 있으므로 하나의 법도 혼자 존립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므로 『인연무성론(因緣無性論)』에서 이르기를 “아난(阿難)과 조달(調達)은 다 같이 세존의 아우이고, 라후라(羅睺羅)와 선성(善星)은 똑같이 여래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난은 언제나 친히 공양하며 모시고 조달은 항상 해치고 거슬렀으며, 라후라는 계[珠]를 잘 지켜 범하지 아니했고 신성은 그릇[器]을 깨뜨리며 거두기조차 어려웠다”라고 했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진실로 알 만하다.
  만약 저마다 제 성품이 있어서 고쳐 바꿀 수 없다 하면,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매가 변하여 비둘기가 되면 본래 마음이 단박에 다하고 귤이 변하여 탱자가 되면 앞의 맛이 영영 없어져버린다. 그러므로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간에 저마다 정해진 성품[定性]이 없어서 마음을 따라 변할 뿐이요 업(業)을 쫓아 날 뿐이며, 마침내 범부로부터 성인의 문으로 들어가고 악을 바꾸어 선한 일을 함이 있는 줄 알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법의 성품 없음이 성품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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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증득하여 마침내 원만하여야 비로소 부처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보(三寶)를 건립하여 불사(佛事)를 이루는 문(門)은 모두가 성품 없는 인연으로부터 일어나고 나타나게 되는 줄 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장로 마하가섭(摩訶迦葉)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법왕자(法王子)는 일찍이 전세에 이미 불사를 지어서 도량에 실제로 앉았고 법륜(法輪)을 굴리어 모든 중생에게 보이고서 대열반에 들었다고 여기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라, 그러니라. 그리고 가섭아, 너희들은 이제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의 세력을 관하라. 모든 큰 보살들은 이 힘 때문에 시현(示現)으로 태 안에 들어가서 처음 태어나 출가하고 보리수(菩提樹)에 나아가 도량에 앉으며 묘한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서는 사리(舍利)를 분포하였다. 그러나 또한 보살로서의 법을 버리지 않았으며, 열반에서도 마침내 없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때 장로 마하가섭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어진이여, 이렇게 있기 드[문]어려운 일을 능히 베풀어지어서 중생들에게 시현하셨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가섭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사굴산(耆闍崛山)은 누가 만들었으며, 이 세계 또한 어디서 나왔습니까?’
  가섭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온갖 세계는 물거품으로 이루어졌고 또한 중생의 불가사의한 업(業)의 인연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온갖 모든 법은 역시 불가사의한 업의 인연으로부터 있습니다. 나는 이 일에서 공력(功力)이 없습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온갖 법은 모두 인연에 속하며 주인이 없기 때문에 뜻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알 수 있으면 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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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하여 보자. 만약 온갖 법이 모두 인연에 속하며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이것은 마음으로 날 뿐임을 깨달아 알면, 하는 일에 무슨 공력을 빌리겠는가? 성품 없음의 도리는 마땅히 그러한 문이어서 연을 따라 말고 펴며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
  『화엄경』의 게송에서는 “여(如)의 그 심성(心性)대로 자세히 살펴보라./마침내 추구해도 얻을 수 없으리니/온갖 모든 법은 남음이 없이/모두 여(如)의 체 없는 성품[無體性]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또 게송에 말씀하기를 “비유하면 진여(眞如)는 본래의 자성(自性)이라/그 중에는 한 법도 있는 일이 없어서/자성을 얻지 못한 것이 진성(眞性)이니/이러한 업(業)으로써 회향(廻向)하느니라”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은 근본지(根本智)를 미혹해서 세간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법이 있는 것이니, 지혜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연(緣)을 따라 깨닫지 못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의 업이 생기며, 지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괴로움에게 얽매임을 당한다. 비로소 근본에 성품이 없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뭇 연은 성품이 없으며 만 가지 법은 저절로 고요하다. 만약 괴로움을 깨닫지 못할 때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온통 스스로 성품이 있음[有性]과 성품이 없음을 모르게 된다. 마치 사람이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처럼, 일체의 중생들이 제 마음의 근본지로 인하여 넘어졌으면 역시 그로 인하여 일어난다.
  또 지혜의 체(體)는 성품이 없고 다만 연을 따라 나타날 뿐이니, 마치 공중의 메아리가 물건에 따라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성품이 없는 지혜는 연에 맞춰 분별할 뿐이며, 분별하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욕망[愛]이 따라 일어난다”고 하였다.
  또 『중관론(中觀論)』의 파응무여래게(破應無如來偈)에 말하였다.
  “삿된 소견이 깊고 두터우면/여래가 없다고 설명하거니와/여래는 고요히 사라짐[寂滅]의 모양이라/있다고 분별함도 또한 아니다.
  이러한 성품의 공(空)한 가운데서/생각하는 그것 또한 옳지 못하거늘/여래께서 멸도(滅度)하신 그 이후에/있다 없다를 분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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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총불게(總拂偈)에서 말하였다.
  “여래는 희론(戱論)을 나무라셨는데/그런데도 사람들은 희론을 내누나./희론은 지혜의 눈을 깨뜨리므로/이것은 모두가 부처를 보지 못하리.”
  논석(論釋)에 이르기를 “희론은 기억하면서 이것 저것들을 분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여래(如來)라는 것은 처음ㆍ중간ㆍ나중을 생각하여도 여래라는 결정된 성품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내지 오구사구(五求四句)라도 모두가 옳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르기를 “여래란 성품이 없으니/바로 이것이 세간의 성품이다/여래란 성품이 없는지라/세간도 역시 성품이 없다”라고 했다.
  여래의 한 성품의 공한 이치를 통해서 온갖 세간의 법은 모두가 다 성품이 없어서 여래의 이치와 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
  『화엄연의(華嚴演義)』 중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이/비록 백ㆍ천ㆍ억 가지의/수없는 모든 법[문]말씀한다 하더라도/그것은 진실로 일승(一乘)을 위함일세.
  모든 부처님의 양족존(兩足尊)께서/법은 언제나 성품이 없고/불종(佛種)은 연을 쫓아 일어남을 아셨나니/그러므로 일승을 말씀하셨느니라.
  이 법(法)은 법위(法位)에 머물러/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무나니/도량(道場)에서 그를 아신 뒤에/도사(導師)께선 방편으로 말씀하셨네.”
  이제 두 구절만을 인용하여 모든 법의 성품 없음을 나타내서 한 성품의 이치를 이루었을 뿐이다.
  그러나 위의 세 게송은 여러 해석이 같지 아니하다. 이제 곧장 경의 글을 해석하여 보자.
  처음의 한 게송은, 부처님은 방편[權]을 열어서 마침내 하나의 진실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로 일승을 위함일세”라고 밝혔다.
  다음 게송을 해석하면, 일승을 설명한 까닭은 한 성품뿐이기 때문이니, 만약 두 성품이 있다 하면 양승(兩乘)이 있다고 용납하게 된다. 이미 한 성품뿐이기 때문에 일승임을 설명했을 뿐이다.
  ‘법은 항상 성품이 없음을 안다[知法常無性]’ 함의 앎[知]이란 바로 증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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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안다[證知]는 것이요, 법(法)은 증득하여 알 바의 법으로서 곧 물질과 마음[色心] 등의 온갖 법이다. ‘항상 성품이 없다’ 함은 증득할 바 진리[所證理]이니, 바로 여(如)의 성품 없는 진리로써 모든 법을 깨닫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성품이 없느냐 하면, 물질과 마음 등은 본래부터 성상(性相)이 공하고 고요하여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니며 한가지[共]도 아니고 여읨[離]도 아니어서 잔잔하며 언제나 고요하기 때문에 성품이 없다고 한다.
  항상[常]이라 함은 본래 그대로가 없는 것이요 그를 밀어뜨려서 없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성품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불종(佛種)은 연(緣)을 쫓아 일어난다’ 함은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원인인 종성[因種]에서다. 원인의 종성은 바로 정인불성(正因佛性)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불성(佛性)이란, 곧 위없는 보리(菩提)ㆍ중도(中道)의 종자이다”라고 했으니, 이 종자가 바로 이 앞의 항상 성품이 없다는 진리이다. 때문에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불성이란 바로 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라고 하셨다. 성품 없음이 바로 공이란 뜻이다.
  연(緣)은 곧 육도만행(六度萬行)이며, 이것은 연인 불성이니 저 정인(正因)을 일으키어 성불(成佛)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일승(一乘)이라 말한 것은 불성으로써 불성을 일으킬 뿐이요, 다시는 다른 성품이 없다. 그 때문에 일승이라 말하며 진리에 맞는 설명이다.
  체(體)가 같으므로 성품[性]이요, 모양[相]이 같기 때문에 종자[種]라고 한다. 때문에 관중(關中)에 이르기를 “마치 벼는 저절로 벼를 내는 것이요, 딴 곡식을 내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성품에 속한다. 싹과 짚과 꽃과 열매는 그것과 유사하여 차이가 없는데, 이것은 종자에 속한다.
  둘째는 결과인 종성[果種性]에서다. 관중(關中)에 이르기를 “부처의 과보는 부처일 뿐이요, 그 진리는 틀리지 아니하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성품의 이치이다. 설법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것들은 모두가 비슷한 것이므로 이것은 종자의 이치이다.
  결과[果]의 종성은 진리를 연하여 나기 때문에 ‘연을 쫓는다[從緣]’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게송에서 말한 것을 해석하면 부처는 진리를 연하여 나고 진리는 이미 둘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승이라 말했을 뿐이다.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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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면, 진리를 증득하면 부처가 되고 진리에 맞추어 하나라고 말했다.
  이 중에서 ‘법은 항상 성품이 없다[法常無性]’라는 게송은 온전히 「화엄 출현품(華嚴出現品)」의 경에서 말씀한 “여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셨을 때에 그 몸 가운데서 널리 일체 중생들이 정각을 이루는 것을 보셨고, 내지 온갖 중생들이 열반에 드는 것을 널리 보셨다.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니, 이른바 성품이 없는 것이며, 내지 온갖 법은 모두가 성품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온갖 지혜를 얻고 대비(大悲)가 계속되어서 중생들을 제도하신다”라고 하신 것과 같은 줄 알 것이다. 말하자면 성품 없는 것이 불성과 같다고 알기 때문이다.
  경의 글의 말씀에 준하건대, 성품 없음을 알면 오히려 하나가 이루어져 온갖 모두가 이루어지게 되거늘, 하물며 일승으로서 제도 해탈된다고 설명하지 않겠는가.
  뒤의 게송에서는 ‘이 법은 법위에 머무른다[是法住法位]’고 한 것들로써 거듭 앞의 게송을 해석하였으니, 이 법[是法]이라 함은 바로 앞의 알 바의 법[所知之法]으로서 항상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진여(眞如)의 바른 자리[正位]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연(緣)이 성품 없음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 그대로가 진(眞)이며, 그대로가 진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다고 말한다.
  법위(法位)라고 함은, 바로 진여의 바른 자리이다. 때문에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법성(法性)과 법계(法界)의 법은 법위에 머무른다”고 했으니, 모두가 진여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
  세간의 법 그대로가 여(如)이기 때문에 모두가 항상 머무르는 것이니, 항상의 도리를 어김으로 인하여, 3계(界)의 무상함[無常]을 이룬다. 만약 무상하다는 진실을 알면, 바로 무상이면서 항상함을 이룬다. 그렇다면 항상함과 무상함은 두 진리가 치우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두 마리의 새[二鳥]가 날아와서 같이 사는 데에 견주었고, 이제 도량에서 온갖 세간의 무상함이 곧 참된 항상함[眞常]의 진리임을 증득하여 아셨으니, 마치 거울을 높은 당(堂)에 걸어 두면 만 가지 형상이 여기에 비치는 것과 같다.
  둘이면서 둘이 아니므로 말로써 펼 수 없어서, 방편의 힘으로써 언설을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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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 것이다. 일승도 오히려 가정인 설명[假說]이거늘, 하물며 둘ㆍ셋이 있겠는가? 곧 일승의 진리는 지극한 진리[至理]로서 과도함이 없다.
  성품 없음의 종[無性之宗]이야말로 모든 종(宗)의 미칠 바가 아니니, 종경(宗鏡)의 강골(綱骨)이요 조교(祖敎)의 지남(指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말씀하기를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자성(自性)이 없어서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본래가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涅槃)이니라”고 하셨고, 『상주천자소문경(商主天子所問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법(法)이 없다면 곧 자재(自在)하지 아니하며, 만약 자재하지 못하면 바로 욕심[欲]이 없으며, 만약 욕심이 없다면 바로 이것이 진성(眞性)이며, 만약 이것이 진성이라면 바로 성품 없음[無性]이라 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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