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8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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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8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성품 없음[無性]의 도리는 같은데, 이것은 어느 종(宗)에 속하는가?
  [답] 법성종(法性宗)에 속한다. 옛 스승이 말하기를 “법의 성품[法性]에 체(體)가 있으면 이는 법상종(法相宗)의 이치요, 현상 위[事上]에 체가 없으면 이는 법성종의 이치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문] 만약 온갖 법에 실로 성품이 없다면 교(敎)의 뜻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단견(斷見)을 이룰까 두렵다.
  [답] 만약 성품이 있다면 본래 한 법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성품이 없기 때문에 모든 연(緣)이 모두 성립된다. 성품 없는 가운데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을 다 같이 얻을 수 없거늘, 어찌 단견과 상견(常見)을 이루겠는가?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매우 희유(希有)하여 심오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면서 두 가지 공[二空]을 관찰한다. 비록 모든 법이 모두가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형상[像]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환영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서 모두가 실유(實有)가 아니며 성품 없음을 성품으로 삼아 제 모양[自相]이 모두 공(空)임을 안다 해도, 좋거나 좋지 않은 모든 차별을 벌여 세우되 모두가 어지러움이 없느니라.”
  또 말하였다.
  “선현(善現)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갖 법은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그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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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性)을 삼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온갖 법에 모두 없음으로 자성을 삼는다 하면, 누가 물들고 누가 깨끗하며 무엇이 속박하고 무엇이 해탈하겠습니까? 저 물듦과 깨끗함과 속박하고 해탈함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계율을 깨뜨리고 견해를 깨뜨리며 위의를 깨뜨리고 깨끗한 생활을 깨뜨려서 장차 지옥과 축생과 아귀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들을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아, 장하고 장하도다. 그러니라, 그러니라. 네가 말한 바와 같아서 온갖 법은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써 자성을 삼는지라 자성 안에서는 성품이 있다거나 성품이 없다거나 하는 것을 다 같이 얻을 수 없나니, 여기서는 있다 ㆍ없다는 성품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미 있음에도 집착할 수 없고 없음에도 집착할 수 없음을 알았다. 자성 중에는 있음과 없음이 없기 때문이다. 말한 바 있다ㆍ없다 하는 법은 모두가 이는 집착을 깨뜨리고 법으로 들어가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얻을 바 없음[無所得]으로 방편을 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을 바 없음으로써 앞의 것을 인도하면서 모양을 따르면 있음[有]에 간섭하여 공(空)에 미혹하지 않는 것이니, 있음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다. 둘째는 얻을 바 없음을 빌려서 있음에 들어가서 얻을 바 없음에 있지 아니하면 곧 얻을 바 없음 역시 이는 방편이니, 이것은 공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얻음이 없는 모양의 공[無得相空]과 지음이 없는 사람의 공[無作人空]과 끝이 없는 성품의 공[無際性空]의 이 세 가지 모양이 다하면 법계(法界)의 도리가 나타난다. 그 때문에 보살은 공이면서 항상 있음[空而常有]을 무너뜨리지 않아 염정(染淨)의 법이 완연(宛然)하며, 있음이면서 항상 공[有而常空]을 장애하지 않아 일진(一眞)의 도가 항상 나타난다. 이와 같이 두 가지가 서로 비추어야 비로소 매우 심오한 경지[甚深]에 든다.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이르기를 “내가 말한 있음[有]에 들기를 막는 것은 자체(自體)가 있다는 것을 막는 것이니,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있다ㆍ없다 함은 모두 치우침[邊]이요/마음의 작용[心所行]까지 다 그러하며/그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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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용이 사라지고 나야/바른 마음[正心]의 사라짐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보자.
  이것은 체가 있는 데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체가 없는 데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법에 체가 없다면 하나도 지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있음을 막음은 있지 않음[非有]을 말함이라/있지 않음조차 취하지 않음이니/마치 푸름[靑]을 막음은 푸르지 않다 함이요/희다[白] 함을 말하려 하지 않음과 같다.”
  해석하여 보자.
  이 두 가지 소견은 좋지 않음[不善]이라 한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 쓸모없는 이론을 쉬고 남음 없는 즐거움[無餘樂]을 얻고자 하면, 이 두 가지 나쁜 소견을 막아야 한다.
  이는 또 무엇을 말하는가? 3계(界)에 속한 것이거나 출세간(出世間)이거나 착함[善]ㆍ착하지 않음[不善]ㆍ무기(無記)이거나 간에 세제(世諦)의 종류 같은 것으로는 모든 경영하고 지을 바이지마는, 저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서 만약 자체(自體)가 있다면 애써 방편을 일으켜 좋거나 좋지 않은 모든 일을 짓는다 하여도 공(空)이요, 결과가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먼저는 있었기[先有] 때문이다. 비유하면 먼저 있었던 병(甁)이거나 옷[衣]과 같다. 이와 같이 즐거운 것은 언제나 즐겁고 괴로운 것은 언제나 괴로운 것이니, 마치 벽 위에 채색으로 그린 그림의 형량(形量)에 위의와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일체 중생 또한 그러하여야 한다.
  만약 자체가 없다면 저 3계에 속한 것이거나 출세간이거나 착함과 착하지 않은 법이거나 간에 부지런히 방편을 일으켜도 곧 공이요, 결과가 없으며, 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간에서는 단멸(斷滅)에 떨어지리니, 마치 빛나는 토끼 뿔을 갈아서 그것을 예리하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조그마한 지혜로 모든 법을 보되/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면/그 사람이야말로 보지 못한 것이니/그것이 사라져야 제일의(第一義)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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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보취경(寶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있다는 것은 바로 한편의 치우침이요, 없다는 것도 바로 한편의 치우침이다. 이러한 등등의 내지계(內地界)와 외지계(外地界)는 모두 두 가지 이치가 없으며, 모든 부처님 여래는 진실한 지혜로 증득하여 알아서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었느니라.’”
  이는 둘이 없는 하나의 모양이니, 이른바 모양 없음[無相]이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모든 종(宗)에서 헤아리는 것은, 대부분이 제 성품[自性]만이 공하고 법(法)의 공함을 말하지 않으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변계(遍界)만이 없을 뿐 의타(依他)는 없지 않다”고 하였고, 『중론(中論)』 등을 잘못 배워 뜻을 얻지 못한 이는 역시 “법에는 제 성품이 없다고 말하여 공이라고 하는 것이고 지금의 모양은 공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다.
  이제 이미 성품이 없으나 연으로 나기[緣生] 때문에 있지만 체(體)는 있는 그대로가 공이며, 연으로 나지만 성품 없기 때문에 공이고 공이면서 언제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서로가 통하여야 비로소 이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니, 그 때문에 말로는 크게 같지만 뜻에서는 다름이 있다.
  또 연기법(緣起法)에서 보아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모양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다면 모두 쓸어 없애서 없는 것이니, 이것은 모양의 공[相空]이요, 둘째 제 성품이 없어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면 업의 결과[業果]는 언제나 상실되지 않은 것이니, 바로 성품의 공[性空]이다.
  모양이 공하기 때문에 온갖 법의 체(體)가 텅 비어서 마침내 얻을 바가 없고,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업의 길[業道]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인과(因果)가 분명하다.
  이 성품과 모양[性相]의 두 가지 공을 통해서만 비로소 진공(眞空)의 이치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처음이거나 중간이거나 뒤의 끝이 아니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연(宛然)한 것이다. 조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상실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품 없는 도리가 이루어져서 법안(法眼)이 분명하게 비춤을 알 것이니, 더 이상의 한 법도 진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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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根由]가 없다.
  이제 다시 증거를 이끌어 자세히 설명하여 종경(宗鏡)을 성취시키리라. 참된 이치[眞諦]와 세속 이론[俗諦]의 모든 법은 ‘공과 존재[空有]’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공과 존재의 법은 모두가 연(緣)으로부터 생기며 연으로 생기는 법은 본래 자체가 없어서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모두가 다 성품이 없으며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연으로 생긴다. 이 연과 성품의 두 가지 문을 통해서 만 가지 법은 한결같이 평등하다.
  그러므로 『화엄기(華嚴記)』에서 자세히 해석하며 말하기를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있다는 이것은 존재의 이치요,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것은 공의 이치이다. 두 가지 이치는 바로 공과 존재가 있는 까닭이니,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다는 이것은 존재하는 까닭이고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라는 이것은 공한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바로 이것이 인연(因緣)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성품이 없는데 공이라는 이치가 성립되는가? 연으로 말미암아 생기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연으로 생긴 것은 성품이 없어서 공한 것이다.
  어찌하여 연으로 생기는데 존재의 이치가 될 수 있는가? 특히 정해진 성품이 없기 때문이며 비로소 연을 따라 허깨비인 존재[幻有]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러므로 성품이 없다. 이것이 존재가 있게 되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을 모르면/공의 인연도 모르고/공에 대한 이치도 모르리니/이 때문에 스스로 번뇌를 낸다./마치 주술(呪術)을 잘 부리지 못하면/독사를 잘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네.”
  만약 4구(句)를 가져다 통틀어 공과 존재에 대비시키면 이것이 모두 이름을 붙이게 된 까닭이다. 그러므로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존재라 하고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라 하며, 성품이 있기 때문에 존재라 하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고 했다.
  진실로 모든 법이 생김에는 반드시 연을 따르고 연을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제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기 때문에 연을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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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緣)으로 있고 성품은 없다면 다시는 두 가지의 법이 없다. 그러나 허깨비인 존재에서 보면 만 가지 종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세속제[俗諦]라고 하며 성품 없음에서는 한 맛이기 때문에 진제(眞諦)라고 한다.
  또 4구가 있는데 셋째 글귀만을 인용하여 증거를 성립시키는 것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음을 이치로는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세히 증명하여 보자. 첫째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존재한다[緣生故有]’라고 함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말씀하기를 “다만 인연으로써 존재할 뿐인데, 뒤바뀜으로부터 생긴다[生]고 일부러 말한다”고 하셨으며,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긴다”고 했고, 『중론(中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일찍이 한 가지의 법도/인연으로부터 나지 않은 일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이, 모두가 인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이치이다.
  둘째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함은, 경에서 말씀하기를 “인연으로 나는 것이므로 생김이 없다”고 하셨으며, 논(論)의 게송에 이르기를 “만약에 법이 연으로부터 생긴다면/이것은 곧 제 성품이 없으며/만약에 제 성품이 없다면/어떻게 이 법이 있으리오”라고 했고,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있음과 공의 이치 때문에/온갖 법은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앞에서 논한 것 중의 여러 가지는 공으로써 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소승(小乘)은 보살에게 허물을 씌우면서 말하기를 “만약 온갖 법이 생김도 없고 소멸도 없다 하면,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의 법이 없다”고 하자, 보살은 도리어 대답하기를 “만약 온갖 법이 공하여 생김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하지 않으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법이 없다”고 하였다. 소승은 공하기 때문에 네 가지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보살은 공하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진리를 상실하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공의 이치가 있다면, 네 가지 진리가 비로소 이룩된다. 그러므로 게송에 이르기를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온갖 법이 이룩될 수 있거니와/만약 공의 이치 없다고 하면/온갖 것은 곧 이룩되지 않으리”라고 했고, 또 『반야경(般若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도(道)도 없고 과위[果]도 없거니와, 곧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정명경』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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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또 물었다.
  ‘나고 죽는 것은 두려움이 있거늘, 보살은 어디에 의지해야 합니까?’
  유마힐(維摩詰)이 말하였다.
  ‘보살은 나고 죽는 두려움 가운데서 여래의 공덕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문수사리가 또 물었다.
  ‘보살이 여래의 공덕의 힘에 의지하려 하면, 어디에 머물러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여래의 공덕의 힘에 의지하려 하면 일체 중생을 제도 해탈시키는 데 머물러야 합니다.’
  또 물었다.
  ‘중생들을 제도하려 하면 무엇을 제거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 그 번뇌를 제거해야 합니다.’
  또 물었다.
  ‘번뇌를 제거하려 하면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바른 생각[正念]을 행해야 합니다.’
  또 물었다.
  ‘어떻게 바른 생각을 행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음[不滅]을 행해야 합니다.’
  또 물었다.
  ‘어느 법이 나지 아니하며, 어느 법이 없어지지 아니합니까?’
  대답하였다.
  ‘착하지 않은 법은 나지 아니하고 착한 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몸이 근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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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물었다.
  ‘몸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욕탐(欲貪)이 근본이 됩니다.’
  또 물었다.
  ‘욕탐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허망한 분별이 근본이 됩니다.’
  또 물었다.
  ‘허망한 분별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뒤바뀐 생각[顚倒想]이 근본이 됩니다.’
  또 물었다.
  ‘뒤바뀐 생각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머무름 없음[無住]이 근본이 됩니다.’
  또 물었다.
  ‘머무름 없음은 무엇이 근본이 됩니까?’
  대답하였다.
  ‘머무름 없으면 곧 근본[本]이 없습니다. 문수사리여, 머무름이 없는 근본으로부터 온갖 법을 세웁니다.’”
  예공(叡公)은 해석하여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음은 바로 실상(實相)의 다른 이름이요, 실상은 바로 성공(性空)의 다른 이름이니, 그러므로 성품이 없음으로부터 온갖 법이 있다”라고 했다.
  또 『정명경』에서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거사(居士)여, 병이 든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합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병든 보살은 생각하기를 금의 이 나의 병은 모두가 전세의 망상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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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뀐 모든 번뇌로부터 났으므로 진실한 법이 없는데, 누가 병을 받을 자이겠는가? 왜냐 하면 4대(大)가 합한 까닭에 임시로 몸이라 한 것이요, 4대는 주인이 없는 것이라 몸 또한 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나를 집착한 탓이니, 이 때문에 나에 대하여 집착을 내지 않아야 된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미 병의 근본을 알았다면 이내 아상(我想)과 중생상(衆生想)을 제거하고 법상(法想)을 일으켜야 하며, 생각하기를 만 뭇 법이 합하여 이 몸을 이룩했을 뿐이므로 일어나도 법만이 일어났고 없어져도 법만이 없어진다. 또 이 법이란 저마다 서로가 모른다. 일어날 적에도 내가 일어난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없어질 적에도 내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아니한다>고 해야 합니다.
  저 병든 보살은 법상을 없애기 위하여 생각하기를 법상(法想)이란 역시 뒤바뀐 것이요, 뒤바뀐 것이란 바로 큰 재환(災患)이다. 나는 그것을 여의어야 한다. 어떻게 여의느냐 하면 나[我]와 내 것[我所]을 여의는 것이다. 어떻게 나와 내 것을 여의느냐 하면, 두 가지 법을 여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법을 여의는 것인가 하면 안팎의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평등(平等)을 행하는 것이요, 무엇이 평등이냐 하면 나의 평등과 열반의 평등이다. 왜냐 하면 나와 열반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空)이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공을 삼느냐 하면, 명자(名字)일 뿐이기 때문에 공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어서 이것은 평등일 수 있으며 다른 병이 없고 공의 병이 있을 뿐이며 공의 병 또한 공한 것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성품이 없고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라 함은 앞의 4구(句) 안의 두 가지 공을 쌍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공은 다 같이 단견(斷見)을 여읜 것이다. 결정코 있다 하면 상(常)에 집착하고, 결정코 없다 하면 단(斷)에 집착한 것이다.
  지금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니 이는 결정코 없는 것이 아니며,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이므로 역시 결정코 없는 것이 아니다. 결정코 없다면 한결같이 없는 물건이어서 마치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과 같다.
  이제 연으로부터 생기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결정코 없는 것이 아니요, 성품이 없고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은, 역시 앞의 4구 안의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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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존재[二有]를 쌍으로 해석한 것이며, 다 같이 상견(常見)이 아니로되 상견으로서의 존재가 있는 것은 정해진 성품으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이제 연으로부터 존재하고 정해진 성품으로서의 존재가 아니거늘, 하물며 성품이 없음에서 존재하겠으며, 어찌 결정코 존재하는 것이겠는가?
  연을 따르지만 성품이 없는 것은 마치 허깨비 사람과 같다. 허깨비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지만 허깨비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환유(幻有)라고도 말하고 또한 묘유(妙有)라고도 한다. 있는 것이 아니로되 있기 때문에 묘유라 하고, 또 환유는 바로 있지 않으면서 있는 것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있다 하여 있는 것이 아니로되 있지 않음도 아니므로 그를 이름하여 중도(中道)라 한다. 이것은 환유의 이치다. 진공은 바로 불공(不空)과 공(空)인 것이니, 불공과 공은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이 아니로되 공하지 않음도 아니므로 중도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공의 이치이다”라고 했다.
  경에 말씀하기를 “공과 불공은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진공이라 한다”고 했고, 『중론(中論)』의 게송에서는 “성품 없는 법 또한 없는 것이니/온갖 법이 공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암제차녀경(菴提遮女經)』의 게송에서는 “아아 참되신 대덕(大德)이시여/진실한 공의 이치 모르겠습니다./물질[色]이란 제 성품이 없는 것이거늘/어찌 공과 같지 않습니까?/공에 만약 저절로 공이 있다면/뭇 물질을 용납하지 않으련만/공이 저절로 공하지 않았기에/여러 가지 물질이 이로부터 나옵니다”라고 했다.
  또 첫째는 공과 존재가 서로 해치는 이치[空有相害義]이다. 이제 첫째 진공은 반드시 환유를 다하는 것[眞空心盡幻有]이니, 곧 참된 본체가 현상을 빼앗는 문[眞理奪事門]이다. 현상[事]으로써 본체[理]를 거두어서 성립시켜 마침내 현상의 모양[事相]으로 하여금 모두가 다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면 하나의 참된 본체만이 평등하게 나타난다. 참된 본체를 여읜 그 밖에는 조그마한 현상조차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물이 파랑을 빼앗으면 파랑은 다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반야경(般若經)』에서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공 안에는 물질[色]이 없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과 의식[識]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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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공과 존재가 서로 짓는 이치[空有相作義]이다. 진공이 반드시 환유를 이룬다[眞空必成幻有]는 것은, 곧 본체에 의하여 현상을 이루는 문[依理成事門]이다. 현상은 따로 체(體)가 없고 반드시 참된 본체로 인하여 성립된다. 모든 연기(緣起)는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는 본체로 말미암아 현상이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파랑이 물을 가지고 성립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여래장(如來藏)에 의하여 모든 법이 있게 된다. 『법구경(法句經)』에서 말씀하기를 “보살은 필경공(畢竟空) 안에서 왕성하게 이룩한다”라고 했다.
  셋째는 공(空)과 존재가 서로 어기는 이치[空有相違義]이다.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덮는 것[幻有必覆眞空]이니, 곧 현상은 능히 본체를 숨기는 문[事能隱理門]이다. 참된 본체는 연(緣)을 따라 현상의 법을 능히 이룬다. 그러나 이 현상의 법은 이미 본체를 어기어 마침내 현상을 나타나게 하므로 본체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현상을 여읜 그 밖에는 본체가 없기 때문이니, 마치 파랑이 물을 빼앗으면 물은 숨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물질[色] 안에 공이 없는 모양이다.
  넷째는 공과 존재가 서로 장애하지 않는 이치[空有不相礙義]이다.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장애하지 아니하는 것[幻有必不礙眞空]이니, 곧 현상이 능히 본체를 나타내는 문[事能顯理門]이다. 현상이 본체를 거두기 때문이니 현상은 공허하고 본체는 충실하다. 현상이 공허하기 때문에 현상을 갖춘 본체[全事之理]가 우뚝하게 드러난다. 마치 파랑의 모양이 비었음으로 말미암아 물로 하여금 드러나게 함과 같다. 『중론(中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만약 법이 연으로부터 생긴다면/이것은 곧 제 성품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이치는 바로 이것이 ‘앞의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공이다[緣生故空]’라는 등의 네 가지 이치이다.
  첫째의 ‘진공은 반드시 환유를 다한다’는 것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치[無性故空義]이며, 둘째의 ‘진공은 반드시 환유를 이룬다’는 것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이치[無性故有義]이며, 셋째의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덮는다’는 것은 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이치[緣生故有義]이며, 넷째의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장애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으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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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치[緣生故空義]이다.
  앞의 네 가지는 통틀어 공(空)과 존재[有]의 까닭을 밝힌 것이지만, 지금의 네 가지는 바로 공과 존재의 모양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과 존재는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것이니, 네 가지 이치는 두 곳에서 이름만이 다른 줄 알아야 한다.
  첫째의 진공은 반드시 환유를 다한다는 것은 진공(眞空) 위의 공의 이치요, 둘째의 진공은 반드시 환유를 이룬다는 것은 진공 위의 불공(不空)의 이치며, 셋째의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덮는다는 것은 환유(幻有) 위의 존재의 이치요, 넷째의 환유는 반드시 진공을 장애하지 않는다는 것은 환유 위의 비유(非有)의 이치이다.
  또 존재[有]와 비유(非有)와 공(空)과 비공(非空)에는 각각 두 가지씩의 이치가 있다.
  첫째는 존재 위의 두 가지 이치란, 첫째 이것은 존재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치[不壞有相義]요, 둘째 이것은 단멸을 막는 이치[遮斷滅義]이니, 존재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비유 위의 두 가지 이치란, 첫째 존재의 모양을 여의는 이치[離有相義]요, 둘째 바로 공의 이치[空義]이다.
  셋째는 공 위의 두 가지 이치란, 첫째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치[不壞性義]요, 둘째 결정코 있다는 것을 막는 이치[遮定有義]이니, 그러므로 공이라는 이름이면 공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는 비공 위의 두 가지 이치란, 첫째 공의 모양을 여의는 이치[離空相義]요, 둘째는 바로 존재의 이치이다.
  이미 명의(名義)를 알았으며, 이제는 융합되어 다섯 번의 겹침이 있어서 다섯 가지의 중도(中道)가 된다.
  첫째, 존재와 비유는 둘이 없어서 하나의 환유(幻有)가 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존재 위의 두 가지 이치가 저절로 합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 위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치와 비유 위의 존재의 모양을 여읜 이치를 취하였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환유가 된 것이어서 이것은 세속이치의 중도이다.
  둘째, 공과 비공(非空)은 둘이 없어서 하나의 진공(眞空)이 된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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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공 위의 두 가지 이치가 저절로 합한 것이다. 그러나 공 위의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치와 비공 위의 공의 모양을 여읜 이치를 취하였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진공이 된 것이어서 참된 이치의 중도가 된다. 앞의 하나는 모양에 즉한 모양 없음[相無相]의 중도가 되거니와, 여기의 하나는 곧 성품에 즉한 성품 없음[性無性]의 중도가 되는 것이니, 또한 이것은 있고 없어짐[存泯]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이다.
  셋째, 비공(非空)과 존재[有]는 둘이 없어서 하나의 환유가 된 것이니, 위의 일대(一對)는 공과 존재가 저절로 합한 것이요, 아래의 일대(一對)는 공과 존재의 네 가지 이치가 교차해서 합한 것이다. 지금의 이 셋째 것은 진공 위의 비공의 이치와 환유 위의 존재의 이치를 취한 것인데, 두 가지 이치는 서로가 따르면서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공 위에서 바로 존재의 이치를 취하였고, 존재의 위에서 단멸을 막는 이치를 취하였기 때문에 다 함께 환유를 이루게 되었다. 공이 아니면서 없지 않은 것이므로, 있고 없어짐에 걸림이 없는 중도이다.
  넷째, 공(空)과 비유(非有)는 둘이 없어서 하나의 진공이 된 것이니, 바로 넷째에서는 진공 위의 공의 이치와 환유 위의 비유의 이치를 취하였다. 두 가지 이치가 서로 따르면서 그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공 위의 결정코 존재를 막는 이치와 비유 위의 바로 공의 이치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이치가 서로 따르면서 진공을 이루게 된다. 존재가 아니면서 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므로, 있고 없어짐에 걸림이 없는 중도이다. 셋째 것은 바로 속이 있고 진이 없어짐[存俗泯眞]의 것이로되 여기서는 바로 진이 있고 속이 없어짐[存眞泯俗]의 것이다. 또 셋째는 바로 공이 존재에 통한 것이로되 지금의 이것은 존재가 공에 통한 것이므로 모두 두 가지 진리가 서로서로 통한다.
  다섯째, 환유(幻有)와 진공(眞空)은 둘이 없어서 한 맛의 법계[一味法界]가 된 것이니, 바로 다섯째에서는 통틀어 앞의 네 가지를 합하여 그로 하여금 둘이 아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위는 저마다 합하여 서로서로가 통하므로 다 같이 진공과 환유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제 합하여 한 맛의 법계가 되었으니 두 가지 진리가 함께 융화된 중도이다. 그러나 셋째와 넷째가 비록 두 가지 진리를 융합하였다 하더라도 공과 존재가 따로 융합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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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었거니와 지금 여기서는 공과 존재가 걸림 없어서 곧 이것은 공도 아니고 존재도 아닌 걸림 없는 것이어서 하나를 들면 모두를 거둔다.
  만약 진(眞)을 속(俗)과 같이한다면 하나의 환유뿐이며, 만약 속을 융합하여 진과 같이한다면 하나의 진공뿐이다. 공과 유가 둘이 없으면 쌍조(雙照)의 중도가 되고, 비공과 비유가 둘이 없으면 쌍차(雙遮)의 중도가 된다.
  차(遮)와 조(照)가 같은 때요, 있고[存]ㆍ없어짐[滅]이 걸림 없기 때문에 “상(相)을 여의고 성(性)을 여의며, 막음[障]이 없고 걸림[礙]이 없어서 분별이 없는 법문[無分別法門]이다”라고 한 것이다.
  환유는 모양[相]이 되고, 진공은 성품[性]이 된다. 또 공과 존재는 모두 모양이고 비공과 비유는 성품이 된다. 또 따로따로 드러나면 모양이 되고, 한데 융합하면 성품이 된다. 이제 서로가 빼앗고[互奪] 둘이 융합[雙融]하여 다 같이 모두를 떠난다.
  분별이 없는 법을 지혜[智]에만 의거하여 말하면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일 뿐이나 그 근원을 궁구하면 그것은 장애가 없어서 경지(境智)에 통하는 것이니, 위에서 다섯 번 겹친 것의 대부분이 경계에 결합시킨 설명이다.
  마음과 지혜가 계합하면 바로 5관(觀)이 되고, 5경(境)이 이미 융합되면 5관 또한 융합된다. 다 함께 융합된 지혜로 걸림 없는 경계에 계합되면, 마음과 경계가 걸림이 없어서 마음속에는 그지없는 경계가 있고 경계 위에는 걸림이 없는 마음이 있게 된다. 그 때문에 반드시 말을 잊어야 비로소 그 진리에 계합되는 것이니, 모두가 연기(緣起)의 매우 깊은 모양이 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약 공과 존재가 걸림이 없고 진(眞)과 속(俗)이 융통하면, 성품 없는 종(宗)과 연(緣)으로 생기는 도리가 마치 똑같이 신비한 변화와 같고 결정된 방향과 모서리[方隅]가 없으리라.
  비록 좁은 데에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넓어지고 비록 깊은 데에 있다 하더라도 한층 더욱 얕아지며, 혹 아래 있는데도 항상 위요, 멋대로 중간에 노는데도 곧 변두리며, 중생은 언제나 부처 몸에서 살고 열반은 생사에 의지할 뿐이다. 따라서 생각하기 어려운 미묘한 뜻이요, 망정으로써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성품 바다[性海]는 가장자리가 없어서 뭇 덕(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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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번성하여 넓어지며, 연으로 생김[緣生]은 측량할 수 없어서 많은 문(門)이 이로 말미암아 뚜렷이 통한다. 만 가지 차별을 회전하지 아니함이 없고 마르고 펴는[卷舒] 형상이 지혜를 따르며 융화되서 하나의 즈음[一際]이 되며, 열리어 합치는 세력이 마음을 따른다. 비춤[照]이 상황에 알맞게 함[機宜]을 잃지 않아 비록 차별이 난다해도 항상 수순하며, 작용이 체를 어기지 않아 비록 한 맛[一味]이라 해도 언제나 통한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티끌은 작은 분량도 무너지지 않으면서 시방(十方)에 두루하고 널리 온갖 것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이것은 분량으로 말미암는다면 분량조차 아니로되, 분량이 아니면서 곧 분량이다. 또 보고 듣고 하는 땅에 있으면서도 곧 보고 듣는 것으로는 미치지 못하며, 생각하고 말로 할 수 있는 즈음에 살면서도 곧 생각하거나 말로써는 측량하지 못한다. 모두가 부사의(不思議)한 체(體)여서 저절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곧 생각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경에 말씀하기를 “생각할 바를 생각할 수 없는 이것을 생각하기 어려움[難思]이라 한다”고 했다.
  법계관진공문(法界觀眞空門)에서 말하였다.
  “첫째 물질이 곧 공[色卽是空]인 것이니, 물질의 전체[擧體]는 온전히 진공(眞空)이어서 단공(斷空)에 즉(卽)하지 아니한다. 물질 등에 본래 이 진여(眞如)의 한 마음이 생멸(生滅)과 화합함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여 능변(能變)은 감관[根]의 몸과 기세간(器世間)을 일으킨다. 바로 이것은 이 안에서 밝힌 바 물질 등의 모든 법이기 때문에 이제 미루어보건대 도무지 그 자체가 없다. 그러므로 전체는 진심(眞心)의 공(空)에 돌아가며 단멸(斷滅)의 공에 돌아가지 아니한다.
  본래 단멸의 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단멸의 공이라면 이는 텅 비어서 아주 없는 것[斷滅]이므로 앎[知]도 작용도 없어서 만 가지 법을 나타낼 수 없다. 마치 거울 밖의 허공은 같은 거울 속의 허공이 아닌 것과 같다. 물질 모양이 완연(宛然)한데도 구하면 얻을 수 없으므로 그를 말하여 공이라 한다.
  또 이 물질의 법은 반드시 진공과 다르지 아니하며, 모든 물질의 법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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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물질이 곧 공이다. 이미 물질을 없애고 공을 취하거나 물질을 여의고 공을 구한 것이 아니다. 또 형색(形色)과 현색(顯色)의 모양에 즉하지 아니한 공이다. 또 형색과 현색을 여의지 아니한 체가 없는 공이란, 바로 진공이다. 만약 물질 모양에 즉하지 않았다면 곧 변계소집(遍計所執)이 없고, 체 없음을 여의지 않았다면 바로 의타(依他)의 연기(緣起)이며, 연기요 성품 없는 진리면 바로 원성(圓成)이다.
  둘째, 공은 곧 물질[空卽色]임을 밝힌 것이니, 진공은 반드시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공은 곧 물질이다’라고 한다. 왜냐 하면 이 진공은 반드시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며 이 법무아(法無我)로써 단멸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은 곧 물질이다. 만약 현상[事]을 여의고 공의 본체[理]를 구한다면 곧 단멸을 이루는 것이어서 현상에 즉하여 나 없음과 성품이 없는 진공(眞空)의 본체를 밝히는 것이니, 현상을 여의면 무슨 본체가 있겠는가?
  진여가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모든 현상의 법[事法]을 이룬다면, 온 공이 온전히 물질이요 온 본체가 온전히 현상이다. 또 진여가 바로 연을 따를 때에 자성을 잃지 아니하면, 온 물질이 온전히 공이요, 온 현상이 온전히 본체다.
  셋째, 공과 물질은 걸림이 없는 것[空色無礙]이니, 물질의 온 체성은 온전히 물질을 다한 공이기 때문에 물질이 다하면 공이 나타난다. 공의 온 체성은 온전히 공을 다한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여 공 그대로가 물질이면서 공은 숨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물질을 보면 공을 보지 아니함이 없고, 공을 보면 물질을 보지 아니함이 없어서 장애가 없어서 한 맛의 법[一味法]이 된다. 마치 온 물결은 온전히 하나의 물이요, 온 물은 온전히 온 물결인 것과 같다. 물결과 물은 걸림이 없이 때를 같이하면서 물 자체는 우뚝하게 완전히 드러난다. 마치 공 그대로가 물질이면서 공은 숨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보장론(寶藏論)』에서 말하였다.
  “공을 공이라 하면 참 공[眞空]이 아니요, 물질을 물질이라 하면 참 물질[眞色]이 아니다. 참 물질은 형상이 없고 참 공은 이름이 없다. 이름 없음이 이름의 아버지요 형색 없음이 형색의 어머니이니, 만물의 근원이 되고 천지의 태조(太祖)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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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론(肇論)』에서 말하였다.
  “본래 없는 것[本無]과 실상(實相)과 법의 성품[法性]과 성품이 공[性空]함과 인연으로 모임[緣會] 등은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왜냐 하면 온갖 모든 법은 인연이 모여서 생기기 때문이다. 인연이 모여서 생겼다면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요,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는 없는 것이므로 인연을 여의면 소멸된다. 만약 그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비록 지금 현재 있다 하더라도, 있는 것은 성품이 언제나 스스로 공하다. 성품이 언제나 스스로 공하기 때문에 그를 말하여 성품의 공함[性空]이라 한다. 법의 성품도 이와 같기 때문에 실상(實相)이라 한다. 실상은 스스로 없는 것이요, 추리해서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래 없다고 한다.
  있지 아니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말은, 있다는 소견[有見]과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의 있는 것과 삿된 소견[邪見]과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의 없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만약 있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니, 있는 것이 이미 있지 않다면 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을 두지 않고 법을 관찰한 이면, 법의 실상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지 3승(乘)이 평등하게 성품이 공함을 관찰하여 도를 얻는다.
  성품이 공하다 함은, 모든 법의 실상이다. 법의 실상을 보기 때문에 바른 관찰[正觀]이 되고, 만약 그와 다르다면 삿된 관찰[邪觀]이 된다. 설령 이승(二乘)이라 하여도 이 이치를 보지 못하면 뒤바뀐 것[顚倒]이다. 그러므로 3승의 관법(觀法)에는 다름이 없고, 다만 마음의 크고 작음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또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 말하였다.
  “지극히 비어서 남이 없다[至虛無生] 함은 대개 이것은 반야로 현묘하게 조감하는 미묘한 의취요, 물이 있다는 종의 지극한 것이다.
  만약 거룩하게 밝고 특별하게 통달하지 아니하면, 어찌 있다ㆍ없다 하는 사이에 신령스럽게 계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신령스런 마음을 무궁(無窮)에 통하되 궁구하는 것이 막힐 수 없고, 귀와 눈을 보고 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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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하되 소리와 빛이 금제하지 못하거늘, 어찌 만물의 스스로 허활함[自虛]에 즉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물질이 그의 신명(神明)에 누(累)를 끼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진심(眞心)을 타고 그로써 이치를 따르므로 걸리는 것마다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한 기운[一氣]를 살피어 그로써 관(觀)하며 교환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마다 순조롭고 알맞다. 걸리는 것마다 순조롭고 알맞기 때문에 물건을 접촉하되 한결같다.
  이와 같다면 만 가지 형상이 비록 다르나 스스로 다를 수가 없고 스스로 다를 수가 없기 때문에 형상이 참 형상이 아닌 것을 안다. 형상이 참 형상이 아니라면, 비록 형상이라 하더라도 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물아(物我)가 같은 뿌리요, 시비(是非)가 한 기운이어서 은밀하고 깊숙이 숨어서 전혀 뭇 망정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약 진심을 타고 만물의 체가 되면 무슨 물건인들 돌아오지 않겠으며, 한 기운을 가지런히 하여 때를 관찰한다면 어느 때인들 모이지 않겠는가? ‘어느 때인들 모이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곧 경계에 접촉하여 남이 없음[無生]을 아는 것이요, ‘무슨 물건인들 돌아오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곧 물건 성품의 스스로 비었음을 보는 것이다. 만약 뜻대로 비춘 바라면, 어찌 그 깊숙한 뜻[旨]을 다할 수 있겠는가?
  만약 종(宗)을 깨치지 못하면 소견의 자취를 벗어나기 어렵다. 가령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있다[有]고 함에 있을 때에는/언제나 있다 하는 사람에게 속아서/가지가지로 분별을 내며/보고 듣고 하는 데에 시비(是非)가 많았네.
  나중에는 없다[無] 함에 앉아 있으면서/또 없다 하는 사람에게 속았으나/한결같이 마음을 살펴보며 앉아 있자/조용하고 은미(隱微)하여 알 바가 없었네.
  있다ㆍ없다 하는 것은 다 같이 집착이니/어느 것이 함이 없음[無爲]인가?/있다ㆍ없다 함은 동일한 체성이라/모든 모양[相] 다하면 모두가 여의네.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허공은 의지할 바 없는 것이니/만약 모양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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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를 논한다면/부왕(父王)께서만 아실뿐이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있다ㆍ없다 하는 모든 법의 구경(究竟)을 구하고자 하면 유심(唯心)이라야 비로소 증득할 것이다. 만약 아직 마음에 돌아가지 못하면 모두 장애를 이루어 상(常)이 되고 단(斷)이 되며 시(是)를 이루고 비(非)를 이룰 것이다.
  이 종(宗)에 들기만 하면 저절로 융합되고 즉(卽)하리니, 먼저 그 일어나는 곳을 밝히면 제 마음이 나는 것을 안다. 이미 마음으로부터 난 것이라면 만 가지 법은 연(緣)을 따르는 것이어서 모두는 체성(體性)이 없으리니, 반드시 마음 밖의 법이 없고 마음과 더불어 연(緣)이 되며 모두가 제 마음에서 나는 것이므로 도리어 마음과 더불어 모양을 이룬다.
  공(空)과 존재[有]만을 논한다면 모든 법에 널리 밝힐 수 있다. 왜냐 하면 공과 존재는 온갖 법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 공과 존재의 두 가지 문은, 또한 본체[理]와 현상[事]의 두 문이요, 또한 성품[性]과 모양[相]의 두 문이요, 또한 체성[體]과 작용[用]의 두 문이요, 또한 참됨[眞]과 범속[俗]의 두 문이다. 그리고 총(總)ㆍ별(別)과 동(同)ㆍ이(異)와 성(成)ㆍ괴(壞)와 이(理)ㆍ양(量)과 권(權:방편)ㆍ실(實)과 권(卷)ㆍ서(舒)와 정(正)ㆍ조(助)와 수(修)ㆍ성(性)과 차(遮)ㆍ조(照) 등에 이르기까지 혹은 서로가 돕고 서로가 거두며, 서로가 옳다 하고 서로가 그르다 하며, 서로가 두루하고 서로가 이루며, 서로가 해치고 서로가 빼앗으며, 서로가 즉(卽)하고 서로가 존재하며, 서로가 덮고 서로가 어기기도 하는, 낱낱의 이러한 것이 저마다 호응해서 통하게 된다.
  이제 한 마음의 성품 없는 마음으로써 한꺼번에 다 거두어들이면, 명(名)ㆍ의(義)가 나란히 끊어지고 경(境)ㆍ관(觀)이 다 같이 녹아서 뜻[旨]에 계합하게 되고 말을 잊으면 다 함께 종경(宗鏡)에 돌아간다.
  그러므로 행상(行相)과 명의(名義)의 차별을 밝혀야 비로소 체성이 융통하게 된다. 만약 먼저 가로 세로로 늘어 펴지 아니하면, 그 뒤에 어찌 한 문(門)으로써 말아 거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환원관(還原觀)』에서 이르기를 “작용은 체성에 나아가 나누어지면서 차별된 형세가 없지 아니하고, 현상은 본체에 의하여 나타나면서 스스로 한 즈음의 형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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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이 미세하게 분석하면서 공과 존재의 두 문을 자세하게 밝혔으니, 만 가지 법의 근본과 원유를 얻었고 모든 인연의 일어남과 다함을 궁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있다[有]ㆍ없다[無]의 두 가지 법에 미혹한 까닭으로 96종(種)의 삿된 이들이 이로 인하여 일어나며, 62견(見)의 이사(利使:번뇌)가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보살조차 오히려 아직 그 근원을 다하지 못했거늘, 범부가 어찌 그 뜻을 궁구할 수 있겠는가?
  그 까닭에 『보성론(寶性論)』에서 말하였다.
  “뜻이 부질없이 산란한 보살은 이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오히려 세 가지 의심이 있으니, 첫째 의심은 공(空)이 물질[色]을 소멸시켰다고 하여 단멸(斷滅)의 공을 취하는 것이요, 둘째 의심은 공이 물질과 다르다고 하여 물질 밖의 공을 취하는 것이요, 셋째 의심은 공이 물질이어서 공이 있다 함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에서 선재(善財)가 모든 부처님을 차례로 섬긴 뒤에 법문을 증득하였으나 모든 법이 있다고 헤아림이 없었으니, 구경에까지 멀리 여읜 사람은 오직 대보살이 된 사람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있다ㆍ없다는 두 소견이 남음 없이 사라진/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부처님은 설하셨네”라고 했고,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있다ㆍ없다는 두 소견이 다시는 남은 습기가 없다”고 했으며, 또 게송에서는 “설법은 있지 않고 없지도 아니하며/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긴다”라고 했다.
  왜냐 하면 만약 시기(時機)의 인연에 존재[有]를 집착하면 공의 문[空門]을 말하였고, 만약 시기의 인연에 공을 집착하면 존재의 교리[有敎]를 말하였기 때문이다.
  존재를 깨뜨리기 위하여 공을 두지 아니했고, 공을 다스리려는 까닭에 존재를 세우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데도 존재하지 아니함을 설명하고, 공한데도 공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혹은 나란히 없는데도 둘이 다 흐르기도 하고, 혹은 둘 다 비추면서 나란히 고요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깨뜨리고 세움이 한 즈음이요, 막고 비춤이 같은 때다.
  『조론초(肇論鈔)』에서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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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논(論)의 글에 나아가 보면, 통틀어 네 가지 뜻이 있는데 두루 원만한[周圓]의 뜻을 드러냈다. 첫째는 실제를 깨뜨려서 공을 드러내고[破實顯空], 둘째는 공을 깨뜨려서 거짓임을 드러내며[破空顯假], 셋째는 공일뿐이요 거짓일 뿐이라는 것을 깨뜨려[破唯空唯假] 또한 공이기도 하고 거짓이고 함을 드러내며[顯亦空亦假], 넷째는 또한 공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함을 깨뜨려[破亦空亦假]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님을 드러낸 것[顯非空非假] 이니, 바로 이것이 중도(中道)요, 비로소 두루 원만함이라 한다.”
  그러나 네 가지 이론은 모두가 두루 원만함이 있다. 이제 하나하나 말하여 보자. 우선 네 가지 이치를 요약해보자. 첫째는 경계[境]에 맞추어서 보고, 둘째는 지혜[智]에 맞추어서 보며, 셋째는 결과[果]에 맞추어서 보고, 넷째는 경계와 지혜와 결과[境智果]에 맞추어서 본다.
  첫째 경계에 맞추어서 본다 함은,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 이르기를 “곧 물건은 따르고 통하기[物順通] 때문에 물건이 그를 거스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제를 깨뜨리고 공을 드러내어 범부의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곧 거짓이 그대로 참된 것이기 때문에 성품은 그를 바꾸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공을 깨뜨리고 거짓임을 드러내어 성문(聲聞)의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
  “성품은 그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이요, 물건은 그를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있다 해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있음[有]도 깨뜨리고 없음[無]도 깨뜨려서 또한 공하고 또한 거짓임을 드러내어 보살의 경계를 말한 것이다. “비록 있다 해도 없음은 이른바 있는 것이 아니요, 비록 없다 하더라도 있음은 이른바 없는 것이 아니다”고 했는데 이것은 또한 공하고 또한 거짓이어서 보살의 집착을 보내 없애는 것이라 중도인 제일공(第一空)의 부처의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경계가 두루 원만함의 것이다.
  둘째의 지혜에 맞추어서 본다 함은, 반야(般若)의 이론이다. 만약 반야의 지혜로 낱낱이 공과 거짓[假] 등의 경계를 정연히 늘여 세우면 심량(心量)을 이루는 것이니 이는 지혜가 있는 것뿐이요, 지혜가 없는 뜻은 얻지 못한다. 지금의 것은 앞의 지혜에 결부시켜 이 하나의 경계를 아는 것이니, 곧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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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원만해야 한다.
  논(論)에 이르기를 “안다고 해도 앎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 조감하는 작용을 소통시키려 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범부가 형상에 집착하여 아는 것을 타파하여 무지(無知)임을 논변한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함은 그 모양을 논변하려 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모양을 잘 분별하면 없는 것이 되지 아니하며, 거울 보듯 환히 알면 있는 것이 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임을 논파하여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님을 드러낸 것이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면서도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으면서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님을 논파하여 아는 것도 또한 앎이 없음을 잘 논변한 것이다.
  앞에서부터의 네 가지 이치의 설명이 비록 앞뒤가 다 같이 한 마음에 있다해도 즉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므로[不卽不離], 부처님의 지혜가 두루 원만한 것이라 말할 만하다.
  셋째의 결과에 의거해서 말한다고 한 것을 살펴보자.
  곧 『열반론(涅槃論)』의 글에 이르기를 “있다 해도 있다고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유여열반(有餘涅槃)을 깨뜨려서 성문의 항상하다[常]는 집착을 버리게 한 것이고, “없다 해도 없다 하지 않는다”고 함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깨뜨려서 성문의 아주 없다[斷]는 집착을 버리게 한 것이다.”
  “없다 해도 없는 것이 아니므로 없다 해도 있으며, 있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 해도 없다”는 것은 있다ㆍ없다 함을 깨뜨려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있다 해도 없으므로 이른바 있는 것이 아니요, 비록 없다 해도 있으므로 이른바 없는 것이 아니다”고 한 이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깨뜨려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드러내어 중도의 부처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니, 머무름이 없는[無性] 열반의 결과가 두루하고 원만하다.
  넷째의 경계ㆍ지혜ㆍ결과의 세 가지를 합하여 말한 것은 바로 앞에서의 여러 가지 논한 글을 통틀어 거두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이론에서 진제(眞諦)는 모양 없음의 경계여서 진공(眞空)이 되며, 반야(般若)는 참된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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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觀)하는 바여서 만 가지 행[萬行]의 근본이므로 묘유(妙有)가 된다.
  오히려 경계는 지혜를 일으키고 지혜로 말미암아 경계를 드러내며, 경계와 지혜는 서로가 드러내어 또한 공도 되고 또한 존재도 되는 것이니, 곧 열반의 이론 안의 세 가지 덕[三德]이 서로 명합하여 경계와 지혜가 둘이 아니다.
  아주 없지도 아니하고 항상하지도 않으며 공(空)이 아니고 존재도 아닌 것이어서 열반의 지극한 결과라 말할 만하다. 바로 여래의 일대 교화[一化]의 뜻이요 다 같이 두루하고 원만하기 때문에 불법의 깊은 바다가 다하여 없어진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공(眞空)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니, 미묘하게 뜻[指歸]을 얻어야 한다. 만약 공과 존재의 글만 따른다면, 모두가 삿된 소견에 떨어질 것이다.
  『앙굴마라경(鴦崛魔羅經)』에서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이를테면 어떤 어리석은 범부가/우박을 보고서 망령된 생각을 내어/이것은 유리(瑠璃)의 구슬이라 말하면서/취득한 뒤에 가지고 돌아가서는/그것을 병 속에다 놓아두고서/지키기를 진짜의 보배처럼 여기는데/오래지 않아서 모두 녹아버리자/공하다는 생각으로 잠자코 있다.
  그 밖의 진짜의 유리에 대해서조차도/또한 다시 공하다는 생각을 짓듯/문수(文殊)도 또한 그러하여서/지극한 공적(空寂)을 닦아 익히도다.
  언제나 공하다는 생각을 지어/온갖 법을 깨뜨리고 무너뜨리거니와/해탈(解脫)은 진실로 공하지 않는데도/지극히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구나.
  마치 우박이 녹는 것을 보고/함부로 그 밖의 진실한 것 파괴하듯/그대 이제 또한 그와 같아서/함부로 극히 공하다는 생각을 낸다.
  공한 법을 보고 나서는/공하지 않은 것도 공이라 하나/다름이 있는 법이 바로 공이요/다름이 있는 법이 공하지 않다.
  온갖 모든 번뇌는/비유하면 저 우박과 같고/온갖 불선(不善)으로 무너뜨림은/마치 우박이 녹는 것과 같다.
  마치 진짜의 유리 보배를/여래의 상주(常住)라 말하는 것 같고/마치 진짜의 유리 보배를/이는 부처의 해탈이라 함과 같다.
  허공의 빛깔[色]은 바로 부처요/빛깔이 아님[非色]은 바로 2승(乘)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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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의 빛깔은 바로 부처요/빛깔이 아님은 바로 2승이다.
  어떻게 지극히 공한 모양을/참된 해탈이라 말하는가./문수여, 자세히 생각해야 하리니/분별하는 생각 아님이 없음을.
  비유하면 사람 없는 빈 마을에/시내까지 마르고 병 속에 물조차 없음에/저 모든 그릇이 텅 비지 않은 것 없어/그러므로 공이라 하는 것과 같다네.
  여래의 참된 해탈이야말로/공하지 않음 또한 이와 같으며/온갖 허물을 벗어나기 때문에/해탈공(解脫空)이라 말하느니라.
  여래는 진실로 공하지 않았으나/온갖 번뇌와 모든 하늘 및/사람의 음(陰)을 여의었나니/그러므로 공이라 이름하느니라.
  슬프다. 모기와 등에의 행(行)으로는/진공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니/외도들 또한 공을 닦거니와/니건(尼乾)아, 잠자코 있어야 되느니라.”
  그러므로 외도는 단공(斷空)에 집착하고 2승(乘)은 단공(但空)을 증득하는 것은 다 같이 한 마음의 진공의 도리는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생의경(無生義經)』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이르기를 음 지니기를 마치 허공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나, 이것은 단공(斷空)이 아니다. 그때 오히려 미묘한 정신[妙神]이 있다는 것은 미묘한 의식[妙識]과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물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음 지니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어디에 다시 미묘한 정신이 있는 곳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경에서 말씀하신 음 지니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고 한 것은 다만 이는 마음을 지녀서 나지 않게 할 뿐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이 하라고 말한 것이요, 바로 이것은 공이 아닌지라 경에서 공과 같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약 식(識)이 두 가지 법에 있으면 기쁨[喜悅]이 있고, 만약 식이 둘이 없는 실제(實際)의 법 안에 있으면 기쁨이 없다>고 하셨다. 실제는 바로 이는 법성(法性)이요, 공한 식[空識]은 바로 미묘한 정신이니, 그러므로 실제 안에 미묘한 정신이 함유된 것이다.’”
  『화엄경』의 「성기품(性起品)」에 열 가지 비유를 들면서 법신불(法身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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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마음이 있음을 밝힌 데서, 대사(大師)가 말하였다.
  “비록 미묘한 정신이 있으나 신령한 성품이 나지 않음은 여(如)와 일체이니, 마치 얼음에서 환원된 물은 물과 일체이고 물 또한 얼음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얼음의 성품이 없다면 추위에 얼음을 얼린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여(如) 중에도 미묘한 정신이 있어서 성품이 여와 같이 청정하면 나타나고 청정하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 내지 마치 스승의 성씨가 부(傅)일 때, 부라는 성씨는 몸속에서도 찾지 못하고 몸 밖에서도 찾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부라는 성씨는 이것은 공이로되 이는 단공(斷空)의 공이 아니며 부라는 성씨 안에는 모든 남녀가 함유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품의 공(空)은 허공과는 다르고 불성(佛性)은 바로 공이요 모든 부처의 법신(法身)은 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사는 경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여인 몸의 색상(色相)은 존재함이 없고[無在] 존재하지 아니함이 없다[無不在].”
  ‘존재함이 없고 존재하지 아니함이 없다’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해석하여 보자. 여인 몸의 색상은 곧 여(如)이기 때문에 존재함이 없다고 말하며, 여의 성품은 참되고 항상하며 체성은 뭇 모양을 포함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다. 포함한다[含]고 함은 남녀 색상 등의 모양이 함유되었다는 것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보살의 염법[菩薩念法]을 밝히면서, “선남자야, 오직 이 법정은 시절(時節)이 없어서 법안(法眼)으로 볼 바요,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나지도 않고 달아나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비롯하지도 않고 마치지도 않으며 밝음[明]도 없고 수(數)도 없나니, 이것은 바로 여(如)의 체를 밝힌 것이다. 맺음[結]도 아니고 업(業)도 아니며 맺음을 끊고 업을 끊는 것이로되 역시 업이요, 남자가 남자를 끊는 것이 아니로되 역시 남자며, 있음[有]이 있음을 끊는 것이 아니로되 역시 있음이요. 듦[入]이 듦을 끊는 것이 아니로되 역시 듦이며, 내지 모든 부처의 노니는 바 거처도 언제나 변하거나 바꾸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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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법이라 하느니라”고 했다.
  위에서와 같이 공(空)과 유(有)의 두 문을 간략하고 자세한 그 이치로써 마침내 있고 없어짐과 열고 합침을 설명하였고, 또 그 망정의 집착을 깨뜨리면서 즉리(卽離)와 유무(有無)를 해설하였다. 만일 견성(見性)하여 증득하고 깨치는 때를 당하면, 지혜와 이해[智解]가 함께 끊어지리라.
  『민절무기관(泯絶無寄觀)』에서 말하였다.
  “이 관(觀)할 바 진공(眞空)은 물질[色]에 즉(卽)하거나 물질에 즉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고 공에 즉하거나 공에 즉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온갖 모두가 옳지 않고 옳지 않는다는 것 또한 옳지 않으며, 이런 말조차도 받지 않아서 멀리 끊어져 붙는 데가 없고 말로 미칠 바가 아니요 이해로 이를 바도 아니니, 이것을 행경(行境)이라 한다. 왜냐 하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이내 법체(法體)에 어긋나고 바른 기억[正念]을 잃기 때문이다. 내지 만약 앞의 지해(智解)가 환히 밝지 않으면 이 수행[行]을 이룩함이 없고, 만약 이 수행의 법을 알지 않으면 앞의 지해에서 끊어져 그 바른 지해를 이룩함이 없으며, 만약 지해를 지키면서 버리지 않으면 이 바른 수행에 들어감이 없다. 이 때문에 수행은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되 수행이 일어나면 지혜는 끊어진다.”
  고석(古釋)에 말하였다.
  “공(空)이 만약 물질에 즉한다[卽色] 하면, 성인은 범부가 보는 망령된 물질과 같아져야 하고 범부는 성인이 보는 참된 공과 같아져야 하며, 또 두 가지 진리도 없어야 한다.
  공이 만약 물질에 즉하지 않는다면, 물질 밖의 공을 보게 되고 거룩한 지혜가 이룩될 이유가 없으며, 또 범부와 성인은 영영 따로따로이어야 되리니 성인은 범부로부터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물질이 만약 공에 즉한다면, 범부의 미혹으로 물질을 보되 성인의 지혜로 공을 보는 것과 같아져야 하며, 또 두 가지 진리도 상실된다. 물질이 공에 즉하지 않는다면, 범부가 보는 물질은 미혹하지 않아야 하고, 또 보는 바 물질은 길이 참된 공과 동떨어져서 영원히 성인을 이루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이내 법체에 어긋나고 바른 기억을 잃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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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라 함은, 참된 공의 이성(理性)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거늘[如然] 다만 그에 미혹한 생각을 움직이며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비록 추구하며 간정(簡情)을 깨뜨리고 지해(智解)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이제는 간정은 잊고 지해는 없어져서 다만 이는 본진(本眞)뿐인데 어찌 새로 생기는 지해의 수(數)가 있겠는가? 만약 지해의 수가 있다면 이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되고, 생각을 움직이고 마음을 내기 때문에 바른 생각을 잃게 된다. 바른 생각이란, 생각이 없이 아는 것이다. 만약 아주 앎이 없다 하면 어찌 바른 생각을 이루겠는가?
  또 해석[解]은 망정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요, 설명[說]은 그로 인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망정이 소멸되고 집착이 상실되면, 설명과 해석이 어찌 있겠는가? 참된 성품은 분명하고 고요하여 있거나 없어짐이 없다.
  그런 까닭에 만약 즉하거나 즉하지 않는다[卽不卽]고 말하면 모두가 시비(是非)에 떨어지고, 문득 있다거나 없다거나 함에 매달리면 곧 바른 생각이 아니다. 때문에 이르기를 “시비가 있기만 하면 산란해지면서 마음을 잃는다”고 했다.
  [문] 있다거나 없다거나 함에 간섭하면 모두가 삿된 소견을 이루고, 만약 능소(能所)에 관여하면 모두가 앎이 있음[有知]에 떨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곧 생각하면서도 앎이 없는 것[無念而知]이 되는가?
  [답] 상서로운 풀은 좋은 때에 나고, 수풀의 꽃은 이른 봄에 망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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