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0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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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0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범부와 성인이 한 마음의 경계라면 무엇이 자재하게 출생하는데 걸림이 없는 힘인가?
  [답] 첫째는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행원(行願)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셋째는 곧 중생이 믿고 아는 제 업[自業]으로 감촉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또 통틀어 열 가지 힘을 갖춘다. 첫째는 법이 그렇게 된 힘[法如是力]이요, 둘째는 공하여 성품이 없는 힘[空無性力]이요, 셋째는 모든 부처님의 신령한 힘[諸佛神力]이요, 넷째는 보살의 착한 뿌리 힘[菩薩善根力]이요, 다섯째는 보현행원의 힘[普賢行願力]이요, 여섯째는 중생의 깨끗한 업의 힘[衆生淨業力]이요, 일곱째는 깊이 믿고 훌륭하게 아는 힘[深信勝解力]이요, 여덟째는 환술과 같은 법으로 일으키는 힘[如幻法生力]이요, 아홉째는 꿈과 같은 법으로 나는 힘[如夢法生力]이요, 열째는 지음이 없는 참 마음으로 나타내는 힘[無作眞心所現力]이다.
  또 『화엄소(華嚴疏)』에서 해석하여 말하였다.
  “하나와 여럿이 서로 부지하여 서로가 본말이 되면서 한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통틀어 열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외로이 드러나면서 혼자 서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혼자 서며 주인이 된다. 둘째는 쌍으로 나타나되 때를 같이하는 것이니, 저마다 서로가 돕고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양쪽이 다 함께 없어지는 것이니, 서로가 빼앗고 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숨고 나타남이 때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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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한 즈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고 오되 요동하지 않는 것이니, 저마다 근본의 법에 머무르고 제 위치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힘이 없되 서로 부지하는 것이니, 힘 있는 것으로 힘 없는 것을 부지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피차가 모르는 것이니, 저마다 제 성품이 없어서 법과 법이 서로가 모르며 서로가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힘과 작용이 서로서로 통하는 것이니, 다른 체상(體相)으로 힘 있는 것에 들어가 서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니, 체성(體性)이 없어야 비로소 즉(卽)하고 들어가서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마침내 말을 떠나는 것이니, 성덕(性德)에 명합하고 과해(果海)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외로이 드러나면서 혼자 선다[孤標獨立]’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여럿 안에 하나의 성품 없고/하나에 또한 여럿이 없다./두 가지 법이 서로 없기 때문에/혼자 서게 되어 역시 하나다”라고 했다. 여럿에 즉하면 여럿일 뿐이요, 여럿이 하나에 즉하면 하나일 뿐이다. 자기를 깨뜨리고 다른 것과 같아지기 때문에 혼자 선다고 말한다.
  둘째의 ‘쌍으로 나타나되 때를 같이한다[雙現同時]’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이기 때문에 여럿임을 알고/여럿이기 때문에 하나임을 안다./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고/여럿이 없으면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쌍으로 나타나서 다시는 앞뒤가 없는 것이니 마치 소의 두 뿔과 같다.
  셋째의 ‘양쪽이 다 함께 없어진다[兩相俱亡]’고 함은 바로 앞의 것 두 가지가 다 함께 버려지는 것이다.
  넷째의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自在無礙]’고 함은 하나를 바라면 곧 하나라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요, 여럿을 바라면 곧 여럿이라 하나가 그대로 여럿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이미 그와 같다면 여럿도 이것에 준(準)하는 것이니, 항상 하나요, 항상 여럿이며, 항상 즉하고 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재하다고 한다.
  다섯째의 ‘가고 오되 요동하지 않는다[去來不動]’고 함은 하나가 여럿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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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는데도 하나로 있게 되고 여럿이 하나에 드는데도 여럿으로 존재한다. 마치 두개의 거울이 서로 맞대어 들어도 본래 모양은 요동하지 아니하고 상즉(相卽)함도 또한 그러하다.
  여섯째의 ‘힘이 없되 서로 부지한다[無力相持]’고 함은 하나로 인하여 여럿이 있고 여럿은 힘이 없으면서도 하나를 부지하며, 여럿으로 인하여 하나가 있고 하나는 힘이 없으면서도 여럿을 부지한다는 것이다.
  일곱째의 ‘피차가 모른다[彼此無知]’고 함은 두 가지가 서로서로 의지하면서도 모두가 체(體)와 용(用)이 없으므로 서로가 알지 못한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에는 작용이 없고/또한 체성이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온갖 것은/저마다 서로 모르느니라”고 함과 같다.
  여덟째의 ‘힘과 작용이 서로서로 통한다[力用交撤]’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 안에서 한량없음을 알고/한량없음 안에서 하나의 이치를 안다”라고 했다.
  아홉째의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自性非有]’고 함은 서로서로가 인연으로 생기게 된 것이어서 온 체성이 공하다는 것이다.
  열째의 ‘마침내 말을 떠난다[究竟離言]’고 함은 하나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하나라거나 하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니라거나 하나가 아님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상즉(相卽)이라고 말할 수도 없음은 상입(相入)이기 때문이요, 상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상즉이기 때문이며, 상즉ㆍ상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요, 상즉ㆍ상입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서로서로가 통하기 때문이다.
  입으로 말하려 하나 말을 잃었고 마음으로 묶어두려 하나 생각이 쉬었다. 증득하여 알 뿐이니, 물결과 바다가 같기 때문이다. 하나와 여럿이 이미 그렇다면 더럽거나 깨끗함 따위의 법이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다.
  또 한 마음의 원(圓)과 별(別)의 이치로서 걸림 없는 힘에서 보면, 원과 별의 두루한 이치가 미세하여 분별하기 어렵다면 반드시 차별이 있어야 능변(能遍)이요, 만약 차별되지 않고 능변으로 뚜렷하지 않다면 차별이면서 능변이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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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변의 법은 하나하나가 원융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원융(圓融)이라 함은 하나의 모임이 저 온갖 것의 모임이어서 이 모임이 곳곳마다 이르는 것도 아니다. 이것 그대로가 저것이요, 하나 그대로가 여럿이기 때문에 원융이라고 한다.
  또 소변(所遍)의 것에서 총(總)과 별(別)을 논한다면 동쪽이라는 이름이 서쪽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면 소변의 별이요, 이 모임 그대로가 저 모임이라 하면 소변의 총이다.
  또 능변에서 원과 별을 논하면, 반드시 차별된 법을 가져야 두루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별이라 하며, 지금의 이 원융하여 차별이 없는 법은 바로 능변이기 때문에 원이라 한다.
  앞의 별(別)은 마치 줄지어선 별이 구천(九天)에 두루한 것과 같고 여기의 별은 하나의 달[月]이 백천(百川)에 떨어진 것과 같으며, 앞의 총(總)은 마치 한 낱 구름이 우주를 가득 채운 것과 같고 여기의 원(圓)은 마치 어울린 향훈이 한 방에 두루한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총과 원은 다르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이 화장계(華藏界)가 숨고 나타남이 자재함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훌륭한 복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곧 갖춘 형상은 만 가지로 다르되, 광명은 환히 비춘다.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뜻에 취착(取着)이 없게 하면, 마치 환영의 구름이 흩어진 것과 같아서 한 물건도 얻을 바가 없는데, 있다 하면 그것은 계교(計校)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원과 지혜 힘과 법 성품의 자체는 공하여 성품이 없는 힘이므로 숨거나 나타남이 자재하다. 만약 법의 성품을 따른다면 만 가지 모양이 도무지 없고 지혜의 힘을 따른다면 뭇 모양이 따라서 나타난다. 숨거나 나타남이 인연을 따르며 도무지 짓는 이가 없는데, 범부가 집착하여 무명을 짓는다. 집착의 장애가 이미 없다면 지혜의 작용이 자재하여 하나의 참된 경계를 떠나지도 않고서 화(化)하는 거동이 백 가지로 변한다.
  그러므로 범으로 오인하여 화살로 돌을 뚫음은 공력으로는 능할 바가 아니니, 취하여 삼군(三軍)을 호령함이 어찌 누룩으로 만들어지겠으며, 죽순이 차가운 골짜기에서 돋아남은 어찌 봄날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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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고기가 얼음 위로 뛰어오름이 어찌 그물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는가? 모두가 마음의 느낌에서 이런 영통(靈通)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 가지 법의 되는 일은 모두가 제 마음의 힘일 뿐이다. 만약 믿어 받아서 이 능력을 갖춘다면 장애의 문이 널리 열리고 업(業)의 바다가 바짝 마르리라.
  그런 까닭에 『인왕경(仁王經)』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의 청정한 믿음을 능히 일으키면, 이 사람이야말로 백 겁ㆍ천 겁이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겁의 온갖 고난을 벗어나서 나쁜 갈래에 나지도 않고 오래지 않아서 위없는 보리를 얻게 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음에 지음이 없음을 알면 이내 업의 공(空)함을 깨치게 되며, 업이 공하다고 관찰할 때에 도(道)를 얻었다고 하며, 그 도가 만약 나타나면 무슨 지혜인들 분명하지 않겠는가? 마음의 지혜가 분명할 때, 가고ㆍ서고ㆍ앉고ㆍ눕는 네 가지 행동 안에서 저절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힘이 나타나리라.
  『화엄경』에서 말씀하셨다.
  “선견(善見) 비구가 숲 속에서 거닐고[經行] 있다가 선재(善財)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야, 내가 거닐 때 한 생각 동안에 일체 시방이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온갖 세계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不可說不可說] 세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가 모두 다 깨끗이 장엄됨은 큰 원력(願力)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뭇 차별된 행이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열 가지 힘의 지혜[十力智]를 만족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몸이 모두 앞에 나타남은 보현행원의 힘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여래를 공경하고 공양함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래를 공양하는 원력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여래의 법을 받아들임은 아승기의 차별된 법을 증득하여 법륜(法輪) 다라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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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을 머물러 지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보살행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깨끗한 온갖 행이 인다라망(因陀羅網)과 같은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삼매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하나의 삼매문에서 온갖 삼매문에 들어가 모두 원력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근(根)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모든 근의 끝을 분명히 알아서 한 근의 가운데서 온갖 근을 보는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때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온갖 때에 법륜을 굴리는 중생 세계에서 법륜을 그지없이 굴리는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갖 세 세상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온갖 세계 안의 온갖 세 세상의 분위(分位)를 분명히 아는 지혜 광명의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거닐 적에 이미 그러한지라, 앉고 서는 데도 그러하느니라.’”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불자야, 이 자리에 머무르면/바로 이는 부처의 수용(受用)이니/언제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거닐며 그리고 앉고 눕는다”고 했다.
  [문] 이 『���종경록(宗鏡錄)』 중에 덕용(德用)이 되는 원인에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 모든 법으로 하여금 혼융(混融)하여 걸림이 없게 하는가?
  [답] 화엄종(華嚴宗)에서 보면 그것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마음만으로 나타난다는 것[唯心現者]이다. 온갖 모든 법은 참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어서 마치 큰 바닷물의 온 바탕이 물결을 이루는 것처럼 온갖 법은 한 마음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크거나 작은 것들의 모양은 마음을 따라 회전하고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걸림이 없다.
  둘째는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것[無定性者]이다. 이미 마음만으로 나타나고 인연을 따라 생겨 결정된 성품이 없고 성상(性相)을 다 함께 여의었다. 작은 것이 결정된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을 용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니, 큰 것과 같아지면서 바깥이 없는 까닭이다. 큰 것이 결정된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티끌을 들이면서도 사이가 없는 것이니, 작은 것과 같아지면서 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하늘의 작은 티끌과도 같으면서 티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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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같이 많은 넓은 세계도 함유하거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는 결정적인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온갖 것일 수 있고, 여럿은 결정적인 여럿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하나일 수 있으며, 가장자리는 결정적인 가장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중간일 수 있고, 중간은 결정적인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가장자리일 수도 있다. 늘이고 오므리고 고요하고 어지러움 따위가 하나하나 모두가 그러하다.
  셋째는 연기로 서로 말미암는다는 것[緣起相由]이다. 곧 법계 안의 연기법해의문(緣起法海義門)은 한량없거니와 간략하게는 열 가지 문이 있다. 자세히는 아래 권(卷)의 법성인연(法性因緣) 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넷째는 법 성품의 융통한 문이라는 것[法性融通門]이다. 사(事)에서만 보면 서로서로가 장애하여 상즉상입할 수 없고 만약 이(理)에서만 보면 하나의 맛일 뿐이어서 상즉상입이 없거니와 지금은 이와 사가 융통하여 걸림 없음을 갖추었는지라 이(理)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사(事)이다.
  이의 성품[理性]을 골고루 겸한 때에는 그로 하여금 이(理)와 다르지 않은 많은 사(事)가 소의(所依)의 이(理)에 따라 모두 하나 가운데서 나타나게 한다. 만약 하나 가운데서 이(理)를 모두 포섭하지 아니하면 참된 이(理)는 분한이 있어서 상실되고, 만약 하나 가운데서 이(理)를 모두 포섭하여 많은 사(事)가 따라 나타나지 아니하면 사는 이(理) 밖에 있으면서 상실된다. 지금은 이미 하나의 사 가운데 온전히 이(理)를 다 포섭되었거늘, 많은 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겠는가?
  「화장품(華藏品)」의 게송에 이르기를 “화장 세계의 있는 바 티끌에/낱낱 티끌 가운데서 법계를 본다”고 했다. 이 법계는 곧 사(事)의 법계이다. 이것은 바로 총괄적인 뜻이다.
  따로 또한 10현문(玄門)을 갖추었다.
  첫째, 이미 참된 이(理)는 온갖 법과 함께 상응하면서 이(理)를 남음 없이 포섭하였으니, 바로 모든 문과 모든 법이 동시에 구족한 문[具足門]이다.
  둘째, 사(事)가 이미 이(理)와 같이 능히 포섭하고 또 이(理)와 같이 넓고 두루하여 좁은 모양조차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넓고 좁고 순수하고 뒤섞임이 있는 걸림 없는 문[無礙門]이다. 또 성품은 언제나 평등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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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하고 널리 모든 법을 포섭하기 때문에 뒤섞인다.
  셋째, 이(理)가 이미 온갖 많은 사에 두루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로 하여금 이(理)에 따라 온갖 것 안에 두루하게 한다. 두루한 이(理)가 온전히 하나의 사에 있으면 온갖 것은 이(理)에 따라 하나의 사 안에 있다. 때문에 하나와 여럿이 있으면서 서로 용납하는 문[相容門]이다.
  또 티끌같이 제 모양은 바로 하나인데, 스스로 하나인 것이 동요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두루할 수 있고 여럿을 이루어야 되거니와, 만약 동요하면 스스로 하나인 것이 이내 두루함과 여럿이어야 함을 잃으므로 역시 하나조차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둘ㆍ셋 모두가 그와 같다.
  또 하나와 여럿은 서로가 말미암아 성립되는데, 하나가 완전히 여럿과 같아야 비로소 하나라 하게 되고, 또 여럿이 완전히 하나이어야 비로소 여럿이라 하게 된다. 여럿 밖에 따로 하나는 없으므로 여럿 안의 하나임을 분명히 알며, 하나 밖에 따로 여럿은 없는지라 이는 하나 안의 여럿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진실로 여럿이 아니로되 하나가 여럿이 될 수 있고, 하나가 아니로되 여럿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성품 없음[無性]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하나가 여럿이라는 지혜가 있게 된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비유컨대 산수법(算數法)은 하나를 더하면/무량(無量)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나니/모두 다 이것은 근본의 수로되/지혜 때문에 나누며 갈라진다”라고 했다.
  넷째, 참된 이(理)는 이미 모든 법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하나의 사(事) 그대로가 참된 이(理)이다. 참된 이는 바로 온갖 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하나가 바로 저것의 온갖 사요, 온갖 것이 하나인 것은 위와 반대로 알아야 한다. 때문에 상즉해서 자재한 문[自在門]이다.
  다섯째, 참된 이(理)는 사(事)에 있되 저마다 전혀 본분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것에 있을 때에는 저것은 이내 숨게 된다. 그 때문에 숨고 나타남이 있는 문[隱顯門]이다.
  여섯째, 참된 이는 널리 모든 법을 포섭하므로 저 능의(能依)의 사를 띠면서 하나의 가운데 단박에 있게 되기 때문에 미세함이 있는 문[微細門]이다.
  일곱째, 이것은 완전히 이(理)를 포섭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능히 나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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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저것은 완전히 이(理)를 포섭하여 이것과 같이 단박에 나타난다. 이것이 저것을 나타나는 때에 저것의 능현(能現)과 소현(所現)은 다 함께 이 가운데서 나타나고, 저것이 이것을 나타내는 때에 이것의 능현과 소현 역시 그 가운데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겹겹이요 그지없기 때문에 제망이 있는 문[帝網門]이 있다. 진여는 마침내 그지없는 까닭이다.
  여덟째, 곧 사(事)는 이(理)와 같기 때문에 하나의 사를 들음에 따라 바로 참된 법문이다. 그 때문에 사에 의탁함이 있는 문[託事門]이다.
  아홉째, 진여는 낮과 밤ㆍ날과 달ㆍ해와 겁이 두루 있어서 모두가 온전히 있기 때문에 날[日]이라는 때에 있으면 겁에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다. 그 때문에 열 세상이 다르게 이루어짐이 있는 문[異成門]이다. 더구나 때는 법으로 인하여 있으므로 법이 혼융하거늘 때가 혼융하지 않겠는가?
  열째, 이 사(事)가 이(理)에 즉할 때에는 걸리지 아니하고 그 밖의 온갖 것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에 주동자와 동반자가 있는 문[主伴門]이다.
  또 티끌은 법계의 체에서 분제(分劑)가 없어서 널리 일체에 통하므로 이것은 주동자이며, 곧 그 모두는 각각 따로따로이므로 이것은 동반자이다. 동반자는 주동자와 다르지 않으므로 반드시 주동자가 있어야 동반자를 이루며, 주동자는 동반자와 다르지 않으므로 역시 동반자가 있어야 주동자를 이루게 된다.
  주동자와 동반자는 서로서로 돕고 포섭한다. 만약 서로가 포섭되면 피차가 서로 없어서 따로 온갖 것이라 말할 수 없고, 만약 서로가 돕는다면 피차가 서로 있어서 똑 같이 온갖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모두가 주동자 그대로 동반자다. 그러므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주동자 안에는 주동자이기도 하고 동반자이기도 하며, 동반자 안에는 동반자이기도 하고 주동자이기고 하는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理)로 융통하여 열 가지 문이 갖추어졌다. 그 때문에 이 이(理)에는 티끌티끌마다 두루 갖추고 생각생각마다 원융하여 하나의 법도 미치게 되지 아니함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화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때 저 보구중생묘덕야신(普救衆生妙德夜神)이 선재동자(善財童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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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하여 보살로서 중생을 조복하여 해탈시키는 신통력을 나타내어서 모든 상호(相好)로 그의 몸을 장엄하고 두 눈썹 사이에서 지등보조청정당(智燈普照淸淨幢)이라는 큰 광명을 놓았는데, 한량없는 광명이 함께 하였다. 그 광명은 일체 세간을 널리 비추고 세간을 비추고 나서 선재의 정수리로 들어가자 그 몸에 꽉 찼다.
  선재는 그 때 이내 구경청정륜삼매(究竟淸淨輪三昧)를 얻었는데, 이 삼매를 얻자마자 두 신(神)의 양쪽과 중간에 있는 온갖 땅의 티끌ㆍ물의 티끌ㆍ불의 티끌과 금강ㆍ마니 등의 뭇 보배의 작은 티끌이며 꽃ㆍ향과 영락의 모든 꾸미개 등의 이러한 온갖 것을 모두 보았으며, 모든 티끌의 낱낱 티끌 중에서 저마다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도 보았으며, 그리고 온갖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의 모든 원소가 쌓여 모인 것을 보았고, 온갖 세계가 잇닿아서 모두 지륜(地輪)에 유지되어 있는 것도 보았으며, 갖가지의 산과 바다ㆍ가지가지의 강과 못ㆍ여러 가지의 나무숲과 여러 가지의 궁전 등, 이른바 하늘 궁전ㆍ야차 궁전에서부터 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들의 궁전 집과 지옥ㆍ출생ㆍ염라왕(閻羅王) 세계의 온갖 사는 처소와 모든 갈래[趣]에서 윤회하고 생사하면서 오가는 것이며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각각 차별된 것도 모두 보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온갖 세계의 차별된 것도 보았으니, 이른바 혹은 세계가 더럽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깨끗하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더러운 데로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깨끗한 데로 나아가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깨끗하다가 더러워지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더러웠다가 깨끗해지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한결같이 깨끗하기만 하고 혹은 세계가 그 형상이 편편하기도 하며 혹은 엎어져 있기도 하고 혹은 기울어 섰기도 하는, 이러한 모든 세계와 온갖 갈래 안의 것을 다 보았으며, 이 보구중생야신이 온갖 때와 온갖 처소에서 모든 중생의 행모와 언사와 행해(行解)의 차별에 따라 방편의 힘을 써서 널리 그의 앞에 나타나 마땅한 대로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다섯째는 환술과 같고 꿈과 같다는 것[如幻夢者]이다. 마치 요술쟁이가 한 물건을 변화시켜 여러 가지 물건으로 만들고 여러 가지 물건을 한 물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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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혹은 잠깐 동안에 백 년을 나타냈다 하는 것 등이니, 온갖 모든 법은 업이라는 환술로 짓게 되기 때문에 동일하다 다르다 함에 걸림이 없다”고 했다. 꿈과 같다 함은 마치 꿈속에서 본 것은 넓고 컸으나 베게 위를 옮아가지 못했고 오랜 세월을 겪었으나 잠깐 밖에 지나지 못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영상과 같다는 것[如影像者]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먼 물건과 가까운 물건이 비록 모두가 그림자로 나타나나, 그림자는 물건을 따르되 멀고 가까움이 있지 아니하다”라고 한 것들이다.
  일곱째는 인이 한없다는 것[因無限者]이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옛날 인위(因位)에 계신 동안에는 언제나 연기관(緣起觀)과 무성관(無性觀) 등을 닦았고 큰 원을 회향하기를 법계만큼 하며 그 밖에 한량없는 수승한 인을 닦았으므로 지금 일으키는 바와 같은 과보는 이 걸림 없음을 갖추었다.
  여덟째는 부처님의 증득은 궁극이기 때문이라는 것[佛證窮故者]이다. 참된 성품에 명합되고 진여 성품의 작용을 얻었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견줄 데 없는 공덕이기 때문에 능히 그렇다”고 했다.
  아홉째는 깊은 선정의 작용이기 때문이라는 것[深定用故者]이다. 해인정(海印定) 등의 모든 삼매의 힘을 말한다.
  그 때문에 「현수품(賢首品)」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작은 티끌 수 같은 모든 삼매에 들되/하나하나에서 티끌 수 같은 정을 출생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작은 티끌 수 같은 것 또한 늘어나지도 아니한다.
  열째는 신통과 해탈 때문이라는 것[神通解脫故者]이다. 열 가지 신통과 부사의 등의 해탈 때문임을 말한다. 「부사의법품(不思義法品)」의 열 가지 해탈 가운데서 말하기를 “하나의 티끌 속에서 세 세상의 온갖 불법을 건립한다”라고 한 것 등이다.
  [문] 마음을 일컬어 거울을 삼은 데 대해 어떤 증명하는 글이 있는가?
  [답]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하였다.
  “각(覺)의 체상(體相)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는데, 허공과도 같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다.
  첫째는 여실공의 거울[如實空鏡]이니, 온갖 마음의 경계 모양을 멀리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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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어 나타날 만한 법이 없고 각으로 비춘다는 이치[覺照義]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의 거울[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온갖 세간의 경계는 모두가 그 가운데서 나타나서 나가지도 않고 들지도 않고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한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니, 온갖 법 그대로가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온갖 물들음의 법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것이어서 지혜의 체성은 동요하지 않아 두루 갖춘 무루(無漏)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출리의 거울[法出離鏡]이니, 불공(不空)을 말한다. 번뇌의 장애를 벗어나고[出] 화합의 모양을 여의어[離]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기 때문이다.
  넷째는 연훈습의 거울[緣熏習鏡]이니, 법출리에 의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선근을 닦게 하고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기를 “성품이 깨끗한 본각(本覺)이다”라고 했고, 『중론(中論)』에서 이르기를 “각의 체상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다”고 했다.
  ‘허공과도 같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다’ 함의 이 네 가지 큰 이치 안에는 저마다 두 가지씩의 이치가 있는데 저 큰 이치와는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았다. 첫째는 허공과 같다는 이치이며, 둘째는 거울과 같다는 이치이다. 논(論)에서 말하기를 “각의 체상에는 네 가지 큰 이치가 있어서 허공과도 같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을 여실공의 거울이라 하며, 그리고 두 가지 이치가 있다는데 그 모양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이 깨끗한 본각 중에는/연려(緣慮)로 아는 것을 멀리 여읜다.”
  여(如)는 허망한 경계를 멀리 여의고 실(實)은 멀리 여의는 이치를 표시하며 거울[鏡]은 마사부사(摩奢趺娑)이니, 하나를 들면서 다른 하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하기를 “성품이 깨끗한 본각의 체성 안에서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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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연으로 생각하여 아는 모든 쓸모없는 의론의 식(識)을 멀리 여의고 한 맛의 평등한 이치를 성취하기 때문에 여(如)라고 하며, 온갖 허망한 경계의 갖가지 상분(相分)을 멀리 여의고 결정된 진실의 모양을 성취하기 때문에 실(實)이라고 하며, 멀리 여읜 이치를 나타내려 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다.
  거울은 밝은 것에 비유했다. 그러나 여기서 거울은 마사부사 구슬로 된 거울에 비유한 것이요, 그 밝의 갖가지 기름으로 닦는 등의 거울로 비유를 삼은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마사부사 구슬로 된 거울을 가져다 한 군데다 놓고 구슬로 된 거울 앞에 흑은 갖가지 돌을 쌓아 두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 꾸미개를 쌓아 두기도 하고 혹은 같은 종류의 구슬로 된 거울을 쌓아 두기도 하면, 그 구슬로 된 거울 속에는 그 밖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고 같은 종류로 된 구슬 거울만이 분명하고 환히 나타나기 때문이니, 여실공의 거울도 역시 그러하여서 이 거울 속에는 같은 종류의 청정한 공덕만이 나열되고 쌓이며 갖가지의 다른 종류의 허물된 법들은 모두가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말하기를 “첫째 여실공의 거울은 온갖 마음의 경계 모양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저마다 두 가지씩의 이치가 있는데 거울과 같다는 이치만 나타냈을 뿐 허공과 같다는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은, 하나의 이치를 들면 겸하여 하나의 이치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허공과 같다는 이치라고 하는가? 허공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어서 4장(障)으로도 가릴 수가 없고 광대하며 그지없는 세 세상으로도 껴잡을 수가 없는 것처럼 여실공의 거울 역시 그와 같기 때문이다. 각으로 비춘다[覺照]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라 함은, 멀리 여읜 인연을 나타내 보인다.
  저 마사부사 구슬로 된 거울 속 같은 데서 돌 따위의 모든 형상은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함은, 돌 등의 모든 물건은 모두가 비루하기 때문이다.
  이 본각의 구슬 거울 속에서 갖가지 허망한 법이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은 온갖 물들음의 법은 모두 다 무명이요, 불각(不覺)의 모양이어서 비추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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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한다[照達]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인훈습의 거울이라 하며, 그리고 두 가지 이치가 있다는데 그 모양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이 깨끗한 본각의 지혜는/ 세 가지의 세간의 법을/모두 다 버리거나 여의지 않아서/하나의 각(覺)에 훈습되게 하느니라.
  법신의 과위를 장엄하기 때문에/인훈습이라 이름하게 되며/거울은 윤다리(輪多梨)의 꽃으로 되고/허공은 받아들이고 두루한 하나니라.”
  논(論)에서 말하기를 “성품이 깨끗한 본각은 세 가지 세간을 모두 다 여의지 않았고 그 세 가지를 훈습하여서 하나의 각에 훈습되게 하며 하나의 큰 법신의 과위를 장엄한다. 그러므로 인훈습의 거울이라 한다”고 하였다.
  무엇을 세 가지 세간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요, 둘째는 기(器)세간이요, 셋째는 지정각(智正覺)세간이다.
  중생세간이라 함은 범부 성품을 지닌 세계요, 기세간이라 함은 의지하여 머무는 땅이요, 지정각세간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을 말한다. 이것을 세 가지라 한다.
  이 중에서 거울은 윤다리꽃으로 된 거울을 말한다. 마치 윤다리꽃을 가져다 한 곳에다 놓고 둘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쌓아 두면 이 꽃의 훈기로 말미암아 온갖 물건들은 모두 다 밝고 깨끗하여지며 또 밝고 깨끗해진 물건들이 꽃 속에 모두 다 남김없이 나타나고 온갖 물건들 속에서도 그 꽃이 역시 남김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인훈습의 거울 또한 그와 같아서 온갖 법을 훈습하되 청정한 각을 위하여 평등하게 훈습한다.
  다음 허공의 이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받아들임[容受]의 이치요, 둘째는 두루한 하나[遍一]의 이치이다. 받아들임의 이치란 모든 물질[色]을 받아들이되 장애가 없기 때문이요, 두루한 하나의 이치란 갖가지 모든 물질은 한 종류의 큰 허공과 같아질 뿐이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둘째는 인훈습의 거울이니, 여실불공을 말한다. 온갖 세간의 경계는 모두 그 가운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본각은 끝없는 때로부터 네 가지 허물을 멀리 여의고 제 성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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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정하여 언제나 한 마음에 머무른다.
  첫째는 두루하지 않는 허물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세 가지 세간은 본각의 청정한 거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뒤섞여 어지러운 허물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온갖 법은 본각의 청정한 거울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논에서 “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허물이 되는 허물을 멀리 여리는 것이니, 본각의 거울 속에는 모든 법이 앞에 나타나되 본각의 깨끗한 공덕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논에서 “잃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무상한 허물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본각의 거울 속에는 모든 법이 앞에 나타나되 무위의 지혜[無爲智]가 항상 머무르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논에서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치우친 허물을 멀리 여의고 중도의 진실에 원만한 것이니, 이 때문에 “언제나 한 마음에 머무른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래는 인연을 나타내 보인다.
  무슨 인연 때문에 본각의 지혜 안의 갖가지 모든 법은 지 본각에서와 같이 모든 허물을 여의는가? 갖가지 모든 법은 모두 다 진실하지 않은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논에서 “온갖 법은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아래는 의심을 결단하는 일을 한다.
  어떤 중생이 의심하기를 ‘세 가지 세간 안에서 중생 세간은 무명의 물듦의 법이 두루 갖추어 원만하고 헤매며 옮아 움직임이 쉬는 때가 없다. 이러한 세간에서 본각이 나타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라고 하나, 본각은 청정하여 모든 허물을 멀리 여의며, 이런 이치 때문에 지금은 통설로 말한다.
  또 온갖 물듦의 법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반야의 진실한 지혜는, 그 체성이 움직이지도 않고 제 성품은 청정하여 무루(無漏)를 두루 갖추어서 항상 중생 세간을 훈습하여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논에서 “또 온갖 물듦의 법조차도 더럽힐 수 없는 지혜의 체성은 움직이지도 않고 무루를 두루 갖추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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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무엇을 법출리의 거울이라고 하며, 그리고 두 가지 이치가 있다는데 그 모양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여실불공법으로/세 가지 허물을 벗어났으며/세 가지 덕을 원만했기 때문에/법출리라 이름하게 된다./ 거울은 만든 파려(玻瓈)로 되고/공이란 물질을 벗어났단 이치이다.”
  논(論)에서 말하기를 “무루 성품의 덕은 세 가지 허물을 벗어나고 세 가지 덕을 원만하였으므로 법출리라고 한다”고 했다.
  무엇을 세 가지 허물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무명의 물드는 품류이니 번뇌의 장애라 하며, 둘째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이니 지혜의 장애라 하며, 셋째는 다 함께 합한 전상(轉相)이니 쓸모없는 의론의 식[戲論識]이라 한다. 이것이 세 가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허물을 마지막에는 여의기 때문에 벗어난다고 한다. 논에서 “셋째는 법출리의 거울이니, 불공(不空)의 법으로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벗어나고 화합의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무엇을 세 가지 공덕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순박하게 성취된 공덕이요, 둘째는 깨끗하게 성취된 공덕이요, 셋째는 밝게 성취된 공덕이다. 이것이 세 가지 공덕이니 논에서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허물을 벗어나고 어떠한 덕을 원만히 하느냐 하면, 번뇌의 장애를 벗어나서 깨끗하게 성취된 공덕을 원만히 하고, 지혜의 장애를 벗어나서 밝게 성취된 공덕을 원만히 하며, 화합의 전상을 벗어나서 순박하게 성취된 공덕을 원만히 한다. 왜냐 하면 상대의 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여기의 거울이라 함은 파려주를 말한다. 마치 파려주가 깊은 진흙 속에 빠지면 이내 그 진흙에서 솟아나와 한 길[丈]가량 뛰어 오르며, 만약 흐린 물속에다 넣으면 뒤섞인 먼지를 없애고 깨끗한 물이 되게 하면서 그 속에 있게 되며, 만약 복다가숲[福多伽林]에다 놓으면 향기가 번져 나와 그를 장애하는 더러운 냄새는 멀리 보내는 것처럼, 법출리의 거울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안의 비유는 자체가 깨끗하다는 이치에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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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과 같다는 이치란 물질을 벗어난다는 이치이다. 마치 허공이 원소[大種]를 멀리 여의고 한결같이 청정하기만 한 것처럼 법출리의 거울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연훈습의 거울이라 하며, 그리고 두 가지의 이치가 있다는데 그 모양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한량없고 그지없는/모든 중생들의 연(緣)안에서/한량없고 그지없는/자못 훌륭한 응화의 몸[應化身]을 낸다./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서/모든 착한 뿌리 출생시키며/두 윤다리꽃 더욱 자라게 하여/법신의 과위를 장엄하게 한다./ 그 때문에 연훈습이라고 하며/거울의 속은 파려주로 되고/허공은 수순하며 성취한단 이치이니/법대로 자세히 살펴야 한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마치 파려주를 가져다가 한군데 놓아두고 둘레에 여러 가지 빛깔 있는 구슬을 모아 놓고서 그 파려주를 향하게 하면 구슬의 빛깔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것처럼 연훈습의 거울 또한 그러하다. 또 마치 허공은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온갖 하는 일마다 따르면서 성립시키는 것처럼 연훈습의 거울도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의 수행하는 일마다 따라 응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넷째 연훈습의 거울은 법출리에 의하기 때문이니,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선근을 닦게 하고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는 까닭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네 가지 본각의 큰 이치는 온갖 중생계와 온갖 2승계와 온갖 보살계와 온갖 여래계 안에 두루하여, 머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비추지 않는 데가 없으며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이르지 않는 데가 없으므로 두루 갖추어서 원만하고 두루 갖추어서 원만하다.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해석하였다.
  “성품이 깨끗한 본각을 공(空)과 거울의 비유로써 따로따로 네 가지 이치로 풀이하였다. 논에서 말한 ‘첫째는 여실공의 거울이니, 온갖 마음 경계 모양을 멀리 여의면 나타날 만한 법이 없고 각으로 비춘다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애초부터 안의 진여 중에는 허망한 법이 없고 먼저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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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실공이라 말한다.”
  아래서는 공의 뜻을 해석하였다. 뒤바뀐 마음과 허망한 경계는 본래부터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멀리 여읜다고 한다. 있으면서 나타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 아니요 허망한 법의 도리가 없기 때문에 나타날 만한 경계가 없을 뿐이며,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요 토끼 뿔처럼 없기 때문에 나타날 만한 것이 없을 뿐이다.
  ‘각으로 비추는[覺照] 것이 아니다’ 함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망념을 참된 지혜에서 보면 각으로 비추는 공(功)이 없는 것이니, 망정으로 집착함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은 바깥 물건에 즉한 것이 아니요 그 바깥 물건에는 비추는 작용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며 곧 거울 속에 나타나지만 바깥 물체가 없는 것과 같다.
  둘째는 본각을 허망한 법에서 보면 역시 각으로 비추는 공능이 없는 것이니, 허망이란 본래부터 없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한 눈으로 허공의 꽃을 바라봄은 비추어 본다는 공능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거울로 토끼 뿔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래의 인훈습의 거울 가운데서 온갖 세간의 법이 나타난다고 했는가?
  [답] 다른 것에 의하여서 보면 법과 비슷하다. 이것은 바로 참 마음이 훈습함에 따라 짓는 바로서 자체가 없기 때문이나 진여와는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은 곧 진실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금은 이 변계소집(遍計所執)에서 본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타날 만한 것이 없다.
  [문] 나타나는 바 비슷한 법은 어찌 그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있지 않겠는가?
  [답] 비록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있다해도, 비슷하다는 것은 항상 진실이 아니다. 마치 그림자가 본바탕을 말미암지만 그림자는 항상 본바탕이 아닌 것과 같다.
  거울 속에서 나타나는 그림자는 본바탕을 나타내지 아니한다. 본바탕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공의 거울이라 하며, 그림자를 능히 나타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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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인(因)이요 훈습이다.
  논에서 말하였다.
  “둘째 인훈습의 거울은 여실불공이다. 온갖 세간의 경계는 모두 그 가운데서 나타나되 나가지도 않고 들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한 마음에 머무는 것이니, 온갖 법은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온갖 물듦의 법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지혜의 체성은 움직이지도 않고 무루를 두루 갖추어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그 안에는 두 가지 인(因)의 뜻이 있음을 해석한다. 첫째는 현재 법의 인[現法之因]을 능히 짓는 것이요, 둘째는 속으로 훈습함의 인[內熏之因]을 짓는 것이다. 역시 처음 것은 인의 이치가 될 수 있으나 뒤의 것은 바로 훈습의 이치이다. 그 때문에 인훈습이라 한다.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 함은, 이것은 통틀어 인과 훈습의 체성을 드러낸 것이니, 자체와 공능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인의 첫째 것 가운데서 온갖 세간의 경계가 모두 나타나며, 온갖 법은 이 마음을 여읜 그 밖에는 따로 체성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마치 거울 속에서 그림자를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다.
  ‘나가지 않는다[不出]’ 함은 마음이 훈습을 기다리게 되는 까닭과 모든 법을 나타내되 훈습하지 않고서 저절로 나간 것이 아님을 밝힌다.
  ‘들지 않는다[不入]’ 함은 마음을 여의면 훈습할 수 없기 때문에 밖에서부터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잃지 않는다[不決]’ 함은 비록 안으로부터 나오거나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인연으로 일어나는 때에는 나타나면서 없지 않기 때문에 잃지 아니한다고 한다.
  ‘무너지지 않는다[不壞]’ 함은 모든 법의 인연이 쌓이고 일어나되 오는 데가 없고 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무너질 수 없다.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는 거울로 인하여 무너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언제나 한 마음에 머문다’ 함은 형상을 융화하여 체성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물듦의 법으로도 더럽힐 수 없다’ 함은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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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의 체성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함은 본래부터 더러움이 없고 지금 비로소 깨끗하게 함도 없는 것이라 이 때문에 본각의 지혜는 일찍이 이동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또 비록 물듦의 법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더럽힘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본바탕을 따라 바꾸어지지만 그 거울의 체성은 일찍이 이동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첫째 공의 거울[空鏡]이니 온갖 바깥 물건의 체성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며, 둘째 불공의 거울[不空鏡]이니 체성은 만 가지 형상을 능히 나타냄이 없지 않다는 것이며, 셋째 깨끗함의 거울[淨鏡]이니 이미 닦고 다스려서 때[垢]를 떠난 까닭을 말하며, 넷째 수용함의 거울[受用鏡]이니 높은 집 위에다 놓으면 필요한 이가 다 수용한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제 성품의 청정이요, 뒤의 두 가지는 때를 떠난 청정이다. 또 처음의 두 가지는 원인에 나아가서 숨는 때의 설명이요, 뒤의 두 가지는 결과에 나아가서 드러난 때의 설명이다. 또 앞의 두 가지는 공과 불공에서 본 것이요, 뒤의 두 가지는 체성과 작용에서 본 것이다.
  『불지경(佛地經)』에서 말하였다.
  “묘생(妙生)아, 대원경지(大圓鏡智)라 함은 마치 뚜렷한 거울에 의하여 뭇 형상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지혜 거울에 의지하여 모든 처(處)와 경(境)과 식(識)의 뭇 형상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원경(圓境)으로써 비유한 것은 원경과 여래의 지경(智鏡)은 똑같은 줄 알 것이니, 그러므로 지경을 원경지라고 한다.
  여래의 대원경을 복락(福樂) 있는 사람이 높고 좋은 곳에 움직이지 않게 달아 두고서 가고 오는 한량없는 중생들이 여기에서 제 몸의 잘함과 못함을 관찰하여 잘함은 보존하고 잘못은 버리게 하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도 원경지를 달아 놓고 깨끗한 법계에 있으면서 끊임이 없고 동요한 바 없이 한량없고 수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더러움과 깨끗함을 관찰하게 하되 깨끗함을 취하고 모든 더러움은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또 원경이 아주 잘 닦이고 빛이 나서 거울의 깨끗하고 때 없는 광명이 두루하게 비추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대원경지도 부처님 지혜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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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때를 영원히 벗어났기 때문에, 아주 잘 닦이고 빛이 나서 의지의 정[依止定]에 거두어서 지니기 때문에, 거울이 깨끗하고 때가 없어서 중생들의 이익 되고 즐거운 일을 짓기 때문에 광명이 두루하게 비춘다.
  또 원경이 반연하는 본바탕에 의하여 갖가지 영상과 모습이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대원경지도 항상 모든 반연에 의하기 때문에 갖가지 지혜의 영상과 모습이 생긴다.
  마치 원경 위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영상이 생기되 그 원경 위에는 모든 영상이 없고 이 원경은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원경지 위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지혜 영상이 생기되 그 원경지 위에는 모든 지혜 영상이 없고 이 지혜 거울은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다.
  또 원경과 뭇 영상은 합한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니요, 쌓여 모이지도 않았고 그 인연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대원경지도 뭇 지혜 영상과 합한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니요, 쌓여 모이지도 않았고 흩어져 잃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이 『���대열반경』을 들어 받으면, 온갖 방등대승경전(方等大乘經典)의 심히 깊은 의미를 모두 골고루 알 수 있다. 마치 남녀가 밝고 깨끗한 거울에서 그의 색상을 똑똑하고 분명하게 보는 것처럼, 『���대열반경』도 그와 같아서 보살이 그를 지니면 대승경전의 매우 심오한 깊은 이치를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무엇을 이제목다가경(伊帝目多伽經)이라고 하며, 내지 구나모니불(拘那牟尼佛) 때에 법경(法鏡)이라 했는가?”라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옛 부처님 모두가 이것을 일컬어 거울이라 하셨음을 알겠다. 교법의 만 가지 이치와 진속(眞俗)의 만 가지 인연이 그 안에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천태 정존자(天台頂尊者)가 『열반소(涅槃疏)』에서 말하였다.
  “반야(般若)란 바로 위없는 조어(調御)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므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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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의 밝고 깨끗한 거울이라 한다. 이 거울로 한번 비추면 온갖 것이 비추어진다. 중도(中道)를 비추기 때문에 거울이요, 진제를 비추기 때문에 깨끗하며, 속제를 비추기 때문에 이것은 밝다. 밝기 때문에 형상이 밝아져서 거짓이 나타나고 깨끗하기 때문에 티가 다하여 참된 것이 나타나며 거울이기 때문에 바탕이 뚜렷하여 중도가 나타난다. 세 가지 지혜[三智]가 한 마음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밝고 깨끗한 거울이라 말하며, 온갖 법을 거두기 때문에 조어라 일컬으며, 부처의 지혜 광이기 때문에 반야의 덕[般若德]이라 한다.”
  이것으로써도 모든 성인이 다 마음을 일컬어 거울이라 하셨음을 알겠으니 미묘함이 그 속에서 극진하다.
  『대승천발경(大乘千鉢經)』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거울을 자세히 살피어 심성을 비추어 보면, 비춤뿐이고 밝음뿐이고 비춤뿐이고 깨끗함뿐이어서 시방의 넓고 두루한 법계를 두루하게 비추리니, 맑고 고요하여 장애가 없다”라고 했으니, 그런 까닭에 선덕이 이르기를 “이 진여의 성품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만 가지 형상이 모두 그 속에서 나타난다”라고 했다.
  또 온갖 만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두가 밝은 거울이 포함한 것과 같은 명료한 성품이 한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둘째는 분별되어 나타난 바는 마치 영상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의 이치는 능현(能現)이 되고 나중의 이치는 소현(所現)이 된다. 그러므로 온갖 법이 서로서로 거울과 형상으로 되는 것은 마치 거울이 서로 비추면서도 본래 모양을 깨뜨리지 않는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먼 물건과 가까운 물건이 비록 모두 그림자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물건을 따라 멀고 가까움이 있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이는 또한 강과 샘 속에 보이는 해와 달 같은 것은 바로 능현이 되며, 만약 강과 샘을 소현으로 삼는다면 큰 강과 솟는 샘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 소현의 모양을 내는 것이니, 다락에 올라가 거울을 비추면 황하(黃河)의 일대가 모두 거울 속에 들어가고 천 길[丈]의 폭포도 지척에서 보리라.
  왕 우승(王右丞)의 시에 “창 너머 구름과 안개는 옷 위에서 생기고/휘장 두른 산과 샘은 거울 속으로 든다”라고 했으니, 이는 소현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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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마음 거울을 높이 달면 법마다 삼키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으니, 환히 트인 성품이 공하면 어느 문인들 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당(唐)나라 태종 황제(大宗皇帝)가 이르기를 “짐(朕)이 듣건대, 구리로 된 거울은 의관을 바를 수 있고 예[古]로 된 거울은 흥망 성쇠를 알 수 있고 사람으로 된 거울은 득실(得失)을 알 수 있다 하던데, 이제 마음으로 된 거울은 법계를 비출 수 있구나”라고 했다.
  또 밝은 거울은 그 형상만을 비추고 그 마음은 비추지 못하며, 생멸만을 비추고 무생(無生)은 비추지 못하며, 세간만을 비추고 출세간은 비추지 못하나니, 형상이 있어야 비추고 형상이 없으면 비추지 못한다.
  이는 또한 마음의 거울은 성품 자리를 모두 환히 밝히고 마음의 근원을 꿰뚫어 비추며 무생을 두루 알고 진속(眞俗)을 널리 밝히는 것과 같나니, 있고 없음이 다 같이 자세하고 숨고 드러남이 함께 통하며 낫고 못함이 현격하게 다르고 생각하고 자세함이 견줄 데 없이 다르다.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때 바라문이 선재(善財) 동자를 위하여 감로대왕(甘露大王)을 찬탄하며 게송으로 말하였다.
  ‘우리 임금 훌륭하고 단정 엄숙하여/성내는 것 징벌하고 모든 욕심 경계한다./마음은 깨끗하고 밝은 거울 같아서/물건들을 비추되 사사로움 없네./ 밝은 거울은 형상만을 비추고/마음에서 생각함은 비추지 못하지만/우리 왕인 마음의 거울은 깨끗하여/마음의 근원을 환히 본다네.’”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마치 큰 마니보(摩尼寶)의 거울을 공중에 달아 비추면 시방의 색상이 모두 다 단박에 나타나되 이 거울 성품의 깨끗한 광명에는 영상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법신도 그와 같아서 맑고 사무쳐서 영상이 없다”고 했다.
  옛날의 대비(大悲)가 게으르지 않아 중생의 업연(業緣)을 따라 감응(感應)함이 차별되고, 온갖 색신삼매(色身三昧)를 널리 나타내어 중생들이 듣고 보매 이익 받지 않음이 없게 한다. 모든 부처님은 무루 금강(無漏金剛)의 마음으로 몸이 되어 널리 온갖 중생계에 나타냈으므로 번뇌의 습기에 가리움을 받았을 뿐 몸마다 나타내지 아니함이 없나니, 마치 병 속에 깨끗한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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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를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고 공덕장(功德藏)이라고도 하며 무진장(無盡藏)이라고도 한다.
  모든 조사가 함께 전한 모든 부처의 청정한 자각성지(自覺聖智)와 진여묘심(眞如妙心)은 세간의 문자와 같은 것으로 얻을 바가 아니다. 왜냐 하면 걸림 없는 해탈은 바로 하나의 참된 법성(法性)이어서 세간이거나 출세간과는 함께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견줄 데 없는 이 보리는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만약 이 진실한 법성을 깨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3세의 모든 부처님과 온갖 중생들이 동일한 법계요 본래 평등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줄 깨달아 알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은 온갖 때 안에서 모양을 관찰함[觀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깨끗하면 벌써 모든 선정(禪定)을 건넜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면 외로운 빛이 한 번 비쳐도 만 가지 생각이 전부다 소멸됨이 마치 어두운 방에 등불을 달고 겹구름 속에서 해를 본 것과 같다. 고덕(古德)의 게송에서 “한 생각의 빛을 받는 처소가/억 겁(億劫)의 혼미함이 녹는 때인 줄 어찌 알리”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법(法)에는 맞춰 비추는[應照]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울로써 비유하고, 교(敎)에는 전할 만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등불에다 비유했다”라고 했다. 지혜의 달이 품속으로 들어가고 신령한 구슬이 손아귀에 있으니, 법계가 환하게 통하여 비추지 아니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재명론(才命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통철하면 보배거울[寶鏡]이다”라고 했고, 그 주(注)에 이르기를 “마음은 모든 물건을 비추되 빠뜨림이 없고 어둡거나 밝은 데를 환히 비추므로, 보배 거울과 같다”고 했으며, 또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지인(至人)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고 했다.
  또 세간의 거울조차도 오히려 사람의 간과 쓸개를 비추거늘, 하물며 영대(靈臺)의 마음 거울로 환히 비추지 못하겠는가?
  옛날 진(秦)나라 궁중에는 옥으로 만든 거울이 있었는데, 관리들의 간과 쓸개며 5장 6부를 비추면 모두 다 나타났다 한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큰 바다에서 놀지 않으면 대해[沃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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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함을 보지 못하며, 큰 산을 우러르지 않으면 간소(干霄)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라고 했다.
  아직 종경(宗鏡)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어찌 제 마음을 알겠는가? 탁 트인 체성은 하늘을 받아들이고 잠잠한 영상은 만상(萬像)을 포함한다. 믿고 들지 못한 이는 높고 깊음을 측량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진각(眞覺) 대사가 말하기를 “마음 거울은 밝아서 비춤에 걸림 없고/휑하게 빛나서 항사계(恒沙界)에 두루하다./삼라만상의 영상은 그 속에서 나타나니/한 성품의 원만한 빛 안과 밖이 아닐세”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기신론(起信論)』에서 네 가지 공의 거울[空鏡]의 이치에 의하여 나아가 널리 조사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한 마음임을 나타내면서 종경(宗鏡)을 증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논(論)에 이르기를 “법이 있어 능히 마하연(摩訶衍)의 신근(信根)을 일으킨다”고 했다. 법이 있다 함은 한 마음의 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능히 알면, 반드시 광대한 신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근이 이미 서면 이내 부처의 길에 들어가고 부처가 되는 길이기 때문에 두 가지 현행(現行)을 여읜다. 무엇을 현행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 범부의 현행이니 생사로 잡염(雜染)을 이루는 일이요, 둘째 2승의 현행이니 열반으로 이익과 안락을 잃는 일이다.
  속박과 해탈이 비록 다르나 다 같이 종경에 미혹한 것이다. 이제 부처가 되는 길이 두 가지 현행이 없으면, 한 마음을 원만하게 증득하고 마하연을 갖추며, 큰 지혜이기 때문에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대비이기 때문에 열반에 머무르지 않으리니, 한 가지의 광명을 지어서 만 갈래 길의 나루가 되리라.
  [문] 종경으로 널리 비추면 만가지 법이 같은 데로 돌아가는데, 바로 이것이 거울이라는 이치인가?
  [답] 범부와 성인의 다름을 말하고 같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울 속의 영상이다. 이 하나의 거울만이 원만히 시방을 다한 것이어서 거울 밖에 법이 없고 그와 내가 함께 끊어졌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만약 중생의 심성이 모든 부처님의 심성과 같다고 말하면 별교(別敎)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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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교(圓敎)에서의 심성은, 바로 하나의 고요한 빛이어서 그것도 없고 이것도 없으며 시방 3세의 부처님과 중생의 맨 끝까지 다하여 하나의 큰 원경(圓鏡)을 이룬 것이니, 이것은 한 거울일 뿐이요 동일함과 다름이 없으며 부처와 중생이 한 거울의 영상일 뿐이다.
  [문] 이제 『���종경록』에서 거울로 이치를 삼은 것은 바로 법상종(法相宗)에 의거해서 세운 것인가, 법성종(法性宗)에 의거해서 세운 것인가?
  [답] 만약 인연이 상대적으로 의지한 문에서 보면, 법상종에서는 곧 본식(本識)을 거울로 삼는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씀하기를 “마치 밝은 거울에서 뭇 색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현식(現識)에서 나타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라”고 한 것과 같다. 현식은 곧 제8식이다.
  법성종에서는 곧 여래장을 거울로 삼는다.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기를 “각(覺)의 체상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으며, 허공과도 같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점찰선악경(占察善惡經)』에서는 두 가지 관문(觀門)을 세운다.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하여 유심식관(唯心識觀)을 세우고, 근기가 영리한 사람을 위하여 진여실관(眞如實觀)을 세운다. 또 『기신론』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만약 내달아 흩어지면, 이내 거두어 들여서 바른 생각[正念]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 바른 생각이란 마음일 뿐 그밖에는 경계가 없고 또 이 마음 역시 제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생각과 생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만약 유심식관과 바른 생각에 의거하면 마음일 뿐이라는 것은 법상종에 해당하고, 만약 진여실관과 그 마음의 생각과 생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의거하면 곧 법성종이다.
  만약 법의 성품이 융통하다는 문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의 취지에 돌아가는 것이요 다시는 분별이 없지만 이제 바로 종(宗)에서 나은 것을 취해서 말하면 법성종에서 본 설명이라 하겠다.
  만약 통틀어 포함시킨다면 마치 바다가 하천 물을 받아들이고 근본으로써 끝을 거두는 것과 같거늘, 어찌 성(性)과 상(相)일 뿐이리오. 버리고서 비출 하나의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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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이 종경(宗鏡)의 안에 어떻게 믿고 들어갈 것인가?
  [답] 한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능소(能所)의 증득이 없고 지해(智解)의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믿음 없는 믿음이요 들음이 없는 들음이며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가지가 공(空)하고 마음과 경계가 쌍으로 고요하다.
  저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법계에 마음을 두는 것[繫緣法界]이 한 생각의 법계요 움직이지 않는 법계이니, 참된 법계임을 알면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내가 법계에 들었다 하면 벌써 동요한 법계이다. 능소 두 가지가 없어지고 들어가는 모양조차 고요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법계이며, 이것이 법계에 든 것이다.
  『대승천발대교왕경(大乘千鉢大敎王經)』에서 이르기를 “어떠한 방편으로 무성관(無性觀)에 증득하여 들어가느냐 하면, 보살은 먼저 마음은 본래 성품이 고요하다 함을 비추어 보아 멸진정(滅盡定)에 깨달아 들고 심식(心識)의 성품을 얻으며, 청정하여 맑고 깨끗할 뿐임을 증득하여 보고 거룩한 성품인 제 성품은 여여(如如)한 한 길로서 고요하다 함을 증득하여 보아야 하며, 근본을 깨치고서 청정임을 보되 비치기만 하고 빛나기만 하며 밝기만 하고 깨끗하기만 하며 고요하기만 하고 거룩하기만 하다 함을 반조(返照)하면, 이것을 보살이 동요가 없는 열반의 무성관에 들게 된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능증(能證)이 있다면 인아(人我)가 있고 만약 소증(所證)이 있다면 법아(法我)가 있는 것이 된다. 하나뿐인 참된 법계이기 때문에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며 법계로써 다시 법계를 증득할 수 없다.
  『무생의경(無生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사리불(舍利佛)이 비구들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제 복밭[福田]에 머무셨구려.’
  그러자 비구들은 말하였다.
  ‘큰 스승 세존께서도 오히려 공양을 녹이실 수 없었거늘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큰 스승께서는 풀이하며 말씀하기를 것은 부처로서 부처에 머무르지 않으면 부처도 없고 복밭도 없는지라 공양을 녹일 수 있는 이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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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복밭 사람이요, 부처로서 만약 부처에 머무르면 부처가 있고 복밭도 있는 것이라 공양을 녹일 수 있는 이는 바로 참된 복밭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아서 신통에 머무르는 지혜는 지혜가 있으므로 이것은 곧 참된 지혜가 아니다. 만약 머무는 바가 없으면 비로소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이다.
  또 『사익경론(思益經論)』에서 해석하기를 “법계를 여의고서 다시는 공양을 받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이니, 그 법계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종경록』에서는 부화(浮華)한 것을 깎아 버리고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명자(名字)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마음의 종[心宗]을 나타냈다.
  『보현관경(普賢觀經)』에서 이르기를 “옛날 영산(靈山)에 있으면서 한 진실의 도를 연설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또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록 교묘한 말이 없더라도/진실한 이치가 있기만 하면/그 법은 받아서 지녀야 하리니/마치 금을 취하고 돌을 버리는 것과 같다./ 미묘한 이치는 순금과 같고/교묘한 말은 기왓장과 같으며/명자에 의하고 이치에 의지 않으면/그 사람은 밝음 없는 소경이니라.”
  만약 친히 성품을 보고 종경(宗鏡) 안에 들어가면 이는 스스로 법문을 믿어 결정코 의혹이 없으리니, 해를 차게 할 수 있고 달을 덥게 할 수 있으며, 비록 천 갈래 길의 다른 설명으로도 끝내 바꿀 수 없으리라.
  마치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여래의 제자는 모든 세간 보기를 마치 허깨비와 같이 여기며 의심함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그들은 여래를 믿고 이내 스스로가 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믿고 남을 믿지 않을 뿐이다. 왜냐 하면 만약 세간 사람들이 벌써 자신이 보고 나면 그 사람은 다시는 다른 이의 말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마치 사람이 벌거숭이로 길을 가고 있을 적에 가령 어느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희유하게도 비단 옷을 몸에 걸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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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나>라고 한다 하자. 교시가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비록 말을 했다해도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믿겠느냐?’
  ‘믿지 않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눈으로 친히 보았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교시가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모든 제자들도 스스로가 법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이 말을 취하지 않나니, 그 이치 또한 그러하니라.’”
  해석하여 보자.
  만약 스스로가 법을 보았다면 어느 법인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있는 것이면 지적하여 진술하리니, 제 마음의 끝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이 믿는 이라야 비로소 법의 근원에 도달하리니, 마치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에서 말한 바와 같다.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진실의 끝[實際]을 아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진실의 끝을 아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무엇을 진실의 끝이라 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내 것[我所]의 끝이 있으면 그것이 곧 진실의 끝이며, 모든 범부의 끝이 바로 진실의 끝이며, 업이거나 과보의 온갖 법의 모두가 바로 진실의 끝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렇게 믿는다면 바로 이것이 진실의 믿음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뒤바뀌게 믿으면 바로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만약 그릇된 행을 하면 그것이 바로 바른 행이옵니다. 왜냐 하면 바르고 바르지 않다는 것은 말만이 있을 뿐이요, 얻을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이것으로써도 만약 마음일 뿐이라는 진실한 이치를 믿으면 언어에 끄달리지 않음을 알 것이니, 깊음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얕음을 듣고도 의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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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아니하며 깊은 것이 아니고 얕은 것이 아님을 듣고도 어리석지 않으리라.
  청량(淸凉)의 『연의(演義)』에서 “깊음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함은 곧 큰 갈래의 깊은 이치이니, 이른바 공(空)이다. 공을 말한 것을 들으면 단멸(斷滅)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게 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를 “먼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 역시 없는 것이 아니요, 제 성품이 항상 공하나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얕음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는다’ 함의 얕다 함은 겪는 일을 말한다. 방편의 문이 많으면 의혹되게 되는데, 이제는 알아서 마땅할 대로 하는데 의심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깊은 것이 아니고 얕은 것이 아님을 듣는다’ 함은 의거할 바 없음을 말한 것이니, 몸과 마음을 담연하게 하여 알게 하되 깊은 것이 아니면 묘유(妙有)가 되고 얕은 것이 아니면 진공(眞空)이 된다. 몸과 마음의 모양을 여의어야 비로소 용맹하게 되고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
  또 이 세 구절은 또한 바로 삼관(三觀)이니, 처음은 공이요 다음은 가(假)이며 나중은 중도이다. 세 구절을 한꺼번에 듣고 한 생각에서 모두 회통하면 삼관이 한 마음이거늘 무슨 의심인들 버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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