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2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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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2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한 마음의 법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가르침 안에 이름을 널리 세우는가.
  [답] 여래의 명호는 시방에서 다 같지 않고, 반야라는 한 법은 갖가지로 이름한다. 해탈도 그러하여 여러 이름이 많다.
  그러므로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말하기를 “마치 온갖 법의 이름은 객관(客觀)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다. 시방과 3세 어디로부터 온 데도 없고 가 닿는 데도 없을 뿐더러 머무는 데도 없다. 온갖 법 안에는 이름이 없고 이름 안에도 온갖 법이 없으며, 합한 것도 아니고 흩어진 것도 아니며, 다만 가정으로 시설했을 뿐이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온갖 법과 이름은 다 같이 제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서 이르기를 “그 때 부처님께서 다라니자재왕보살(陀羅尼自在王菩薩)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란 모든 법이 없음을 말하나니, 만약 모든 법이 없다면 어떻게 공이라고 말하겠느냐. 이름 붙일 법이 없는데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 이름 또한 머무는 데가 없다. 이름 아래의 법도 역시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법은 마음으로부터 나고 이름은 법으로 인하여 세워진다. 내는 바의 마음이 처소가 없는지라 능히 내는 법도 그러하니, 곧 마음과 경계가 다 공하여 다 함께 처소가 없다”고 했다.
  논(論)에 이르기를 “마음은 온갖 법에 이름을 짓는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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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이름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세간과 출세간에서의 이름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마음이 반연을 따라 물건에 알맞게 이름을 붙이는데, 대략 다섯 가지의 이치가 있는데 가정으로 이름을 세운다. 첫째는 뜻을 따르기 때문이요, 둘째는 반연을 따르기 때문이요, 셋째는 세속에 의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때를 따르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작용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뜻[義]을 따르는 것인가.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이르기를 “한량없는 뜻이 하나의 법으로부터 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뜻으로 인하여 이름이 붙여지고 이름으로 인하여 뜻을 나타내는 줄 알 것이다.
  어떤 것이 반연[緣]을 따르는 것인가.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그 맛이 참되고 바른지라 설산(雪山)에 머무는데, 그 흐르는 곳을 따라 갖가지 이름이 지어진다”고 했다. 그 흐르는 곳을 따른다 함은 바로 더러움과 깨끗함의 반연을 따른다는 것이니, 거기서 범부와 성인이란 이름이 지어진다.
  어떤 것이 세속[俗]에 의하는 것인가.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법에 많은 이름이 있지만 실제의 법 속에는 곧 없는 것이며, 법의 성품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세간에서 유포된다”고 했다.
  어떤 것이 때[時]를 따르는 것인가.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성품은 시절의 다름이 있음으로 인하여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을 말한다”고 했다. 왜냐 하면 때[垢]에 물들어 있을 적에는 중생이라고 일컫고 청정한 데에 처할 때에는 모든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작용[用]에 의거하는 것인가. 마치 마음으로 인하여 법이 성립되고 법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진 것과 같나니, 성인에 있으면 진(眞)이라 일컫고 범부에 서 있으면 속(俗)이라 이름한다. 마치 금으로 만든 그릇을 그릇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손가락에 있으면 가락지라 하고 팔에 장식하면 팔찌라 한다.
  곧 한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데 따로따로의 이름에 집착하므로 만 가지 법이 차별을 이루고, 순금은 변하지 않는데 다른 이름으로 알기 때문에 천 개의 그릇이 같지 아니하다. 만약 법과 법이 전혀 마음으로 지어지고 그릇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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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이 모두 금으로 되는 줄 알면, 이름과 형상이 간여할 수 없거늘 시비가 어떻게 미혹시키겠는가.
  또 둥근 그릇과 모난 그릇의 이름이 같지 않은 것과 같고 생금과 달군 금이라는 말이 다른 것과 같나니, 근원인 바탕을 추구하면 만 가지 법이 모두 공(空)하지만 뜻과 말과 이름과 이치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움직이면 곧 8식(識)이요 응집되면 하나의 마음이니, 뜻[旨]을 얻고 반연을 잊으면 부딪치는 길마다 의탁할 곳이 없으리라.
  『대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여래가 지닌 온갖 선행은 모두가 모든 중생을 조복하기 위함이니, 마치 의사가 지닌 처방은 모두가 온갖 병고를 고치기 위한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여래 세존께서는 국토를 위하여, 시절을 위하여, 다른 이의 말을 위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뭇 근기를 위하여, 하나의 법 안에서 두 가지 말을 하고 한 이름의 법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며, 한 이치의 안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고 한량없는 뜻 안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느니라.
  무엇이 한 이름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열반(涅槃)의 이름으로 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무생(無生)이라 하기도 하며, 무출(無出)이라 하기도 하고, 무작(無作)이라 하기도 하며, 무위(無爲)라 하기도 하고, 귀의(歸依)라 하기도 하며, 굴택(窟宅)이라 하기도 하고, 해탈(解脫)이라 하기도 하며, 광명(光明)이라 하기도 하고, 등명(燈明)이라 하기도 하며, 피안(彼岸)이라 하기도 하고, 무외(無畏)라 하기도 하며, 무퇴(無退)라 하기도 하고, 안처(安處)라 하기도 하며, 적정(寂靜)이라 하기도 하고, 무상(無相)이라 하기도 하며, 무이(無二)라 하기도 하고, 일행(一行)이라 하기도 하며, 청량(淸凉)이라 하기도 하고, 무암(無暗)이라 하기도 하며, 무애(無礙)라 하기도 하고, 무쟁(無諍)이라 하기도 하며, 무탁(無濁)이라 하기도 하고, 광대(廣大)라 하기도 하며, 감로(甘露)라 하기도 하고, 또한 길상(吉祥)이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한 이름인데 한량없는 이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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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말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한 이치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제석(帝釋)의 이름을 제석이라 하기도 하고, 교시가(憍尸迦)라 하기도 하며, 바차바(婆蹉婆)라 하기도 하고, 부란타(富蘭陀)라 하기도 하며, 마거바(摩佉婆)라 하기도 하고, 인타라(因陀羅)라 하기도 하며, 천안(千眼)이라 하기도 하고, 사지부(舍脂夫)라 하기도 하며, 금강(金剛)이라 하기도 하고, 보정(寶頂)이라 하기도 하며, 또한 이름을 보당(寶幢)이라 하기도 하나니, 이것이 한 이치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한량없는 뜻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부처님 이름을 여래라고 하나 뜻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며, 아라하(阿羅訶)라고도 하나 뜻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며,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라고도 하나 뜻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며, 선사(船師)라고도 하고, 도사(導師)라고도 하고, 정각(正覺)이라고도 하고, 명행족(明行足)이라고도 하고, 대사자왕(大師子王)이라고도 하고, 사문(沙門)이라고도 하고,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하고, 적정(寂靜)이라고도 하고, 시주(施主)라고도 하고, 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하고, 대의왕(大醫王)이라고도 하고, 대상(大象)이라고도 하고, 대용왕(大龍王)이라고도 하고, 시안(施眼)이라고도 하고, 대력사(大力士)라고도 하고, 대무외(大無畏)라고도 하고, 보취(寶聚)라고도 하고, 상주(商主)라고도 하고, 득탈(得脫)이라고도 하고, 대장부(大丈夫)라고도 하고, 천인사(天人師)라고도 하고, 대분타리(大分陀利)라고도 하고, 독무등려(獨無等侶)라고도 하고, 대복전(大福田)이라고도 하고, 대지혜해(大智慧海)라고도 하고, 무상(無相)이라고도 하고, 또한 구족팔지(具足八智)라고도 함과 같나니,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뜻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한량없는 뜻 안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니라.
  또 한 이치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있느니라. 이른바 음(陰)의 이름을 역시 음이라 하기도 하고, 전도(顚倒)라 하기도 하며, 제(諦)라 하기도 하고, 사념처(四念處)라 하기도 하며, 사식(四食)이라 하기도 하고, 사식주처(四識住處)라 하기도 하며, 유(有)라 하기도 하고, 도(道)라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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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하며, 시(時)라 하기도 하고, 중생(衆生)이라 하기도 하며, 세(世)라 하기도 하고, 제일의(第一義)라 하기도 하며, 신(身)ㆍ계(戒)ㆍ심(心)의 3수(修)라 하기도 하고, 인과(因果)라 하기도 하며, 번뇌(煩惱)라 하기도 하고, 해탈(解脫)이라 하기도 하며, 12인연(因緣)이라 하기도 하고,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이라 하기도 하며,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인(人)ㆍ천(天)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과거(過去)ㆍ현재(現在)ㆍ미래(未來)라고도 하니, 이것을 한 이치에서 한량없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여래ㆍ세존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자세한 가운데서 간략함을 말하고 간략한 가운데서 자세함을 말하며, 첫째가는 이치를 세속의 진리라 말하고 세속 진리를 말하여 첫째가는 이치라 하느니라.
  무엇이 자세한 가운데서 간략함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비구들에게 ‘나는 이제 12인연을 펴 말하리라. 무엇을 12인연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인과니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무엇이 간략한 가운데서 자세함을 말한 것인가. 예를 들어 비구들에게 ‘나는 이제 고ㆍ집ㆍ멸ㆍ도를 말하리라. 고(苦)라 함은 이른바 한량없는 모든 고통이며, 집(集)이라 함은 이른바 한량없는 번뇌며, 멸(滅)이라 함은 이른바 한량없는 해탈이며, 도(道)라 함은 이른바 한량없는 방편이니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무엇이 첫째가는 이치를 세속의 진리라 말하는 것인가. 마치 비구들에게 ‘이제 나의 이 몸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무엇이 세속의 진리를 첫째가는 이치라고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교진여(憍陣如)에게 말하기를 ‘너는 법을 얻었기 때문에 아야(阿若)교진여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을 따르고 뜻을 따르며 때를 따르느니라.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모든 근력(根力)을 안다고 하시느니라.
  선남자야, 내가 만약 이러한 이치들에서 결정적인 설명을 한다면, 나를 ‘여래께서는 근력을 모두 아신다’고 일컫지 못할 것이니라.
  선남자야, 지혜 있는 사람은 향상(香象)이 짊어지는 것을 당나귀는 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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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음을 알아야 하리니, 온갖 중생들의 행할 바는 한량없는지라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갖가지로 그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법을 해설하시느니라. 왜냐 하면 중생들은 번뇌가 많기 때문이니라. 만약 여래로 하여금 하나의 행을 말하게 하면, 여래께서는 완전히 성취하여 모든 근력을 아는 이라 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법은 본래 이름이 없고 마음으로 인하여 이룩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큰 성인께서는 세속 진리를 따르면서 간곡하게 교화의 편의를 따르며, 자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고 하나와 여럿이 일정하지 아니하며 설명 있는 것을 거두어서 설명 없는 것으로 돌아가고 이름 있는 것을 이끌어서 이름 없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니, 마침내는 다 함께 본마음의 고요히 사라진 자리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부디 근기가 영리한 사람에게 법어를 자세히 말하거나 근기가 둔한 사람에게 법을 간략하게 말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또 이름은 바탕[體]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바탕은 이름을 따라 생기므로, 바탕이 공(空)한데 이름이 붙여질 바 없고 이름이 비었는데 바탕이 생길 바가 없다. 이름과 바탕은 서로가 고요하고 만 가지 법은 생김이 없으며, 다만 하나의 참 마음일 뿐 다시는 아무 것도 없다.
  『영가집(永嘉集)』에서 이르기를 “그러므로 바탕은 이름이 아니면 가려지지 아니하고 이름은 바탕이 아니면 붙여지지 아니한다. 바탕을 말함에는 반드시 그 이름을 빌리고 이름을 말함에는 반드시 그 바탕을 빌린다. 지금의 바탕 이외에 이름을 붙였다면 이것은 그 바탕이 없는 것에 이름 붙였을 뿐이니, 어찌 바탕으로서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있겠는가. 마치 토끼에 뿔이 없는데도 이름을 붙인 것과 같으니 이것은 그 뿔이 없는 것을 이름 붙인 것과 같거늘 어찌 뿔로서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있겠는가.
  바탕이 없는데도 이름은 붙이면 그 이름은 진실 없는 이름이요, 이름이 진실 없는 이름이라면 이름을 붙인 것이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이름은 붙인 것이 없다면 이름 붙이는 것조차도 없다. 왜냐 하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본래 그 바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니, 바탕이 없는데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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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름을 해당시키겠는가. 바탕을 말함에는 본래 그 이름을 해당시키는 것인데 이름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바탕에 해당시키겠는가. 바탕이 해당된 데가 없으므로 바탕이 아니며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이 아니다. 이러하다면 어찌 바탕만 원래 허망하겠는가. 역시 이름까지도 본래 고요한 것이다. 그리고 바탕으로서 이름에 해당됨이 없는 유래가 그렇다면, 이름도 어디에 해당함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바탕은 스스로가 이름짓지 못하고 딴 이름을 빌려서야 제 바탕에 이름을 붙이며 이름도 스스로가 짓지 못하고 다른 바탕을 빌려서야 제 이름이 붙여진다. 만약 바탕으로서 아직 나타나지 못했으면 이름은 어디의 이름이며, 만약 이름으로서 아직 지어지지 못했다면 바탕은 어디서 밝혀지는 것인가.
  그리고 바탕을 밝힘에 비록 그 이름을 빌린다 해도 이름 붙이지 않았다 하여 바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지음에는 반드시 그 바탕에 기인하는 것이니 바탕이 없으면 이름도 본래 없다. 그렇다면 바탕은 이름 붙이지 않아도 생기지만 이름은 바탕에서 나온다. 지금의 바탕은 이름 이전에 있고 이름은 바탕을 따른 뒤에야 분별되는 것이니, 이는 곧 이름을 지음에는 그 바탕에 이름이 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탕은 바로 이름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곧 이름이 있게 된 까닭은 바탕에서 생기거니와 바탕의 원 실마리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바탕은 제 스스로가 나타내지 못하고 인연이 모여야 바탕이 이룩되며, 인연은 제 스스로가 모인 것이 아니고 모이는 바탕으로 인하여 인연이 이룩된다. 만약 바탕으로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연이 어디에 모이며 만약 인연이 아직 모이지 않았다면 바탕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바탕이 나타났다면 인연이 모여서 나타난 것이고, 인연이 모였다면 바탕이 나타나서 모인 것이다. 바탕이 나타나서 모였다면 나타남에는 따로의 모임이 없다 함이 분명하고, 나타남에 따로의 모임이 없다면 모임은 본래가 없다. 인연이 모여서 나타났다면 모임에는 따로의 나타남이 없다함이 분명하고 모임에 따로의 나타남이 없다면 나타남은 본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 가지 법은 인연을 따르되 그 자체는 없다. 바탕이면서 자체가 없으므로 성품이 공(空)하다고 하며, 성품이 공하므로 비록 인연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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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더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이 모였으므로 비록 성품이 공하다 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이 모여서 있는 것이지만 있으면서도 있는 것이 아니요, 성품이 공하여 없는 것이지만 없으면서도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모였지만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공하지만 인연이 모였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함은, 바로 있음을 떠나서 따로 하나의 없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요, 없음을 떠나서 따로 하나의 있음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법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름할 뿐이다. 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벌써 있거나 없거나 함이 아님도 아니며, 또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다. 이렇다면 말의 길만 끊어졌겠는가. 역시 마음이 가는 곳까지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름과 바탕이 이미 공(空)하므로 말과 생각이 절로 끊어졌으니, 만 가지 기틀의 자취가 없어지고 홀로 참 마음만이 환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했다.
  [문] 유심의 미묘한 종지는 일체 이름이 없다 하니 중생들의 이름이라면 가설로 붙였다 하겠거니와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어찌 거짓되게 지었다 하겠는가?
  [답] 범부로 인하여 성인이 성립되므로 성인은 본래 이름이 없고 범속으로부터 진리를 나타내므로 진리는 원래 성립되지 아니한다. 다 같이 세속의 문자에 상대하여 의지하면서 나오므로 문자도 공이며 공 또한 의탁할 곳이 없다.
  만약 으뜸 근기의 대사(大士)라면, 어찌 이름과 모양을 빌면서 떨쳐 일으키겠는가. 경계를 대하면 생각과 생각마다 근원을 알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과 마음마다 도에 계합되리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사자뢰음불(師子雷音佛) 국토에는 보배나무로 장엄되었고 그 나무들로부터 언제나 한량없는 법의 음성이 나온다. 이른바 ‘온갖 법은 마침내 공이요 남이 없고 사라짐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 국토 인민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내 이 법 음성을 듣기 때문에 나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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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이러한 때에 어느 처소에 3보의 이름이 있겠는가. 다만 남이 없는 뜻이 일체임을 알 뿐이어서 3보는 언제나 세간에 나타난다. 만약 차별된 이름을 취하면 곧 참되고 항상하는 진리를 잃게 되고 온갖 법에 제 성품이 없음만을 알면 어디서나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므로 하나의 법도 근본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다 함은, 지금 여래께서 출현하셨으나 완전히 티끌이어서 성품이 없는 것이다. 법계와 연기와 보리와 열반이 여래의 몸이며, 이 몸은 세 가지 세간을 다 통하였다.
  그러므로 온갖 국토와 온갖 중생과 온갖 사물과 온갖 연기와 온갖 업보며 온갖 티끌과 털 등에서, 저마다 보리와 열반을 드러내며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한 것으로 된다. 만약 한 처소에서라도 깨닫지 못하면, 곧 부처가 되지 못하고 출현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깨닫지 못하므로 말미암는 처소가 그대로 무명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처도 되지 못하고 출현하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함에는 기회를 알고 때를 알아서 머리 숙이며 아래 근기들을 위하여 감겁(減劫)에 태어남을 보이며, 빈주먹으로 유인하고 노란 잎[黃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만약 상상(上上)근기의 사람에게는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돌아가시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안 계시거나 간에 성상(性相)은 언제나 머무른다”고 했고,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마음과 같이 모든 부처도 그러하고/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마음과 부처 및 중생의/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하나의 법일 뿐이어서 이름은 다르나 도리는 같다.
  왜냐 하면 이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상대가 끊어지고 부사의함을 깨달아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적에는 10신(信)의 첫 이름인 부동지불(不動智佛)에 들어가며, 이 상대가 끊어진 진심을 깨닫지 못하여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차별될 때에는 법신(法身)이라 하고, 다섯 갈래를 헤매면 중생이라 하기 때문이니, 미혹과 깨침의 이름이 있고 한 마음의 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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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지 않았거늘 다시 무슨 법이 있어서 범부와 성인이란 이름을 짓고 차별을 할 것인가.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법은 위없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문수가 대답하기를 ‘한 법의 작은 티끌만큼도 위없다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마치 세존께서 이 법을 말씀할 때에 보살로서 이 삼매와 모든 다라니문을 얻은 이가 없고 또한 저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글귀의 뜻도 없으며, 내지 한 문자의 글귀조차 해설하지 않았으므로 들은 사람도 없고 이해한 사람도 없고 부처가 된 사람도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이 참말이라면, 이후 말세의 5백 년에 이 경의 법문을 염부제에 홍포하여 두루 행해지고 널리 펴져서 불꽃 일어나듯 소멸하지 아니하여야 진실한 말이리라.
  [문] 이미 만 가지 기틀의 자취가 없어지고 홀로 참 마음만이 환하다 하면, 무엇 때문에 가르침 안에서 ‘이것은 범부의 법이요 이것은 성인의 법이다’라고 말하는가.
  [답] 온갖 법은 인연으로 생겨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범부의 법이 될 수도 없고 성인의 법이 될 수도 없다. 성품이 없고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진리거나 범속이거나 간에 서로가 뒤섞여 범람하지 아니한다.
  가령 “온갖 것이 그대로 하나여서 다 똑같이 성품이 없으며 하나가 그대로 온갖 것이어서 인과가 역연(歷然)하다. 비록 역연하다 하더라도 성품 없는 도리를 잃지 아니하며, 비록 성품이 없다 하더라도 인연으로 생기는 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또 한 마음을 알 뿐이기는 하나 모든 법에서 낱낱이 환히 알아 분명하여 미혹됨이 없다”고 한 것과 같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이 모두 동일한 성품임을 안다. 이른바 성품이 없고 갖가지 성품이 없고 한량없는 성품이 없고 고루 헤아릴 만한 성품이 없고 측량할 만한 성품이 없다. 빛깔이 없고 모양이 없어서 하나거나 여럿이거나 간에 모두가 얻을 수 없다.
  그리하여 결정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의 법이고 이것이 보살의 법이고 이것이 독각의 법이고 이것이 성문의 법이고 이것이 범부의 법이고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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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법이고 이것이 착하지 않은 법이고 이것이 세간의 법이고 이것이 출세간의 법이고 이것이 허물 있는 법이고 이것이 허물없는 법이고 이것이 유루의 법이고, 이것이 무루의 법이며 내지 이것이 유위의 법이고 이것이 무위의 법임을 분명히 안다. 이것이 제7의 여실주(如實住)가 된다”고 했다.
  [문] 한 마음의 법이, 어떻게 온갖 법을 다 능히 두루 표용하고 출생시키며 원만하게 모든 법을 갖출 수 있는가?
  [답] 마음이란 신령하고 묘하며 방소(方所)도 없고 지극한 이치는 오묘하고 아득하다. 3세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두 진리로 추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형상이 없고 이름이 없는지라 그 깊고 넓음을 측량할 수 없고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지라 그 뜻과 자취를 살필 수 없으며, 미세하여 사이가 없는 속을 들어가는지라 그의 작음을 말로써 할 수 없고, 워낙 커서 천체(天體) 형상의 밖까지 포용하는지라 그의 깊음을 말로써는 할 수 없다.
  지극한 도여서 텅 비고 오묘한데 그 누가 있게 할 수 있으며, 그윽하고 신령하여 추락하지 않는데 그 누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자취는 법계를 나누되 많은 것이 아니고 성품은 진공(眞空)에 계합하되 적은 것이 아니며, 체성은 하나의 도(道)에 모이지만 고요한 것이 아니고 작용은 만물에 수고롭지 않다.
  마치 여의주와 같아서 천상에서의 뛰어난 보배이고, 형상은 겨자씨와 조만 하지만 큰 공능이 있다. 오욕을 깨끗하고 묘하게 하는 일곱 가지 보배이며 임랑(琳瑯)이로되 안에 쌓아 둔 것도 아니고 바깥에서 들이는 것도 아니며 앞과 뒤도 꾀하지 않고 많고 적음도 가리지 아니하며 거칠거나 아름다움도 짓지 아니하고 뜻에 알맞게 하여 풍요하게 쓰거나 검약하게 하며 비오듯 주룩주룩 내리되 더하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으며 이롭게 하고 구제함이 그지없다. 대개 이것은 물질의 법인데도 오히려 이러할 수 있거늘 하물며 마음의 신령하고 묘함이야 어찌 온갖 법을 갖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성문과 독각과 보살들이 모두가 이 하나의 묘하고 청정한 도를 같이 하며 모두가 이 하나의 마지막의 청정함을 같이 하는 것이요, 다시 둘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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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느니라. 나는 이에 의지하기 때문에 은밀한 뜻으로 일승(一乘)이 있을 뿐임을 말하느니라. 내지 비유하면 허공이 어디서나 두루하고 모두가 동일한 맛이어서 온갖 하는 일들을 장애하지 않음과 같으니라.’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법은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다 동일한 맛이어서 온갖 성문과 연각이며 모든 대사(大士)들의 닦는 일을 장애하지 않습니다.’”
  한산자(寒山子)의 시에 이르기를 “나의 집이 여기 있어 한산(寒山)이라 하니/산 바위에 깃들면서 번거로움 여읜다네./없어질 땐 만상(萬像)이 흔적도 없고/펴면 곧 널리 흘러 대천(大千)에 두루하네./빛을 환히 번쩍이며 마음자리 비추어도/한 법도 눈앞에 나타남이 없으니/알겠도다. 마니(摩尼)의 한 덩이 보배는/묘한 작용 그지없어 곳곳마다 원만함을”이라고 했다.
  『환원관(還原觀)』에서 이르기를 “선정의 광명이 나타나되 생각이 없이 관한다 함은, 일승교 안의 희고 깨끗한 보배 그물이요 만자(萬字)인 전륜왕의 보주임을 말하나니 이 구슬의 체성은 밝게 사무쳐 시방을 한꺼번에 비춘다. 헤아림 없이 일을 이루는 생각이라 함은, 모두가 그로부터 기특한 공능을 나타내나 마음에 생각함이 없다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크고 묘한 지관문(止觀門) 안에 들면 헤아림도 없이 저절로 일이 이룩됨이 마치 저 보주가 멀고 가까운 데를 한꺼번에 비추면 분명하게 나타나서 허공을 널리 환하게 한 것처럼 2승과 외도의 티끌ㆍ안개ㆍ연기ㆍ구름 등에 의해 가리워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청량소(淸凉疏)』에서 이르기를 “마치 하나의 햇빛이 나란히 비추는 것처럼 하나의 법을 들음에 따라서 한량한 문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모양[相]에서 본 종류이다. 마치 하나의 무상한 문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모이고 흩어지고 합치고 떨어지며 얻고 잃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등의 삼재(三災)와 사상(四相)이 있으면서 바깥 세계와 안 몸은 찰나 동안에 일생을 이루고 없어지고 바뀌고 변하며 더럽고 깨끗하고 숨고 나타나는 것처럼 그 밖의 모두의 무상한 문도 역시 그러하다.
  둘째는 성품(性)에서 보면 원융하여 끝없는 것이니, 법 성품은 고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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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모양이 없기는 하나 모양이 없는 모양은 번거롭게 일어남을 장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성에 의지하여 널리 나타남은 마치 달이 백천의 시내로 들어갈 때 그림자의 달을 찾아도 달의 체성은 나누어지지 아니하여 체성에 즉한 작용이라 작용은 법계에 퍼지며 체성과 작용은 서로가 통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불가사의하다”라고 했다.
  『보행기(輔行記)』에서 말하였다.
  [문] ‘한 마음을 이미 십법계(十法界)의 인과를 갖추어서 다만 마음을 관할 뿐이거늘 어찌하여 관(觀)을 갖추어야[具]하는가?’
  [답] ‘일가(一家)의 관문(觀門)에는 여러 가지 해설이 영영 다른지라 온갖 시방 3세의 범부거나 성인의 온갖 인과를 모두 포섭하면 진실로 관으로 말미암아 갖춘 것이다. 갖춤은 곧 가(假)요 가는 곧 공(空)과 중(中)이다. 진리 성품이 비록 갖추었다 하더라도, 만약 관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관한다고 말만 하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소승이 어찌 마음을 관하지 아니하겠는가. 한 마음에 모든 법을 갖춘 것을 미혹했을 뿐이다.’
  [문] ‘만약 관을 갖추지 아니하면, 어느 교(敎)에 속하게 되는가?’
  [답] ‘별교(別敎)의 가르침의 길이니, 음 마음을 내면서부터 다만 차례로 10법계에 나고 끊음도 차례로 한다>고만 말하기 때문에 관을 갖추지 아니한다. 혹은 통교(通敎)를 받으면 곧 공이라는 도리일 뿐이며, 혹은 삼장교(三藏敎)를 받으면 고요히 사라짐의 진공[眞]인데 이와 같은 사람들이 어찌 관을 갖추어야겠는가.
  왜냐 하면 삼장교와 통교에서는 음은 육계(六界)에서 나고 관(觀)은 익숙함과 서투름이 있다고 말할 뿐이어서 즉리(卽離)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교에서는 관으로 갖출 필요가 없고 오히려 갖춤[具]조차도 모르거늘, 하물며 공과의 중을 알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발심(發心)과 필경(畢竟)의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고 하겠으며, 정각을 이루고 나면 어찌하여 10법계의 몸과 국토를 나툰다고 하겠는가.
  또 배우는 이가 비록 속의 마음을 알아 3천 가지 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내가 저 3천 가지에 두루함을 모른다. 그는 저 3천 가지가 서로서로 두루한 것도 그러하여 진실로 범부의 망정을 따르면서 안팎의 소견을 내고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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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체성을 비추어야 본래 사성(四性)이 없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 이것을 능히 아는 이라야 식심(識心)을 어렴풋이나마 본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한 마음인 큰 지혜의 도장으로 비롯함이 이 없는 3세에 도장을 찍는다”고 했다.
  온통 같은 때에 있으면서 끝없는 모든 법의 지혜 도장이 다 함께 두루한 것은, 지혜는 모든 부처와 같기 때문이요, 지혜는 중생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요, 지혜는 모든 법과 같기 때문이요, 지혜는 중간과 가장자리ㆍ겉과 속ㆍ3세와 길고 짧음과 가깝고 멂이 없기 때문이요, 지혜는 허공의 분량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니, 마치 세간의 허공은 분명히 알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무분별지(無分別智)의 허공은 한 생각으로 허공 등보다 뛰어나는 법문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온갖 허공은 오히려 헤아려도 부처님의 설법은 말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보광명지(普光明智)는 허공과 같으나 허공은 공(空)일 뿐 지혜는 자재하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이르기를 “한량없는 이치는 한 법으로부터 생긴다. 곧 한 법이 한량없는 이치를 내는 줄 알 것이니, 이른바 한 마음이다. 하나하나의 법은 모두 한량없는 이치를 내는 것이니, 마음이 온갖 법에 두루하므로 하나하나의 법은 마음 아님이 없기 때문에 간략함으로써 모두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간략한 마음은 만법을 능히 포함하고 온갖 가르침을 두루한 줄 알 것이니, 경계거나 지혜거나 사람이거나 법이거나 간에 모든 일에 따라 하나하나를 풀이하며 마음을 향하여 관을 하게 되면 관혜(觀慧)가 더욱 이루어져서 마치 바다가 흐름들을 삼키는 것과 같고 나무가 불을 돋우는 것과 같다. 깊이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루하게도 되고 작게도 되며, 자세히 관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有]에 머무르고 공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성문은 이 큰 일을 보고 스스로가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겨 혹은 울부짖는 소리가 대천세계에 떨치기도 하고, 혹은 ‘똑같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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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법을 함께 하면서는 이 일을 얻지 못하겠다’고 말하기도 하거니와 보살이 이 묘한 뜻을 들으면 전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혹은 ‘한량없는 겁으로부터 나 없음[無我]에게 표류를 당했구나’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들이 예전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삿된 소견을 낸 사람이었구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와 같은 잘못은 모두가 이는 제 마음이 광대하고 원융하여서 능히 포함하고 능히 두루함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능히 포함하고 능히 두루하다고 하느냐 하면,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큰 허공은 모양이 없어서 모든 현상을 거부하지 않고 떨쳐 드러내어 시방의 깨끗하거나 더러운 국토를 능히 포함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 가지 변화[萬化]는 종(宗)이 없지 않되 종이란 것이 모양이 없고, 허망한 모양[虛相]은 계합(契合)이 없지 않되 계합이란 것이 무심(無心)이어서 안과 밖이 나란히 명합하고 인연과 지혜가 함께 고요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약 이와 같이 도를 체달하면 천만 가지가 상응하리니, 정법(正法)중의 사람이요, 참 부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종지를 어기고 망령되이 유심(有心)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수행에 떨어져서 종경(宗鏡)에 들지 못한다.
  고덕(古德)이 노래하기를 “다만 무심이 되어 배울 것 없음 배우고/또한 바르게 닦을 것 없음 닦아라/만약 사람이 이러한 곳 모르면/비구라고 일컫지 못하리로다”고 함과 같다.
  동산(洞山) 화상이 이르기를 “우리 집 본래 주소 어느 쪽에 있는가/길이 없고 사람 닿지 않은 곳이 고향일세/그대 만약 출가하여 석가 제자 되어서/이 길을 능히 가면 만 가지가 알맞으리”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초조(初祖) 대사가 이르기를 “만약 일체를 짓는 곳이 곧 지음 없는 곳이어서 법을 지음이 없으면 곧 부처를 보겠지만, 만약 모양을 보면 온갖 처소에서 귀신을 보리라. 왜냐 하면 짓는 때에 짓는 이가 없고 지을 법이 없는지라 곧 인(人)ㆍ법(法)이 다 함께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거니와 만약 지음이 없는 법에 헷갈리면 허깨비 모양[幻相]이 앞에 나타나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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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있는바 모양은 모두가 바로 허망이니라”고 하였다. 마치 열병(熱病)에서 보는 바와 같거늘 어찌 귀신이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고덕이 이르기를 “만법은 넓고 크되 근원은 하나이어서 모양이 없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생각은 1만 8천 번이 넘더라도 한 번 한 번 마다 모양 없는 선정[無相定]에 든다”고 했으며, 또한 이르기를 “모양 없는 도량과 모양 없는 법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종경(宗鏡)에서라면 참되고 으뜸가게 마음 살피는 힘[省心力]을 내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적은 방편으로써도 빨리 보리를 얻는다”고 하고, 고덕이 이르기를 “배움은 비록 많지 않더라도 으뜸가는 성현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 곧 이런 뜻이다.
  또 이 한마음은 모두가 본체[理]와 현상[事]의 걸림 없음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두루함과 함용(含容)이 있을 수 있다.
  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에서는 “본체와 현상이 용융(鎔融)하여 있음[存]ㆍ없음[亡]과 쫓음[順]ㆍ거스름[逆]에는 통하여 열 가지 문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본체가 형상에 두루한 문[理遍於事門]이니, 능히 두루하는[能遍] 본체는 성품에 따로따로의 한계가 없되 두루할 바[所遍]의 현상은 분위(分位)로 차별되어 낱낱 현상 중에 본체가 다 온전히 두루한 것이요 부분만 두루한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저 참된 본체는 나누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낱의 작은 티끌은 모두가 끝없는 참된 본체를 포섭하여 뚜렷하고 만족하지 아니함이 없다.
  둘째는 현상이 본체에 두루한 문[事遍於理門]이니, 능히 두루함의 현상은 바로 따로따로의 한계가 있되 두루할 바의 본체는 반드시 따로따로의 한계가 없다. 이 따로따로의 한계가 있는 현상과 따로따로의 한계가 없는 본체는 온전히 같은 것이요 부분만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현상은 체성이 없지만 도리어 본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법계에 두루하다. 마치 하나의 티끌처럼 온갖 법도 그러한 줄 생각할 것이다.
  또 첫째, 본체의 성품[理性]은 나누어짐이 없을 뿐더러 그 때문에 온갖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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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있으며, 그리고 전체는 하나의 속에 있게 된다. 둘째, 나누어질 뿐더러 그 때문에 언제나 하나의 속에 있고 전체는 온갖 곳에 있다.
  첫째, 현상의 법[事法]은 나누어질 뿐더러 그 때문에 언제나 여기에 있고 항상 다른 쪽에도 있다. 둘째, 나누어짐이 없을 뿐더러 그 때문에 온갖 곳에 두루하면서도 본래 자리를 옮아가지 아니한다.
  또 첫째, 본체의 성품은 나누어짐이 없을 뿐더러 그 때문에 하나의 현상의 바깥에 있지 아니하다. 둘째, 나누어질 뿐더러 그 때문에 하나의 현상 안에도 있지 아니하다.
  첫째, 현상의 법은 나누어질 뿐더러 그 때문에 언제나 이 곳에 있으면서도 존재함이 없다. 둘째, 나누어짐이 없을 뿐더러 그 때문에 언제나 다른 곳에 있으면서도 존재함이 없다.
  그러므로 존재함이 없으면서도 존재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그리고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면서 장애가 없다.
  이것은 완전히 두루한 문[全遍門]이어서 망정을 초월하고 소견을 떠났기 때문에 세간의 비유로써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완전히 하나의 큰 바다가 하나의 파랑 속에 있다하여 바다가 작은 것이 아님과 같고, 마치 하나의 작은 파랑이 큰 바다를 돈다 하여 파랑이 큰 것이 아님과 같다. 같은 때에 온전히 모든 파랑에 두루 미친다 하여 바다가 다른 것이 아니며, 같은 때에 저마다 큰 바다에 돈다 하여 파랑이 동일한 것이 아니다.
  또 큰 바다가 하나의 파랑에 두루 미치는 때에도 온 바탕이 모든 파랑에 두루 미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하며, 한 파랑이 큰 바다를 온전히 도는 때에도 모든 파랑 역시 저마다 온전히 돌며 서로서로가 장애하지 아니한 줄 생각할 것이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바다를 참된 본체[理]로 삼고 파랑을 현상[事]으로 삼아 본체와 현상이 서로 두루하면서 동일하거나 다르지 않음에 견주었다. 곧 바다는 파랑에 처하되 작지 아니하고 습성(濕性)은 같으면서 넓고 좁음에 차별이 없으며, 파랑은 바다를 돌되 크지 아니하고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하나와 여럿이 온전히 두루한다.
  [문] 본체가 이미 하나의 티끌에 두루하다면 무엇 때문에 작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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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티끌과 같이 작지 않다면 어찌하여 전체가 하나의 티끌에 두루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나의 티끌이 본체의 성품에 완전히 두루하다면 무엇 때문에 크지 아니하며, 만약 본체와 같이 광대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본체의 성품에 완전히 두루할 수 있는가. 벌써 모순을 이루었고 이치가 아주 서로 어긋난다.
  [답] 본체와 현상을 서로 대비시키면 저마다 동일하거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거두면서 근본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
  먼저 본체를 현상에 대비시키면, 거기에는 네 구절이 있다. 첫째는 참된 본체와 현상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참된 본체의 전 체성(體性)은 현상 안에 있다. 둘째는 참된 본체와 현상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참된 본체의 체성은 언제나 끝이 없다. 셋째는 동일한 것이 아님은 다른 것이 아님에 즉하기 때문이니, 끝없는 본체의 성품은 하나의 티끌에 있다. 넷째는 다른 것이 아님에 즉하기 때문이니, 하나의 티끌의 본체의 성품은 따로따로의 한계가 없다.
  다음에 현상을 본체에 대비시키면 역시 네 구절이 있다. 첫째는 현상의 법과 본체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본체의 성품에서 완전히 두루한다. 둘째는 현상의 법과 본체는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하나의 티끌에서 무너지지 아니한다. 셋째는 동일한 것이 아님이 곧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작은 티끌이 끝없는 본체의 성품에서 두루한다. 넷째는 다른 것이 아님이 곧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은 끝없는 본체의 성품에서 두루하면서 티끌은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문] 끝없는 본체의 성품이 하나의 티끌에 두루 미치는 때에는 바깥의 모든 현상의 처소에 본체의 성품이 있게 되는가. 본체의 성품이 없게 되는가. 만약 티끌 바깥에 본체가 있다면 전 체성은 하나의 티끌에 두루한 것이 아니며, 만약 티끌 바깥에 본체가 없다면 전혀 온갖 현상에 두루한 것이 아니리니, 이치가 매우 서로 어긋난다.
  [답] 하나의 본체의 성품이 융합하기 때문이요, 여럿의 현상이 걸림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바깥에 있을 수 있어서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는 것이니 저마다 네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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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본체의 네 구절에 나아가 보자. 첫째는 본체 성품의 전체가 온갖 현상 안에 있을 때에는 전 체성이 한 티끌 처소에 있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깥에 있으면 안에도 있다. 둘째는 전 체성이 한 티끌 속에 있을 때에는 전 체성이 그 밖의 현상 처소에 있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안에 있으면 바깥에도 있다. 셋째는 둘이 없는 성품이 저마다 완전히 온갖 속에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안에서도 있고 바깥에서도 있다. 넷째는 둘이 없는 성품은 온갖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의 것도 아니고 바깥 것도 아니다.
  앞의 세 구절은 온갖 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밝혔고, 여기의 한 구절은 온갖 법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진실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안팎에 걸림이 없다.
  다음에 현상의 네 구절에 나아가서 보자. 첫째 하나의 티끌이 본체에서 완전히 두루하는 때에, 온갖 현상의 법 또한 전혀 두루하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안에 있으면 곧 바깥에도 있다. 둘째 온갖 법이 저마다 본체의 성품에서 두루하는 때에, 하나의 티끌 또한 전혀 두루하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바깥에 있으면 안에도 있다. 셋째 모든 법은 동시에 저마다 두루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전혀 안에서도 전혀 바깥에서도 장애가 없다. 넷째 모든 현상의 법은 저마다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피차가 서로 바라보며 안의 것도 아니고 바깥 것도 아닌 줄 생각할 것이다.
  해석하여 보자. 본체가 하나에 있으면 안이 되고 여럿에 있으면 바깥이 되며, 현상도 하나면 안이 되고 여럿이면 바깥이 된다. 왜냐 하면 하나와 여럿과 안과 바깥은 서로가 두루하고 서로가 존재하면서 장애함이 없고 이 하나의 마음만이 원융하기 때문이다.
  본체와 현상에 붙여서 그를 나타내면, 체성의 고요한 편을 일컬어서 본체라 하고 작용의 움직인 편을 일컬어서 현상이라 한다. 본체는 바로 마음의 성품이요 현상은 바로 마음의 모양이니, 성품과 모양은 다 함께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온갖 것은 걸림이 없다. 위에서와 같은 끝없는 분한(分限)과 차별된 현상은 하나의 본체 성품으로써만 녹아 어울린다.
  저절로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함용하고 하나와 여럿이 즉하여 들어감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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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 금으로 부어 만든 10법계(法界)의 형상을 만약 녹인다면 다른 모양이 없는 것과 같고, 녹아 어우르면 바로 하나의 금뿐인 것과 같다. 본체의 성품이 큰 화로가 되고, 녹은 만 가지 현상은 큰 대장장이다. 그렇다면 만 가지 법이 녹아서 똑같이 하나의 진실로 모인다.
  셋째는 본체에 의하여 현상을 이루는 문[依理成事門]이니, 현상은 따로의 체성이 없고 반드시 참된 본체로 인하여 성립될 수 있음을 말한다. 모든 연기(緣起)는 모두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본체로 말미암아 현상이 비로소 성립되기 때문이다. 마치 파랑은 반드시 물로 인하여 성립되기 때문인 것처럼, 여래장에 의하여 모든 법이 있을 수 있나니,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생각할 것이다.
  넷째는 현상이 능히 본체를 나타내는 문[事能顯理門]이니, 현상으로 말미암아 본체를 거두기 때문이다. 곧 현상은 공허하고 본체는 충실하며, 현상은 공허하기 때문에 순수한 현상 안의 본체가 우뚝하게 드러난다. 마치 파랑의 모양은 공허하나 물의 체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이 안의 도리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생각할 것이다.
  다섯째는 본체가 현상을 빼앗는 문[以理奪事門]이니, 현상이 본체에 거두어져 이루어지면 마침내 현상의 모양을 모두 다하게 하여 하나의 참된 본체만이 나타난다. 참된 본체를 여의면 그 밖의 조그마한 현상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파랑을 빼앗으면 파랑은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이것은 바로 물이 자기를 존재시키면서 파랑을 파괴하여 다하게 함과 같다.
  여섯째는 현상이 능히 본체를 숨기는 문[事能隱理門]이니, 참 본체는 인연을 따라서 모든 현상의 법을 이룬다. 그러나 이 현상의 법이 이미 본체에서 두루했으면 마침내 현상으로 나타나게 하면서 본체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마치 물이 파랑을 이루되 움직이면 나타나고 고요하면 숨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하기를 “법신이 다섯 갈래[五道]를 헤매면 중생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으로 나타나게 되는 때에는 법신은 나타나지 아니한다.
  일곱째는 참 본체가 현상에 즉하는 문[眞理卽事門]이니, 이 참 본체는 반드시 현상 밖의 것이 아니다. 이 법은 나[我] 없음의 도리이기 때문이며, 현상은 반드시 본체에 의하고 본체는 공허하여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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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이 본체의 온 체성이 모두 현상이라야 참 본체가 된다. 마치 물이 곧 파랑이되 움직이면서 습기 성품이 아닌 것과 같다.
  여덟째는 현상의 법이 본체에 즉하는 문[事法卽理門]이니, 연기의 현상 법은 반드시 제 성품이 없고 온 체성이 곧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여(如)에 즉한지라 적멸을 기다리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파랑의 움직이는 모양도 온 체성이 그대로의 물이요 다름이 없는 것과 같다.
  아홉째는 참 본체는 현상이 아니라는 문[眞理非事門]이니, 현상에 즉한 본체로되 이는 현상이 아님을 말한다. 진실과 허망이 다르기 때문이요 진실은 허망이 아니기 때문이며 소의(所依)는 능의(能依)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파랑에 즉한 물이로되 파랑이 아니며, 움직임은 습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째는 현상의 법은 본체가 아닌 문[事法非理門]이니, 순수한 본체의 현상이로되 현상은 항상 본체가 아님을 말한다. 성품과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요, 능의는 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체성은 순수한 본체로되 현상의 모양이 완연하다. 마치 온전히 물의 파랑이로되 파랑이 언제나 물이 아님과 같다. 움직임의 이치는 습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빛깔과 빛깔이 아님은 이것이 둘이요 하나가 되어지지 않음과 같다”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생사와 열반은 분별되어 저마다 같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본체와 현상의 거스름과 쫓음이 자재하다[理事逆順自在]’ 함은 현상과 본체를 서로 대비시키면 저마다 네 가지의 이치가 있다. 네 가지 이치 중에서 두 가지 이치는 거스름이요 두 가지 이치는 쫓음이다.
  본체에 의하여 현상을 이루면 참 본체가 현상에 즉하므로 쫓음이요, 본체가 현상을 빼앗으면 참 본체는 현상이 아니므로 거스름이며, 현상이 능히 본체를 나타내면 현상의 법은 본체에 즉하므로 쫓음이요, 현상이 능히 본체를 숨기면 현상의 법은 본체가 아니므로 거스름이다. 이루고자 하면 이내 이루고 파괴하고자 하면 이내 파괴하기 때문에 ‘자재함’이라고 하며, 이루어짐이 파괴에 장애되지 아니하고 파괴가 이루어짐에 장애되지 아니하며, 나타남이 숨음에 장애되지 아니하고 숨음이 나타남에 장애되지 않기 때문에 ‘걸림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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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하며, 바로 이루어지는 때에 이내 파괴됨과 같기 때문에 ‘같은 때’라 하고, 다시 쌍[對]이 모두 나아감과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단박에 일어난다’고 한다.
  위의 네 쌍에서 무엇 때문에 본체를 현상에 대비시켜서 ‘이루어짐’이라고만 말하고 ‘나타남’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현상을 본체에 대비시켜서 ‘나타남’이라고만 말하고 ‘이루어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느냐 하면, 깊은 까닭이 있다.
  왜냐 하면 현상은 본체로부터 생기므로 ‘이루어짐’이라고만 말할 수 있고, 본체는 새로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타남’이라고만 말할 수 있으며, 현상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소멸되기 때문에 ‘무너짐’이라고만 말할 수 있고, 참 본체는 언제나 머무르기 때문에 ‘숨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동일함과 즉하거나 그 다름과 즉하거나 간에 큰 뜻은 같지만 세밀하게 밝히면 역시 다르다. 본체는 형상이 없고 다만 현상에 즉하면서 현상에 만 가지 차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본체와 하나로 명합한다’고 말하며, 본체는 모든 모양이 끊어지기 때문에 ‘현상을 여읜다’고 말하며, 현상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본체와 다르다’고 말한다.
  위의 것을 뜻으로 요약하여 구별하면 여기에 같지 아니함이 있고, 만약 통틀어 거두면 다섯 쌍[對]의 걸림 없는 이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상변(相遍)의 쌍이요, 둘째는 상성(相成)의 쌍이요, 셋째는 상해(相害)의 쌍이요, 넷째는 상즉(相卽)의 쌍이요, 다섯째는 부즉(不卽)의 쌍이다.
   다섯 가운데서 앞의 네 가지는 현상과 본체가 서로 다르지 않다[不離] 함을 밝히는 것이요, 나중의 하나는 현상과 본체가 즉하지 아니함을 밝힌 것이다.
  또 다섯 쌍의 안에는 다 같이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이루고 나타남[成顯]의 한 쌍은 바로 현상과 본체가 서로 짓는다는 이치[相作義]요, 빼앗고 숨김[奪隱]과 즉하지 않음의 두 쌍은 바로 현상과 본체가 서로 어긴다는 이치요, 상변과 상즉의 두 쌍은 바로 현상과 본체가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는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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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제2의 상성으로 말미암아 제4의 상즉이 있고, 상즉으로 말미암아 상변이 있으며, 제3의 상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제5의 부즉이 있다.
  또 만약 부즉이 없으면 상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설명하게 되는데, 저마다 네 가지 이치가 있다.
  본체를 현상에 대비시키면 진공의 네 가지 이치에 즉한다.
  첫째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것을 이루는 이치이니, 곧 본체에 의하여 현상을 이루는 문이다. 둘째는 다른 것을 없애고 스스로를 나타내는 이치이니, 곧 참 본체가 현상을 빼앗는 문이다. 셋째는 자기와 다른 것이 다 함께 보존되는 이치이니, 곧 참 본체는 현상이 아닌 문이다. 넷째는 자기와 다른 것이 다 함께 소멸되는 이치이니, 곧 참 본체가 현상에 즉하는 문으로서 그것이 즉함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소멸된다.
  또 처음과 셋째는 곧 본체가 현상에 두루하는 문이며 스스로가 보존되는 까닭이면서 온 체성이 다른 것을 이루기 때문에 다른 것에 두루한다.
  뒤의 현상을 본체에 대비시키면 묘유의 네 가지 이치에 즉한다. 첫째는 다른 것을 나타내면서 스스로는 다하는 것이니, 곧 현상이 능히 본체를 나타내는 문이다. 둘째는 스스로가 나타나면서 다른 것을 숨기는 이치이니, 곧 현상이 능히 본체를 숨기는 문이다. 셋째는 자기와 다른 것이 다 함께 보존되는 이치이니, 곧 현상의 법은 본체가 아닌 문이다. 넷째는 자기와 다른 것이 다 함께 소멸되는 이치이니, 곧 현상의 법이 본체에 즉하는 문이다.
  또 처음과 셋째는 곧 현상이 본체에 두루하는 문이며 스스로가 보존되는 까닭이면서 다른 것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두루하다.
  그 때문에 공(空)과 존재의 있고 없음에서 말하면 걸림이 없고, 진공의 숨고 나타남에서 보면 자재함이다.
  본체와 현상이 용융한다 함의 용(鎔)은 대장장이로서 처음에 녹인다는 뜻이요, 융(融)은 어울림으로서 마지막에 이룬다는 이치이다. 본체로써 현상에 녹이고, 현상은 본체와 함께 어우른다.
  마음 관하는 것을 여기서 관(觀)이라 하는데, 현상을 관하면 범속에 해당하고 본체를 관하면 진리에 해당되거니와 이제 본체와 현상의 걸림 없음을 관하면 중도인 첫째가는 이치의 관[第一義觀]이니, 저절로 자비와 지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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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인도하면서 머무름이 없는[無住] 행을 이루리라.
  또 본체와 현상에 관한 열 가지 문을 통틀어 다섯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본체와 현상의 상변(相遍)이요, 둘째는 본체와 현상의 상성(相成)이요, 셋째는 본체와 현상의 상해(相害)요, 넷째는 본체와 현상의 상즉(相卽)이요, 다섯째는 본체와 현상의 상비(相非)이다.
  본체는 곧 성품이 공하여 참 본체는 한 모양이로되 모양이 없고 현상은 곧 물들거나 깨끗하기도 하여 마음과 경계는 인연으로서 일어나게 된다. 일어나고 소멸될 때의 갈래와 피차의 모습은 자세히 진술할 수가 없다.
  상변의 두 문[二門]은, 바로 온전히 두루하고 온전히 같아서 본체는 분류될 수가 없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법 성품은 두루하여 온갖 곳에 있어서/온갖 중생 및 국토며 3세에/모조리 남음 없이 두루 있지만/역시 형상조차 얻을 수 없네”라고 했다. 세 글귀는 바로 온전히 두루함이요, 끝 글귀는 나누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상성의 두 문은, 본체에 의하여 현상이 이루어짐은 마치 물로 인하여 파랑을 이루는 것 같고 공(空)에 의하여 물질이 성립되는 것과 같다. 진여는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만 가지 인연을 따른다. 현상이 본체를 나타낼 수 있음은 마치 영상이 거울의 밝은 데에 나타나고 식(識)의 지혜는 본 성품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온갖 법의 제 성품은/아무 것도 없는 줄 분명히 알지니/이렇게 모든 법을 이해하여야/이내 노사나불(盧舍那佛)뵙게 되리라”고 했다.
  상해의 두 문은, 본체로 현상을 빼앗음은 마치 물이 파랑을 빼앗는 것과 같고, 현상이 본체를 숨길 수 있음은 마치 연기가 불을 덮는 것과 같다.
  상즉의 두 문은 참 본체가 현상에 즉함은 마치 물이 얼음을 떠나지 아니함과 같다. 만약 이것이 공이어서 현상의 밖에서 나올 뿐이라면 현상에 즉하지 않거니와 지금의 즉한 법은 나[我] 없음의 본체로 되는 것이니, 현상을 여의고 어찌 본체가 있겠는가. 현상의 법이 본체에 즉하고 연기는 성품이 없는 것이며, 온갖 중생 또한 그와 같다.
  상비의 두 문은 능소(能所)에 다름이 있고 진실과 허망이 같지 아니하다. 곧 알음[解]에서는 언제나 스스로 하나요, 이치[諦]에서는 항상 스스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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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상즉이면 둘이 아니요, 상비면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세속 이치를 무너뜨리지 않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이치를 숨기지 아니한다.
  이 참된 이치는 성품이 공의 본체로되 공하면서도 공하지 아니하고, 이 세속 이치는 허깨비로 존재하는 현상이로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존재하지 않은 존재이므로 존재는 공을 장애하지 아니하고, 공하지 않은 공이므로 공은 존재를 단절하지 않는다. 피차 의탁하는 곳 없이 서로서로 이루어진다.
  만약 마음속에서 하나의 법이 존재한다고 작정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요, 만약 마음 밖에서 하나의 법이 없다고 집착하면 곧 단견(斷見)에 빠질 것이니, 다 같이 소견의 그물을 이루는 것이요 뚜렷한 종경(宗鏡)에는 들지 못하리라.
  위에서와 같이 원융(圓融)을 본체와 현상의 걸림 없음[理事無礙]으로써 요약하여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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