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3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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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이 앞에서 이미 한 마음의 이사무애(理事無礙)를 밝혔으므로, 이제는 두루하고 함용(含容)하는 관(觀) 안의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요약하겠다.
  『법계관(法界觀)』의 서(序)에서는 “관으로 하여금 현상[事]의 본체[理]가 온전히 현상을 따르면서도 낱낱이 볼 수 있게 하고, 본체의 현상은 온전히 본체를 따르면서도 낱낱이 융화할 수 있게 한 뒤라야 하나와 여럿이 걸림이 없어지고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함용하여 곧 실제 행하게 되는 숨음과 나타남의 신령한 작용이 측량하기 어려울 것이며, 내지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이 경계가 제 마음에서 명합하여 마음의 지혜가 이미 밝아지면 스스로 끝없는 이치를 보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두루하고 함용하는 관 또한 열 가지 문을 갖춘다. 첫째는 이여사문(理如事門)이다. 현상의 법이 이미 헛된 모양이라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본체 성품이 진실한 바탕이라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이야말로 현상은 따로의 현상이 없고 곧 온전한 본체의 현상이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비록 또 현상을 보되 바로 그것이 본체를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현상은 본체에 즉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풀이하여 보면, 이 참 본체로 말미암아 완전히 현상이 되기 때문에 현상처럼 나타나고 현상같이 차별되어 크고 작음과 하나와 여럿이 변하고 바꿔짐이 한량없다.
  또 이 참 본체가 바로 온갖 천차만별의 현상과 함께 같은 때에 똑똑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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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남은, 마치 귀와 눈으로 상대한 바의 경계와 같고 또한 겨자씨와 병과도 같으며 또한 순금과도 같다.
  부처님과 보살과 비구 및 여섯 갈래의 중생의 형상으로 되었을 때에는 모든 형상과 함께 일시에 나타나서 터럭만큼의 숨김도 없고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아니함이 없듯이, 지금 본체의 성품도 그러하여 터럭만큼의 숨김도 없고 터럭만큼도 일삼지 아니함이 없으며 진공(眞空)과는 같지 않고 다만 본체가 현상을 빼앗는 문을 관하는 가운데서 이는 공한 본체만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비록 또 현상을 보되 바로 그것이 본체를 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 현상은 본체에 즉하지 않은 것이라 말하며, 현상은 공허하여 체성이 없으면서도 그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중생을 관하여 모든 부처를 보고 생사를 관하여 열반을 보는 것이니, 온전한 본체의 현상이 항상 나타난다.
  그러므로 현상은 벌써 온전한 본체이기 때문에 본체에 즉하지 아니한다. 만약 본체에 즉한다면 이것은 온전하지 않으리라. 마치 금으로 10법계(法界)의 형상을 부어 만들었을 때 낱낱 형상은 전체가 금이므로 다시 금에 즉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둘째는 사여리문(事如理門)이다. 모든 현상의 법과 본체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상은 본체를 따르면서 두루하며 나아가 한 티끌로 하여금 법계에 두루하게 한다. 법계 전체에 모든 법이 두루할 때는 이 한 작은 티끌 또한 본체의 성품과 같이 온갖 법 안에 온전히 있으며, 한 작은 티끌에서와 같이 온갖 현상의 법 또한 그러하다.
  해석하여 보면, 낱낱의 현상은 모두 본체가 널리 두루하고 광대한 것과 같고, 본체가 3세에 통한 것과 같고 본체가 항상 본연(本然)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이런 예(例)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연각ㆍ성[문]및 여섯 갈래 중생들도 낱낱이 모두가 그러하며, 내지 하나의 티끌ㆍ하나의 생각ㆍ성품과 모양ㆍ작용이며 행위(行位)ㆍ인과 등이 뚜렷하고 만족하지 아니함이 없다.
  셋째는 사함이사문(事含理事門)이다. 모든 현상의 법과 본체는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부터 존재한 하나의 현상이면서 널리 포용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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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마치 하나의 작은 티끌처럼 그 모양은 크지 않으면서도 끝없는 법계를 능히 포용하고 포섭한다.
  세계 등의 모든 법이 법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다같이 한 티끌 안에 있으면서 나타나며, 마치 하나의 티끌에서처럼 온갖 법도 역시 그러하다.
  이 본체와 현상이 융통하여 동일함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기 때문에 통틀어 네 구절이 있다.
  첫째는 하나 속의 하나요, 둘째는 온갖 것 속의 하나요, 셋째는 하나 속의 온갖 것이요, 넷째는 온갖 것 속의 온갖 것이니, 저마다 까닭이 있으므로 생각해 볼 것이다.
  해석하여 보면, 하나 속의 하나[一中一]라 함은 위의 하나는 바로 능함(能含)이요, 아래의 하나는 바로 소함(所含)이며, 아래의 하나는 바로 능변(能遍)이요, 위의 하나는 바로 소변(所遍)이다. 나머지 세 구절도 낱낱이 이런 예로 알라.
  넷째는 통국무애문(通局無礙門)이다. 현상과 본체는 동일함이 아닌 것이 바로 다름이 아니기 때문에 이 현상의 법으로 하여금 한 처소도 여의지 않으면서 바로 시방의 온갖 티끌 안에 온전히 두루하게 하며, 다름이 아닌 것이 바로 동일함이 아니기 때문에 시방에 온전히 두루하면서도 한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먼 데가 곧 가까운 데며 두루한 것이어서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다.
  다섯째는 광협무애문(廣狹無礙門)이다. 현상과 본체는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다름이 아니기 때문에 한 티끌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시방세계의 바다를 널리 포용할 수 있고, 다름이 아닌 것이 곧 동일함이 아니기 때문에 시방 법계를 널리 포용하면서도 작은 티끌만큼도 크지 아니하다. 이것은 곧 한 티끌의 현상으로서 넓은 것이 곧 좁은 것이요 큰 것이 곧 작은 것이어서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다.
  여섯째는 변용무애문(遍容無礙門)이다. 이 하나의 티끌을 온갖 것에서 보면, 두루함이 바로 너른 포용이기 때문에 온갖 것 안에 두루 있게 되고, 언제나 다시 도로 온갖 법을 거두어 온전히 제 안에 머무른다.
  또 너른 포용이 바로 두루함이기 때문에 이 한 티끌로 하여금 도리어 제 안의 온갖 차별된 법 안에 두루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티끌은 스스로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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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른 것에 두루하는 때에 이내 다른 것도 자신을 두루하게 하나니, 능히 포용하고 능히 들어오게 하여 동시에 두루하고 거둠이 걸림 없는 줄 생각할 것이다.
  일곱째는 섭입무애문(攝入無礙門)이다. 저 온갖 것을 하나의 법에서 보면, 다른 것을 들임이 바로 다른 것을 거두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것이 온전히 하나 안에 들어온 때에는 곧 저 온전한 하나가 도리어 스스로 온갖 것 안에 있는 것이요, 동시에 걸림이 없는 줄 생각할 것이다.
  또 다른 것을 거둠이 바로 다른 것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법이 온전히 온갖 것 안에 있을 적에는 도리어 온갖 것으로 하여금 항상 하나의 안에 있게 하는 것이요 동시에 걸림이 없는 줄 생각할 것이다.
  해석하여 보면, 이 위의 걸림 없음[無礙]은 마치 거울과 등불 같아서 열 개의 거울이 서로 받아들인다면, 마치 아홉 개의 거울을 저 한 거울 속에서 받아들일 때에 저 한 거울을 거두면 아홉 거울 속에 도리어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동시에 서로가 교차하기 때문에 ‘걸림 없다’고 한다.
  여덟째는 교섭무애문(交涉無礙門)이다. 하나를 온갖 것에서 보면, 거둠[攝]이 있고 들임[入]이 있어서 통틀어 네 구절이 있다. 하나가 온갖 것을 거두고 하나가 온갖 것을 들이며 온갖 것이 하나를 거두고 온갖 것이 하나를 들이며, 하나가 하나를 거두고 하나가 하나를 들이며 온갖 것이 온갖 것을 거두고 온갖 것이 온갖 것을 들이어서 동시에 서로 엇갈리며 걸림이 없다.
  해석하여 보면 하나가 하나를 거두고 하나가 하나를 들인다 하면, 마치 동쪽 거울이 저 서쪽 거울을 거두어 나의 동쪽 거울 속으로 들어온다 할 적에 곧 나의 동쪽 거울은 저 서쪽 거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
  온갖 것이 온갖 것을 껴잡고 온갖 것이 온갖 것을 들인다 함은, 원만하여 언제나 여(如)한 것이다. 이 구절은 말로써만은 단박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앞의 세 구절을 빌려야 구절마다 원만해진다.
  아홉째는 상재무애문(相在無礙門)이다. 온갖 것을 하나에서 보면, 역시 거둠이 있고 들임이 있어서 역시 네 구절이 있다. 하나를 거두어 하나에 들어가며, 온갖 것을 거두어 하나에 들어가며, 하나를 거두어 온갖 것에 들어가며, 온갖 것을 껴잡아 온갖 것에 들어가서, 동시에 서로 교차하며 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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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
  해석하여 보면, 이것은 앞의 네 구절과는 같지 아니하다. 앞의 것은 피차가 동시에 거두고 들일 뿐이었으나, 지금의 것은 저것에 들어가려 할 적에 반드시 딴 것을 따로 거두어 저것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겹겹의 끝없는 세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를 거두어 하나에 들어간다 함은, 마치 동쪽 거울이 남쪽 거울을 거두어 서쪽 거울 속으로 거두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니, 곧 동쪽 거울은 능히 거둠[能攝]과 능히 들어감[能入]이 되고 남쪽 거울은 거두어지는 대상[所攝]이 되며 서쪽 거울은 들어가는 대상[所入]이 된다. 이것은 곧 석가 세존께서 문수보살을 거두어 보현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온갖 것을 껴잡아 하나에 들어간다 함은, 마치 동쪽 거울이 나머지 여덟 거울을 거두어 남쪽 거울 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에 동쪽 거울은 능히 거둠과 능히 들어감이 되고, 여덟 거울은 거두어지는 대상이 되며, 남쪽 거울은 들어가는 대상이 됨과 같다. 곧 한 부처님께서 온갖 중생들을 거두어 한 중생의 속으로 데리고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를 거두어 온갖 것에 들어간다 함은 마치 동쪽 거울이 남쪽 거울을 거두어 그 밖의 여덟 거울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온갖 것을 거두어 온갖 것에 들어간다 함은 마치 동쪽 거울이 아홉의 거울을 거두어 아홉 거울 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적에 동쪽의 한 거울은 능히 거둠과 능히 들어감이 되고 아홉 거울은 거두어지는 대상이 되면서 역시 들어가는 대상도 된다.
  이 구절은 모든 법이 서로 서로가 관계하여 들면서 일시에 원만해지고 겹겹으로 그지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제 실제로 거울과 등불에서 본다 하면, 하나의 등불만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할 적에 거울과 거울 속에는 저마다 여럿의 등불이 있게 되고 앞과 뒤도 없다. 그렇다면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며 여섯 갈래의 중생들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벌써 존재하였음을 알리라. 바로 한 찰나 동안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방의 온갖 범부와 성인의 속을 꿰뚫은 것이다.
  열째는 보융무애문(普融無礙門)이다. 온갖 것과 하나가 널리 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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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서로 바라보면서 하나하나마다 앞의 두 가지 겹으로 된 네 구절이 갖추어져 널리 융화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것에 준하여 생각하면 적합한 행(行)과 경계가 막힘없고 걸림 없음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고, 깊이 생각하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앞의 아홉 개의 문은 글이 단박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나, 여기에서 거둔 것은 동일한 찰나에 벌써 총별(總別)이 동시요 겹겹이며 그지없게 한다.
  또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기를 “능소(能所)가 서로 걸림이 없이 들어가고[相入] 마음과 경계가 포함되는 것에 통틀어 네 가지 이치가 갖추어져 있어서 걸림을 능히 이루나니, 첫째는 성품에 일치됨의 이치[稱性義]요, 둘째는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음의 이치[不壞相義]요, 셋째는 즉하지 않음의 이치[不卽義]요, 넷째는 떠나지 않음의 이치[不離義]이다”라고 했다.
  성품에 일치되기 때문에 떠나지 아니하고,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즉하지 아니한다. 또 모든 세계가 털구멍에 듦과 같은 것은, 모두가 성품에 일치되는 것과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음의 이치가 있다.
  이제 털[毛] 위에서는 성품에 일치됨의 이치를 취하기 때문에 법 성품의 바깥이 없음을 알고, 세계 위에서는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음의 이치를 취하기 때문에 성품에 일치됨의 털에 두루하지 아니한다. 하나의 털은 성품에 일치되기 때문에 넓은 세계를 능히 포함하고, 넓은 세계는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털을 능히 들인다.
  또 안팎의 연기(緣起)가 즉한 것도 아니고 떠난 것도 아닌 것에 역시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안팎이 다 같이 연기가 됨에서 보면, 즉하지 않기 때문에 능입(能入)ㆍ소입(所入)이 있고 떠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걸림 없이 융합하게 된다. 둘째는 안팎의 연기와 참 법성품에서 보면 즉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데, 여기에는 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안팎과 즉하지 않은 법성품으로 말미암아 능입ㆍ소입이 있고, 법성품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털은 널리 포함할 수 있고 세계는 두루 들어갈 수 있다. 둘째 털을 떠나지 않은 법성품에서 보면 그대로의 본체로서 포함되고, 세계를 즉하지 않은 법성품에서 보면 털구멍에조차 두루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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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건대 이 사사무애관(事事無礙觀)은 마치 여러 신하들이 왕에 대하여는 저마다 전부가 왕의 힘이 되는 것과 같고, 여러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하여는 하나하나 전부가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다.
  또 백 명의 스님들이 한 절에 같이 있으면서 저마다 전부가 수용할 수 있되 절은 나누지 못하는 것과 같고, 공중의 작고 큰 꽃이 끝없는 허공에 두루 들어가되 꽃은 파괴되지 않은 것과 같다.
  곧 시방의 일체 중생들이 전부가 부처의 몸이어서 분한이 없는데도 모르기 때문에 못난이라고 쉽게 말하고, 여래의 지혜와 덕을 받았으면서도 도리어 어리석음에 떨어지며, 광대한 위신을 갖추었으면서도 작은 그릇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지공(志公)이 이르기를 “법 성품의 분량은 큰 허공과 같거늘/중생들의 내는 마음 스스로 작구나”라고 했다.
  위에서와 같은 걸림 없음은 바로 한 마음 뿐이어서 마치 바다가 천만의 파랑을 용솟음치게 하고, 거울이 만 가지 형상을 머금는 것과 같다.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어서 두루하고 원융하며, 서로 빼앗고 서로 이루며 존재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마침내는 티끌이 법계를 함용하되 이지러짐이 없고 크고 작은 생각이 아홉 세상을 포함하되 길고 짧음이 동시요 평등한 현상이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야말로 화엄(華嚴) 일부인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자재한 법문이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아서 환히 볼 수 있다.
  또 화엄의 법전에서만이 아니요 일대시교(一代時敎)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기 어려운 묘한 뜻으로서 시방의 부처님의 지음 없는 신통이요 관음의 비밀한 자비의 문이며 문수의 법계의 지혜바다이다. 일시에 드러나서 환히 비춰 봄이 의심 없으리라. 만약 지혜로이 비추어 깊이 제 마음을 통달하지 않으면, 어찌 이 희귀한 일을 깨칠 수가 있겠는가.
  마치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부처 자리를 증득한다 함은 진공(眞空)이요 무아(無我)요 무성(無性)이다”라고 함과 같다.
  내지 본체[理]와 일치되는 말이어서 지혜로 알 바가 아니니, 마치 공중에 나는 새의 날 때의 자취와 같아서 의지했던 자취를 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중의 자취는 벌써 모양으로는 얻을 수 없되 그렇다 하여 자취조차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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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아니다. 이 자취는 찾을수록 더욱 넓어만 지며 반드시 새가 날던 방소에 의하여 자취의 깊고 넓음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 자리는 반드시 마음으로 인하여 부처 자리의 깊고 넓음이 증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 증득하여 들더라도 적멸(寂滅)에서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리니, 온갖 부처의 법이 그렇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면서 부처의 방편을 배우고 부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부처의 지혜라 함은 바로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그러므로 『반야경(般若經)』 안에서 “종지(種智)로써 부처를 삼으면 종류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종류마다 보지 못함이 없다”고 했다.
  이야말로 앎[知]이 없음으로써 온갖 앎을 알고, 봄[見]이 없음으로써 온갖 봄을 보는 것이니, 마치 화엄의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열 가지 하열함이 없는 마음[無下劣心] 가운데서 “보살마하살이 또 생각하기를 ‘3세에 있는 온갖 부처님과 온갖 부처의 법과 온갖 중생들ㆍ온갖 국토ㆍ온갖 세간ㆍ온갖 3세ㆍ온갖 허공의 경계ㆍ온갖 법계ㆍ온갖 말로 시설된 경계며 온갖 고요히 사라진 열반 경계 등, 이와 같은 온갖 갖가지의 모든 법을 나는 한 생각과 상응한 지혜로써 모두 알고 모두 깨닫고 모두 보고 모두 증득하고 모두 닦고 모두 끊어야겠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분별도 없고 분별도 여의고 여러 가지도 없고 차별도 없고 공덕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둘이 없는 지혜[智]로 온갖 둘을 알고 모양 없는 지혜로 온갖 모양을 알며, 분별없는 지혜로 온갖 분별을 알고 다름 없는 지혜로 온갖 다름을 알며, 차별 없는 지혜로 온갖 차별을 알고 세간 없는 지혜로 온갖 세간을 알며, 세상없는 지혜로 온갖 세상을 알고 중생 없는 지혜로 온갖 중생을 알며, 집착 없는 지혜로 온갖 집착을 알고 머무를 데 없는 지혜로 머무르는 데를 알며, 섞여 물들음이 없는 지혜로 온갖 섞여 물들음을 알고 다함없는 지혜로 온갖 다함을 알며, 마지막 법계의 지혜로 온갖 세계에서 몸을 나투어 보이고 말과 소리를 여읜 지혜로 말로는 할 수 없는 말과 소리를 보이며, 한 제 성품의 지혜로 제 성품 없음에 들고 한 경계의 지혜로 갖가지 경계를 알며, 온갖 법의 말로는 할 수 없음을 알아서 크게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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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언설을 나타내고 일체지(一切智)의 자리를 증득하며 온갖 중생들을 조복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온갖 세간에서 큰 신통 변화를 나타내리라’고 하나니, 이것이 제10의 하열함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위에서 자세하게 본체와 현상[理事]의 근원을 분석하였으므로, 비로소 부처이면서 중생이라 함이 맑고도 분명함을 보았고, 완전히 중생이면서 부처라 함이 똑똑하고도 의심 없음을 보았다.
  근본을 깨치면 고향의 집에 도달한 것과 같고 작용을 얻으면 친 손발과 같거늘, 어찌하여 진실을 미혹하여 허깨비를 안으며 실제를 버리고 허망을 의지하며 자기의 신령을 저버리고 집안의 보배를 파묻으며 위의 성인을 높이 추앙하면서 자신을 낮은 범부라고 천히 여기는가.
  도무지 쓸데없는 글줄만을 외우면서 진실한 이치는 궁구하지 못하였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만을 기억할 뿐 몇 년을 몸소 살폈으며, 만 가지 법이 유식(唯識)이라는 말만을 배웠을 뿐 누가 실제로 증득해야 되는가. 이미 교관(敎觀)에 어긋났을 뿐더러 밝은 스승까지 잃었으니 비록 계승하여 흥하게 한다 하나 자기가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종경(宗鏡)에서 자세히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하여, 그 이치를 깨달아서 그의 마음을 알고 그 글을 헤쳐서 그의 법을 보며 모든 성인의 간절한 말씀을 느끼고 선현들의 마음 씀에 부끄러이 여기며 이 책을 보면서 비로소 속이거나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구름과 안개를 높이 털어서 푸른 하늘을 훤히 보는 것 같고, 용궁에 깊이 들어가서 친히 지중한 보배를 만난 것 같으리라. 비로소 본래부터 아직 진실로 배우지 못했고 거칠고 부황한 데 처함을 깨치고서 언제나 전혀 역량이 없음을 체험하여 아직 진실한 자리에 이르지 못했거든 그의 깊이를 말하지 말고, 아직 힘을 들여 피로하지 않았거든 그의 고통을 말하지 말라. 오직 견성을 해야만이 말이 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성인이 말씀하고 가르치신 까닭은, 널리 소경인 범부들에게는 생사에 집착되지 않게 하고 애꾸눈인 2승들에게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게 하며, 밤에 보는 작은 보살에게는 권승(權乘)을 버리게 하고 비단으로 가리운 특별한 보살에게는 교도(敎道)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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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은 광대하고 신령한 덕과 끝없는 미묘한 작용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이들을 위한 것이므로 분명하게 열어 보이어 저마다 스스로가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나의 거룩한 빛을 이어받지 않음이 없고 온갖 범부들이 나의 은혜를 힘입지 않음이 없나니, 기꺼이 흠모하여 도에 나아가 널리 닦아서 하나의 작은 티끌을 부수어 대천(大千)의 경책이 나오도록 권하라. 그런 뒤에는 정혜(定慧)의 힘으로 안팎이 장엄되고 본래 미묘하고 깨달음의 마음인 진여의 작용이 일어나서 마치 닦아서 윤이 난 옛 거울과 같고 광채를 발한 신주(神珠)와 같으리니, 빛이 시방에 사무치고 그림자는 법계에 투명하여 하나의 조그마한 함식(含識)조차도 이 빛을 받지 않음이 없게 되리라.
  마치 선재(善財)가 일생에 이룩될 수 있었음과 같고, 또 용녀(龍女)가 영산(靈山)에서 구슬을 바치자 여래께서 인가(印可)하셨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내가 바친 보주(寶珠)를 세존께서 받아들이셨으니, 이 일이야말로 빠릅니까, 빠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심히 빠릅니다”라고 했다. 용녀가 말하기를 “그대의 신력으로써 내가 성불함을 보게 됨이 다시 그것보다 빠릅니다”라고 했다.
  이것으로도 이 법을 깨치자마자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도를 이루어서 중생을 제도함은 한 찰나의 끝에서 벗어나지 아니함을 알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의 「신해품(信解品)」에서 이르기를 “빨리 달려가서 붙잡으라”고 했고, 또 「비유품(譬喩品)」에서 이르기를 “그의 빠름이 바람과 같거늘, 어찌 여러 생[多生]을 머무르며 억울하게 공행(功行)을 닦는가”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빠른 생각생각마다 상응하는 힘이 있는데도 수긍하려 하지 않으므로, 모든 성인들은 놀라고 슬퍼하면서 널리 그들을 위하여 연설하시되 8교(敎)의 그물을 펴서 삼승(三乘)의 수레에 대비하며 크고 작은 것을 다 함께 거두고 권(權)과 실(實)을 나란히 실으며 손을 끌어 유인하여 은밀히 기의(機宜)에 나아가고 혹은 보고 혹은 듣되 앞에 하기도 하고 뒤에 하기도 하면서 모두가 이 일승(一乘)의 금강 보배 광[金剛寶藏]에 들어가 마지막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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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하신다.
  「방편품(方便品)」 중에서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며 언사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을 연설하심은 이 법이 모두 일불승(一佛乘)을 위해서이니 이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들으면 마지막에는 모두가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의 방편문에 미혹하고 그 알음알이[知解]에 집착하여 이미 만들어진 말을 알아차리거나 법아(法我)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반야경(般若經)』 중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온갖 법에서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항상 비치는 광명[常光]이 한 길을 얻어서 몸이 진금의 색이니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인(人)ㆍ법(法)의 두 가지 집착이 다 함께 없어지기만 하면 한 줄기 항상하는 광명이 저절로 나타나서 도리어 석가가 친히 증득한 금색의 몸과 같아지리라.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교문(敎門)은 모두가 종(宗)을 드러내고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요, 앞의 것에 의하여 주착하면 도리어 마음만 더욱 더 미혹하는 것이니, 마치 이글거리는 쇠구슬을 집으면 손이 타는 것과 같다. 감로(甘露)의 거룩한 가르침을 고통에서 벗어나는 좋은 인연이 되게 하는, 만약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손해가 있을지언정 이익은 없으리라.
  「방편품(方便品)」의 게송에서 “사리불이여, 마땅히 알라./모든 부처의 법 이러하나니/만억 가지의 방편으로써/마땅함을 따라서 설법하느니라./그것을 익히거나 배우지 않는 이면/이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없거니와/세간의 스승이신 모든 부처님의/여러 가지의 방편을 알아/다시는 갖가지의 의혹이 없어/마음에 큰 기쁨 내게 된다면/저절로 장차 부처될 줄 알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선정을 익히거나 지혜를 배우지 않는다면 이는 또한 적당한 설법인 줄 모르므로 망령되이 진실이라 오인하리니, 글을 따르면서 도를 깨쳤다고 여기지 말고 곧장 선재가 누각에 오르듯 용녀가 구슬을 바치듯 하라. 이런 때를 당하면 자연히 몸소 보게 되리니, 모름지기 제 자신을 극복하여 이룩할 일에 밤낮 고달픔을 이겨야 한다. 길을 묻고서도 가지 않으면 고향집은 더욱더 멀어지는 것과 같고, 보물을 보고서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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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가난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고덕(古德)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도를 배움에는 먼저 마음을 자세히 알아야 하리니/미세한 속의 미세함은 미세하여 찾기 어렵다/그 속에서 찾되 찾을 곳 없는 데에 이를 수 있어야/범부 마음이 바로 부처 마음인 줄 믿게 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한 생각이 나고 죽는 마음속에서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일이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심히 얻기 어려운 일이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연뿌리의 실오라기로 수미산을 매달을 수 있다면, 생각으로나 말로 할 수 있느냐?’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한 생각 동안에 온갖 생사를 모두 헤아릴 수 있나니, 그러므로 불가사의라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본체[理]는 한 가닥일 뿐이나 현상[事]은 만 가지로 다르거늘 어떻게 한 마음만을 깨달으면 끝없는 부처의 일이 모두 다 원만해진다 하는가.
  [답] 세간을 벗어난 길인 본체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세간에서 사는 문인 현상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어진다.
  만약 유심(唯心)의 현상으로써 하면 하나의 법이 곧 온갖 법이라 그를 펴면 끝없거니와 마음만의 본체로써 하면 온갖 법이 곧 하나의 법이라 그를 말아 들이면 자취가 없다.
  마름으로 인하여 하나라고 말하나 이 법에는 일찍이 하나라는 것이 없고, 폄으로 인하여 여럿이라 말하나 이 법에는 일찍이 여럿이란 것이 없다. 하나도 아니요 여럿도 아니며,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아니하고, 여럿이면서도 하나이며, 없으면서도 없지 아니하고, 하나와 여럿이 서로 의지하면서 서로서로 밑둥과 끝이 된다.
  통틀어 네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서로 이룸의 이치[相成義]이니, 하나와 여럿이 다 함께 성립되어 서로 서로 유지되면서 힘이 있고 함께 존립한다. 둘째는 서로 해침의 이치[相害義]이니, 형상을 빼앗아 둘 다 없어지며 서로가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성품이 없다. 셋째는 서로 존속하는 이치[互存義]이니, 이것으로 저것을 유지하고 저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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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에 존재하며 저것이 이것을 유지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 안에서 한량없음을 알고/한량없음 안에서 하나를 안다”라고 했다. 넷째는 서로 없어짐의 이치[互泯義]이니, 이것으로 저것을 유지하다가 저것의 모양이 다되면서 이것만이 남고 저것으로 이것을 유지하다가 이것의 모양이 다되면서 저것만이 남는다. 경에서 이르기를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임을 안다”고 했다.
  또 저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서로 이루어지고 돕고 거두는 것이 걸림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크고 작은 것이 즉하여 들고 하나와 여럿이 서로 포용하며 멀고 가까움이 서로 지탱하고 주인과 손이 어울려 거두는 것이 있게 된다. 비록 티끌과 티끌에서마다 나타나게 한다 하더라도 그지없음이 제망(帝網)과 같아서 들쑥날쑥하며, 그 때문에 현상과 현상에서마다 드러나게 되면서도 끝이 없음이 마치 일정하게 빛나면서도 겉으로는 환히 드러나지 않게 비치는 것과 같다.
  또 하나와 여럿이 걸림 없다는 이치에는, 고덕(古德)이 비유로 드러내 보인 것으로 마치 10전(錢)의 돈을 세는 법과 같다. 여기에는 두 체성이 있다. 첫째는 체성이 다른 것[異體]이요 둘째는 체성이 같은 것[同體]이다.
  체성이 다른 것 가운데서 둘이 있는데, 첫째는 상즉(相卽)이요, 둘째는 상입(相入)이다.
  또 모든 연기(緣起)의 법에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공과 존재[空有]의 이치이니, 이것은 바로 그 제 체성[自體]이다. 둘째는 힘이 있고 힘이 없음[有力無力]의 이치이니, 이것은 힘에서 바라본 작용이다.
  처음의 이치로 말미암아 상즉에 결합되고, 나중의 이치로 말미암아 상입을 얻는다. 처음의 공과 존재의 이치 중에서, 자신[自]으로 말미암아 존재할 때에는 다른 것[他]은 반드시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은 자신에 즉한다. 왜냐 하면 다른 것은 성품에 없고 자신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으로 말미암아 공이 되는 때에는 다른 것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은 다른 것에 즉한다. 왜냐 하면 자신은 성품이 없고 다른 것으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공과 존재는 두 체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상즉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기는 이루어지지 않고 제 성품[自性]이 있는 따위의 허물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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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의 힘의 작용 중에서 자신은 온전한 힘이 있는 까닭에 다른 것은 능히 거두고, 다른 것은 전혀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능히 들이는 것이니, 제 체성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상즉이 아니요 힘의 작용을 서로 통하기 때문에 상입을 이룬다.
  10전으로 세며 비유를 삼는다 함은, 다시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체성이 다른 문[異體門]이요, 둘째는 체성이 같은 문[同體門]이다.
  체성이 다른 [문]안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 안의 여럿이요 여럿 안의 하나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 안에서 한량없음을 알고/한량없음 안에서 하나를 아나니/그것이 서로 나고 일어남을 깨달아/두려울 바 없음[無所畏]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함과 같다. 이것은 모양[相]에서의 설명이다.
  둘째는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이니/의미가 적멸하여 모두가 평등하다/같음과 다름의 뒤바뀐 모양 여의면/이것을 보살의 불퇴주(不退住)라 한다네”라고 했다. 이것은 본체[理]에서의 설명이다.
  [문] 벌써 그것이 저마다 성품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하나와 여럿이 다를 수 있는가.
  [답] 이것은 법계의 진실한 덕과 연기의 힘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보현(普賢)의 경계와 상응하나니, 그런 까닭에 하나와 여럿이 언제나 이루어져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아니한다.
  다음에서 밝힌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 함은, 하나가 곧 열과 같은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열이 하나가 아니라면,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하나만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열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기둥이 없으면 집이 아닌 것과 같아서 그 때에는 집이 없는 것이며, 만약 집이 있다면 역시 기둥이 있어서 곧 기둥이 바로 집이 되기 때문에 집이 있으면 기둥도 있다.
  하나가 곧 열이요 열이 곧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가 이루어지면 열도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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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만약 하나가 곧 열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하나가 없는 것이며, 만약 열이 곧 하나라면 이것이야말로 열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와 열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또 곧[卽]이라는 말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가.
  [답] 하나가 곧 하나가 아니라 함은, 이것은 정(情)으로 생각하는 하나요 지금 말하는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라 함은, 이것은 정으로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 또한 하나가 되지 않나니/모든 수(數)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얕은 지혜 지닌 이는 모든 법에 집착하여/하나를 보면 하나라 여기느니라”고 했다.
  [문] 앞에서 밝힌 하나 안의 여럿이요 여럿 안의 하나라 함에서, 곧 하나 안에 열이 있고 열 안에 하나가 있는 것과 여기서 밝힌 하나가 곧 열이라는 것과는 어떠한 구별이 있는가.
  [답] 앞에서 밝힌 하나 안의 열이라 함은 하나를 여의면 열이 없되 열은 하나가 아닌 것이요, 여기서 밝힌 하나가 곧 열이라 함은 하나를 여의면 열이 없되 열은 곧 하나이니,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의 체성이 같은 문이라 함은, 도리어 앞의 문과 같다. 비슷하므로 도리어 하나 안의 여럿이요 여럿 안의 하나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 함을 밝혔다.
  지금 이 [문]안에서 말한다면, 앞의 체성이 다른 문에서 말한 하나 안의 열이란 뒤의 아홉을 바라보면서 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 안의 열이라 이름하고, 이 문에서 말한 하나 안의 열이란 곧 하나 안에 아홉이 있기 때문에 하나 안의 열이라 말한다.
  [문] 만약 하나 안에 곧 아홉이 있다면, 이것과 앞의 체성이 다른 [문]안의 하나가 곧 열이라는 것과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여기 안에서 말한 아홉이 있다 함은 제 체성에 아홉이 있으면서 하나는 아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앞의 체성이 다른 데서 말하면 하나가 곧 저 체성이 다른 데의 열이로되 열은 하나를 여의지 않은 것이다.
  [문] 하나 안에 스스로 아홉이 있다면, 인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치가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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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만약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찌 아홉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 한 체성이거늘, 어떻게 아홉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답] 만약 아홉이 없다면, 곧 하나도 없다. 다음에서 밝힌 체성이 같은 [문] 안의 하나가 곧 열이라 함에서 도리어 하나라 말하면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가 곧 열이다. 왜냐 하면 만약 열이 하나가 아니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가 곧 열이라는 것이 이미 그렇다면, 하나가 곧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그러하다.
  [문] 이 안에서 말한 제 체성의 하나가 곧 열이라 함과 앞의 체성이 같은 하나 안의 열이라 하는 것과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앞에서 밝힌 제 체성 안에 열이 있다. 그 하나는 이 열이 아니요, 여기서 밝힌 하나가 곧 열이며, 그 하나가 곧 이 열이다. 이것이 다르다.
  [문] 여기서 밝힌 하나의 체성이 곧 열은 법을 모두 거두게 되는가.
  [답] 지혜의 차별을 따르기 때문에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 하면 하나 같은 것이 만약 열에 거두어지면 곧 다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곧 다함이 없다.
  [문] 제 문에 거두어지면 다함이 없게 되거니와 다른 문에 거두어지게 되어도 역시 다함이 없는가.
  [답] 하나가 다함이 없으면 그 밖의 것도 다함이 없다. 만약 그 밖의 것이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 또한 다하지 아니한다. 만약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내 이루어지고, 만약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갖 것이 이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 거둠의 법은 곧 다함이 없고 다시 다함이 없다는 하나의 이치를 이룬다. 셋과 넷의 이치에서 마치 허공과 같다면 바로 이것은 다하거니와, 다시는 그 밖의 것을 거두지 않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역시 거둠에는 다하거나 다하지 아니하는 줄 알 것이다.
  [문] 이미 하나는 곧 능히 거둠[能攝]의 것이라 말한다면 하나 안의 열을 거둘 뿐인데, 역시 다른 곳의 열도 거둘 수 있으리라.
  [답] 다른 곳의 열을 거둠에도 역시 다하거나 다하지 아니함의 이치가 있다. 왜냐 하면 다른 것을 여의면 자신도 없기 때문이니, 하나가 다른 곳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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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어도 곧 다함이 없으면서 하나의 이치를 이룬다. 다른 곳의 열이라는 이치는 허공과 같기 때문에 다함이 있다. 경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한 자리에 있으면서 널리 온갖 자리의 공덕을 거둔다”고 했다.
  이 『종경록(宗鏡錄)』은 바로 일승의 별교(別敎)요 부사의한 문이며 원융한 끝없는 종(宗)이니, 삼승의 교 안에서 말한 바와는 같지 아니하며 위에서와 같이 하나와 여럿의 걸림 없는 이치라, 뜻으로 이해하고 정으로 생각하는 등의 한량 있는 소견을 지어서는 안 된다. 오직 깨끗한 지혜 눈에 6상(相)과 10현(玄)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그의 뜻을 다할 뿐이다. 곧 원융과 거둠이 그지없고 포함하여 말한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의 「신력품(神力品)」에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법륜을 굴리셨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반열반하셨다”고 했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자비는 부처의 눈이 되고, 바른 생각은 부처의 머리가 되며, 미묘한 음성은 부처의 귀가 되고, 향림(香林)은 부처의 코가 되며, 감로(甘露)는 부처의 입이 되고, 사변(四辯)은 부처의 혀가 되며, 6도(度)는 부처의 몸이 되고, 4섭(攝)은 부처의 손이 되며, 평등은 부처의 손가락이 되고, 계정(戒定)은 부처의 발이 되며, 종지(種智)는 부처의 마음이 된다”고 했다.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에서 이르기를 “법성신불(法性身佛)이라 함은 범부와 이승의 아래 자리에서 능히 볼 바가 아니요 제도되어야 할 이에게만 보여서 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바로 몸이 없는 몸이요 모양이 없는 모양이다. 온갖 지혜는 머리가 되고, 첫째가는 이치는 상투가 되며, 8만 4천의 법문은 머리카락이요, 대비는 눈이며, 중도는 백호(白毫)요, 무루는 코며, 18공(空)은 허요, 40불공법(不共法)은 이며, 큰 서원은 어깨요, 삼삼매는 허리며, 여래장은 배요, 권실의 지혜[權實智]는 손이며, 정혜(定慧)는 발이니, 이와 같은 등의 몸매로 법성신불을 장엄한 것이다”라고 했다.
  우두 초조(牛頭初祖)가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께서 여기서 보리를 얻는다 함은, 이 마음의 처소에서 보리를 얻고 빛깔의 처소에서 법륜을 굴리며 눈의 처소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몸 안에 마지막 해탈한 법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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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깨끗한 국토에 두루 갖추어 있는 것이거늘, 다시 조그마한 어떤 물건으로 또 무엇을 구한다는 것이냐. 처음 마음 내는 때에 문득 정각을 이뤘도다”라고 했다.
  이 종경(宗鏡) 안에 있는 지혜와 행과 주인과 손은 모두가 동일한 실마리이다. 믿음이 있기만 한 이면 모두가 같은 법의 무리이며, 마치 하나의 뚜렷한 거울 속의 것은 따로따로 나누어 가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이 경의 법문은 온통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같이 행하고 함께 행하셨고 다시는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대왕이 가는 길과 같아서 발자국을 떼어 오르는 이가 바로 그 분이거늘, 가지 않는다면야 어떻게 할 수 없다. 한 생각이나마 선근(善根)을 따라 조금만이라도 견성(見性)하여 지혜가 앞에 나타난다면, 모두가 부처의 바른 깨달음인 근본의 지혜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요, 보현의 행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치 보현이 한 생각 동안에 지닌 조그마한 착한 마음과 같아서 온통 이것은 법을 향한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명호와 말씀한 바 법문을 들으면 듣고서 믿지 않아도 오히려 마지막에는 금강지(金剛智)의 자리에 이를 수 있거늘, 하물며 믿고 닦는 이이겠는가’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이 『화엄경』 안의 해행법문(解行法門)을 닦고 배우고 깨쳐서 들면 반드시 10주(住) 법문을 성취할 수 있고 부처의 종성(種性)에 머물러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리니, 권교(權敎)의 초지(初地)보살로서 서원으로 성불한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이 『화엄경』은 실제 증득할 지위를 바른 대로 말했고 서원을 논하지는 않았다. 이 가르침이 되는 문은 온통 한때요, 한 끝이요, 한 법계요, 다른 생각이 없고, 앞뒤의 정(情)이 끊어졌다. 범부와 성인이 하나의 성품이므로 정에 매인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생각이 없고 지음이 없는 법계로 그를 비추어야 볼 수 있다.
  만약 정을 세워 본다 하면 믿을 수가 없다. 설령 믿음을 낸 이라 하여도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제가 본 것이 아니다. 만약 자신이 본다 하면 정이 끊어지고 생각이 없어져서 마음과 진리가 계합되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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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와 경계가 명합되어야 비로소 만 가지 경계가 성품과 모양으로 온통 거두어지는 줄 알 것이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마음은 언제나 저것이다, 이것이다, 옳다, 그르다 하며 앞을 다투어 지어질 터인데 더러움과 깨끗함이 언제 쉬겠는가.
  만약 성품에 일치되어 정이 없어지면, 법계의 겹겹의 오묘한 문에 저절로 도달하고 하나와 여럿과 순수와 뒤섞임이 자재하게 함용하며 총별(總別)의 문이 원융하여 자재하고 중생 이롭게 하는 법에 모든 근(根)을 잘 통달하며 감당할 수 있음에 따라 모두 다 이익을 이루고 공경히 받들며 친근한 이면 모두를 구제할 수 있으리니, 그러므로 성품에 일치되기 때문에 행하는 하나의 일까지도 모두가 법계에 두루하리라.
  만약 일을 따라 짓는다면 분한이 있으리니,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한 끼니 밥을 시방의 각각 항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한 벌의 옷과 꽃과 향ㆍ영락ㆍ가루 향ㆍ바르는 향ㆍ사르는 향ㆍ등촉ㆍ당기ㆍ번기와 꽃ㆍ일산 등을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논(論)에서 물었다.
  “보살이 한 끼니 밥을 한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는 것도 오히려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시방의 항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함이겠습니까?”
  대답하였다.
  “공양의 공덕은 마음에 있고 일에는 있지 아니하다. 만약 보살이 한 끼니의 밥을 큰마음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스님들께 모두 공양한다면, 역시 멀고 가까움에는 장애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보시고 모두 받으신다.”
  이것으로도 광대하고 끝이 없는 하나의 마음이 운반되는 것인 줄 알겠다. 공덕과 지혜의 두 가지로 장엄하고 6도(度) 만행(萬行)이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한 터럭만큼의 공(空)한 성품의 법계도 틀림이 없고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의 몫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 회상(法華會上)에서 시방의 부처님 국토가 통하여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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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이 되어 분신(分身)이 함께 앉아 같이 일승을 증득하였고, 또한 화엄의 교를 밝히는 데서도 이 땅에서 설법하자 시방이 모두 다 그러했음과 같다.
  선성(先聖)이 한 가지로 돌아간 데를 우러르고, 후학(後學)이 믿음을 굳게 하게 하라. 이 교를 만난 이는 이보다 큰 좋은 인연이 없으리니, 마치 큰 횃불을 잡고 캄캄한 문을 비추는 것과 같다. 환히 성품을 보면 빠른 배를 타고 깊은 나루를 건너는 것 같으리니, 깜짝할 사이에 진리에 오르리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한 글귀가 정신에 물들면 반드시 장차 부처가 될 것이요, 두 글자가 귀를 스치면 일곱 세상 동안 잠기지 않으리라”고 했다.
  이로울 바는 사람들뿐이요 검소할 곳은 자신뿐이다. 백 가지 복이 모양은 다르나 똑같이 무생(無生)에 들어가고, 만 가지 선행이 무리는 다르나 다 함께 평등으로 모이리라.
  제 종경(宗鏡) 안에서도 역시 그렇다. 똑바로 방편을 버리고 위없는 도만을 말하며 온갖 법 가운데서 등관(等觀)에 들 뿐이다. 만약 방편에 집착하여 모든 법[乘]을 널리 말한다면, 부처의 본 생각을 잊어버리고 큰 뜻에 어긋나리라.
  『법왕경(法王經)』에서는 “만약 근기를 결정시켜 소승의 사람을 위하여 소승의 법을 말하거나 천제(闡提)의 사람을 위하여 천제의 법을 말한다면, 이는 부처의 성품을 끊고 이는 부처의 몸을 소멸시킴이라 이런 설법을 하는 사람은 백천만 겁 동안 모든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 왜냐 하면 중생의 성품은 바로 법성품이어서 본래부터 더하거나 덜함이 없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그 가운데서 약이니 병이니 하고 분별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렇게 알면, 곧 온갖 법이 불법 아님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온갖 법이 모두 불법인가.
  [답] 온갖 법은 마음일 뿐이니,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다.
  마치 학인이 충국사(忠國師)에게 물은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이 모두 불법이다’ 했는데, 살해하는 것도 이는 불법입니까?”
  대답하였다.
  “온갖 하는 일이란 모두가 부처의 지혜 작용이다. 마치 사람이 불을 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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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불이 향기와 악취를 싫어하지 않는 것과 같고, 또한 그 물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부처의 지혜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불은 분별이 없이 난초와 쑥을 다 같이 태우고, 물은 훌륭한 덕과 같아서 모나거나 둥근 그릇에 다 맡기는 줄 알겠다.
  그런 까닭에 문수는 구담(瞿曇)에게 칼을 들이댔고, 앙굴마(鴦掘摩)는 석씨(釋氏)에게 칼을 꽂았으니, 어찌 부처의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마음 밖에서 법을 보며 분별을 내어 곧장 훌륭한 일을 널리 짓는다면, 역시 마지막이 아니다.
  [문] 심성(心性)은 본래 깨끗하고 고요히 비추어서 유실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지혜 광명을 빌려야 총명하게 되는가.
  [답] 마음이 바로 정인(正因)이다. 비록 환히 비추고 있다 하더라도 객진번뇌(客塵煩惱)에게 막혀 있으므로, 만약 지혜라는 요인(了因)이 없으면 나타내지 못한다.
  고덕이 이르기를 “지혜는 마음의 근원을 비추나니, 바로 이것이 요인이다. 마치 허공과 해와 같나니, 간략하게 열 가지 이치가 있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을 말해준다. 첫째 해와 허공은 즉(卽)한 것도 아니고 여읜[離] 것도 아니다. 둘째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셋째 마치 해는 어둠을 깨뜨리는 좋은 인연이 되어 주어 허공을 나타내는 목[要]과 같다. 넷째 비록 또 어둠을 없애고 허공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 허공에는 손해거나 이익이 없다. 다섯째 본체[理]는 실로 손상됨이 없지만 현상[事]은 그것을 밀어 뜨려 가려진 어둠을 영영 제지시키듯, 성품은 더함이 없지만 허공계에 포함된 만 가지 형상을 모두 나타낸다. 여섯째 이 허공의 성품은 비록 청정하기는 하나 만약 햇빛이 없으면 어둠이 인다. 일곱째 허공으로써의 허공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어둠을 제거할 수 있고 어둠이 제거되면 반드시 햇빛을 빌린다. 여덟째 해는 만약 허공이 없으면 빛도 없고 비춤도 없으며, 허공은 만약 해가 없으면 어둠이 저절로 제거되지 아니한다. 아홉째 그러나 이 어둠의 성품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해의 체상(體相) 역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열째 해가 있어서 공중을 비추면 천지가 환히 밝을 뿐이니, 지혜의 해가 심성의 허공을 비추는 것 또한 그와 같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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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하여 보자. 첫째 지혜와 마음은 즉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다. 어떻게 즉한 것도 아니냐 하면 지혜는 능히 비춤[能照]이요 마음은 비추어지는 대상[所照]이니, 능소(能所)가 다르기 때문이며, 어떻게 여읜 것도 아니냐 하면 지혜는 이 마음의 작용이니 작용은 체성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머무른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떻게 머무른 것도 아니냐 하면 지혜의 성품은 여의기[離] 때문이며, 어떻게 머무르지 않은 것도 아니냐 하면 마음과는 상응하기 때문이다.
  셋째 지혜는 능히 객진을 깨뜨리고 심성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넷째 지혜가 비록 객진을 보내고 성품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마음은 본래 숨거나 나타남이 없다. 다섯째 마음이 비록 본래는 공(空)하나 반드시 객진을 다해야 비로소 법계를 널리 나타낼 수 있다. 여섯째 마음은 비록 청정하나 만약 지혜의 광명이 없으면 객진에게 가려진다.
  일곱째 마음이 스스로 공하여 객진에게 물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객진을 제거함에는 반드시 지혜의 광명을 인유해야 한다. 여덟째 지혜는 마음이 아니면 비추지 아니하고 마음은 지혜가 없으면 밝지 아니하다. 아홉째 객진이 비록 다한다 해도 본래부터 오고 감이 없고 지혜가 비록 비춤을 일으키나 역시 생멸이 없다. 열째 지혜 광명을 얻기만 하면 심성은 맑디맑고 고요히 비추어져서 법계가 환히 밝아지고 마지막에는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알라. 만 가지 법은 닦음이 없되 다잡아 닦으면서 닦음 없음에 이르고, 근본 성품은 비록 공하나 역시 공을 닦음으로 인하여 공이 나타난다.
  이제 종경(宗鏡)에서 기록한 바는 깊은 까닭이 있다. 다만 중생들에게 지혜가 없으면 닦지 않다가 컴컴한 데에 떨어져서 심성을 비추지 아니하여 억울하게도 윤회에 빠지게 될 뿐이다. 만약 종경의 지혜 광명을 얻지 못한다 하면, 무엇으로 연유하여 마음의 보배를 나타내겠는가.
  또한 중생의 샘이 없는 지혜 성품은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지만 객진에게 가려졌음은, 마치 거울이 먼지 때문에 흐려진 것과 같다. 거울은 본래 밝은 것이라 알기만 하면 먼지는 차츰차츰 다하게 되리니, 객진이 다하는 곳에 참 성품은 환히 밝으리라.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는 “큰마음 밖에는 사라숲[娑羅林]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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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속에는 숲보다 먼저 난 1백 년이 넘은 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때 숲의 주인은 물을 대며 때때로 보살펴 길렀는데, 그 나무가 오래되자 썩어서 껍질이며 가지와 잎이 모두 다 벗겨지고 떨어져서 알맹이만이 남게 되었다. 그와 같아서 여래도 그러하여 묶였던 것이 모두 다 없어지자 온갖 진실한 법만이 남는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일발(一鉢) 화상이 노래하기를 “천세 만대의 금륜 성왕(金輪聖王) 아들이여/진여(眞如) 영각(靈覺)이 바로 그 분일세/보리수 아래서 중생을 제도하고/중생들 다 제도하자 생사를 벗어났네./나고 죽지 않은 참 장부시여/용모 없고 형체 없는 대비로자나(大毘盧遮那)일세/진로(塵勞)가 다 없어지자 진여만이 남아/뚜렷이 밝은 한 알 값칠 수 없는 보주로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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