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4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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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석가문불은 중생의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지견(知見)을 열어주셨고, 달마 초조(達磨初祖)는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했다. 이 한 마음을 체달하는 것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 도리라고 하는가.
  [답] 한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은 성품[性]이 없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다 부처가 된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불자여,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그 몸 안에서 온갖 중생들이 정각 이룬 것을 널리 보셨고, 내지 일체 중생들이 열반에 드는 것을 널리 보셨나니,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었습니다. 이른바 성품이 없음이니 어떠한 성품이 없다는 것이냐 하면 이른바 모양 없는 성품이요, 다함없는 성품이요, 남이 없는 성품이요, 사라짐 없는 성품이요, 나[我] 없는 성품이요, 나가 아님이 없는 성품이요, 중생 없는 성품이요, 중생 아님이 없는 성품이요, 보리 없는 성품이요, 법계 없는 성품이요, 허공 없는 성품이며, 또한 정각을 이룸이 없는 성품입니다. 온갖 법이 모두 성품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얻고 대비가 계속되어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불자여, 마치 허공의 온갖 세계가 이루어지거나 무너지거나 간에 언제나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허공은 남[生]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의 보리도 그와 같아서 정각을 이루거나 정각을 이루지 않거나 간에 역시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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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다. 왜냐 하면 보리는 모양이 없고 모양 아님도 없고 하나도 없고 갖가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항하 모래만큼의 많은 마음을 만들고 그 낱낱의 마음으로 다시 항하 모래만큼 많은 부처님을 모두 빛깔도 없고 형용도 없고 모양도 없이 변화로 만들되 이렇게 하기를 항하 모래만큼 많은 겁이 다하도록 쉬는 일이 없다 합시다. 불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의 변화로 된 마음과 변화로 만든 여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래성기묘덕(如來性起妙德)보살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가 말씀한 이치로 해석하건대, 변화와 변화하지 않은 것은 똑같아서 구별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습니까.’
  보현(普賢)보살이 말하였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불자여, 그대가 말씀한 바와 같아서 설령 일체 중생이 한 생각 동안에 모두 정각을 이루거나 정각을 이루지 않거나 간에 똑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보리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모양이 없다면 더하거나 덜함이 없습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보리에서와 같고 한 모양도 모양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그런 까닭에 부처의 지혜가 두루함을 안다 함은 한 중생도 본각(本覺)이 있지 아니함이 없나니 부처의 체성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지혜가 은밀히 흐르는지라, 곧 부처의 지혜는 다른 중생에 두루한 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에는 중생에게 스스로 부처의 지혜가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루하다’고 말할 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 한 중생도 있지 아니함이 없으면 성품 없음을 아는 것을 밝힘이니, 중생의 수가 아닌 초목 등을 말한다. 이는 이미 5성(性)의 소견을 벗어났다.
  둘째 중생이 얽매임의 원인이 있으면 벌써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결과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여래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성품이 있은 뒤에야 장차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요, 역시 이치가 먼저고 지혜가 뒤도 아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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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도 열반을 옛날에는 방편으로 또한 성품이 있는 것이라 말했음을 알겠다. 후학들조차도 오히려 있음을 말하고 없음은 숨겼다 하거늘, 하물며 똑같이 결과[果] 지혜[智]가 있음을 듣고서야 누가 당연히 믿어야 할 이가 있겠는가.
  셋째 저 원인 중의 결과 지혜는 곧 다른 부처의 결과 지혜이니, 원교종(圓敎宗)에서 자기와 남의 인과에는 두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여기서 중생에게 결과가 있다고 설명하면, 무엇을 이름하여 부처의 지혜라 말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오묘하고도 오묘하다.
  화엄종(華嚴宗)에 이런 이치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의심하며 말하기를 ‘열반(涅槃)에서 이르되, 처의 성품이란 지혜를 이름한다. 지혜가 있을 적에는 번뇌가 없다고 했다. 이제 부처의 지혜가 있거늘, 어떻게 중생이 되었는가>’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뒤바뀜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 것이요, 어찌 없다고야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치 장사(壯士)가 이마의 구슬을 미혹한 것 같아서 어찌 살갗 속에 보배야 없겠는가. 만약 먼저 뒤바뀜을 여읨이 없으면 어찌 있겠으며, 이미 여의었다면 본래 없지 않음이 분명하게 나타나리니, 마치 가난하다가 구슬을 얻었으나 지금에야 준 것이 아님과 같다.
  그러므로 열반을 수행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결정코 있다’고 말하면 이내 집착할 것이요, 있음을 믿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결정코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잠깐이나마 집착을 할지언정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래장 등을 경에서는 설명하되, 아홉 가지의 비유가 있다. 여래장의 비유에는 마치 푸른 연꽃이 진흙탕 속에 있으면서 아직 진흙에서 나오지 못했을 때는 귀히 여기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하고, 또 가난한 여인이면서 성인을 뱃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하고, 큰 값어치의 보배가 때가 낀 옷에 싸여진 것과 같다 하고, 또 순금으로 만든 상(像)이 해진 옷으로 가려진 것과 같다 하고, 암라나무의 꽃과 열매가 아직 벌어지지 못한 것과 같다 하고, 또한 멥쌀이 겨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하고, 금이 광물 속에서 있는 것과 같다 하고, 동상이 거푸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하기도 한다. 모두가 이는 티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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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부처가 있다는 이치이니, 이것과 대체로 같다.
  또 이 성품 없는 도리는 온갖 것을 이룰 수도 있고 온갖 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 곧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면 온갖 것이 무너진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진다고 함은, 곧 인과가 서로 통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함을 밝힌다.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여래가 정각을 이루실 적에 그 몸 안에서 일체 중생들이 정각 이루는 것을 널리 보셨다”고 했고,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중생이 곧 보리의 모양이다. 보리의 모양이거니 어떻게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둘째는 능(能)과 소(所)가 둘이 아니라 함을 밝힌다. 곧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니 이른바 성품 없음이다”라고 했고, 『정명경』에서 이르기를 “이 보리를 행하지 아니함은 뜻[意]과 법[法]을 여의기 때문이니, 법은 바로 소(所)요, 뜻은 바로 능(能)이다”라고 했다.
  진실로 마음과 경계는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심이 제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온 체성이 인연을 따라 모든 만법을 이루는데, 성품이란 곧 체성이다.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어서 저마다 제 체성이 없고 거짓이 서로 의지하여 결정된 성품이 없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인연을 따르면서 온갖 것을 성립시킨다. 만약 결정된 성품이 있다면 마치 금과 돌이 저마다 견고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이것에는 성품이 없으므로 마치 물이 찬 것을 만나면 얼음이 되고 불을 만나면 따뜻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쌓임[集]에 결정된 성품이 있다면/원래부터 끊어지지 않을 바거늘/이제에 어떻게 끊는다는 것인가/도(道)에 만약 결정된 성품이 있다면/원래부터 닦아지지 않을 바거늘/이제에 어떻게 닦는다는 것인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결정된 성품이 있다면 온갖 법이 모두가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만약 결정된 성품이 없다면 온갖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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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만약 중생으로서 저마다 성품이 있어서 제 체성이 옮아가지 않는다면 영원한 중생이요 부처가 될 연유가 없다. 그런 까닭에 성품이 없다는 도리는 한가지다.
  존재와 공(空)의 이치 때문에 온갖 법이 이루어지게 되고, 필경공(畢竟空) 가운데서 왕성하게 온갖 법을 이룩한다. 만약 이 한 작은 티끌에서 법이 이루어진다면 시방의 허공계가 다하도록 온갖 다른 법이 일시에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한 작은 티끌의 다른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세간에서 하나의 작은 터럭만큼의 법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니, 원돈(圓頓)의 이치를 잃는다.
  하나의 마음이 온갖 마음이기 때문에 만약 종경(宗鏡)을 깨쳐서 부처가 되면 곧 온갖 곳이 부처를 이루리라. 그러므로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기를 “이 경전이 있는 처소면 부처님께서 계시게 되리라”고 하셨다.
  만약 한 작은 티끌의 곳에서도 부처를 이루지 않으면 종경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나 한 사람뿐이라 함은 3계와 6도(道)의 범부와 성인이 나 아님이 없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요 사람이기 때문에 나 한 사람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이것을 여의고서 닦으면 모두가 권점(權漸)을 이루리니, 마치 공중의 꽃에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아지랑이 물기에서 얼음 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서 3기(祇) 동안을 채운다 하더라도 진실에 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스스로가 마음을 관하여 부처를 보고 모든 법이 공(空)인 줄 깨닫기만 하면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친히 백호광(白毫光)을 보게 되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 법계에 두루 참예하리라.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계시며 여름 한 철 안거를 하시면서 신력으로 모든 인간과 천상을 제압하셨으므로 계신 곳을 몰랐었다.
  여름을 다 지내시고 부처님께서 신족을 거두시면서 염부제로 돌아오려 하셨다. 그 때 수보리(須菩提)가 석실 안에서 머무르다가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시는데 부처님에게로 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해야 하겠는가, 가지 않아도 되겠는가’라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설법하신다. 사람이 지혜의 힘으로써 부처님의 법신을 뵙는 것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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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부처님을 뵙는 것 중에서 가장 으뜸이다’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이 때에 벌써 도리천에서 염부제로 내려오시자 4부 대중들이 다 모였고 사람과 하늘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며, 좌중에는 부처님과 전륜성왕이 계시고 여러 하늘들이 크게 모여 와서 대중모임이 엄숙하게 장식되었으므로 전에 없던 일이었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이제 이 대중들이 자못 특이하기는 하나 그 기세는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닳아 없어지는 법이기에 모두가 무상으로 돌아가리라’고 했다. 이 무상관(無常觀)의 첫 문으로 인하여 모든 법은 공(空)하여 진실이 없음을 모두 알았다. 이 관을 할 적에 이내 도를 증득하였다.
  이 때에 온 대중들은 먼저 여래를 뵙고 예비 공양하려 하는데, 연화색(蓮華色) 비구니가 있다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음녀(婬女)라고 불리던 터라 그 나쁜 이름을 없애려고 이내 전륜성왕과 7보며 천의 아들로 변화하자, 뭇 사람들이 그를 보고 모두가 자리를 비키는지라 변화로 된 왕은 부처님을 뵙고 도로 본래의 몸으로 회복하였으므로 비구니가 맨 먼저 부처님께 예배한 것이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니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 나에게 예배한 것이 아니다. 수보리가 맨 처음 나에게 예배했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보리는 모든 법의 공함을 관하여 법신을 뵙게 되었으므로 참된 공양을 할 수 있었고 공양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니, 산몸으로 공양함이 아닌 것을 공양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이것으로도 만약 스스로가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고 다른 데서의 훌륭한 인연을 구한다 하면, 공업이 비록 부지런하다 하더라도 끝내 마지막이 아님을 알겠다.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말하기를 “불자여, 설령 보살이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겁 동안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면서 갖가지 보리 갈래법[菩提分法]을 닦아 익힌다 하여도, 만약 이 여래의 부사의한 큰 위덕의 법문을 아직 듣지 못했거나 혹은 때로 듣고 나서 믿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따르지 않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진실한 보살이라 할 수 없나니, 여래의 집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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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인연 역시 제 성품이 없다면 온갖 것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생각생각에 흩어져 무너지리니, 마치 차별된 섞여 물든 인연을 따르는 것과 같다.
  명언(名言)으로 인하여 이룩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데, 모든 인연 중에서 중생의 성품을 구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다. 곧 중생의 체성은 공(空)하므로 바로 이것이 무너짐의 이치이다. 모든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의 이치가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이 하나의 중생이라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시방의 법계가 다하도록 온갖 중생들은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때문에 하나가 무너지면 온갖 것이 무너진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이 모두 성품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를 성취하게 되고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켜 계속 끊이지 않으면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유정들을 널리 제도하신다.
  한 마음의 성품 없음이 부처가 되는 도리이므로 일체 중생과 나는 다름이 없음을 원하며 중생은 본래 한 마음도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천진(天眞)에 계합함을 안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불각(不覺)은 인연을 따르면서 여섯 갈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억울하게 허망한 고통을 받으면서 부질없이 윤회에 떨어진다.
  그런 까닭에 대비를 능히 일으켜 계속 제도하는 것이요, 만약 이 성품 없는 도리가 없다면 큰 교화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선과 악과 범부와 성인이 바꾸어질 수 없다. 만약 이렇게 깨달아 알면, 바로 부사의한 방편의 법문에 들리라.
  『불장경(佛藏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에 만약 결정된 체성이 있다면, 마치 머리칼을 백분의 일로 쪼갠 것과 같으리니, 이는 곧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는 것이요, 또한 끝내 모든 법의 공을 말하지 않는 것도 된다”고 했다. 이는 다 같이 돈을 증득하는[證頓] 이치이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한 생각에 온갖 중생이 남음이 없이/저 중생 마음의 제 성품을 알되/성품 없이 통달함이 행할 바의 도임을/모두가 분명히 깨달아 알라”고 했다.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에서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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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세 보살이 세존의 앞에 서서 만다(曼陀) 연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 나서 말하였다.
  ‘저희는 이 법에 신해(信解)를 깊이 내어 의혹이 없습니다.’
  그 첫째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 가 곧 여래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법 안에서 도무지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둘째 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세존께 는 곧 세존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역시 이 법에서 모두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아라하삼먁삼불타께 가 곧 아라하삼먁삼불타입니다>라고 한다면 역시 이 법에서 모두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내지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로서 이렇게 말을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 보살은 거짓 이름[假名]을 잘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이 범부와 성인의 모든 법이 모두 거짓 이름일 뿐인데, 마음으로부터 이룩되는 것이다. 만약 온갖 것이 평등한 줄 분명히 통달하면, 곧 범부와 성인의 모든 법이 거짓 이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거짓 이름은 진여의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렀다.
  “그 때 선현(善現)은 욕계와 색계의 여러 하늘들에게 말하였다.
  ‘그대 여러 하늘들이여, 나 선현은 부처님의 참 제자로서 여래를 따라 태어났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선현이 여래를 따라 태어났느냐 하면, 여래의 진여를 따라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여래의 진여는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선현의 진여도 옴도 감도 없기 때문에 선현은 여래를 따라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여래의 진여는 곧 온갖 법의 진여며, 온갖 법의 진여는 곧 여래의 진여입니다. 이와 같은 진여는 진여의 성품이 없고 진여가 아닌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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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없나니, 선현의 진여도 역시 그와 같기 때문에 선현은 여래를 따라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해석하여 보자. 여래의 진여가 곧 온갖 법의 진여라 함은, 선현 혼자만이 여래를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온갖 법계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래를 따라 태어났다. 왜냐 하면 여래의 진여는 곧 자신들의 진여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여는 진여의 성품이 없다 함은, 이 진여라는 말은 설명 중의 극치(極致)라 역시 설정할 수도 없으므로 말한 것이니, 여여(如如)라고 부르면 일찍이 변해진 것이다. 이미 진여의 성품이 없으므로 진여 아니라는 성품도 없다. 이렇게 분명히 깨달아야 비로소 마지막의 진여가 된다.
  『안액경(雁腋經)』에서 이르렀다.
  “그 때 사리불(舍利弗)이 여러 비구들에게 물었다.
  ‘대덕들은 무슨 일로 리는 이제 처음에 6사(師)에게서 출가했다>는 그런 말을 합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지금으로부터는 6사가 모든 부처님과 평등하고 동일한 모양이어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습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저희들은 이제 여러 6사와 출가하는 가운데서는 다르지 않고 분별할 바가 없는 줄 알았기 때문에 출가라고 말을 합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대덕들은 무슨 일로 금으로부터는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높은 이가 아닙니다>라고 말을 합니까?’
  여러 비구들은 말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저절로 명료하여 남의 설명을 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귀의한 것이요 딴 데에 귀의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귀의하고 스스로가 높은 이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처님께서는 우리의 높은 이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부처를 여의지 않았고 부처는 우리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대덕들은 무엇 때문에 금으로부터 업(業)이 없다>고 말을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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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비구들은 말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온갖 것으로 마지막의 열반을 말하되 이 안에는 조복(調伏)이 없고 조복 아님이 없는 줄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리는 업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래장경(如來藏經)』에서 이르렀다.
  “세존께서는 금강혜(金剛慧)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나는 부처 눈으로 온갖 중생들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모든 번뇌 가운데에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으며 가부좌하고 앉아 점잖게 꼼짝도 않고 있음을 보느니라. 선남자야, 온갖 중생들이 비록 여러 갈래에 있으면서 번뇌의 몸속이라 하더라도 여래장이 있어서 언제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며 덕 몸매가 두루 갖추어져서 나와 다름이 없느니라.’”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은 제 성품이 청정하여 서른두 가지 몸매를 바꾸고서 온갖 중생의 몸 안으로 들어가 있다”고 했다.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말하였다.
  “비슬지라(鞞瑟胝羅) 거사가 보살로서 해탈하여 반열반에 닿지 아니한 법문[不般若際法門]을 얻고는 항상 전단좌(栴檀座)의 부처님 탑에 공양하면서 선재(善財)에게 말하였다.
  ‘나는 전단좌의 여래의 탑 문을 여는 때에 삼매(三昧)를 얻었으니, 이름은 불종무진(佛種無盡)이다. 선남자야, 나는 생각생각 동안에 이 삼매에 들어가고 생각생각마다 온갖 한량없는 수승한 일들을 알게 된다. 선남자야, 나는 이 보살만의 얻을 바 반열반에 닿지 아니한 해탈을 얻었는지라, 모든 보살마하살이 한 생각의 지혜로 3세를 널리 알고 한 생각으로 온갖 삼매에 두루 들어가듯 여래의 지혜 해가 항상 그 마음을 비추어 온갖 법에서 분별함이 없으며, 온갖 부처가 모두 다 평등하여 여래와 나와 온갖 중생들이 똑같아서 둘이 없음을 깨달았으며, 온갖 법의 제 성품은 청정하여 생각함이 없고 움직임이 없으면서 일체 세간에 널리 들어가 모든 분별을 여의었고 부처의 법인(法印)에 머무르면서 법계 중생들을 모두 잘 깨우쳐 열어줌을 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음과 경계가 한량없는 것처럼/모든 부처의 경계 또한 그러하며/마음과 경계가 뜻[意]으로부터 생기듯/부처 경계도 그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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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내가 성불한 지 매우 오래되어 수명은 한량없고 아승기겁 동안이로되 항상 머물러서 입멸(入滅)하지 않느니라’고 하시자, 여러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성도하신 지 오래되어 항상 교화하셨다 하나 중간에 계셨던 연등불(燃燈佛)과 비바사불(毘婆沙佛)과 시기불(尸棄佛) 등이 성도하여 입멸하시고 설법도 하며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그렇다면 그 분들은 누구란 말인가’”라고 했다.
  고석(古釋)에서 이르기를 “그 중간에 연등불 등이 성불도 하고 입멸도 하였다고 설명한 이와 같은 것의 모두는 지혜 방편의 교묘한 분별로써 다른 부처님을 설명한 것이니, 내 몸을 여의고 따로 저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금강경론(金剛經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 부처가 있고 은밀한 것도 아니다. 몸 밖에도 있으나 역시 은밀한 것이 아니다. 내지 몸 안이 아닌 데와 몸 밖이 아닌 데도 있고, 몸 아님이 아닌 데와 바같이 아님이 아닌 데도 있되 다 같이 은밀한 것이 아니다. 중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은밀함이라 한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한 법도 보내지 아니하고 한 법도 얻지 아니하며 한 법도 닦지 아니하고 한 법도 증득하지 아니하여 성품이 깨끗한 천진(天眞)이라 가위 큰 도[大道]이면서 참된 하나[眞一]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천하를 두루 관찰하면 진인(眞人) 아님이 없는데, 누가 이 도리를 얻어서 그 한 무리와 같아지겠는가.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10법계 중생이 곧 부처요, 10법계 중생의 음(陰)과 부처님의 음이 터럭 또는 개자만큼이라도 다름이 없고 3세의 부처의 일과 중생의 네 가지 거동이 다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관찰할 뿐이다”라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적게라도 성품을 본 이면 역시 불승(佛乘)을 얻는 것이니, 마치 큰 바다 안의 한 터럭만큼의 물방울에서 많은 물방울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의 물방울 안은 모두가 큰 바다의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의 5위(位) 안과 10신(信)에서 10지(地)까지의 낱낱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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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도 모두 부처 과위가 있는 것이 마치 저 바닷물의 한 터럭만큼의 방울과 같다”고 했다. 부처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행을 얻기 때문이다.
  저 부처의 성품으로 나아가고 닦음이 있음은 마치 『화엄경』에서 “바로 온전한 부처의 과위와 부동지(不動智) 등의 10지(智)의 여래로 믿음과 닦음을 보인 것은, 마치 어떤 평범한 사람이 단 번에 보위(寶位)로 올라가 몸이 왕위에 있으면 신하를 두루 알게 되고 온갖 품류는 다 그에게 속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함과 같다.
  『화엄경』 안의 법문인 보살의 행상(行相) 또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으로부터 10주(住)의 처음까지 단박에 이러한 여래의 법신과 부처 성품과 지혜 결과를 보며 보현의 온갖 만행을 두루 행하되 인연 따라 걸리지 않으면서 모두가 다 지음이 없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성품은 짓는 것이 아니요, 다만 객진번뇌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제 10주의 첫 지위로부터 지음이 없는 삼매 때문에 제 체성이 아라한[應眞]이요 객진번뇌는 전혀 체성이 없다. 참된 체성과 작용뿐이라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고 저절로 그대로가 부처이다. 때문에 한 생각과 상응하면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고, 하루와 상응하면 하루 동안에 부처를 이루거늘, 어떻게 수겁 동안 점차로 닦고 여러 겁에 닦음을 쌓아서 3지(祗)에야 과위에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마음이 겁의 수량과 소견의 장애에 반연한다면 어떻게 쉬겠는가. 모든 불법의 문은 본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헤아리고 겁(劫)을 설정하는 것은 바로 불승이 아니다.
  또 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세계와 바다의 작은 티끌만큼 많은 수의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고 친근하며 공양한다 함은, 공(功)이 없음의 지혜가 두루하여 법마다 부처가 아님이 없고 부처가 곧 법이라 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했다.
  시방 허공에 틈 사이도 없고, 바늘 끝 또는 터럭의 끄트머리만큼까지도 이는 온갖 법이요 온갖 부처가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작은 티끌만큼의 시비나 물들고 깨끗하다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가 부처는 보지 못할 뿐이다. 지혜 눈으로만이 그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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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르기를 “도무지 부처 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많은 부처님을 드는 것은 지혜가 만족하고 행이 두루하여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받들어 섬긴다 함은, 곧 성인 범부의 체성이 같아서 하나도 불법 아님이 없고 공(空)하여 사이조차 없으며, 넓은 눈으로 그를 관찰하여 그 마음과 경계를 통하면 부처 아님이 없으며 지혜는 모든 행을 따르고 모두가 다 부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보며 일로써 논하여도 실제로 그와 같고 표시되는 법으로 논하여도 온갖 것이 모두 진실인 것이니,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법이거나 한 물건이라도 이것을 부처라고 보지 않으면, 이 사람은 바로 삿된 소견이요, 바른 소견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곧 능소(能態)와 시비의 모든 소견이 다투어 생기게 되어 이 보현과 문수의 지혜 눈의 경계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다른 생각이거나 잡념이 계속 일어나게 되면, 그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 곧 능소가 서로 일어나고 시비가 서로 관계하는지라, 바로 이것이 삿된 소견이다. 만약 망령된 생각은 모양이 없음을 깨달아 바깥 경계가 저절로 공허해지면, 모든 세계의 티끌이 정각 아님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되 처음의 모양[初相]이 없다 함은 마음의 일어남[心起]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의 모양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말함은 곧 생각 없음[無念]을 말한다”고 했으니, 곧 이것은 의심을 제거하고 훌륭한 알음[解]을 내게 한다.
  이를테면 어떤 중생이 ‘지극한 해탈의 도[極解脫道]가 본각(本覺)과 만날 때 미세하게나마 처음으로 생긴 앎[知]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의심한다.
  만약 앎이 있다면 지극한 해탈의 도는 당연히 생각 없음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 하면 있다는 처음의 생각을 아는지라 처음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앎이 없다면 지극한 해탈의 도는 당연히 있을 수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이미 처음의 생각이 없는데 무슨 생각이 없다는 것을 기다려서 해탈이 있다는 것을 성립시키겠는가.
  이러한 의심 때문에 이제 널리 해석하되 알아야 할 대상[所知]의 모양은 본래부터 제 성품이 공(空)하여 없으며, 능히 앎[能知]의 지혜는 본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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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는 때가 없다. 이미 깨달을 바[所覺]의 모양이 없고 능히 깨달음[能覺]의 지혜도 없거늘, 어찌 미세하게 처음의 모양이 있고 지혜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처음의 모양을 안다 함은 바로 생각 없음의 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 성품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대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이 없고 능히 앎의 처음 깨닫는 지혜가 없다손 치더라도 알아야 할 대상의 모양이 없고 능히 앎의 지혜가 없음을 통달하면 모든 깨달음도 없고 도무지 공하고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도리에 의하여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온갖 중생은 각(覺)이라 하지 아니하며 본래부터 생각생각이 계속되면서 일찍이 생각을 여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비롯함이 없는[無始]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은 위의 생각 없음의 뜻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강(金剛) 이하의 일체 중생은 혼자 힘의 업상(業相)인 큰 무명의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은 온갖 중생들의 모두는 생각이 있는지라 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생각 없음을 얻은지라 부처라 하는 까닭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하에서는 시각(始覺)의 경계가 두루하고 원만함을 나타내 보인다.
  크게 깨달음[大覺]이라 함은, 이미 저 언덕에 이르러서 온갖 한량없는 중생들이 한 마음의 미혹[流轉]으로 나고 머무르고 달리하고 사라지는[生住異滅] 네 가지 모양을 짓는 줄을 두루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만약 생각 없음을 얻으면, 마음의 모양이 나고 머무르고 달리하고 사라짐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렇게 아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 없음을 얻은 때에 온갖 중생도 평등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에서 “생각 없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떠한 이치 때문에 오직 한 수행자가 생각 없음을 얻었을 적에 온갖 중생들도 모두 생각 없음을 얻느냐 하면, 낱낱 중생들에게는 모두 다 저마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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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한 수행자의 시각이 원만하여져서 본각과 같아질 적에는 온갖 한량없는 중생들의 본각의 마음속에 두루 같아져서 자신만의 본각이 아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제 성품의 본각은 중생계에 두루하여서 이르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청정하게 깨달은 이가 생각 없음을 얻을 적에 온갖 중생들도 모두가 생각 없음의 것을 얻거니와, 청정하게 깨달은 이가 무명을 끊을 적에 온갖 중생들 역시 끊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시각(始覺)한 이가 무명을 끊을 적에 일체 중생도 모두 끊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위에서 ‘금강 이하의 일체 중생은 혼자 힘의 업상인 큰 무명의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이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만약 모든 중생들이 비롯함이 없는 무명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모든 부처와 똑같이 생각 없음을 얻었다 하면 생각 없음이라는 이치들은 말로만이 있을 뿐 진실한 이치가 없다. 어찌 일체 중생들의 모두가 본각이 있고 시각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난을 결단(決斷)함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 제 종(宗)에서 결단하고, 둘째는 다른 것에 견주어 결단하는 것이다.
  제 종에서 결단한다 함은 이 논(論)의 바른 종[正宗]에서 일체 중생은 동일하게 계속하여 차별이 없는 까닭을 나타내 보이려 함에서다. 한 수행자가 비롯함이 없는 무명이 마지막 끊어질 적에 일체 중생들도 똑같이 다 끊어지며, 한 수행자가 시각이 원만해질 적에 일체 중생들도 똑같이 원만해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3신(身)이 본래 존재하는지라 계경(契經) 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나는 두 가지의 같음[等]으로 말미암아 정각을 이루었느니라. 첫째는 끊어짐이 같음[斷等]이요, 둘째는 얻음이 같음[得等]이다. 끊어짐이 같음이란 나의 지극한 해탈의 도가 처음 일어났을 적에 온갖 중생들의 비롯함이 없는 무명이 한꺼번에 마지막으로 당장 결단되었기 때문이요, 얻음이 같음이란 내가 처음 도를 이루어서 시각이 원만해졌을 적에 일체 중생도 다 만족되었기 때문이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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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셨으니, 이것을 두 가지 같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견주며 결단한다 함은, 원만한 것을 중생계와 견주면 하나하나의 법마다 청정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모든 중생을 위없는 부처님과 견주면 무명의 광에 들어가 깨달아 아는 바가 없다. 모두가 다 청정하며 장애한 바가 없어야 생각 없음 등의 이치가 성립되고, 무명의 광에 들어가 깨달아 아는 바가 없어야 위와 위에서 말한 바의 글에 서로 어기는 허물이 없다. 이 한 모퉁이를 들어서 널리 관찰하여야 한다.
  이로부터 이하는 모든 시각에 융화하여 본각과 같게 한다. 쉰한 갈래[五十一分]로 시각이 원만해질 적에 실로 더욱 나아지는 점차의 결과가 없고 마지막의 원만한 극치도 없다. 왜냐 하면 온갖 시각은 네 가지 모양[四相]이 때를 함께 하면서 머무를 수 있고 모두가 자기 혼자 성립됨은 없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한 맛이요 평등하여 제 성품이 원만하여 꼭 들어맞아서 둘이 없고 한 모양의 각(覺)이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실로 시각의 다름이 없고 네 가지 모양이 때를 함께 하면서 존재하고 모두가 자기 혼자만으로 성립됨은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기신소(起信疏)』에서 이르기를 “환히 크게 깨쳐서 제 마음을 깨달아 알면, 본래 바꾼 바도 없고 이제야 고요하여진 바도 없어서 본래가 평등하나 갖가지 꿈 같은 생각이 그 마음의 근원을 움직였다.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 함은 바로 깨달을 바 모양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요, 처음 일어난다 함은 무명에 의하여 생상(生相)의 마음 체성이 있어서 생각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제야 본각을 여의면 불각(不覺)이 없어서 곧 움직이는 생각이 고요한 마음임을 증득하여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동쪽을 미혹하여 서쪽을 삼았으나 깨쳤을 적에 비로소 서쪽이 동쪽이었음을 안 것과 같다.
  마음에 처음의 모양이 없다 함은, 본래는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일어남이 있었거니와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일어나는 바가 없으므로 처음의 모양이 없다고 말하며, 지금은 마지막 지위라 움직임의 생각은 온통 다 되어 한 마음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처음 모양이 없다고 말한다.
  무명이 영원히 다하여 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다시는 일어나거나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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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 없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면 마음은 곧 항상 머무르며 다시는 나아갈 바가 없어서 마지막 깨달음[究竟覺]이라 한다’고 말한다.
  아직 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고 꿈같은 생각이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이 움직임을 없애려 하고 저 언덕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이제는 이미 심성을 보았고 꿈같은 모양이 다한지라 제 마음이 본래 미혹함이 없음을 깨달아 알았고, 이제는 무명이 고요히 쉬어서 언제나 저절로의 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부처 자리의 생각 없음을 증득하여 알았으니, 이것이 바로 원인을 들어서 결과를 증득한 것이다”라고 했다.
  마조(馬祖) 대사가 이르기를 “그대는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지금 말하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일 뿐이다. 이 마음에 이름 붙여 부처가 된다 하고, 또한 이것은 실상(實相)의 법신불이라 하고, 또한 도(道)라고도 한다”고 했다.
  경에서 이르기를 “3아승기의 백천 가지 이름은 세간을 따르고 처소에 알맞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마치 빛을 따르는 마니주가 푸른 것에 접촉하면 이내 푸르게 되고 누른 것에 접촉하면 이내 누르게 되는 것과 같지만 체성이 온갖 빛깔의 것이 아님은 손가락이 자신을 대지 못하는 것과 같고 칼이 자신을 자르지 못하는 것과 같고 거울이 자신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인연 따라 보게 되는 처소에서 저마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다”라고 했다.
  이 마음과 허공은 수명이 같고, 내지 여섯 갈래를 윤회하면서 갖가지 형상을 받되 곧 이 마음은 일찍이 생긴 일도 없고 일찍이 없어진 일도 없다. 중생이 제 마음을 모르고 미혹한 뜻으로 망령되이 모든 업을 일으켜 과보를 받으며, 허망하게 세간에서 숨을 쉬는 4대(大)의 몸에 집착하여 나고 없어짐이 있다고 보나 신령한 깨달음[靈覺]의 성품은 실로 나거나 없어짐이 없다.
  그대가 이제 이 성품을 깨치면, 오래 산다고 하고 여래의 수명 양이라고도 한다. 본래 공(空)한 것을 움직이지 않는 성품이라 했으니, 앞뒤의 모든 성인이 이 성품을 만나서 도를 삼았을 뿐이다.
  지금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원래 그대의 본 성품이요 본래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다시는 이 마음을 여의고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본래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지라 조작을 빌지 아니하며, 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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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하고 지금도 깨끗한지라 빛이 나게 닦기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제 성품이 열반이요 제 성품이 청정이며, 제 성품이 해탈이요 제 성품이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의 성품이요 본래 부처인지라 따로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대 스스로가 금강정(金剛定)이라 다시금 뜻을 짓고 마음을 모아 선정을 취할 필요도 없고 비록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거두어서 지어 얻는다 하여도 역시 마지막이 아니다.
  지공(志公)화상의 『생불불이과(生佛不二科)』에서 이르기를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도 않고 큰 지혜가 어리석음과도 다르지 않거늘, 어찌하여 바깥에서 값진 보배를 구할 필요 있는가. 몸 안에 저절로 명주(明珠)가 있다. 바른 도와 삿된 도가 둘이 아니니,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인 줄 분명히 알라. 미혹과 깨침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과 생사가 한결같으며 마지막의 반연도 비어 고요하고 추구하는 생각도 맑게 비었으며, 한 가지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고 조용히 곧장 남음 없음[無餘]에 둔다”라고 했다.
  부 대사(傳大士)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근원으로 돌아가라/어찌하여 차례를 구할 필요 있는가/법 성품은 앞뒤가 없는 것이니/한 생각으로 일시에 닦아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범부의 자리에선 성인의 길을 닦고/결과의 자리에선 범부의 원인을 익힌다/언제나 가면서는 밟는 바 없고/늘 제도하면서 제도한 사람 없네”라고 했다.
  진각(眞覺) 대사가 노래하기를 “설산(雪山)의 비니(肥膩)는 섞임이란 없어서/순수한 제호(醍醐)라 나는 늘 수장하며/한 성품은 뚜렷이 온갖 성품에 통하고/한 법은 두루하게 온갖 법을 함용한다.
  하나의 달은 널리 온갖 물에 나타나고/온갖 물속의 달은 하나의 달이 거두며/모든 부처의 법신은 나의 성품에 들고/나의 성품도 똑같이 여래와 합한다.
  한 자리[地]가 온갖 자리 빠짐없이 갖추며/빛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行業)도 아니로되/탄지(彈指)에 8만 문을 뚜렷이 이루고/찰나(刹那)에 아비 업(阿鼻業)을 소멸시킨다/온갖 수의 글귀가 수의 글귀 아니거늘/나의 영각(靈覺)과는 무슨 관계 있으랴”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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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문의해(百門義海)』에서 이르기를 “보리를 낸 이는 이제 온갖 중생과 티끌 및 털 등의 성품 없는 도리를 분명히 통달하였으니, 부처를 이루는 보리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보리 몸속에서 온갖 중생들이 등정각 이루는 것을 보셨다. 또 중생과 티끌 및 털 등이 온전히 부처의 보리의 도리로 중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중생의 보리 안에서 부처의 보리의 행 닦는 것을 본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는 바로 중생의 부처요 중생은 바로 부처의 중생이다. 비록 열고 합침이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차별이 없다. 이렇게 본 이라야 보리 마음이라 하며, 동체대비를 일으켜 중생들을 제도한다.
  또 『책림(策林)』에서 말하였다.
  [문] ‘중생은 미혹하였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깨치셨다. 체성은 비록 하나라 하나 그 작용에서 보면 차별이 있다. 만약 중생이 부처에 통한다면 부처 또한 미혹하였다 하겠고, 부처가 중생에 통한다면 중생도 깨쳤다고 하리라.’
  [답] ‘항상 중생이 아니로되 중생이 되었고 역시 부처가 아니로되 부처가 되었으니, 있으면서 언제나 빼앗음을 장애하지 아니하고 무너뜨리면서 늘 이루어짐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인연 따라 또한 중생이라는 이름을 지었거늘 어찌 중생이 따로 있어 체성에 결합할 수 있겠으며, 권도로 법신이라는 명호를 주었거늘 어찌 모든 부처가 있어 구할 수 있겠는가. 허망은 진실의 근원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하나의 모양에 있으면서 항상 존재하며, 진실은 허망의 끝을 갖추는지라 다섯 길에 들어서도 늘 공(空)하다. 망정으로 말한다면 두 지경이 통하기 어렵되, 지혜로 말한다면 한결 같아서 나아가기 쉽다. 그런 뒤에는 쌍비(雙非)와 쌍시(雙是)가 바로 서로가 무너뜨리고 서로가 이루는 것이니, 모든 부처를 중생의 몸에서 보고 중생을 부처의 체성에서 살펴라”고 했다.
  앙산(仰山) 화상이 위산(爲山) 화상에게 물었다.
  “참 부처가 어디에 머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함이 없는 미묘함을 생각함으로써 신령스런 불꽃[靈炎]의 끝없는 데로 돌아가라.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과 모양[性相]이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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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무르고 현상과 본체[事理]가 둘이 아니어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하리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여섯 갈래의 길은 선을 여읜 악이고 악을 여읜 선이며, 2승의 길은 샘[漏]을 여읜 샘 없음이며, 보살의 길은 치우침을 여읜 중도이며, 모든 부처의 길은 여읨도 없고 이르름도 없나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이 바로 부처의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큰 도는 오직 마음일 뿐이어서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니, 한 마음에 의하여 닦으면 바로 이것이 근본지(根本智)일 뿐이다. 또한 이는 분별없는 지혜로되 그대로 능히 분별하며 끝없이 스스로 온갖 지혜가 갖추어졌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켜서 두루 헤아리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이 있는 이는 모두 다 부처가 되리니, 지금처럼 행한 것이 바로 부처의 행이고, 앉은 것이 바로 부처의 앉음이며, 말한 것이 바로 부처의 말이요, 잠잠한 것이 바로 부처의 잠잠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아비지옥의 정보(正報)와 의보(依報)가 극히 성스러운 자기 마음에 있고, 모든 부처의 법신은 낮은 범부의 한 생각을 여의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것은 부분으로 얻는 것이 아니요, 말하자면 온통 얻는 것이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코 범부요,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었다. 그러나 성불한다는 이치는 성품에서 보면 비어 오묘하되 모양을 따르면 근기에 대응하는 것이라, 여러 종류가 있다.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기를 “문을 따르면 같지 아니하여 갖가지로 다름이 있다. 문(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약하면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성품에서 본 것이니, 곧 하나의 참 법계이다. 둘째는 모양에서 본 것이니, 곧 끝없는 현상의 법이다. 셋째는 성품과 모양이 서로 통한 것이니, 이 두 가지 문은 즉하지도 않고[不卽] 떨어지지도 않음[不離]을 나타낸다. 넷째는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여 덕의 작용[德用]이 겹겹이다”라고 했다.
  처음의 체성의 문에서 보자.
  [문] 체성[體]이 바로 부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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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네 개의 구절을 이루어야 한다. 첫째 이것은 부처이니, 법성신(法性身)은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성품이 공(空)한 바로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둘째 부처가 아니니,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이 끊어진 그 성품이기 때문이요, 평등한 참 법계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부처이기도 하고 부처 아니기도 하나니, 법성신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 쌍비(雙非)이니, 성품과 성품 없음이 두 가지 다 끊어져 없어지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없음 가운데에 두 가지 없고/두 가지 없는 데에 역시 없나니/3세의 온갖 것이 공이라/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소견이다”라고 했다.
  제2의 모양의 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정(情)이요, 둘째가 무정(無情)이다. 참 마음이 인연을 따라 능소(能所)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은 저마다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무명이 진여에 훈습되어 더러움의 연기를 이루고 진여가 무명에 훈습되어 깨끗함의 연기를 이루며, 더러움은 만 가지 종류를 이루고 깨끗함은 성불하기에 이른다. 깨끗한 인연을 닦아 저 더러운 인연을 끊어야 성불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치에 의하면 중생과 부처는 같지 아니하며, 깨끗한 인연 중에는 다시 인과가 있고 원인에는 순수함과 뒤섞임이 있으며 결과에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있다.
  순수한 문에서 보면 어느 한 보살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하나의 행만을 수행하되 낱낱의 모두가 그러하며 뒤섞인 문에서 보면 만 가지 행을 다 같이 닦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이며, 원인의 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언제나 그는 보살이며, 결과의 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언제나 그 분은 여래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들을 위하여 생각생각마다 새롭고 새로이 등정각을 이룬다”고 했다.
  쌍변문(雙辯門)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며, 쌍비문에서 보면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곧 참 성품이 같되 앞의 세 가지 문은 자비와 지혜를 둘 다 갖추고 마음과 경계가 나란히 융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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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의 성품과 모양이 서로 통하는 문에는 자세하게 네 개의 문이 있다. 첫째는 성품이 모양을 따르면 두 번째의 문과 같다. 둘째는 모양에 붙어 있다가 성품으로 돌아가면 첫 번째의 문과 같다. 셋째는 두 가지 다 존재하면서 걸림 없으면 위의 두 가지 문을 다 갖추는데, 이것에 의하면 대비와 지혜가 나란히 옮아가고 성품과 모양이 가지런히 달리며 고요함과 비춤이 쌍으로 흘러서 큰 자재함을 이룬다. 넷째는 서로가 빼앗아 둘이 다 없어지면 성품과 모양이 다 함께 끊어지고 똑같은 결과 바다에 빠져서 이루어짐도 없고 이루어지지 아니함도 없다.
  제4의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는 문은, 모양이 비록 만 가지로 틀리나 성품에 즉하지 아니함이 없고 성품의 덕은 그지없어서 온전히 모양 속에 있으며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여 모양이 성품에서와 같아져서 위의 모든 문으로 하여금 모두가 장애 없게 하며, 원인과 결과가 서로 통하고 순수함과 뒤섞임이 서로 융화하며 일과 일마다 서로 엇갈려서 겹겹이요 그지없다.
  이제 성품의 문의 네 가지 구절 안에 나아가면 이는 바로 부처의 문이요 그 나머지 세 가지는 취하지 아니한다.
  모양의 문안에 나아가 유정의 문[有情門]에서 보면, 이는 깨끗함이요 더러움이 아니며, 이는 결과요 원인이 아니다. 이것은 한 갈래의 이치로서 여기서 쓸 것은 아니다.
  서로 통하는 문에 나아가서 부처면 성품과 모양이 둘 다 융화하고 중생이면 모양에 모여서 성품으로 돌아간다.
  이제 경에서는 바로 제4에 의거한다. 성품이 모양에 융화하여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부처의 깨끗한 성품이 중생의 더러움에 융화하고, 부처의 한 성품을 중생의 여럿에 융화하며 많은 더러움이 어느 한 참된 성품은 나게 하여 모두가 부처에서와 같이 된 뒤에 성불하면 끝이 난다. 유정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를 서로 회통하고 융화하여 부처의 몸이 되면 모두가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만물을 모아서 자기를 이룩한 이는 저 성인뿐이리라”고 했고, 또 이르기를 “그러므로 성인은 공(空)하여 그 체성이 한가지요 만물은 나 아님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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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의 성품이 만물에 융화하여 성품이 부처와 같아져서 모두가 이루어지고 물건의 성품이 부처의 모양에 융화하기 때문에 3업(業)이 만 가지 종류에서와 같게 한다.
  지금 이것은 경의 뜻이어서 딴 문의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르기를 “문을 따라 같지 아니하다”라고 했으니, 지금의 이것이 성불의 문이다.
  돈교(頓敎)에서는 대체로 성품에서 보는 네 개의 문이 같고, 종교(終敎)에서는 성품과 모양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 같으며, 시교(始敎)에서는 두 가지 문이 있는데, 환유(幻有)는 곧 공이라 모양에 모여서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마음만으로 나타날 뿐이라 대체로 제2의 것과 같다.
  소승과 사람과 하늘은 모두가 모양의 문에서와 같다. 이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정(無情)도 성불한다”고 한다. 이것은 성품과 모양이 서로 융화한다는 데서 본 것으로 유정의 성품이 무정의 모양에 융화하고 무정의 모양이 성품을 따라 유정의 모양과 융화하면서 같아지기 때문에 무정도 성불한다는 이치를 말한다.
  만약 무정이 성불하지 못한다는 이치가 유정의 모양에 융화되면, 역시 모든 부처와 중생도 성불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불과 성불하지 않음과 유정과 무정은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법계는 한없기 때문이요, 부처의 체성은 넓고 두루하기 때문이요, 빛깔과 공(空)은 둘이 없기 때문이요,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10신(身)은 원융하기 때문이요, 연기의 모양으로 연유하기 때문이요, 중생계는 그지없기 때문이요, 단상(斷常)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요, 만법은 비고 원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요, 무정도 깨닫는 성품이 있어서 유정과 같이 성불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이룩된다고 허락되면, 능히 수행의 원인으로 무정이 유정을 변화시키고 유정이 무정을 변화시키리니, 삿된 소견과 한가지다.
  그러므로 성품은 교묘하거나 서투른 것이 아니고, 아는 것에 상세함과 소략함이 있다. 지혜가 미묘한데도 보는 것은 잠깐 동안에 있고, 근기가 둔한데도 깨치면 티끌만큼의 많은 겁(劫)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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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까닭에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부처의 체성은 오묘하여 색온(色蘊)에 즉한 것도 아니고 색온을 여읜 것도 아니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이 공하여 참 성품이 저절로 나타난다”고 했다.
  『밀엄경(密嚴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금광(金鑛)을 부수어서 가루로 하면/그 금광 안에서는 금을 못 보며/지혜로운 이가 잘 녹이고 불려야/순금은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모든 물질[色]을 쪼개고 나누되/아주 작은 극미(極微)의 수까지에 이르며/그리고 모든 쌓임[蘊] 쪼개며 구하되/동일하거나 다른 성품이거나 간에/부처의 체성은 볼 수 없으나/또한 부처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또한 종경(宗鏡) 안에 깨쳐 들어서 성불하되 한 생각을 여의지 않은 것과 같나니, 만약 앞생각은 바로 범부였고 뒷생각은 바로 성인이라 하면 이것은 오히려 별교(別敎)에서 거두어들일 바나 지금은 무명을 움직이지도 않고 온전히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왕위를 가져다 곧장 평범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으며, 마치 꿈에 천추(千秋)를 누리다가 깨고 나자 따라 소멸한 것과 같다”고 했으며, 부 대사(傳大士)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말하기를 “이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가지고 청정하게 해탈하며 시방을 환히 비추면서 광명빛이 미묘하여 생각하거나 말하기조차 어렵기를 바라십니까. 임금께 드리고 싶은데, 만약 받으시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이루시리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약 한 생각 동안에 결정코 믿어 받으면 찰나도 못 되어서 문득 깨달음의 지위에 오르게 되리라.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기를 “유마힐(維摩詰)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대들이 이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면 이것이 곧 출가요 이것이 곧 구족계(具足戒)입니다’”라고 했다.
  또 『법화경』에서 이르렀다.
  “그 때 용녀(龍女)가 값어치가 삼천대천세계만큼한 한 개의 보주(寶珠)를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께서 이내 받으셨다. 용녀는 지적(智積)보살과 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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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제가 보주를 바치자 세존께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일이 빠릅니까?’
  대답하였다.
  ‘아주 빠르십니다.’
  용녀는 말하였다.
  ‘그대들의 신통력으로 제가 성불하는 것을 관하십시오. 그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함생(含生)들의 마음 구슬은 환히 빛나서 도리에 앞뒤가 없음을 알 것이다.
  밝고 어둠은 근기를 따르는 것이니, 혹은 싸우다가 살갗 속에 숨었을 때 밝은 거울을 대하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놀다가 물속에 빠졌을 때 느리게 흐른 데에 있으면 갖기도 하며, 혹은 전륜왕의 상투 속에 있을 때 큰공을 세우면 하사하기도 하고, 혹은 가난한 사람의 옷 속에 매었을 때 지혜롭게 원하면 오히려 있게도 된다.
  종경(宗鏡)에서는 명문(明文)으로 이것을 한 가지로 증명했다. 이렇게 믿으면 마지막에는 남음 없이 되리니, 바로 이 한 생각으로 온갖 법을 알고 이 도량에서 온갖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거하여 모든 성인은 마음과 부처를 분명하게 열어 보였다. 설령 의심을 안고 기가 꺾여 물러나는 이가 있거나 비록 아직은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불하는 도리는 잠시라도 이지러진 일이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진짜 금인 줄 모르고 구리쇠로 오인했더라도 구리쇠라는 헛된 이름만이 있었을 뿐 금의 성품은 잠시도 변한 일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지금 고집하는 이가 본래 그것인 줄 모르고 도리어 지금도 아니요 옛날도 아니었다 하면서 미혹하였다가 비로소 깨쳐 아는 것과 같다.
  위에서 널리 인용하며 간곡하게 증명한 것은, 생사하는 그 속에 부사의한 성품이 있고 진로(塵勞) 그 안에 큰 보리의 몸이 갖추어졌다 함을 보이기 위해서일 뿐인데,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이 듣고 모두 믿지 않고 쉽게 분수가 없다면서 ‘나는 범부다’라고만 말하여 불승을 이어받아 크게 법그릇[法器]을 지니지 못하고 나아가 한결같이 중생의 업만 따르면서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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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합한다면, 생사의 바다가 더욱 깊어지고 번뇌의 농(籠)이 더욱 빽빽해지리라.
  그런 까닭에 조사와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두루 모아서 뭇 의심들을 단박에 풀어 그 자리서 밝아져서는 바로 남[生]이 없는 제 성품을 보며 부처와도 다름이 없고 만법이 본래 같은 줄 알며 비로소 진전(眞詮)을 믿고 여기에 깊이 이익이 있게 한다.
  [문] 육조(六祖)가 이르기를 “선이거나 악이거나 간에 도무지 생각 말라”고 했으니 저절로 마음의 체성에 들게 되는 것이요, 동산(洞山) 화상이 이르기를 “부처의 곁일만 배워 얻으면, 오히려 용심(用心)만 그르친다”고 했거늘, 이제 어찌하여 성불하는 취지를 널리 논하는가.
  [답] 지금 종경록(宗鏡錄)이 바로 이런 이치를 논하고 있다. 마음이 성품에 명합하면 부처의 도리가 진공(眞空)에 계합하거늘, 어찌 마음 밖에서 망령되이 다른 것을 따르며 더 나은 경계를 구하겠는가.
  『화엄기(華嚴記)』에서 “만약 진공을 통달하면 오히려 선조차 짓지 않거늘, 하물며 악이겠는가, 혹은 삿되이 공(空)을 설명하면서 환하며 물건이 없다 하기도 하고, 또는 걸림이 없는지라 악을 지음에도 거리낄 것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 참으로 공을 알아 도리에 잘 따르는 것도 동요와 산란을 내어 오히려 마음에 선을 사모하지 않을까 두렵거늘, 악으로 도리를 등지고 망정(妄情)을 따르면서 어찌 지어야 되겠느냐. 만약 걸림 없다 하여 악을 짓는 데도 거리낄 것도 없다 하면, 어찌하여 걸림이 없는데 선을 닦으면서 악을 끊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지 못하느냐. 선법 닦기를 싫어함도 오히려 마음에 집착이 있을까 두렵거늘, 멋대로 악을 짓는다면 어찌 집착이 두렵지 아니하랴. 분명히 삿된 소견이요 나쁜 중생임을 알겠도다. 진리에 들어서 부처를 관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 일으킴을 두려워하거늘, 다시 나쁜 생각을 짓는다면 특히 진리에 어긋난 것이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렀다.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앞 성인들이 아는 바를 차츰차츰 서로 전하여 준 것조차 망상이어서 성품이 없나니, 보살마하살이 혼자 하나의 고요한 곳에서 다른 이로 말미암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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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이거나 망상을 여읜 것이 아님을 스스로가 깨닫고 관찰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면서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면, 이것을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또 이르기를 “온갖 것에는 열반이 없고 열반의 부처도 없고 부처의 열반도 없어서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멀리 여읜다”고 했다.
  소각은 바로 모양이요 능각은 바로 소견이니, 능각ㆍ소각을 멀리 여읨을 자각성지라고 한다. 능소가 없어지는 곳에서야 성불하기 때문이다.
  한량 있게 아는 바는 다른 이로부터 배우는 외학(外學)인데, 반야의 바다를 궁구하려 하면 그 근원을 얻지 못하리라. 마치 항하 물 속에 한 됫박의 소금을 넣는 것과 같아서 그 물은 짠맛도 없을 뿐더러 마시는 이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안으로 비추어서 밝아지고 법의 근원을 꿰뚫으면 본체[理]마다 비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현상[事]마다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생각 없음[無念]의 법 중에 머무는지라 이와 같은 황금빛 몸의 서른두 가지 몸매를 얻었고 큰 광명을 놓아 남음 없이 세계를 비추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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