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5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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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5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비천한 범부의 자리까지도 모든 부처님과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신통 작용을 갖추지 않았는가.
  [답] 이것을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생들이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화엄종(華嚴宗)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체성을 증득하여 중생의 작용을 쓴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지공(志公) 화상이 노래하기를 “해가 기울어서 마음 땅에 못 미치니/어떻게 일찍이 이치 알리요/다른 집 문자(文字)는 친소(親疎)있으니/공부하며 적실한 뜻 구하지 말라.
  발자취에 맡기어 꺼림을 끊고/오래 인간에 있으면서도 세속에선 아니 산다/원래 빛과 소리의 속에서 운용하는데/범부들 모르고서 다투며 헤아리네”라고 했다.
  어떤 학인이 대안(大安)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신통입니까?”
  스님은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강서(江西)에서 옵니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아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학인이 재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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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이 신통입니까?”
  스님은 말하였다.
  “과연 거짓말이로다.”
  이 모두는 증험한 것인데, 다 같이 눈앞에서 평소에 수용하면서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 마음속의 진여의 체(體)ㆍ상(相)ㆍ용(用) 3대(大)의 원인을 가져다 법(法)ㆍ보(報)ㆍ화(化) 3신(身)의 결과로 삼거늘, 어찌 다시 갖추고 갖추지 않았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만약 실제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생인(生因)의 나는 바가 아니요 요인(了因)으로 알 바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생인이란 진흙으로 병을 만드는 것과 같고, 요인이란 등불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만약 지혜 등불로 겨우 비추기만 하면 범부와 성인이 한결같고, 뜻으로 이해하여 그를 관찰하면 진리와 범속이 다른 듯하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현상계의 모양에 집착이 많아서 참된 본체[眞理]를 미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모양에 집착한 범부에게 마땅함에 따라 그를 위하여 설법한다”고 했고, 『금강경』에서 이르기를 “범부가 그 현상에 탐착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온갖 경론(經論)은 모두 중생들의 몸과 마음이 현상계의 모양에 대한 집착들을 깨뜨리는 것이니 『보장론(寶藏論)』의 「이미품(離微品)」에서 “경론이란 저 범부의 망정에 나아가서 저 근량(根量)의 갖가지 방편을 깨뜨리지 않음이 없나니, 모두가 모양 있는 형상에 머무르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모양 있는 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온갖 언설과 이미(離微)가 필요 없으리라.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마땅함에 따라 법의 의미와 알기 어려운 것을 말하거나 비록 갖가지의 승(乘)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이는 권도로 접하는 방편이요, 도를 돕는 법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구경의 해탈이거나 열반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에다 갖가지 물질 모양을 그리거나 여러 가지 음성을 내더라도 저 허공은 실로 달라지는 모양이 없이 받아들이며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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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부처님의 화신(化身)과 설법도 그와 같아서 실제(實際) 안에서는 도무지 하나도 달라짐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는 이(離)에 합하고, 허공은 미(微)에 합하여 만물이 동작하고 변화하되 아무 일도 없다.
  정신 안에는 지혜가 있고 지혜안에는 통달이 있다. 통달에는 다섯 가지가 있고, 지혜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의 통달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도통(道通)이요, 둘째는 신통(神通)이요, 셋째는 의통(依通)이요, 넷째는 보통(報通)이요, 다섯째는 요통(妖通)이다.
  요통이라 함은, 여우와 너구리가 늙어서 변화하며 목석의 요정(妖精)이 화현하여 사람의 정신에 달라붙어서 총명해지고 기이하게 되는 이것을 요통이라 한다.
  무엇을 보통이라 하느냐 하면, 귀신이 미리 알려주고 여러 하늘들이 형상을 변화하며 중음신(中陰神)이 태어날 곳을 미리 알려 주며 용이 숨고 변화하는 이것을 보통이라 한다.
  무엇을 의통이라 하느냐 하면, 술법으로 다스려서 알고 인연 있는 몸으로 이용하며 부작[符]을 타고 오가며 약으로 신령하게 변화하게 하는 이것을 의통이라 한다.
  무엇을 신통이라 하느냐 하면, 고요한 마음으로 만물을 관조하여 전생 일을 기억하며 갖가지의 분별이 모두 선정의 힘에 따르는 이것을 신통이라 한다.
  무엇을 도통이라 하느냐 하면, 무심하게 물건에 응하여 만유(萬有)를 교화함이 물속의 달ㆍ허공의 꽃ㆍ영상 등과 같이 일정한 자체가 없는 이것을 도통이라 한다.
  무엇이 세 가지 지혜냐 하면, 첫째가 진지(眞智)요, 둘째가 내지(內智)요, 셋째가 외지(外智)이다.
  무엇을 외지라 하느냐 하면, 감관으로 분별하여 바깥 경계를 알며 고금의 일을 널리 보고 모두 세속 일에 통한 이것을 외지라 한다.
  무엇을 내지라 하느냐 하면, 무명임을 스스로가 깨달아 번뇌를 끊어 없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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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마음과 뜻이 고요하여져서 남음 없이 사라지는 이것을 내지라 한다.
  무엇을 진지라 하느냐 하면, 분석하면 물건이 없고 본래부터 고요하며 통달함이 끝이 없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진지라 한다.
  진지와 도통은 이름 붙일 수 없으나 나머지 것 모두는 삿되고 거짓이다. 거짓이면 참되지 아니하고 삿되면 바르지 않으므로 미혹하고 산란한 마음이 생기어서 본래의 성품을 미혹되게 한다. 그러므로 깊이 이미(離微)를 알고 저 모든 존재는 제 성품이 본래 진실이나 뭇 품류에서 나왔음을 통달하라.
  지혜에는 삿됨과 바름이 있고 통달에는 참됨과 거짓이 있지만, 법 눈의 뛰어난 밝음이 아니면 가려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삿됨과 거짓에 믿음이 많고 바름과 참됨에는 믿음이 적으면서 큰 가르침은 누워서 행하고 소승은 실제로 이용한다. 때문에 묘한 도리는 드러내기 어려운 줄 알 것이다.
  『백장광어(百丈廣語)』에서 이르기를 “물건에 응하고 형상에 따라 모든 갈래[趣]에 변하여 나타내되 나[我]와 내 것[我所]을 여의는 것도 오히려 소용(小用)에 속하므로 이것은 부처 일의 문[佛事門]에서 거두어들이거니와, 대용(大用)이라 함은 큰 몸을 형상 없는 데에 감추고 큰 음성이 아주 작은 소리에서 숨는다”라고 했다.
  방 거사(龐居士)가 게송에서 이르기를 “세간인은 대체로 금을 중히 여기지만/나는 찰나 동안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금은 사람 마음을 어지럽힘이 많되/고요함은 진여의 성품을 보네.
  마음이 통하면 법 또한 통하나니/열 여덟 가지 행(行)의 자취 끊는다/자기 마음이 걸림 없다면/신령스레 통하지 않음을 어이 근심하랴”고 했다.
  이렇게 아는 이라야 종경의 안에 든다. 온갖 하는 일 모두가 율행(律行)에 들면, 저절로 온갖 부처 일이 이룩되리라.
  『정명사기(淨名私記)』에서 “율행에 들게 된다 함은 마치 우파리장(優波離章)을 바로 계율 받듦[奉律]이라 하고 바로 잘 이해함[善解]이라 함과 같나니, 단정히 앉았어도 소용없다. 경영하고 공양 거리를 마련하면서 언제나 부처 일을 짓되 마음이 가는 가운데서 구하라”고 한 것과 같다.
  이상에서는 다 같이 성품의 작용인 마음의 통달에서 본 것이요, 현상의 이해에서 본 것이 아니다. 혹 어떤 이들은 형상을 통틀어 말하는 이도 있고,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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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중생의 본체가 갖추어지고 모든 부처님의 현상도 원만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중생은 원인에 있고 모든 부처님은 결과를 증득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중생은 객진번뇌에 막히고 모든 부처님은 여러 가지가 나타나서 함께 다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중생은 망령된 소견에 막히고 모든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五眼]을 뚜렷이 통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천태교(天台敎)에서는 대체로 본적(本迹)에서 보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님을 밝히고 중생과 부처의 인과를 가린다. 그러므로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본적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부사의는 하나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담연 존자(湛然尊者)는 3관(觀)ㆍ4교(敎)ㆍ10여(如)ㆍ10승(乘)ㆍ일념삼천(一念三千) 등으로 요약하였고, 이 적문(迹門)에서는 그 10묘(妙)를 논하였다. 적문을 알아도 오히려 묘한데 본문(本門)은 알 만하다. 나아가 색심불이(色心不二) 등의 열 가지 문을 대강 추려서 권실(權實)의 종(宗)을 밝혔고 능소(能所)의 변화를 가렸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실교를 위하여 권교를 베풀면 둘이 아니면서도 둘이고, 권교를 열어 실교를 드러내면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열 가지 문의 첫째는 색심불이문(色心不二門)이다.
  이는 또한 10여(如)와 거울[鏡]에서 무제(無諦)까지인데, 낱낱 모두에는 총별(總別)의 두 뜻이 있어서 전체를 통해서는 한 생각에 있으면서 색과 심을 분별하였다.
  왜냐 하면 처음의 10여 중에서 모양은 색에만 있고 성품은 심에만 있으며 몸의 힘으로 지은 인연은 이치로는 색과 심을 겸할 것이나 인과는 심뿐이요 과보는 색에 요약될 뿐이기 때문이다.
  12인연의 괴로운 업은 두 가지 다 겸하고 혹(惑)은 심에만 있으며, 4제(諦)의 셋은 색과 심을 겸하지만 멸(滅)은 심에만 있으며, 2제(諦)와 3제가 모두 세속이라 색과 심을 갖추지만 진리 안의 것은 심일 뿐이다. 실제(實諦)와 무제(無諦)는 이것에 준하여 보아야 한다.
  이미 별(別)을 알고 나면 별을 거두어 총(總)에 들이는 것이니, 온갖 법은 심성 아님이 없고 한 성품과 성품에도 3천(千)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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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마음의 색심(色心)인줄을 알아야 한다. 곧 심을 변화[變]라 하고 ,변화를 지음[造]이라 하며, 지음을 체성과 작용이라고 하나니, 이것이 곧 색도 아니고 심도 아니며 색이면서 심이며 오직 색이면서 마음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알라. 한 생각뿐인 줄 알면서 두루 보면 자기가 다른 이요, 중생이 부처이다. 다른 이가 중생이요 다른 이가 부처라는 것도 오히려 마음과 동일하거늘, 하물며 자기 마음이 중생이요 부처거늘 어찌 한 생각을 어기겠는가. 그러므로 저 여러 경계의 법이 서로 틀리면서도 틀리지 아니하다.
  둘째는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이다.
  관찰할 대상인 경계는 안과 밖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밖[外]이란, 저 의보와 정보에 의탁한 것을 말한다. 색과 심은 곧 공(空)ㆍ가(假)ㆍ중(中)이며, 곧 공ㆍ가ㆍ중이 미묘하기 때문에 색과 심의 체성이 끊어지면서 하나의 진실한 성품일 뿐이요 공ㆍ가ㆍ중도 없지만, 색과 심은 완연하여 참되고 깨끗함이 크고도 같다. 다시는 중생의 일곱 가지 방편[七方便]의 다름이 없고 국토의 깨끗하고 더러운 차별 류를 보지 않으면서 제석의 보망[帝網]과 같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저절로 환하다.
  안[內]이라 함은, 먼저 밖의 색과 심의 한 생각과 생각 없음을 알면 안 체성의 3천(千)이 곧 공ㆍ가ㆍ중일뿐이다. 이는 곧 밖의 법은 온전히 심성이 되고 심성에는 밖이 없으며 거두어서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 시방의 모든 부처와 법계의 유정이 체성은 다름이 없어서 온갖 모두가 두루하거늘, 누가 안이며 밖과 색이며 심과 자기며 남을 말하겠는가.
  이것은 색심불이문으로써 이루어진다.
  셋째는 수성불이문(修性不二門)이다.
  성덕(性德)은 바로 계여(界如:十界十如)의 한 생각뿐이며 이 안의 계여에는 3법(法)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덕이 본래 그렇다 하나 지혜를 빌어서 수행을 일으키며 수행으로 말미암아 성덕에 비추고 성덕으로 말미암아 수행을 낸다. 성덕에 있으면 온전히 수행으로 성덕을 이루고 수행을 일으키면 온전히 성덕이 수행을 이루며, 성덕은 옮는 바가 없고 수행은 언제나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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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에는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순수(順修)와 역수(逆修)이다. 순이란 성덕을 깨달아[了] 행을 삼는 것이요, 역이란 성덕을 저버리고 미혹하여짐을 말한다. 미혹과 깨달음의 두 마음이니, 마음에는 둘이 없다 하더라도 역과 순은 두 가지 성품이다. 성품과 현상[事]은 언제나 다르므로 현상으로 말미암아 옮아가지 않는 마음이면 미혹한 수행이 깨달음을 이루게 한다. 때문에 한 동안의 미혹과 깨달음으로 성덕을 비추어 수행을 이루거나 성덕을 보고 마음을 수행하는 이 두 가지 마음이 다 함께 없어져야 한다.
  또 깨달은 순수가 성덕과 상대하여 떨어짐[離]이 있고 합함[合]이 있다. 떨어짐이란 수행과 성덕에 각각 3씩을 말하고, 합함이란 수행에는 2요 성덕에는 1을 말한다.
  수행의 2는 저마다 3씩인데, 함께 성덕의 3을 낸다. 그렇다면 수행에 9를 갖추었기는 하나 9는 바로 3일뿐이다.
  성덕에 상대하여 수행을 밝히기 때문에 합함은 수행에서 2가 된다. 2와 1의 성품은 마치 물이 파랑으로 된 것과 같으며, 2 또한 2가 없는 것도 파랑과 물이 없는 것 같다.
  성덕은 3장(障)을 가리킨 줄 알아야 하리니, 이 때문에 3을 갖춘다. 수행은 성덕으로부터 이루어지고 3을 이루는 법도 그러하며, 수행과 성덕이 없음을 통달하면 하나의 묘한 법[妙乘] 뿐이어서 분별할 바도 없고 법계가 환하다.
  이것은 내외불이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넷째는 인과불이문(因果不二門)이다.
  중생 마음의 원인에는 이미 3궤(軌)가 갖추어져 있고 이 원인이 결과를 이루면 3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원인과 결과는 다름이 없고 처음과 마지막의 본체는 하나다. 만약 그렇다면 인덕(因德)이 이미 갖추어져 있거늘, 어찌하여 인덕에 머무르지 아니하는가. 다만 원인을 미혹한 연유로 각자가 진실이라 할 뿐이다.
  만약 미혹한 성품을 깨달으면 실로 인덕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 인덕을 연구하여 인덕이 드러나면 결과라 하는 것이니, 원인과 결과를 반연하는 본체는 동일할 뿐이다. 이 동일한 본체로써 원인을 삼으면 본체가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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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서 다시는 결과라는 이름도 없거늘, 어찌 그대로 원인이라는 이름을 둘 수 있겠는가.
  원인과 결과가 이미 없어지고 본체의 성품이 저절로 잊혀지면, 지혜의 친소(親疎)를 잊음으로 말미암아 미혹함에 후박(厚薄)을 이루게 할 뿐이다. 미혹함의 후박 때문에 억지로 3혹(惑)이 나누어지고 6즉(卽)의 이치가 열리는 것이니, 지혜의 얕고 깊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꿈에 애써 행한 것 같아서 공(空)에 합하매 미혹이 끊어질 허환한 인연이 이미 가득 차면 거울 영상(影像)의 결과가 원만하다. 공과 영상이 비록 이치는 같다 하더라도 공은 빈 것이요 형상은 실지이니 형상이 실지이기 때문에 본체에 일치하여 본래부터 존재한다.
  공은 비었기 때문에 미혹은 더욱더 성품을 형성시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둘이 아니면서도 둘이어서 원인과 결과가 다름을 세우며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어서 처음과 결과가 다름을 세우며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어서 처음과 마지막의 체성이 하나다. 만약 원인과는 다른 결과라 하면 원인 또한 원인이 아니며, 분명한 결과는 원인을 따르므로 원인이라야 결과가 정해진다.
  그런 까닭에 3천은 본체에 있어서 무명과 이름이 같고 3천의 결과가 이룩되면 모두가 상락(常樂)이라 일컬으며 3천이 고쳐짐이 없어서 무명이 곧 밝음이고 3천이 다 같이 항상하면 체성과 함께 하고 작용과 함께 한다.
  이것은 수성불이문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섯째는 염정불이문(染淨不二門)이다.
  만약 비롯함이 없이 곧 법 성품이 무명이 됨을 알면, 지금의 무명이 그대로 법 성품이 되는 줄 깨달을 수 있다. 법 성품이 무명과 함께 모든 법을 두루 지으면 그것을 더러움[染]이라 하고, 무명이 법 성품과 함께 뭇 인연에 두루 응하면 그것을 깨끗함[淨]이라 한다.
  흐린 물ㆍ맑은 물의 파랑과 습기는 다름이 없다. 맑고 흐림이 비록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하더라도 흐림이 이루어질 소지는 본래부터 존재한다. 흐림이 비록 본래부터 존재한다 하나, 전체는 바로 맑은 것이다. 두 가지 파랑의 도리는 공통된 것이니, 온 체성이 작용이기 때문이다.
  3천의 인과를 다 같이 연기라 하고 미혹과 깨침의 연기는 찰나 동안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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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 아니하며, 찰나의 성품은 항상하고 연기의 본체는 하나이며 하나의 본체 안에서 깨끗함과 더러움이 분류되는데, 따로따로면 6예(穢)와 4정(淨)이고 상통하면 열 가지가 깨끗함과 더러움에 다 통한다. 그러므로 찰나 동안의 더러움의 체성은 모두가 깨끗함인 줄 알 것이다.
  3천이 아직 드러나지 못하면 증험할 체성을 여전히 미혹한다. 그러므로 상사위(相似位)에서 여섯 감관의 두루 비춤[六根遍照]을 이룬다. 두루 비춤은 10계에 분류되고 저마다 골고루 환하거늘, 어찌 여섯 감관이 깨끗한 사람이 10정(定)의 열을 말하겠는가. 분진(分眞)은 자취를 드리우고 10계 또한 그러하며, 내지 결과가 이루어지면 저 백계(百界)도 같다.
  그러므로 처음 마음이로되 차(遮)이면서 조(照)다. 조이기 때문에 3천이 항상 갖추어지고, 차이기 때문에 당연히 공(空)과 중(中)이다. 종일토록 둘 다 없어지고 종일토록 나란히 비추며, 이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두루하여 방소 없이 응하며 느낌[感]을 따르면서 베풀면 깨끗함과 더러움이 여기서 없어진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공이요 중이다. 여전히 공과 중으로 말미암아 더러움이 바뀌어서 깨끗한 것이 되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환히 앎으로 말미암아 공과 중이 저절로 없어진다.
  이것은 인과불이문(因果不二門)으로써 이루어진다.
  여섯째는 의정불이문(依正不二門)이다.
  이미 자나(遮那:毘盧遮那佛)를 증득하면, 한 체성이요 둘이 아니다. 진실로 비롯함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한 생각이 3천이다. 3천 중에서 생음(生陰)의 2천이 정보(正報)가 되고, 국토의 1천은 의보(依報)에 속한다. 의보와 정보가 이미 한 마음에 해당하거늘, 한 마음이 어찌 능소로 나누어지겠는가. 비록 능소는 없다 하더라도 의보와 정보는 완연하다. 이것이 곧 이치의 성품의 명자(名字)와 관행(觀行)이다.
  벌써 둘이 아닌 의보ㆍ정보의 모양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 남으로 하여금 인과가 서로 포섭하게 한다. 중생이 본체에만 있으면 결과가 비록 이룩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온갖 것이 바로자나의 묘한 경계가 아님이 없다.
  그러나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 체성은 두루하지 않으면서도 두루하고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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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본체 성품은 좁지 않으면서도 좁으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쳐지지 않고, 크고 작은 것에 관계치 않음을 알아야 한다. 원인ㆍ결과의 본체가 같거늘 의보ㆍ정보가 어찌하여 구별되랴. 그러므로 깨끗하고 더러운 국토와 훌륭하고 하열한 몸에서, 티끌 몸과 법신은 분량이 같고 티끌 나라와 적광토(寂光土)는 다름이 없다.
  이것이 곧 “하나하나의 티끌 세계가 온갖 세계요/낱낱의 티끌 몸이 온갖 몸일세/넓고 좁고 낫고 못함은 불가사의요/깨끗하고 더러움과 방소는 그지없다.
  만약 3천이 공ㆍ가ㆍ중 아니면/어찌 능히 여기서 자재한 작용 이루랴/이러해야 중생ㆍ부처 평등한 줄 알고/피차와 현상ㆍ본체 서로서로 거두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염정불이문으로써 이루어진다.
  일곱째는 자타불이문(自他不二門)이다.
  근기 따라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은 근본에 의거하며 본래 한 성품이라 자기와 남이 완전히 갖추어졌어야 과위(果位)에 이르고 자기가 그대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마치 본체 성품의 3덕(德)과 3제(諦)와 3천(千)과 같다.
  자기의 행은 공(空)과 중(中)에 있을 뿐이나 남을 이롭게 하는 3천(千)은 만물에 나아간다. 중생의 근기는 한량없어서 3천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능히 응함[能應]은 많기는 하나 10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10계가 바뀌어 나타나도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국토와 국토가 서로 생기되 적광토(寂光土)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중생은 본체에 3천을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느끼고[能感], 모든 부처는 3천의 본체가 원만하기 때문에 능히 응한다. 응함이 두루하고 근기가 두루한지라 기꺼이 나아가되 차별하지 아니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거울에 영상이 나타남과 같을 수 있겠는가.
  거울은 영상을 나타내는 본체가 있고 형용은 영상을 내는 성품이 있다. 만약 하나의 형용이 대하는데 영상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거울은 궁(窮)함이 있고 형용인 현상은 통하지 못하리라. 만약 거울과 형상이 동떨어졌다면 이런 도리가 있을 수 있지만, 형용이 대하는데 영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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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
  만약 거울이 영상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며, 먼지를 벗김에는 사람이 닦는 것이나 영상을 나타냄에는 닦는 이에게 관여한 것이 아니다. 이로써 관법(觀法)을 비유하면 큰 뜻을 알 수 있으리라.
  본체는 비록 자기와 남이 두루 갖추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연인(緣因)과 요인(了因)을 빌려야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 되며, 또 연인ㆍ요인과 성품이 하나로 합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품에 일치한 여러 가지 실마리를 시설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 성품을 일으키지 않고 교화에 방소가 없으리라.
  이것은 의정불이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여덟째는 삼업불이문(三業不二門)이다.
  남을 교화하는 문[化他門]의 현상에서는 3밀(密)을 나누고, 수순하는 만물의 본체에서는 붙이는 이름이 같지 아니하다.
  마음 바퀴로는 근기를 살펴보고 두 바퀴[二輪]로는 교화를 베푸는 것이니, 현신(現身)의 설법이 일찍이 터럭만큼도 어긋난 일이 없다.
  몸에 있어서는 진응[眞身應身]으로 나누고 법에 있어서는 권실[權敎實敎]로 나눈다. 두 가지 몸이 만약 다르다면 무엇 때문에 ‘곧 이것이 법신’이라 했겠으며, 두 가지 언설이 만약 어긋난다면 무엇 때문에 ‘모두가 부처의 도를 이룬다’고 했겠는가.
  법신뿐이라면 응신은 세간에 드리움이 없고 부처의 도뿐이라면 누가 삼승을 베풀겠는가. 몸은 오히려 몸이 없되, 언설은 반드시 언설이 아니다. 몸과 입은 평등하여 저 뜻 바퀴와 같다.
  심색(心色)이 한결같은 것이라 꾀하지 않으면서 교화하며, 언제나 지극한 데에 명합하여 만물에 알맞게 시행하거늘 어찌 백계(百界)가 아니겠는가.
  한 마음의 계(界)와 계(界)도 3업 아님이 없다. 계조차 오히려 한 생각이거늘, 3업이 어찌 다르겠는가. 결과의 작용은 이지러짐이 없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와 일치한다.
  원인과 결과를 믿어야 3밀(密)에는 근본이 있고 백계와 3업은 공(空)ㆍ가(假)ㆍ중(中)이 함께 함을 알기 때문에 알맞고 마땅하게 두루 나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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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가 되게 한다.
  하나하나 응하는 빛과 낱낱의 말의 소리는 백계와 3업이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 ‘교화에 다시 교화를 짓는다’ 함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러므로 한 생각의 범심(凡心)은 이미 본체 성품의 3밀의 모양 바다에 있고, 한 티끌의 보색(報色)은 똑같이 본체의 비로자나에 있어야 비로소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자타불이문으로써 이루어진다.
  아홉째는 권실불이문(權實不二門)을 밝힌다.
  평등한 큰 지혜는 언제나 법계를 비추어 본다. 또한 본체 성품은 아홉의 권(權)에 하나의 실(實)이며, 실이 다시 9계(界)면 권 또한 그렇다.
  권과 실이 서로 명합하니, 백계와 한 생각 또한 분별할 수 없어서 저절로 언제나 그러하다. 결과에 이르고 본래의 한 본체에 계합하면 권이 아니고 실이 아니로되 권이면서 실이다. 이것은 곧 앞에서와 같다.
  마음의 바퀴가 자재하여 몸과 입으로 하여금 권실의 기틀에 나아가게 하고, 3업과 한 생각은 권실에 어긋남이 없다.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베풀거늘, 어찌 떨어져 나눈 상대로 말해야 되겠는가. 곧 권실로써 알맞게 세움이 몸에 있으면 진신ㆍ응신으로 이름하게 되며, 3업의 본체가 같아지면 권교ㆍ실교가 명합한다.
  이것은 삼업불이문으로써 이루어진다.
  열째는 수윤불이문[受潤不二門)이다.
  만물 본체의 본래 성품은 권실이 갖추어져 있고, 비롯함이 없이 혹은 권에 혹은 실에 훈습한다. 권실은 훈습으로 말미암고 본체는 항상 평등하며, 때를 만나 혹은 익히되 원행(願行)이 돕는 바다.
  만약 본래의 원인이 없으면 훈습 또한 헛된 시설이다. 훈습을 만나면 저절로 달라지되 성품으로 말미암아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성품은 비록 달라짐이 없으나 반드시 환발(幻發)과 환기(幻機)와 환감(幻感)과 환응(幻應)과 환부(幻赴)를 빌어야 한다.
  능화(能化)와 소화(所化)는 다 같이 권실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권도 아니고 실도 아닌 것을 갖추어 권실의 기틀을 이루고, 부처 또한 결과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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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아니고 실도 아닌 것을 갖추어 권실의 응함[應]이 된다. 만물의 기틀이 응함과 계합하면 몸과 국토에 치우침이 없고 언제나 적광토와 같아서 법계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 3천은 똑같이 마음자리에 있는지라 부처와 마음자리와 3천은 다르지 아니하며, 4미(微)의 체성도 같고 권실의 이익도 평등하다.
  이것은 권실불이문으로 이루어진다.
  이상에서 다 같이 본체와 현상ㆍ권교와 실교ㆍ원인과 결과ㆍ능과 소 등으로 요약하여 해석하였다.
  본체와 현상의 두 가지 문은 동일함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니,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한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필경공의 문[畢竟空門]이요, 둘째는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문[分別好惡門]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분별의 [문]안에 의하면, 본체[理]는 바로 소의(所依)가 근본이 되고 현상[事]은 바로 능의(能依)가 끝이 된다.
  또 본체는 묘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요, 현상은 거칠어서 보기 쉽기 때문에 하열한 것이니, 지금은 훌륭한 것만 따라야 하고 하열한 것은 따르지 말아야 한다. 본체의 근본만 얻게 되면 근본이 성립되면서 도(道)가 생기고 현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또 본체는 실로 연(緣)에 응하므로 걸림이 없는 현상의 본체요, 현상은 본체로 인하여 성립되므로 잃음이 없는 본체의 현상이다.
  이제 원만한 믿음에 들지 않은 이면 모두가 스스로 비루하게 평범에 낮추면서 멀리 지극한 성스러운 데로 미루는 것이니, 이야말로 현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본체 또한 전혀 없다.
  한 마음의 걸림 없고 자재한 종(宗)을 깨치기만 하면 저절로 본체와 현상이 융통하고 진리와 범속이 서로 통하는 것이니, 만약 현상을 집착하면서 본체에 미혹하면 영원한 겁(劫) 동안 빠져 헤매며, 혹은 본체를 깨치면서 현상을 버리면 이것도 원만한 증득이 아니다. 왜냐 하면 본체와 현상은 자기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성품과 모양이 어찌 하나의 뜻에서 어긋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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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종경(宗鏡)에 들어가 참 마음을 단박 깨치면, 오히려 본체가 아니요 현상이 아니라는 글조차 없거늘 어찌 본체다, 현상이다 하는 집착이 있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고 난 뒤에 역시 원만한 수행을 그만두지 않을 뿐이다.
  어떤 학인(學人)이 본정 화상(本淨和尙)에게 물었다.
  “스님은 수행을 하십니까, 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였다.
  “나의 수행은 그대들과는 다르니라. 그대들은 먼저 수행하고서 뒤에 깨치거니와 나는 먼저 깨치고서 뒤에 수행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먼저 수행하고서 뒤에 깨친다면 이것은 공(功)이 있는 공이라 그 공은 생멸에 귀착하거니와 만일 먼저 깨치고서 뒤에 수행한다면 이것은 공이 없는 공이라 그 공은 헛되이 버려지지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융(融) 대상의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청정을 얻고자 하면 무심(無心)으로써 공(功)을 쓴다”고 했다.
  또 만일 지혜 눈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찌 망령되이 탐을 낼 수 있겠는가. 마치 눈이 밝은이는 끝내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맹선(盲禪)으로 증득함이 어두운 무리라면 어찌 6즉(卽)을 알겠으며, 광혜(狂慧)로 문(文)을 쫓는 무리라면 어떻게 한 마음임을 알겠는가.
  지금에는 다만 원만한 믿으므로 의심이 없이 스스로 관행(觀行)의 지위에 있게 할 뿐이니,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한 세상 동안에 이룩할 수 있다’ 함이 어찌 거짓말이겠는가.
  간절히 바라건대 성품에 미혹하여 수행을 따르거나 권교[敎]에 집착하여 실교(實敎)를 해치거나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거나 허망을 오인하여 진실을 버리거나 세속 이치의 명언(名言)에 의거하고 비롯함이 없는 훈습을 고집하거나 말을 가져서 뜻을 결정하고 알음을 세워서 종을 밝히거나 하여, 한결같이 티끌에 합하면서 본각(本覺)을 저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망정으로 끌어대면 어느 세월에 마칠꼬/영대(靈臺)의 한 점 빛을 저버리니 말이다”라고 했다.
  또 진각(眞覺) 대사가 노래하기를 “깨치고 나면 더 애쓸 필요 없어서/온갖 유위법과는 같지 아니하며/상(相)을 내어 보시함은 하늘에 나는 복이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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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보며 화상을 허공에다 쏨과 같네.
  힘 다하면 화살은 도로 떨어지듯/내생(來生)에 뜻대로 되지 않음만 부르리니/함이 없는 실상(實相)문에 한번 뛰어서/여래의 지위에 바로 드는 것 같으랴.
  근본만 얻으면 끝은 조심 말지니/유리에 스며 있는 달빛 같도다/이미 이런 여의주를 알아냈으면/나와 남에게 이로움은 끝내 쉬지 않으리”라고 했다.
  이는 또한 세간에 복이 있는 사람이 묻힌 광 안에서 마니주를 얻고는 자연히 갖가지로 갈고 닦은 연후에야 저절로 보물이 비내리는 것처럼, 마음을 깨쳐 도를 얻은 이도 그와 같아서 부처 지위에 들었으면 저절로 만행(萬行)으로 장엄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이어진다.
  『화엄경』 안의 제10 법운지(法雲地)보살을 큰 마니주에 열 가지 성품이 있는 것에 견줌과 같다.
  「십지품(十地品)」에 이르기를 “불자여, 마치 큰 마니주에 뭇 보배에서 뛰어난 열 가지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는 큰 바다로부터 나오고, 둘째는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갈고 닦으며, 셋째는 원만하여 결함이 없고, 넷째는 깨끗하여 때를 여의며, 다섯째는 안팎이 환히 비치고, 여섯째는 아주 교묘하게 구멍을 뚫으며, 일곱째는 보배 실로 꿰고, 여덟째는 유리의 높은 당기 위에 놓아두며, 아홉째는 온갖 갖가지 광명을 널리 놓고, 열째는 왕의 뜻을 잘 따라 뭇 보물을 비내려 중생들 마음대로 그 원을 충족시킨다.
  불자여, 보살도 그와 같아서 뭇 성인 중에서 뛰어난 열 가지 일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는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내고, 둘째는 지계와 두타의 바른 행이 밝고 깨끗하며, 셋째는 모든 선정의 삼매가 원만하여 결함이 없고, 넷째는 도의 행이 깨끗하여 모든 때를 여의며, 다섯째는 방편과 신통으로 안팎이 환히 비치고, 여섯째는 연기와 지혜로 구멍을 잘 뚫으며, 일곱째는 갖가지 방편지(方便智)의 실로 꿰고, 여덟째는 자재함의 높은 당기 위에 놓으며, 아홉째는 중생의 행을 관찰하여 문지(聞持)의 광명을 놓고, 열째는 부처 지혜의 직분을 받아 부처의 수에 들어가서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부처 일을 짓는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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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라. 도를 깨치는 것은 마치 보주(寶珠)를 얻는 것 같거늘, 어찌 갈고 닦아 장엄하는 따위의 일이 없겠는가.
  [문] 만약 신통 변화를 갖추지 않으면, 무엇으로 거두어 주고 교화할 것인가.
  [답] 만약 순전히 현상의 신통만을 취한다면, 참된 의취에 어긋남이 있다. 『보행기(輔行記)』에서 이르기를 “삼매를 닦는 이가 갑자기 신통이 발생되면 급히 버려야 하리니 유루(有漏)의 법은 허망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관(止觀)』에서 이르기를 “반야를 능히 장애한다”고 했다. 왜냐 하면 종지(種智)의 반야는 스스로 모든 법을 갖추고 모든 모양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니, 아직 갖추지 못한 동안은 본체에 편안히 둘지언정 어찌 현상의 통함을 구하겠는가. 만약 통함에만 전념하면 이것이야말로 본체를 장애한다. 또 본체를 장애할 뿐만 아니고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것이니, 울두승의(鬱頭勝意) 같은 무리가 바로 이런 류들이다.
  진실한 신통 변화라 하면 일승의 문을 연설하고 남이 없는 도리[無生理]를 말한 것이 아님이 없나니, 한마디 말로 도에 계합하여 생사에 당하여서 열반을 증득하고 눈으로 한번 보며 종(宗)을 밝히어 진로(塵勞)에 즉하여서 정각을 이룬다. 찰나에 범부를 바꾸어 성인이 되며 잠깐 만에 존재를 변화시켜 공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작용하니 어찌 신통 변화가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보적경(寶積經)』에서 이르기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설법이란, 큰 신통 변화이옵니다.’ 만약 그가 하열한 근기라면 모든 부처님의 대자비로 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니, 한 때의 방편이며 노랑 잎으로 울음을 그치게 한다”라고 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신통으로 어리석은 중생들을 은혜로이 교화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상상(上上) 근기라면,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게 할 뿐이며 부처를 관하게 한 것 또한 그렇다.
  옛날 팽성왕(彭城王)이 여러 대덕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이 만약 과위를 증득하여 바로 성인이 되었다면 나를 위하여 왼쪽 겨드랑이에서는 물을 내고 오른 겨드랑이에서는 불을 내면서 허공으로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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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라 광명을 놓고 땅을 움직이십시오. 나는 이내 예배하고 그대들을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우융(牛融) 대사가 대답하였다.
  “장하고도 장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이제 만약 우리에게 이와 같이 과위 증득한 것을 요구한다면, 도(道)와는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성불이라 한다면, 요술쟁이도 부처가 될 것이요, 이는 또 여러 대덕이거나 모든 인사들도 증득한 것이리다.
  옛날 석가께서 승가(僧伽) 안에 있으면서 위없는 도를 연설하셨으나 승가와는 다르지 않았고 유마(維摩)가 세속에 있으면서 해탈의 과위를 설법하였으나 세속과는 다르지 않았으며, 승만(勝鬘) 여인이 대승의 법을 말하였으나 여인의 모양이 고쳐지지 않았고, 선성(善星) 비구가 천제(闡提)의 행을 행했으나 비구의 모양은 바꿔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 속마음에서 알고 모름에 의거하여 격차로 삼을지언정, 어찌 육신인 남자ㆍ여자의 모습과 의복이며 곱고 추한 데에 관계되겠습니까.
  만약 형상이 증득함을 따라 고쳐지고 모습이 깨침을 따라 옮아지는 것이 바로 성인이라 한다면, 구담(瞿曇)의 형상도 바꿔졌어야 석가가 되었을 것이고, 유마의 모양도 고쳐졌어야 금속(金粟)을 이루었으리다. 곧 이 마음으로 증득한 것이요, 이는 행상의 고침이 아닌 줄 알겠습니다. 마치 세간에서 벼슬살이하는 사람과 같아서 벼슬자리가 옮아지고 벼슬이 높아졌다 하여 어찌 모습조차 달라지겠습니까.”
  또 옛 사람이 이르기를 “옛적의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요, 다만 옛적의 행리처(行履處)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설혹 형질이 바뀌고 천만 가지로 변화했다 하여도 모두 이웃한 마음으로 행한 바요, 신통의 작용으로 나오고 없어짐이 자재하여 작은 것을 크게 바꾸고 짧은 것을 길게 편 데에 이르기까지 어찌 한 마음의 속을 여읜 것이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 가지 일은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다만 제 마음만을 증득하면 그 자리에서 성인이 되고, 만약 도를 모른다면 몸매[相]를 갖춘들 무엇하겠는가.
  그러므로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서른두 가지 특징으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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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라 본다면 전륜성왕이 바로 여래이리라”고 하셨으며, 또 게송에서 말하기를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이 사람이야말로 삿된 도를 행함이라/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이 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비록 걸음걸음마다 연꽃을 밟는다 하더라도 역시 악마의 짓과 같다”고 했다.
  방(龐) 거사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빛과 소리로 부처의 길 구하면/결과에는 도리어 악마가 되리”라고 했다.
  만약 결정코 신통과 훌륭한 몸매를 취하여 부처가 된다 하면, 요술쟁이도 성인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늘 악마와 외도ㆍ여우의 요술ㆍ도깨비ㆍ귀신ㆍ용이며 이무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부처가 되리니, 그들은 모두 업보로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추어서 다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하나 실상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겠는가. 먼저 종경(宗鏡)을 깨치어 법눈이 뚜렷이 밝기만 하면, 무슨 도리인들 통달하지 않겠으며 무슨 일인들 사무치지 않겠는가. 온갖 부처 일을 거두어 교화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화엄론(華嚴論)』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이르기를 ‘깊은 선정에 들어가 부처의 신통을 얻게 되면 마음이 본체의 근원에 일치하여 남과 듦의 체성이 없고 고요함과 어지러움의 체성이 없고 조작함의 성품이 없어서 본체 스스로의 참됨에 맡기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본체의 참된 지혜가 응하여 성품은 저절로 3세와 시방에 두루하고 일시에 널리 응하면서 대등하게 육신을 다투며 지혜를 따라 응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되 오감이 없고 또한 변화하지도 않음을 부처의 신통이라 한다’고 했다.
  지혜는 의지함이 없고 형색이 없으며 체성은 오감이 없고 성품은 스스로 두루하며 3세에 속한 것이 아니면서 3세의 법에 널리 응할 수 있음을 신통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지혜는 3세에 들면서도 오감이 없나니, 3세는 바로 중생의 정으로 허망하게 세운 바요, 실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의 체성은 모양도 없고 빛도 없으며 만들지 아니하고 짓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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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으면서 중생에게 응하는 그것을 신(神)이라 하고, 시방에 원만하여 법마다 알지 아니함이 없고 뿌리마다 알지 아니함이 없는 그것을 통(通)이라 한다.”
  또 이르기를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갖가지 성품과 모양의 이치를 나와 시방의 부처님은 능히 알지만, 성문과 연각 및 물러나지 않은 모든 보살은 모두 다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것들은 바로 [문]앞[門前]의 삼승으로서 세간 모양이 항상 머무름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름을 아직 알지 못함에서다”라고 했다.
  삼승이 괴로움[苦]과 쌓임[集]을 똑같이 싫어하고, 사라짐[滅]과 도(道) 닦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는 것은 아직 괴로움과 쌓임이 본래 지혜로 일어날 뿐임을 밝히지 못했고, 사라짐과 도가 본래 스스로 닦음도 없고 만듦도 없고 지음도 없어서 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마치 눈어림처럼 세상에 머무르며 성품에 무명이 끊어지면 바로 이것이 부처임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한 생각이 상응하면 한 생각이 부처요 하루가 상응하면 하루가 부처거늘 어찌하여 괴로움과 죽음이 반드시 삼승기(三僧祇)를 필요로 하겠는가. 스스로가 3계(界)의 업을 알아 업의 처소를 공(空)하게 할 수만 있으면 저절로 중생을 맞아들이는 바로 이것이 부처거늘 어찌하여 변화하고 바뀌어야 부처가 된다고 말하겠는가. 용과 하늘도 변화하거늘 어찌 부처라 하겠는가. 삼승의 사람도 변하고 바뀌는데 무엇 때문에 삼승기를 기다려야 부처를 비로소 이룬다고 하며, 십지(十地)의 위라야 견성한다고 하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빛의 성질인 큰 신통으로써 조어사(調御士)를 보려 한다면 그는 곧 병난 눈으로 뒤바뀌게 보는 것이니, 그는 가장 훌륭한 법과 부처란 깨달음[覺]임을 모르는 것이 된다”라고 했다.
  깨달음의 업과 성품의 진실한 업은 생멸이 없으며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으며 나오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서 성품은 변화가 없고 본래 여(如)한 바로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인연을 따라 여섯 갈래에서 보살행을 행하며 신통으로 변화하여 미혹된 무리들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요, 부처는 변화한 이가 아니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비록 정각을 이루어 법륜을 굴린다 하더라도, 보살의 도를 버리지 않는 이것을 보살행이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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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善財)가 10주(住)의 처음 마음으로 묘봉산(妙峰山) 위의 덕운(德雲) 비구에게서 온갖 부처의 경계인 지혜 광명으로 널리 보는 법문을 기억하게 되고서 이내 정각을 이루었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모든 벗에게 나아가고 보살의 도를 구하며 보살의 행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정각의 체성과 작용을 하는 때에 곧 마음에 짓는 곳이 없고 바로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가 없고 설령 수행이 원만하다 하여도 지금의 것을 바꾸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치 변화한 부처님께서 변화한 몸매를 이룬 때에 고행하면서 깨와 보리를 잡수고 머리를 깎고는 가사를 입으며 모든 장식들을 버리고 풀을 깎는 따위의 일과 같은 것은 외도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경(經) 중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밝혔다. 부처님 스스로가 이와 같은 것들의 행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다. 뛰어난 체함[增上慢]이 없는 이가 어찌 이런 것을 구하겠는가. 한 생각이나마 지음이 없는 성품에 맡기면 부처의 지혜는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바로 이것이 부처이리라.
  도리어 선재가 증득하여 깨달은 후에야 보리의 도와 보살의 행으로 구한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도를 깨달은 후에야 얽매임에 들어가서 세속에 처하되 속박됨이 없고 비로소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으로 속박을 풀수 있기 때문이니, 만약 자신이 속박되어 있으면서 남의 속박을 풀 수 있다는 이치는 있을 수 없다. 해설하는 때는 앞과 뒤로되 법은 바로 한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행하고자 하면 먼저 정각을 이루어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문수의 법이 언제나 그렇다면/문수는 바로 모든 부처의 지혜가 되나니/부동지(不動智)는 바로 체성이요/문수는 바로 작용이니라”고 했다.
  이 온갖 부처님과 모든 중생들의 근본지(根本智)의 체성과 작용의 문으로써 마음을 믿는 온갖 이들과 함께 원인과 결과를 짓는 체성과 작용이기 때문이요, 근본에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는 결과의 원만함이 원인과는 다르지 아니함은 두 성품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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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때문이니, 비로소 초발심과 마지막 마음의 두 가지가 구별되지 않는다 한다.
  여기서 밝힌 10신(信)의 마음은 내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고 들기도 어려워서 그것을 듣는 이는 모두가 이르기를 ‘나는 범부다’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믿는 이가 곧 신통과 도력을 책망하나니, 모름지기 이와 같이 바르게 믿어야 비로소 바른 믿음이요 바른 소견이어서 법력(法力)으로 행을 더하여 법답게 수행으로 나아가 갈래갈래의 무명이 얇아지고 해탈의 지혜가 밝아지며 스스로가 얻은 법의 얕고 깊음에 의하여 점점 신통의 덕용이 자기를 따라 얻어짐을 알아야 하리니, 믿음조차 오히려 얻지 못했으면 어떻게 신통을 찾겠는가.
  점점(漸漸)이라고 말함은 한 때와 한 법성과 한 지혜도 옮아가지 않으며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고 얻을 바 없는 가운데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현(玄)과 6상(相)의 이치로 원만하게 된 법성품 가운데서는 점점으로 되는 단박이라는 것이 없고 다만 비롯함이 없는 무명의 관습이 성숙한지라 갑자기 진리에 계합되게 하는 순수한 성숙은 어렵기 때문에 점점이 있을 뿐이다.
  [문] 부처를 깨달음이라는 이치로 일컫는데 어떠한 법을 깨닫는다는 것인가.
  [답] 법이 없는 법을 참된 법이라 하고, 깨달음이 없는 깨달음을 참된 깨달음이라 하나니, 곧 미묘한 성품은 붙은 데가 없어서 천진(天眞)이며 밝고 환하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의 법은 깨달을 수 없나니/이를 알면 깨달음의 법이라 하며/하나의 법조차 얻을 수 없나니/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수행하네”라고 했다.
  『무자보협경(無字寶篋經)』에서 이르렀다.
  “그 때 승사유(勝思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떠한 법이 바로 여래께서 증득하여 깨달아 알 바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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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남자여, 한 법도 여래의 깨달을 바가 없느니라. 선남자여, 법에서 깨달음이 없는 이것이 여래의 깨달음이니라. 선남자여, 온갖 법이 나지 않으면서 여래는 증득하여 깨달으며 온갖 법이 없어지지 않으면서 여래는 증득하여 깨닫느니라.’”
  그러므로 만약 깨달음이 있으면 중생이요 깨달음이 없으면 목석과 같나니, 다 같이 참된 성품이 아니로되 계합에는 인연이 없지는 않아서 깨달음이 없는 깨달음이라야 큰 종지가 같다.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중생과도 같지 아니하고 깨닫기 때문에 목석과도 같지 않다면, 하나의 깨달음이 온갖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되 깨닫지 아니함이 없나니,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지혜로 앎이 고요하고 깨닫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텅 빈 생각이 환히 비춘다.
  또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다고 보며 그것을 깨달음이라 하므로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깨달으면 온갖 것이 깨닫는 것이며,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져서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문] 처음 발심할 적에 문득 정각을 이루었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나중 마음의 보리를 말하는가.
  [답] 처음도 아니고 나중도 아니로되 처음과 나중을 여읜 것도 아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처음 마음만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처음 마음을 여의고 얻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왜냐 하면 만약 처음 마음만으로 얻고 나중의 마음으로 얻지 못한다 하면, 보살이 처음 발심할 적에 바로 부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제2와 제3의 마음이 있겠는가. 제2와 제3의 마음은 처음 마음을 근본 인연으로 삼는다. 또한 나중의 마음만이 아니고, 또한 나중의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다. 이 나중 마음이 처음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다. 만약 처음 마음이 없으면 나중의 마음도 없다.
  처음 마음은 갖가지의 한량없는 공덕을 쌓고 나중의 마음으로 완전히 갖춘다. 완전히 갖추기 때문에 번뇌의 습기를 끊을 수 있고 위없는 도를 얻는다.
  수보리(修菩提)는 이 가운데서 스스로 어려운 인연을 설명하였으니,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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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과 나중 마음의 심수법(心數法)은 함께 하지 아니하며, 함께 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것은 벌써 소멸하여 어울리지 못한다. 만약 어울림이 없다면 선근이 쌓이지 못하고, 선근이 쌓이지 못하거늘 어떻게 위없는 도를 이루겠는가”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현재 일로 비유하여 대답하셨는데, 마치 등불 심지도 처음의 불꽃만으로 타는 것이 아니지만 처음의 불꽃을 여읜 것도 아니요 나중의 불꽃만으로 타는 것이 아니지만 나중의 불꽃을 여읜 것도 아니면서 등불 심지는 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스스로 심지가 타는 것을 보라. 처음 것도 아니고 나중 것도 아니면서 심지는 탄다. 나 또한 부처 눈으로 보살이 위없는 도 얻는 것을 보건대, 처음 마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로되 처음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중 마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로되 나중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면서 위없는 도를 얻느니라.”
  등불은 보살의 도에 비유하고, 심지는 무명 등의 번뇌에 비유하고, 불꽃은 초지(初地)와 상응한 지혜로부터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상응하는 지혜에 견주었다.
  무명 등의 번뇌 심지가 타는 것은 처음 마음의 지혜 불꽃도 아니고 나중 마음의 지혜 불꽃도 아니로되 무명 등의 번뇌 심지가 다 타면 위없는 도를 얻게 된다.
  또 마치 등불이 비록 생각 생각마다 소멸된다 하더라도 능히 서로 이어지면서 어둠을 깨뜨리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생각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아 앞뒤가 함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능히 서로 이어지면서 그 깨달음의 지혜를 이루고 위없는 도를 이룬다.
  『청량소(淸凉疏)』에서 말하였다.
  “『화엄경』에서 말하되 ‘경계는 마치 눈어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또한 변화와도 같은 줄 분명히 알라.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관행과 상응한다면 모두 법 중에서 두 가지 알음을 내지 않고 온갖 불법이 빨리 앞에 나타나게 되어 처음 발심할 적에 이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는 것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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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말미암아 깨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처음 마음이 시초가 되고 정각은 마지막이 되거늘 어찌하여 처음 마음에서 문득 정각을 이루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인 줄 안다’고 한 것이니, 법의 제 성품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라 한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 마음이 어찌 남에게 있겠으며/정각은 세간을 깨닫는 것이니라’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좋은 증거이다. 이것은 곧 냄[發]이라는 것이나, 열어서 펴냄[開發]의 냄이요 먼저 일으켜 냄[發起]의 냄이 아니다.
  무엇을 앞에 나타난 모양이라 하느냐 하면, 부처의 지혜는 깊은 것이 아니로되 정(情)이 미혹하면 멀다 하는 것이니, 정이 없어지고 지혜가 나타나면 하나의 체성이라 먼 것이 아니다. 이미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임을 알았다 말하면 이 마음이 곧 온갖 법의 성품임을 알 것이다. 이제 본체[理]가 제 마음에 나타나니, 곧 마음의 성품에는 벌써 끝없는 덕이 갖추어져 있다.
  지혜 몸[慧身]을 성취한다 함은 위의 관법(觀法)의 극치이다. 바른 법이 일어나면 지금의 모든 소견은 없어진다. 부처의 지혜가 일어나매 마음을 깨달아서 본체가 나타나고, 본체가 나타나면 지혜가 원만해짐이 마치 거울이 깨끗하면 광명이 생기는 것과 같나니, 앞이 아니고 뒤도 아니며 새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니어서 고요히 비추며 맑디맑다.
  남으로 말미암아 깨치지 않는다 함은 위의 지혜 몸을 이루는 것이니 곧 스승 없이 저절로 나는 지혜이다.
  또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다. ‘온갖 법을 안다’ 함은 다른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지혜 몸을 성취한다’ 함은 깨달음이 원만한 것이다.
  지혜 몸을 성취함에는 반드시 본체를 바탕으로 삼아 일어난다. 저 심성을 보았으면 어찌 다른 이가 있겠으며, 만약 다른 이가 있다고 보았으면 어찌 깨침이라 하겠는가. 이미 심성이라 하면 자기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고요하면서 능히 알므로 정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일대사(一大事) 인연을 위하여 일부러 세간에 출현하여 부처의 지견(知見)에 깨쳐 들어감을 열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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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一)이라 함은 곧 예나 이제나 바꾸지 못할 하나의 길이요, 대(大)라 함은 바로 범부와 성인의 마음 체성이기 때문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일대사를 위하여 세간에 출현하여 모두 중생들에게 제 마음속에서 이 지견이 열리게 하셨다.
  만약 갖가지 차별이 성립되면 이것은 중생의 지견이요 융화되어 하나의 도에 돌아가면 이것은 2승의 지견이며 하나가 또한 하나가 아니라고 하면 이것은 보살의 지견이거니와, 만약 부처의 지견이라면 한 생각의 마음이 열렸을 적에는 마치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비추는 것 같아서 다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바로 이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것이요,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널리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생각마다 석가가 세간에 출현하고/걸음마다 미륵이 내려와 태어난다”고 했다. 어찌하여 자기의 마음 바깥에서 따로 조사와 부처를 구하겠는가. 곧 중생은 부처의 지혜가 본래부터 두루 갖추어진 줄 알 것이다. 만약 마음을 일으켜 따로 구한다면 변계(遍計)의 성품을 이루리라.
  그러므로 육조(六祖)가 이르기를 “본래 성품에 스스로 반야의 지혜가 있으므로 스스로가 그 지혜로써 관조(觀照)할지언정 문자를 빌리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문자를 주장하겠는가.
  지금은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임시 문자로써 지시하여 제 성품을 보게 하는 것이다. 만약 밝아졌을 때는 바로 이것이 넓고 환하면서 도리어 본 마음을 얻는 것이며, 본마음 속에서는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생각 없음의 법[無念法]을 깨치면 만법이 다 통하고 생각 없음의 법을 깨치면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본다”고 했다. 이것으로도 만약 무념(無念)의 법문에 들면 부처가 된다는 찰나 동안을 벗어나지 아니하며, 만약 마음을 일으켜 도를 구하면 한갓 정신을 티끌 같은 많은 겁(劫) 안에서 괴롭히는 줄 알 것이다.
  마치 석가문불께서 과거의 한량없는 겁 동안 수없는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였지만 모두 수기(授記)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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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 하면 행한 바에 의지하여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등불(燃燈佛) 때에 이르러서 다섯 송이의 연꽃을 바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석가라는 명호를 수기 받게 된 것이며, 그제야 5음(陰)의 성품이 공(空)함을 통달하여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었고 비로소 천진(天眞)의 부처를 보고서 단박에 얻음이 없는 문에 들어갔기 때문에 연꽃을 가져다 부처님께 바침으로써 증명을 표하셨다. 그런 까닭에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성품이 공한 바로 그것이 부처이니/헤아림으로써는 얻을 수 없다”고 했으니 오히려 문득 헤아림을 일으킴조차 소용없거늘 하물며 영원한 겁 동안 수고로이 공을 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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