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6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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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6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면 그것은 진실한 마음[眞心]인가, 허망한 마음[妄心]인가.
  [답] 진실한 마음뿐이다. 마음의 진실을 깨치기 때문이요 큰 깨달음의 이치를 이루기 때문에 부처라 일컫는다.
  [문] 만약 그것이 진실한 마음이면 어떤 훌륭한 이치가 있으며, 허망한 마음이면 어떤 허물을 이루는가.
  [답] 필경공의 문[畢竟空門]인 본체[理]에는 조짐이거나 자취가 없고, 분별의 길인 현상[事]에는 열거나 막음이 있다.
  허망한 마음은 능소(能所)로부터 생기고 분별로 인하여 일어나며, 부근(浮根)을 잠시 이용하여 대경(對境)의 허망한 알음을 이룬다. 만약 앞 대경을 여의면 이 마음은 체성이 없고 대경으로 인하여 일으켜 비추므로 대경이 소멸되면 비춤도 없어지며, 생각을 따라 대경이 일어나므로 생각이 공(空)하면 대경도 사라진다. 만약 이 영상인 현상으로 부처 몸을 삼는다면, 벌써 허망한 원인인지라 단멸(斷滅)의 결과만을 이룬다.
  진실한 마음이란 맑고 고요히 비추어서 대경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며, 허공을 함용하고 인연에 맡기어 일찍이 뜻을 짓는 일이 없으며, 아주 밝아서 어둡지 않고 분명하게 항상 알며, 펴도 자국이 없고 말아도 자취가 없음은 마치 맑은 못이 들에 빛나고 밝은 거울이 공중에 달려서 삼라만상이 넓고 공허하여 환히 비추는 것 같으며, 나오지도 아니하고 들지도 아니하며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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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천 분 성인이 가만히 귀착하고 만 가지 신령함이 모이는 곳이다. 그를 믿는 이 큰 도의 근원에 사무치고 그를 체달한 항상 머무름의 법신을 이룬다. 조사와 부처가 똑같이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고 지시했고, 또한 천진불(天眞佛)ㆍ법신불(法身佛)ㆍ성불(性佛)이요 여여불(如如佛)이라고도 한다.
  또한 허망을 여읜 것도 아니니 허망은 체성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진실에 즉(卽)하지도 않았으니 진실은 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망이란 이름이 다하고 즉과 이[卽離]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미묘하고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이 그제야 나타나게 된다. 또 본래 갖추어졌기 때문에 그제야 능히 열어 보인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여래 정각의 마음과 중생의 분별하는 마음은 꼭 들어맞아서 둘이 없으며, 열어 보이고 깨쳐 들어감의 방편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과 모든 부처의 마음이 저마다 다르다면 어떻게 말하여 열어 보일 것인가. 꼭 들어맞아야 방편을 드리울 뿐이다. 마치 창고 안에 보물이 없으면 판다 하여도 헛수고일 것이나 보물이 있다면 사람의 공이 버려지지 않는 것과 같다. 신심만을 내면 끝내 견성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내가 그대의 보임(保任)을 위한 이 일은 끝내 헛되지 않느니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데/여래장의 그 안에서 친히 얻었네/육신통은 공(空)하되 공하지 아니하고/둥근 광명 빛깔이되 빛깔 아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적실하게 지시했거늘, 무엇 때문에 따로 구하겠는가.
  그러므로 『심단결(心丹訣)』에서 이르기를 “넓고 먼 천하에서 헛되이 찾으며/머리 돌려 알려고 하지 않다가/스승을 믿고 가서 무위향(無爲鄕)에 닿아서야/비로소 그 동안에 잘못 애씀 깨달았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무명이 머[문]땅의 번뇌로 온갖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로 삼았으나, 일체 중생들은 모두 스스로 소유하되 다만 지혜의 체성이 성품 없고 의지함이 없을 뿐이라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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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만나야 비로소 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중생 모두가 부처의 지혜로되 아는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깨칠 연유가 없다가 알면 이내 부처를 이룬다. 『대품경(大品經)』에서 “어떤 보살이 처음 발심하자 이내 도량에 앉아 부처와 같이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방(龐) 거사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마음은 그대로요 정신은 절로 비어/약을 먹지 않아도 병은 절로 낫는다/흰 연꽃이요 여의주인데 /허덕허덕 찾아서 쫓아다니지 말라./ 지혜로운 이 재물과 여색 보기를/허깨비와 같은 줄 분명히 아나니/의식으론 몸과 목숨 지탱하면서/서로가 권하며 여여(如如)를 배우다가/때가 되어서 암자로 옮아가면/물건은 하나도 남음이 없네”라고 했다.
  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하나의 환으로 만 가지 병 고치므로/약방문의 많은 것 빌리지 않네”라고 했다.
  [문]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는 부처를 이루고 허망한 생각으로는 범부에 떨어지면, 망념(妄念)은 종(宗)을 어기고 진심(眞心)은 깨달음을 따른다. 이것이야말로 진실과 허망은 둘이 있어서 체성과 작용이 분리되거늘 어떻게 회통하면 하나의 뜻에 원융하는가.
  [답] 진실과 허망은 성품이 없어서 언제나 하나의 근원에 계합되거늘, 어찌 두 가지 마음이 있으면서 서로서로 상즉(相卽)하겠는가. 성품은 깨끗하여 물들음이 없는지라 허망조차 얻을 수 없다. 마치 요술로 만든 칼이 돌을 찍을 수 없고 궂은 안개라도 허공에 물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마음임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까닭에 상즉을 설명한다.
  태교(台敎)에서 묻기를 “무명 그대로가 법 성품이어서 다시는 무명이 없으면 어느 것과 상즉하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마치 얼음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물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얼음이다 하고, 얼음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물이다라고 함과 같다. 이름만이 있을 뿐이거늘, 어찌 두 가지 물건이 상즉한단 말인가”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으로도 시절에 다름이 있어서 녹고 어는 것은 인연을 따르되 습기의 성품은 언제나 존재하여 일찍이 변동한 일이 없는 줄 알 것이며, 내지 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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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곧 성인임도 역시 그러하여 범부와 성인이라는 이름이 있을 뿐 하나의 체성이어서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화엄경』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하나의 세계가 법계에 다함 또한 그와 같다 함은, 한 눈이 같으면 온갖 눈의 같음도 모두가 그러한 줄 알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한 사람의 몸에 손발이 있으면 온갖 사람에게서 모두 손발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을 분명히 모르면 모두가 두 가지 소견을 이룬다. 만약 범부가 이 마음을 집착하면 윤회의 업을 짓고, 2승은 이 마음을 싫증내어 버리면서 회단(灰斷)의 결과를 구한다.
  또 범부가 눈이 없으면 보리 지혜의 조명을 가져다 번뇌의 불에 타게 하나니, 마치 큰 부자인 소경이 보물창고 안에 앉아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다가 보물에게 상처를 입는 것과 같다.
  2승은 여래의 4덕(德)의 비장(秘藏)을 무상한 5음(陰)으로 삼아서는, 이것은 “도둑이요, 범이요, 용이요, 뱀이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며 달아난다.
  속박과 해탈은 비록 다르나 취하고 버림에 다 같이 과실이다. 만약 진실로 알아 통달한 이면 일으키지도 않고 없애지도 아니하며 얻음도 없고 남[生]도 없어서 이 허망한 마음이 생각마다 체성이 없는 줄 알거늘, 무엇으로부터 집착을 일으켜 생각생각에 스스로가 여의겠는가. 끊어 없앨 필요도 없고 오히려 하나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둘이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이 진여에 따르면 원성실(圓成實)을 증득하면서 망정으로는 없고 도리로는 있으며, 뭇 유정이 뜻을 어기면 변계(遍計)를 집착하면서 망정으로는 있고 도리로는 없다. 항상 있음을 따르고 하나의 길을 어기거늘 어찌 일찍이 체성을 잃겠는가. 망정은 도리를 거스르지 아니한다. 천 갈래 길이면서 잠시도 갈래가 지지 못했고, 그를 꿰뚫으면서 망정과 도리가 이름을 끊었으니 그를 알게만 되면 따름과 어김은 자리조차 없다.
  그러므로 법마다 모두 말 없는 도에 계합하고 생각마다 모두 얻음 없는 종지에 돌아가리니, 천진이요 자연이며 조작이 아니다.
  『무언보살경(無言菩薩經)』에서 “그 때 사리불이 무언보살에게 말하였다. ‘그대 족성자여, 말로 할 수 없거늘 어떻게 여래의 이치를 묻고자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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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이 말하였다. ‘온갖 법은 다 문자가 없고 말씨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온갖 중생은 모두 다 자연이라 모든 말의 가르침과 뭇 생각들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만약 현상[事]에 맞추어 자세히 설명하면 범부와 성인은 틀림이 없으면서 틀리고, 본체[理]에 나아가서 어울려 결합되면 중생과 부처가 틀리면서도 틀리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틀림과 틀리지 아니함은 다같이 진여의 체성을 여의지 않았다.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기를 “틀림이 없으면서 틀린다 함은 바로 원융(圓融) 위의 항포(行布)요, 틀리면서 틀림이 없다 함은 바로 항포 위의 원융이다. 마치 별(別)을 잡아서 총(總)을 이루고 별을 여읜 그 밖에 이 총이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렇게 어울리고 거두면 법마다 돌아가지 아니함이 없고, 곧 삼승(三乘)은 셋이 아니요 5성(性)은 다섯이 아니다. 이렇게 미묘하게 알아야 종경(宗鏡)의 빛을 받게 되고 이런 소견이 나서 모두 둘이 없는 뜻 어기는 것을 여의게 된다.
  [문] 만약 일체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3기(祇)와 백겁(百劫) 동안 공을 쌓고 덕을 쌓아야 이루어진다 했는가.
  [답] 다시 일승(一乘)을 배우는 실법(實法)을 위해서요, 또 5성(性)에 나아가는 권기(權機)를 위해서다. 여기서는 자증(自證)의 법문을 논한 것이요, 화의(化儀)의 방편을 진술한 것은 아니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넷의 부처가 있음을 말했으니, 첫째는 화불(化佛)이요, 둘째는 보생불(報生佛)이요, 셋째는 여여불(如如佛)이요, 넷째는 지혜불(智慧佛)이다.
  근기에 따라 나아가 감통하는 그것을 화(化)라 하였고, 그의 옛 원인에 갚아지는 그것을 보(報)라 하였으며, 본각이 환히 비추는 그것을 지혜라 하였고, 본체와 체성이 둘이 없기 때문에 여여라고 했다.
  『화엄경』에서는 열 가지 부처를 밝혔다. 이른바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이루는 정각불(正覺佛)이니 집착 없음에서 보았고, 원불(願佛)이니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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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보았고, 업보불(業報佛)이니 깊은 믿음에서 보았고, 주지불(住持佛)이니 수순함에서 보았고, 열반불(涅槃佛)이니 깊이 듦에서 보았고, 법계불(法界佛)이니 널리 이름[至]에서 보았고,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름에서 보았고,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고 의지함 없음에서 보았고, 본성불(本性佛)이니 분명히 앎에서 보았고, 수락불(隨樂佛)이니 널리 줌에서 보았다.
  또 부처도 총괄하면 열 가지 몸을 갖추었다.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요, 둘째는 국토신(國土身)이요,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요,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요, 다섯째가 연각신(緣覺身)이요,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요,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요, 여덟째는 지신(智身)이요, 아홉째는 법신(法身)이요,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
  따로따로 5교(敎)에 의하면 교에 따라서 일정하지 아니하다.
  첫째는 소승교에서 두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생신(生身)이요, 둘째는 법신(法身)이다.
  둘째는 대승 초교(初敎)에서 세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응신(應身)이요, 셋째는 화신(化身)이다.
  셋째는 종교(終敎)에서 네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이성신(理性身)이요, 둘째는 법신(法身)이요, 셋째는 보신(報身)이요, 넷째는 응화신(應化身)이다.
  넷째의 돈교(頓敎)에서는 한 부처의 몸뿐이어서 실상불(實想佛)이며, 다섯째의 일승원교(一乘圓敎)에서는 열 가지의 부처가 있다.
  또 성품으로 성불함에서 보면 5교가 서로 다르며 같지 아니하다.
  소승에서는 실달(悉達)한 사람만이 부처 성품이 되고, 초교(初校)에서는 반은 이루고 반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부처가 되며, 종교(宗敎)에서는 초목 등을 제외한 마음 있는 것이면 장차 부처가 될 수 있고, 돈교에서는 부처도 없고 성품도 없고 언설의 모양을 여읜 것이 부처가 되며, 원교에서는 부처의 성품이 있지 않는 것이 없어서 세 가지 세간의 모두가 이는 부처가 되는 것이니, 세 가지 세간 모두가 부처라면 안과 밖 마음과 경계가 부처 아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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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마음으로 성불한다는 데서 보면, 소승에서는 착한 마음으로 닦아 얻는 바가 부처가 되고, 초교에서는 마음 성품이 부처가 되며, 종교에서는 마음의 모양과 성품이 없어짐이 부처가 되고, 돈교에서는 마음이 본래 생기지 않음이 부처가 되며, 원교에서는 마음이 걸림 없고 그지없음이 부처가 된다.
  또 천태(天台)에서는 네 가지 교(敎)의 부처를 밝혔다. 첫째는 장교불(藏敎佛)이요, 둘째는 통교불(通敎佛)이요, 셋째는 별교불(別敎佛)이요, 넷째는 원교불(圓敎佛)이다.
  가령 여여불ㆍ심불ㆍ본성불의 경우 어느 사람인들 갖추지 않았으며, 가령 국토신ㆍ법신ㆍ허공신의 경우 무슨 법인들 뚜렷하지 않겠는가.
  곳곳마다 모두가 이는 보배 절인데 언덕이 어찌 있겠으며, 생각마다 모두 정각을 이뤘는데 망상이 어디서 구분되겠는가. 마치 소경이 광명을 보지 못함이 아침 해와 밤 달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고, 소승이 원돈(圓頓)을 듣지 아니함이 어찌 불심(佛心)의 미묘한 뜻의 친소(親疎)에 있어서이겠는가.
  법이 약해짐은 근기의 미미함에 연유하고, 도가 넓어짐은 도량의 크기에 있다. 얕은 근기라고 스스로가 느끼면 묘유(妙有)가 증득되나 무상한 것이 되고, 박복하다고 될 대로 여기면 값진 보물이 변하여서 조약돌이 된다. 부질없이 자기 눈을 미혹하여 다른 이의 몸으로 오인하고, 실제(實際)를 천 가지 차별로 나누어 화의(化儀)의 백 가지 변화가 되게 한다.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서 이르기를 “그 때 부처님께서 대운밀장(大雲密藏)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큰 지혜 등불을 켜서 모든 중생의 어리석은 어두움을 깨뜨려야 되느니라. 만약 여래가 진실로 수두단(輸頭檀)의 집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고행을 닦아 익히며 악마 병사들을 무너뜨리고 도량에 앉아 보리의 도를 이루었다 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부처를 비방하는 것인 줄 알지니라. 차라리 머리를 끊고 그 혀를 빼어낼지언정 끝내 이런 허망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는 여래의 비밀한 말을 잘 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석가여래가 도솔천으로부터 어머니의 태 안으로 내려오셨고, 내지 8상(相)으로 성도하셨다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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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바로 성문의 굽은 소견이니라”고 했다.
  때문에 “하열하게 아는 중생들을 위하여 어머니 태 안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종경(宗鏡)에 들면 하는 말마다 허물이 없고 내는 생각마다 모두가 진실이거니와, 만약 이 문에 아직 이르지 못했으면 옳은 것을 말해도 그른 것이 되고 마음을 거두어도 오히려 그르친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생각을 움직임과 생각을 쉼은, 모두가 미혹함에 돌아간다”고 함과 같으며,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오묘한 뜻을 알지 못하면/고요함을 생각함도 헛수고니라”고 했다.
  융(融) 대사가 이르기를 “이 종(宗)을 깨친 사람은 부처가 아니라 해도 좋거니와, 만약 아직 믿지 못한 이면 설령 염불한다 하여도 역시 거짓말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宗鏡)을 통달하지 못하면 견해가 있다 하여도 모두가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한 것이니, 천만 가지 생각으로 상응하지 못하거니와 겨우 이 뜻을 알게만 되면 자연히 한 생각 오차가 없으리라.
  그런 까닭에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처음 발심으로부터 10주(住)의 끝에 이르기까지 삼매의 힘으로써 단박에 3계(界)를 도장 찍으면 3세가 한 동안이요 모든 법이 한 맛이며 해탈이며 열반이며 언제나 적멸의 맛이리니, 다시는 처음과 마지막이 없고 인과가 한 끝이며 모든 성품이 한 성품이요 모든 지혜가 한 지혜이며 모든 모양이 한 모양이요 모든 행이 한 행이며 3세가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3세이며, 내지 10세이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자재하여 걸림이 없고, 이 경의 법문은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므로 언제나 법륜을 굴린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경의 교문은 근본에 의하여 편안히 서서 큰 뿌리를 갖추고 근본에 의한 한 끝이라 처음과 마지막을 세우지 않나니, 허망한 소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에 들면 온통 나머지를 얻음은 법계가 한 끝이기 때문이요 권학(權學)의 소견이 다하지 못한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며, 나머지에 들면 온통 하나를 얻음은 법계의 체성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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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둥근 구슬은 모가 없는 것 같고, 밝은 거울은 단박에 비추는 것 같으며, 허공은 막이가 없는 것 같고, 메아리는 의지함이 없는 것 같으며, 그림자는 거리끼지 않는 것 같고, 요술하는 사람이 만들어 냄과 같다.
  이 법문은 바로 모두가 묶어져서 처음과 마지막이 한 끝이고 원만하여 걸림이 없으며 이루어짐도 없고 무너짐도 없으며 나옴도 없고 숨음도 없어서 언제나 법륜을 굴린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 법문을 알아 얻으면 부처의 지혜와 자연스러운 지혜와 스승 없음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리니, 이 법은 출몰이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연히 출몰이 없는 지혜를 저절로 얻게 될 것이요, 뜻에 두어 생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온갖 권교(權敎)의 법문이 온통 그 안에 있나니, 일시에 말한 것이로되 모든 권교가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3세가 없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소견에 의하여 한량없이 다르다. 이 일승교에서는 바로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적의 설법이로되, 만약 정(情)에 의거하면 이것은 맨 처음 성불할 적의 설법이요 만약 지혜에 의거하면 처음과 마지막이 없는 설법이다.
  그러므로 알라. 성불과 설법은 한 생각을 여의지 아니한 것이니, 『화엄경』에서 “비목 선인(毘目仙人)이 선재의 손을 잡자, 즉시 선재는 스스로 그의 몸이 시방의 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세계로 가서 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에게 도착했음을 보았고, 그 부처님 국토와 그 대중의 모임에서 모든 부처님의 상호가 갖가지로 장엄되었음을 보았으며, 내지 혹은 백천억의 말로 할 수 없이 말로 할 수 없는 부처 세계의 작은 티끌 수 같이 많은 겁(劫)을 지나기도 하였다.
  때에 그 선인이 선재의 손을 놓자 선재동자는 이내 자신의 몸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보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으로도 본래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은 시방에 두루하고, 아직 한 생각 동안을 여의지 않고서 억 겁의 때를 겪는 줄 알 것이다.
  본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으나 멀고 가까운 세계는 역연하며, 한 생각도 옮아가지 않으나 길고 짧은 때는 완연하다. 종경(宗鏡)에 의지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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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으로써 이 글을 소화하겠는가. 만법이 모르는 결에 귀착되리니 끝내 따로의 뜻이 없다.
  [문] 성품 없는 도리는 한가지라 일시에 성불한다면, 어떻게 삼승의 사람들이 부처를 볼 적에는 거기에 차별이 있는가.
  [답] 마음에 따라 느낌이 나타나며 영상(影像)은 같지 아니하다. 제 업(業)이 다를지언정 부처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물을 보면서도 갑자기 네 쪽으로 나누면, 모두가 자신의 소견은 다른 것이다. 같은 보배 그릇이면서 밥 빛깔은 같지 아니하나 다른 이의 업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체의 마음이 바로 부처요 전체의 부처가 바로 마음이며 곧 진여의 마음이 바로 법신불이다. 또한 법신은 모양이 없고 참 성품은 형용이 없다. 모양과 형용조차 오히려 없거니, 어떻게 차별되겠는가. 모두가 비춤과 그림자가 같지 않다 함을 스스로가 알 것이다.
  마치 5백의 바라문이 재 몸[灰身]을 보고서 믿음을 내고, 구사라 장자(劬師羅長者)가 석 자[三尺]를 보고서 발심하며, 무변신(無邊身)보살이 상계(上界)를 다했는데 남음이 있고, 소성(小聖)에서 머[문]범부가 장육(丈六)을 보는데 끝없는 것과 같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부처님께서 부왕에게 아뢰고서 아난에게 명하기를 ‘나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두루 갖춘 몸매를 모두 나타내리라’고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중이 다 함께 일어나서 여래를 살펴보게 하되 정수리로부터 발의 수레바퀴 몸매까지를 순서대로 살펴보게 하고, 다시 발의 몸매로부터 정수리까지를 거스르며 살펴보게 하시자 낱낱이 몸 부분이 똑똑하면서도 분명하기가 마치 거울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보는 것과 같았었다.
  그런데 나쁘고 착하지 못한 마음을 낸 이거나 부처님의 금계를 깨뜨린 이에게는 형상이 순전히 검어 마치 재 묻은 사람처럼 보였고, 5백의 석자(釋子)에게는 재를 바른 사람으로만 보였으며, 어느 천 비구에게는 붉은 흙빛으로 보였고, 우바새 16인에게는 검은 코끼리의 다리 빛으로 보였으며, 우바이 24인에게는 마치 먹덩이처럼 보였고, 비구니들에게는 마치 백운처럼 보였으며, 우바새와 우바이인 어떤 이들에게는 쪽빛으로 물들인 청색처럼 보이기도 하였는데, 사부 대중들은 슬피 울었고, 또 석자들은 머리를 쥐어뜯고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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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면서 자신들이 본 바를 진술하자 부처님께서는 저마다 그들을 위하여 과거 전생 인연으로 이런 다른 빛으로 보이게 되었음을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식론(識論)』에서 이르기를 “경계는 업식(業識)을 따라 구르나니, 그러므로 유심임을 말한다”고 했다.
  또 『밀적경(密跡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천인들이 부처님의 빛과 크기를 보되, 어떤 이는 황금ㆍ백은 또는 여러 가지 보배 빛 등으로 보기도 하였고, 내지 어떤 이는 한 길 여섯 자로 보기도 하고 혹은 1리(里)로 보기도 하고 혹은 10리로 보기도 하였으며, 내지 백 억과 한량없고 그지없이 허공에 두루함을 보기도 하였나니, 이것을 바로 여래 몸의 비밀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따라서 봄이 같지 아니하고 자취의 갈래가 여러 가지이며, 부처님을 보는 데뿐만이 아니고 법을 보는 데도 역시 그렇다. 지혜의 얕고 깊음에 따라 법의 높낮이가 이루어진다.
  『대열반경』에서 이르기를 “12인연을 하지(下智)로 보기 때문에 성문의 보리를 얻고, 중지(中智)로 보기 때문에 연각의 보리를 얻으며, 상지(上智)로 보기 때문에 보살의 보리를 얻고, 상상지(上上智)로 보기 때문에 부처의 보리를 얻으며, 내지 8상(相)의 성도가 찰나 동안의 삼매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함과 같나니, 중생의 소견에 따라 저절로 시간을 분류한다.
  그러므로 선덕이 이르기를 “그러므로 여래는 한 생각 동안에 8상의 성도가 찰나 동안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태어났을 때가 바로 그것이 성도한 때요, 바로 그것이 사람들을 제도하는 때요, 바로 그것이 열반에 든 때이다. 왜냐 하면 온갖 법은 동시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니, 하나가 이루어지면 온갖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화엄경』에서 “보리수[覺樹]에서 떠나지 않고서 제석천을 올라가셨다”고 한 것을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얻은지라 지혜는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고 몸은 있지 않은 데가 없되,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고 옴도 없다. 그러나 자재로이 몸에 즉(卽)한 감응이요 감응은 몸을 따라 두루하되, 감응의 앞뒤를 따르면서 머무름이 있고 오름이 있다. 염부제에서 감응이 있으면 길에 있는 나무로 보이고 천궁에서 감응이 있으면 천상에 올라 있음이 보이지만, 보리수의 부처님께서는 옮아간 것이 아니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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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궁으로 올라간 것이다. 때문에 이르기를 ‘보리수에서 떠나지 않고서 제석 궁전에 오르셨다’고 한다”고 했다.
  법혜게(法慧偈)에 이르기를 “불자야, 너는 여래의/자재한 힘을 관찰해야 하리니/온갖 염부제에서 모두 말하기를/부처님께서는 이 안에 계신다 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떠나지 않으신 것이며, “우리들은 이제 부처님께서 수미산 꼭대기에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한 이것은 오르신 것이다.
  또 옛 스승의 해석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처소의 상입문[處相入門]에서 본 것이니, 하나의 처소 안에 온갖 처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궁 등은 본래 나무 아래 있기 때문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작용이기 때문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둘째는 역시 상입문(相入門)에서 본 것이니, 하나의 처소가 온갖 처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무는 하늘 안에 두루한지라 역시 일어날 필요는 없지만 천궁의 표시하는 법을 이용하려면 올라간 것이기 때문에 ‘올랐다’고 말한다.
  셋째는 온갖 것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하늘은 나무 아래 있고, 넷째는 하나가 곧 온갖 것이기 때문에 나무는 천상에 있는 것이니, 일어나지 않는다는 등은 앞의 것에 준한다.
  다섯째는 부처 몸에서 본 것이니, 이 나무 아래의 몸은 곧 법계에 가득하고 온갖 곳에 두루한지라 본래 거기에 있어도 일어날 필요는 없다. 근기가 성숙하여 보게 하기 때문에 ‘올랐다’고 한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법계 몸이라 언제나 여기에 계셔도 그대로가 저기에 계신 것이다.
  여섯째는 부처님의 자재하고 부사의한 해탈에서 본 것이니, 앉은 그대로가 가고 서신 것이요, 여기에 계신 그대로가 저 곳에 계신 것이라 모두가 하위에서는 헤아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연기의 모양으로 연유한 문[緣起相由門]에서 본 것이요, 여덟째는 법 성품의 융통한 문[法性融通門]에서 본 것이며, 아홉째는 표시하여 법을 드러내는 문[表示顯法門]에서 본 것이요, 열째는 법계를 이루는 큰 모임의 문[成法界大會門]에서 본 것이다.
  『부사의경(不思議經)』에서 이르기를 “온갖 부처와 온갖 모든 법은 평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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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평등하여 모두 동일한 본체이니, 마치 아지랑이와 같다. 일체 중생과 모든 여래의 온갖 부처님 국토 모두가 생각을 여의지 않은 것이며, 내지 만약 ‘내가 부처를 분별하면 바로 앞에 나타나고, 분별함이 없으면 도무지 보이는 바가 없구나’고 하나니, 생각으로 부처를 만들 수 있는지라 생각을 여의면 그런 것이 없다. 3계의 모든 법은 모두가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고 했다.
  『보현관경(普賢觀經)』에서 이르기를 “그 때 수행한 이가 보현보살의 설법을 듣고 그 이치를 깊이 이행하여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날마다 그렇게 하자 그의 마음은 점차로 날카로워졌다. 보현보살이 그에게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기억하게 하여 보현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바르게 하자 점차로 마음눈으로 몸이 황금빛의 단엄하고 미묘한 동방의 부처님을 보게 되었고, 한 부처님을 본 뒤에는 다시 한 부처님을 보게 되면서 이렇게 점차로 동방의 모든 부처님을 두루 보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두루 보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바로 법계의 몸이라 온갖 중생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에서 부처님을 생각할 적에 이 마음은 곧 32상과 80종호를 갖추는 것이며,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 모든 부처의 정변지(正遍知)의 마음이 바라는 생각으로부터 난다”고 하셨다.
  이것은 무량수경에서 중하의 근기를 위하여 16관(觀)의 생각을 지으면서 위제 부인(韋提夫人) 등으로 하여금 잠깐 동안 부처님 몸을 보게 하고는 마음 밖에서 났다고 이해할까 두렵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글이 사실이라는 소견을 내게 했다.
  화엄의 「출현품(出現品)」에 이르기를 “불자여, 마치 큰 바다의 물이 사천하의 땅과 80억 여러 소주(小洲) 안에 스며 흐를 때 움푹 파인 데면 물이 고이지 아니함이 없되 그 큰 바다는 ‘내가 물을 주었다’고 분별하지 않는 것처럼 부처 지혜 바다의 [문]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의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만약 모든 중생이 경계를 관찰하고 법문을 닦아 익히면, 지혜를 얻어 청정하고 명료하여지면서 여래의 지혜와 평등하여 둘이 없고 분별함이 없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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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중생들의 마음의 행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얻는 바 지혜도 저마다 같지 않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마음 모양이니라”고 했다.
  또 문명품(問明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마치 물은 한 맛이나/ 그릇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듯이/ 부처의 복밭 또한 그러하지만/ 중생 마음 때문에 다르느니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마치 깨끗하고 밝은 거울이/물질을 따르면서 형상을 나타내듯/부처님의 복밭도 그와 같지만/마음 따라 뭇 과보 얻게 되니라”고 했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다음에 진여의 작용[用]이란 모든 부처님께서 인지(因地)에 계실 적에 큰 자비를 내어 모든 바라밀[度]과 4섭(攝) 등을 수행하면서 물건을 보되 자기처럼 여기어 널리 모두 구제하고 한없는 겁 동안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나와 남이 평등함을 사실대로 분명히 알아 역시 중생이란 상(相)을 취하지 아니하며, 이와 같은 큰 방편 지혜로 비롯함이 없는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을 증득하여 저절로 부사의한 업을 일으켜 여러 가지의 자재로 차별되게 작용하고 법계의 진여 등에 두루하면서도 작용의 모양조차 얻을 만한 것이 없다. 왜냐 하면 온갖 여래는 이 법신이요 첫째가는 이치이고 세속 이치가 없으며 경계의 작용은 중생의 보고 듣는 것 등을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갖가지의 작용은 같지 아니한데, 이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다. 범부와 2승의 마음으로 보는 바의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화신(化身)이라 한다. 이 사람들은 전식(轉識)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모르고 보는 것[見]은 밖으로부터 온다 하며 물질의 분한을 취한다. 그러나 부처의 화신은 한량이 없다.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한다. 모든 보살의 처음 발심으로부터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바의 것이니, 수용신(受用身)이라 한다. 몸에는 한량없는 빛이 없고 빛에는 한량없는 모양이 있고 모양에는 한량없는 상호[好]가 있다. 머무는 바는 의보와 과보도 또한 그것은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되었으며, 응하고 보는 바를 따라 한량없고 그지없고 갓이 없고 끊어짐이 없나니, 마음 밖에서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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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모두가 바라밀 등의 무루(無漏)의 행의 훈습과 부사의의 훈습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바며, 끝없는 기쁘고 즐거운 공덕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에 또한 보신(報身)이라 한다.
  또 범부들이 보는 바는 바로 그것이 거친 작용이라 여섯 갈래[六趣]의 다름에 따라 갖가지로 차별되며 끝없는 공덕의 즐거운 모양이 없기 때문에 화신이라 한 것이다.
  처음 수행한 보살이 보는 것은 중품의 작용이나 진여를 깊이 믿기 때문에 조그맣게 보는 것을 얻어서 여래의 몸은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끊어짐이 없어서 유심(唯心)의 영상으로 나타나되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도 미세한 분별을 여의지 못하고 아직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마음이 깨끗해진 보살은 미세한 작용을 보므로 이렇게 차츰차츰 나아지며, 보살의 구경지 안에 이르러서 보아야 비로소 이 미세한 작용이 다하므로 이것이 수용신이다” 하였다.
  업식이 있어서 수용신을 보는 것이요,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게 되는 것이 없다. 온갖 여래는 모두가 이들 법신이라 피차의 차별된 색상(色相)이 없어서 서로서로 보기 때문에, 옛 해석에 이르기를 “분별사식에 의한다 함은 범부와 2승의 마음으로, 보는 바의 것을 말하나니, 이것을 화신이라 한다 함은 범부와 2승은 아직도 유식(唯識)임을 모르고 밖의 대경이 있다고 헤아림에서다”라고 했으니, 바로 이것이 분별사식의 이치이다.
  지금 부처 몸을 보는 것 또한 마음 밖이라 하여 저 사식(事識)을 따라 분별하고 헤아리면서 유심에 미혹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며, 물질이 바로 마음이요, 분한이 없음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의 분한을 취하면서 다 알지 못한다”고 했다.
  [문] 부처 몸을 무엇 때문에 중생의 참 마음일 뿐이라 하며, 그와 부처의 체성은 평등하여 둘이 없다 하는가.
  [답] 중생이 제 본체에 미혹하여 모든 망념을 일으키면 이때의 진여는 물든 모양만을 드러내며, 본각 안에서 망심을 훈습하기 때문에 염구(厭求)가 있는데 염구가 있기 때문에 참 작용은 이내 드러나고 염구가 하열하기 때문에 모양의 작용[相用]이 이내 거칠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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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구가 점차로 더하면 작용도 미세하여지며, 이렇게 점점 마음의 근원에까지 이르면 무명이 다하여 염구는 쉬어버려서 시각(始覺)은 본각과 같아지고, 작용은 다시 체성으로 돌아가며 평등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고 구별이 없다.
  아직 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면 도리어 작용은 식(識) 가운데서 감관을 따라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이르기를 “식 안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문] 만약 이 이치에 의거하면 작용은 진여로부터 일어나거늘, 어찌하여 전식(轉識)에서 나타난다고 말하는가.
  [답] 전식은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 안의 전상(轉相)이며, 이 전상에 의하여야 비로소 현식(現識)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 식은 바로 “진실과 허망이 화합한 것이다”라고 했다.
  [문] 만약 이 이치에 의거하면 바로 중생의 제 마음 속이 진여의 작용이거늘 어떻게 부처의 보화(報化)를 말하는가.
  [답] 중생의 참 마음은 모든 부처의 체성과 차별이 없다. 만약 흐름을 따라 나고 죽고 하면 허망에 공능이 있고 허망에 비록 공능이 있기는 하나 진실을 여의고는 성립되지 아니하며, 만약 흐름을 거슬러 속박을 벗어나면 진실에 공능이 있고 진실에 비록 공능이 있기는 하나 허망을 여의고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 연기로 화합한 가운데서 설명될 따름이다.
  이미 법신으로부터 보와 화의 작용이 일어났거늘 어찌하여 중생의 참 마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 마음 이것은 법가(法家)의 몸이라 범부와 성인이 똑같은 한 법신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모든 여래를 만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바로 마음이 부처이다.
  [문] 참 마음이 바로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바라밀 등의 인연으로부터 난다고 하는가.
  [답] 이것은 본각(本覺)이 물들음을 따른다는 이치[隨染義]에서 본 학설이다. 그러나 그 시각(始覺)의 각이 마음 근원에 이르면 평등하여 한 끝이거늘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또 모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으뜸의 것으로 삼아 중생의 기감(機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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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반연함은 종자가 원인이 되며, 부처의 본바탕 위에 의탁하여 제 마음이 영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제 의식 안에 있으면서 나타난다”고 한다.
  「법계품(法界品)」에서 미가 장자(彌伽長者)는 시방의 부처 바다에서 이 정(定)을 드러낸 것이 유심관(唯心觀)임을 철저하게 보았나니, 중생계의 한량없고 끝없는 것이 모두가 마음에서 나타남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함에 따라 모든 부처님께서 앞에 나타나고, 유심관이 만 가지 법을 두루 겸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제는 상ㆍ중ㆍ하의 근기가 제 마음의 관(觀)에 따라 부처님을 보는 것이 같지 않다 함을 보자. 그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범부이다. 과거 여섯 갈래의 악업과 습기가 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혹은 부처님을 수신(樹神)이거나 천신(天神)이거나 검은 다리 가진 코끼리거나 석 자[三尺] 등의 몸으로 보기도 한다.
  둘째는 소승이다. 업을 띠어 생멸하는 소견을 말미암기 때문에 부처님을 금창(金槍)이거나 말먹이 보리[馬麥]거나 몸을 때려 피를 내는 것 등의 모두가 좋지 않은 모양들을 본다.
  셋째는 대승이다. 초교와 종교와 돈교의 3교의 보살은 이 유식관(唯識觀)으로 말미암아 부처는 바로 아리야식 중의 전식(轉識)에서 나타나는 바의 모양이기 때문에 이 부처의 몸은 바로 마음에서 나타날 뿐이며 진여를 여의지 않고 분제(分劑)도 없으며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중생의 근기를 따라 저절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니, 이들은 좋은 모양이다.
  넷째는 일승이다. 원교의 보살은 법계의 뚜렷하고 밝은 지혜로써 의보와 정보가 본체[理:人我]ㆍ현상[事:法我]을 모두 포섭하고, 이 지혜로써 열 가지 몸이 본체와 현상이 걸림 없음을 느껴서 본다. 또 3세가 온갖 것에 융통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의 몸은 시방의 도수(道樹)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언제나 6천(天)에 나아가며, 지혜는 온갖 것을 두루 관찰하되 항상 생각을 지음이 없다.
  14과법신의(科法身義)에 이르기를 “경에서 밝힌 법신이라 함은 발자국부터 가리키는 한 길 여섯 자[丈六]라 사람과 같은 몸인 이 무더기의 뜻이나 법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법신이라는 칭호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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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의 뜻을 연구해보건대 여래의 비추는 체성은 공허하면서도 존재함을 몸으로 삼고 허물이 다함을 법으로 삼으니 이것이 참 법신인 까닭이다. 그러나 좋은 감응(感應)으로써 하면 응함[應]은 곧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을 이루어 보는 이에 있어서만은 부처님께서 계시지만 언제나 몸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몸은 바로 허깨비 몸이다”라고 했다.
  [문] 부처가 반드시 몸이 없다면, 어떻게 한 길 여섯 자임을 알며 느끼는가.
  [답] 중생은 아직 만족한 선(善)이 못되는지라 여래의 지극히 만족한 선을 우러러 느끼게 된다. 도(道)가 만족하면 곧 응하여 교화함[應化]에 견줄 데 없거니와 아직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보는 바의 법만을 볼 뿐이니, 곧 몸이 허환한 것인 줄 통달하지 못해서이다.
  [문] 감응의 도는 모두가 뜻이 철저함으로 말미암아 계합되는 것이요, 때문에 초래되는 일의 나타남이 당시의 안팎 도리에 같아져야 하리니, 마치 아내의 애정이 저승까지 닿자 성(城)은 그를 위하여 무너졌고, 효성이 지극하매 돌이 뚫린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하는 일이 마음에 따라 변한 것이거늘 어떻게 한 길 여섯 자를 잘 느끼면서 이는 허환한 몸이라 하는가.
  [답] 성이 무너지고 돌이 뚫린 이것은 뜻으로 말미암아 물건에 느꼈고, 물건이 진실하기 때문에 무너지고 뚫렸다.
  법신을 헛되이 알아 느낀 것이 아니고, 법신이 있는 것이 아닌데 다만 믿고 이해함이 혹(惑)에게 막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길 여섯 자가 진실이라 본 것이니, 어찌 사람들 스스로가 느낀 바를 본 것이 아니겠는가.
  [문] 한 길 여섯 자가 만약 허환하다면, 무엇으로 진실한 본체를 전할 것인가.
  [답] 본체는 미묘하여 거친 것이 아니고 전하지 아니함은,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전하여 주는 것과 같다.
  [문] 법신에 형상이 없다면, 곧 법신이 한 길 여섯 자인가. 법신 외에 따로 한 길 여섯 자가 있는가.
  [답] 법신을 느낌에는 한 길 여섯 자의 것이거늘, 어찌하여 따로따로 있겠는가. 마치 소리가 골짜기에 느끼면서 메아리를 내는 것과 같거늘, 어찌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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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기 외에 따로따로 메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문] 중생은 법신을 반연으로 하여 보는 것이 생기는가. 한 길 여섯 자로 반연하여 보는 것이 생기는가.
  [답] 느낌으로 법신의 응한 바를 보는 것이다. 어찌 반연으로 법신을 보겠는가. 마치 그림자를 보면 나무가 있음을 아는 것이니, 나무를 보지 않은 것과 같다.
  [문] 법신이 항상하다면 한 길 여섯 자도 항상한 것인가.
  [답] 한 길 여섯 자의 본체는 바로 항상한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무상하다고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어둠 속의 나무 그림자는 육안으로 볼 바가 아님과 같다”고 했다.
  옛 해석에 이르기를 “부처는 언제나 몸이 없는 것이로되 밝고, 감응은 참된 것이 아니로되 법신은 바로 진실이다. 느낌 이것은 능히 느낌[能感]이라 중생에게 속하고, 응함은 바로 응할 바[所應]라 부처에게 속한다.
  중생들이 부처의 선(善)에 느낌이 있되 스스로 보는 것은 같지 아니하여, 석가는 한길 여섯 자요 미륵은 천자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끝없는 모양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석 자의 형상으로 보기도 하나니, 중생의 근기에 깊고 얕음이 있어서 마침내 응하는 몸이 정세하고 거칠음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부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이 물건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냄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고 했다.
  또 부처는 언제나 몸이 없다 함은 분단신(分段身)과 변역신(變易身)이 없어서요, 법신은 지극히 미묘하여 형질로 구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몸이 없다’고 한다.
  진실의 본체에 의거하건대 묘한 물질[妙色]이요 묘한 마음[妙心]이 없지 아니하다. 묘한 물질이기 때문에 현상을 나누며 알맞게 변할 수 있고, 묘한 마음이기 때문에 능히 비우고 능히 비춘다”고 하였다. 때문에 천친(天親)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보신(報身)ㆍ화신(化身)은 참 부처가 아니요/또한 설법을 하는 이도 아니다”라고 했다.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이르기를 “응신ㆍ화신의 두 몸은 바로 거짓 이름으로 존재하되, 법신은 바로 진실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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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가 만족하면 곧 응화(應化)에 견줄 이 없음은 법신의 도가 만족하기 때문이다. 응화에 견줄 데 없는 바로 이것은 응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그 일정한 몸이 없다.
  중생의 자리가 신해(信解)에 있으면 아직 만족한 선(善)이 못되는 지라 그의 보는 바에 따라 한 길 여섯 자 등의 몸일 뿐이다. 만족하지 않은 선이란 법운(法雲) 이하로 신해의 선이요, 지극히 만족한 자리란 불과(佛果)가 비춤이 극진하고 도가 보리에 만족하면 지극히 만족한 자리라고 한다.
  선이 아직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길 여섯 자거나 석 자 등의 몸이 허환한 줄 요달하지 못하며, 법신과 스스로가 수용하는 몸만을 진실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마치 아내의 애정이 저승까지 닿자 성이 그를 위해 무너졌다 함은 『열녀전(列女傳)』에서 이르기를 “기량(杞梁)의 아내가 그 남편의 시체에 나아가면서 성 아래서 통곡을 하자 10일 만에 성이 그를 위하여 무너졌다”는 것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돌이 뚫렸다 함은 『한서(漢書)』에서 이르기를 “이 광(李廣)이 아버지가 없자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의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어머니가 말하기를 ‘범이 죽였단다’라고 하자, 드디어 범을 잡으러 갔다가 풀 속에서 밤이 되어 돌이 범처럼 보였으므로 쏘았더니 화살이 꽂혔다. 뒷날 그 돌을 쏘아보았으나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과 돌에 관한 일은 마음을 따라 느껴 변한 것이니, 그러므로 무너지고 열렸다.
  본체는 미묘하여 거친 것이 아니고 전하지도 않으나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전하는 것 같다 함은, 한 길 여섯 자가 비록 거칠다 해도 묘한 본체를 전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니, 현상에 의탁하여 본체를 나타내고 말에 붙여서 도를 드러내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전해 줌과 같고 또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청량소(淸凉疏)』에서 이르기를 “옛 부처와 새로 이룬 것이 일찍이 두 체성이 없되, 새로 이룬 것과 옛 부처의 법(法)ㆍ보(報)는 나누어진 것 같다.
  때에 응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곧 진(眞)이면서 응(應)이요, 응은 성품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곧 응이면서 진이다. 셋의 부처가 원융하고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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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몸이 걸림 없기 때문에 응현(應現)이 진성(眞成)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또 부처 몸을 의지함이 없되 근기에 응하여 널리 나타낸다. 말하자면 색깔에 일정한 색이 없음은 마치 금강이 붉은 빛ㆍ자주 빛과 합해짐과 같고, 형상에 일정한 형상 없음은 마치 그림자가 길고 짧음에 맡기는 것 같으며, 모양에 정해진 모양 없음은 마치 밝은 거울이 곱거나 밉거나 대해 주므로 좋을 대로 모두가 보는 것과 같다.
  내지 하나의 몸이 여럿의 몸이나 다만 중생의 분별된 마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쌓임도 없고 쫓음도 없다. 그것은 마치 천 개의 그릇을 나란히 놓았을 때 걸음을 뗄 적마다 천 개의 달은 같지 아니하고 한 줄기로 된 맑은 강은 만리를 가도 한 개의 달이 외로이 비치는 것과 같다.
  또 세 척의 배가 같이 있되 한 척의 배는 가만히 서있고, 두 척의 배는 남쪽과 북쪽에 떠 있을 때, 남쪽 배에서 달을 보면 천 리까지 가도 남쪽을 따라오고 북쪽 배에서 달을 보면 천 리까지 가도 북쪽을 따라오며 머물러 선 배에서 달을 보면 옮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 이것은 이 달이 중류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남쪽과 북쪽으로 가는 것이며, 설령 백 척ㆍ천 척의 배가 함께 8방으로 저마다 같다 하여도 백 개ㆍ천 개의 달은 저마다 그를 따라 가리라.
  그러므로 정(情)이 막히면 곧 법신이 달라지게 되고, 마음이 통하면 오묘한 뜻이 반드시 같으리라. 어지러이 자기다 남이다 하면 부처에 어떻게 참예하겠는가.
  그러므로 진신(眞身)은 고요하고 넓어서 법계와 그 체성이 계합하며, 싸고 벌려 놓음에 바깥이 없어서 만 가지 변화와 그 작용을 같이 한다. 그 근원을 궁구하면 둘이 없고 자취를 고집하면 여러 가지이다.
  한 몸이요 여러 몸이라 함을 경론에서는 달리도 말하나, 지금 이 경을 설한 부처는 진신인가 응신인가, 일신(一身)인가 다신(多身)인가.
  만약 진신이라고만 하면 어떻게 석가께서 사바세계에 계시는데 사람과 하늘들이 똑같이 보았다 하겠으며, 만약 응신이라고만 말하면 어떻게 비로자나불이 연화장(連華藏)에 계시는데 큰 보살들이 보면 부처의 법신으로 본다 하겠는가. 만약 일신이라고만 하면 어찌하여 여러 곳에서 따로따로 나타난다 하겠으며, 만약 달라지는 몸이라고만 하면 어찌하여 또 몸이 나누어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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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경을 설명한 부처는 다 같이 앞의 설명들이 아니다. 바로 이 법계의 끝없는 몸 구름은 진신ㆍ응신이 서로 원융하고, 일신ㆍ다신이 걸림 없다. 곧 비로자나가 바로 석가이기 때문에 이 곳에 계시나 그대로 저 곳에 계시기 때문이요, 멀리 다른 데 계시나 항상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며, 몸은 나누어지거나 달라지지 아니하고 또한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요, 같은 때와 다른 곳에 한 몸이 원만하여 모두가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며, 온갖 보살이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제 먼저는 열 가지 몸을 밝히고 뒤에는 걸림 없음을 나타내겠다.
  열 가지 몸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 부처의 위에 나아가 보면 저절로 열 가지 몸이 있다.
  첫째는 보리신(菩提身)이요, 둘째는 원신(願身)이며, 셋째는 화신(化身)이요, 넷째는 역지신(易持身)이며, 다섯째는 상호장엄심(相互莊嚴身)이요, 여섯째는 위세신(威勢身)이며, 일곱째는 의생신(意生身)이요, 여덟째는 복덕신(福德身)이며, 아홉째는 법신(法身)이요, 열째는 지신(持身)이다.
  걸림 없음이라 함은, 『지귀(指歸)』에서 열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작용이 두루하여 걸림 없다[用周無礙]. 생각과 겁(劫)과 세계와 티끌 등의 처소에서 비로자나불이 나타나고 몸의 작용이 그지없어서 모두 두루하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이곳에 부처님께서 앉아 계심 보듯이/온갖 티끌 속에서도 그러하니라’고 한 것들이다.
  둘째는 모양이 두루하여 걸림 없다[相遍無礙]. 낱낱 차별된 작용 중에서 저마다 온갖 작용을 거둠은 마치 태 안에 있을 적에 바로 출가하고 성도함이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니, 이렇게 온갖 것에 자재하고 걸림이 없다.
  셋째는 고요한 작용이 걸림 없다[寂用無礙]. 비록 이렇게 끝없는 자재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뜻을 짓지도 않고 생각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언제나 삼매에 있으면서 일으키는 작용에 거리끼지 아니한다. 「부사의품(不思議品)」에 이르기를 ‘한 생각 동안에 모두가 온갖 3세의 부처님을 나투어 보이며 일체 중생을 교화하되 모두 부처의 적멸과 둘이 없는 삼매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의 비유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로서 마치 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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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가 보물을 비내리고 하늘북이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아서 공을 들임이 없이 저절로 성취된다’라고 했다.
  넷째는 의지함과 일어남이 걸림 없다[依起濟礙]. 이와 같이 나타난 바가 비록 공용이 없다 해도 모두가 해인삼매(海印三昧)의 힘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남음 없이 모두가 나투어 보임은/해인삼매의 거룩한 신력일세’라고 했다.
  다섯째는 진신과 응신이 걸림 없다[眞應無礙]. 바로 이 응하여 나투는 끝없는 몸이 곧 생멸이 없고 바로 이것이 법신과는 평등하여 한 맛이며, 작용에 거리끼지 않고 한량이 없다.
  여섯째는 나누어짐과 원만함이 끝없다[分圓無礙]. 곧 이 법계에 두루한 노사나[盧舍那] 몸에는 낱낱의 몸의 낱낱 갈래와 낱낱 털구멍에도 모두 스스로 노사나의 전신이 있다. 그러므로 나누어진 곳이 그대로 원만하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의 바다를/낱낱 털이 구멍에서도 모두 다 본다’라고 했다.
  일곱째는 원인과 결과가 걸림 없다[因果無礙]. 몸의 털구멍에서 저절로 노사나와 전생에 지었던 행과 보살행과 받았던 몸과 부처의 눈썹 사이에서 나온 훌륭한 음성 등이며 티끌 수같이 많은 보살들이 나타난다.
  여덟째는 의보와 정보가 걸림 없다[依正無礙]. 이 몸 그대로가 온갖 기세간(器世間)을 만든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혹은 해와 달이 되어 허공에서 노닐고/하천과 못과 우물들이 되기도 한다’라고 했다. 또 몸을 숨겨 저 여러 세계의 낱낱 작은 티끌과 털들에도 들어가며, 모두가 부처 몸이 있어서 원만하고 두루하다.
  아홉째는 숨어 들어감이 걸림 없다[潛入無礙]. 중생 세계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여래장이 비록 중생으로 되었다 하더라도 제 성품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출현품(出現品)」에 이르기를 ‘부처의 지혜가 몰래 중생에게 들어간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고 정각을 이루었다’고 했다. 또 일체 중생을 껴잡아 한 털구멍 속에 두는 것이니, 선화천왕(善化天王)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그대는 부처님의 한 털구멍을 살필지니/온갖 중생 모두가 그 속에 있느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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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째는 뚜렷이 통하여 걸림 없다[圓通無礙]. 이 부처의 몸은 본체가 곧 현상이요, 하나가 곧 여럿이며, 의보가 곧 정보요, 인아가 곧 법이며, 이것이 곧 그것이요, 정(情)이 곧 정 아니며, 깊음이 곧 넓음이요, 원인이 곧 결과며, 세 몸이 곧 열 몸이어서 동일하여 걸림이 없다. 이와 같은 걸림 없음은 바로 한 마음일 뿐이요, 만약 바깥 대경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 하면 걸리게 된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 몸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요/또한 장차 오는 미래도 아니며/한 생각 동안에 태어나게 되고/성도하고 열반함도 나타내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화엄연의(華嚴演義)』로 부처를 보는 차별을 해석하였고, 이제는 청량(淸凉)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文殊) 뵙는 것으로 법계에서 부처를 보는 차별에 견주겠다.
  통틀어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 혹은 여러 근기가 다른 곳에서 저마다 느껴 보기도 하고, 둘째 혹은 같은 곳에서 저마다 보기도 하고, 셋째 혹은 다른 때에 따로따로 보기도 하고, 넷째 혹은 같은 때에 다르게 보기도 하며, 다섯째 혹은 같은 때에 다른 곳에서 보기도 하고, 여섯째 혹은 같은 곳에서 다른 때에 보기도 하며, 일곱째 혹은 다른 때에 다른 곳에서 보기도 하고, 여덟째 혹은 같은 때에 같은 곳에서 보기도 하며, 아홉째 혹은 한 사람이 같고 다름이 엇바뀌는 때와 처소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바를 보기도 하고, 열째 혹은 한 사람이 같고 다름을 함께 하는 때와 처소에서 온갖 사람들이 보는 바를 보기도 하는 것이니, 같은 때에 같은 곳이거나 다른 때에 다른 곳의 같고 다름을 함께 하는 때와 처소라고 한다.
  벌써 이 한 사람의 때는 많은 때를 겸하고 처소는 모든 처소에 두루하며 보는 것은 모든 경계에 다 통하기 때문에, 이것이 보안의 근기[普眼機]이다.
  그러므로 알라, 문수의 참 몸은 오히려 하나가 아닌지라 보는 이에게 스스로 다름이 있으리니, 오직 마음뿐임을 증험하면서 더욱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문수가 한 처소인 동쪽으로부터 오는 것이 그대로 온갖 처소의 문수이다”라고 한 것을, 첫째는 뜻으로 요약하자. 다시 말하면 그의 진실한 덕이니 마치 앞 시내의 달이 그대로 이것은 뒤의 시내와 만강(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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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 백천(百川)의 달이어서 전체가 앞 시내에 들어간다. 그런 까닭은 온갖 처소의 달이 본래의 달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의 달이 한 시내에 떨어져 들면 천 개의 처소에서도 다 함께 떨어져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는 표시된 것으로 요약하자. 문수는 반야문을 주(主)로 한다. 만약 관조(觀照)에서 본 반야라면 지혜는 만 가지 경계를 알기 때문에 반야 아님이 없고, 만약 태양이 하늘에 떠오르면 물건마다 밝지 아니함이 없다. 만약 실상(實相)이 반야라면 법마다 실상 아님이 없기 때문에 반야가 아님이 없으리니, 마치 물이 파랑에 두루하고 파랑이 없으면 물이 아닌 것과 같다.
  바로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반야바라밀다가 청정하기 때문에 빛깔이 청정하고, 빛깔이 청정하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의 지혜가 청정하다. 왜냐 하면 만약 반야바라밀다가 청정하고 빛깔이 청정하고 일체지의 지혜가 청정하다면 둘도 없고 두 갈래도 없고 차별도 없고 끊어짐도 없기 때문이니, 관조와 실상에 다 통한다”고 한 것이다.
  [문] 부처의 앞에는 하나의 보현(普賢)뿐이라면, 무엇 때문에 낱낱의 부처 앞에 저마다 여럿이 있는가.
  [답] 두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연기의 서로 말미암음[緣起相由]이다. 바로 주(主)되는 것과 짝[伴]이 되는 것에서 보면 겸하여 즉입(卽入)을 밝힌다. 주되는 것은 하나이어야 하지만 짝이 되는 것은 반드시 많을 것이니, 하나는 바로 여럿의 하나요 온갖 것의 하나이며, 여럿은 온전히 하나의 여럿이요 하나의 온갖 것이다.
  둘째는 힘과 작용이 서로 통하는 것[力用交徹]이다. 하나에는 온갖 보현의 몸의 불가사의가 있으며,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리를 따르는 몸[隨類身]이니, 사람과 하늘들에 따라 보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점점 나아지는 몸[漸勝身]이니, 여섯 어금니를 지닌 코끼리를 타는 등의 몸매가 장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계를 다하는 몸[窮盡法界身]이니, 제석의 보망처럼 겹겹이요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의 몸은 앞의 두 개의 몸과 끝없는 몸을 포함한다.
  [문]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면, 한 처소에도 보현이 없는 것이 없으리라.
  이제 어찌하여 해석에 세 가지 뜻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는가. 첫째는 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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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맞추어 보지 않음은 바로 소경의 허물이다. 둘째는 보지 않음이 바로 보는 것이니, 허공의 몸을 볼 때 허공은 볼 수 없는 것이므로 만약 보지 않았다면 참으로 허공을 보는 것이다. 셋째는 역시 두루하여 보지 않을 곳이기 때문이니, 분명하게 본다면 두루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볼 수도 있고 볼 수도 없는 것이 모두 보현의 몸이기 때문이니, 반드시 볼 수 있는 몸이 되게 한다면 보현의 몸은 만유(萬有)에 두루하지 못하다. 마치 지혜는 볼 수 없는 것과 같거늘, 지혜 몸이야 어찌 하겠는가. 분명히 알라. 보지 않은 처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두루함을 알 따름이다. 이 세 번째 몸은 어떤 사람이 볼 수 있느냐 하면 지혜 눈이라야 보는 것이요 육안으로서는 볼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은 지혜 눈은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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